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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평점 :
1980년대 초반, 아일랜드 시골의 어린 소녀인 ‘나’는 여름방학을 먼 친척인 킨셀라 부부의 집에서 보내게 됩니다. 이미 여러 자식을 둔 엄마가 또 다른 아기를 출산할 때까지 좀더 편히 지내도록 ‘맡겨진’ 것이지만, 실은 이리저리 손이 가는데다 없는 살림에 밥만 축내는 ‘나’는 부모에 의해 ‘떠맡겨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모든 게 낯설고 두려웠지만 킨셀라 부부와 함께 보낸 짧은 여름은 ‘나’에게는 지금껏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해줬습니다.
자극적인 장르물 편식이 지독한 제가 순수문학, 그것도 ‘아일랜드의 한 소녀가 겪은 특별한 여름’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인터넷서점과 인스타그램에서 발견한) 출판사의 뛰어난 마케팅과 여러 매체 및 작가들의 찬사이고, 또 하나는 본 내용이 100페이지도 채 안 되기에 그 수많은 찬사의 정체가 뭔지 금세 알 수 있겠다는, 또 여차하면 바로 접을 수 있겠다는 그리 건전치 못한 호기심입니다.
10살도 채 안 된 소녀의 인생은 킨셀라 부부의 집에 도착한 바로 그 순간을 기준으로 전혀 다른 색깔을 띠게 됩니다. 이전의 인생이 가난과 무관심과 냉대의 잿빛이었다면 이후의 인생은 아주 천천히 밝고 따뜻한 색으로 충만해집니다. 처음엔 낯설고 두려운 나머지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었지만, 소녀는 날이 바뀔 때마다 자기 앞에 펼쳐진 새로운 세계가 얼마나 따뜻하고 아늑한지 천천히,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사소하지만 꼭 필요한 삶의 지혜를 하나둘씩 체득하는 것은 물론 타인의 상처와 상실에 공감하는 법도 자연스럽게 익힙니다. 표지 뒷면에 실린 “사랑과 다정함조차 아플 때가 있다. 태어나 그것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이에게는.”이라는 문구는 킨셀라 부부 집에 살게 된 소녀의 첫 불안감과 함께 소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잘 압축한 카피입니다. 킨셀라 부부와 함께 한 짧은 여름 동안 훌쩍 성장한 소녀는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지만 이제 그녀 앞에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새로운 전율’, ‘완벽한 정수’, ‘순수한 결정체를 연상시키는 문장’ 등 이 작품에 쏟아진 찬사에 모두 동의하기는 어렵습니다. 어쩌면 진짜 보석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저의 부족함 때문일 수도 있지만 다소 과해 보인 게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든 한번쯤 읽어보라고 자신 있게 권유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는데, 그건 딱히 뭐라고 정의하긴 힘들지만 이 작품이 발산하는 특별한 에너지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긍정, 힐링, 계몽 같은 건 아니고, 뭐랄까... 소녀의 여름은 두 번째 읽을 때의 느낌이 다를 것 같고, 세 번째 읽을 때는 또 다른 느낌을 받을 것 같은, 그런 특별함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고 간결한 이야기지만 암시와 여백과 행간을 중요하게 여긴 작가의 의도 덕분인지 늘 곁에 두고 생각날 때마다 펼쳐보고 싶다고 할까요?
소녀의 여름을 지켜본 모든 독자의 바람은 비슷할 것입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소녀가 예전과는 다른 삶을 살기를, 따뜻하고 긍정적인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그래서 킨셀라 부부처럼 누군가에게 조건 없는 사랑과 배려를 전해주기를 바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일은 알 수 없듯 킨셀라 부부와 함께 보낸 그 여름이 소녀의 삶에 행이 될지 불행이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으며 그런 근거 없는 불안감이 불쑥 솟아났는데, 어쩌면 이런 해석조차도 작가의 의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기회가 되는대로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 ‘말없는 소녀’를 보려고 합니다. 담담함 그 자체인 원작에 충실했으면 좋겠다는, 그러니까 너무 영화적인 감동을 강요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관객들로부터 좋은 평을 들었다는 소문이 맞다면 나름 기대를 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