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속의 산
레이 네일러 지음, 김항나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안드로이드를 만드는 진짜 이유가 뭐지요?" 인터뷰 영상에서 사회자는 미너부도티어-첸 박사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수고를 들여 기계를 인간처럼 만드는 거죠? 그냥 인간을 만들어내는 건 거의 비용이 들지 않잖아요?"

미너부도티어-첸 박사는 대답했다.

"인류가 가장 위대하면서 가장 끔찍한 이유는 바로 이거예요. 우리는 결국, 우리가 해낼 수 있는 일은 반드시 하겠다는 마음을 가졌지요."              p.60~61


베트남의 고립된 군도 꼰다오에는 바다 괴물에 대한 이야기가 전설처럼 오랫동안 전해 내려져 왔다. 원래는 그림자와 갑자기 물에 빠져 죽는 현상과 해안가에 나타나는 형상처럼 아이들을 겁주려는 신화에 가까웠다. 하지만 실제로 불법으로 낚시하던 어부 몇 명과 거북이 알을 밀렵하던 공원 관리자가 한 명이 괴물에게 공격받아 죽는 일이 벌어지고 나서, 이제는 모든 주민이 그 이야기를 믿었다. 섬에 위험한 존재는 바다 괴물 외에도 상어, 창꼬치, 사람... 등 더 많았지만, 바다 괴물은 위험하기만 한 게 아니라 똑똑했다. 목격자에 따르면 그건 물속에서 나타난 게 아니라 해변을 따라 내려왔다. 처음엔 땅에 낮게 붙어 있어 마치 모래 위를 움직이는 얼룩 같았던 그것은 갑자기 팔 끝으로 일어섰다. 움직이는 모습은 문어가 맞았지만, 거의 사람 형체를 하고 사람처럼 움직였던 것이다. 그게 가능한 것일까?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편, 두족류의 지능을 연구하는 하 응유엔 박사는거 대 기업 ‘디아니마’의 의뢰를 받고 그곳에 도착한다. 하 박사는 깊은 밤 해변으로 올라와 두 개의 '팔'로 걸어다니며 조개를 사냥하고, 자신들을 위협하는 인간을 날카로운 조개껍데기 단면으로 찔러 죽이는 문어에 대해 연구한다. 그리고 그들이 인간과 유사한 형태의 문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문어의 언어를 통해 의사소통을 시도한다. 극중 하 응유엔 박사가 집필한 책 <바다는 생각한다>와 앤캐틀러 미너부도티어-첸 박사의 <마인드 건설하기>라는 책의 구절이 각 장 사이마다 인용되어 있는데, 그 내용 또한 대단히 흥미로웠다. 실제로 존재하는 책이라면 구매해서 읽어 보고 싶을 정도로 통찰력 있는 내용들이 담겨 있으니, 서사와 서사 사이에 방점을 찍어 주는 이 인용문들 또한 놓치지 말고 꼼꼼히 읽어 보길 권해주고 싶다. SF 소설을 꽤나 많이 읽어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 작품은 그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 내고 있다. 굉장히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이론을 토대로 쓰여진 데다 담담하게 흘러 가는 서사도 매우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이런 작품이 데뷔작이라니, 그저 감탄 또 감탄하며 읽었다.





"...우리 인간들은 그렇게 행복한 결말로 마무리할 수 있는 종이 아니에요. 절대. 분명 저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는 연약한 작은 사회, 이미 우리가 수 세기 동안 체계적인 거대 산업 규모로 망가뜨리고 있던 해양 생태계의 남은 부분마저 파괴하는 걸로 끝날걸요. 우리는 또 다른 종족들을 쓸어버리겠지요. 게다가 이번에는 자기들끼리 문화를 만들어 살아가고 있는 종족들을 말이에요. 멸종이 아니라 집단 학살이 될 거예요. 그것도 제가 그들이 사는 삶을 이해할 기회를 얻기도 전에 일어날 거라고요......"                p.405


이 작품의 배경은 '인류세' 말기이다. 인류세란 인류로 인한 지구온난화 및 생태계 침범을 특징으로 하는 지질학적 시기를 뜻한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들 중심으로 생각하며 진화해왔고, 해양자원을 착취하고, 환경을 파괴시키며 생존해왔다. 그 결과가 바로 이 작품 속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기존의 국가 개념이 모두 해체된 근미래에서 펼쳐지는 이 이야기는 인간과 문어와 안드로이드라는, 결코 섞일 수 없는 ‘종’들의 관계에 대해 사유하게 만들어 준다.




'과학'을 넘어선 이야기가 현실 세계에 펼쳐진 것 같은 이 소설은 언어에 대해서, 소통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눈부시게 아름다운 이야기로 보여준다. 책표지와 책배에 새겨진 문양들은 극중 문어가 만들어낸 신호이자 일종의 기호 언어이다. 바닷속 깊은 곳을 보여주는 듯한 푸른색 표지의 색감과 실버 컬러 띠지까지 책의 외관 또한 이 작품 속으로 들어가는 매혹적인 입구가 되어 주는 것 같아 인상적이었다. 


최근에 한 과학책을 읽다가 문어에 관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암컷 문어는 대부분 평생 단 한 번 알을 낳고, 그 알들이 부화하고 나면 죽는다고 한다. 그리고 암컷 문어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굶은 상태로 최장 4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알을 끌어안고 보호했다. 문어 알은 다른 생물들에게 귀중한 영양분일테니, 자리를 이탈해 사냥하러 갈 수가 없었던 거다. 오로지 몸에 저장해 둔 에너지로 무려 4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을 희생해 알을 품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실제로 문어는 지능을 가지고 있는 굉장히 똑똑한 생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5억 개의 뉴런 중 일부만 뇌에 있고, 나머지는 8개 다리에 분포되어 각각 다리가 독립적으로 상황을 판단할 수 있어 뛰어난 인지 능력을 가지고 있다. <바닷 속의 산>은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인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고 탐구하는 문어의 세계를 매우 현실적이고 과학적으로 구축해내고 있다. 그래서 SF 소설이 아니라 한 편의 과학 서적을 읽는 듯한 느낌도 들었는데, 덕분에 너무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이렇게 재미있는 과학이라니, 이렇게 생각하는 SF라니... 감탄하면서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바닷속의 산
레이 네일러 지음, 김항나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과학과 철학이 어우러져 탄생한, 세상에 없던 단 하나의 SF!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아이네이스 3 아이네이스 3
베르길리우스 지음, 김남우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때 부친은 아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모두에게 날은 온다. 돌이킬 수 없는 촌음을

모두는 살다 간다. 위업으로 명성을 잇는 건

덕이 일군 결과이니. 트로야의 높은 성벽 아래

신들의 자식들으 숱하게 쓰러졌고, 심지어

내 아들 살페돈도 쓰러졌다. 투르눗도 그의

운명이 그를 부르리니. 삶의 끝에 이르리라」             -제10권, 중에서, p.78


단테는 <신곡>에서 베르길리우스와 베아트리체의 안내를 받아 사후 세계인 지옥, 연옥, 천국을 여행했다. 단테는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를 유별나게 존경하는 걸로도 유명한데, 그래서 자신의 작품 <아이네이스> 속에서 안내자로 삼았던 것이다. 로마 최고의 시인이라 불리는 베르길리우스의 대표작은 전체 12권으로 이루어져 있는 서사시 <아이네이스>이다. 로마 건국의 역사와 신화를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오뒷세이아>와 더불어 서양 정신의 원류를 형성한 대표적인 고전이다.



김남우 번역으로 열린책들에서 출간된 버전은 전체 12권을 삼분하여 마치 삼부작처럼, 세 권으로 나누어 나왔다. 1권부터 4권까지가 <아이네이스 1>, 5권부터 8권까지가 <아이네이스 2>, 그리고 이번에 출간된 <아이네이스 3>에서는 9권부터 12권까지 묶었다. 


베르길리우스는 기원전 29년부터 기원전 19년 죽을 때까지 꼬박 11년을 <아이네이스>에 매달렸다. 생의 마지막 3년은 원고를 들고 배경이 되는 희랍과 아시아를 돌아보기도 했는데, 이탈리아로 돌아오는 길에 열병에 걸려 끝내 이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미완성으로 남기게 된다. 그의 유고는 아우구스투스의 뜻에 따라 편집되어 세상의 빛을 보았다. 전승에 따르면 베르길리우스는 우선 산문으로 글을 완성하고 12권으로 이를 나눈 다음 장면별로 운문으로 바꾸어 갔는데, 당장 완성할 수 없었던 부분은 그대로 놓아두고 다음 부분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렇게 <아이네아스>에는 58개의 미완성 시행이 남아 있으며, 이것이 미완성의 흔적을 보여 주는 부분들이다.




그런 이후에 아버지는 다른 일을 궁리한다.

유투나를 동생의 전쟁에서 떼어 내려 한다.

전하는바, 복수 여신이라 불린 쌍둥이 재앙과

저승의 메게라를 섬뜩한 밤의 여신이 한날

한시에 낳았고 이들에게 똑같이 똬리 튼 뱀을

감아 주고 폭풍의 날개를 달아 주었다 한다.

신들의 왕이 가공할 죽음과 질병을 도모하고

전란을 당해 마땅한 도시를 위협할 때마다

이들은 유피테르의 권좌, 잔인한 왕의 문턱을 

지키며 고통의 인간에게 공포를 일깨웠다.              - '제12권' 중에서, p.203


이 책을 옮긴 김남우 역자는 로마 문학 박사로, 라티움어(라틴어) 원전을 직접 번역했다. <아이네이스>는 그가 12년간 치열하게 연구하며 번역한 대망의 결실이기도 하다. 라티움어로 된 원문 시행이 <여섯 걸음 운율>의 18음절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를 우리말에서 최대한 가깝게 구현하기 위해 각 행을 18자 이내로 옮기는 <18자역>으로 구성했다고 한다. 원전을 충실히 살릴 수 있도록 원문의 행과 번역문의 행을 일치시켜 옮기고자 각별히 노력했으며, 페이지마다 상세한 각주를 달아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했다.


'서사시'라는 장르가 일정한 운율과 리듬을 지닌 운문의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에, 입으로 읊을 때 가장 큰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줄바꿈이 거의 없이 빽빽하게 이어져 있는 글이라 집중하기 어려운 부분이 확실히 있었는데, 소리 내어 읽으면 특유의 리듬감이 살아나면서 확실히 몰입이 잘 되었다. 



트로이가 멸망하고 도시를 빠져나온 아이네아스 일행은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떠난다. 선조들의 땅이 이탈리아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탈리아로 향하는데 폭풍을 만나 카르타고에 난파한다. 이후 7년간의 방랑 끝에 아이네아스 일행은 이탈리아의 쿠마이에 상륙하고, 운명으로 정해진 목적지 이탈리아의 티베리스강 하구에 도착한다. 이어 투르누스와 라티움 사람들이 합세해 전쟁이 시작되는데, 이번에 출간된 마지막 3권에서 본격적인 이탈리아 전투를 다루고 있다. 아이네아스의 용맹무쌍함이 펼쳐지고, 아이네아스와 누르누스의 맞대결로 장대한 서사가 마무리된다. 


세 권의 책이 각각 이백 오십 페이지 정도로 나뉘어 나왔기 때문에 분량 자체가 많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일반적인 줄글에 익숙한 독자로서 수월하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은 아니었다. 하지만 트로이아의 영웅 아이네아스의 로마 건국 과정과 신화를 그리고 있는 이 서사시는 위대한 고전만이 줄 수 있는 묵직한 잔상을 남겨 준다. 분명 내용은 어렵지만 어떤 페이지는 각주가 본문보다 길어질 정도로 꼼꼼하게 독자들이 방향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가이드가 되어 주고, 각권의 마지막에 수록된 역자 해설 또한 작품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어 준다. 전례 없는 라티움어 원전 완역본으로 만나는 베르길리우스의 대서사시는 꼭 한 번 쯤 읽어 봐야 할 고전 작품이다. 아름다운 장정으로 12년 만에 완간된 이 특별한 고전을 놓치지 말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설산의 사랑 거장의 클래식 6
딩옌 지음, 오지영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융춰는 눈물을 흘리며 말없이 마젠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마전을 바라보았다. 마전은 뻣뻣하게 서서 그녀의 눈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눈물 속에서 자신을 보았고 자신과 그녀의 관계를 보았다. 그것은 환상 속에 투영된 상상이었다. 환상 속 만물은 각자의 궤적에 따라 자라고 움직였다. 상상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실현할 길이 없었다. 그에게는 길이 없었고 그녀에게도 길이 없었다. 두 사람은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둘 다 길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 '설산의 사랑' 중에서, p.170~171


린탄에서 명성이 자자한 마씨 집안은 티베트 골동품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다 큰 화재가 발생해 전부 타버렸는데 불행하게도 점원으로 일하던 티베트인 청년이 목숨을 잃었다. 양측은 목숨값으로 합의를 보았지만, 화재로 인한 손실이 막대해 비싼 보장금을 당장 내놓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 마씨 집안의 막내아들 마전이 죽은 남자의 여동생과 할머니가 사는 집에 ‘인질’로 들어가게 된다. 마전이 할 일은 집안에 돈이 돌아 보상금을 지불할 수 있을 때까지 그곳에서 조용히 지내는 거였다. 그렇게 티베트식 가옥의 가장 아래층에 머물게 된 마전은 자신을 전혀 반기지 않는 두 사람과 함께 지내게 된다. 티베트족 여성인 융춰와 회족 출신인 마전, 두 사람은 알라의 모스크와 불교 사원의 오래된 벽화만큼이나 먼 거리에 있었다. 


마전은 그들에게 아버지를 대신해 사죄하는 마음으로 매일 과일을 사다 문 앞에 놓지만, 융춰는 과일을 봉지째 쓰레기통에 처박는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서는 무관심과 혐오, 그리고 호기심과 호감이라는 감정이 보일듯 보이지 않게 쌓여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들의 마음은 끝까지 서로에게 표현되지 않는다. 이 작품의 표제작인 <설산의 사랑>은 영하 20도를 훨씬 밑도는 눈 내리는 겨울을 배경으로 조용한 폭발력을 보여준다. 딩옌은 적막 속 은은한 분위기와 아직 녹지 않은 주변의 하얀 눈, 서로가 적대적인 두 집안 사이에서 오가는 은근한 긴장감과 완전히 다른 두 종교를 가진 두 사람의 일상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시종일관 짙은 슬픔을 배어 나오게 만든다. 사물과 풍경을 주의 깊게 파고들어 인물들의 감정을 은유하는 우아한 문장의 힘이 엄청난 몰입감을 불러 일으키며,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아주 특별한 사랑의 감각을 느끼게 한다. 두 사람의 감정을 '사랑'이라고 불러도 될까 싶을 정도로 서로에게 닿을 수 없는 것이라 더욱 먹먹한 여운을 남겨주는 작품이었다. 




튀쥔은 진실과 인내심은 언젠가 보상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일찌감치 현실에 의식을 빼앗긴 기분이었다. 감정을 둘 곳이 없었다. 싫은 동료와 어쩔 수 없이 함께 지내야 했고 싫은 친구와 연락을 유지해야 했다. 싫은 일도 울며 겨자 먹기로 계속 해야 했다. 싫은 삶은 다른 사람이 그에게 어설프게 씌운 올가미 같았다. 어두운 늪에서 발버둥 쳐도 빠져나올 기력이 없는 것처럼 그의 상태는 점차 무감각해졌고 삶에 대한 동경이나 자신에 대한 존중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 '아프리카봉선화' 중에서, p.191~192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 딩옌은 위화, 옌롄커 등으로부터 “젊은 세대 중 최고의 작가”라는 찬사를 받았다. 딩옌은 이슬람교를 믿는 소수민족 둥샹족 출신으로, 중국 북서쪽 칭하이와 티베트의 탁 트인 땅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써낸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속 이야기를 그리고 있지만, 히잡을 쓴 무슬림이 등장하고 이슬람교와 불교 신자들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풍경 속에서 낯설고, 이국적인 분위기가 작품 전체에 스며들어 있다. 서사 자체는 복잡하지 않지만, 그것을 통과하는 인물들의 내면이 너무도 섬세하게 그려져 있어 페이지마다 감정을 쥐고 흔드는 힘이 대단하다. 특히나 배경 묘사를 통해 인물들의 감정과 마음 상태가 드러나도록 쓰인 문장들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딩옌은 속세의 우여곡절이나 허무함을 세찬 바람이 불어 눈밭에 찍힌 발자국을 삽시간에 지워버리는 광경으로,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스며들었던 감정을 깨닫게 되는 순간을 벽화 속 화염이 천천히 다가와 몸에 옮겨 붙은 것 같았다는 느낌으로, 애틋한 감정을 억누르며 예의를 갖춰 말하는 작은 목소리를 새 떼가 수면을 스쳐 일으킨 잔물결이 조금씩 넘실대며 수면 위의 평온을 깨뜨리는 것 같았다는 기분으로 그려낸다. 단 한 번도 고백되지 않는 사랑, 애써 유지하며 붙잡고 있던 것들로부터 벗어나는 순간, 정답이 없는 상태에서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희망, 이 쓸쓸한 세상을 견디게 해준 짧은 만남 등 수록된 일곱 편의 작품 모두 수준급이다. 딩옌은 '삶은 극적인 감각으로 충만할 때도 있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라고, 삶의 무정함은 연극의 편집과 연출보다 훨씬 더 강렬하다'고 말한다. 그만큼 강렬한 여운을 남겨주는 작품이었다. 딩옌의 다른 작품도 꼭 국내에 번역되어 만날 수 있기를 바래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만찢남의 인생 정식
조광효 지음 / 책깃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운명의 그날, 우리는 특별한 메뉴를 고민하다가 때마침 출출해져서 떡볶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곁들여 먹던 밥버거가 우연찮게 떡볶이 접시 안에 툭 떨어졌는데 그게 생각보다 너무 맛있었다. '이거다!' 싶었다. 만화책 <요리왕 비룡>에서 영감을 받아 접시 한가운데에 볶음밥을 놓고 주변을 떡볶이로 둘렀다... 우리는 이걸 '비룡 떡볶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만화책에 나온 요리를 우리 식으로 재해석해 만든 음식이 만화방을 찾은 손님을 즐겁게 해주었고, 그 덕분에 장만동 책장을 만화책으로 가득 채울 수 있게 되었다. 만화와 음식, 역시 떼려야 뗄 수 없는 ‘꿀조합’인 것이다.             p.115~116


전 세계적으로 요리 서바이벌 신드롬을 일으켰던 '흑백요리사'를 재미있게 보면서 눈에 띄는 셰프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단연코 독특한 개성을 보여주었던 캐릭터가 바로 '만찢남' 조광효 셰프였다. 실제로 긴장감 넘치는 경연 중에 찢어온 만화책 낱장을 들고 요리를 하기도 했었는데, 만화책을 찢어서 요리하는 남자라는는 컨셉부터 정말 신기하면서도 매력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가 만든 요리 이름이 ‘<맛의 달인> 2권 25페이지 동파육’, ‘<철냄비 짱!> 8권 23페이지 게살 춘권’ 이었을 정도이니 시선을 사로잡는게 당연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만드는 음식들의 맛이 궁금해졌다. 정통 셰프들 사이에서 꿋꿋하게 자신만의 요리 철학과 레시피로 당당하게 대결하는 모습이 멋져 보였기 때문이다. 


정식으로 요리를 배워본 적이 한 번도 없고, 오직 만화책으로 요리를 배웠다는 평범한 청년이 어떻게 셰프가 되었는지 궁금했다면 그의 첫 책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화방을 운영하며 만화책에 등장하는 요리를 따라 만들고 재해석해 음식을 만들고, 마라샹궈에 반해 쓰촨요리 전문점을 열기도 하는 등 하고 싶은 게 생기면 앞뒤 재지 않고 일단 시작하는 사람의 인생 여정은 정말 만화처럼 재미있는 일들로 가득했다. 요리 만화를 덕질하다 레스토랑 오너 셰프가 되기까지 무수한 실패와 좌절이 있었지만, 좋아하는 일 앞에서 망설이지 않고 도전하는 그의 열정 덕분에 모든 순간이 즐거울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맛의 고장 전라도에서 재야의 고수에게 1년 9개월 동안 하루도 빼먹지 않고 매일매일 특식 레시피들을 전수받았던 취사병 시절 덕분에 요리의 재미에 아주 살짝 눈을 뜨게 되었고, 마라샹궈를 처음 먹고는 '맛있다'라는 감탄과 '팔아야겠다'라는 각오가 한데 뒤섞여 쓰촨으로 가는 중국행 비행기표를 끊고는 일주일간의 여행을 끝내고 돌아와 쓰촨 음식을 파는 장쓰동을 연다. 그야말로 스펙터클한 요리 인생이다. 




독학으로 요리를 하나하나 터득해나갈 수밖에 없었던 건 따로 공부할 시간이 없었고 레스토랑 막내로 들어가 기초부터 익힐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20대 때 어쩌다 시작하게 된 장사였기에 도중에 멈출 수는 없었고, 갑자기 가게 문을 닫고 요리사의 첫걸음을 떼기에는 생계 유지라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나를 믿고 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책을 보고 열심히 연습해서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의 음식을 손님들에게 내놓고, 손님이 음식을 남기고 가면 접시에 남은 요리를 먹어보고 뭐가 부족한지 분석해 날마다 조리법을 보완해가는 과정을 되풀이했다.            p.198


전형적인 요리사의 길을 걷지 않은 비전공자가 셰프가 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만화책을 통해 요리를 배우다니, 이 무슨 만화같은 이야기란 말인가. 게다가 미술을 전공한 조광효 셰프 또한 자신이 요리사가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학 졸업 후 자전거 디자이너로 일하다, 돌연 만화방을 차린다. 그리고 자본금이 부족해 만화책을 사들이지 못해서 신메뉴를 개발하기로 하는데, 만화책에 등장하는 음식을 만화방 손님에게 대접하다 그게 입소문이 나기 시작한다. 나중에는 만화방보다 떡볶이 맛집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했을 정도라고 하는데, 그 덕분에 책장을 만화책으로 가득 채울 수 있게 되었다니 인생이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는 것이 새삼 느껴지는 에피소드였다. 


그는 끊임없이 연구하고 새로운 요리를 개발하며 다양한 테스트를 해왔다. 만화책에서 영감을 얻은 메뉴,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메뉴를 구현하는 데 오랜 시간을 썼는데, 그 모든 과정이 너무나 즐거웠다고 말한다. 그건 특정한 분야에 정통한 셰프는 아니어도 나만의 길을 끊임없이 개척해나간다면 어느 때고 요리가 나에게 ‘맛’으로 보답하는 날이 오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만화 속 주인공이 우여곡절 끝에 놀라운 성장을 거듭하는 것처럼, 그도 타고난 근성과 특유의 성실함으로 크고 작은 위기와 어려움을 통과해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다. 이 책에는 20편의 에세이, 8편의 특별 만화, 22개의 레시피, 그리고 초판 한정 '만화방 떡볶이' 레시피가 삽입되어 있다. 요리 레시피 평범한 것이 하나도 없고, 요리 에피소드를 그린 만화 또한 너무도 유쾌하고 재미있었다. <흑백요리사> 만찢남 셰프의 달고 맵고 짜고 맛있는 인생 모험기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