쌈리의 뼈 로컬은 재미있다
조영주 지음 / 빚은책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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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평택역 인근의 집창촌 쌈리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을 그린 소설 쌈리의 뼈를 집필하던 중 치매에 걸린 윤명자는 딸 해환에게 소설의 완성을 부탁합니다. 엄마의 부탁이 내키지 않았던 해환은 쌈리의 한 성매매업소에서 유골이 발견됐다는 소식에 깜짝 놀라며 엄마가 쓰던 소설이 어쩌면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복잡한 심경이 됩니다. 결국 소설 집필에 달려든 해환은 직접 쌈리를 찾아가 취재하는 것은 물론 주인공 에 의해 여러 여자가 살해당하는 소설 내용이 사실이라 확신하며 과연 누가 인지를 찾아내기 위해 수차례의 수정을 고치며 소설을 완성해나갑니다. 그러던 중 해환은 어쩌면 엄마가 엄청난 비밀을 숨겨왔을지도 모른다는 충격적인 결론에 이릅니다.

 


쌈리의 뼈는 치매와 기억에 관한 심리스릴러이자 오토픽션(Autofiction, 작가의 실제 경험과 허구가 결합된 문학)과 살인사건이 절묘하게 결합된 미스터리입니다. 치매에 걸린 엄마와, 엄마를 간호하다가 스스로의 기억에 문제가 생긴 딸 사이에 벌어지는 심리스릴러가 바탕에 깔린 가운데 혹시 오토픽션을 즐겨 쓰던 엄마가 소설 속 연쇄살인범 가 아닐까?”라며 의심하는 딸이 진짜 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상상과 추리를 동원하여 소설을 완성하는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로 짐작되는 사람이 바뀔 때마다 해환이 집필하는 소설은 큰 폭으로 수정됩니다. 윤명자가 집필한 소설 초반부엔 거듭되는 연쇄살인만 묘사됐을 뿐 의 성별과 나이조차 그려져 있지 않은데, 그러다 보니 해환은 윤명자가 일 수도 있고, 거꾸로 윤명자가 의 범죄피해자일 수도 있으며, 거꾸로 쌈리의 뼈는 오토픽션이 아니라 100% 허구일 수도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던 중 윤명자의 오랜 편집자인 상모 아저씨와 함께 쌈리를 직접 취재하면서 해환의 추리는 급물살을 탑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두 건의 죽음이 발생하자 해환은 큰 충격과 함께 그동안 써놓은 소설에 대해서도 확신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독자의 관심은 “‘의 정체는 누구?”에 가장 먼저 쏠릴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애초 쌈리의 뼈를 쓰려 했던 윤명자의 진짜 의도는 무엇이며 치매와 제정신을 오가는 그녀가 딸 해환에게 밝히지 않은 비밀과 거짓말은 무엇인가?”에도 촉각이 곤두서게 됩니다. 또한 진실에 다가가면 갈수록 소설이 단지 엄마 윤명자뿐 아니라 자신과도 연관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해환 때문에 독자의 호기심과 궁금증은 증폭될 수밖에 없습니다.

 

해환 주변의 조연들은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하나같이 의심스러운 구석을 지니고 있습니다. 윤명자의 데뷔시절부터 함께 해온 편집자 상모 아저씨, 뼈가 발견된 성매매업소 사장 핑크젠틀맨, 아직도 성매매 일을 하는 미니라는 이름의 여성, 윤명자처럼 치매기가 보이는 붕어빵 할머니와 그녀를 언니라고 부르는 미용실 언니 등 대부분 악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지만 뭔가를 감추는 듯한 인상을 풍기곤 해서 마지막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가장 아쉬웠던 대목은 인물들의 관계가 자연스럽지못했다는 점입니다. 딱히 구체적으로 말할 순 없지만 왠지 작위적으로 엮인 듯한 인상을 여러 차례 받았고, 일부 인물은 등장 자체나 역할이 다분히 도구적으로 보인 게 사실입니다. 모든 관계의 중심에 있는 해환도 간혹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보이곤 하는데, 그런 탓에 한참 그녀에게 몰입해 있다가 갑자기 툭 하고 몰입이 끊긴 적도 몇 번 있었습니다. 독자에 따라 소설 쌈리의 뼈와 현실 사건 사이의 접점에 대해 시비를 거는 경우도 있을 것 같은데, 저 역시 살짝 의문이 들기도 해서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참고해볼 생각입니다.

 

아주 오래 전 붉은 소파를 읽은 뒤로 처음 만난 조영주의 작품이라 무척 반가웠습니다. 소개글을 보니 이 작품이 시간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라는데, 기회가 되면 나머지 두 작품도 찾아 읽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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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체면
도진기 지음 / 황금가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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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세 개의 잔’(‘진구 시리즈’ 5) 이후 5년 만에 읽은 도진기의 작품입니다.(단편집으로만 치면 2017악마의 증명이후 8년 만입니다) 2022복수 법률 사무소 1~3’이 출간됐지만 1,500페이지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분량에 짓눌린 데다 기대하던 고진 시리즈진구 시리즈가 아니라서 패스했고, 2023년에 출간된 애니는 중편 분량에 불과해서 장바구니에 담기를 주저했습니다.(다행히 애니는 이번 중단편집에 수록됐습니다)

신작 소식이 너무 반갑기도 했지만 역시 고진 시리즈진구 시리즈가 아니라서 살짝 아쉬웠던 게 사실인데, 그래도 오랜만에 도진기의 다양한 스펙트럼의 단편들을 만날 수 있어서 나름 흥미로운 책읽기가 됐습니다.

 


법정을 무대로 한 미스터리 두 편(‘법의 체면’, ‘완전범죄’)을 포함하여 가상현실과 물체 전송기술을 다룬 SF물과 복수 스릴러 등 여러 장르의 맛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뷔페 같은 단편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부장판사와 변호사를 지낸 도진기의 이력이 빛났던 두 편의 법정물이 가장 눈길을 끌었는데, ‘법의 체면이 진실보다 체면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법부의 경직성과 권위의식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면, ‘완전범죄는 말 그대로 그 누구도 알아챌 수 없는 완벽한 살인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뜻밖의 반전과 함께 풀어낸 작품입니다. (‘법의 체면에는 단편집 악마의 증명에서 두 편의 수록작에 등장했던 전직 검사이자 변호사 호연정이 등장해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8년 전 출간된 단편집 악마의 증명에서 도진기는 추리와 오컬트 혹은 호러가 결합된 작품에 늘 매료되곤 한다.”라면서 수록작 중 거의 절반을 예상치 못한 장르로 채웠었는데, 이번 법의 체면을 보면 그의 관심이 SF로까지 확장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갈망하던 인생을 꿈에서 마음껏 누릴 수 있게 만들어주는 프로그램이 개발되지만 생각지 못한 오류가 발생하면서 벌어지는 미래형 비극 애니’, 양자컴퓨터를 통해 물체를 다른 공간으로 전송하는 기술을 소재로 한 과학 서스펜스 컨트롤 엑스등 두 편의 SF물은 소재 자체도 흥미롭지만 디스토피아의 암울한 분위기가 돋보였던 작품입니다.

그 외에 사회파 복수 스릴러 당신의 천국은 인생의 최고 단맛과 쓴맛을 모두 맛본 여자가 이끌어낸 아이러니한 엔딩이 인상적이었고, 한 남자의 찌질하면서도 파멸적인 사랑 이야기를 그린 행복한 남자는 허무한 결말 탓에 좀더 세고 독한 설정이 아쉽게 느껴진 작품이었습니다.

 

작가의 관심영역과 스펙트럼이 넓고 다양해진다는 건 환영해야 할 일이지만, 개인적으론 도진기 미스터리의 진수가 가장 빛나는 고진 시리즈진구 시리즈의 공백이 너무 오래 이어지는 것 같아 서운하고 아쉬울 뿐입니다. 다음에 도진기의 신작 소식이 들려온다면 꼭 두 시리즈 중 한 편이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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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소게임
박소해 외 지음 / 북오션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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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시소게임은 부부와 결혼을 주제로 한 여성작가 네 명의 미스터리 앤솔로지 작품입니다. 검색해보니 이 네 명의 작가는 2022년 산후우울증에 대한 앤솔러지 소설집 네메시스 - 복수하는 여자들’(북오션)을 함께 펴내기도 했습니다. 다른 작품을 통해 만난 적이 있는 관심 작가도 있고 처음 만나는 낯선 작가도 있는데, “신뢰가 무너졌을 때 결혼은 최고의 스릴러가 된다는 홍보카피처럼 부부를 주제로 한 장르물이라는 서사 자체가 눈길을 끌어서 나름 기대감을 갖고 읽게 됐습니다.

 

박소해의 사마귀, 여자

쌍둥이를 임신한 아내를 둔 형사 차민우는 가정폭력사건 현장에서 만난 기묘한 분위기의 여자 송채윤에게 빠져든 뒤 위험천만한 불륜을 저지릅니다. 하지만 그 이후 차민우 주위에서 자살과 살인 등 끔찍한 사건이 연이어 일어납니다.

 

김재희의 부부, 그 아름다운 세계

성형외과 의사 이수중과 아내 서현경은 이미 부부라고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지 오래된 사이입니다. 두 사람 모두 이혼을 원하지만 어떻게든 상대에게 귀책사유를 뒤집어씌우고 싶어 이리저리 궁리를 합니다. 결국 그들이 선택한 귀책사유는 바로 불륜의 덫이었습니다.

 

한수옥의 설계된 죽음

저수지에 빠진 차에서 아내가 사망하고, 신고자인 남편이 범인으로 의심받습니다. 조사결과 남편에겐 불륜 상대가 있었고, 여러 가지 정황상 아내를 죽일 동기가 충분해보입니다. 하지만 사건을 맡은 형사의 촉은 남편이 범인이 아닌 것 같다는 쪽으로 향합니다.

 

한새마의 시소게임

아내를 살해하고 보험금을 타낼 계획으로 국제결혼을 시도하는 남자. 한국남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국제결혼을 감행하는 베트남 여자. 이 둘의 시소게임은 생각지도 못한 반전으로 마무리됩니다.

 


수록된 네 작품 가운데 세 편이 중요한 소재로 삼을 정도로 불륜은 부부결혼에게 가장 치명적인 흉기입니다. 순간적인 격정 때문이든 배우자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된 의도적인 행위든 불륜은 증오와 원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물론 살의까지 품게 만드는 배신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부부와 결혼을 주제로 한 미스터리에서 불륜만큼 매력적인 모티브를 찾기 힘든 건 사실이지만, 세 편씩이나 주요 소재로 삼은 점은 다소 아쉬웠습니다. 개인적으론 영화 장미의 전쟁같은 블랙코미디 스타일의 풍자 비극이 한 편쯤 들어갔더라면 더 알찬 구성이 됐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가장 재미있게 읽은 한새마의 잔혹한 부부 스릴러 시소게임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초반 설정과 뜻밖의 반전 때문에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지만 유일하게 불륜이 등장하지 않은 작품이라 더 돋보였다는 생각입니다.

 

부부, 그 기묘하고도 잔혹한 세계라는 띠지 카피는 보는 사람에 따라 과장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어쩌면 민낯 그대로의 현실을 잘 반영했다고 여기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일부 작품에서 미스터리 설정이 너무 쉽고 안이하게, 또는 억지스럽거나 작위적으로 연출된 점이 아쉽긴 했지만, 역시 부부와 결혼은 연인과 사랑이 등장하는 달달한 로맨스와 달리 미스터리나 스릴러 등 장르물에 더 잘 어울리는, 말하자면 언제 어떤 식으로든 폭발할 수 있는 시한폭탄 같은 관계라서 주제 자체만으로도 흡인력이 강했고 매 수록작마다 긴장감을 즐기며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막연한 바람이지만 혹시 시소게임 2’가 기획된다면 남성작가들이 쓴 부부와 결혼에 관한 미스터리 또는 스릴러이기를 기대해봅니다. 같은 주제를 놓고 미묘할 수도, 확연할 수도 있는 차이를 만끽해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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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프트 - 고통을 옮기는 자, 개정판
조예은 지음 / 북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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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해변의 폐건물에서 기이한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한 남자가 피 웅덩이에 잠긴 채 살해됐고, 어린 소년이 납치됐던 흔적까지 발견됐는데, 문제는 흉기와 바닥을 물들인 피가 피살자의 것이 아니라는 점, 또 남자의 몸에서 갑자기 발병한 듯한 말기 피부암 증상이 발견된 점입니다. 불치병에 걸린 조카 채린을 돌보기 위해 일부러 지방경찰서로 내려온 이창은 살해된 남자를 조사하던 중 어쩌면 자신이 오랫동안 찾아 헤맨 사람이 이 사건에 연루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전율합니다.

 


시프트2017년에 출간된 조예은의 첫 장편소설입니다. 최근 꽤 많은 작품이 출간됐음에도 불구하고 작년(2024)적산가옥의 유령을 통해 처음 만난 작가인데, 기대 이상의 재미와 만족을 느낀 덕분에 그녀의 첫 장편소설 개정판을 반가운 마음으로 읽게 됐습니다.

 

“(고통과 질병을) 옮기기만 할 뿐 없앨 수는 없어요. 누군가를 살리려면 누군가가 죽어야만 해요. 그래서 저는 제 능력이 저주스러워요.” (p95)

 

굳이 장르를 분류한다면 판타지 스릴러라고 할 수 있는데, 주인공인 란에게 고통을 옮기는 기이한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란이 고통과 병에 시달리는 환자와 그것을 옮겨 받을 그릇이 될 사람의 손을 양손에 쥐고 있으면 그를 매개로 하여 환자의 고통과 병이 그릇에게 옮겨가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고통과 병을 제거해준다는 점에서 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문제는 누군가 그 고통과 병을 받아내야 한다는 점, 즉 대신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린 시절 형 찬과 함께 인신매매범이자 사이비교주에게 납치됐던 란은 찬이 그 기이한 능력 때문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걸 눈앞에서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죽어가던 찬이 그 능력을 자신에게 물려준 걸 깨달았습니다. 저주받은 능력이지만 란은 찬의 복수를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려왔는데,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던 자신의 능력을 꿰뚫어 본 자가 나타나면서 그에게 위험천만한 위기가 닥칩니다.

사고로 숨진 누나 부부가 남긴 조카 채린이 불치병에 걸리자 이창은 어린 시절 직접 목격했던 기적을 떠올리곤 그 능력자를 찾기 위해 전력을 다합니다. 그리고 선술집 직원인 란을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란에게서 알아낸 기적의 진상은 너무나도 참혹해서 이창으로 하여금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만듭니다.

 

지금껏 읽은 그 어떤 판타지나 호러에서도 본 적 없는 특별한 능력을 소재로 삼았지만 그 작동원리가 너무나도 단순명쾌해서 조금의 위화감이나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저주받은 능력을 품은 채 복수에 나선 란과 그 능력이 너무나도 간절하지만 조카를 살리려면 누군가가 그릇이 돼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하는 이창의 이야기는 적절한 비율로 배합된 판타지와 미스터리와 복수 스릴러 서사 속에서 마지막 장까지 긴장감을 유지하며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두 주인공의 첫 만남이 너무 쉽고 안이하게 설정된 건 아쉬웠지만, 그 점만 빼면 란과 이창의 이야기는 충분히 재미있었습니다)

 

찬과 란의 능력을 악용하는 악당들의 캐릭터와 역할도 잘 설정돼서 끝까지 두 주인공과 엎치락뒤치락하며 롤러코스터 같은 흥미진진함을 유발합니다. 징악(懲惡)의 짜릿함을 만끽하려면 그만큼 악당이 탄탄하게 설정돼야 하는데, ‘시프트에 등장하는 여러 악당은 뚜렷한 동기와 무자비한 잔혹함에다 개연성 있는 캐릭터까지 품고 있어서 주인공들의 분투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어줍니다.

 

적산가옥의 유령이후 두 번째로 만난 시프트역시 만족스러운 책읽기를 선사했습니다. 이제 그동안 관심만 갖고 있던 조예은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독자들의 서평을 훑어보며 어떤 작품을 가장 먼저 장바구니에 담을지 고민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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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황홀한 순간
강지영 지음 / 나무옆의자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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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사랑에 실패하고 고향 연향으로 돌아와 역 앞 매점을 떠맡게 된 24살의 김하임은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운명과 사랑 때문에 마음이 늘 신산합니다. 그러던 중 우유식빵 같은 역무원 윤지완에게 반하게 됐고 조금씩 그와의 거리를 좁혀갑니다. 하지만 어느 날 윤지완이 역 앞에서 피부가 가무잡잡한 한 여자와 수상쩍은 모습을 보이자 불안감에 사로잡힙니다.

10대 때 염희태에게 겁탈을 당한 뒤 임신까지 하자 집을 나왔던 이무영은 10년 만에 그와 우연히 만나 살림을 합칩니다. 하지만 염희태의 악마성은 여전했고 이무영과 딸 민아는 가혹한 폭력에 시달리며 고통스런 나날들을 보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고, 이무영의 가족은 어쩔 수 없이 서울을 떠나 연고도 없는 연향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거의 황홀한 순간사랑이 태어나서 죽는 자리라는 사연 많은 지명을 가진 서울 근교의 소도시 연향을 무대로 김하임과 이무영, 두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1월 김하임’, ‘1월 이무영으로 이어지다 마지막 챕터 ‘12월 김하임에 이르는 독특한 구성도 눈길을 끌었지만, 전혀 다른 결을 지닌 두 여자의 삶을 전혀 다른 장르를 통해 풀어내다가 서술트릭의 반전과 함께 극적인 엔딩에 이르게 만드는 신선한 서사가 가장 기억에 남았습니다.

 

김하임의 챕터가 운명과 사랑 때문에 고민하는 20대의 달달한 로맨스이자 통일호와 홍익매점이 남아있던 2000년대 초반의 어느 중소도시에서 아직 사랑을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이무영의 챕터는 10대 시절부터 폭력과 강간에 시달린 한 여성의 비극이자 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걸 수 있는 한 엄마의 투쟁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하임의 챕터가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를 떠올리게 했다면, 이무영의 챕터는 덴도 아라타의 젠더 크라임을 연상시켰다고 할까요?

 

전혀 만날 일이 없을 것 같던 두 여자의 삶은 이무영이 가족과 함께 연향에 머물게 되면서, 그리고 우유식빵 같은 매력적인 역무원 윤지완으로 인해 미묘한 접점을 갖게 됩니다. 곁을 주는 듯 하면서도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 윤지완에게 서운해 하던 김하임은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옆에 나타난 피부가 가무잡잡한 여자 때문에 또다시 사랑에 실패하는 건 아닌가, 불안해집니다. 한편 윤지완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감자탕 집에 몸을 의탁한 이무영은 한편으론 염희태의 폭력 속에 딸 민아를 지켜내기 위해 분투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윤지완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기도 합니다.

로맨스와 스릴러가 묘하게 뒤섞인 가운데 정체불명의 불안감을 뿜어내던 이야기는 마지막에 이르러 뜻밖의 진실을 폭로하면서 독자에게 여러 감정이 혼재된 짙은 여운을 전달합니다.

 

이무영의 챕터가 긴장감과 속도감을 갖춘 몰입도 높은 스릴러인 반면, 김하임의 챕터는 다소 가벼운 20대의 로맨스에다 엉뚱한 가족 이야기(번개를 맞고 우주신이 된 할아버지, 단역에서 출발하여 유명 스타가 된 엄마, 그런 엄마의 로드매니저를 자청하는 아빠)가 곁들여져 있어서 마치 두 발을 냉탕과 온탕에 하나씩 담근 듯한 묘한 느낌을 선사합니다. 무엇보다 두 여자의 본격적인 접점이 언제쯤, 어떻게 이뤄질까 궁금하면서도 거의 종반부까지 눈에 띄지 않아서 살짝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는데, 그래선지 2/3쯤까지만 해도 별 4개 정도의 무난한 작품이려니, 생각했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막판에 단 한두 줄에 의해 트릭이 밝혀지는 순간 잠시 멍해지며 앞서 전개된 이야기들을 찬찬히 되새기게 되는데, 그 트릭을 제대로 이해하자마자 반전의 짜릿함과 함께 이 작품의 진가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실은 작가는 군데군데 눈에 보일 듯 말 듯 단서와 복선을 숨겨놓았습니다. 조금이라도 위화감이 느껴지는 대목을 기억해두며 페이지를 넘긴다면 막판 반전과 트릭의 쾌감을 좀더 진하게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양한 장르와 서사를 통해 늘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내는 강지영의 매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고, 특히 서술트릭이라는 의외의 방식으로 전혀 결이 다른 두 이야기를 한데 묶어낸 필력이 매력적이었습니다. 300페이지가 채 안 되는 짧은 분량이지만 그 이상의 탄탄하고 농도 짙은 이야기가 실려 있으니 구미가 당기는 독자라면 관심을 가져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사족으로... 인터넷서점의 출판사 소개글은 이 작품의 줄거리를 너무 상세하게 공개해놓았습니다. 가급적이면 표지 앞뒷면의 카피 정도만 훑어본 뒤 본편을 읽기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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