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몰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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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 각본가 가이 치히로는 유명세를 타고 있는 영화감독 하세베 가오리에게서 신작 각본에 대해 의논하고 싶다는 메일을 받고 깜짝 놀랍니다. 더구나 그 소재가 15년 전 고향 사사즈카초에서 벌어진 일가족 살해사건이란 사실에 궁금증이 더해졌지만, 실은 가오리 역시 그곳에서 3년 정도 살았으며, 그래서 그 사건을 영화로 조명하고 싶다는 설명을 듣곤 그녀의 신작에 전력을 다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자료조사를 하면 할수록 치히로는 혼란에 빠집니다. 새롭게 밝혀낼 진상이 없는 그 사건에 가오리가 집착하는 이유도, 영화로 만들려는 이유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오리는 그저 알고 싶어서.”라는 모호한 말만 할뿐입니다. 한편 치히로는 일가족 살해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사고로 죽은 언니 치호를 떠올리며 착잡한 심경에 빠집니다.

 

미나토 가나에의 작품에 별 3.5개라는, 보기 드문 야박한 평점을 주긴 했지만, 그건 일몰이 함량이 부족한 작품이라거나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라 서사나 스토리가 제 취향과 거리가 멀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서점에서 일본소설로만 분류돼서 미스터리 작품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일본의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을 강타한 전대미문의 살인 사건. 15년 전에 일어난 그 사건을 좇는 두 여성이 맞닥뜨린 진실은?”이라는 소개글 때문에 미나토 가나에 특유의 미스터리 서사를 조금은 맛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읽은 건데, 분명 살인사건의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는 맞지만, ‘일몰은 두 여성 가오리와 치히로가 유년시절과 청소년시절에 겪은 깊은 상처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이야기를 그린 정통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일약 유명세를 타게 됐지만 하세베 가오리는 대중성 높은 상업영화와는 거리가 먼 감독입니다. 오히려 논픽션에 가까운 무거운 주제 - ‘자살한 자들의 마지막 한 시간’ - 를 그려내서 화제가 됐는데, 그녀는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알고 싶어서영화를 만들었다는, 다소 선문답 같은 대답을 내놓은 바 있습니다. 그리고 어릴 적 잠시 살았던 사사즈카초에서 15년 전 벌어진 일가족 살해사건을 영화로 만들려고 하는 지금도 역시 같은 목적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반면 업계에 발을 들인 지 10년이 됐는데도 대작가의 조수 역할에 머물고 있는 신인 각본가 가이 치히로는 가오리와의 작업을 통해 제대로 된 각본가로 성공하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히지만, 시간이 갈수록 가오리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해 당황합니다. 범인이 뒤바뀔 일도, 이미 알려진 것 외에 새롭게 드러날 일가족의 사연도 없는데 굳이 그 사건을 영화로 만드는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과연 가오리는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건지, “알고 싶어서.”라는 가오리의 말 속엔 무슨 함의가 숨어있는 건지 치히로는 내내 답답할 뿐입니다.

 

감독님은 그렇게까지 해서 뭘 알고 싶은데요? 그리고 알면, 그 다음에 뭐가 있는데요?”

잘은 모르지만, 알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니까요.” (p325)

 

인구 15천 명 안팎의 작은 소도시 사사즈카초를 무대로 하고 있지만 일몰에는 가오리와 치히로를 둘러싼 여러 건의 죽음이 등장합니다. 가족, 친구, 좋아하는 사람을 비극적으로 떠나보냈던 가오리와 치히로는 보통사람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큰 상처와 트라우마를 지닌 채 성장했고, 그것들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영화 자료조사 차 여러 사람을 만나며 접하게 되는 정보들은 뜻밖의 진실을 알게 해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상처와 트라우마를 더 고통스럽게 헤집기도 합니다. 그 지난한 과정들이 자신들을 따뜻한 구원으로 이어줄지, 더 가혹한 지옥에 밀어 넣을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가오리와 치히로는 15년 전의 진실과 정면으로 마주하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야박한 평점을 준 이유가 서사나 스토리가 제 취향과 거리가 꽤 멀어 보였기 때문이라고 앞서 밝혔는데, 저와는 반대로 미스터리에 대한 기대감 없이 절망의 밑바닥을 경험한 사람들의 구원과 재생에 관한 이야기라는 홍보 카피에 눈길이 끌리는 독자라면 별 5개도 모자랄 만큼 푹 빠져서 읽을 수 있는 매력적인 작품이기도 합니다. 만일 똑같은 이야기를 정통 미스터리 서사로 풀었다면 재미있게 읽긴 했겠지만 일몰특유의 묵직하고 깊은 여운을 만끽하기 어려웠을 거란 점은 저 역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제 서평 때문에 조금이라도 선입관을 갖게 된 독자라면 다른 분들의 서평도 꼭 참고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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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유튜버
하마구치 린타로 지음, 김현화 옮김 / ㈜소미미디어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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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바다와 모래사장으로 유명한 미야코 섬에 오래된 게스트하우스 유이마루가 있습니다. 10여 년 전 코미디언이 되기 위해 도쿄에서 분투하다가 결국 꿈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유고가 11살 딸 우미카를 홀로 키우며 운영하는 곳입니다. 술과 낙담으로 살아가던 유고는 어느 날 유튜브에 대해 처음 알게 된 뒤 신세계를 만난 듯 흥분합니다. 그리고 유명 유튜버가 되겠다고 선언하곤 갖은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조금씩 구독자와 조회수를 모으기 시작합니다. 처음엔 한심한 눈길로만 바라보던 우미카는 아빠가 유튜브를 통해 돈을 벌고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자 깜짝 놀랍니다. 하지만 그 의욕이 지나쳐 점점 위험한 영상에 몰두하며 사고까지 일으키자 우미카는 큰 의문에 휩싸입니다. “아빠는 왜 그렇게 유명해지고 싶어 할까?”

 

유튜브라는 매체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데다, 유일하게 찾아 봤던 영상이라곤 그림으론 이해하기 어려웠던 낚시 매듭법 영상뿐이라 이 작품의 제목만 봤을 때는 조금도 끌리지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소개글을 읽다가 언젠가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오키나와의 미야코 섬이 이 작품의 배경이란 걸 알게 됐고, 오로지 그 이유 하나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재미있는 건 제목에도 유튜버가 들어있고, 분명 유튜브가 중요한 소재이긴 하지만 정작 이 작품은 유튜버나 유튜브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혹시 저처럼 유튜브에 거부감이 있는 독자라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데, 마지막엔 여러 번 울컥하는 느낌까지 만끽할 수 있어서 온기와 위로를 찾는 독자에겐 더없이 알맞은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래된 게스트하우스에 조용하고 아름다운 해변, 그리고 다분히 시골스러운 정경이 묘사되고 있지만 미야코 섬은 세계적인 호텔 체인이 들어설 정도로 유명한 관광지입니다. 다만 유고와 우미카가 살고 있는 게스트하우스 유이마루는 분주한 관광지 어딘가에 하나쯤은 있을 법한 외떨어지고 고즈넉한 이미지를 풍깁니다.

풍경에 비해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꽤나 요란합니다. 특히 간절했던 코미디언의 꿈을 접고 부모가 물려준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유고는 중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철없는 괴짜처럼 보입니다. 반면 그림을 좋아하고 세상을 떠난 엄마를 그리워하는 11살 딸 우미카는 애어른 같은 캐릭터라 유고와는 다른 의미에서 개성 있는 캐릭터입니다.

 

모든 사건의 발단은 유고가 유튜브라는 신세계를 알게 되면서부터입니다. 무작정 유명해지고 싶다며 채널을 열고 영상을 올리기 시작한 유고는 초반에는 꽤나 고전하지만 코미디언 지망생 특유의 기질을 살려 점차 구독자를 끌어들입니다. 문제는 돈도 충분히 벌게 됐고 나름 유명세도 타게 됐지만 유고의 폭주는 그칠 줄 모른다는 점입니다. 비싼 장비를 사들이는가 하면 위험천만한 행동을 영상에 담아 조회수를 올리는데 골몰합니다. 그러면서 전국 방송에 나가는 유명인이 되겠다는 다짐을 거듭 밝힙니다.

우미카를 비롯한 게스트하우스 주변 사람들은 하나 같이 유고의 폭주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단 한 사람, 10여 년 전 도쿄에서 함께 동고동락했던 고타로만이 유고를 남몰래 응원합니다. 유고는 고타로와 단 둘이 있을 때면 10여 년 전 도쿄에서 꿈을 좇아 분투했던 일들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 회상 장면이 현재의 이야기와 번갈아 등장하는데, 바로 그 회상 속에 현재 유고가 과격하게 폭주하는 이유가 숨어있고, 그 이유는 막판에 생각지도 못한 반전과 함께 독자의 심금을 울리게 됩니다.

 

아빠는 유튜버는 꿈에 관한 이야기이자 가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0여 년 전 유고가 절친들과 함께 꿈을 이루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했던 이야기, 현재 최고의 유튜버가 되어 전국 방송에 나가기 위해 다시 한 번 유고가 꿈을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 그리고 게스트하우스 유이마루 사람들이 단단하고 따뜻한 가족이 되어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동시에 의외의 반전이 선사하는 눈물 폭탄까지 만끽할 수 있어서 늘 독한 장르물만 탐독하던 저에겐 무척 신선한 책읽기를 경험하게 해줬습니다.

원제를 그대로 살리긴 했지만 아무래도 독자의 눈길을 끌기 어려워 보이는 제목과 조금은 공을 들였으면 좋았을 표지가 아쉬웠는데(미야코 섬의 정경을 배경으로 유이마루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다면?), 독자들의 입소문을 통해서라도 이 작품의 진가와 미덕이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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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카르테
치넨 미키토 지음, 권남희 옮김 / ㈜소미미디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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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소설이 아닌가 싶을 만큼 현실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수련의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상냥하고 다정하고 온화한 성격으로, 환자의 마음에 입은 상처를 달래주고 치료하려고 애쓰는 병아리 의사 선생님이. 술술 넘어가는 책장, 줄줄 새어나오는 미소, 어쩌면 이렇게 착한 소설이 있을까.” (p269, ‘옮긴이의 말)

 

기도의 카르테는 주인공 스와노 료타가 준세이 의과대학 부속병원에서 보낸 2년 동안의 수련의 생활을 연작단편 형식으로 그린 작품입니다. 스와노는 지도교수의 가르침 아래 정신과, 외과, 피부과, 소아청소년과, 순환기 내과를 돌며 환자들을 열심히 치료하는 수련의지만, 동시에 그 환자들이 품고 있는 내밀한 사연들을 포착하여 마음에 입은 상처까지 치료해주는 특별한 의사이기도 합니다.

 

툭하면 대량의 수면제를 먹고 스스로 구급차를 불러 실려 오는 여자, 완치가 확실한 간단한 수술법을 거부한 채 위험도 높은 개복수술을 요구하는 노인, 어떻게 봐도 수상할 뿐인 기묘한 화상을 입은 중년여자, 1년 전부터 천식 발작이 갑자기 심해진 소녀, 한때 아이돌 출신 배우로 이름을 날렸지만 지금은 치명적인 심장병 때문에 이식수술만 기다리고 있는 여자 등 스와노는 자신이 마주한 환자들에게서 다른 의사들은 알아채지 못한 특별한 사연과 비밀을 포착합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대학병원에서 의사가 한 사람의 환자에게 전력을 다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스와노는 쪽잠과 휴식을 포기하면서까지 환자들이 감추려 하는 뭔가를 알아내기 위해 진심으로 열과 성을 다합니다.

 

스와노를 지도하는 각 과의 의사들은 그의 진심 어린 노력과 의사로서의 재능을 칭찬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과에는 맞지 않는다며 손사래를 칩니다. 이유는 모두 똑같습니다. 환자 한 사람에게 전력을 다하는 스와노의 성격이 많은 환자들을 한꺼번에 돌봐야 하는 시급한 상황에는 잘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옮긴이의 말에서 스와노를 놓고 현실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수련의라고 표현한 건 바로 이런 캐릭터 때문입니다.

지금도 크게 바뀌지 않았겠지만 “5시간을 기다렸지만 의사와 만난 건 달랑 5분뿐이라는 대형병원 환자들의 불만을 떠올리면 분명 스와노는 이런 의사가 현실에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이라는 바람을 갖게 만드는 판타지 소설 속 의사로 보입니다. 의료체계가 무너져버린 이즈음의 세상을 떠올려보면 스와노 같은 의사에 대한 간절함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인데, 그래선지 현직 의사인 치넨 미키토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하려고 했던 바가 더욱 진정성 있게 느껴졌습니다.

 

뒤늦게 그 진가를 알아본 탓에 미처 못 읽었던 치넨 미키토의 작품들을 몰아서 읽는 중인데, 판타지와 라노벨 계열의 작품을 제외하곤 이제 거의 다 읽은 것 같습니다. 아직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그의 작품이 꽤 많은데, 2024년 안에 한두 편쯤은 신작 소식이 들려오기를 간절히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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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어의 도시 1 스토리콜렉터 23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서유리 옮김 / 북로드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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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스트리트에서의 성공을 꿈꾸던 알렉스 존트하임은 35살의 나이에 유력 투자은행에 스카우트되어 M&A 팀장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막강한 재력가인 세르지오 비탈리의 연인이 된 뒤로 뉴욕 최상류층의 삶을 만끽하지만, 얼마 후 그 이면에 돈과 권력을 향한 무자비한 일들이 자행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알렉스는 회의를 품곤 세르지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 한다. 하지만 상황은 더 악화되고 알렉스는 생명의 위협마저 받게 된다. 한편 검사 시절부터 세르지오와 오랜 악연을 이어온 닉 코스티디스 뉴욕 시장은 알렉스의 도움을 받아 세르지오의 범죄를 입증하려 하지만 오히려 치명적인 위기에 빠진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타우누스 시리즈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넬레 노이하우스가 처음 쓴 장편소설은 (모든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한 뒤) 자비 출판을 통해 세상에 나온 상어의 도시입니다. 주인공 알렉스가 독일 국적의 여성이긴 하지만 이야기의 무대는 뉴욕이고, 사건 역시 정재계의 추악한 부정부패, 내부자 거래를 통한 부당이득, 사방에서 난무하는 테러와 살인 등 타우누스 시리즈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을 품고 있습니다. 넬레 노이하우스의 광팬이다 보니 출간 직후 구매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너무 오래 방치한 끝에 이제야 상어의 도시를 읽게 됐습니다.

 

이야기를 이끄는 세 명의 인물은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한 것은 물론 독보적인 존재감을 발휘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월스트리트에서의 성공을 인생 목표로 삼은 알렉스는 10여 년의 노력 덕분에 유능한 M&A 전문가가 됩니다. 거기다가 재력가이자 카리스마와 매력을 겸비한 세르지오의 연인까지 되자 그녀는 앞으로 꽃길을 걸을 일만 남았다는 행복감에 도취됩니다.

50대 중반의 세르지오 비탈리는 맨해튼의 절반을 소유하고 있는 살아있는 전설이자 정재계에 걸쳐 어마어마한 인맥을 과시하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건실한 사업가이자 엄청난 기부 천사라는 외양과 달리 그의 부와 명예는 잔혹한 범죄를 토대로 구축된 것입니다.

역시 50대 중반인 닉 코스티디스는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대쪽 같은 시장입니다. 검사 시절이던 20년 전부터 세르지오를 노려왔지만 번번이 체포에 실패했던 그는 뉴욕 시장이 된 지금도 세르지오를 눈여겨보고 있는 중입니다.

 

1~2권을 합쳐 800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이지만 이야기의 구조는 단순합니다. 매력적인 연인이자 재력가인 세르지오가 실은 온갖 악행을 통해 부와 명예를 축적해온 걸 알게 된 알렉스가 고군분투 끝에 코스티디스와 함께 그의 악행을 밝혀내는 이야기입니다. 넬레 노이하우스는 이 단순한 구조 속에 권력층에 만연한 부정부패, 월스트리트에서 은밀하게 자행되는 경제범죄, ‘대부를 연상시키는 잔혹한 테러와 살인 등 맛깔스런 스릴러 양념들과 함께 알렉스가 벌이는 여러 겹의 아슬아슬한 로맨스까지 쉴 새 없이 녹여 넣어 두툼한 분량 내내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다만 평점에서 별 1개를 뺄 수밖에 없었던 건 (첫 장편소설에 대한 넬레 노이하우스의 의욕이 과했던 탓인지) 필요 이상의 상세한 묘사와 사족이 과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월스트리트의 경제범죄에 대한 디테일한 설명은 그 피로도가 무척 높아서 1권 후반부쯤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꽤나 지루하고 느슨한 책읽기를 피할 수 없게 만듭니다. 일반인에겐 생소한 전문분야라서 최대한 친절하게 설명하려 했던 것 같지만, 개인적으론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는 생각입니다. 그 외에 사건이나 감정에 대한 묘사 역시 지나치게 공을 들인 경우가 많았는데, 그래선지 다 읽은 뒤엔 500~600페이지로 압축했더라면 훨씬 매력적인 작품이 됐을 거란 아쉬움이 여러 번 들었습니다.

 

오래 묵혀온 숙제를 겨우 끝낸 개운함과 아주 약간의 아쉬움을 품은 채 마지막 장을 덮었습니다. 총평하자면, 분량이 좀 과하고 이야기의 전개가 다소 전형적인데다 상투적이기도 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넬레 노이하우스 특유의 스피디하고 긴장감 넘치는 스릴러 서사를 맛볼 수 있어서 그녀의 팬이라면 충분히 만족할 만한 작품이 돼줄 것 같습니다.

사감을 담은 사족 하나만 덧붙이자면, 넬레 노이하우스가 소시지 공장에서 일하는 와중에 남편 눈치를 보며 틈틈이 쓴 눈물 젖은 자비 출판 데뷔작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읽다 보면 이런저런 아쉬움들은 얼마든지 용서하며(?) 페이지를 넘길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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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나무의 여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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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향신사에는 거대하고 장엄한 녹나무 한 그루가 있다. 초하룻날과 보름날 밤마다 나무 동굴 속으로 들어가 밀초에 불을 켜면 혈연으로 이어진 사람끼리 염원을 주고받을 수 있다. 녹나무에 염원을 새기면 예념이고, 그것을 받으면 수념이라고 하는데, 예념자와 수념자를 이어 주는 사람이 바로 파수꾼이다. 나오이 레이토는 이모 치후네의 뒤를 이어 새로운 파수꾼이 돼 매일같이 신사 경내를 청소하고 예념자와 수념자를 안내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집에 절도범과 강도가 연달아 침입한 기이한 사건 때문에 레이토는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된다. 더구나 시집(詩集)을 대신 팔아 달라는 여고생과 잠들면 기억을 잃는 소년까지 나타나며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간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녹나무의 여신2020년 출간된 녹나무의 파수꾼의 후속작으로, 혈연으로 이어진 사람들 사이에 염원을 주고받게 해주는 신비하고 영험한 녹나무와 신사 관리인이자 녹나무 파수꾼인 나오이 레이토가 펼쳐 보이는 기적에 관한 이야기이자 힐링 판타지 미스터리입니다. 불우한 성장과정을 겪다가 전과자가 될 뻔했던 레이토가 이모 치후네에게 구원받은 뒤 신사 관리인이자 녹나무 파수꾼이 되어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이야기가 전작의 주요 내용이라면, ‘녹나무의 여신은 아직 어설프긴 해도 어엿하게 성장한 레이토가 갖가지 사건에 휘말리는 가운데 여러 사람들의 운명에 따뜻하고 훈훈한 영향을 미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여러 갈래의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그것들은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한줄기로 합쳐지면서 거대한 녹나무가 발산하는 긍정과 선의의 에너지에 맞먹는 애틋한 감동과 여운을 선사합니다. 신사 인근의 한 주택에 절도범과 강도가 연이어 든 사건 때문에 경찰의 의심을 받게 되는 레이토의 이야기가 밑바탕에 깔려 있고, 자신이 직접 쓰고 제본한 시집을 신사에서 판매하게 해달라며 레이토를 찾아온 여고생 유키나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뇌종양 수술 이후 심각한 기억장애 - 잠이 들면 전날의 기억이 모두 사라져버리는 장애 - 를 겪고 있는 중학생 소년 모토야는 누구에게나 철벽을 친 채 살아가지만 우연한 기회에 레이토와 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되는 것은 물론 특별한 그림 재능 덕분에 시를 쓰는 유키나와 함께 그림동화를 만들기로 하는 등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레이토를 수렁에서 구원해준 이모 치후네의 인지장애 증세가 점차 심각해지면서 벌어지는 가슴 아픈 이야기 역시 나머지 이야기들과 절묘하게 연결되면서 독자의 눈가와 코끝을 수시로 찡하게 만들곤 합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중 원 픽을 꼽으라면 전 주저하지 않고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추천합니다. 결은 전혀 다르지만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비밀’. 그리고 녹나무 시리즈는 기적에 관한 판타지이자 선의를 전염시키는 힐링 소설이며 하나같이 수시로 눈물을 뽑아내고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실 전편인 녹나무의 파수꾼은 그런 기대감이 너무 강했던 탓에 제대로 눈물을 뽑아내지 못했는데, ‘녹나무의 여신은 그때와는 반대로 일부러 기대감을 낮춘 덕분인지 예상 밖으로 여러 대목에서 목구멍과 눈시울이 뜨끈해지는 행복한 경험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그 행복한 경험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물론 주인공 레이토지만, 이 작품은 주요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여러 갈래의 이야기들이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전개돼서 더 애틋하고 특별하게 읽혔습니다. 대부분 불행하거나 불우하거나 불안감에 사로잡힌 인물들이지만 그들은 녹나무 파수꾼 레이토를 통해 삶과 운명, 현재와 미래, 희망과 도전에 대해 조금은 낙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얻게 됩니다. 물론 그 여유는 거꾸로 레이토에게 선한 전염력을 발휘하여 그의 성장에 의미 있는 자양분이 돼주기도 합니다.

 

장르를 불문하고 기적, 힐링, 판타지 같은 단어가 소개글에 들어있으면 막연한 거부감부터 발동하는 게 사실인데, ‘녹나무 시리즈를 소개할 때 이 단어들을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좀 답답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가 그동안 선보인 기적과 힐링과 판타지를 한 번이라도 맛본 적 있는 독자라면 녹나무의 여신이 어떤 매력을 품고 있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지만 혹시 녹나무의 파수꾼에서 밋밋함 이상의 감흥을 느끼지 못한 독자라도 녹나무의 여신만큼은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거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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