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받은 사람 중에 가장 축복받은
박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복미영 팬클럽 흥망사」이어 출간된 박지영작가님의 신작 장편소설이자 10년 전부터 쓰고 계셨던 「저주받은 사람 중에 가장 축복받은」을 읽었습니다.

앞서 읽었던 김나현작가님의 「모든 시간이 나에게 일어나」가 여러 인물들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이 되어 약간의 혼동을 주었다면 이번 박지영작가님의 「저주받은 사람 중에 가장 축복받은」의 경우에는 가전제품 서비스센터에서 직장선배로 있던 마태공이 퇴사 후 차린 디지털 세탁소 ‘더 빨래‘에 이직(코로나보다 더 강력한 파라노이드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거의 반강제로 퇴사하다시피한)한 변우식(중반부에 이르러 우식이 머리에 칠이 벗겨져 대머리에 가까운 정가 2만 9900원인 중고 앵무새인형을 당근마켓에서 99만원에 판매한다는 글을 올리고 그 인형을 구매하려고 정확하게는 「휴먼북 조기준」을 열람했던 변우식을 만나기 위해 시나리오 작가인 강선재라는 이름으로 만나게 되는 것을 보고 작가님이 변우석배우가 출연했던 화제의 드라마「선재 업고 튀어」를 인상깊게 보신 것이 아닐까했습니다.)이 휴먼북 서비스에서 열람한 90% 할인가로 대여 중인 「휴먼북 조기준」속 ‘소년‘이 후반부로 갈수록 마치 기억이 왜곡된 것처럼 사건과 심정같은 것이 종잡을 수 없이 변하기 때문에 약간의 혼란스러움을 느꼈지만 흥미롭게 읽어나갔고 우리나라는 아직 전쟁종료를 선언한 국가가 아니며 언제라도 우리나라를 포함한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국가에서도 전쟁이 발발될 수 있지만 아직까지도 전쟁 중이라 굳게 믿은 채 살아가던 소년같은 인물을 만나게 된다면 어떨지 궁금했습니다.

이 소설은 지난달 5일에 출간되었고 작가님이 10년 전부터 쓰고 계셨기에 당연히 작가님이 의도하셨다고 생각이 들진 않지만 최근 어떤 충격적 소식들을 접하며 84쪽 ‘늬우친 사람이 새로운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 나쁜가. (......) 어쩌면 더러움은 더러움으로 남겨둔 채 강력한 처벌을 하고 인간은 빨아 쓸 수 없다는 말을 진리로 믿으며 죄를 죄로 박제해두는 것이 악의 재발을 막는 데, 정당한 사회를 만드는 데 더 도움이 되는 일인지도 몰랐다. 가해자가 반성하는 척하는 것, 가해해놓고 용서까지 바라는 것에 피해자들이 더 분노하고 힘들어하는 모습도 많이 보아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끝까지 용서를 구하지 않은 채 가해자로 남는 것만이 정의인가.‘ 같은 문장들을 읽은 후 저도 우식처럼 어떠한 판단도 하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조기준이 불우했던 과거를 지나 방탈출카페인 ‘벙커 1983‘을 개업하게 되는 데 실제로 있다면 저는 아직 한번도 방탈출카페에 가보진 않았지만 한 번 방문해보고 싶습니다.
박지영작가님, 좋은 글을 읽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든 시간이 나에게 일어나
김나현 지음 / 은행나무 / 202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 사건 오류」김나현작가님의 2025년 신작 장편소설 「모든 시간이 나에게 일어나」를 읽어보았습니다.

이나을(왠지 모르게 한 글자만 다른 사람이 생각난 것은 그저 기분탓이겠지요.)이라는 23살 신인 배우가 윤희재감독의 신작 영화에 전격 주연급으로 캐스팅되어 촬영 중이었으나 앵두라는 닉네임을 가진 이가 나을의 초등학교 시절 나을에게 학교폭력을 당하였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잘못하면 영화에서 하차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자신의 과거를 추적하게 되는 이야기인데 「사랑 사건 오류」에서도 한 번 경험해봤지만 여러 인물의 시점이 나와 어떤 분이 소설을 읽고 남기신 것처럼 조금 헷갈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었기에 끝까지 읽었고 그저 읽은 후로는 나을과 나을을 둘러싼 인물들이 그저 행복했으면 하는 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을의 엄마는 도저히 용서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김나현작가님, 좋은 글을 읽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의 사랑하는 거 말고
김병운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병운작가님의 두번째 소설집 「거의 사랑하는 거 말고」가 12월 1일에 출간되어 읽었습니다.

(봄에는 더 잘해줘)
영묵씨를 받아들이고 예뻐해주는 엄마와 그런 엄마를 극진하게 대하려는 영묵씨를 보며 ‘더없이 전형적이고 평범해서 내게는 허락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이 모든 상황이 우리에게 익숙해지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어떻게든 단축해보고 싶었던(36쪽)‘ 나의 진부하지만 간절히 원했던 욕망.

(만나고 나서 하는 생각)
‘잘 봐, 나는 너를 모르는 척할 수 있는 것처럼 너의 비밀도 모르는 척할 수 있어. 그러니까 너의 비밀은 안전해.(51쪽)‘
서로가 지니고 있었던 깊은 상처와 분노에 쌓여 알고자 하지 않았던 진심, 그 누구도 영원히 몰랐으면 하는 비밀들을 더 늦기 전에 똑바로 바라보며 잘 지나온 홍주와 나 사이에서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천진한 홍주의 아들 원기.

(크리스마스에 진심)
‘너는 말이야. 동네 아줌마들, 할머니들 얘기 듣는 걸 좋아했어. 어른들 옆에 얌전히 앉아서, 어른들이 무슨 얘기를 하면 전부 다 알아듣는 것처럼 방긋방긋 웃으면서, 아직 말도 제대로 못하는 게 몇 시간이고 울지도 않고 나를 찾지도 않고 그렇게 오래오래 어른들 사는 얘기를 들었어. 너는 그런 아이였어.(105쪽)‘
이제는 볼 수 없게 되었고 그로인해 돌려 줄 수도 없게 된 P의 디지털 피아노를 용이의 조카인 찬오에게 선뜻 주는 추운 겨울 한복판에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의 따뜻한 산타할아버지의 모자같은 마음을 지닌 찬오대신 삼촌인 용이와 더 놀아주겠다고 약속한 나.

(세월은 우리에게 어울려)
‘나를 죽게 한 건 병이 아니고 사람이었다는 걸. 그러니 나를 살게 할 수 있는 것도 약이 아니고 사람이라는 걸.
(......) 절대로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았다고. 곁에 있는 사람을 하루라도 더 살고 싶게 만드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내가 이렇게 지금도 잘 지내고 있다고.(121~2쪽)‘
가족들에게 이미 죽음을 선고받아버린 장희의 삼촌 원진무씨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 부산에서 진무 삼촌을 곁에서 지켜봐온 이영서씨를 만나 진무 삼촌과 화상 면회를 하고 진무 삼촌의 고장난 카메라를 작동시키며 한 시절의 끝이자 시작을 맞이하는 장희와 나.

(교분)
‘너는 항상 땅만 보고 걸었어. 복도에서도 운동장에서도. 그러면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그 시절의 너는 너무 빛나서 어디서든 잘 보였는데.(164쪽)‘
그 시절 어느 누구보다도 나를 알아봐주고 이해해주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을 매번 단속해야 했던 김준일선생님과 자신을 빼닮은 후배이자 그 애인 김인경의 이름을 발음해보는 소설가 이윤범과 함께 잘 지나온 친구 재효.
(아마도 이재현편집자님이 가장 인상깊게 읽었던 단편일 것이라 생각이 드는 게 단편의 끝 여백에 페이지 표시를 하지 않았던 다른 단편과 달리 끝난 후 여백에 176 페이지 표시가 되어 있어서라는 저의 망상같은 추측을 해봅니다.)

(오프닝 나이트)
‘진짜가 아니구나. 삶을 내걸고 쓴 게 아니었구나. 아니, 어쩌면 기만당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 삶을 훔쳤다고, 자격도 없으면서 이득을 취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아닐까?(199쪽)‘ 와
‘언제나 너의 첫 독자일 수 있었던 그 특별한 영광이 실은 내게 암묵적 동의를 구하는 절차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느닷없이 나를 습격해왔을 때, 나는 너의 인스타그램에 공개된 내 사진을 모두 숨겨달라고 말했다. 자랑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투쟁하고 싶어서 업로드했던 우리의 모습을 더는 사람들이 볼 수 없게 해달라고 말했다.(200쪽)‘ 같은 문장들을 읽으며 불현듯 떠올랐던 어떤 사람들.

(그리고 여기서부터가 사소한 일이다)
‘먼저 말해볼까 싶다가도 거절을 당하는 건 또 싫어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은 건 나였고 우리의 공백은 펜데믹 때문은 아니었으니까.(232쪽)‘
코로나바이러스에 확진된 엄마를 대신하여 엄마와 함께 살던 동네에서 만난 한때는 하트현이라며 별명을 지어주며 선후배사이로 지냈으나 이제는 깍듯이 존대하는 ♥현이 빗어내는 만둣 가게가 있고 장현씨와 손을 마주잡고 거닐 수 있는 동네가 다시 좋아지려고 하는 선배이자 소설가인 나.

「거의 사랑하는 거 말고」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제가 떠올려버린 어떤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진짜 (진심으로) 사랑을 하여 자신들의 시절을 잘 지나오며 자신들에게 찾아로는 한 시절의 끝과 시작을 잘 맞이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김병운작가님, 좋은 글을 읽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의 사랑하는 거 말고
김병운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병운작가님의 두번째 소설집 「거의 사랑하는 거 말고」가 12월 1일에 출간되어 읽었습니다.

(봄에는 더 잘해줘)
영묵씨를 받아들이고 예뻐해주는 엄마와 그런 엄마를 극진하게 대하려는 영묵씨를 보며 ‘더없이 전형적이고 평범해서 내게는 허락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이 모든 상황이 우리에게 익숙해지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어떻게든 단축해보고 싶었던(36쪽)‘ 나의 진부하지만 간절히 원했던 욕망.

(만나고 나서 하는 생각)
‘잘 봐, 나는 너를 모르는 척할 수 있는 것처럼 너의 비밀도 모르는 척할 수 있어. 그러니까 너의 비밀은 안전해.(51쪽)‘
서로가 지니고 있었던 깊은 상처와 분노에 쌓여 알고자 하지 않았던 진심, 그 누구도 영원히 몰랐으면 하는 비밀들을 더 늦기 전에 똑바로 바라보며 잘 지나온 홍주와 나 사이에서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천진한 홍주의 아들 원기.

(크리스마스에 진심)
‘너는 말이야. 동네 아줌마들, 할머니들 얘기 듣는 걸 좋아했어. 어른들 옆에 얌전히 앉아서, 어른들이 무슨 얘기를 하면 전부 다 알아듣는 것처럼 방긋방긋 웃으면서, 아직 말도 제대로 못하는 게 몇 시간이고 울지도 않고 나를 찾지도 않고 그렇게 오래오래 어른들 사는 얘기를 들었어. 너는 그런 아이였어.(105쪽)‘
이제는 볼 수 없게 되었고 그로인해 돌려 줄 수도 없게 된 P의 디지털 피아노를 용이의 조카인 찬오에게 선뜻 주는 추운 겨울 한복판에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의 따뜻한 산타할아버지의 모자같은 마음을 지닌 찬오대신 삼촌인 용이와 더 놀아주겠다고 약속한 나.

(세월은 우리에게 어울려)
‘나를 죽게 한 건 병이 아니고 사람이었다는 걸. 그러니 나를 살게 할 수 있는 것도 약이 아니고 사람이라는 걸.
(......) 절대로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았다고. 곁에 있는 사람을 하루라도 더 살고 싶게 만드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내가 이렇게 지금도 잘 지내고 있다고.(121~2쪽)‘
가족들에게 이미 죽음을 선고받아버린 장희의 삼촌 원진무씨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 부산에서 진무 삼촌을 곁에서 지켜봐온 이영서씨를 만나 진무 삼촌과 화상 면회를 하고 진무 삼촌의 고장난 카메라를 작동시키며 한 시절의 끝이자 시작을 맞이하는 장희와 나.

(교분)
‘너는 항상 땅만 보고 걸었어. 복도에서도 운동장에서도. 그러면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그 시절의 너는 너무 빛나서 어디서든 잘 보였는데.(164쪽)‘
그 시절 어느 누구보다도 나를 알아봐주고 이해해주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을 매번 단속해야 했던 김준일선생님과 자신을 빼닮은 후배이자 그 애인 김인경의 이름을 발음해보는 소설가 이윤범과 함께 잘 지나온 친구 재효.
(아마도 이재현편집자님이 가장 인상깊게 읽었던 단편일 것이라 생각이 드는 게 단편의 끝 여백에 페이지 표시를 하지 않았던 다른 단편과 달리 끝난 후 여백에 176 페이지 표시가 되어 있어서라는 저의 망상같은 추측을 해봅니다.)

(오프닝 나이트)
‘진짜가 아니구나. 삶을 내걸고 쓴 게 아니었구나. 아니, 어쩌면 기만당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 삶을 훔쳤다고, 자격도 없으면서 이득을 취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아닐까?(199쪽)‘ 와
‘언제나 너의 첫 독자일 수 있었던 그 특별한 영광이 실은 내게 암묵적 동의를 구하는 절차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느닷없이 나를 습격해왔을 때, 나는 너의 인스타그램에 공개된 내 사진을 모두 숨겨달라고 말했다. 자랑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투쟁하고 싶어서 업로드했던 우리의 모습을 더는 사람들이 볼 수 없게 해달라고 말했다.(200쪽)‘ 같은 문장들을 읽으며 불현듯 떠올랐던 어떤 사람들.

(그리고 여기서부터가 사소한 일이다)
‘먼저 말해볼까 싶다가도 거절을 당하는 건 또 싫어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은 건 나였고 우리의 공백은 펜데믹 때문은 아니었으니까.(232쪽)‘
코로나바이러스에 확진된 엄마를 대신하여 엄마와 함께 살던 동네에서 만난 한때는 하트현이라며 별명을 지어주며 선후배사이로 지냈으나 이제는 깍듯이 존대하는 ♥현이 빗어내는 만둣 가게가 있고 장현씨와 손을 마주잡고 거닐 수 있는 동네가 다시 좋아지려고 하는 선배이자 소설가인 나.

「거의 사랑하는 거 말고」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제가 떠올려버린 어떤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진짜 (진심으로) 사랑을 하여 자신들의 시절을 잘 지나오며 자신들에게 찾아로는 한 시절의 끝과 시작을 잘 맞이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김병운작가님, 좋은 글을 읽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의 사랑하는 거 말고
김병운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병운작가님의 두번째 소설집 「거의 사랑하는 거 말고」가 12월 1일에 출간되어 읽었습니다.

(봄에는 더 잘해줘)
영묵씨를 받아들이고 예뻐해주는 엄마와 그런 엄마를 극진하게 대하려는 영묵씨를 보며 ‘더없이 전형적이고 평범해서 내게는 허락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이 모든 상황이 우리에게 익숙해지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어떻게든 단축해보고 싶었던(36쪽)‘ 나의 진부하지만 간절히 원했던 욕망.

(만나고 나서 하는 생각)
‘잘 봐, 나는 너를 모르는 척할 수 있는 것처럼 너의 비밀도 모르는 척할 수 있어. 그러니까 너의 비밀은 안전해.(51쪽)‘
서로가 지니고 있었던 깊은 상처와 분노에 쌓여 알고자 하지 않았던 진심, 그 누구도 영원히 몰랐으면 하는 비밀들을 더 늦기 전에 똑바로 바라보며 잘 지나온 홍주와 나 사이에서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천진한 홍주의 아들 원기.

(크리스마스에 진심)
‘너는 말이야. 동네 아줌마들, 할머니들 얘기 듣는 걸 좋아했어. 어른들 옆에 얌전히 앉아서, 어른들이 무슨 얘기를 하면 전부 다 알아듣는 것처럼 방긋방긋 웃으면서, 아직 말도 제대로 못하는 게 몇 시간이고 울지도 않고 나를 찾지도 않고 그렇게 오래오래 어른들 사는 얘기를 들었어. 너는 그런 아이였어.(105쪽)‘
이제는 볼 수 없게 되었고 그로인해 돌려 줄 수도 없게 된 P의 디지털 피아노를 용이의 조카인 찬오에게 선뜻 주는 추운 겨울 한복판에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의 따뜻한 산타할아버지의 모자같은 마음을 지닌 찬오대신 삼촌인 용이와 더 놀아주겠다고 약속한 나.

(세월은 우리에게 어울려)
‘나를 죽게 한 건 병이 아니고 사람이었다는 걸. 그러니 나를 살게 할 수 있는 것도 약이 아니고 사람이라는 걸.
(......) 절대로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았다고. 곁에 있는 사람을 하루라도 더 살고 싶게 만드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내가 이렇게 지금도 잘 지내고 있다고.(121~2쪽)‘
가족들에게 이미 죽음을 선고받아버린 장희의 삼촌 원진무씨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 부산에서 진무 삼촌을 곁에서 지켜봐온 이영서씨를 만나 진무 삼촌과 화상 면회를 하고 진무 삼촌의 고장난 카메라를 작동시키며 한 시절의 끝이자 시작을 맞이하는 장희와 나.

(교분)
‘너는 항상 땅만 보고 걸었어. 복도에서도 운동장에서도. 그러면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그 시절의 너는 너무 빛나서 어디서든 잘 보였는데.(164쪽)‘
그 시절 어느 누구보다도 나를 알아봐주고 이해해주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을 매번 단속해야 했던 김준일선생님과 자신을 빼닮은 후배이자 그 애인 김인경의 이름을 발음해보는 소설가 이윤범과 함께 잘 지나온 친구 재효.
(아마도 이재현편집자님이 가장 인상깊게 읽었던 단편일 것이라 생각이 드는 게 단편의 끝 여백에 페이지 표시를 하지 않았던 다른 단편과 달리 끝난 후 여백에 176 페이지 표시가 되어 있어서라는 저의 망상같은 추측을 해봅니다.)

(오프닝 나이트)
‘진짜가 아니구나. 삶을 내걸고 쓴 게 아니었구나. 아니, 어쩌면 기만당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 삶을 훔쳤다고, 자격도 없으면서 이득을 취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아닐까?(199쪽)‘ 와
‘언제나 너의 첫 독자일 수 있었던 그 특별한 영광이 실은 내게 암묵적 동의를 구하는 절차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느닷없이 나를 습격해왔을 때, 나는 너의 인스타그램에 공개된 내 사진을 모두 숨겨달라고 말했다. 자랑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투쟁하고 싶어서 업로드했던 우리의 모습을 더는 사람들이 볼 수 없게 해달라고 말했다.(200쪽)‘ 같은 문장들을 읽으며 불현듯 떠올랐던 어떤 사람들.

(그리고 여기서부터가 사소한 일이다)
‘먼저 말해볼까 싶다가도 거절을 당하는 건 또 싫어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은 건 나였고 우리의 공백은 펜데믹 때문은 아니었으니까.(232쪽)‘
코로나바이러스에 확진된 엄마를 대신하여 엄마와 함께 살던 동네에서 만난 한때는 하트현이라며 별명을 지어주며 선후배사이로 지냈으나 이제는 깍듯이 존대하는 ♥현이 빗어내는 만둣 가게가 있고 장현씨와 손을 마주잡고 거닐 수 있는 동네가 다시 좋아지려고 하는 선배이자 소설가인 나.

「거의 사랑하는 거 말고」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제가 떠올려버린 어떤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진짜 (진심으로) 사랑을 하여 자신들의 시절을 잘 지나오며 자신들에게 찾아로는 한 시절의 끝과 시작을 잘 맞이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김병운작가님, 좋은 글을 읽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