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측 죄인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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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여인이 살해당하고, 그녀의 남편이 살인자로 지목된다. 문제는 사체가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범인은 지문은 물론이고 머리카락조차 남기지 않았다. 몇 년 전에 개봉했었던 영화 의뢰인의 줄거리이다. 이야기는 그를 변호하는 변호인과 그를 구속하려는 검사 쪽의 대결구도로 진행되었는데, 당시 흥미로웠던 건 검사 쪽의 계획이었다. 살인자로 지목된 남자는 그 전에 있었던 살인사건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지만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수사팀은 범인이라고 확신했지만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는 상태, 즉 기소할 수 없는 상태로 어쩔 수 없이 그를 풀어줘야 했던 검사는 이후 비공식적으로 그를 주시해왔다는 것이다. 모든 정황으로 미뤄볼 때 명백한 범인임에도 그저 정황증거만으로 범인에게 처벌을 가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정의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여러모로 생각하게 해주었던 영화였다.

시즈쿠이 슈스케는 거기에 아직까지도 존폐논란이 끊이지 않는 '공소시효'라는 사법계의 영원한 숙제를 추가한다. 지난 달에 일명 태완이법이라 불리는 공소시효 폐지에 관한 개정안이 법사위 소위를 통과하지 못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1999년 대구 어린이 황산 테러의 피해 아동이었던 김태완 군이 숨지고 나서 지난 2014년 공소시효가 끝날 예정이었으나 제정신청을 통해 공소시효가 정지된 상태이다. 원래 공소시효라는 것은 범죄의 경중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예를 들어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라면 25, 무기징역 또는 무기금고에 해당하는 범죄는 15년이다. 하지만 수많은 살인 사건들이 공소시효라는 걸림돌 덕분에 미제 사건으로 남겨졌고, 그 사건들은 영화의 소재로도 자주 활용되어 왔다. 몽타주, 아이들, 그 놈 목소리, 내가 살인범이다, 공범 등등... 공소시효가 만료되기 전 사건의 범인을 처벌하기 위해 부단히 뛰어다니는 스토리는 무엇보다 감정이입을 끌어내고, 제한된 시간이라는 긴장감 또한 부여하기 때문에 영화적인 소재로 자주 이용되는 게 아닌가 싶다. 공소시효를 폐지해야 한다는 측은 이것이 사건의 피해자에게 불리한 법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공소시효가 지난 뒤 범인이 밝혀진다면 그에 대한 형벌권이 없기 때문에 처벌할 수 없고, 따라서 엄청난 범죄를 저질러놓고도 유유자적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공소시효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하는 측은 공소시효 기간 동안 범죄자의 고통은 형벌을 받는 것과 맞먹기 때문에 처벌의 필요성이 낮아지고, 검찰과 경찰의 업무가 한 사건에만 인력과 시간을 쏟아붓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양측 모두 각각의 이유가 합리적이어서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 판단하기는 사실 매우 어렵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관련해서 작품이 만들어질 수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서론이 길었지만, 이 작품의 질문은 사실 간단하다.

공소시효가 만료된 사건의 범인을 처벌하기 위해, 현재 벌어진 다른 사건의 범인으로 그 사람을 몰아서 법의 심판을 받게 하려는 것을 과연 정의라고 할 수 있는가?

아오토의 설명을 흘려 들으며 모가미는 단 한 가지 생각에 빠져 있었다.

마쓰쿠라가 진범이기를 바란다는 생각.

어떤 사건이든 범인이 특정 인물이기를 바라며 수사에 임한 적은 없었다. 이 녀석은 결백할지도 모른다, 이 녀석은 범인이 틀림없다 뭔가에 근거한 판단 말고, 이를테면 희망이 포함된 사심을 검찰 수사에 개입시킨 적은 없었다.

하지만 현재 모가미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감각 속에 있었다.

이 흉악 사건의 범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아직 부각되지 않았다. 마쓰쿠라가 범인일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 한 점에 기대를 걸었다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23년 전 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였던 사람을, 현재 다른 살인 사건의 범인을 찾다가 발견했다면, 그렇다면 누구라도 내심 바라게 되지 않을까. 그가 이번 살인 사건의 범인이었으면. 그래서 지난 살인 사건의 피해자의 못다한 한이라도 풀 수 있기를, 분하게도 공소시효가 지나서 처벌할 수 없었던 법의 정당한 심판을 받을 수 있기를 말이다.

70대 노부부가 잔인하게 살해당한 사건이 발생한다. 아마도 계획적인 범행으로 보이고, 돈까지 얽혀 있는 걸로 조사되어 면식범의 소행으로 보고 용의자가 추려진다. 용의 선상에 오른 사람들의 알리바이를 조사해 용의자 범위를 압축하는 작업 중에 베테랑 검사 모가미는 명단에서 낯익은 이름을 하나 발견한다. 바로 자신이 대학 시절 하숙을 했던 기숙사 관리인의 딸 살해 사건에서 마지막까지 범인으로 지목됐었던 남자의 이름을 발견한 것이다. 무려 23년이 지나 이미 공소 시효가 지나버렸지만, 당시 중학교 2학년이던 관리인 부부의 외동딸 유키가 만약 아직 살아 있다면 벌써 결혼해 아이도 있을 지 모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녀의 미래를 잔인하게 빼앗아 버린 범인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유유히 거리를 활보하며 살.... 것이다. 당연히 모가미는 그가 이번 노부부 살인 사건의 범인이었으면 하고 바랄 수밖에 없다. 설령 지금 그가 과거의 죄를 인정한다고 해도 아무런 법적인 제재를 가할 수 없지만, 그가 이번 사건의 범인이라면 그 동안 미뤄졌던 법의 심판을 받아 죗값을 치를 수 있는 것이다.

오키노 역시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과가의 죄를 청산하지 않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취조할 때 서슴없이 폭언을 퍼부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번 사건의 죄까지 덮어씌워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래서야 거의 사적 제재의 영역이다....원죄로 발생하는 또 다른 문제는 정말로 심판 받아야 할 사람이 심판 받지 않고 법망에서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단추를 하나 잘못 끼우면 이치에 어긋나는 결과가 연쇄적으로 발생한다.

 

과거의 살인 사건을 저질렀지만 시효가 성립되어 처벌받지 않았다면,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는 죄를 뒤집어씌워도 상관없는 것일까? 범인상을 미리 정해놓고 철저히 억측으로 수사를 하더라도, 과거에 살인을 저질렀던 살인자를 벌하는 것이므로 이것이 세상의 정의를 지키는 것일까? 만약 이것이 옳은 일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공소시효를 빌미로 아무런 제재 없이 빠져 나가버린 범죄자를 심판하는 일은 누가 할 수 있을까? 피해자는 그저 단순히 운이 나빴을 뿐이고, 범인은 그저 운이 너무 좋았을 뿐이라고 치부해야 하는 건가? 세상에 이런 정의가 어디 있단 말인가.

베테랑 검사 모가미의 정의는 "죄를 저지른 자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에게 다른 죄를 뒤집어씌우게 되더라도, 어차피 그가 과거에 저지른 원래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모가미의 제자이자 새내기 검사인 오키노의 정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법은 지켜져야 한다"이다. 원죄를 만드는 것은 수사 측이 저지르는 죄이므로, 남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 설사 그것이 과거의 살인을 저지른 자일지라도 말이다. 누군가에게 현재의 죄를 뒤집어씌우면, 결국 현재 사건의 범인은 역시나 또 처벌받지 않고 살아 갈테니 말이다. 과연 정의란 무엇일까. 모가미의 정의와 오키노의 정의는 극과 극이지만, 사실 어느 한 쪽의 입장을 편들고 싶지는 않다. 모가미의 행동도 이해가 가고 오키노의 생각도 공감이 되기 때문이다.

죄를 저지른 자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

누군가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게 되는 일이 생기더라도.

어떤 일이 있어도 법은 지켜져야 한다.

설사 그것이 과거에 살인을 저지른 자를 보호하는 것일지라도.

세상에 이렇게 어려운 질문이 또 있을까 싶다. 시즈쿠이 슈스케는공소시효를 빌미로 달아난 범죄자를 심판하는 것은 가능한가라는 진지한 의문에서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현직 검사들을 취재해서 작품의 리얼리티를 생생하게 그려내어 현행 사법제도의 복잡한 딜레마를 인간적인 드라마로 만들어내고 있다. 애초에 공소시효라는 것만 없었더라도. 라는 안타까움이 들기도 한다. 여러 가지 생각들을 남겨주는 멋진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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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측 죄인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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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저지른 자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 누군가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게 되는 일이 생기더라도.
어떤 일이 있어도 법은 지켜져야 한다. 설사 그것이 과거에 살인을 저지른 자를 보호하는 것일지라도.
시즈쿠이 슈스케는 현행 사법제도의 복잡한 딜레마를 인간적인 드라마로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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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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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이 작품을 만났던 건 초등학교 시절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왜냐하면 당시에 친한 친구에게 책을 빌려주고 나서 그 아이가 갑자기 이사를 가면서 연락이 끊기는 바람에 책을 여태 돌려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반에서 가장 책을 많이 읽는 아이였던 나는 그 이후로는 좋아하는 책은 친구에게 절대 빌려주지 않게 되었다. 읽어보고 마음에 드는 책들은 친구들에게 읽게 하고 싶어서 마구 빌려주곤 했었는데, 책을 돌려받지 못하는 일이 몇 번 반복이 되고 나니 누군가 책을 빌려달라고 할 때, 내가 과연 이 책을 돌려받을 수 있을까 부터 계산하게 되는 내가 싫어져 그냥 빌려주지 않게 된 것이다. 근데 재미있는 건 내가 당시에 읽었던 버전은 한겨레에서 출판된 버전의 표지인데, 지금 찾아보니 출간 년도가 1999년으로 되어 있는 게 아닌가. 분명 나는 그것보다 한참 전에 이 책을 읽었는데 말이다. 이번에 역자 후기를 보아하니, 2003년에 문예 출판사가 정식 판권을 획득하기 전에 국내에서는 그 동안 해적판으로 나돌았다고 되어 있다. 나도 몰랐지만, 정식 버전이 아닌 해적판을 읽고 마음 속에 그렇게 오래 남겨두었었구나 생각하니 이 책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러니까 번역이 조금 아쉽거나 어설프거나, 어쨌거나 정식 판권으로 출간된 책이 아니었어도 이 책은 어린이에게조차 감동을 줄 수 있는 책이었던 거다.

서두가 길었지만, 어쨌건 이번에 굉장히 오랜만에 새 판형으로 예쁘게 다시 출간된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나는 그냥 가슴이 마구 설레었었다. 드디어 이 책을 다시 만나는 구나 싶은 생각에 마치 초등학교 시절의 첫사랑을 대면하는 듯한 느낌도 들고 말이다. 특히나 이번에는 역자가 기존에 출간 되었던 버전의 번역을 수정한 것이 아니라, 거의 새로 번역하다시피 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어색하거나 부정확한 어휘나 표현을 바로 잡고, 평어체 문장을 경어체 문장으로 바꾼 점이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인데, 사실 주인공 스카웃이 아홉 살 어린이로 자신의 경험을 말하듯이 들려주는 형식이라 경어체 문장은 생각보다 더 감정 이입하기 쉽게 만들어준다. 지금의 이 번역이라면 나처럼 초등학교 시절에 이 책을 만나더라도 조금 더 빠르고, 쉽게 이 책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간단한 요령 한 가지만 배운다면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어." 아빠가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를 정말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는 거야."

"?"

"말하자면 그 사람 살갗 안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되어서 걸어다니는 거지"

이 책의 주인공은 스카웃이라는 소녀이다. 스카웃은 네 살 위의 오빠 젬과 변호사인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다. 아이의 시선으로 어른들의 세계에 대해 보고 들으며 이해하는 이야기는 어린 시절에 읽었을 때와 현재 어른이 된 다음에 읽었을 때의 감동이 확실히 다르다. 그래서 좋은 책은 십 년, 이십 년의 터울을 두고 한번씩 다시 읽어봐야 하는 것 같다. 스카웃이 첫날 수업에서 알파벳을 읽어 나가자, 어린 그녀가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게 못마땅했던 캐럴라인 선생님이 아빠에게 앞으로 더 이상 스카웃을 가르치지 말라고 전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스카웃의 아빠는 그녀에게 글을 가르쳐준 적이 없었고, 젬 오빠 말로는 그녀가 태어날 때부터 글을 읽었다는 이야기를 선생님에게 하자 그 말을 믿지 않고, 아빠는 가르치는 방법을 잘 모르고 계신다며 뜬구름 잡는 망상은 그만하라고 한다. 그게 속상했던 스카웃은 집에 돌아가 아빠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말하며 자신을 더 이상 학교에 보내지 말아달라고 한다. 그러자 아빠는 스카웃에게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를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초등학교 시절의 내가 기억하기로, 나는 이 대목에서 스카웃의 아빠가 멋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체 왜 아빠가 선생님 편을 드는 걸까. 싶었고, 스카웃의 불평을 아빠가 그냥 어른처럼 대한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 이 대목을 다시 읽어보니 스카웃의 아빠가 얼마나 현명한 사람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사실 어른이 되어서도 쉽지 않은 일인데, 그걸 어린 딸에게 진지하게 설명하는 모습이 너무도 멋지게 보였다.

"너희 아빠 말씀이 옳아." 아줌마가 말씀하셨습니다. "앵무새들은 인간을 위해 노래를 불러 줄 뿐이지. 사람들의 채소밭에서 뭘 따 먹지도 않고, 옥수수 창고에 둥지를 틀지도 않고, 우리를 위해 마음을 열어 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어. 그래서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되는 거야."

억울하게 강간범으로 몰린 흑인을 스카웃의 아버지가 변호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법정 공방 또한 다시 읽어봐도 매우 흥미로웠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이 부분 때문에 법정 드라마에 관심이 많이 생겨서 관련 책들을 찾아보곤 했었다. 물론 당시에는 인종차별이니, 흑백갈등이니 하는 건 잘 몰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편견에 맞서는 용기와 자신이 믿고자 하는 걸 꿋꿋하게 밀어 붙이는 신념이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그녀는 아무런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온 우리 사회의 엄격한 규범을 깨뜨렸을 뿐입니다. 그 규범은 너무 엄격하여 누구든지 그것을 깨뜨리면 우리와 함께 살기에 부적합한 인물로 추방당합니다."

"배심원 여러분은 진실을 알고 계십니다. 그 진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흑인은 거짓말을 하고, 또 어떤 흑인은 부도덕하며, 또 어떤 흑인에게는 여자를-백인이건 흑인이건 말이지요-옆에 맡겨 둘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류 전체에 해당하는 진리이지 어느 특정한 인종에만 적용되는 진리는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만들어진 것인가. 사법 제도라는 것은 과연 정의의 심판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책을 읽어나갈 수록 어린 시절의 기억이 고스란히 떠오르면서 묘한 향수에 빠지기도, 당시에 내가 느꼈던 감정적인 울림도, 그리고 어른이 된 내가 새롭게 깨닫게 되는 감동들도 파도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런 게 바로 진정한 고전이 아닐까 싶다. 내 아이가 자라면 꼭 읽어보게 하고 싶은 책 중에 단연코 선두에 놓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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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7-08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가 다문화사회가 될수록 인종을 차별하는 인식이 생겨나고 있어요. 여전히 흑인에 대한 편견이 남아있기도 하죠. 하퍼 리의 소설을 아이에게 권하는 피오나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

피오나 2015-07-09 11:01   좋아요 0 | URL
맞아요.다문화사회가되면서우리나라도좀그렇죠.편견이란참무서운거같아요.아이가읽으면서저처럼좋다고느끼면금상첨화일텐데요ㅋㅋ

곰곰생각하는발 2015-07-24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에게 권하면 정말 좋은 소설이죠. 소설 자체가 무척 재미있기도 하고... 제가 알기로는 모범적인 플롯으로 이 소설을 뽑고는 하더군요....

피오나 2015-07-25 19:27   좋아요 0 | URL
오..그렇군요ㅎㅎ 모범적인 플롯으로 꼽히는 책인줄은 몰랐네요^^
 
셜록 홈즈 : 모리어티의 죽음 앤터니 호로비츠 셜록 홈즈
앤터니 호로비츠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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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캐릭터의 시대이다. 올해 말에 크리스마스 특별판이 방송될 BBC의 셜록 시리즈를 떠올려보자.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19세기 명탐정 셜록 홈스를 21세기로 멋지게 소환해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탐정 캐릭터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TV와 영화를 통해서 셜록을 연기했던 수많은 배우들이 모두 다 이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아니란 걸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70여명의 배우들이 연기했던 셜록 홈스와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셜록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가장 큰 매력은 프록코트를 입고 스마트 폰, 노트북 등 디지털 기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엄청나게 빠른 말투로 자신의 생각을 쏟아내 상대방의 혼을 쏙 빼놓는, 이른바 소시오 패스라는 21세기형 캐릭터라는 점일 것이다. 배우가 가지고 있는 외모적인 개성마저도 정서적으로 코난 도일의 원작 속의 홈즈 처럼 느껴지게 만들 정도이니 말이다. 이렇게 잘 구축된 캐릭터는 스토리를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동일한 상황이라도 인물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기 때문에, 플롯은 주로 인물에 의존하게 된다. 따라서 인물이야말로 작품의 인기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키포인트이고,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그 누구도 절대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캐릭터가 바로 셜록 홈즈이다.

"셜록 홈즈를 만난 적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경감님은 직접 만난 적 있으신가요?"

".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놀랍게도 내 질문에 기분 나빠하는 눈치였다. 만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 유명한 탐정의 열렬한, 심지어 광적인 팬처럼 느껴질 정도였는데 뜻밖이었다. "사실은 세 번 만난 적 있죠." 그는 말을 잇다 말고, 계속해도 좋을지 고민하는 사람처럼 잠깐 멈추었다.

그 유명한 셜록 홈즈가 TV와 영화에서처럼 단순히 리바이벌 되는 게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로 다시 나타난다면 어떨까. 전세계의 수많은 셜로키언들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마저 깜짤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코넌 도일이 없는데, 대체 새로운 이야기를 어떻게 만든다는 말인가. 영국 작가 앤터니 호로비츠는 코넌 도일의 직계 후손이 운영하는 아서 코넌 도일 재단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홈즈 작가이다. 17살 때 셜록 홈즈 작품집을 읽고서 범죄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하니, 일단 기본적으로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나 충성심은 깔고 시작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가 쓴 <셜록 홈즈-실크 하우스의 비밀>은 무려 8년간의 방대한 자료 조사와 집필 기간을 거쳐 만들어졌기에 코넌 도일의 원작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거의 고...히 살려냈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이번 작품 <셜록 홈즈-모리어티의 죽음>에 대한 기대치는 높아질 수밖에 없다. 정말 코넌 도일이 살아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서 셜록 홈즈 시리즈의 새 작품이 발표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번 작품은 <마지막 사건> 이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원래 코넌 도일이 홈즈가 모리어티와 라이헨바흐 폭포에서 맞대결한 끝에 추락사하는 것으로 시리즈를 끝내려고 했던 바로 그 작품 말이다. 물론 독자들의 원성으로 셜록 홈즈는 이후에 다시 등장하지만 말이다.

셜록 홈즈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경찰 소관이라 그러면 안 되는데 문을 부수고 들어왔더군요. 그 위대한 탐정을 가까이서 본 것도, 수사에 나선 그의 모습을 제대로 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도착해 보니 벌써 수사를 시작했더군요. 뭐 어쩌겠습니까. 그는 내 기억보다 키가 컸고 심미적인 관점에서 일부러 굶은 사람처럼 비쩍 말랐더군요. 그래서 턱과 광대뼈, 무엇보다 무엇을 보든 그 안에 들어 있는 정보를 죄다 벗겨낼 것만 같은 눈이 인상적이었죠. 다른 사람한테서는 접한 적 없는 에너지, 가만히 있지 못하는 그런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몸놀림은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었어요. 허투루 흘려보낼 시간이 없다는 분위기를 풍겼죠.

홈즈와 모리어티의 맞대결 이후 닷새가 지난 뒤 라이헨바흐를 찾아가는 체이스의 이야기로 이 작품은 시작한다. 프레더릭 체이스는 미국 핑커턴 탐정 사무소 소속으로 모리어티 교수의 소재를 파악하려고 영국으로 갔다가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스위스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는 사건의 경위를 알기 위해 찾아간 스위스 산중턱의 경찰서에서 런던 경시청의 애설니 존스 경감을 만나게 된다. 재미있는 건 체이스와 존스의 첫 만남은 마치 홈즈와 왓슨의 만남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들의 첫 만남이 어떻게 묘사되어 있기에 홈즈와 왓슨 처럼 보일지는 직접 읽어보아야 한다. 정말로 셜록 홈즈가 다시 살아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기시감이 드는 순간은 이들의 첫 만남 이후에도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존스가 셜록처럼, 체이스가 왓슨처럼 여겨지는 이 구도는 작품의 후반부에 가서 밝혀지지만 특별한 그들만의 사정이 숨겨져 있다. 그저 셜록 시리즈를 따라 하기 위해서 주인공 두 명의 구도를 이렇게 설정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주인공인 애설니 존스 경감은 <네 사람의 서명>에 등장했었던 인물이고, 체이스가 소속되어 있는 핑커턴 탐정 사무소 역시 <공포의 계곡>에서 언급된 적이 있다는 것. 작가인 호로비츠가 인터뷰에서 "코넌 도일이 하지 않았을 법한 일은 나도 할 생각이 없다. 나는 셜록 홈즈는 내게 속한 존재가 아니라, 그와 그가 등장하는 책을 사랑하는 수백만 명의 전 세계 팬들에게 속한 존재라고 끊임없이 되뇌었다."라고 한 것처럼 그는 기존에 너무도 탄탄하게 구축된 캐릭터를 전.. 훼손시키지 않고, 그래서 셜로키언들의 분노를 사거나 그들을 정말 실망시키지 않고도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의문이 들 것이다. 존스와 체이스가 주인공이라면, 홈즈와 모리어티가 죽은 다음에 이야기가 시작되는 거라면, 그렇다면 대체 이 작품에서 셜록 홈즈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제목에도 셜록 홈즈의 이름이 떡 하니 자리잡고 있는데 말이다. 실제로 홈즈가 이 작품에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치 홈즈가 작품을 읽는 내내 등장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셜록 홈즈는 이 작품 속에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이 작품의 미스터리는 이것 뿐만이 아니다. 기존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 익히 보았던 암호문 해독이나 살인 트릭, 거짓 단서 등 고전 추리소설의 냄새를 폴폴 풍기는데도 불구하고, 스토리는 너무도 현대적이어서 BBC의 드라마 '셜록'처럼 감각적이고, 세련되고, 긴장감 넘치고, 매력적인 반전과 화려한 스케일을 자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존스와 체이스 이 두 콤비의 다음 시리즈를 또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혹시 당신이 전작인 <실크 하우스의 비밀>을 읽지 않았다면, 거의 무조건 <모리어티의 죽음> 책장을 덮자마자 전작을 구매하게 될 거라는 사실도 미리 밝혀둔다. 호로비츠는 진정한 셜로키언이자, 대단한 작가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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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를 사랑하는 방법
헤일리 태너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마음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들과 그 사람에게 일어났었던 일들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마음을 나눈다는 것보다 더 따듯한 말이 또 있을까 싶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믿는 것은 내가 그 혹은 그녀와 마음이 통해 그것을 나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타인이 서로의 마음을 백 퍼센트 이해하거나 공감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믿는 많은 것들.. 그러니까 그 사람의 생김새, 생일, 연락처, 취향, 습관 등등이 그 사람의 전부는 될 수 없으니 말이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고 저 사람이 내가 알고 있던 사람이 맞나 싶어 상처를 받게 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한번쯤 찾아온다. 아마도 그래서 사랑에 빠지는 걸 상대에게 눈이 머는 거라고 비유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빠진 연인에게는 가족도, 친구도, 심지어 세상 조차 절대 간섭할 수 없는 영역이 구축된다. 단어 그대로 '이 세상에 단둘밖에 없는 것 같다'는 느낌을 겪게 되는 그런 순간이 오면, 그 비현실적인 경험이 마법의 주문이 되어 영원히 함께 할거라는 착각에 눈이 멀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바츨라프와 레나 또한 그런 순간을 맞이한다. 바츨라프가 레나를 두 팔로 들어 올리고, 레나가 그를 올려다보며 웃음 짓던 바로 그 순간에 시간이 잠시 그들에게 멈추어 버렸으니 말이다. 그렇게 때로는 그저 손을 맞잡기만 해도 너무 벅차서 감당이 안 되는 상대를 만나게 되는 법이다.

바츨라프와 레나는 곧장 라시아에게 돌아갔다. 미리 약속한 것도 아닌데 둘은 서커스를 봤다는 말을 라시아에게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경험은 비밀로 해야 하는 법이다. 너무나 소중한 경험이라서 섣불리 꺼냈다가 누가 나쁜 말을 하거나 비웃기라도 하면 심하게 상처받을  테니까. 게다가 서커스는 사실 놀이기구가 아니니 바츨라프는 정확히 엄마가 하라는 대로 행동하지 않은 셈이었다. 그러므로 엄마에게 혼나지 않으려면 비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바츨라프가 10, 레나가 9살일 때, 그들은 처음 만나게 된다.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많은 이들이 그렇듯, 이들의 만남 또한 어른들 사이의 친분으로 건너건너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들이 그날 함께 갔던 놀이공원에서 우연히 서커스를 지나다가 난생처음으로 마술이라는 걸 보게 된다. 그것은 순진하고, 호기심 가득했던 두 소년, 소녀의 마음을 완전히 빼앗아버릴 만큼 강렬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모든 것이 달라진다. 이들의 인연 또한 바로 그 매혹적인 경험 때문에 더욱 간절해지고, 돈독해졌을 지도 모른다고 해도 좋을 만큼 말이다.

첫사랑.이라고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풋사랑은 대부분 유치하다고 무시하거나, 너무 어려서 잘 생각도 나지 않는다며 잊어버리기 일쑤이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의 내가 알고 있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린 시절의 그 풋풋하고 두근거렸던 그 마음과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다. 나도 바츨라프와 레나처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가 있었다. 나보다 한 두 살 위의 오빠였는데, 바로 옆집에 살았고, 부모들끼리 너무 가까웠고, 아주 어릴 때부터 허물없이 거의 모든 걸 공유했던 사이였다. 물론 사소한 오해로 마음이 멀어지고, 이사를 가게 된 뒤로는 연락도 끊어져서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어린 시절에는 지금 생각해보면 어리석고, 이기적인 마음들이 그 당시의 우리에겐 세상이 무너질 만큼의 무게였었으니 어쩔 수 없었기도 했지만, 그 뒤로 나이를 먹어가면서 만나게 되는 많은 관계들은 사실상 내가 처음 맺게 된 그 시절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재미있기도 하고, 씁슬하기도 하고 그렇다.

암기한 공식들을 공책에 적으며 자가 테스트를 하는 동안, 바츨라프는 자꾸만 레나가 생각난다. 당장 방에 들어가서 혼자 레나 생각에 몰두하고 싶다. 무척 설레는 기분이다. 재미있는 추리소설을 읽을 때와 비슷하다. 일상생활에 집중이 통 안 되고, 미스터리가 어떻게 풀리는지 어서 알아내고 싶고, 온종일 오로지 그 책에만 파묻혀 있고 싶을 때처럼.

사랑으로 가득 찬 이 책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등장인물들이었다. 알콩 달콩, 풋풋하고, 설레이고, 두근거리는 바츨라프와 레나의 에피소드만큼이나 마음에 들었던 장면은 바츨라프의 엄마인 라시아가 레나를 대하는 마음이었다. 함께 사는 이모는 레나에게 거의 아무런 관심도, 보살핌도 주지 않고 방치했기 때문에 라시아가 레나를 집까지 데려다 주고, 자는 걸 지켜봐 주곤 했다. 라이나는 그날도 잠든 레나를 가만히 지켜보다 일어나서 조용조용 불을 끄고 방을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부엌 싱크대에 초파리가 들끓고 잔뜩 쌓여 있는 설거짓거리들을 보게 된 것이다. 그녀는 레나가 한밤중에 목말라서 깨기라도 하면 물을 따라 마실 컵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릇들을 남김없이 씻고, 수챗구멍에 박힌 꽁초들을 버리고, 싱크대가 윤이 나도록 닦아낸다. 그렇게 부엌은 깨끗해졌지만, 레나가 한밤중에 일어나 부엌으로 나오다가 바닥에 널린 옷가지에 발을 헛디디지는 않을까, 넘어지다 무릎을 탁자에 찧으면 어쩌나 또 걱정스러워 재떨이를 비우고, 옷들을 한아름 주워 들고, 빈 병들을 버리고, 종이컵, 콜라 캔 등을 전부 버리고 치운다. , 나는 이 장면이 어찌나 뭉클하던지, 라이나는 어쩜 이런 마음을 갖고 있을까 싶어 가슴이 먹먹해지고 말았다. 엄마, 아빠도 없이 낯선 이국 땅에서 영어를 제대로 하지 못해 늘 주눅들어 있던 레나였지만, 하지만 그녀 뒤에 이렇게 그녀를 아끼는 라이나 아주머니가 있었던 것이 너무도 따스하고 고맙게 느껴졌다. 마치 내가 레나의 보호자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바츨라프가 레나의 숙제를 대신해줄 때, 빨리 끝내버리고 마술 연습을 하고 싶었던 바츨라프는 이렇게 생각한다.

레나가 원하는 것은 바츨라프가 원하는 것이니까.

두 사람은 나머지 없이 딱 떨어지는 바츨레나여야 하니까.

이런 게 바로 사랑 아닐까. 네가 나를 더 좋아하기 때문에 내가 너를 덜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내가 너를 덜 좋아해서 네가 나를 더 좋아하는 건지, 어느 쪽이 먼저인지, 애초에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이라는 게 오롯이 자신만의 마음이 아니라 상대의 감정에 영향을 받기도 하는 건지. 원래 다들 그렇게 연애를 한다고 쳐도. 그렇지만 우리에게도 한때 이렇게 순수하고, 절박하고, 바라는 것 없이 다 해주고 싶고, 그저 쳐다 만 봐도 설레 이던 시절이 있었단 말이다. 나의 마음은 이 책을 읽는 내내 열두 살 어린 시절의 내가 되어 있었다. 부끄럼 많이 타는 소심한 소녀였지만, 좋아하는 오빠와 단둘이 있을 때는 먼저 손을 내밀 수도 있었던 순수하고, 용기 있었던 그 시절의 나로 말이다.

, 바츨라프와 레나가 그래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는지가 궁금하다면 책을 직접 읽어보아야 한다. 이들이 어떤 위기를 겪고,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하고, 어떤 상처를 받고 극복하는지에 대한 줄거리는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들의 '마음'이다. 이 책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면서, 바츨라프가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돌이킬 수 없는 거짓말을 하게 되는 그 과정이 바로 그가 레나를 사랑하는 방법이니 말이다. 가끔은 속고 싶은 거짓말도 필요한 법이다. 당신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해본 적이 있다면 아마도 공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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