뉴욕 3부작 - 그래픽노블
데이비드 마추켈리 외 그림, 황보석 외 옮김, 폴 오스터 원작, 폴 카라식 각색 / 미메시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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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퀸은 언제나 자신을 혼자 있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여겨 왔었다. 이제 그는 고독의 본질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 한 가지는 자기가 추락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만일 추락하고 있었다면 어떻게 자신을 붙잡는 것까지도 가능했을까? 동시에 꼭대기와 밑바닥에 있는 일이 가능할까? 그것은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았다.                - '유리의 도시' 중에서, p.119


폴 오스터의 거의 모든 작품들을 다 읽었는데, 매번 한번도 같은 스타일을 복기 하지 않는, 독특한 자신만의 색깔을 가지고 있는 작가로 기억한다. 폴 오스터가 우리 곁을 떠난 지 어느 새 한 해가 흘렀다. 최근에 그가 투병 중에 집필한 생애 마지막 장편소설을 읽었었는데, 이렇게 초기작을 다시 만나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빵굽는 타자기>, <달의 궁전>, <뉴욕 3부작> 등 그의 초기작들은 국내에서도 꽤 많은 사랑을 받았었는데, 나 역시 그 작품들로 그를 처음 만났었다. 


초기작들 중에서도 <뉴욕 3부작>은 이후 그의 작품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의 원형이 담겨있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미스터리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고, 실종과 추적이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이야기임에도 결말이 모호하기 때문에 명확한 서사를 좋아한다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만한 작품이기도 하다. 




그래서 <뉴욕 3부작>이 그래픽 노블 버전으로 나온다고 해서 매우 궁금했다. 얼마나 짜임새있게 압축해서 각색했을지, 원작의 모호한 서사를 이미지로 어떻게 그려냈을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래픽 노블이라는 장르는 소설이 지닌 깊이 있고 탄탄한 스토리라인과 만화가 지닌 시각적 효과를 동시에 즐길 수 있다는 점에 있어 굉장히 훌륭한 장치이다. 어른들의 만화라고도 불리며 만화와 소설의 중간 형식을 띠고 있다고 보면 되는데, 보통은 매우 길고 복잡한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있고, 함축적이고 은유적인 이미지로 전개가 빠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촘촘히 글자가 박힌 소설책보다는 눈의 피로도 덜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좋은 반면에, 조금 내용이 어렵게 느껴지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원작 소설이 이미 존재하고, 그 뒤에 그래픽 노블이 나온 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래픽 노블이 가진 장점과 소설의 단점이 적절하게 손을 잡은 느낌이랄까. 그래픽 노블의 장르적 특성이 빡빡한 지면 구성, 때론 실험적인 내용들인데, 원작이 있는 경우에는 그런 점이 오히려 매력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드디어 그의 마음에 와닿는 문장을 하나 발견한다. <책은 쓸 때 고심해서 묵묵히 쓰는 만큼 읽을 때도 그렇게 읽어야 한다.> 문득 그는 천천히 읽는 것, 과거 그 어느 때의 독서보다 천천히 읽는 것이 비결이라는 사실을 이해한다... 책이 요구하는 마음가짐으로 독서할 인내심을 찾을 수 있다면, 점차 점차 완전한 이해에 다다를 수 있겠지. 자신에 관해. 그리고 블랙, 화이트, 이 사건, 모든 것에 관해. 그러나 붙잡은 기회만큼 놓친 기회도 인생의 일부이고, 이야기는 일어나지 않은 일에 미련을 가져서는 안 된다.              - '유령들' 중에서, p.180


첫 번째 작품 <유리의 도시>는 잘못 걸려온 전화 한 통에서 시작된다. 필명으로 추리 소설을 쓰는 작가 퀸은 한밤중에 엉뚱한 사람을 찾는 전화를 여러 번 받는다. 탐정 회사를 하는 폴 오스터 씨를 찾는 전화였다. 그런 사람은 없다고, 여기는 탐정 회사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전화는 여러 날로 이어졌고, 결국 퀸은 자신이 폴 오스터라고 말하며 의뢰인을 만나 보기로 한다. 그리고 남편의 아버지가 접근하는 걸 막아 달라는, 감시 업무를 의뢰 받게 된다. 그렇게 퀸은 탐정 업무를 하며 노인을 감시하는 일을 하게 되는데, 그의 삶을 지켜보면서 점차 자신을 잃어 버리고 있다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두 번째 작품인 <유령들>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블루는 화이트로부터 블랙이라는 이름의 남자를 쫓아다니며 지켜봐 달라는 의뢰를 받게 된다. 블루는 블랙이 사는 건물 정반대 편에 있는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하고, 그를 몰래 지켜보기 시작한다. 블루는 길 건너편의 블랙을 엿보면서 단순히 타인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자기 자신도 바라보는 것만 같다고 느낀다. 삶의 속도가 급격하게 줄어들자 전에는 주의를 비껴가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사건에 진척은 없고, 아무 일도 없는 나날이 계속되는 가운데 블루는 블랙에게 접근해 그와 대화를 나누기도 하며 보고서를 작성해나가지만, 끝이 없는 숨바꼭질을 얼마나 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세 번째 작품 <잠겨 있는 방>은 어린 시절 친구의 실종에 대한 소식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내와 아들을 남겨둔 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친구가 남긴 원고를 읽고 그의 글을 출간하는 작업을 하며 그가 남긴 흔적들을 뒤쫓는 과정에서 나는 친구의 아내와 점차 가까워진다. 세 편의 연작 소설은 각자 독립된 인물들이 누군가를 추적하고, 쫓는 서사를 가지고 있다. 끝없이 감시하고 뒤쫓는 과정이 이어지지만, 그에 대한 결과는 명확하지 않다. 좇으면 좇을수록, 대상에게 가까워지면 가까워질 수록 모든 것이 더욱 흐릿해진다고 할까. 그러면서 탐정과 작가 등 추적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조금씩 잃어 간다. 


원작 소설이 채워주지 못하던 부분을 시각화 작업을 통해 보여주고 있어 아무래도 소설보다는 그래픽노블 버전이 가독성은 훨씬 좋았던 것 같다. 특히나 세 작품을 각기 다른 작가가 그림을 맡아 작업했기에, 완전히 다른 작법과 다른 방식으로 그려진 삽화들이 재미를 더해준다. 폴 오스터의 소설 세계를 각기 다른 세 작가가 자신만의 시선으로 해석해 그려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을 그래픽 노블 버전으로 만나야만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원작의 느낌을 잘 살리면서도, 또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보여주고 있어 같은 작품을 읽는 듯한 익숙함과 새로운 작품을 만나는 듯한 설레임을 함께 안겨주고 있으니 말이다. 폴 오스터의 작품을 좋아했다면, 그래픽 노블로 만나는 완전히 새로운 폴 오스터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적극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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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3부작 - 그래픽노블
데이비드 마추켈리 외 그림, 황보석 외 옮김, 폴 오스터 원작, 폴 카라식 각색 / 미메시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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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의 예술가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그려낸 세 편의 연작 소설, 그래픽 노블로 만나는 폴 오스터라니 너무도 매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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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푸른 벚나무
시메노 나기 지음, 김지연 옮김 / 더퀘스트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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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꽃은 피면 지기 마련이고 꽃이 져야 다음 계절이 찾아온다. 이러한 순환 덕분에 생명을 계속 이어갈 수 있다. 사람은 사라져가는 눈앞의 현실에만 관심을 보이지만 과거가 있었기에 미래도 있는 법이다. 과연 알기나 할까. 오늘이라는 하루는 면면히 이어지는 시간의 한 조각이라는 사실을. 삶은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다.                p.21~22


서른 살인 히오는 3년째 카페 '체리 블라썸'을 운영하고 있다. 지은 지 족히 70년은 넘은 가게는 가족의 역사가 담긴 곳으로 외할머니가 운영하던 아담한 호텔에서, 엄마가 운영했던 양식 레스토랑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계절에 맞는 화과자와 차를 제공하는 카페가 되었다. 마당에는 커다란 몸집의 오래된 산벚나무가 자리하고 있는데, 봄이면 흰색에 가까운 연분홍색 꽃과 적갈색 새잎이 어우러져 눈부시게 밝고 화사한 풍경을 자아낸다. 3대째 이곳을 이어온 외할머니 야에와 어머니 사쿠라코 그리고 지금의 카페 주인 히오를 지켜주는 수호신같은 존재로 등장하는 100년이 넘은 벚나무가 화자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카페 도도 시리즈에서도 카페의 부엌 기둥에 걸려 있는 작은 액자 속 도도가 화자로 등장했었다. 도도는 한때 이 세상에서 숨 쉬며 살았지만 지금은 절멸해버린 새의 이름인데, 액자 속 그림이 되어 카페 도도의 부엌에서 주인장과 손님들을 지켜보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도도라는 이름의 유래가 '바보'였기에, 도도의 시점으로 들려지는 이야기는 조금 귀엽고, 유쾌한 톤이기도 했었다면, 이번에 등장하는 벚나무는 오랜 세월만큼의 무게감과 통찰력을 가지고 있어 도도의 업그레이드 버전같은 느낌도 들었다. 이 작품의 주인공 히오는 매사에 서툴지만 카페를 운영하는 데 진심이다. '만개한 꽃이 아니라 서서히 지기 시작한 꽃잎, 겉으로 드러난 사랑스러움이 아니라 고상하게 잎사귀에 싸여 있는 흰색 떡' 같은 것들이 삶을 여유롭게 해주고 아름답게 해준다는 것을 손님들에게 전하고자 노력 중이다. 꽃집을 운영하는 미야코가 시기에 맞춰 꽃을 장식해주고, 히오는 비에 젖은 벚나무를 표현한 과자, 은은한 복숭아색 유약을 바른 찻잔 등으로 계절감을 고스란히 살려서 손님들에게 내준다. 





화과자 가게의 소에다 모녀도 그러기를 바라며 과자를 만들었다. 손으로 집자 하나비라모찌의 부드러운 감촉이 손끝에 전해지면서 기분도 저절로 풀린다. 살며시 깨물어 먹으니 매화꽃 한복판에 자리한 우엉의 단맛과 안에 든 소의 풍미가 입안에 가득 퍼진다. 흰색과 분홍색을 겹쳐서 만든 규히 반죽에서는 쫀득쫀득한 찰기가 느껴진다.

"행복한 맛이 나는데요." 가나가 감상을 말한다.

"하나하나 정성을 다해서 만들었대요."               p.184


카페 도도 시리즈는 주인장 소로리가 개발한 ‘오늘의 추천 메뉴’에 따라 각 장이 구성되며, 음식 한 접시로 위로 받고 행복을 느끼게 되는데 초점을 맞추었었는데, 이번 작품의 주요 소재는 다르지만음식 메뉴에서 만나게 되는 즐거움 또한 놓치지 않고 있다. 카페 '체리 블라썸'은 계절에 맞는 화과자와 차를 제공한다. 오래전 호텔을 운영하던 시절처럼 손님이 신발을 벗고 들어와 슬리퍼로 갈아 신도록 했더. 조금이라도 더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서양식 방이 둘, 일본식 다다미방이 하나 있는데, 각각 벚나무, 범주채, 삼잎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 팀밖에 못 들어가는 작은 방도 있고, 두세 팀이 동시에 들어가도 될 만큼 넓은 방도 있다. 손님이 방을 골라 차와 시즌 디저트를 고르는 식으로 운영이 된다. 손님들은 차와 과자, 그릇까지 계절감이 살아 있어서 근사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히오가 나름의 방식으로 카페를 운영하는 동안 100살 벚나무 또한 꽃을 피우고, 단풍을 물들이고, 휴면기에 들어갔다가 다시 새봄을 기다린다. 꽃이 피면 지기 마련이고 꽃이 져야 다음 계절이 찾아온다. 이러한 순환 덕분에 생명을 계속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라져가는 눈앞의 현실에만 관심을 보이지만 과거가 있었기에 미래도 있는 법이다. 오늘이라는 하루 또한 면면히 이어지는 시간의 한 조각인 것이다. 사람들은 만재한 벚꽃을 아끼고 사랑하지만, 벚꽃의 아름다움은 꽃이 전부가 아니다. 꽃이 질 때만 느낄 수 있는 멋과 맛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장점만 보지 말고 내면에 감춰진 장점까지 찾아낼 수 있다면 인생이 훨씬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실제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저자가 잎이 없는 겨울 벚나무를 보며 봄에 꽃을 피우기 위한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고 이 소설이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사계절의 자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이야기라 더욱 흥미롭게 읽었다. 시메노 나기의 작품은 카페 도도 시리즈로 만나게 되었는데, 이번 작품이야말로 힐링 소설의 최고점에 있는게 아닌가 싶다는 생각도 든다. 누군가에게는 이 책이 '인생소설'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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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다 양자역학 때문이야
제레미 해리스 지음, 박병철 옮김 / 문학수첩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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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러나 1900년대 초에 아인슈타인이 나타나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 아인슈타인은 세상을 향해 자신 있게 외친다. "어이, 복사에너지가 연속적이지 않고 불연속의 알갱이로 이루어져 있다는 막스 플랑크의 양자 가설을 알고 있나? 제레미가 이 책의 서론에서 이미 얘기했다고? 오케이, 좋아. 그런데 나는 복사에너지뿐만 아니라 빛까지도 불연속적인 알갱이로 이루어져 있음을 증명했어. 이 알갱이를 '광자'라 부르기로 했고 말이야. 분위기 파악했으면 다들 멍하니 서있지만 말고 빨리 가서 물리교과서를 새로 써야지!"                     p.39


양자물리학은 모든 현대 기술의 토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자물리학 덕분에 우리는 물질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고, 우주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물질을 만들 수 있으며, 별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망원경 너머 저 먼 우주에 무엇이 있는지도 알 수 있다. 올해는 양자역학이 탄생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양자역학은 1925년 독일의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가 정립한 이론으로 현대 과학기술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이론이다. 양자역학은 아주 작은 세상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는 과학이다. 인간의 의식과 평행우주에서 자유의지와 영생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삼라만상을 아우르는 이야기이며, 인간의 본질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과학적 렌즈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과학 이론을 불경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이 책의 저자인 제레미 해리스는 박사과정에서 물리학을 공부하다가 졸업 전에 실리콘밸리로 진출해 벤처회사를 설립했다. 그는 박사과정 학생 때 양자역학을 주제로 한 논문 여러 편을 국제 학술지에 게재했었고, 현재는 인공지능과 인류의 미래를 주제로 진행되는 팟캐스트를 진행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양자역학의 수학적 공식이나 원리 자체를 다루기보다 양자역학을 해석하는 다양한 관점과 철학적 의미에 관해 탐구한다. 매우 유쾌하고 위트있게 쓰여 누구라도 쉽고 재미있게 양자역학의 세계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굉장히 복잡하고 어렵지만, 또 엉뚱하고 황당하고 엄청난 이야기들이 나와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향하게 해주는 것이 양자역학이라면, 저자는 바로 그 방식으로 우리를 양자역학의 놀라운 세계로 안내한다. 




바로 이것이 문제다. 우리는 다중우주 어딘가에 자신이 속해있다고 느낀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자신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기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선택은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양자적 사건의 결과였다. '그런 결정을 내린 주체는 분명히 나 자신이었다'고 느낄 수도 있다.(그래서 간간이 과거를 회상하며 자부심이나 수치심을 느낀다). 그러나 이런 느낌은 실체가 아니라, 생존에 필요한 '주체의식'을 스스로에게 심어주기 위해 우리의 뇌가 만들어 낸 이야기일 뿐이다.              p.230


사실 아주 유명한 물리학자도 '양자역학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양자역학은 쉽지 않다. 그래서 100년 가까이 과학자들의 의연이 엇갈리고 있으며, 서로 자신의 의견이 맞다고 싸우고 있는 것 또한 바로 이 분야이다. 실제로 양자역학 초창기에 '주류'를 점유한 물리학자들은 "붕괴에 대해 더 이상 묻지 말라"거나 "닥치고 계산이나 하라"면서 골치 아픈 문제를 덮어 버렸다. 정작 본인들도 심기가 몹시 불편했지만, 옳은 답만 내놓는 문제투성이 이론을 차마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론상으로는 계산된 값이 실험으로 얻은 데이터와 정확하게 일치했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이 현실적인 해석에 특별히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보어의 붕괴이론이 양자역학의 확고한 해석으로 자리 잡았고 그 밖의 새로운 해석은 모두 배척되었다. 


누군가가 의문을 표하면 “닥치고 계산이나 해!(Shut up and calculate!)”라는 대답이 돌아올 뿐이었던 바로 그 물리학계에 통쾌하게 딴지를 걸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또한 이 책은 양자역학을 해석하는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한 매우 유쾌한 안내서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역자가 '책을 번역하면서 이렇게 웃어보긴 난생처음'이라고 했겠는가. 물리학을 전공했지만 현재는 기업가이기 때문에 저자는 물리학계의 권위에 도전해도 크게 피해 볼 것이 없는 입장이다. 그런만큼 저자는 이 책에서 시종일관 보어를 '양자역학의 발전을 저해한 빌런' 취급하며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평범한 독자 입장에서는 그렇게 이야기를 해나가는 방식이 재미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중간중간 설명이 필요한 이론에 대해 간단하지만 귀여운 그림으로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해준다. 현대 물리학계에서 상대성이론과 양자물리학은 양대산맥이라고 할만큼 중요하고, 또 그만큼 내용을 잘 모르는 대중들에게도 유명하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 양자물리학의 세계를 조금 엿볼 수 있어 아주 흥미진진했다. 이제 어디가서 나 양자역학이 뭔지 조금 알아, 라고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우주 만물의 근원인 양자역학을 이해해보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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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의 풀꽃 인생수업
나태주 지음 / 니들북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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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여러분 힘든 일이 있더라도, 잠시 실망했더라도, 기죽지 말고 사세요. 살다 보면 좋아지지 않을까요? 꽃을 피우는 순간이 있지 않을까요? 좋은 세상이 있지 않을까요? 이건 자존심의 문제입니다. 더 나아가 자존감의 문제이지요. 자존감이란 게 뭡니까? 스스로를 높이는 마음입니다.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남도 높일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거예요... 자존감이란 건 남과 비교하지 않고 나 스스로가 나를 인정하고 높이는 마음입니다.            p.47


나태주 시인의 글과 칼 라르손의 그림이 만나 아름다운 책이 탄생했다. 자세히 볼수록, 오래 볼수록 더 아름다운 책이다. 이 책은 EBS 클래스ⓔ <나태주의 풀꽃 인생수업>을 문장으로 풀어 옮긴 것이다. 20분짜리 연속 강좌 12회분이 고스란히 인생수업 12강으로 재탄생했는데, 각각의 챕터들은 자존감, 결핍, 행복, 터닝포인트, 가족, 성공 등 열두 가지 인생의 주제에 대한 시인만의 답이기도 하다. 시인은 강연의 포커스를 '오늘을 사는 젊은 청춘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고민하는지'에 맞추었다고 말한다. 힘들고 고단한 나날 속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한 것은 젊은 층이든 그렇지 않든 비슷할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누구에게나 공감할 수 있을 만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라는 시, '풀꽃'을 쓴 나태주 시인의 시들은 간결하고 단순한 언어와 짧은 분량으로 누구나 쉽고 친근하게 읽을 수 있어 시를 잘 모르더라도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따뜻하고 사려 깊은 말투도 시만큼이나 다정해서 노시인이 들려주는 인생의 지혜가 담백한 위로처럼 다가온다. 


나태주 시인은 시를 통해서 세상 곳곳에 높여있는 아름다운 것들과 애틋한 사랑에게 안녕을 전하고, 마음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안부를 묻는다. 시인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살포시 가져와 시로 써 내려가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래서인지 시들을 이루고 있는 언어들이, 감정들이 다정하고, 따뜻하게 느껴진다. 혹시 지금 겪는 고난 덕분에 다소 억울하고 화가 나더라도, 조금 더 참고 견디면서 언젠가 이 고난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쥐여 준다는 사실을 믿으라고 시인은 말한다. 그는 살아날 확률 10만 분의 1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살아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인생에는 이런 반작용도 있다고 알려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꿈꿔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사랑해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는 아름다워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는 우리 옆에 남아 있어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는 축복이 되어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는 노래와 위로가 되어야 합니다.             p.161


우리는 때로 너무 잘하려고만 해서 힘들어지곤 한다.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고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마음가짐도 살면서 필요한 거라고 저자는 말한다. 행복이란 가까운 곳, 내 안에 있는 것이며, 사랑이란 예쁘지 않은 것을 예쁘게 보아주는 것, 자존감이란 남과 비교하지 않고 스스로를 인정하고 높이는 마음이며, 좋은 시는 책이 아닌 인생 속에 있다고 시인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이야기한다. 


'쓸쓸해져서야 보이는 풍경이 있고, 버림받은 마음일 때에만 들리는 소리'가 있는 법이다. 우리는 그럴 때 평소에 안 듣던 음악을 찾아 듣고, 시를 읽고, 영화를 본다. 사는 건 매번 만만치 않은 일이고, 사랑 역시 결코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며, 누구나 겪는 일이라고 해서 쉬운 일은 절대 없다. 일상이 전쟁처럼 치열하고, 사는 게 매일매일 너무 바쁘지만, 그래도 가끔은 한숨 돌리고 마음의 여유를 좀 가져야 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스웨덴의 국민 화가 칼 라르손이 그린 많은 작품들은 아내 카린과 함께 손수 꾸민 집과 8명의 아이들의 일상 풍경들을 주로 담고 있다. 마당에서의 대가족 점심 식사, 강가에서의 뱃놀이, 그림 같은 집안에서의 홈 파티, 아내와 아이들이 책을 읽는 모습, 정원에서 뛰노는 풍경, 강아지와 함께 하는 일상 등.. 너무도 따뜻하고 예쁜 풍경들 속에서 행복이 묻어 나온다. 스웨덴의 목가적인 풍경과 소소하고 평범한 가정의 모습들은 우리의 일상과 꽤나 많이 닮았다. '행복을 그리는 화가'라고 불렸던 칼 라르손의 그림과 소박하고 긍정적인 나태주 시인의 글이 너무도 잘 어울려서 그 감동은 배가 된다. 


누구에게나 생은 단 한번이기에 인생은 다 처음 살아 보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도 서툴고, 부모 노릇도, 선생 노릇도, 자식 노릇도 다 그런 것이다. 처음이라서 모두 서툰 것이다. 세상은 서툰 것 투성이고, 서툴다고 잘 살 수 없는 것은 아니란 것이다. 내 나이는 나에게 처음인 것이라 서툰 것이 당연하고, 그것을 새로움으로,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인생의 지혜가 되는 것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인생의 어떤 시기도 충분히 가치 있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차츰 깨닫게 된다. 빡빡한 일상에 쉼표를 만들어주는 시간이 필요하다면, 고단한 삶을 헤쳐나갈 응원이 필요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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