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레보스 탐 청소년 문학 10
우르술라 포츠난스키 지음, 김진아 옮김 / 탐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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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보스는 런던의 한 지역 청소년들 사이에 은밀하게 성행중인 RPG게임입니다. 게임CD는 개인끼리만 유통되고, 참여 중인 사람도 탈락된 사람도 전혀 발설하지 않기 때문에 게임의 정체는 베일에 싸여있습니다. 최근 친구들의 심상치 않은 변화가 게임과 관련 있다고 짐작하면서도 이내 그들 못잖게 게임에 빠져든 닉은 곧 에레보스가 평범한 게임이 아니란 걸 알게 됩니다. 에레보스는 닉의 실명은 물론 은밀한 비밀까지 파악하고 있습니다. 또 게임 속에서 위기에 처한 자신을 구해준 대가로 현실에서 수행해야 할 미션을 부여하기도 합니다. 그리 위험한 범법행위가 아니기에 그동안 에레보스의 미션들을 거부감 없이 수행해오던 닉은 점차 감당하기 힘들어진 미션 때문에 혼란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에레보스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짝사랑하던 에밀리와 그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동분서주하기 시작합니다.

 

청소년 문학에 판타지 게임 스릴러라는 외양만 놓고 보면 제 취향과는 거리가 한참 먼 작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레보스가 관심을 끌었던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올해 읽은 마이테 카란사의 독이 서린 말이 준 좋은 인상이었습니다. 스페인 청소년문학상을 받은 작품으로 아동 성폭력의 문제를 깊이 있게 표현했는데, 수상 이력을 숨겼다면 오히려 더 많은 독자를 끌어들이고도 남을 만한 수작이었습니다. ‘독일 청소년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을 지닌 에레보스에 별 거부감이 들지 않은 건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게임에서 벌어진 결과가 현실의 범죄와 연결된다는 설정 때문이었습니다. 게임이라곤 콜 오브 듀티시리즈 정도밖에 하지 않는 문외한이지만 게임과 현실 범죄의 관계, 그리고 그것의 해결과정이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입니다.

 

꽤 두꺼운 분량이지만 페이지는 빠른 속도로 넘어갑니다. 등장인물도 많고 게임 캐릭터 명칭도 많아서 조금 혼란스럽긴 하지만, 이야기 자체는 간결한 구조이고, 흥미진진한 설정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게임 자체에 그렇게 빠져드는 성격이 아니라서 닉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레벨 업에 목숨 거는 게임 중독증이 낯설긴 했지만 에레보스가 보통 게임과는 달리 지능을 가진 유기체처럼 행동한다는 점, 일반 게임과는 달리 누가 게이머이고, 누가 탈락됐는지, 누가 최고 레벨에 있는지조차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진행된다는 점, 오로지 한 번밖에 참여할 수 없으며 탈락될 경우 다시는 참여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에레보스에 위협이 되는 인물들이 현실에서 의문의 사고를 당한다는 점 등 때문에 등장인물들이 느끼는 욕망이나 공포심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만, 대체로 엔딩과 관련된 내용이라 구체적인 언급은 어렵고, 그저 에레보스의 정체, 에레보스가 노린 것, 그리고 사건의 해결과정등이 기대했던 것만큼의 파괴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정도만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능을 가진 게임이 현실의 범죄를 일으킨다는 설정 속에 다양한 코드들이 잘 버무려져 있어서 모처럼 흥미로운 엔터테인먼트 스릴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유럽의 청소년문학상 수상작은 단순히 그 또래들을 위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독이 서린 말이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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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일드 44 뫼비우스 서재
톰 롭 스미스 지음, 박산호 옮김 / 노블마인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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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953년 스탈린 독재 하의 소련. 국가정보기관 MGB의 기대주 레오는 자신을 시기하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집단의 모함 속에 시골마을로 내쳐집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잔혹하게 살해된 소녀의 시신을 발견하면서 레오의 삶은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입에 흙이 들어간 채 장기가 훼손된 소녀의 시신은 MGB 시절, 자신이 사고로 은폐했던 한 소년의 시신과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레오는 동일범에 의한 연쇄살인으로 확신하곤 반역죄로 처분될 수도 있는 범죄 수사에 뛰어들기로 결심합니다. 스탈린이 건설한 이상적인 공산주의 사회에서 범죄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미 국가가 결정한 사안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조차 사상과 충성심을 의심받는 일이기에 레오의 범죄 수사는 그 자체만으로 국가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레오의 수사는 아내와 부모, 그리고 레오를 돕던 사람들을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뜨립니다.

 

모처럼 묵직하고 한시도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대서사를 만났습니다. 1950년대 소련의 암울한 상황과 함께 소년소녀 연쇄살인이라는 최악의 참사가 잘 조합되어 한 편의 고전을 읽은 듯한 느낌이었는데, 정치, 사회, 역사 등 거대한 배경 속에서 우여곡절을 겪게 되는 개인의 비극을 좋아하는 제 취향에 너무나도 잘 맞았던 것 같습니다.

중고서점에서 좀처럼 구하기 쉽지 않았던 탓에 개정판이 나온다는 소식이 너무 반가웠고, 기대 이상의 여운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1930년대 우크라이나를 덮쳤던 대기근(실은 대학살이나 마찬가지였던)1970~90년대에 걸쳐 50여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범이라는 두 가지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톰 롭 스미스가 불과 29살의 나이에 집필한 데뷔작입니다.

 

중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줄거리를 정리했지만, 등장인물도 굉장히 많고 사건 역시 규모나 깊이가 방대해서 제대로 소개하려면 A4용지 2~3장도 부족할 정도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1950년대 소련의 독재 권력의 힘, 친구는 물론 부부나 가족 간에도 고발이 횡행하던 감시 체계, 먹을 것이 없어 남의 아이라도 잡아먹어야 했던 대기근의 참상, 거기에 44명의 아이가 참혹하게 살해당한 사건이 벌어지고, 덧붙여 블록버스터에 버금가는 긴박한 범인 찾기와 탈주극까지 더해지다 보니 방대한 서사는 당연한 결과일 수밖에 없습니다.

 

냉혹하고 가차 없는 업무방식과 뛰어난 실적으로 국가정보기관 MGB에서 장밋빛 미래를 보장받았던 레오가 한순간에 나락으로 내쳐진 뒤 반역행위나 다름없는 범죄 수사에 나서는 대목부터 갖은 위기와 협박을 감내하며 진실을 찾는 과정은 그 어떤 미스터리보다도 비극성과 긴장감을 발산합니다. 단순한 압박이 아니라 가족이 몰살될 수도 있는 상태에서 과거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레오의 행보는 매번 아슬아슬한 줄타기처럼 느껴져서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곤 합니다.

 

주요 조연으로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면면마다 무게감이 상당한데, 레오를 괴롭히는 MGB 내의 라이벌 바실리는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팽팽하게 만들고, 레오의 아내 라이사는 당시 소련의 감시체계가 가져온 가족의 비극을 생생하게 대변합니다. 레오의 수사를 돕는 민병대장 네스테로브, 반정부인사로 추정되는 라이사의 동료 이반 외에 곳곳에서 롤러코스터의 한 축을 담당한 조연들 덕분에 이야기는 단순한 범인 찾기나 액션 스릴러 이상의 서사를 발휘합니다.

 

다만, 독자에게 다소 생소할 수도 있는 ‘1953년의 모스크바를 설명하기 위해 서론이 필요 이상으로 장황했던 점, 막판에 밝혀진 연쇄살인범의 동기가 기대했던 것과 많이 달랐던 점, 그리고 곳곳에서 발견된 오타는 옥의 티처럼 아쉬웠습니다.

 

검색해보니 톰 롭 스미스가 ‘The Secret Speech’, ‘Agent 6’ 등 레오의 이후 이야기를 시리즈로 출간한 것으로 나오는데,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시리즈 첫 편의 개정판이 나왔으니 후속작 소식도 조만간 들려오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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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A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9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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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마트 지상 6층을 가득 채운 주말 방문객들이 한순간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후일, 누군가는 불꽃을 봤다고 하고, 누군가는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고 진술하지만, 실제로는 화재의 흔적도, 유독가스의 잔재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방문객들은 일제히 마트 밖으로 도망치기 위해 출구로 몰려들었고, 그 과정에서 내장 파열, 전신 골절, 질식 등의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이 무참히 죽어나갔습니다. 그리고 참사 이후 조사원, 유족, 생존자 등이 둘씩 짝을 지어 서로 묻고 대답하는 형식으로 사건에 관한 정보를 캐거나 참혹했던 기억들을 되새기거나 참사 전후에 벌어졌던 미스터리한 현상들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 펼쳐집니다.

 

본문 마지막 장을 읽자마자 얼른 다음 페이지를 넘겨봤습니다. 작가의 후기든, 번역자의 해설이든 뭐라도 읽어야 제대로 책을 덮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서지 정보가 전부였고 남은 건 1인용 나무의자 그림과 ‘Q&A’라는 활자가 조그맣게 인쇄된 뒤표지뿐이었습니다. 결국 제 목록 속에 또 한 편의 온다 리쿠의 문제작이 추가되고 말았습니다.

 

발발 원인에 관해 어떤 논리적 설명도 불가능한 대형 참사가 이야기의 중심에 놓여있고, 나이, 성별, 직업이 제각각인 인물들이 그에 관해 문답을 주고받습니다. 살아남은 자들에게 목격한 사실을 청취하는 조사원도 있고, 취재가 목적인 언론 관계자도 있고, 살아남았으나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고, 사건 자체와는 전혀 관계없는 인근 주민들도 등장합니다.

참사 직후의 정황을 소개한 첫 챕터를 읽다보면 범인의 정체 또는 사건의 원인이 후반부쯤에는 자연스레 드러날 것으로 예상됐습니다. 하지만 참사 이후 근 7-8개월이 지난 시점의 이야기를 다루는 2/3쯤에 이르렀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와서 진실 따위가 무슨 소용이지?”

 

아마 온다 리쿠의 작의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거란 생각입니다. 말하자면, 어처구니없는 참사를 겪은 사람들의 다양하고 기구한 사연과 트라우마 그 자체를 묘사하는 것이 온다 리쿠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뜻입니다. 누군가는 살아남아서 기뻤지만, 누군가는 그날 누군가가 죽어줘서기뻤습니다. 누군가는 트라우마를 이겨내지 못해 삶 자체가 엉망이 되었지만, 누군가는 남들의 트라우마를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습니다. 누가 어떤 식으로 참사를 일으켰는지는 더 이상 관심 밖의 일이고 오로지 자신에게 닥친 느닷없는 불행에 격분하고 우울해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등장인물의 대화는 대체로 이런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이들의 묻고 답하기는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한 진실 찾기가 아니라 각자의 뇌리 속에 전혀 다른 모양새로 새겨진 그날의 기억에 대한 고백담이란 뜻입니다. 마치 대형 참사의 생존자나 유족이나 목격자들 역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사고의 원인과 책임자 추궁보다는 살아남은 탓에 겪어야만 했던 불면과 악몽, 떠나보낸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 TV화면을 통해 겪은 간접적인 공포 등을 기억 속에 더 깊이 간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온다 리쿠의 독특함과 고유의 미덕이 작품 전반에 가득 배어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읽은 후의 당혹스러움은 꽤 심각했습니다. 진실은 희미하고, 딱히 주인공이라 부를만한 존재도 없고, 전형적인 기승전결 구성과도 거리가 멀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조금은 화가 나기도 했고, 조금은 내 이해력의 부족 탓인가?” 의문스럽기도 했다가, 결국엔 스스로를 위로하는 마음으로 내가 읽은 게 이런 거였나? 그렇겠지? 맞을 거야.”라는 과정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제가 유별난 게 아니라면 ‘Q&A’는 꽤나 호불호가 갈릴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5:5쯤 될 거란 제 예상과 달리 대략 8:2쯤으로 나뉜 인터넷서점의 서평들은 잠시나마 저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다들 이 이야기를 이해했다는 뜻인가? 어느 대목에서든 호감을 느꼈고, 그래서 재미든 의미든 뭔가 하나는 제대로 건졌단 뜻인가?

 

올해 들어 유독 좋아하는 작가들의 특이한 작품들을 자주 만났습니다. 누쿠이 도쿠로의 미소 짓는 사람’, 가이도 다케루의 나니와 몬스터’, 다카노 가즈아키의 ‘KN의 비극등이 그 예인데, 대부분 읽고 난 후 한동안 얼떨떨해지거나 나만 이상한가?”라는 생각이 들었던 작품들입니다.

‘Q&A’는 어느 정도 공백을 뒀다가 다시 한 번 읽어볼 생각입니다. 어떤 작품은 이미 결론을 알고 재독할 때 제대로읽히는 경우가 있는데, ‘Q&A’는 그리 될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3개에 불과한 야박한 별 평점에 1개 정도는 추가하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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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폴리스맨 - 자살자들의 도시
벤 H. 윈터스 지음, 곽성혜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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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행성과의 충돌로 인해 지구가 멸망하기까지 6개월이 남은 어느 날, 짝퉁 맥도널드 매장 화장실에서 보험회사 직원의 시신이 발견됩니다. 지구의 종말이 확실시 된 상황이라 자살은 도처에서 일어나는 흔한 일이 되어버렸고, 헨리 팔라스 형사를 제외하곤 아무도 맥도널드의 시신에 관심조차 갖지 않았습니다. 비아냥과 조소 속에서도 팔라스 형사는 눈앞의 사건에 매진하고, 연이어 벌어지는 살인사건까지 파고드는 집요함을 잃지 않습니다.

 

흔히 봐온 지구 종말에 관한 소설이나 영상물들은 최후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 시간을 그다지 넉넉히 주지 않습니다. 위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리고 긴박감을 강조하기 위한 필수적인 장치입니다. 반면, ‘라스트 폴리스맨6개월이라는 충분한 시간을 설정함으로써 오히려 더 고통스러운 기다림을 강조합니다.

약탈과 방화 등 종말을 선고받은 자들의 전형적인 패닉 상태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갔고, 거리에는 냉소와 비아냥, 무관심과 헛된 희망만이 남아있습니다. 자살은 끔찍한 종말을 회피하기 위한 가장 현명한 수단으로 선호됐고, 사회를 유지하는 필수적인 시스템들은 천천히 붕괴되는 중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명백히 자살로 보이는 시신에 홀로 관심을 갖는 이가 팔라스 형사입니다. 그리고 그의 수사 과정은 단순한 범인 찾기스토리뿐만 아니라, 종말을 코앞에 둔 다양한 군상들의 이야기를 함께 보여줍니다. 6개월 후면 쓸모없어질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돈에 혈안이 된 사람들, 버킷리스트를 작성하여 남은 시간을 나름 의미 있게 보내려는 사람들, 그동안 억제해온 날들을 보상받기 위해 쾌락과 일탈에 탐닉하는 사람들, 아니면 실없는 농담으로 공포를 이겨내려는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읽기 전에는 공포와 혼란이 지배하는 긴박한 공간, 그리고 6개월 후면 모든 것이 끝장나는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스피디한 범인 찾기라고 예상했지만, 실제 내용은 그와는 정반대였습니다. 말하자면, 종말 6개월 전을 지극히 사실적으로 담담하게 그려냈고, 바로 그 점이 라스트 폴리스맨의 가장 돋보이는 미덕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범인 찾기라는 본연의 임무에 취약하다는 점입니다. 종말이라는 설정을 빼놓고 보면 살인사건 자체도 팔라스의 수사도 조금은 맥이 빠진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증거는 모호하고, 추리는 자의적입니다. 팔라스의 카리스마는 빛나지 않고, 종말은 그에게는 남의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수사는 대부분이 팔라스의 머릿속에서 반짝하고 빛나는 순간적인 착상에 의존하고 있고, “누가 범인일까?”라는 궁금증이나 호기심도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매 챕터의 마지막 문장에서 제시되는 미끼조차 큰 흥미를 자아내지 못합니다.

더구나 종말 6개월 전이란 설정은 결과적으로는 더 큰 약점의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살인사건 + 지구 종말을 묶었을 때는 사건 자체가 지구 종말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거나 범인의 동기와 피살자의 행적 등이 종말로부터 적잖은 영향을 받아야 그럴 듯 해지는데, 정작 이야기는 그 두 가지 아이템을 적절히 믹스하기 보다는 거의 따로국밥처럼 다루기 때문입니다.

 

기대했던 설정의 힘에 비해 이런저런 아쉬움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지구 종말 77일 전을 배경으로 한 2편을 포함하여 3부작으로 기획된 시리즈라고 하니 이후의 헨리 팔라스의 활약이 기대되기도 합니다. 큰 키와 시크한 성격으로 묘사된 헨리 팔라스가 나머지 시리즈에서는 비슷한 외양을 지닌 해리 홀레에 버금가는 매력과 카리스마를 발휘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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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 창비세계문학 16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이한정 옮김 / 창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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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같은 작가의 미친 사랑을 읽고 난 직후 세설을 이어서 읽을 예정이었는데, 어찌어찌 하다 보니 열쇠를 먼저 만나게 됐습니다. ‘()’을 소재로 다뤘다고는 하지만, 주인공이 부부이고 나이가 56세와 45세이다 보니 흔히 예상할 수 있는 자극적인 이야기는 아니겠구나, 싶었습니다. 예상은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일기를 통해 가감 없이 자신들의 성 생활을 표현하는 점, 또 그 일기 자체가 다분히 상대방이 훔쳐 읽을 것을 기대하며 쓰인 점 등 파격적인 형식과 캐릭터 덕분에 얼마 안 되는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무척 독특한 책 읽기가 되었습니다.

 

주요 등장인물 네 명은 일본이라는 공간과 1950년대라는 시대적 특징을 감안하더라도 요즘의 상식으로는 다소 이해하기 힘든 면모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질투를 성욕의 원동력으로 삼은 나머지 아내의 나체사진 인화까지 질투의 상대에게 맡기는 남편, 고풍스러운 집안에서 자란 탓에 여자가 지켜야 할 의무를 당연히 여기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왕성한 성욕 때문에 이중적인 삶을 살아온 아내, 그런 모친의 음탕함을 대놓고 비난하다가도 자신의 교제상대인 남자와의 불륜을 조장하는 듯한 딸, 존경하는 남자의 아내와 딸을 양손에 거머쥔 파렴치한 같지만 정작 행동은 예의바른 사나이처럼 하는, 남편의 질투 상대인 젊은 남자 등이 그들입니다.

그들의 모든 관심은 부부의 침실 생활에만 맞춰져있고, 그 방법 역시 변태라고 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특이합니다. 작가는 이런 분위기를 위해 상당히 많은 양의 판화로 된 삽화를 함께 실었는데, 그 덕분에 내용이나 형식 모두 극단적이라고 할 지점까지 내달립니다.

 

요즘이야 워낙 극단적인 소재와 이야기들이 넘쳐나서 열쇠같은 작품의 출간이 주목받기 쉽지 않지만, 1950년대 일본에서 연재될 당시 정치권까지 나설 정도로 사회적인 이슈가 됐던 건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다루는 은 탐미적이라기보다는 파괴적이거나 악마적인 성격이 강한 편입니다. 작품 해설에서 언급된 다니자키의 다른 작품들의 내용을 보면 대체로 일관된 경향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들을 살피다 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활동 시점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억압받는 근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 속에서 남녀의 지위는 을 매개로 역전된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남자들은 여자들의 발 앞에 굴복하고 이용당하다가 종국엔 파멸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렇지만, 다니자키는 그런 메시지를 의도적으로 내세우진 않습니다. “나는 섹슈얼 페미니스트다!”라고 주장하지도 않고, 남자의 을 단순히 동물적인 것으로 격하시키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작품 속에서 여자는 신 아니면 완구라고 언급한 점을 보면, 지독한 여성 비하론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도 아니면 모식의 양극단을 치닫는 가치관을 지닌, 이해 불가한 뇌구조라고 할까요?

 

호기심을 자극하는 내용이지만, 읽고 나면 이게 뭐지?”라는 당혹감이 더 강하게 남는 작품입니다. 단순히 선정적인 장면들을 기대한다면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지만, 일본 문화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상식과는 거리가 먼 다소 기괴한 이야기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강추까지는 아니더라도 한번쯤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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