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모노 에디션) 열린책들 세계문학 모노 에디션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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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너무 좋은 일은 오래가지 못하는구나,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차라리 이게 꿈이었더라면. 저 고기를 낚지 않고 차라리 신문지를 깐 침대 위에 그냥 누워 있었더라면.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야.」 그가 말했다.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 거야.」            - '노인과 바다' 중에서, p.96


멕시코 만류에서 조각배를 타고 혼자 낚시하는 노인 산티아고는 벌써 84일째 고기를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 희망과 자신감은 사라지지 않았고, 마침내 낚싯줄이 팽팽해지면서 신호가 온다. 아주 단단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중량이었다. 노인은 애를 썼지만 그놈을 단 1인치도 끌어올리지 못했고, 결국 거대한 물고기를 뱃전에 매달고 그 상태로 돌아가기로 한다. 하지만 그것조차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고기는 자꾸 공중으로 뛰어올랐고, 낚싯줄이 빠르게 풀릴 때마다 배도 함께 움직였다. 하지만 노인은 포기하지 않았고, '누가 이기나 한판 붙어 보자'는 마음이다. 그렇게 엄청난 고통을 감내하며 물고기와 사투를 벌인 끝에 물고기를 잡는데 성공하지만, 피 냄새를 맡은 상어들이 다가오기 시작한다. 노인은 상어로부터 물고기를 지키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이 책에는 표제작인 <노인과 바다> 외에도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 도움이 되는 단편 일곱 편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아프리카로 사파리 여행을 떠난 헤밍웨이의 자전적 작품이기도 한 <킬리만자로의 눈>과 <프랜시스 매코머의 짧고 행복한 생애>를 비롯해서 생전 마지막 단편집에 수록되었던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 하루키가 영감을 얻은 것으로 유명한 단편집에 수록되었던 <하얀 코끼리 같은 산>, <살인자들> 등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헤밍웨이 문학의 본령은 단편소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만큼, 하나하나의 작품들이 다 좋았다. 특히나 모노 에디션은 그동안 있던 판본에서 많이 눈에 띈 오역도 바로잡았다고 한다. 원작의 의미나 작가의 의도를 오해할 수 있는 요소를 배제하려 의역을 가능한 한 줄여 번역 작품을 읽는 독자와 작품 사이의 거리를 최소화하려 노력했다고 하는데, 덕분에 간결하고 정확한 헤밍웨이의 문체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가질 수도 있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아니, 그 외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어요. 하지만 날마다 그것을 점점 더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어요.」

「무슨 소리야?」

「우리가 이 모든 것을 가질 수도 있었다고요」

「우린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어.」

「아니요. 우린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우린 어디든 갈 수 있어.」

「아니요. 우린 갈 수 없어요. 여긴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에요.」              - '하얀 코끼리 같은 산' 중에서, p.228


마거릿은 프랜시스 매코머와 결혼한 지 올해 십 년하고도 일 년이 되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아프리카로 수렵 여행을 온 참이다. 매코머는 매우 키가 크고 체력이 좋으며, 코트에서 하는 게임을 잘하고, 낚시질에서도 큰 고기를 낚는 남자였다. 하지만 백인 수렵가 윌슨과 함께 하는 사자 사냥에서 그만 겁쟁이의 모습을 드러내고 만다. 직업 사냥꾼인 윌슨이 손님 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벌리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매코머는 소문이 퍼져 나갈까봐 전전긍긍한다. 사자 앞에서 토끼처럼 도망쳐 버린 자신의 모습이 계속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다음 번 일정으로 물소 사냥을 하기로 했는데, 과연 그는 내일 물소를 잡을 때는 자신의 명예를 만회할 수 있을까? 이 이야기는 헤밍웨이 스스로 '자신의 최고 걸작 단편'이라고 평한 작품인 <프랜시스 매코머의 짧지만 행복한 생애>이다.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 남자 매코머의 삶이 왜 가장 행복한 것인지는 이야기를 끝까지 읽으면 알 수 있게 된다. 


<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가 실제로 청새치 낚시를 하며 구상했다고 한다. 이 단순하고 짧은 이야기는 소년과의 짧은 대화와 노인의 독백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읽히며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겨준다. 사실 아주 어릴 때 이 작품을 처음 읽으며 노인이 청새치, 상어와 벌이는 싸움이 조금 무모하고 의미없게 느껴졌었는데, 시간이 더 많이 흐른 뒤에 읽었을 때는 처절하게 고독한 노인에게 소년 마놀린같은 존재가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었고,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는 드넓은 바다 한가운데서 홀로 싸움에 임하는 노인의 의지와 마음가짐에 대해 더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를 죽이는 일인 동시에 나를 살게 해주는 일이 무엇인지, 나는 과연 매 순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왔는지 말이다. 고전이 가진 최고의 가치는 이렇게 다시 읽을 때 비로소 만날 수 있다. 간결하고 가벼운 장정으로 만나는 모노 에디션으로 쉽고 부담없이 고전을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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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3부작 - 그래픽노블
데이비드 마추켈리 외 그림, 황보석 외 옮김, 폴 오스터 원작, 폴 카라식 각색 / 미메시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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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퀸은 언제나 자신을 혼자 있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여겨 왔었다. 이제 그는 고독의 본질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 한 가지는 자기가 추락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만일 추락하고 있었다면 어떻게 자신을 붙잡는 것까지도 가능했을까? 동시에 꼭대기와 밑바닥에 있는 일이 가능할까? 그것은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았다.                - '유리의 도시' 중에서, p.119


폴 오스터의 거의 모든 작품들을 다 읽었는데, 매번 한번도 같은 스타일을 복기 하지 않는, 독특한 자신만의 색깔을 가지고 있는 작가로 기억한다. 폴 오스터가 우리 곁을 떠난 지 어느 새 한 해가 흘렀다. 최근에 그가 투병 중에 집필한 생애 마지막 장편소설을 읽었었는데, 이렇게 초기작을 다시 만나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빵굽는 타자기>, <달의 궁전>, <뉴욕 3부작> 등 그의 초기작들은 국내에서도 꽤 많은 사랑을 받았었는데, 나 역시 그 작품들로 그를 처음 만났었다. 


초기작들 중에서도 <뉴욕 3부작>은 이후 그의 작품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의 원형이 담겨있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미스터리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고, 실종과 추적이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이야기임에도 결말이 모호하기 때문에 명확한 서사를 좋아한다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만한 작품이기도 하다. 




그래서 <뉴욕 3부작>이 그래픽 노블 버전으로 나온다고 해서 매우 궁금했다. 얼마나 짜임새있게 압축해서 각색했을지, 원작의 모호한 서사를 이미지로 어떻게 그려냈을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래픽 노블이라는 장르는 소설이 지닌 깊이 있고 탄탄한 스토리라인과 만화가 지닌 시각적 효과를 동시에 즐길 수 있다는 점에 있어 굉장히 훌륭한 장치이다. 어른들의 만화라고도 불리며 만화와 소설의 중간 형식을 띠고 있다고 보면 되는데, 보통은 매우 길고 복잡한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있고, 함축적이고 은유적인 이미지로 전개가 빠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촘촘히 글자가 박힌 소설책보다는 눈의 피로도 덜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좋은 반면에, 조금 내용이 어렵게 느껴지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원작 소설이 이미 존재하고, 그 뒤에 그래픽 노블이 나온 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래픽 노블이 가진 장점과 소설의 단점이 적절하게 손을 잡은 느낌이랄까. 그래픽 노블의 장르적 특성이 빡빡한 지면 구성, 때론 실험적인 내용들인데, 원작이 있는 경우에는 그런 점이 오히려 매력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드디어 그의 마음에 와닿는 문장을 하나 발견한다. <책은 쓸 때 고심해서 묵묵히 쓰는 만큼 읽을 때도 그렇게 읽어야 한다.> 문득 그는 천천히 읽는 것, 과거 그 어느 때의 독서보다 천천히 읽는 것이 비결이라는 사실을 이해한다... 책이 요구하는 마음가짐으로 독서할 인내심을 찾을 수 있다면, 점차 점차 완전한 이해에 다다를 수 있겠지. 자신에 관해. 그리고 블랙, 화이트, 이 사건, 모든 것에 관해. 그러나 붙잡은 기회만큼 놓친 기회도 인생의 일부이고, 이야기는 일어나지 않은 일에 미련을 가져서는 안 된다.              - '유령들' 중에서, p.180


첫 번째 작품 <유리의 도시>는 잘못 걸려온 전화 한 통에서 시작된다. 필명으로 추리 소설을 쓰는 작가 퀸은 한밤중에 엉뚱한 사람을 찾는 전화를 여러 번 받는다. 탐정 회사를 하는 폴 오스터 씨를 찾는 전화였다. 그런 사람은 없다고, 여기는 탐정 회사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전화는 여러 날로 이어졌고, 결국 퀸은 자신이 폴 오스터라고 말하며 의뢰인을 만나 보기로 한다. 그리고 남편의 아버지가 접근하는 걸 막아 달라는, 감시 업무를 의뢰 받게 된다. 그렇게 퀸은 탐정 업무를 하며 노인을 감시하는 일을 하게 되는데, 그의 삶을 지켜보면서 점차 자신을 잃어 버리고 있다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두 번째 작품인 <유령들>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블루는 화이트로부터 블랙이라는 이름의 남자를 쫓아다니며 지켜봐 달라는 의뢰를 받게 된다. 블루는 블랙이 사는 건물 정반대 편에 있는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하고, 그를 몰래 지켜보기 시작한다. 블루는 길 건너편의 블랙을 엿보면서 단순히 타인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자기 자신도 바라보는 것만 같다고 느낀다. 삶의 속도가 급격하게 줄어들자 전에는 주의를 비껴가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사건에 진척은 없고, 아무 일도 없는 나날이 계속되는 가운데 블루는 블랙에게 접근해 그와 대화를 나누기도 하며 보고서를 작성해나가지만, 끝이 없는 숨바꼭질을 얼마나 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세 번째 작품 <잠겨 있는 방>은 어린 시절 친구의 실종에 대한 소식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내와 아들을 남겨둔 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친구가 남긴 원고를 읽고 그의 글을 출간하는 작업을 하며 그가 남긴 흔적들을 뒤쫓는 과정에서 나는 친구의 아내와 점차 가까워진다. 세 편의 연작 소설은 각자 독립된 인물들이 누군가를 추적하고, 쫓는 서사를 가지고 있다. 끝없이 감시하고 뒤쫓는 과정이 이어지지만, 그에 대한 결과는 명확하지 않다. 좇으면 좇을수록, 대상에게 가까워지면 가까워질 수록 모든 것이 더욱 흐릿해진다고 할까. 그러면서 탐정과 작가 등 추적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조금씩 잃어 간다. 


원작 소설이 채워주지 못하던 부분을 시각화 작업을 통해 보여주고 있어 아무래도 소설보다는 그래픽노블 버전이 가독성은 훨씬 좋았던 것 같다. 특히나 세 작품을 각기 다른 작가가 그림을 맡아 작업했기에, 완전히 다른 작법과 다른 방식으로 그려진 삽화들이 재미를 더해준다. 폴 오스터의 소설 세계를 각기 다른 세 작가가 자신만의 시선으로 해석해 그려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을 그래픽 노블 버전으로 만나야만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원작의 느낌을 잘 살리면서도, 또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보여주고 있어 같은 작품을 읽는 듯한 익숙함과 새로운 작품을 만나는 듯한 설레임을 함께 안겨주고 있으니 말이다. 폴 오스터의 작품을 좋아했다면, 그래픽 노블로 만나는 완전히 새로운 폴 오스터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적극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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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3부작 - 그래픽노블
데이비드 마추켈리 외 그림, 황보석 외 옮김, 폴 오스터 원작, 폴 카라식 각색 / 미메시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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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의 예술가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그려낸 세 편의 연작 소설, 그래픽 노블로 만나는 폴 오스터라니 너무도 매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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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푸른 벚나무
시메노 나기 지음, 김지연 옮김 / 더퀘스트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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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꽃은 피면 지기 마련이고 꽃이 져야 다음 계절이 찾아온다. 이러한 순환 덕분에 생명을 계속 이어갈 수 있다. 사람은 사라져가는 눈앞의 현실에만 관심을 보이지만 과거가 있었기에 미래도 있는 법이다. 과연 알기나 할까. 오늘이라는 하루는 면면히 이어지는 시간의 한 조각이라는 사실을. 삶은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다.                p.21~22


서른 살인 히오는 3년째 카페 '체리 블라썸'을 운영하고 있다. 지은 지 족히 70년은 넘은 가게는 가족의 역사가 담긴 곳으로 외할머니가 운영하던 아담한 호텔에서, 엄마가 운영했던 양식 레스토랑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계절에 맞는 화과자와 차를 제공하는 카페가 되었다. 마당에는 커다란 몸집의 오래된 산벚나무가 자리하고 있는데, 봄이면 흰색에 가까운 연분홍색 꽃과 적갈색 새잎이 어우러져 눈부시게 밝고 화사한 풍경을 자아낸다. 3대째 이곳을 이어온 외할머니 야에와 어머니 사쿠라코 그리고 지금의 카페 주인 히오를 지켜주는 수호신같은 존재로 등장하는 100년이 넘은 벚나무가 화자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카페 도도 시리즈에서도 카페의 부엌 기둥에 걸려 있는 작은 액자 속 도도가 화자로 등장했었다. 도도는 한때 이 세상에서 숨 쉬며 살았지만 지금은 절멸해버린 새의 이름인데, 액자 속 그림이 되어 카페 도도의 부엌에서 주인장과 손님들을 지켜보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도도라는 이름의 유래가 '바보'였기에, 도도의 시점으로 들려지는 이야기는 조금 귀엽고, 유쾌한 톤이기도 했었다면, 이번에 등장하는 벚나무는 오랜 세월만큼의 무게감과 통찰력을 가지고 있어 도도의 업그레이드 버전같은 느낌도 들었다. 이 작품의 주인공 히오는 매사에 서툴지만 카페를 운영하는 데 진심이다. '만개한 꽃이 아니라 서서히 지기 시작한 꽃잎, 겉으로 드러난 사랑스러움이 아니라 고상하게 잎사귀에 싸여 있는 흰색 떡' 같은 것들이 삶을 여유롭게 해주고 아름답게 해준다는 것을 손님들에게 전하고자 노력 중이다. 꽃집을 운영하는 미야코가 시기에 맞춰 꽃을 장식해주고, 히오는 비에 젖은 벚나무를 표현한 과자, 은은한 복숭아색 유약을 바른 찻잔 등으로 계절감을 고스란히 살려서 손님들에게 내준다. 





화과자 가게의 소에다 모녀도 그러기를 바라며 과자를 만들었다. 손으로 집자 하나비라모찌의 부드러운 감촉이 손끝에 전해지면서 기분도 저절로 풀린다. 살며시 깨물어 먹으니 매화꽃 한복판에 자리한 우엉의 단맛과 안에 든 소의 풍미가 입안에 가득 퍼진다. 흰색과 분홍색을 겹쳐서 만든 규히 반죽에서는 쫀득쫀득한 찰기가 느껴진다.

"행복한 맛이 나는데요." 가나가 감상을 말한다.

"하나하나 정성을 다해서 만들었대요."               p.184


카페 도도 시리즈는 주인장 소로리가 개발한 ‘오늘의 추천 메뉴’에 따라 각 장이 구성되며, 음식 한 접시로 위로 받고 행복을 느끼게 되는데 초점을 맞추었었는데, 이번 작품의 주요 소재는 다르지만음식 메뉴에서 만나게 되는 즐거움 또한 놓치지 않고 있다. 카페 '체리 블라썸'은 계절에 맞는 화과자와 차를 제공한다. 오래전 호텔을 운영하던 시절처럼 손님이 신발을 벗고 들어와 슬리퍼로 갈아 신도록 했더. 조금이라도 더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서양식 방이 둘, 일본식 다다미방이 하나 있는데, 각각 벚나무, 범주채, 삼잎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 팀밖에 못 들어가는 작은 방도 있고, 두세 팀이 동시에 들어가도 될 만큼 넓은 방도 있다. 손님이 방을 골라 차와 시즌 디저트를 고르는 식으로 운영이 된다. 손님들은 차와 과자, 그릇까지 계절감이 살아 있어서 근사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히오가 나름의 방식으로 카페를 운영하는 동안 100살 벚나무 또한 꽃을 피우고, 단풍을 물들이고, 휴면기에 들어갔다가 다시 새봄을 기다린다. 꽃이 피면 지기 마련이고 꽃이 져야 다음 계절이 찾아온다. 이러한 순환 덕분에 생명을 계속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라져가는 눈앞의 현실에만 관심을 보이지만 과거가 있었기에 미래도 있는 법이다. 오늘이라는 하루 또한 면면히 이어지는 시간의 한 조각인 것이다. 사람들은 만재한 벚꽃을 아끼고 사랑하지만, 벚꽃의 아름다움은 꽃이 전부가 아니다. 꽃이 질 때만 느낄 수 있는 멋과 맛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장점만 보지 말고 내면에 감춰진 장점까지 찾아낼 수 있다면 인생이 훨씬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실제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저자가 잎이 없는 겨울 벚나무를 보며 봄에 꽃을 피우기 위한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고 이 소설이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사계절의 자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이야기라 더욱 흥미롭게 읽었다. 시메노 나기의 작품은 카페 도도 시리즈로 만나게 되었는데, 이번 작품이야말로 힐링 소설의 최고점에 있는게 아닌가 싶다는 생각도 든다. 누군가에게는 이 책이 '인생소설'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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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다 양자역학 때문이야
제레미 해리스 지음, 박병철 옮김 / 문학수첩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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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00년대 초에 아인슈타인이 나타나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 아인슈타인은 세상을 향해 자신 있게 외친다. "어이, 복사에너지가 연속적이지 않고 불연속의 알갱이로 이루어져 있다는 막스 플랑크의 양자 가설을 알고 있나? 제레미가 이 책의 서론에서 이미 얘기했다고? 오케이, 좋아. 그런데 나는 복사에너지뿐만 아니라 빛까지도 불연속적인 알갱이로 이루어져 있음을 증명했어. 이 알갱이를 '광자'라 부르기로 했고 말이야. 분위기 파악했으면 다들 멍하니 서있지만 말고 빨리 가서 물리교과서를 새로 써야지!"                     p.39


양자물리학은 모든 현대 기술의 토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자물리학 덕분에 우리는 물질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고, 우주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물질을 만들 수 있으며, 별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망원경 너머 저 먼 우주에 무엇이 있는지도 알 수 있다. 올해는 양자역학이 탄생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양자역학은 1925년 독일의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가 정립한 이론으로 현대 과학기술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이론이다. 양자역학은 아주 작은 세상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는 과학이다. 인간의 의식과 평행우주에서 자유의지와 영생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삼라만상을 아우르는 이야기이며, 인간의 본질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과학적 렌즈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과학 이론을 불경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이 책의 저자인 제레미 해리스는 박사과정에서 물리학을 공부하다가 졸업 전에 실리콘밸리로 진출해 벤처회사를 설립했다. 그는 박사과정 학생 때 양자역학을 주제로 한 논문 여러 편을 국제 학술지에 게재했었고, 현재는 인공지능과 인류의 미래를 주제로 진행되는 팟캐스트를 진행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양자역학의 수학적 공식이나 원리 자체를 다루기보다 양자역학을 해석하는 다양한 관점과 철학적 의미에 관해 탐구한다. 매우 유쾌하고 위트있게 쓰여 누구라도 쉽고 재미있게 양자역학의 세계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굉장히 복잡하고 어렵지만, 또 엉뚱하고 황당하고 엄청난 이야기들이 나와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향하게 해주는 것이 양자역학이라면, 저자는 바로 그 방식으로 우리를 양자역학의 놀라운 세계로 안내한다. 




바로 이것이 문제다. 우리는 다중우주 어딘가에 자신이 속해있다고 느낀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자신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기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선택은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양자적 사건의 결과였다. '그런 결정을 내린 주체는 분명히 나 자신이었다'고 느낄 수도 있다.(그래서 간간이 과거를 회상하며 자부심이나 수치심을 느낀다). 그러나 이런 느낌은 실체가 아니라, 생존에 필요한 '주체의식'을 스스로에게 심어주기 위해 우리의 뇌가 만들어 낸 이야기일 뿐이다.              p.230


사실 아주 유명한 물리학자도 '양자역학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양자역학은 쉽지 않다. 그래서 100년 가까이 과학자들의 의연이 엇갈리고 있으며, 서로 자신의 의견이 맞다고 싸우고 있는 것 또한 바로 이 분야이다. 실제로 양자역학 초창기에 '주류'를 점유한 물리학자들은 "붕괴에 대해 더 이상 묻지 말라"거나 "닥치고 계산이나 하라"면서 골치 아픈 문제를 덮어 버렸다. 정작 본인들도 심기가 몹시 불편했지만, 옳은 답만 내놓는 문제투성이 이론을 차마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론상으로는 계산된 값이 실험으로 얻은 데이터와 정확하게 일치했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이 현실적인 해석에 특별히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보어의 붕괴이론이 양자역학의 확고한 해석으로 자리 잡았고 그 밖의 새로운 해석은 모두 배척되었다. 


누군가가 의문을 표하면 “닥치고 계산이나 해!(Shut up and calculate!)”라는 대답이 돌아올 뿐이었던 바로 그 물리학계에 통쾌하게 딴지를 걸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또한 이 책은 양자역학을 해석하는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한 매우 유쾌한 안내서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역자가 '책을 번역하면서 이렇게 웃어보긴 난생처음'이라고 했겠는가. 물리학을 전공했지만 현재는 기업가이기 때문에 저자는 물리학계의 권위에 도전해도 크게 피해 볼 것이 없는 입장이다. 그런만큼 저자는 이 책에서 시종일관 보어를 '양자역학의 발전을 저해한 빌런' 취급하며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평범한 독자 입장에서는 그렇게 이야기를 해나가는 방식이 재미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중간중간 설명이 필요한 이론에 대해 간단하지만 귀여운 그림으로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해준다. 현대 물리학계에서 상대성이론과 양자물리학은 양대산맥이라고 할만큼 중요하고, 또 그만큼 내용을 잘 모르는 대중들에게도 유명하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 양자물리학의 세계를 조금 엿볼 수 있어 아주 흥미진진했다. 이제 어디가서 나 양자역학이 뭔지 조금 알아, 라고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우주 만물의 근원인 양자역학을 이해해보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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