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코워커
프리다 맥파든 지음, 최주원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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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 후 단 한 번도 ‘845분 출근을 어긴 적 없는 돈 쉬프가 출근하지 않자 옆자리의 동료 내털리는 의문에 사로잡힙니다. 더구나 대신 받은 돈의 업무용 전화기에서 분명 그녀의 목소리로 도와주세요라는 말을 들은 내털리는 사고라도 벌어진 게 아닐까, 걱정합니다. 결국 외근 중 돈의 집에 들른 내털리는 명백히 범죄현장으로 보이는 장면을 목격하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문제는 목격자이자 신고자인 내털리가 용의자로 지목된 점. 돈의 집에선 내털리의 범행을 입증하는 단서들이 수두룩이 발견됐고, 직장동료들은 내틸리가 돈을 지속적으로 괴롭혔다고 진술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 흔적만 남긴 채 행방이 묘연해진 돈이 시신으로 발견된다면 내털리가 종신형을 피하는 건 불가능해 보입니다.

 


2023핸디맨이후 2년여 만에 무려 다섯 편의 작품이 한국에 소개된 프리다 맥파든의 신작입니다. 올봄에 출간된 하우스메이드 2’를 제외하고 모두 읽었는데, 심리스릴러를 기반으로 한 미스터리 서사가 마음에 들어서 신작 소식이 들릴 때마다 그녀의 작품을 찾아 읽게 됐습니다. 검색해보니 하우스 메이드 시리즈는 단편을 포함하여 모두 4편이나 출간됐고, 스탠드얼론은 ‘The Tenant’(20255)까지 무려 18편이나 됩니다. 이 가운데 몇 편이나 한국에 소개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의 작품을 읽을 기회가 적지 않을 거란 건 확실해 보입니다.

 

이야기를 이끄는 주인공은 동료들 모두가 좋아하는 성격과 외모에다 뛰어난 실적과 매력적인 남친까지 겸비한 내털리와, 사람보다 거북이를 더 좋아하며 지독한 강박증과 결벽증에다 대인소통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돈입니다. 그야말로 극과 극의 캐릭터가 사무실 바로 옆자리에 앉은 코워커(직장동료)가 된 셈입니다.

 

더 코워커는 여러 가지 서사가 미묘하게 뒤섞인 심리스릴러입니다. 피해자가 종적을 감춘 (살인으로 추정되는) 사건이 벌어진 가운데 몇 명 안 되는 등장인물 사이에 모함, 직장 내 괴롭힘, 시기와 질투, 불륜, 음모, 복수 등 복잡하고도 불온한 관계와 감정들이 이리저리 얽혀있는데, 실은 마지막 페이지까지 독자를 혼란에 빠지게 만드는, 즉 이 작품의 가장 매력적이면서도 치명적인 재료는 바로 거짓말입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전개되는데, 하나는 하루아침에 살인용의자로 전락한 내털리가 어떻게든 자신이 빠진 진창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돈이 9개월 전부터 최근까지 절친인 미아에게 보낸 이메일 내용입니다. 입사 직후부터 내털리와의 관계를 상세히 묘사한 돈의 이메일들은 내털리에 대한 의심을 확고하게 만듭니다.

한 챕터씩 번갈아 등장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누군가 한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게 분명해지는데, 문제는 모두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는데다 양쪽 이야기가 다 그럴듯해 보여서 도대체 누구를 믿고 응원해야 되는 건지,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지 모호해진다는 점입니다. 이 모호함은 마지막 페이지까지 독자를 긴장감 속에 빠지게 만드는 것은 물론 흥미진진한 반전의 발판이 되기도 합니다.

 

전체 분량의 2/3정도인 1부는 다소 긴장감도 떨어지고 대체로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만 진행돼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국면을 펼치는 2부부터 더 코워커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고, 엄청 빠른 속도로 마지막 페이지까지 폭주합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작품의 가장 매력적이면서도 치명적인 재료인 거짓말의 진가가 드러납니다. 과연 거짓말을 한 건 누구일까요? 그 거짓말 속에 깃든 진짜 악의는 무엇일까요? 그 거짓말은 진짜 거짓말이긴 할까요?

 

더 코워커의 엔딩은 프리다 맥파든의 전작들과는 사뭇 다른 결을 지니고 있습니다. 독자마다 조금씩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꽤 마음에 드는 엔딩이었습니다. 다른 결을 어떻게든 적당한 단어로 표현해보고 싶었지만 그 자체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포기했습니다. 다만 아주 촉이 뛰어난 독자가 아니라면 쉽게 예상할 수 없는 뜻밖의 엔딩이 기다리고 있다는 정도만 언급하겠습니다.

 

혹시 이 작품을 통해 프리다 맥파든을 관심작가로 삼은 독자라면 한국에 출간된 그녀의 작품 가운데 저의 원픽인 네버 라이를 읽어볼 것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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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
세스지 지음, 전선영 옮김 / 반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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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오컬트 호러 작가 세스지는 새내기 편집자 오자와의 부탁을 받고 함께 괴담 특집기사를 준비합니다. 오자와는 수십 년에 걸쳐 의문의 자살과 실종이 벌어진 것은 물론 갖가지 으스스한 괴담을 양산한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 ●●●●●에 주목하곤 그곳에 관한 과거의 자료들을 모아 세스지와 의견을 나눕니다. 하지만 직접 ●●●●●을 찾아가 조사를 하겠다던 오자와는 이내 행방불명이 되고 맙니다. 세스지는 인터넷에 제 친구가 소식이 끊기고 말았습니다. 이 일과 관련해 정보를 구하고 있습니다라는 메시지를 올리곤 ●●●●●와 관련된 각종 기사와 르포 등을 공개하며 오자와의 목격 정보를 간절하게 요청합니다.

 


호러물 마니아까지는 아니어도 나름 많이 알려진 작품들은 꽤 읽었다고 자부해왔지만,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는 지금껏 읽은 어느 호러물과도 비슷한 구석이 전혀 없는 독특한 형식과 서사를 지닌 작품입니다. 작가 세스지와 편집자 오자와가 ●●●●● 일대에서 벌어진 숱한 사건과 괴담의 진상을 파헤치는 르포 스타일의 호러물이긴 하지만, 기승전결도 없고, 딱히 세스지와 오자와를 주인공으로 보기도 어려우며, 이야기의 대부분은 여러 매체에서 발췌한 ●●●●●에 관한 기사와 르포, 인터넷의 익명 글, 독자 편지, 인터뷰 녹취 등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독자 입장에선 소설을 읽는다기보다 숏폼 스타일의 괴담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질 수밖에 없는데, 이는 이 작품이 취한 모큐멘터리 기법, 즉 허구의 상황을 실제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에 기인합니다.

 

세스지가 인터넷에 올린 ●●●●● 관련 자료들은 짧게는 한 페이지, 길어도 20페이지를 넘지 않을 정도로 단편적이지만, 하나같이 동기를 알 수 없는 자살, 경위를 짐작할 수 없는 실종,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집단히스테리, 유령의 소행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으스스한 괴담들인데다 일상 속에서 벌어진 일들을 팩트처럼 설명하고 있어서 독자로 하여금 이건 진짜다!”라는 현실적인 공포감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유일하게 픽션처럼 읽히는 대목은 세스지와 오자와가 자료를 놓고 의견을 나누며 왜 이 모든 일들이 ●●●●●에서 벌어졌는가?”를 추론하는 장면들인데, 실은 이 장면들마저도 팩트 체크같은 분위기를 발산해서 오히려 그들 앞에 놓인 자료들의 현실감을 더욱 부각시키곤 합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도대체 이 이야기를 어떻게 마무리하려는 걸까?”라는 궁금증이 증폭됩니다. 미스터리 호러물처럼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엔딩이 나올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이고, 그렇다고 해서 사건과 괴담만 나열하다가 설명되지 않는 것은 억지로 설명할 필요도, 설명할 수도 없다라며 황당하게 이야기를 마무리할 것 같지도 않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려는 마지막 다섯 페이지에서 깨끗이 불식되는데, 작가는 독자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그 어느 호러물에서도 맛볼 수 없었던 전혀 다른 질감의 공포를 선사하며 막을 내립니다. 처음엔 이게 뭐지?” 싶었지만, 그 다섯 페이지를 다시 한 번 읽는 동안 발끝에서부터 아주 천천히 냉기가 올라오는 느낌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동시에 작가가 날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희롱과 저주를 번갈아 퍼부어왔구나...”라는 기기묘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는데, 그래선지 앞서 읽어온 사건과 괴담의 오싹함이 수십 배는 더 강렬하게 머릿속에서 되새김질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런 스타일의 호러물입니다라고 비교할 만한 작품이 없어서 알맞은 추천의 말이 떠오르진 않지만, ‘밤에 읽기 무서운 호러물을 찾는 독자라면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는 충분히 괜찮은 선택이 돼줄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페이지에 대해선 다소 의견이 갈릴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호러물 마니아라 자부하는 독자라도 신선한 충격과 오싹함을 만끽할 수 있을 거란 생각입니다.

 

- 사족이지만 노파심에 한마디만 한다면 대형 스포일러와 마주칠 가능성이 있으니 가급적 다른 독자들의 서평은 책을 다 읽은 뒤에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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쌈리의 뼈 로컬은 재미있다
조영주 지음 / 빚은책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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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평택역 인근의 집창촌 쌈리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을 그린 소설 쌈리의 뼈를 집필하던 중 치매에 걸린 윤명자는 딸 해환에게 소설의 완성을 부탁합니다. 엄마의 부탁이 내키지 않았던 해환은 쌈리의 한 성매매업소에서 유골이 발견됐다는 소식에 깜짝 놀라며 엄마가 쓰던 소설이 어쩌면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복잡한 심경이 됩니다. 결국 소설 집필에 달려든 해환은 직접 쌈리를 찾아가 취재하는 것은 물론 주인공 에 의해 여러 여자가 살해당하는 소설 내용이 사실이라 확신하며 과연 누가 인지를 찾아내기 위해 수차례의 수정을 고치며 소설을 완성해나갑니다. 그러던 중 해환은 어쩌면 엄마가 엄청난 비밀을 숨겨왔을지도 모른다는 충격적인 결론에 이릅니다.

 


쌈리의 뼈는 치매와 기억에 관한 심리스릴러이자 오토픽션(Autofiction, 작가의 실제 경험과 허구가 결합된 문학)과 살인사건이 절묘하게 결합된 미스터리입니다. 치매에 걸린 엄마와, 엄마를 간호하다가 스스로의 기억에 문제가 생긴 딸 사이에 벌어지는 심리스릴러가 바탕에 깔린 가운데 혹시 오토픽션을 즐겨 쓰던 엄마가 소설 속 연쇄살인범 가 아닐까?”라며 의심하는 딸이 진짜 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상상과 추리를 동원하여 소설을 완성하는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로 짐작되는 사람이 바뀔 때마다 해환이 집필하는 소설은 큰 폭으로 수정됩니다. 윤명자가 집필한 소설 초반부엔 거듭되는 연쇄살인만 묘사됐을 뿐 의 성별과 나이조차 그려져 있지 않은데, 그러다 보니 해환은 윤명자가 일 수도 있고, 거꾸로 윤명자가 의 범죄피해자일 수도 있으며, 거꾸로 쌈리의 뼈는 오토픽션이 아니라 100% 허구일 수도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던 중 윤명자의 오랜 편집자인 상모 아저씨와 함께 쌈리를 직접 취재하면서 해환의 추리는 급물살을 탑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두 건의 죽음이 발생하자 해환은 큰 충격과 함께 그동안 써놓은 소설에 대해서도 확신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독자의 관심은 “‘의 정체는 누구?”에 가장 먼저 쏠릴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애초 쌈리의 뼈를 쓰려 했던 윤명자의 진짜 의도는 무엇이며 치매와 제정신을 오가는 그녀가 딸 해환에게 밝히지 않은 비밀과 거짓말은 무엇인가?”에도 촉각이 곤두서게 됩니다. 또한 진실에 다가가면 갈수록 소설이 단지 엄마 윤명자뿐 아니라 자신과도 연관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해환 때문에 독자의 호기심과 궁금증은 증폭될 수밖에 없습니다.

 

해환 주변의 조연들은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하나같이 의심스러운 구석을 지니고 있습니다. 윤명자의 데뷔시절부터 함께 해온 편집자 상모 아저씨, 뼈가 발견된 성매매업소 사장 핑크젠틀맨, 아직도 성매매 일을 하는 미니라는 이름의 여성, 윤명자처럼 치매기가 보이는 붕어빵 할머니와 그녀를 언니라고 부르는 미용실 언니 등 대부분 악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지만 뭔가를 감추는 듯한 인상을 풍기곤 해서 마지막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가장 아쉬웠던 대목은 인물들의 관계가 자연스럽지못했다는 점입니다. 딱히 구체적으로 말할 순 없지만 왠지 작위적으로 엮인 듯한 인상을 여러 차례 받았고, 일부 인물은 등장 자체나 역할이 다분히 도구적으로 보인 게 사실입니다. 모든 관계의 중심에 있는 해환도 간혹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보이곤 하는데, 그런 탓에 한참 그녀에게 몰입해 있다가 갑자기 툭 하고 몰입이 끊긴 적도 몇 번 있었습니다. 독자에 따라 소설 쌈리의 뼈와 현실 사건 사이의 접점에 대해 시비를 거는 경우도 있을 것 같은데, 저 역시 살짝 의문이 들기도 해서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참고해볼 생각입니다.

 

아주 오래 전 붉은 소파를 읽은 뒤로 처음 만난 조영주의 작품이라 무척 반가웠습니다. 소개글을 보니 이 작품이 시간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라는데, 기회가 되면 나머지 두 작품도 찾아 읽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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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미 넉 장 반 신화대계 다다미 넉 장 반
모리미 도미히코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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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발하면서도 예스럽고 신나는 소동극 같으면서도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세계를 그린 듯한 로맨스 판타지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이하 밤은 짧아~’)를 읽고 모리미 토미히코의 팬이 됐지만 그 후에 읽은 야행열대는 살짝 난해했던 데다 제 취향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서 무척 아쉬웠습니다. 그래선지 2024년에 개정판이 나온 유정천 가족에 눈길이 끌렸으면서도 끝내 읽지 않았는데, ‘다다미 넉 장 반 신화대계를 덮어놓고 장바구니에 담은 건 왠지 밤은 짧아~’의 분위기와 닮은 것 같다는 기대감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풋풋한 대학 신입생이던 2년 전, ‘는 장밋빛 캠퍼스 라이프를 꿈꾸며 마음에 드는 동아리를 찾아 나섰습니다. ‘의 눈길을 끈 건 영화 동아리 ’, ‘제자 구함이라는 기상천외한 전단을 돌린 정체불명의 동아리, 소프트볼 동아리 포그니’, 그리고 자칭 비밀기관인 복묘반점등 네 곳이었습니다. ‘는 마치 평행세계를 살 듯 이 네 곳의 동아리를 모두 경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는 어느 동아리에도 제대로 녹아들지 못했고, 달콤하고 행복했던 일보다는 쓰고 맵싸했던 일만 기억나는, 그래서 결국엔 후회와 한탄만 남는 시간을 보내고 맙니다.

 


대학 3학년 봄까지 2년간, 실익 있는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노라고 단언해두련다. 만약 (신입생이던) 그때 다른 길을 선택했더라면 나는 지금과는 다른 2년간을 보냈을 것이다. 환상의 지보(至寶)라 불리는 장밋빛 캠퍼스 라이프를 이 손에 거머쥘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수록된 네 편의 단편은 네 곳의 동아리에서 보낸 2년간의 우당탕탕 희비극을 다루는데,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자 흥미로운 점은 마치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이라는 바람을 구현한 듯 라는 인물이 겪은 네 번의 2을 평행세계 SF물처럼 그렸다는 점입니다. 첫 수록작에서 하잘 것 없는 삶을 살며 사랑의 훼방꾼 노릇에만 몰두하다가 끝내 영화 동아리에서도 쫓겨난 2년 전의 선택을 후회하며 그때 다른 동아리에 들어갔더라면...”이라는 바람을 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수록작에선 다른 동아리를 선택한 2년이 그려집니다. 나머지 수록작에선 기괴한 스승의 제자가 되어 뜻밖의 대리전쟁에 나서게 된 이야기, 갑자기 세 여자 사이에 끼인 채 혼란을 겪다가 뒤통수를 맞는 이야기, 어느 날 깨어 보니 외부세계는 사라지고 다다미 넉 장 반인 자신의 방만 무한 반복되는 기이한 상황에 처한 이야기 등 그야말로 골 때리는롤러코스터 판타지가 이어지며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의 주변에 포진한 개성 강한 조연들도 매 수록작에 함께 등장하는데, 이름과 캐릭터는 같지만 와의 관계라든가 역할은 수록작마다 조금씩 바뀝니다. ‘의 유일한 친구이자 원수인 오즈, ‘의 로맨스의 상대인 검은머리의 후배 아카시, 감색 유카타를 입은 괴인 같은 존재 히구치, 수수께끼 같은 치위생사이자 애주가 하누키 등이 그들인데, 이들이 벌이는 기상천외한 행동들은 의 엉망진창 희비극 못잖게 웃음과 흥미를 자극합니다.

특히 이들 가운데 히구치와 하누키는 밤은 짧아~’에도 등장했던 인물로 2013년에 제가 쓴 서평엔 각각 도도한 여장부이자 말술 캐릭터텐구(天狗)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유카타 사나이라고 묘사돼있습니다. 또한 이 작품의 주 무대 역시 밤은 짧아~’와 마찬가지로 시모가모 신사, 기야마치, 폰토초 등 교토 일대로 설정돼있어서 교토 청춘 판타지 시리즈로 불러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의태어와 의성어라든가 고풍스러우면서도 황당무계한 표현들은 안 그래도 특이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더욱 맛깔나게 만드는데, 그런 대목들마다 얼마나 번역이 중요한지를 여러 번 깨달았습니다. 번역자는 다르지만 밤은 짧아~’다다미 넉 장 반 신화대계를 모두 재미있게 읽은 저로서는 만약 조금이라도 경직되거나 점잖은 문장들로 번역됐다면 이 두 작품의 묘미는 절반도 살아나지 못했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워낙 특이한 소재와 형식과 이야기로 포장된 작품이라 독자마다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습니다. 또 다 읽은 뒤엔 잠시 멍해지며 이 작품의 미덕이나 주제가 뭘까, 라는 궁금증에 사로잡힐 수도 있는데, 개인적으론 출판사 소개글 가운데 적절한 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 답을 염두에 두고 다시 한 번 읽는다면 좀더 진한 재미와 페이소스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청춘소설 같기도 하고, 평행우주론 SF 같기도 하고, 여러 얼간이의 한바탕 소동극 같기도 한 다다미 넉 장 반 신화대계를 한두 문장으로 정의할 필요가 있을까? 독자는 그저 천부적이고 독보적인 이야기꾼이 벌여놓은 이상한 이야기를 마음껏 웃고 즐기면 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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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시체가 보고 싶은 날에는
구보 미스미 지음, 이소담 옮김 / 시공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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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살 소녀 미카게의 삶은 혹독함 그 자체입니다. 3살 때 아버지를 병으로 잃었고, 어머니는 미카게와 언니 나나미가 아직 어리던 시절 집을 나갔습니다. 천식을 앓는 미카게는 왕따를 견디지 못해 야간학교에 다니게 됐고, 나나미는 성매매로 생계를 유지합니다. 자매가 사는 낡은 아파트 단지 주민 대부분은 독거노인과 히키코모리와 극빈층입니다. 더구나 자살 명소로 불릴 정도로 흉흉한 죽음이 빈발하곤 합니다. 이처럼 밝음보다는 어둠에, 삶보다는 죽음에 가까운 일상에 갇힌 미카게의 유일한 바람은 시체를 직접 보고 싶다는 것. 두렵지만 직접 마주함으로써 죽음이란 것의 실체를 들여다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느 날 단지 경비원을 자칭하는 노인 젠지로를 만나면서 미카게의 삶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원제(Time of Death, Date of Birth)와는 다소 거리가 먼 번역제목만 보면 호러물로 오해하기 쉽지만, 구보 미스미를 아는 독자라면 제목과 표지만 보고도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룬 위로와 희망의 이야기구나.”라고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보 미스미는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이후 절망과 상실의 늪에 빠진 인물들이 스스로 혹은 누군가의 손길에 힘입어 조금씩 희망을 회복하는 이야기를 선보여 왔는데, 초기작들이 대체로 높은 수위와 독한 설정을 지니고 있었던 반면 최근 작품들은 일본 특유의 힐링 소설의 분위기를 품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그녀의 초기작들을 무척 좋아해서 상대적으로 다소 부드럽고 연해진 최근작들이 아쉽게 느껴지곤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담하면서도 묵직한 문장들로 절망과 상실을 그려내는 필력만큼은 변함이 없어서 늘 신작 소식을 기다리곤 합니다.

 

그러니까 보고 싶었다. 진짜 시체는 공장에서 골라내는 딸기처럼 상하고 썩었을까.” (p53)

 

15살 소녀 미카게가 시체를 직접 보고 싶어 하는 건 일그러진 호기심 때문도, 왜곡된 욕망 때문도 아닙니다. 일상 자체가 삶보다 죽음에 더 가까운 미카게에게 있어 시체를 직접 목격하는 행위는 (출판사 소개글을 인용하면) “언젠가 찾아올 죽음의 실체를 확인하고 더 잘 이해하는것은 물론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가장 확실한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낡은 아파트 단지에선 독거노인의 고독사가 빈발하고, 자살 명소로 꼽힐 정도로 외지인의 투신자살도 심심찮게 벌어집니다. 또래에 비해 세상 물정에 어두운 미카게가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과 함께 그것을 직접 들여다보고 싶은 특이한 호기심을 갖는 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서글프고 안쓰러워 보이기도 하고, 독자로 하여금 절대 그 호기심이 충족되는 일이 없기를 바라게 만들기도 합니다. 미카게라면 시체를 보는 순간 죽음에 사로잡힐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저절로 들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탈출구라곤 없어 보이던 미카게의 삶을 변화시킨 건 야간학교에서 만난 무짱과 구라하시, 그리고 자칭 단지 경비원인 노인 젠지로입니다. 미카게처럼 불행한 사연을 가진 무짱과 구라하시는 미카게로선 평생 처음 갖게 된 친구들로 이들은 비슷한 상처를 지닌 탓에 서로의 결핍과 갈망을 알아보고 손을 내미는 관계로 발전합니다.

어디 사는지,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아는지 알 수 없는 노인 젠지로에게 경계심을 품었던 미카게는 엉겁결에 그가 시키는대로 단지 경비원이 되어 아르바이트가 없는 날마다 그와 함께 아파트 곳곳을 순찰하게 됩니다. 젠지로에 따르면 걱정되는 집을 방문하고, 투신자살을 막기 위해 시설을 보수하는 게 단지 경비원의 일입니다.

 

온통 먹구름으로 덮여있던 미카게의 삶은 친구들과 젠지로로 인해 조금씩 빛을 얻게 되고,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스스로도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변화를 겪게 되는데, 구보 미스미는 이 과정에 소소하지만 현실감 있는 에피소드들을 가미함으로써 무조건적인 위로와 희망과 힐링이 아닌 단단하면서도 보는 이를 울컥하게 만드는 그녀 특유의 서사를 만들어냅니다. 또한 고독사, 자살, 히키코모리 등 사회에 만연한 문제에 대해서도 진지하고 현실적인 자세로 접근함으로써 묵직한 여운을 자아냅니다.

 

제가 좋아하는 구보 미스미 초기작의 강렬함이나 독한 설정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언제나처럼 약간의 미소와 약간의 울컥함과 함께 마지막 장을 덮었습니다. 언젠가는 그녀의 초기작들을 다시 한 번 읽을 생각인데, “절망을 탁월하게 그리는 작가로 정평이 나있다는 한 출판사의 소개글을 오랜만에 제대로 절감할 수 있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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