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동주 창비교육 성장소설 15
정도상 지음 / 창비교육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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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몽규의 말에 동주는 잠시 고민했다. 같은 학교에 같은 반에다 한방에서 먹고 자는 사촌이자 동무였지만, 몽규는 자꾸만 위험한 길을 향해 가는 것 같았다. 그 위험한 길에 대해 몽규는 동주한테 절대 말하지 않았다. 동주 또한 어렴풋이 위험을 감지할 뿐이었다. 그 위험은 동주를 향한 위험이기도 했다. 주변 사람을 위험과 상처에 빠트리기 때문에 비밀은 위험했다. 비밀의 파편이 언제 심장을 향해 날아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p.46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누구나 눈 감고도 외울 수 있는 시가 바로 '서시'일 것이다. 언젠가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를 본 적이 있는데, 일본 유학길에 오른 윤동주와 송몽규 사촌형제가 일제 강점기 느껴야 했던 고민과 울분을 문학과 독립운동, 그리고 일본 경찰에 체포돼 억울하게 죽는 모습을 통해 그린 작품이었다. 식민지 청년들의 고민과 울분과 윤동주의 시 10여 편을 함께 만날 수 있어 더욱 인상깊은 영화였다. 대부분 학창시절 교과서를 통해서 윤동주의 시를 만나왔지만, 정작 그의 생애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 중에서도 청소년 시기라 할 수 있는 중등학교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으니 말이다. 


이 책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 서거 80주기를 맞아 그의 성장기를 그린 소설이다. 만주에서 나고 자라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기까지, 좀처럼 소개되지 않았던 윤동주의 청소년 시절을 소설로 만날수 있어 아주 특별한 시간이었다. 작가는 윤동주의 중등학교 시절을 공부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을 확인해 이 소설을 썼다. 현대의 여고생 ‘새봄’이 꿈에서 윤동주 시인을 만나 시간 여행을 떠난다는 설정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소년 윤동주를 만날 수 있어 더욱 의미가 있다. 독서 모임에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하루에도 몇 편씩 팔이 뻐근해지도록 시를 옮겨 적으며 시에 대해 사색하고, 경쟁이라도 하듯 책을 읽고,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인의 길을 선택하기까지의 과정과 송몽규, 문익환과의 우정과 시대적 고뇌 등 문학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했던 시절을 고스란히 들여다볼 수 있는 소설이었다. 




"...... 시인이 되는 건 중요하지 않아. 시는 그 자체로 내 생명과 같으니...... 칠흑의 밤 숲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잇을 때, 별빛 하나가 길을 열어 주듯이, 나한테 시는 그래." 동주가 말했다. 아름답게 살기가 참으로 어려운 세상이고 시대지만, 그래도 아름다워지려고 끊임없이 고뇌하는 것은 시가 있기 때문이었다. 꽃이 필 때도 아름답지만, 꽃이 질 때도 아름답다. 지지 않는 꽃은 아름답지 않다. 새로운 생명의 씨앗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생명의 씨앗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꽃이 질 때, 아름다움은 절정에 이른다.


이 작품은 한국사의 상처를 보듬는 작품을 발표해 온 소설가 정도상이 집필했다. 청소년들이 교과서로 접한 시인에게 느낄 법한 거리감을 좁히기 위해, 여고생이 시인을 만나 시간 여행을 떠난다는 설정을 만들었다. 윤동주 시인 고유의 차분하고도 서글픈 정서를 산문으로 구현해 시로부터 받은 감상을 해치지 않은 채 그의 인생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애썼다고 한다. 이 작품은 문학과 신앙, 조국애, 그리고 시인의 길을 선택하기까지 품었던 고뇌 등 시인이 겪었던 일들과 그로 인한 내적 갈등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문재린, 김약연 등 1930년대 북간도 조선인 사회를 이끌던 인물들을 비롯해 윤동주와 함께 ‘명동촌 삼총사’로 불리며 일생을 함께했던 송몽규, 문익환 등 윤동주와 그를 둘러싼 주변 인물까지 촘촘히 보여주고 있다. 일제 강점기 자신의 꿈을 조국 독립의 연장선에 두었던 그 시대 젊은이들의 모습까지 엿볼 수 있어 더욱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윤동주 시인이 오늘날 우리 곁에 온다면, 어떤 모습일까?'에서 시작된 이 작품은 서시의 글귀처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면서 짧고 굵은 삶을 살다 간 민족 시인 윤동주의 삶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청소년인 새봄 학생과 대화하는 짧은 장면들도 웃음을 유발시키는데, 정말 과거 속 인물이 현대어로 대화한다면 이러지 않을까 싶어 공감하며 읽었다. 이 작품을 우리 자신에게 한번쯤 되물어 보자. 우리는 스스로의 젊은 날을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에게 부당했던 그 모든 것들을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하고자 했던 그의 시처럼, 우리도 과연 그럴 수 있을지 말이다. 또한 청소년들이 이 책을 통해 교과서로만 접했던 시인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고, 스스로의 꿈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된다면 더욱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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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만 년을 사랑하다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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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도갓타는 놀라운 마음에 무심코 감탄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거기에 실린 사진은 루비 펜던트였다.

정교한 백금 세공으로 장식된 커다란 루비 펜던트.

그 빛깔은 마치 핏물이 밴 것처럼 짙었다.

아름답다기보다 왠지 모를 두려움이 느껴지는 보석이었다.           p.18~19


사립 탐정 도갓타 란페이는 우메다마루 백화점 창업자의 손자로부터 특별한 보석을 찾아 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최근 들어 그의 할아버지인 소고가 밤마다 있지도 않은 보석을 찾아 헤매는 기이한 행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 년을 사랑하다'라는 이름이 붙은 정체불명의 보석을 찾기 위해 도갓타는 군도에 있는 노라시마섬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할아버지의 88세 생신 축하 파티가 열릴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개인이 소유한 프라이빗 아일랜드에 가족들과 손님들이 모여든다. 


45년 실종 사건으로 인해 인연을 맺게 된 전직 형사 사카마키와 손자가 데려온 사립 탐정까지 함께 모이고 보니... 뭔가 미스터리한 사건이 벌어질 것만 같은 무대였다. 실제로 소고는 전직 경위와 탐정이 초대손님으로 왔으니, 살인 사건이 벌어지지 말란 법도 없지 않냐고 농담을 하며 아주 기분이 좋았다. 물론 살인 사건이 일어날 기미는 털끝만큼도 없었고, 애초에 탐정이 받은 의뢰도 보석을 찾는 일이지 살인 사건 같은 끔찍한 일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마침 고립된 섬에는 태풍이 몰려오고 있었고, 다음 날 할아버지가 섬에서 돌연 사라진다. 베개 밑에서 발견된 것은 '유언장'이라고 적힌 봉투였고, 거기에는 "내 유언장은 어젯밤의 내가 가지고 있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그렇게 폭풍우가 몰아치는 와중에 전직 경찰과 의뢰를 받은 탐정, 섬의 고용인들과 가족들이 함께 할아버지가 남긴 단서를 쫓아 수수께끼를 풀어 나간다. '만 년을 사랑하다'라는 보석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 할아버지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건지... 과거 속 비밀을 추적하는 미스터리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억측일지 모르지만 분명 지금 우리가 느낀 감정은 같을 겁니다."

...... 만약 그 세편의 영화와 이번 우메다 어르신의 실종에 어떤 연결 고리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우메다 어르신이 우리에게 하려는 고백은 한 가지뿐이죠.

45년 전 실제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어르신은 우리에게 그 얘기를 전하고 싶은 겁니다.             p.178


'내 유언장은 어젯밤의 내가 가지고 있다'에 이어 발견된 편지지에는 '만 년을 사랑하다'는 내 과거에 있다, 는 문구였다. 그렇다면 아마도 '만 년을 사랑하다'라는 보석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뜻일지도 모른다고 다들 생각한다. 하지만 가족들은 이러한 소고의 행동이 평소 할아버지의 모습과 같지 않다고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사카마키는 가족이 아닌 자신이 축하 파티에 초청을 받은 데는 과거의 사건과 뭔가 연관이 있찌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으로부터 45년 전, 한 사십대 주부가 근처 슈퍼마켓에 장을 보러 갔다가 실종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사카마키가 담당 형사였고,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소고가 용의자가 되었다. 사라진 여성과 그가 어느 호텔 커피숍에서 만났었다는 제보가 들어온 것이다. 당시 소고는 젊은 백화점 사장이라는 주목받는 위치에 있어 화제가 되었는데, 결국 사건 당일에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었고, 별다른 동기도 보이지 않아 사건은 미제로 남았다. 그 사건이 현재 소고가 사라진 것과 연관이 있는 걸까. 


요시다 슈이치는 일반적인 미스터리 서사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 '인간을 쓰고 싶다'고 말했던 것처럼 한 사람의 삶 전체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며 묵직한 이야기를 들려 준다. 일본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사회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아이들의 문제를 현실감있게 그려낸다.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전개되는 서사의 매력과 반전에서 비롯되는 먹먹한 감정까지 요시다 슈이치다운 휴먼 미스터리가 만들어졌다. 살인죄에 반대되는 죄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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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 생존 - 지구상 가장 혹독한 환경에서 피어난 생명의 경이로움
알렉스 라일리 지음, 엄성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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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함(그리고 인간 중심적 사고) 때문에 우리는 어떤 장소를 감히 '생명체가 살 수 없는 곳'이라 불렀지만, 결국 우리 눈앞에 지구상에서 가장 밀도 높은 생태계가 펼쳐지곤 했다. 우리는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온도에 한계를 정해왔지만, 결국 그 한계가 깨지는 걸 목격했다. 우리는 모든 동물은 산소로 호흡한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과학자들이 지중해 바닥에서 산소 없이도 잘 살아가는 동물을 발견했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생명체가 태양에 의존한다고 생각했지만, 사람이 황화수소를 필요로 하지 않듯 산소를 필요로 하지 않는 생태계가 발견됐다.             p.20


끓는 물 속에서도 30분간 살아남고 섭씨 영하 200도의 차디찬 액체 헬륨 안에서도 7개월간 살아남으며 1,000기압의 압력과 강한 방사선은 물론 다양한 유독 가스에도 살아남는 동물이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심지어 이 생명체는 우주여행을 하고도 살아남았다. 이 생명체는 완보동물로 '미시 세계의 스타'라 불린다.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는 아주 작고 귀여운 동물인데, 둥근 엉덩이, 납작한 얼굴, 너무 하찮아서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움직임 등 테디베어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다. 완보동물의 초자연적인 능력은 오래 알려져 왔다. 이 동물의 생존력은 정말이지 말 그대로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2007년 9월에 두툼한 금속 캡슐 안에 담겨 우주로 보내졌고, 우주의 진공 상태, 그러니까 극도의 저기압과 혹한 그리고 여과되지 않은 자외선에 노출되었음에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이렇듯 인간이라면 단 몇 초에서 몇 분 만에 죽고 말 상상 불가능한 극한 상황에서도 살아남는 생명체들이 있다. 절대 영도(섭씨 영하 273.15도)에 가까운 혹한이나 펄펄 끓는 열기, 모든 것을 파괴하는 방사선, 진공 상태의 우주에서도 살아남는 슈퍼 히어로 같은 능력을 가진 생명체는 대체 어떻게 극한의 환경에서 버티는 것일까. 이 책은 물, 산소, 음식, 추위, 압력, 열, 어둠, 방사선 등 생명에 꼭 필요한 요소가 전혀 없거나 지나치게 많은 극한 환경을 극복해온 세계 극한 생명체의 실존을 탐구한 것이다. 상상도 못 할 만큼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는 생명체들을 찾아본 일이,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은 시기를 헤쳐 나오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저자의 말처럼 그들의 전략과 적응 과정은 지구의 여섯 번째 대멸종 한가운데 서 있는 우리에게도 커다란 통찰을 건넨다. 




이제 지표면으로 되돌아가 보자. 당신의 상상력을 지구 맨틀 깊은 곳에 놓인 지층에서, 그러니까 수백만 년에 걸친 지질 역사 속에 쌓인 암석층에서 위로 끌어올려 보라. 만일 당신의 생각이 아직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광산 안에, 즉 머리에 매단 플래시 빛밖에 없는 좁은 터널 안에 머물러 있다면, 천천히 지상으로 올라오라. 다시 탁트인 공기 속으로 나오면, 햇빛이 당신의 망막을 간지럽히고, 몇 시간 동안 햇빛을 못 본 뒤라 삶이 더 풍요롭게 느껴질 것이다. 식물들은 더 푸르고, 새소리는 더 달콤하다. 간질이고 장난치는 느낌까지 주며 산들바람이 피부를 스쳐 지나간다.            p.285~286


이 책은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생존의 당연한 조건이라고 여겨지는 요소들이 없는 환경에서도 살아남는 생명의 신비한 세계를 보여준다. 물, 산소, 먹이 없이 생존하기, 극저온, 극고압과 극저압, 극고온이라는 극한 환경에서 진화하는 생물들, 그리고 빛이 없거나 방사선이라는 독이 가득한 환경에서 살아남는 생명체들의 사례를 각기 구분해 정리했다. 흥미로운 것은 생존과 지속성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자신만의 고유한 '다름'이라는 점이다. 고유한 생존 방식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극한 환경을 향한 끝없는 진화의 원동력이 되어 주었으니 말이다. 태곳적 바다 깊은 데서 진화한 최초의 미생물부터 시작해, 생명체는 태양의 힘을 사용해 육지로 올라왔고, 하늘로 날아오르거나, 깊은 해구 속으로 들어갔다. 그 어떤 포식자도 따라올 수 없고, 그 어떤 경쟁자도 겨룰 수 없는 장소들을 찾아 모든 빈 공간과 틈새로 퍼져 나가게 된 것이다. 


산소 없이 생존하는 멋쟁이거북, 먹이 없이 생존하는 셰다오 살무사, 극저압 고도를 견디는 큰뒷부리도요, 극저온 북극에 사는 북극곰, 극고온 사막에서도 전력질주가 가능한 사하라은개미, 겨울에 몸을 얼렸다가 부활하는 송장개구리, 체르노빌 출입금지 구역에서 방사선을 먹고 사는 미생물 등 지구에서 가장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는 동물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너무나 놀라웠다. 불가능해 보이는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 생명체들의 이야기는 웬만한 소설보다 더 극적이고, 드라마틱하다. 정말 잘 읽히는, 쉽고 재미있는 과학책을 찾고 있다면 이 책을 적극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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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다 하다 앤솔러지 4
김엄지 외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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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애실은 말하고 들었다.

그것을 처음 배우는 사람처럼. 거기에서 즐거움과 유쾌함을 이제 막 발견한 사람처럼. 맞다. 두 사람의 대화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그녀는 기뻤다. 자신에게 위로와 위안을 주는 이 소통이. 자신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것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현서가 자신과는 상반된, 어떤 감정을 품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 김혜진, '하루치의 말' 중에서, p.49


애실은 어머니가 발목이 부러져 깁스를 하게 되자, 연차를 내고 고향집에 내려간다. 주말마다 어머니를 만나러 가다 보니 그곳에서 몇 달 지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다 고향으로 돌아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애실은 어머니가 20년 넘게 꾸려 온 이불 가게를 도맡아 하게 된다. 애실은 사는 동안 그래 왔듯 큰 기대 없이, 욕심 없이 가게를 지켰다. 그러다 이불을 사러 온 손님 현서와 이야기를 나누고, 점점 가까워진다. 우정이 싹트게 된 거였다. 현서는 애실보다 다섯 살이 많았고, 일주일에 서너 번 그녀와의 대화가 애실의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고, 대화를 나누며 점점 더 친밀해진다. 하지만 얼마 뒤, 현서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사람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김혜진 작가는 <하루치의 말>이라는 이 작품을 통해 '상대의 감정을 헤아리고, 공감하려 애쓰고, 적절한 반응을 건네는 것까지 포함'된 것이 우리가 일상에서 누군가와 귀 기울여 듣고, 말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듣는 일>은 절대 수월하지 않다고 말이다. 애실은 현서의 실체와 마주하고 나서 생각한다. 살아오며 만나 온 사람들, 마음과 시간을 나눈 사람들, 한순간 멀어진 사람들, 이유도, 까닭도 묻지 못하고 끝나 버린 관계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리고 다 기억나지도 않는,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말들을 생각한다. '듣기'라는 것이 단순히 소리를 받아들이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준 작품이었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의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에 대해서도 말이다. 내가 그 동안 가까운 이들에게 했던 말들과, 내가 들어왔던 그들의 이야기들도 이런 거였다면 참 슬플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책에 수록된 다섯 편의 이야기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듣는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일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는 거예요, 그거?」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점점 줄어 가는 통장 잔고와 막막한 앞날이 머릿속을 스쳤고, 순간 집중력이 흐려져 날아오는 공을 놓쳐 버렸다. 흙바닥 위를 데구루루 굴러가는 공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하기 싫은 것도 참고 하는 게 어른이잖아요.」

나는 공을 주우러 가며 답했다.

「그래, 그게 어른이지. 그런데 싫은 것도 정도가 있는 거야. 너무 싫으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다.」                - 서이제, '폭음이 들려오면, 중에서, p.130


다섯 명의 소설가가 하나의 주제로 함께 글을 쓰는 열린 책들의 '하다 앤솔러지' 네 번째 책이다. 이 시리즈는 우리가 평소 하는 다섯 가지 행동 즉 걷다, 묻다, 보다, 듣다, 안다, 라는 동사를 테마로 진행되고 있다. 그 네 번째 책 <듣다>에는 김엄지, 김혜진, 백온유, 서이제, 최재훈 작가가 참여했다. 이번 시리즈는 다섯 편의 이야기들이 고루 재미있었다. 가장 분량이 많은 백온유 작가의 <나의 살던 고향은>이라는 작품은 생각지도 못하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서사가 대단히 흥미로웠고, 김혜진 작가의 <하루치의 말>은 '듣다'라는 동사를 가장 일상적으로 와 닿게 풀어낸 이야기였고, 서이제 작가의 <폭음이 들려오면>은 일상 속 소음에서 시작해 '제대로' 듣는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해주는 이야기였다. 


자신만의 색깔이 뚜렷한 다섯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앤솔러지만의 매력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떤 작품은 잘 읽히고, 어떤 작품은 잘 와닿지 않고, 또 어떤 작품은 공감되고, 어떤 작품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 들어 읽게 되니 그야말로 종합선물세트같은 책이 아닐까 싶다. 이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은 외관이 매우 아름답다는 것이다. 반투명한 트레싱지로 된 표지가 아름다운 이 시리즈는 책배와 위, 아래에 프린트가 함께 되어 있어 책의 물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래서 시리즈별로 한 권씩 모으기 딱 좋다. 시리즈 다섯 번째 책인 <안다>도 벌써 출간이 되어 곧 읽어볼 예정이다. 마지막 작품 <안다>에는 정이현, 조경란 작가의 작품도 포함되어 있어 더욱 기대 중이다. 어서 만나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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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다는 말 - 진화의 눈으로 다시 읽는 익숙한 세계
이수지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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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때보다 자연에서 '답'을 찾으려는 풍조 속에서 진화 과학은 주목받고 있다. 우리가 왜 이런 방식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기원을 알고 싶다면 자연과 그 진화사를 보라! 이 웅장한 메시지에 많은 이가 끌리는 이유는 인간의 생물학적 기원을 통해 '자연스러운' 인간성의 조건을 이해하고, 또 혹자는 회복하고자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자연스러움이란 대체 무엇인가?           p.9


우리는 '자연스럽다'는 말을 일상에서 자주 사용한다. 동성애는 자연 법칙에 어긋나는 일이야, 아빠가 육아를 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아. 여자는 이래야 해. 남자라서 그런거야... 등등 자연스러운 것이 인간의 본성에 가깝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것은 항상 좋고, 정상적이고, 또 필연적이어서 우리가 꼭 지키고 따라야만 한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자연스러운 게 좋다'고 했을 때, 무엇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일까. 이 책의 저자인 진화 인류학자 이수지 박사는 '자연스럽다'라는 말은 자연 그 자체와 구별된다고 말한다. 사람의 어떤 행동이나 특성을 자연스럽다고 할 때 전달되는 긍정적 가치와 달리, 자연은 순수하지도, 편하지도, 또 쉽지도 않기 때문이다.


또한 자연이 좋다고 외치는 것이 '자연 친화'라면, 그것은 철저히 인간 중심적인 의미에서만 그렇다고 말한다. 그 점에서 자연에 대한 동경은 우리가 믿고 싶어 하는 '자연스러움'을 확인하려는 바람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현재 독일 막스 플랑크 인구학 연구소에서 현대 인류의 출산 및 생식 행동을 연구하고 있는 저자는 생물학, 생태학, 신경 과학 등 다양한 학문을 넘나들며 '본성'이라는 이름 아래 차별과 낙인이 정당화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연을 인간 행동의 근거이자 정답으로 삼을 때, 자연은 오히려 오류의 언어가 된다는 말이 가장 흥미로웠다. 저자는 그에 대한 사례로 “모든 생명은 어미가 새끼를 돌보게 되어 있다.”, 그리고 “동성애는 자연 법칙에 어긋난다.”라는 식의 주장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자연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가 옹호하는 것, 옳다고 생각하는 것,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에 부합하는 사례에만 선택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확증 편향 때문이다. 




인간 본성의 서사도 비슷하게 작동한다. '자연'과 '자연 아닌 것' 사이의 대치 구도를 상정하고, '자연'에 가까운 어디쯤에서 인간 행동의 원형이 발견된다고 가정한다. 우리 행동은 그 원형에 충실할 것으로 기대한다. 그렇지 않으면 ─ 즉 부자연스러우면 ─  적대시된다. 싸우지 않는 남자, 아이를 키우지 않는 여자, 동성을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성전환 수술을 한 사람이 그러하리라. 본성에 충실한 결과 벌어진 전쟁은 더 이상 놀라울 일이 아니다. 이 모두가 '자연'과 '자연 아닌 것'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환상에 기반한다.            p.135~137


지난 해 세계 인구가 인류 역사상 가장 높은 수치에 도달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렇게 2024년에 세계 인구는 81억 명에 도달했다. 그리고 또 한국이 단일 국가로서는 가장 낮은 출산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한국의 합계 출산율은 0.75명에 이르렀다. 당분간 세계 인구는 매해 신기록을 경신하며 21세기가 끝날 때까지는 100억을 향해 더 늘어날 것이다. 동시에 한국은 그 어떤 국가보다도 빠르게 인구 감소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 한쪽은 '너무 많음'을, 다른 쪽은 '너무 적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저자는 이 두 가지 사실이 얼핏 모순되어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저 '인구'를 일정한 시공간을 점유하는 개체들의 군집이라고 했을 때, 그 집단의 경계를 어디에 긋는지에 따라 다른 현상이 펼쳐질 뿐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한국인이기도 하고 동시에 세계 시민이기도 하기 때문에, 너무 많고 또 너무 적은 문제를 하나의 몸으로 동시에 사유해야 한다. 물론 한국 사회는 저출생에만 집중하고 있는 듯 하지만 말이다. 


진짜 문제는 인구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자원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방식과 거기에 깃든 불평등의 구조다. 이 책은 '너무 많다'라는 말에 숨은 우생학적 동기에 대해 짚어보고, 기후위기와 환경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며 우리가 천착해야 할 문제는 인구가 아니라 이미 도래한 기후 위기라는 난제를 함께 풀어 나가며 100년 뒤를 맞이할 사람을 키우는 일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가 무언가를 자연스럽다고 여길 때, 어떤 행동을 자연스럽다는 이유로 정당화하거나 부정할 때, 우리는 어떤 자연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 제대로 생각해 봐야겠다고 느꼈다. 인간이 언제부터 ‘자연’을 도덕의 근거이자 행동의 잣대로 삼아 왔는지를 추적하는 과정을 통해 '자연스러운 게 좋다'는 말 아래에 우리가 놓치고 있던 통념에 대해서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자연스럽다.”라는 말 뒤에 숨겨 온 믿음과 편견을 부수고, 제대로 된 단어 ‘자연스러움’을 다시 배우는 시간이 된다면 좋을 것 같다. 진화를 생물학의 관점이 아니라 인류학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것부터 새로운 부분들이 많았다. 그래서 이 책은 과학책이라기 보다 인문학책에 가깝다는 느낌이었는데, '자연스러움'이라는 개념 아래 이렇게나 많은 오해와 편견이 있었다는 걸 몰랐던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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