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의 제자들 밀리언셀러 클럽 140
이노우에 유메히토 지음, 김아영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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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특정 장르의 책을 많이 읽다 보면 어느 정도는 내용의 전개가 짐작이 되는 경우가 많다. 소재와 간단한 플롯 정도만 알아도, 혹은 첫 문장을 읽거나, 첫 단락만 지나가도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은 전..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는 이야기를 따라 잡느라 두툼한 두께의 페이지가 언제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후다닥 읽어버린 것 같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내용을 전혀 짐작할 수 없는 독특한 제목과 바이러스라는 소재 덕분에 과학 소설처럼 이야기가 풀어지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웬걸 스릴러였다가, SF였다가, 호러 처럼 느껴지는 장면도 있고, 막판에는 액션 스릴러처럼 보이기도 했다. 신종 바이러스, 전염병으로 인한 공포 등은 기존에 다른 작품에서도 만날 수 있었던 장치이다. 그런데 이노우에 유메히토는 이것을 가지고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말 그대로 기발한 상상력, 그리고 넘치는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너무도 매력적인 작품이

애당초 교스케는 초자연 현상이니 초능력 따위와는 관련 없이 살아왔다. 불가사의한 일은 이 세상에 엄청 많다. 평범하게 생각하면 당장 믿을 수 없는 일이 때론 벌어지곤 한다.

하지만 그런 불가사의한 일을 단순히 ''라든가 ''이라는 단어를 붙여 결론짓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저 그래서야 사태를 피하기만 하는 게 아닌가. 설명이 안 되는 걸 전부 한 상자 속에 던져 넣는 셈이었다....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걸 직면하면 자신들을 넘어선 존재나 힘을 탓한다. 그건 결국 회피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여기에 오고 나서 그런 불가해한 일이 자기 몸에서 벌어져 버렸다.

주간지 기자인 나카야 교스케는 대학병원에서 원내감염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취재를 하려 하지만, 시설 내 통행허가증이 있어야만 출입할 수 있다며 길은 막혀 있고, 병원은 완전히 봉쇄된 상태이다. 주변에 몰린 보도차량의 수도 엄청났고, 노란색 가드펜스가 도로를 가로 질러 세워져 있고, 흰 방호복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병원 사이를 오가고 있는 등 마치 SF 영화의 한 장면이라도 보고 있는 듯 현실감이 없는 모습에 당황한다. 현재 격리된 류오 대학병원에는 환자, 방문객, 의사, 간호사 등 약 450명이 있고,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16명으로 늘어난 상황이다. 그는 병원에 들어갈 수 없으니 뭐라도 기삿거리를 찾기 위해 시청으로 향하는데 그곳에서 의대생 약혼자와 연락이 두절되어 걱정하던 메구미라는 여성을 알게 되고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런데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쪽으로 급변한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던 병원으로, 본의 아니게 들어가게 된 것이다. 바이러스 연구소의 연구생이던 약혼자 고바타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 메구미에게서 열이 나고, 빨갛게 부풀어 오른 발진, 기침 등의 증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응급차를 호출하고, 카페에 다른 손님이 없었기에 카페 주인과 교스케, 메구미 세 명은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중 카페 주인은 이틀 후에 사망해버린다. 이후 교스케는 열흘 동안 의식불명상태가 된다. 그로부터 두 달 동안 감염으로 인한 사망자는 372명에 달했고, 어느 정도 유효한 백신이 만들어져 사망률을 조금 낮추고, 세간에서는 이 신종 전염병을 '용뇌염'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그 근저에는 자신이 믿어 온 상식이 뒤집히는 것에 대한 공포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초능력 같은 건 거짓말, 우화일 뿐이라는 상식 말입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초능력에 대해서는 저희도 상식파였죠. 절대로 믿을 수 없다고.... 아니, 그런 바보 같은 얘기엔 관여하고 싶지도 않았죠.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나카야 씨와 연결이 되면서 어쩔 수 없이 저도 초능력과 관계되는 게 생기고 말았습니다.

신종 바이러스의 출현, 그로 인한 전염병 사태는 금방 진정이 되지만, 진짜 문제는 그 이후였다. 초기 감염자 중에 의식이 돌아온 것은 교스케와 메구미, 그리고 메구미와 고바타가 병문안을 했던 노인 오키쓰, 이렇게 세 사람이었는데 문제는 이후 그들에게 나타나는 말도 안 되는 증상들이었다. 우선 93세의 오키쓰는 의사소통도 잘 안 되던 노망난 노인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이가 실감 나지 않는 활기찬 할아버지로, 게다가 외모가 하루가 다르게 점점 젊어지고 있었다. 교스케는 갑자기 환각을 보기 시작했고, 메구미는 물체를 움직일 수 있게 하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회춘, 예지력, 염력이라는 초능력을 가지게 된 이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세상과 소통하려 매스컴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지만 예상치 못한 사고는 비극으로 이어지고 이야기는 점점 엄청난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간다.

바이러스라는 소재와 '마법사의 제자들'이라는 제목이 잘 매칭되지 않아 읽기 전부터 더욱 궁금했었는데, 책을 다 읽고 나서 제목이 만들어진 계기를 들으니 꽤나 그럴 듯하고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프랑스 작곡가 폴 뒤카의 교향시 '마법사의 제자들'에서 따온 제목이라고 하는데, 마법사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의 제자가 어설픈 마법으로 물바다 소동을 일으키고 만다는 내용이 바이러스로 인한 전염병이 세상을 초토화시키고, 이후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초능력이 등장해 더욱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책의 내용과 기묘하게 부합되어 제목의 특별함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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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드런 액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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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법원 가사부 판사 피오나 메이는 35년 동안 한눈 한번 판 적 없던 남편에게 충격적인 말을 듣는다. 여전히 피오나를 사랑하지만, 일에만 신경 쓰느라 성생활 없는 그녀와의 관계에 지쳤다며 죽기 전에 흥분으로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연애를 해보겠다고 말이다. 그들에게 아이는 없지만 그래도 서로 믿고 살아왔다고 생각했었기에 그녀는 충격이 크다. 피오나의 나이 59, 수많은 부부간의 갈등을 재판해왔지만, 그녀 자신이 그런 갈등을 겪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오나는 동료 판사들 사이에서 찬탄의 대상일 정도로 업무적으로는 완벽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남편과의 관계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오죽 하면 남편이 "피오나, 우리가 마지막으로 잠자리를 한 게 언제지?"라고 물었을까. 그녀는 생각한다. 언제였을까? 그제야 기억난다. 남편은 이전에도 같은 질문을 했었다는 걸. 처량하게 묻기도 했고 따지듯 묻기도 했었다. 오랜 시간 타인의 가정사를 들여다보고 조언하고, 판단하고, 결정했던 그녀가 그들과 하나 다를 것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자 그녀는 당혹스럽기만 하다. 그렇게 그녀가 수십 년 동안 지탱해온 결혼생활의 위기를 맞을 그 즈음, 한 소년의 생사가 걸린 재판을 맡게 된다.

"난 우리가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아. 안 그래?"

"떠나는 사람은 당신이야."

"우리 결혼을 깨트리려는 건 내가 아니야."

"그건 당신 말이지."

18세가 되기까지 3개월이 채 남지 않은, 17세 소년이 백혈병에 걸려 긴급 수혈을 해야 하는데 아이와 부모가 동의를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유는 아이와 그의 부모가 여호와의 증인이고, 혈액제제를 몸 안으로 받아 들이는 것은 그들의 신앙에 위배되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재 상황은 수혈을 할 경우 생존 가능성이 아주 높아지고, 수혈을 하지 않으면 죽을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 문제는 죽음의 방식이다. 내출혈이 일어날 수도 있고, 신부전의 가능성도 있고, 시력을 잃거나 뇌졸중을 일으키거나 합병증으로 무수한 신경질환을 앓을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끔찍한 죽음이 되리라는 사실뿐. 당연히 병원에서는 왜 수혈을 하지 않아 환자를 잃을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서 병원 측은 본인과 가족의 의사에 반해 적법한 절차로 수혈할 수 있도록 법원명령을 신청하게 된 것이다.

의료 선택의 자유는 성인의 기본적 인권이지만, 문제는 애덤이 아직 법률상 성인이 아니라는 데 있다. 물론 3개월만 지나면 18세로 법률상 성인이 되지만, 아이의 견해가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부모의 견해가 아닌지, 사이비 종교집단의 교리를 근거로 수혈에 반대하는 것이 자신의 견해가 맞는지 사람들은 의심할 수밖에 없다. 내일까지 수혈을 못 하면 매우 위험한 상태로 접어들 수밖에 없고, 피오나는 양측의 공방과 부모의 입장 만으로는 이 특별한 상황에 대해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해 직접 애덤을 만나보기로 결정한다. 자신의 상황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병원의 청구를 기각하는 판결을 내릴 경우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기로 말이다. 피오나는 애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 마땅히 존중 받아야 할 신앙과, 치료를 거부할 권리에 내포된 개인의 존엄성보다 더 소중한 것이 생명이라고 판단하고, 그를 살릴 수 있도록 수혈을 통해 치료하는 것이 적법하다는 판결을 내린다. 극중 피오나가 읽어내는 판결문은 너무도 정확하면서 아름다워 페이지를 읽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케이크를 먹고도 계속 가지고 있을 수는 없다. 이 속담을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알겠어요. 우리 경우에는 케이크를 먹어버렸는데도 아직도 손에 케이크가 있는 거예요. 부모님은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랐고, 장로님들 말에도 순종했고, 옳은 일은 모두 했으니까 지상낙원에 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게다가 동시에 아들도 살렸잖아요. 가족 누구도 회중에서 이탈하지 않았고 말이에요. 수혈을 받긴 했는데 우리 잘못은 아닌 거죠! 판사를 비난하고, 하느님을 믿지 않는 체제를 비난하고, 우리가 가끔 '세상'이라고 부르는 것을 비난하라는 거죠. 이런 구제방법이 있었다니! 아들이 죽어야 한다고 말했는데도 아들을 살릴 수 있었던 거예요. 그 아들이 바로 케이크인 거고요!

, 이 작품이 정말 흥미로운 건 여기까지가 작품의 중반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피오나의 판결로 애덤이 수혈을 받게 되어 건강을 회복하고, 가족들이 의외로 아들이 회복되는 모습에 기뻐하게 되는 것까지 말이다. 중요한 이야기는 이미 다 나와 버렸고, 그에 대한 판결까지 내려졌다. 그런데 피오나가 애덤을 살리는 판결을 하고 난 뒤, 상황은 전.. 예상 밖의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이어지는 작품의 후반부에 진짜 이야기가 들어 있다.

누구에게나 삶이 낯설어지는 순간이 오게 마련이다. 때로는 우리가 믿고 살아왔던 것들의 기준이 무너져 내리기도 하고, 정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게 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기도 한다. 내가 모조리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어느 순간 타인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내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라고 자신했던 바로 그곳에서 함정에 빠져버리기도 하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이다. 전반부의 보여지는 종교의 법의 충돌, 개인의 가치관과 생명의 무게, 그리고 법의 테두리 안에서 판단하기 어려웠던 실제 사례들에 대한 스토리 만으로도 너무 훌륭한 작품이지만, 이언 매큐언의 진정한 장기는 후반부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법이라는 너무도 정..한 테두리 안에서 올바른 판단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 믿으며 살아온 한 여인이 어떻게 낯선 삶 속으로 던져 지게 되는지, 삶이란 매 순간 얼마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인지 보여주는 글은 담담하지만 묵직한 울림을 안겨준다.

몇 해전에 여호와의 증인 신도가 자신의 부인이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었을 때 종교적인 이유로 수혈을 거부해 결국 아내를 죽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이후 남편은 교통사고로 사망했으니 보험사에 보험금을 요구했고, 보험사측은 살 수 있는 환자를 그렇게 죽게 만든 것은 남편의 책임이니 보험금을 줄 수 없다고 하고, 결국 재판까지 갔으나 보험사가 보험금을 줄 필요가 없다고 판결이 났었다. 여러 종교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를 내세우는 이 종교에서는 수혈이 꼭 필요한 경우에도 거부하다 죽는 경우도, 군입대를 거부하다 감옥에 가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종교적 신념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더 엄청난 거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이언 매큐언은 "아동의 양육과 관련한 사안을 판결할 때 (…) 법정은 아동의 복지를 무엇보다 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영국의 아동법과 개인의 자유인 종교적 신념에 관해 매우 치밀하게 잘 짜인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역시 이언 매큐언의 작품은 한 번도 실망 시킨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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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이 아닌 두 남자의 밤
최혁곤 지음 / 시공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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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바야흐로, 일명 바리캉 맨으로 불리는 범인의 연쇄살인사건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 하던 시기였다. 석 달 사이에 젊은 여자 넷이 죽어나갔는데 희생자들의 머리 한 부분이 바리캉으로 밀린 채 발견되어, 일명 바리캉 맨으로 불린다는 어쩐지 다소 우스운(?) 설정의 범인덕분에 사회부 기자들도, 경찰 들도 비상근무에 수사에 애를 먹고 있던 참이었다. 한국기자대상을 수상하고 꽤나 잘나가는 기자인 박희윤에게 어느 날 갑자기 옛 애인으로부터 연락이 온다. 자신을 구해달라고. 게다가 그녀는 지금 얼굴만 봐도 다들 알 만한 인기 탤런트 채연수였다.

농담인 듯

소문 하나에 죽고 사는 연예인이니 경찰에 신고하기는 부담스럽고, 하지만 납치 임에 분명하니 뭔가 조치는 취해야겠고, 박희윤은 세종문화회관 뒷골목의 카페 '이기적인 갈 사장'을 찾아간다. 그곳의 사장 갈호테는 피의자와의 스캔들로 인해 쫓겨난 전직 강력계 형사다. 하지만 그들의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채연수는 얼굴 없는 시체로 발견되고, 이후 바리캉 맨과 채연수, 그리고 박희윤에 대한 루머성 기사로 한동안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가 바리캉 맨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해 결국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만다. 그리고 카페 '이기적인 갈 사장'에서 빈둥거리며 갈호테와 기자 시절 동료이자 후배 홍예리와 함께 수상쩍은 사건, 사고 조사에 뛰어들게 된다.

“그나저나 우리가 이 짓 해서 남는 게 뭐지? 오지랖 넓은 것도 어느 정도라야지. 용감한 시민상 받을 것도 아니고 사립탐정처럼 의뢰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카페는 손님이 없어 망하기 직전인데. 그냥 대책 없이 본능에 막 끌려가는 기분이야.”

문제는 극중 이들의 말처럼, 목숨을 걸고 범인을 쫓고, 수상한 일을 따라다니며 조사하는 것이 사실 별다른 의미가 없는 일이라는 거다. 누군가 그들에게 의뢰한 것도, 그렇다고 전직 기자, 전직 형사의 신분이니 투철한 사명감으로 정의를 밝혀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농담 아닌

표면적인 스토리는 본격 미스터리 물이지만, 실제 진행되는 이야기는 전반적으로 지나치다 싶을 만큼 가볍게 흘러간다. 실없는 농담과 단순한 유머들은 지방경찰청장까지 지내고 퇴직한 갈호테의 전 상사가 너무도 진지하게 사라진 개를 찾아달라고 의뢰를 하는 순간에 이르면 정점이 된다. 아니 무슨 중동의 테러리스트를 쫓다가 하마 영감이 애지중지 키웠던 개 덕식이를 찾는 것까지 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 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린가. 그러니까 의뢰 내용인즉슨, 집 나간 개를 찾아달라는 거였다. 입안의 커피를 뿜을 뻔했다. 화가 끓어올라 귓구멍과 콧구멍에서 압력밥솥 스팀 같은 게 나올 것만 같았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지만 친구 체면을 생각해 함부로 행동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 작품을 그저 농담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것은 이주 노동자 불법체류, 전직 탈레반의 사제폭탄, 등록금 인하와 취업 대책을 촉구하는 대학생 시위 등등 현실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무거운 내용을 진지하게 전달하는 것보다는 가볍게 풀어내는 것이 오히려 사태의 심각성을 두드러지게 보여주기도 하니 말이다. 마지막 종막에 이르면 그 동안 벌어졌던 사건들이 하나 둘 씩 그 연계성을 나타내기 시작하면서, 바리캉 맨과 박희윤 사이에 벌어졌던 사건, 그리고 박희윤의 주변 인물들에게 생겼던 일들이 동기를 가지고 연결되기 시작한다.

농담같은

하지만 여전히 이 작품을 누군가에게 추천해도 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게 만드는 것은 (아마도 작가가 일부러 그런 거겠지만) 이런 대목들 때문이다. <따로 놀던 의문점들이 자기장에 끌리듯 일직선에 모이기 시작했다>, <..한순간 모든 퍼즐 조각들이 빈틈없이 들어맞았다. 차가운 전율이 등줄기를 핥었다> 등등 사건의 해결을 너무 쉽게 '이지 고잉'하려는 대목들 말이다. 흩어져있던 단서들이 하나로 모이면서 퍼즐을 맞추는 것은 이렇게 말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빠져 '읽고 있는' 독자들이 스스로 깨닫게 해야 그 재미가 더 할 텐데 말이다. 어딘가 나사 빠진 것 같은 인물들이 사건 해결을 너무 편하게, 쉽게 해버리니 단편임을 감안한다고 해도 이야기의 깊이는 물론 추리 소설로서의 긴장감이 확실히 떨어지긴 하는 것 같다.

매년 새로 출간되는 미스터리 소설만 이백여 종, 그 중에 반 이상을 읽어대는 추리 소설 마니아인 나에게 이 책에 대한 첫인상은 "대략 난감"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함이라고는 찾아 볼래야 찾아 볼 수 없는 '이상한' 두 캐릭터부터 연작 단편으로 이어지는 스토리 또한 깃털처럼 가볍기 그지 없는데, 설렁설렁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무심코 지나갈 수만은 없는 묵직함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무거워지려고 하면 우리의 주인공 두 캐릭터가 분위기를 또 확 깨버리는 무슨 농담 같은 소설이라고나 할까. 이 무슨 진지하지 않은 추리 소설이란 말인가. 재미있는 건, 읽는 내내 투덜대는 기분으로 이야기를 따라갔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면 이들의 다음 스토리가 궁금해진다는 것이다. 그건 아마도 두 명의 아주 명확한 캐릭터가 작품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명력을 얻기 시작했다는 뜻일 것이다. 장르 소설에서 매력적인 캐릭터야말로 사실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닌가. 그러니 '탐정이 아닌' 이 두 남자가 어떻게 진짜 '탐정'이 되어 가는지 앞으로의 이야기를 고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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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작은 집 인테리어 - 좁은 공간을 효율적이고 센스 있게 활용하는
스미노 케이코, 모리 세이카 지음, 안은희 옮김, 마츠나가 마나부 사진 / 황금부엉이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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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는 우리나라 못지않게 주택난이 심각한 도시라고 한다. 100년이 된 아파트는 기본일 정도로 낡고 오래된 아파드 들도 많아, 파리지앵들은 작고 낡은 집을 아늑하고 개성 있는 공간으로 변신시킨다고. 이 책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지만, 또 가장 복잡한 도시 중 하나인 파리에서 35~75제곱미터 규모의 작은 집에서 살아가는 파리지앵들의 집을 방문해 그들의 재치 넘치는 인테리어 아이디어를 보여주고 있다.

 

 

'좁은 거실에 뭔가 자꾸 장식해봐야 어수선하고 복잡해질 뿐이다' 하는 생각이 드는 것 또한 당연지사. 하지만 그렇다고 벽이나 선반 위에 아무것도 장식하지 않는 썰렁하고 삭막한 집에서 살아간다면 일상생활의 재미도 그만큼 반감될 것이다.

......작은 집이라고 해서 원하는 인테리어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파리의 인테리어 고수들의 아이디어를 참고해 나만의 '작고 예쁜 집 꾸미기'에 도전해보자!

이 책은 작은 집에서도 센스 있고 쾌적하게 살아가기 위한 방법으로 아래의 네 가지 힌트를 제시하고 있다.

1.'좋아하는 것'은 확실하게 고수한다!

2.단번에 완성을 꿈꾸지 말고, 살면서 꾸준히 하나씩 고쳐간다!

3.사용법과 정리 법을 조금만 고민하면 얼마든지 공간을 넓고 예쁘게!

4.작은 집에서 여는 파티로 친밀한 분위기를!

요지는 작은 공간이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에 둘러싸여 있다면 자신만의 개성 넘치는 감각적인 인테리어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작은 집은 아무래도 공간적 제한이 크기 때문에 수납 방법에 대한 아이디어와 주변과의 밸런스, 색상의 조화 등이 매우 중요하다.

 

 

"집이라는 게 생활하면서 조금씩 만들어가는 곳이기 때문에 꾸준히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어요. 처음부터 완벽하게 만들려고 하지 않고, 천천히 공을 들여가면서 꾸미는 것이 재미있어요."

공간의 넓이 별로 실제 파이지앵들의 아파트가 소개 되어 있는데, 대담하게 노란색 벽지를 쓰고 라벤더 컬러 커텐에, 부엌의 식기들은 빨강으로 페인트 칠을 하는 등 방마다 색상에 변화를 줌으로써 집도 있고, 흰색을 베이스로 밝은 느낌을 주는 산뜻한 인테리어를 한 집, 직접 DIY를 통해 방의 구조를 변경하고 부엌과 거실을 연결하며, 바닥도 새로 깔고 벽이랑 천장에 새로 페인트 칠도 하는 등 미니멀 한 취향을 잘 살려 자신에게 꼭 맞는 집을 만들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파리의 인테리어 전문가에게 듣는 작은 집을 센스 있게 연출하는 5가지 포인트도 소개되어 있다.

1.'직선,평면'을 고수하되, '곡선'을 악센트로

2.작은 집이야말로 큰 그림이 제격

3.공간의 확장을 일으키는 '거울'의 매직

4.맞춘 듯 맞추지 않는다

5.벽너머에 넓은 공간을 상상하게 만드는 마법의 틈새

세탁기나 냉장고, 책상 같은 생활용품이 대부분 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으니, 다른 부분도 직선적, 평면적이어야 안정감이 있고 눈에도 예쁘게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약간 큰 거울이 있다면, 거울 속에 비치는 또 다른 공간으로 인해 훨씬 더 넓어 보이는 효과가 있고, 특히나 벽에 슬릿(틈새 공간)을 넣는 방법은 마술처럼 공간 확장효과를 주기도 한다.

좁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데 관심이 많은 신혼 부부라, 작은집 인테리어에 관련된 책들을 여럿 보았다. 집이 막 넓은 편이 아닌데, 서재도 있고, 아이 방도 있고 해서 정말 짐들이 많은 편이기 때문이다. 가끔 영화 같은 데 보면 파리의 아파트들은 작은 집이 많은 편인데도, 참 아기자기하게 가구들이며 배치가 잘 되어 있었던 기억이 난 것이다. 이 책 덕분에 좁은 공간을 좀 더 효율적이고, 나만의 색깔이 드러나는 센스 있는 인테리어를 할 수 있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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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주는 레시피
공지영 지음, 이장미 그림 / 한겨레출판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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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집밥 열풍이 뜨거워졌다. 흰 쌀밥과 정갈하게 차려진 반찬이 나오는 한식당들이 핫 플레이스로 떠오르고, 끼니는 챙기고 살자는 취지의 먹방 프로그램들이 인기를 모아 요리하는 과정 자체에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우리가 먹는 음식에 어떤 재료가 들어가고, 어떤 방식의 조리방법이 쓰이는지 알려면 직접 만드는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이렇게 건강한 생활방식을 추구하려는 킨포크 라이프를 지향하기 시작한 건 어쩌면 점점 삭막해지는 도시의 삶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출근길 지옥철에서 시달리고, 회사에서 상사에게 한 소리 듣고, 내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기획안은 풀리지 않고, 연인은 속을 썩이고, 그렇게 종일 쌓이고 쌓인 스트레스는 퇴근길 지하철에서 사람들에게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면서 극대화가 된다. 그러고 퇴근해봐야 어두운 집에서 나를 반기는 건 아무 것도 없고, 대충 차려서 배를 채우고 거실에 앉아 멍하니 티비를 보고 있노라면 다음날 다가올 출근에 대한 압박으로 답답해지고 말이다. 이럴 때 생각나는 것이 '엄마가 해주는 집밥'이 아닐까. 이상하게 내 입맛에 꼭 맞는, 맵지도, 그렇게 짜지도, 지나치게 달지도 않으면서 조미료 하나 안 들어가도 감칠맛이 돌고, 두 그릇을 먹어도 살이 찌지 않을 것만 같은 포만감을 주는 그럼 엄마 표 밥상 말이다. 그러니 집밥 열풍과 쿡방의 인기의 도착점은 바로 엄마의 집밥이다. 우리는 밥 힘으로 살아가니까.

재료는 시금치야. 싱싱하고 예쁜 시금치 한 단. 약간의 올리브유(없으면 포도씨유나 현미유, 유전자를 조작한 옥수수유 같은 것은 권하지 않아. 이왕이면 몸에 좋은 기름은 한 병쯤 마련해두자. 앞으로도 기름은 계속 쓰일 거거든), 파르메산 치즈 가루, 이렇게.

 

이 책은 소설가 공지영이 매우 간단한 요리법을 상황에 맞춰 딸에게 소개하면서, 엄마로서 자식에 대한 애정과 조언이 가득한 매우 따뜻한 책이다. 물론 레시피 책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간단한 요리법들 투성이지만, 재미있는 건 이 책을 읽다 보면 요리에 관심이 없었던 이들이라도 "맛있겠다, 나도 한번 만들어볼까'하는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 부담 없이 시도해 보고 싶을 만큼 어렵지 않은 요리들이지만, 함께 실린 일러스트를 보면 꽤 그럴 듯해서 이 책은 레시피 북으로서도 괜찮은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화가 머리끝까지 뻗치는 날, 평소에 아무렇지도 않았던 누군가의 옷차림조차 견딜 수 없을 만큼그냥 다 그만두고 막 망가져 버리고 싶은 날, 그런 날 그녀는 <시금치 샐러드>를 만들어 먹어보라고 말한다. 방법은 레시피라고 할 것도 없을 만큼 초간단. 시금치를 깨끗이 씻어 한입에 먹기 좋을 만큼 손으로 뜯고, 올리브유를 그 위에 살살 뿌린 뒤, 마지막으로 파르메산 치즈 가루를 '성질대로' 뿌린다. ! 요리하는 데 5분도 걸리지 않지만, 그 맛만은 여느 레스토랑에서 나온 시저 샐러드 못지 않다. 그리고 이런 날에는 화이트 와인을 함께 마시는 것도 좋다. 샐러드를 다 먹고 나면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라벤더 오일을 로션에 섞어 얼굴과 몸에 바르고, 가장 편한 자세로 누워 오늘의 일기를 써보는 거다. 세상에 지치고 상처 입으며 돌아온 딸에게 이렇게 멋진 해결방법을 제시하는 그녀가, 정말 대단한 엄마처럼 느껴진다.

우선 유기농 브로콜리를 사자. (유기농 제품 비싸. 그러나 유기농 제품을 먹도록 하자. 비싸면 조금만 먹기로 하고. 같은 돈이면 좋은 것을 조금만 먹는 것이 훨씬 더 좋아.) 먹기 좋은 크기로 썬 다음 찌거나 삶아. 유기농일 경우 잘 씻어 냄비에 물 한 숟가락만 넣고 찌면 특유의 영양이 유지되고 색깔이 잘 살아나서 좋아. 만일 유기농이 아니라면 소금을 한 꼬집(엄지, 검지, 장지를 모아 살짝 꼬집듯 집어낸 양) 넣고 물을 넉넉하게 부어 삶자

공지영 작가는 인간의 세포가 6개월마다 모두 바뀌기 때문에 인스턴트 음식에 쌓였던 먼지와 싸구려 기름기, 합성 조미료에 지친 우리의 세포들에게 좋은 것들을 주자며 유기농 재료들을 권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소중하니까. 한 끼를 먹어도 가치 있게 먹을 줄 아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그만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남에게도 딱 그만큼의 존중을 받게 된다면 참 좋을 것 같다.

 

 책에 실린 레시피 중에 탐나는 것은 비프커틀릿이었다. 돈까스보다 훨씬 맛있고, 고급스러운, 그리고 혼자 먹기에도 그럴듯해 보이는 메뉴여서 어쩐지 먹고 나면 든든한 것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커틀릿이라고 해서 손이 많이 가고 귀찮을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우선 조금 두꺼운 불고깃 감이나 구이용 고기를 준비해서, 후추를 치고, 밀가루, 달걀, 빵가루 순으로 입히는데, 작가만의 비장의 무기는 바로 빵가루에 파르메산 치즈 가루를 섞는 거라고. (사실 이건 어떤 쿡방 프로그램에서 모 쉐프님이 이미 알려준 비법 아닌 비법이지만) 구울 때는 버터나 올리브유를 넉넉하게 두르고 튀기는 것이 아니라 전 부치든 지져내면 된다. 생각만 해도 먹음직스러울 것 같다. 이렇게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며 앞으로 수많은 실패와 시련들을 겪어 나가야 할 자식에게 멋진 요리법을 전해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멋진 엄마가 어디 있을까 싶을 만큼 공감이 되고, 마음 따뜻해지는 책이었다. 언젠가 내게도 딸이 생긴다면 꼭 권해주고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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