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풀 라이프
마루야마 마사키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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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데프 보이스로 처음 만났던 마루야마 마사키의 신작입니다. ‘데프 보이스는 농인(聾人)과 청인(聽人), 즉 들리지 않는 사람과 들리는 사람이 등장하는 미스터리로 주인공 아라이 나오토는 부모와 형이 모두 농인이지만 본인만 청인인 가혹한 운명을 안고 태어났고, 경찰 사무직을 거쳐 수화 통역사가 되어 살인사건 수사에 합류하는 인물입니다. 이후 마루야마 마사키는 용의 귀를 너에게’, ‘통곡은 들리지 않는다로 이어진 시리즈를 통해 장애를 테마로 한 미스터리라는 독특한 영역으로 독자의 관심과 호응을 받아왔는데, ‘원더풀 라이프는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좀더 광범위하고 다양한 차원의 장애를 다루는 것은 물론 차별과 편견으로 가득 찬 현실을 비극적인 사건들을 통해 통렬하게 고발한 작품입니다.

 

무력의 왕’, ‘한낮의 달’, ‘불초의 자식’, ‘가면의 사랑등 네 가지 이야기가 수록돼있는데, 경수 손상으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중증 장애인 아내와 그녀를 8년째 간병해왔지만 더는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른 남편의 이야기, 입양아를 직접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장애가 있는 아이를 입양하게 될까봐 걱정하는 사람의 이야기, 무슨 이유에선지 장애가 있는 가족들을 죽이거나 동반자살을 선택한 자들의 기사를 스크랩하는 여자의 이야기, 선천성 뇌성마비로 오른발밖에 쓸 수 없지만 깊고 다양한 지식과 뛰어난 재능을 지닌 한 남자의 사랑 이야기 등 현실에서 부딪힐 수 있는 장애에 관한 다양한 상황과 사건들이 등장합니다.

 

미스터리로 분류돼있긴 하지만 살인은 물론 특별히 사건이라 부를 만한 것들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작가는 교묘하게 설치해놓은 트릭을 통해 전혀 연관 없어 보이는 네 가지 이야기를 조금씩 수렴시키는 구성을 사용했는데, 적잖은 힌트를 제공하고 있어서 웬만한 독자라면 중반부쯤이면 트릭의 윤곽을 대략 파악할 수는 있지만 결정적 퍼즐은 막판에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트릭과 퍼즐은 독자의 뒤통수를 치기 위한 오락적 장치가 아니라 작가가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무게감과 강도를 최대치로 증폭시키기 위해 절박한 심정으로 심어놓았다는 인상을 진하게 풍깁니다. 장애와 비정상은 절대 같은 뜻이 아니고, 장애는 지원하고 도와야 할 대상이 아니라 같은 시공간에서 공존하면서 익숙해져야 하는 대상이며, 장애는 누구나 꿈꾸는 멋진 인생에 조금도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작가는 트릭으로 얽힌 네 가지 이야기를 통해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더풀 라이프의 가장 큰 매력은 뻔하지도, 강요하지도 않는 방식으로 장애의 현실을 피부에 와 닿게 그렸다는 점입니다. 특히 네 가지 이야기 모두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재미를 놓치지 않고 있어서 무겁고 어려운 소재의 부담감을 조금도 느낄 수 없습니다. “이야기 속 현실의 무게감과 엔터테인먼트 소설로서의 가치가 양립하는 작품이라는 일본 독자의 평 역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마지막 장에 이르러 네 가지 이야기가 하나로 수렴되는 장면에선 먹먹함을 피할 수 없습니다. 동정심도 측은지심도 아닌 그 먹먹함은 어쩌면 마지막 한 줄까지 냉정한 입장을 잃지 않은 작가의 태도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하나 멋지지 않은 인생이란 없다!”라는 의미에서 원더풀 라이프라는 제목을 붙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거 없는 해피엔딩이나 막연한 희망을 제시하는 오픈된 결말을 선택하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작가가 지극히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마무리를 선택한 것은 아마도 실제로 경수 손상 장애를 가진 아내와 30년 동안 살아오면서 그가 겪었던 숱한 희로애락의 경험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 경험들이 아니었다면 독자들은 원더풀 라이프의 지독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리얼리티와 쉽게 잊히지 않을 여운을 결코 만나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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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너는 속고 있다
시가 아키라 지음, 양윤옥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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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어린 딸과 함께 도쿄로 도망친 다카요는 코앞으로 다가온 연립주택 강제 퇴거 때문에 전전긍긍합니다. 밀린 임대료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다가 결국 퇴거 직전 개인 사채업자 미나미를 통해 급전을 마련합니다. 그런데 미나미라는 사채업자는 연체에도 관대하고 다카요의 갖가지 고충에 대해 상담도 해주는 등 사채업자의 포악함이나 잔인함 따윈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어느 새 미나미에게 많은 걸 의지하며 야금야금 돈을 빌리다가 대출금이 위험수위를 넘어버린 다카요는 끝내 성매매까지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자신의 연락처를 알아낸 남편이 연락을 해오자 다카요는 사색이 되고 맙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사채업자는 뉴스나 상식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고객들을 모으고 관리합니다. 이른바 소프트 사채업이라 불리는데, 여윳돈이 있는 개인이 SNS를 통해 급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소액의 돈을 빌려주곤 나름 적절한 - 그래도 연 100%에 가깝지만 - 수준의 이자를 받아내는 것입니다. 이들은 협박조의 추심은커녕 위험도가 낮은 연체는 관대하게 눈감아주기도 하고, 고객의 고민에 공감하며 카운슬링도 해주는 등 말랑말랑하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합니다. 그러다 보면 고객은 사채업자가 내 편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물론 언제라도 마음 편히 돈을 빌릴 수 있는 상대라고 여기곤 부담 없이 소액을 빌리다가 어느 새 큰돈을 빚지게 되는 것입니다.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사채업자라고 할 수 있는데, 아이러니한 건 이들의 고객들은 냄비 속 개구리처럼 자기도 모르게 파멸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이 작품의 제목 그리고 너는 속고 있다는 바로 이 아이러니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전반부 소제목이 속는 사람’, 후반부 소제목이 속이는 사람으로 구성돼있는데, 전반부가 사채를 쓰다가 헤어날 수 없는 늪에 빠져드는 다카요의 사정을, 후반부가 다카요를 비롯하여 여러 고객들을 상대하는 개인 사채업자의 술수를 상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채를 쓸 수밖에 없는 사정도 다양하고, 업자가 고객을 관리하는 전략도 제각각이라 경각심을 품은 채 페이지를 넘길 수 있었지만, 꽤 야박한 평점을 준 결정적인 이유는 이 작품이 소설이라기보다는 피해자의 고백업자의 수법을 나열해놓은 장문의 기사 혹은 정직한 르포처럼 읽혔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다카요가 점차 늪으로 빠져드는 과정이나 업자가 고객들을 상대로 장난치는 일 모두 너무나도 익숙한 이야기라서 작가의 전작인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와 같은 궁금증과 긴장감을 전혀 유발하지 못했습니다. 소프트 사채업이라는 신종 사채의 특이함 외에는 딱히 눈길이 끌리는 대목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반전은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조차 애매해서 맥이 풀렸고(이미 앞에서 다 공개된 정보들인데 막판에 마치 반전인 양 서술됐기 때문입니다), 교훈도 여운도 어중간했던 엔딩 역시 특별한 맛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의 재미를 기대하고 읽었다가 전작의 후광만 바란 티를 역력하게 느꼈던 후속작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나름 흥미로운 이야기를 뽑아낼 수 있는 소재를 너무 안이하게 활용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5년 만에 한국에 출간된 시가 아키라의 작품이라 꽤 기대를 했지만 아쉬움만 잔뜩 느끼게 돼서 그저 유감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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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스티븐 킹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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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의 주인공은 유령과 대화할 수 있는 소년 제이미 콘클린입니다. 죽은 직후부터 그 혼이 사라지기까지 며칠간만 대화가 가능하며 유령들은 제이미의 질문에 진실만을 답한다는 특별한 설정이 있긴 하지만, ‘유령과 대화가 가능한 능력자라는 캐릭터는 기본적으론 새롭지도, 신선하지도 않은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호러의 대가 스티븐 킹은 독자의 예단을 비웃기라도 하듯 제이미의 능력을 의외의 상황과 맞닥뜨리게 하곤 연이은 반전을 선사하여 마지막 장까지 흥미와 긴장감을 놓치지 않게 만듭니다.

 

6살 소년 제이미의 능력을 아는 건 싱글맘이자 작가 에이전트인 티아뿐이지만, 그녀 역시 자신의 눈으로 제이미의 능력을 확인하기 전까진 그저 우연으로 치부했거나 아들의 정신 상태를 심각하게 걱정하는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제이미가 죽은 베스트셀러 작가의 유령과 대화를 나누는 상황을 직접 목격하자 티아는 충격과 함께 아들의 능력을 믿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한편 티아의 동성 연인이자 뉴욕 경찰인 리즈 역시 그 자리에서 제이미의 능력을 목격했는데, 이후 리즈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제이미를 극히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만듭니다.

 

이야기의 뼈대만 추리면 짧은 중편으로도 소화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스티븐 킹은 금융위기, 마약, 테러, 동성애, 근친상간, 폰지 사기 등 현대 미국 사회가 안은 민감한 소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면서 호러물 이상의 풍성한 이야기를 완성시켰습니다. 제이미가 목격하거나 대화를 나누는 유령들도 이웃의 노부인에서부터 엄마가 관리하던 베스트셀러 작가, 또래들의 가혹행위로 목숨을 잃은 소년, 10년 넘게 폭탄테러를 자행해온 흉악범, 마약 중개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해서 서사 자체를 튼실하고 볼륨감 넘치게 만듭니다.

가장 큰 사건이자 이야기의 하이라이트인 제이미 납치극은 막판에 짧고 빠르게 전개될 뿐이지만 그 전까지 차곡차곡 쌓여가는 호러의 조각들이 하이라이트 못잖게 매력적이라 조금도 지루할 틈 없이 페이지를 넘길 수 있습니다.

 

매번 스티븐 킹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느낀 점이긴 하지만 나중에가 좀더 특별하게 읽힌 이유는 책을 읽는다기보다도 맞은편에 앉은 스티븐 킹이 직접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친밀감이 여느 작품보다 강렬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1인칭 화자인 제이미가 수시로 독자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거나 직접 말을 거는 듯한 장면이 많은데, 그때마다 스티븐 킹과 마주 앉은 듯한 친밀감이 고조되곤 합니다. 그래선지 유령과 대화가 가능한 능력자인 제이미의 캐릭터 역시 조금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너무나 리얼해서 세상 어딘가에 이런 인물이 하나쯤 있을 것 같다는 착각까지 들게 됩니다. 진정한 이야기꾼인 스티븐 킹의 재능을 다시 한 번 만끽할 수 있었다고 할까요?

 

스포일러까진 아니어도 책읽기의 재미를 반감시킬 만한 내용이 많아서 줄거리가 거의 없는 서평이 되고 말았는데, 그만큼 사전 정보 없이 읽어야 제 맛을 즐길 수 있는 작품이란 뜻입니다. 스티븐 킹의 팬이 아니더라도 소름 돋게 하면서도 유쾌하고 재미있는 뜻밖의 호러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나중에를 꼭 찾아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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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의 계절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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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의 계절은 개인적으로 일본 미스터리 최애 작가 중 한 명으로 꼽는 요코야마 히데오의 첫 번째 소설집(1998년 일본 출간)이자 ‘D현경 시리즈의 첫 작품입니다. 최애 작가로 꼽으면서도 그의 첫 소설집을 이제야 읽은 건 좀 이상한이유 때문입니다. 2년 전쯤인가, 한국에 출간된 그의 작품을 거의 다 읽은 마당에 신간 소식은 너무나도 뜸하다 보니 아직 읽지 않은 작품들을 두고두고 아껴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데, 그렇게 아껴둔 작품들이 그늘의 계절’, ‘동기’, ‘루팡의 소식입니다. 이제 그늘의 계절을 읽어버렸으니 신간이 나오지 않는 이상 제 손에는 두 편밖에 남지 않게 됐고, 그마저 다 읽고 나면 예전에 읽었던 작품들을 다시 한 번 읽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D현경 시리즈’(일본출간연도)그늘의 계절’(1998) - ‘동기’(2000) - ‘얼굴’(2002) - ‘64’(2012)로 구성돼있습니다. 장편인 ‘64’를 제외하곤 모두 D현경을 무대로 한 단편집인데, 기자 출신인 요코야마 히데오가 세밀하고도 냉정한 시각으로 경찰 조직을 바라보며 직조한 독특한 미스터리를 맛볼 수 있는 작품들입니다.

 

엄격한 조직의 룰이 적용될 것만 같은 경찰 조직이지만, 그 안에서도 개인의 욕망은 충돌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욕망이 뿜어내는 부조리가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요 동력이 된다.” (‘옮긴이의 말, p272)

 

모두 네 편의 단편이 수록된 그늘의 계절의 주인공들은 경무부 소속입니다. 인사담당 조사관 후타와타리 신지, 감찰관 신도 다카요시, 여경 담당계장 나나오 도모코, 비서과의 쓰게 마사키 등 현장에서 수사를 담당하는 형사부가 아니라 조직 관리가 주 업무인 경무부의 인물들이 주인공이라는 점만으로도 이 작품이 기존의 경찰 미스터리와 확실히 다른 서사를 품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주인공들의 공통점이라면 내부에서 발생한 치명적인 문제를 은밀하고 조용히 처리함으로써 어떻게든 조직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데 주력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경쟁자나 경쟁부서를 가차 없이 짓누르거나 치밀한 계획 하에 자신의 공을 도드라지게 만드는, 말하자면 개인적인 욕망과 정치적 야망에 무척이나 솔직한 인물들이기도 합니다. ‘옮긴이의 말의 부제처럼 전형적인 호모 폴리티쿠스라고 할까요? 탐정 역할을 맡아 조직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그걸 기회 삼아 자신의 이익을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하는 현실적인 속물들이란 뜻입니다.

이들의 욕망과 야망은 대부분 예상치 못한 반전과 함께 씁쓸한 엔딩을 맞이하지만, 때론 누군가의 지나친 욕망과 야망을 보기 좋게 꺾어놓으며 권선징악의 여운을 남기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미스터리 자체보다도 바로 이런 민낯 그대로의 인간들이 풍기는 다양한 욕망과 야망의 냄새가 독자의 구미를 더욱 자극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편집이지만 수록작에 대한 소개 없이 거의 총평에 가까운 서평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족으로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표지만 보고 코믹하거나 가벼운 미스터리로 오해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 작품을 비롯하여 요코야마 히데오가 한국에 처음 소개되던 즈음 랜덤하우스코리아에서 출간된 작품들('종신검시관', '동기’) 모두 표지 때문에 오해받기 쉬운 작품들인데, 실은 그 어느 경찰 미스터리보다 묵직하고 깊은 여운을 남겨주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으니 그쪽으로 관심 있는 독자라면 중고로라도 구해서 읽어 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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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붕어 룰렛
오윤희 지음 / 팩토리나인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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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자문회사 간판을 걸곤 일반인을 상대로 거액의 코인사기를 치던 정상구가 길거리에서 살해당하자 경찰은 사기 피해자의 복수로 여기고 수사에 나섭니다. 하지만 사기 피해자 대부분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어서 사건을 맡은 강력반 팀장 이준현과 신참 김도윤의 탐문은 별 성과를 내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뜻밖의 인물이 유력한 용의자로 대두되지만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서 수사는 또다시 막다른 벽에 부딪힙니다. 더구나 사건 관련자 중 한 명이 살해당하고 그 역시 정상구처럼 사기 행각을 벌였던 사실이 밝혀지자 이준현은 동일범에 의한 연쇄살인 가능성을 떠올리며 사기 피해자들을 더욱 집요하게 탐문하기 시작합니다.

 

사기를 친 자사기를 당한 자가운데 누가 더 나쁜 사람일까요? 누가 더 돈에 대한 욕망이 강렬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본문 속 배가 터져 죽는 줄도 모르고 주는 대로 계속 먹이를 받아먹는 금붕어라는 표현은 사기를 친 자사기를 당한 자가운데 누구에게 더 잘 어울리는 표현일까요?

 

금붕어 룰렛은 돈에 대한 끝없는 욕망과 거기에서 비롯된 지독한 악의와 증오를 그린 살인사건 미스터리입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뼈대는 팩트를 기반으로 한 르포에 더 가깝습니다. 사기를 당한 자가 더 멍청하고 사악하다며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사기꾼들, 간절해서든 탐욕스러워서든 공짜로 일확천금을 노리다가 사기꾼의 덫에 걸린 걸 깨달은 뒤에야 자탄에 빠지는 피해자들, 그리고 이들의 진술을 들으며 도대체 누가 더 나쁘고 탐욕스러운 건지 판단하는 것조차 어려워진 수사관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생생하고 사실적이어서 소설이 아니라 르포를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듭니다.

 

작가는 선한 피해자악한 가해자라는 이분법 대신 실은 그들이 품고 있는 욕망이란 게 알고 보면 데칼코마니처럼 꼭 닮은꼴이란 점을 강조합니다. 즉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에 빠져든 사기 피해자들이든 달콤한 말로 상대를 속여 피 같은 돈을 갈취하고도 조금도 죄의식을 못 느끼는 사기꾼이든 노력 없이 돈을 벌고 싶어 한 죄는 마찬가지란 뜻입니다. 말하자면 양쪽 모두 배가 터져 죽는 줄도 모르고 주는 대로 계속 먹이를 받아먹는 금붕어라는 비난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는 게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느껴진 점입니다.

 

삼개주막 기담회 시리즈등 여러 작품을 내놓은 작가답게 문장과 구성은 무척 안정적이지만, 코인사기를 소재로 한 반전 충만한 사회파 미스터리를 기대했던 탓인지 정직한 돌직구에 가까운 르포 스타일의 서사는 다소 아쉽게 읽혔습니다. 상당한 분량이 피해자들이 얼마나 절박한 사연을 갖고 있었는지, 그래서 어떻게 사기꾼의 꾐에 그리 쉽게 넘어가게 됐던 건지에 할애됐는데, 실은 그리 새로울 것도 없고 뉴스를 통해 수없이 들어온 익숙한 사연들이라 긴장감을 고조시키진 못했습니다. 미스터리를 위해 꼭 필요한 재료들이긴 했지만 조금은 과해 보였다고 할까요? 수사를 맡은 이현준과 김도윤 콤비의 역할이 비슷비슷한 탐문의 반복에 그치고 만 건 르포 스타일이라는 구조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역시 아쉽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구나 사기 관련 뉴스를 보며 어떻게 저런 거에 속아 넘어가?”라며 혀를 끌끌 찬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금붕어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의 탐욕은 언제라도 마음속 어딘가에 위험천만한 균열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며 그 균열은 언제든 한 인간을 뉴스 속 멍청한 피해자로 돌변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금붕어 룰렛의 가장 큰 미덕은 그런 상황에 대한 강력한 경고장이자 명확한 지침서라는 데 있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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