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법을 어길 때 - 과학, 인간과 동식물의 공존을 모색하다
메리 로치 지음, 이한음 엮음 / 열린책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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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가셀리스는 동물이 공격했을 때 어떻게 대응하는지 지역 공무원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고를 받고 갔는데 곰이 사람을 깔고 앉아 물어뜯고 있다면 어떻게 하겠냐고 물어보았지요. <총으로 쏘나요?> 그러자 그는 답했어요. <사람과 곰 중에서 어느 생명이 더 중요한지 판단할 권리는 내게 없어요.>」 인도에서는 해마다 약 5백 명이 야생 코끼리에게 죽는다. 정부는 유족에게 보상을 하지만, 코끼리를 살처분하는 사례는 거의 없다. 사망자가 가장 많은 주는 서벵골이다. 지난 5년 동안 403명이 사망했다. 아마 답은 거기에서 찾아야 할 듯싶다.           p.74


텃밭과 과수원을 침입해 농작물과 과일을 약탈해 고소당한 모충,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파문당한 곰, 돼지의 살인 재판, 쥐에게 발부해 굴 안으로 쑤셔 넣은 퇴거 영장, 양조업자들이 초록색을 띤 한 바구미종에게 제기한 소송.... 이것은 실제로 법정에서 재판으로 다루어진 사건들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옛 법 제도의 어리석음을 탓하는 증거라기보다, 인간과 야생 동물 사이의 갈등이 대처하기에 무척 곤란한 특성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이는 중세부터 수 세기 동안 고심했음에도 여전히 흡족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고 있는 문제다. 그렇다면 사람이 의도를 갖고 만든 법을 자연이 어길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적절한 조치일까? 


미국에서 가장 유쾌한 과학 저술가로 평가받는 메리 로치는 콜로라도 애스펀의 뒷골목부터, 인도령 히말라야산맥의 어느 마을, 성 바오로 광장까지 인간의 법과 동식물의 본능이 충돌하는 현장을 직접 방문해 이 책을 썼다. 골치 아픈 문제들을 일으키는 동식물을 <자연의 범법자>들로, 인간의 법과 동식물의 본능이 충돌해 벌어진 사고를 <사건 현장>으로 풀어나가는 이야기라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저자는 인간과 야생 동물의 갈등을 수습하는 전문가, 곰 관리자, 나무 벌목 및 발파공, 포식 동물의 공격을 조사하는 법의학 수사관 등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자연과 인간의 공존'에 대해 탐구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든다. 골치 아픈 문제들을 일으키는 동식물은 정말 <자연의 범법자들>일까? 사실 진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우리 <인간>이 아닐까?




수 세기 동안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 없이, 그리고 인도적인 행동인지를 거의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침입하는 야생 동물, 또는 누군가가 들여온 야생 동물을 죽였다. 우리는 실험실에서 쥐와 생쥐를 윤리적으로 다루고 인도적으로 <안락사>하는 상세한 절차를 마련해 쓰고 있지만, 우리 집과 뜰을 침입하는 설치류나 미국너구리를 처리하는 공식 표준 절차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부사항은 퇴치업자와 <야생 동물 방제업자>에 달려 있다. 후자는 미국에서 사람들이 모피 구입을 꺼리고 덫 사냥꾼들이 가정의 고미다락에서 다람쥐 잡는 일로 돈을 벌기가 더 쉽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온 직업이다.              p.357~358


무단 횡단 하는 동물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쓰러질 위험이 있는 나무는 어떻게 관리해야 할까? 비행을 방해하는 새를 어떻게 통제해야 할까? 쓰레기통을 뒤지는 곰을 포획해 다른 지역에 풀어놓으면 쉽게 문제가 해결될까. 사람들은 경작지를 보존하기 위해 혹은 조류 충돌을 막기 위해, 새를 독살하거나 소음, 레이저, 폭발물 등으로 괴롭히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다. 또한 개체수 관리를 위해 시행되는 면역 피임법을 포함해 각종 동물 피임법의 경우는 부작용의 위험은 물론 윤리적인 논란도 안고 있다. 동물에 의해 사람이 다치거나 죽게된 경우, 대부분은 동물을 사살하는 걸로 마무리가 된다. 사람을 해치는 동물의 운명은 어떤 경우든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처벌보다는 예방이 더 낫다. 양쪽 종에게 가장 안전한 방안은 서로 거리를 두는 것이다. 


동물은 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본능을 따르는 존재다. 그들은 본래 타고난 대로 행동하는 단순한 동물들이다. 먹고, 싸고, 보금자리를 짓고, 자기 자신이나 새끼를 지킨다. 하지만 우연찮게 그 본능을 따르는 행위가 인간에게 또는 인간의 집이나 작물에 피해를 주는 순간 불화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갈등은 사람과 도시에게는 해결하기 힘든 난제를, 야생 동물에게는 곤경을 안겨 준다. 2백여 국가의 동식물 약 2천 종이 사람과 불화를 일으키는 행동을 하고 있다. 각 갈등마다 상황 배경, 종, 걸려 있는 문제, 이해 관계자가 다르기에 해결 방법도 제각각 달라야 한다. 이 책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갈등을 '과학적' 접근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고민한다. 자연은 통제의 대상이 아니며, 진정한 공존은 과학적 이해와 공감에서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 책을 통해 인간과 자연이 모두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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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김에 의학 공부 - 한번 보면 결코 잊을 수 없는 필수 해부 개념
켄 애시웰 지음, 고호관 옮김 / 윌북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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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윌북의 '그림으로 과학하기' 시리즈 신간이다. 물리, 화학, 생물 공부와 수학의 대수와 기하 편이 나왔었는데, 이번에는 의학 공부 편이다. 그림으로 모든 이론을 정리하는 시리즈라서 아이가 보기에도, 어른이 보기에도 너무 좋은 시리즈이다. 


과학 문해력은 글로 읽을 때보다 그림을 볼 때 놀랍도록 빠르게 자라난다고 한다. 특히나 요즘 아이들은 문자보다는 이미지로 정보를 습득하는 데 더 익숙하기 때문에, 필수 과학 개념을 엄선해 인포그래픽으로 압축한 이 새로운 과학책이 매우 도움이 될 것 같다. 





이 책은 의학의 기초인 해부를 그림으로 압축해 설명하고 있다. 해부학이란 몸을 절개하고 그 안을 더 자세히 보고 이해하는 학문이다. 몸을 자르고, 관찰하고, 육안으로 보이는 장기와 부위를 묘사하는 것이 해부의 시작이다. 해부학은 시각적인 과학이기 때문에 이 책에서도 선명한 색채와 간결한 표현으로 인체 구조의 핵심 요소를 강조하고 있다. 신체의 각 부위가 다른 구조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림을 통해 상세하게 배울 수 있다. 


인체 해부학에서는 피부계, 골격계, 근육계, 신경계, 순환계, 소화계, 비뇨계, 생식계, 면역계, 림프계, 내분비계를 다룬다. 이 책은 우리 몸의 기본 요소들을 하나씩 순서대로 알아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마인드맵으로 장별 내용을 정리해 개념 간 관계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해주어 좋았다. 단 두 페이지로 각 장의 모든 내용들을 한꺼번에 정리해서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았는데, 얼굴근육이 어떻게 얼굴의 표정을 만드는지, 모든 척추동물의 뇌줄기의 구조가 비슷하다는 것과 사람은 약 1만 가지 냄새를 구별할 수 있다는 사실도 인상적이었다. 후각 또는 냄새는 맛과 마찬가지로 화학적 감각인데, 우리의 후각은 다섯 가지 맛만 느끼는 미각보다 훨씬 민감한 감각이었던 거다. 폐의 구조는 어떠하고, 소화관에는 어떤 기능이 있으며, 콩팥은 얼마나 다양한 일을 하는 지 등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었다. 


또한 이 책은 <태어난 김에 생물 공부>에 이어 고등 생명과학의 중요한 개념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구성되어 있어, 함께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의사를 꿈꾸는 학생에게도, 의학에 관심이 있는 성인 독자들에게도 누구나 부담 없이 읽으며 의학의 세계를 탐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감각적인 이미지로 눈을 즐겁게 만들어 주고, 정확한 설명으로 개념 이해를 도와주며, 그림으로 정리해 가장 과학적인 학습법을 제시하고 있다. 글이 아니라 그림이 중심이기 때문에 한번 보면 쉽게 잊혀 지지도 않는다. '그림으로 과학하기' 시리즈는 미국의 학습서 명가 베런스에서 모든 연령의 학습자들이 혼자서도 공부할 수 있도록 개발한 것이다. 


보다 쉽고, 재미있게, 효과적으로 과학 공부를 할 수는 없을까 고민해 본 적이 있다면 이 시리즈를 추천해주고 싶다. 이 책을 통해 의학을 접하게 된다면, 의학이 어려운 학문이라는 생각은 완전히 사라지게 될테니 말이다. 선명한 색을 활용한 인포그래픽, 중요도에 따라 시선의 흐름을 유도한 배치, 딱 필요한 것만 군더더기 없이 원포인트으로 설명해주고 있으니 사실 지루할 틈이 없다. 초등학생부터 중고등학생들에게도 보여줄 수 있을 만큼 잘 쓰인 책이라 아이와 어른이 함께 보면 더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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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페이지 인문학 - 하루 5분이면 충분한 실천 인문학
김익한 지음 / 21세기북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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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일상의 작은 노력은 처음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요. 하지만 이 미세한 차이는 복리처럼 쌓여, 어느 순간 거대한 격차를 만들어냅니다. 이 큰 차이는 다시 새로운 반복의 기반이 되고, 그 위에서 또 다른 미세한 차이들이 생겨나며 우리의 성장을 가속합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 미세한 차이를 의식적으로 만들어가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어제와 다른 오늘을 만들려는 작은 '태도'의 차이, 좋은 일을 꾸준히 해나가는 '습관'의 차이, 그리고 현상을 더 깊이 이해하려는 '사유'의 차이가 그것입니다. 이 작은 차이야말로 평범한 하루를 비범한 성장으로 이끄는 힘입니다.            p.169


인문학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은, 어려운 책 몇 권을 읽는다고 단번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작은 실천으로 '생각의 습관'이 몸에 붙을 때 비로소 가능한 거라는 걸 보여주는 책이다. <하루 한 장, 작지만 큰 변화의 힘>의 철학을 12개의 자기 계발 주제로 구분해 하루에 한 페이지씩 5분이면 읽을 수 있도록 구성했다. 기존의 글을 다듬고 60여 편의 글을 새로 더했으며, 매일의 사유를 돕는 ‘오늘 나에게 던지는 질문’을 추가했다. 


인문학은 '지식'이 아니라 '습관'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이 책은 365일, 하루 한 장의 실천이 가진 힘을 고스란히 체감할 수 있게 해준다. 그 동안의 자기 계발이 너무 기술 위주로 흘렀고, 인문학은 너무 사유 위주로 맴돌았다면, 이 책은 그 둘을 잇는 다리가 되어 인문학적 성찰과 실천의 답을 동시에 제시한다. 실용적인 루틴과 현실적인 통찰로 가득해 도움이 되는 대목들이 많았다. 글이 잘 안 써지거나 일이 잘 안 풀릴 때, 독서의 진도가 잘 안 나갈 때는 '끈기가 아닌 끊기'를 선택해야 한다고 가끔은 미련하게 버티는 끈기보다 확실하게 떨치는 끊기가 도움이 된다는 조언과 자기화된 독서를 위해 조금 다른 방식으로 책을 읽는 방법, 단순히 이해하고 아는 것이 아니라 무술을 익히든 지식이 내 몸에 배도록 익히는 기술, 시간의 우선순위를 바로잡게 해주는 시간 가계부 작성하기, 내 삶의 주도권을 온전히 가질 수 있는 루틴 만들기 등 바로 해볼 수 있는 구체적인 내용들이 많아 더 좋았다.




철학자 니체는 우리에게 무서운 질문 하나를 던졌습니다. 바로 '영원회귀' 사상이지요. "만약 당신이 살아온 이 삶 자체가,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똑같이, 무한히 반복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미래의 천국이나 과거의 후회에 기대지 않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의 무게와 가치를 온전히 긍정하고 사랑할 수 있는지를 묻는 강력한 사상적 실험입니다... 매 순간을 살아갈 때, "이 순간이 영원히 반복되어도 좋을 만큼 나는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가?" 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세요. 이 질문을 마음에 품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선택은 달라집니다.               p.412


이 책의 진짜 힘은 읽은 즉시 삶에 적용되는 구체성에 있다. 개인적으로는 나만의 시선으로 세상 읽기를 제안하는 4챕터와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아줄 기록의 습관을 담은 7챕터를 가장 흥미롭게 읽었다. 4챕터에는 생각력을 키우는 방법으로 시작해 자유로운 책 읽기, 삶을 바꾸는 독서법, 그리고 책을 그저 읽기만 하는 게 아니라 공부하듯 책 읽는 법에 대해 알려준다. 의미 없는 독서가 아니라 아웃풋을 그리고 시작하는 독서가 삶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다양한 방법의 독서법이 제시되어 있다. AI 시대의 책 읽기, 정보의 홍수 속에서 중심 잡기 등은 요즘 같은 시기에 꼭 필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7챕터에는 기록형 인간으로 살기를 시작으로 다양한 글쓰기 방법과 기억법, 만능 카드 사용법, 플래너 쓰기 등 생각하고 기록하는 삶을 위한 구체적인 팁들이 가득하다. 


인문학은 결국 생각의 습관이다. 이 책은 그 습관을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훈련 도구가 되어줄 것이다. 매일매일, 하루에 딱 한페이지를 읽으며, 인문학을 습관으로 만들어 보자. 아침을 시작하며, 혹은 하루를 마무리하며 한 페이지씩 읽어 보자. 하루의 분량이 많지 않기에 나를 위한 오늘의 질문에 답을 써보며 필사를 해봐도 좋고, 소리내어 낭독하는 것도 좋다. 인생의 변화는 작은 곳에서 시작된다. 이 책을 통해 조금 더 단단해지는 내일을 맞이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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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는 가족의 저녁 식탁 - 아이의 탁월함을 발견하고 길러내는 가족문화의 비밀
수전 도미너스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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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에게 자녀의 능력을 어디까지 믿어줘야 할지 파악하라는 말은 단순한 요구처럼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줄리아는 부모에게 어디까지 요구해야 합당한지 고민한다. "제가 부모가 되면 아이의 학습이 그렇게 중요할까요? 그저 아이를 안전하게 지키는 것, 그리고 또 하루를 무사히 보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가끔은 제가 부모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p.104~105


어린 시절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던 수전은 아버지의 출장으로 부모님이 집을 비우는 2주동안 친한 친구 가족에게 맡겨진 적이 있다. 그 집은 미로처럼 펼쳐진 3층짜리 빅토리아풍 주택이었는데, 집 안에서의 의례와 규칙이 수전의 집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수전의 가족들은 저녁식사가 끝나면 대개 텔레비전이 있는 작은방에 모여 시트콤을 보곤 했는데, 친구의 가족들은 부엌 옆방에 있던 텔레비전에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던 것이다. 그 집 어머니는 밤이면 보통 자정을 훨씬 넘길 때까지 책을 읽곤 했다. 미동도 없이 조용하게. 가족의 습관 차이는 식사시간에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다. 수전의 부모님은 보통 식탁에서 아버지의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는데, 친구의 가족들은 식사를 마친 뒤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특정 사안에 관해 의견을 묻거나 즉석에서 만든 수학문제를 내곤 했던 것이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수전은 곧 원래의 편안한 식사시간으로 되돌아갔지만 한가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자신은 수학을 어려워했는데, 만약 매일 저녁 식탁에서 수학문제를 풀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친구네 가족들처럼 그날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의견을 말하고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는데 익숙했다면? 그랬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진 것이다. 그렇게 수전은 커가면서 일종의 가족 전문가가 되어 친구들이 받은 가정 교육의 단서와 디테일을 면밀하게 살피기 시작한다. 그렇게 어린 시절의 경험을 통해 가족의 습관 차이에 대해 알게 된 뒤 '가족'이라는 주제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가지며 성인이 된다. 그리고 샬럿 브론테가 쓴 <제인 에어>, 동생 에밀리가 쓴 <폭풍의 언덕>, 막내 앤이 쓴 <와일드펠 저택의 여인> 등을 읽으며 브론테 자매들은 어떤 환경에서 자랐기에 이런 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인지 궁금증이 커진다. 그렇게 여러 가족의 이야기들을 탐구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부모의 유전자가 수백만 가지 방식으로 섞일 수 있고, 무작위적인 작은 변화가 개인의 삶에서 수업이 많이 발생할 수 있으며, 이러한 요인들이 거의 무한한 방식으로 결합할 수 있음을 생각하면, 자녀에게 영향을 끼치려고 애쓰던 부모는 망연자실한 무기력 상태에 빠질 수 있다. 부모가 자녀 양육에서 내리는 선택은 하나같이 중요해 보이기도 하고, 일상 속에서 매일같이 아이들에게 쇄도하는 그 모든 힘들 앞에서 너무나 하찮아 보이기도 한다.             p.268


각 가정에는 저마다의 가족문화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함께 공유하는 가치관부터, 시간을 보내는 방식, 식사를 하는 습관, 부모가 자녀에게 바라는 기대치와 가족 간에 존재하는 역학 관계 등 많은 요소들이 한 가족의 문화를 만들어 내고, 그들 삶의 경로를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이끌어 간다. 이 책의 저자인 저널리스트 수전 도미너스는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배경이 서로 다른 여섯 가족의 삶을 통해 가족문화의 차이가 자녀들의 성공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추적한다. 학업적으로나 직업적으로 뛰어난 성취를 이룬 가족들에게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 직접 찾아 나선 것이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환경이 만들어내는 보이지 않는 힘이, 한 개인의 인생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 그 놀라운 영향력이 낱낱이 드러난다. 왜 의사 집안에서는 의사가, 예술가 집안에서는 예술가가 나오는 것일까? 왜 어떤 가족은 한 집안의 모든 자녀가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는 것일까? 꼭 성공한 부모 밑에서만 성공한 자녀가 자랄 수 있는 것일까? 이 모든 궁금증에 대한 해답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이 책에 사례로 수록된 여섯 가족 중 첫 번째로 소개된 그로프 가족은 국내에도 출간되었던 책 <운명과 분노>를 쓴 작가 로런 그로프이다. 첫째인 애덤은 의사이자 사업가, 둘째 로런이 동시대 가장 뛰어난 소설가, 막내 세라는 트아이애슬론 종목으로 올림픽에 출전한 경력이 있는 선수이다. 이들 세 남매가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부모들은 어떤 가족 문화를 만들었는지, 그 시간들이 이들을 어떤 어른으로 성장시켰는지 보여주는 스토리 자체가 소설처럼 흥미진진했다. 그런데 이런 사례가 이 책에 여섯 편이나 수록되어 있으니, 재미가 없을 수가 없다. 웬만한 소설보다 더 시간가는 줄 모르고 빠져 들어 읽었다. 브론테 자매의 사례를 비롯해서 형제자매의 관계가 부모만큼이나 중요한 변수라는 점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형제자매는 가장 가까운 경쟁자이자, 서로의 사다리가 되어주는 존재였다. 서로의 가능성을 가장 먼저 목격하는 존재이고, 동일한 환경, 시간, 자원을 공유하며 서로를 끊임없이 비교하고 모방하고 경쟁하면서도 깊은 연대를 쌓는 존재라는 점이 새삼 놀라웠다.  자신의 아이를 훌륭하게 키우고 싶지 않은 부모는 없을 것이다. 높은 성취를 이뤄낸, 성공한 가족들의 삶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패턴이 궁금하다면, 가족문화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영향력을 통해 새로운 자녀교육 방법에 대한 영감을 받고 싶다면 이 놀라운 책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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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임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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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나는 결코, 단언한건대, 엘리네에게 내 마음을 고백한 적이 없었으니까, 결코, 절대로, 나는 지금껏 어떤 여자에게도 감히 그런 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엘리네가 거기 서 있었다, 이 아름다운 한여름 밤 내게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이건 현실이라 할 수 없었다, 이건 꿈이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환영이 틀림없었다, 어쩌면 유령일지도 몰랐다,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부둣가에 서서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엘리네일 리는 없었다, 절대 그럴 리 없었다,             p.49~50


크리스마스 직전의 오후, 누군가 쓰러져가는 낡은 집의 문을 두드린다. 설거지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책들은 사방에 널려 있으며, 온통 어질러져 있는 지저분한 집에 살고 있는 엘리아스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믿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유일하게 그의 집을 찾아오던 친구 야트게이르는 여자가 생기고 나서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고, 그것이 벌써 수년 전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다. 유령일까, 혹은 자신의 착각일까 생각하며 점차 겁이 나기 시작한 그에게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번에는 진짜 야트게이르가 나타난다. 하지만 오랜 친구인 그는 그냥 잠깐 인사만 하려고 들렀다며, 금방 돌아간다. 그리고 엘리아스는 상점가에 나갔다가 야트게이르가 바다 위에 떠서 죽은 채로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자신과 얘기를 나눈 지 삼십 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몇 시간 전에 익사체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총 3장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야트게이르의 시점으로 짝사랑하던 엘리네와 재회하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1장, 그의 친구인 엘리아스의 독백으로 채워진 2장, 그리고 엘리네의 남편 프랑크의 관점으로 서술되는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부인 야트게이트는 자신의 배에 '엘리네'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는 그 배를 타고 바임에서 대도시인 비에르그빈으로 간다. 헐거워진 단추를 다시 달기 위한 바늘 한 개와 검은 실 한 타래를 사기 위해서였는데, 힘들게 구했지만 가격이 무려 250크로네라는 걸 알게 된다. 어쩔 수 없이 두 번이나 상인들에게 그렇게 사기를 당해 지긋지긋해진 마음으로 돌아가려는데, 우연찮게 오래 전부터 짝사랑했던 엘리네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자신의 결혼생활이 불행하다고, 남편으로부터 도망쳐 다시 고향인 바임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와달라고 말한다. 그렇게 야트게이르는 그녀와 함께 바임으로 향한다. 




지금 나는 사트로트의 순에 있는 내 거실, 내 고향집 거실에 앉아, 부두에 정박해 있는 나의 너무나 아름다운 배 엘리네를 내다보면서 생각한다, 내 나이 일흔다섯이 될 동안, 나는 엘리네와 나에 대해 그토록 자주 곱씹어보았지만 결국 다다른 생각은 모든 것이 참으로 이상했다는 것 뿐이었다, 그래서 내 묘비에는 이렇게 적어야겠다고 생각해 왔다─모든 것이 이상했다─하지만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하니 그저 단순한 십자가 하나면 충분할 것 같았다, 그렇다 내 묘비에는 십자가 하나만 있으면 된다,                 p.192


1장에서 벌어진 야트게이르의 이야기는 2장에서 그의 친구인 엘리아스의 독백으로 뒷이야기를 들려준다. 사람들은 야트게이르가 멀리 다른 곳에서 결혼한 여자를 데려왔다고 '유부녀 납치 사건'이라고 그 상황에 대해서 말한다. 여자의 남편이 언제든 바임으로 와서 아내를 데려갈 거고, 야트게이르를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들 했다. 하지만 별다른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고, 유일한 친구였던 야트게이르와 엘리아스의 관계도 점차 소원해진다. 3장에서는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다가왔다가 또다시 갑작스럽게 떠나간 엘리네에 대해 추억하는 그녀의 남편 프랑크의 이야기가 보여진다. 그녀가 시키는 대로 운명처럼 이끌려 살았던 그의 수수께끼 같았던 삶을 되돌아보는 것이 중심 서사이다. 이상한 방식으로 자신의 삶에 들어왔다가 역시나 이상한 방식으로 자신의 삶에서 떠나버린 엘리너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지만, 작품은 그렇게 세 남자의 시점으로 한 여성에 대해 서술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욘 포세는 <아침 그리고 저녁>, <멜랑콜리아> 등에서 보여줬던 것과 같이 이 작품에서도 마침표 없이 쉼표로만 이루어진 텍스트로 압축과 반복으로 특유의 리듬감을 만들어 낸다. 단순하고 간결한 문장으로, 등장 인물이 많은 것도 아니며, 커다란 사건이나 갈등이 일어나는 것도 아닌데 시종일관 눈을 뗄 수 없는 흡입력을 발휘하고 있다. 욘 포세는 노벨상을 수상하기 전 이미 희곡을 통해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입센 다음으로 가장 많은 작품이 상연된 노르웨이 극작가’로서 현대 연극의 최전선을 이끌고 있으며, 언어가 아닌 언어 사이, 그 침묵과 공백의 공간을 파고드는 실험적 형식으로 ‘21세기 베케트’라는 수식어를 얻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소설들은 마치 연극의 독백처럼 천천히 읽히며, 누군가의 생을 압축적으로 담아내고 있으면서도 과장되지 않게 담백하게 쓰여 있어 쉼표와 쉼표 사이 여백이 깊이있게 느껴지곤 했다. 특유의 리듬이 특별한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어 어느 순간 그 나직하고 고요함 속에 몸을 맡기면 물 흘러가듯 페이지가 넘어가곤 한다. 이 작품은 <바임 호텔>, <바임 위클리>로 이어질 '바임 3부작'의 첫 권이다. 2025년부터 2027년까지 3년간 매년 한 권씩 이어질 작품이라 다음 이야기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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