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줘
길리언 플린 지음, 강선재 옮김 / 푸른숲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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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은 뒤 표지 안쪽에 실린 작가 길리언 플린의 사진을 보면서 문득 레베카의 작가 대프니 듀 모리에가 생각났습니다. “얌전하게 생긴 작가가 글 한번 진짜 독하게 썼네.”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던 기억 때문입니다. 작가의 외모와 글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 자체가 전근대적인 헛소리인 건 분명하지만 외모와 글 모두 깊은 인상을 남긴 탓에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는 대프니 듀 모리에의 레베카보다 몇 배는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품이었습니다.

크게 세 장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두 번째 장 이후의 줄거리는 그 자체로 완벽한 스포일러라서 어쩔 수 없이 첫 번째 장의 전개 부분까지밖에 소개할 수 없습니다. 남편 닉과 아내 에이미가 한 챕터씩 번갈아 의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두 사람의 결혼 5주년 날, 에이미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닉의 챕터는 수사진의 개입, 주변 인물이나 언론의 반응, 그리고 닉에게 집중되는 혐의와 그의 치명적인 비밀을 그립니다. 보통 아내가 사건 피해자일 경우 유력한 용의자로 남편이 손꼽히기 마련입니다. 닉도 마찬가지여서 수사를 맡은 형사 보니와 길핀은 닉을 유심히 살핍니다. 더구나 살인사건으로 추정할만한 흔적들이 발견되고, 사건이 언론을 통해 갈수록 부풀려지자 닉은 어떻게든 자신의 무고함을 입증하려 애쓰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사방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정황들이 나타나면서 말 그대로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에이미의 챕터는 그녀가 기록한 일기장의 내용들입니다. 7년 전, 닉과 사랑에 빠진 에이미의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시작된 일기는 5년의 결혼생활이 어떻게 악몽으로 변질됐는지를 묘사하다가 결국 실종 일주일 전, 절망만 남은 에이미의 비참함으로 마무리됩니다. 에이미의 마지막 일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이 남자가 나를 죽일 수도 있겠구나.”

 

월스트리트저널은 피가 난무하지 않아도 이런 서스펜스를...”이라고 평했고 뉴욕데일리 뉴스는 장미의 전쟁과 비교하며 호평했지만, 난무하지만 않을 뿐 피는 적당히 등장하는 편이고, ‘장미의 전쟁이 지독한 블랙코미디 스타일의 폭력 장면 때문에 히트를 쳤다면 나를 찾아줘는 고도의 지능전이 베스트셀러의 동력이 됐다는 생각입니다.

작가는 곳곳에 적절한 부비트랩을 잘 설치해놓았습니다. 인물, 사건, 소품 등 그 종류도 다양하고, 파괴력 역시 에피소드에 맞춰 잘 조율해놓았습니다. 스트레이트로 완독하다 보니 몸도 피곤하고 눈도 뻐근해졌지만, 지루해질 만하면 사방에서 터져준 폭탄들 덕분에 도저히 중간에 끊을 수가 없었습니다. (부비트랩 중 한두 가지만 털어놔도 이 책을 읽는 재미가 반감되기 때문에 이렇게 애매모호한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습니다.)

 

내용의 절반 정도는 서스펜스나 스릴러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들입니다. “불꽃 튀는 사랑을 나눈 연인들이 행복한 결혼에 골인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랑은 시들해지고, 끝내는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최악의 존재로 추락하는 이야기가 적잖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나머지 절반은 한시도 긴장을 풀 수 없는 스피디한 장르물의 덕목을 갖추고 있고, 특히 두 번째 장부터는 페이지 터닝 속도가 몇 배는 빨라지지만, 성격 급한 독자들에겐 초반부의 식상한 부부 갈등이 다소 지루하고 답답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스펜스와 스릴러를 위한 필수적인 토대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좀 과하게 보인 게 사실입니다.

 

전체적으론 매력이 철철 넘치는 작품이지만, 0.5개를 빼게 만든 유일한 단점은 분량의 문제입니다. 요즘 들어 700페이지를 넘나드는 작품들을 자주 읽은 탓인지 나를 찾아줘’(693페이지)의 첫 페이지를 펼칠 때만 해도 큰 부담감을 느끼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미스터리나 스릴러의 경우 연이은 사건, 복잡한 관계, 그리고 주인공 외에도 여러 캐릭터와 사건들이 방대한 분량을 나눠 책임지는 일종의 분업형태로 전개되기 때문에 그리 부담스럽지는 않지만, ‘나를 찾아줘는 주인공 닉과 에이미 두 사람에게 거의 모든 것이 맞춰져 있는데다, 이야기 역시 좁고 깊게 파들어가는 스타일이다 보니, 적어도 이틀에 나눠서 읽어야 덜 부담스러울 수 있는 작품입니다. 괜한 욕심에 일요일 하루에 끝내겠다고 덤볐다가 밥시간 빼고 읽는 데만 9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리언 플린이 해외에서 받은 호평은 결코 공치사나 홍보를 위한 미사여구가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2009년에 출간된 첫 소설 그 여자의 살인법을 빨리 찾아 읽어봐야겠다는, 동시에 신작까지 기다리게 되는 기대 이상의 느낌을 안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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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0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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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제목이나 표지만으로도 묘하게 끌리는 작품이 있습니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제목과 표지 모두 단번에 시선을 잡아끌었는데 검색해보니 나오키상 후보에도 올랐고 야마모토슈고로 상도 받은 작품이었습니다. 로맨스 판타지라는 장르는 제 취향과는 한참 거리가 먼 쪽이었지만, 어쨌든 호기심과 기대를 갖고 첫 페이지를 펼쳤습니다.

모두 네 개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사실 장편소설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봄부터 겨울까지 계절마다 한 편씩의 에피소드가 연작처럼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이한 건 마지막 장까지 남녀 주인공의 이름이 소개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남자의 챕터는 “~했다, 여자의 챕터는 “~했습니다로 구분되며, 두 사람의 관계가 대학 클럽 선후배라는 점만 설명됩니다.

 

이야기 구조는 단순합니다. 선배인 는 어느 날 후배인 그녀에게 반합니다. 하지만 무턱대고 들이대기보다는 계속 그녀의 시야 안에 들면서 점점 관심을 끄는 작전을 택합니다. ‘는 무작정 성()의 본체를 공격하는 멍청한 남자들과 달리 성을 둘러싼 해자를 메우듯 끈질기게 그녀에게 다가가는 쪽을 택합니다. 그리고 거의 1년에 걸쳐 조금씩 그녀의 마음을 얻어내고 맙니다. 단순하고 진부한 짝사랑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작가는 기발한 문장과 특이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개성 넘치는 결과물을 내놓았습니다. 또한 로맨스 판타지라는 장르답게 비현실적인 해프닝들이 곳곳에 설정되어 있는데 그 또한 읽는 재미를 배가시켜 줍니다.

 

첫 에피소드는 술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그녀미친 듯이 술을 마시고 밤과 어른들의 세계에 빠져들고 싶다는 생각에 기야마치와 폰토초를 거닐면서 중요한 조연들과 첫 만남을 갖습니다. 그 사이 그녀를 뒤쫓다가 생각지도 못한 사건들을 겪게 됩니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시모가모 신사에서 열린 헌책 시장에 그녀가 나타날 것이라는 정보를 얻고, 하루 종일 그녀의 뒤를 쫓는 의 이야기입니다.

세 번째 에피소드는 가을 대학축제에서 벌어진 일대 해프닝을 무대로 합니다. 축제의 마지막 날을 요동치게 만든 사건으로 인해 그녀의 관계는 극적인 변곡점을 맞이합니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교토를 휩쓴 지독한 감기를 소재로 하는데, 우여곡절 끝에 이뤄지는 그녀의 해피엔딩 이야기입니다.

 

읽으면서 문득문득 든 생각은, 평범하지 않은 원작을 전혀 어색하지 않게 옮긴 번역자의 깔끔한 솜씨에 관한 것입니다. 파격적이고 현란한 문체, 통통 튀듯 구사된 의외의 단어들, 촌철살인에 가까운 적절한 비유와 풍자 등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번역이 얼마나 지난한 작업이었을지 짐작이 됐습니다.

적재적소에 등장한 조연들도 주인공들의 이야기 못잖게 재미를 줍니다. 도도한 여장부이자 말술 캐릭터 하누키, 텐구(天狗)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유카타 사나이 히구치, 고리대금업자이자 밀주 가짜 전기부랑의 주인공 이백 할아버지, 비단잉어 사업가이면서 춘화 콜렉터인 도도 등 별나고 특이한 캐릭터들이 분위기 메이커이자 해프닝 메이커로 활약합니다. 특히 가을 축제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여러 조연들은 유쾌한 소동극을 눈앞에서 직접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입체적인 캐릭터들입니다.

 

다만, 이런 여러 가지 장점에도 불구하고 가장 아쉬운 점은 에피소드가 뒤로 갈수록 로맨스보다는 판타지의 성격이 강해지면서 조금은 의 짝사랑 과정이 비현실적이거나 지루해지는 경향이 있다는 점입니다. 또 첫 에피소드인 표제작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느낌이 너무 강해서 뒤에 실린 이야기들이 상대적으로 심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특히 마무리 에피소드는 다소 실망스러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아무튼... 미스터리와 스릴러에 파묻혀 지내다가 얼마 전부터 편식을 피하기 위해 가끔씩 라이트한 이야기들을 섞어 읽는 중인데,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충분히 제 역할을 해준 작품이었습니다. 로맨스의 재미를 맛보고 싶거나 지친 일상 속에서 휴식 겸 여유를 찾고 싶을 때 언제든지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좋은 텍스트로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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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의 복합 세이초 월드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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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작가 이세 다다타카는 구사마쿠라라는 처음 듣는 잡지의 편집차장 하마타카로부터 전설을 찾아가는 벽지 여행이라는 타이틀로 연재물 집필을 의뢰받곤 오지를 돌아다니며 그곳에 전해지는 전설이나 설화를 기행문 형식으로 연재하기 시작합니다. 첫 편이 호응을 얻은 덕분에 이세는 박학다식한 수다쟁이 편집자 하마타카와 호흡을 맞추며 오지 여행을 계속합니다. 하지만 여행이 거듭될수록 이세와 하마타카 주위에서 기이한 일이 벌어집니다. 매장된 사체를 수색하는 지역 경찰과 마주치기도 하고, 어딘가 4차원 같은 열혈 독자의 방문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면식이 있던 사람들이 연이어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두 사람은 직접 조사에 나서고 점차 사건의 퍼즐 조각들을 하나씩 손에 넣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주위에서 벌어진 사건이나 자신이 만났던 인물들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은 읽을 때마다 느끼는 바지만, 뭐랄까, 바른 자세를 하고 읽어야 할 것 같은 엄격함이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이나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치밀한 자료조사 때문이기도 하지만, 등장인물들이 지닌 한없이 깊은 사연들 덕분에 사건의 무게 역시 부담스러울 정도로 무겁기 때문입니다. ‘모래그릇때도 그랬고, ‘짐승의 길에서도 그랬고, 이번에 읽은 ‘D의 복합역시 예외 없이 한나절을 바른 자세로 열심히 읽었습니다.

 

본문 앞에 두 페이지에 걸쳐 일본의 중서부 지도가 실려 있습니다. 보통 미스터리에 실린 지도나 그림, 평면도 등은 봐도 별 도움이 안 되는 경우가 많은데, ‘D의 복합은 이 지도가 없으면 여러 가지로 불편한 점이 참 많습니다. 더구나 일본의 전설과 설화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꽤 많은 고대 인명과 지명이 등장하는 바람에, 초반 100페이지 정도에 이르기까지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애를 먹었습니다.

하지만, 거꾸로 이만한 자료조사를 위해 작가가 얼마나 많은 발품을 팔았으며, 얼마나 많은 자료조사를 했을까, 생각하면 새삼 마쓰모토 세이초의 집요함에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이 작품이 연재된 시기가 1965~1968년이라고 하니,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수동식으로 진행했어야 할 텐데, 인터넷 검색에 익숙해진 요즘의 작가나 독자에겐 엄두도 못낼 일입니다.

 

‘D의 복합은 세련되고 스피디한 현대의 장르물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좋게 얘기하면 고전적인, 나쁘게 얘기하면 나이브하고 설명적인 인상을 줄 수 있는 작품입니다. 아무래도 작가와 편집자라는 비전문가들이 사건을 조사하겠다고 뛰어다니다보니 전문성도 떨어지고, 막판에 여러 페이지가 할애된 사건의 전말을 읽다보면 결과에 짜맞추기 위한 무리한 설정들이 많았다는 느낌을 피하기 어려웠습니다. 특히 196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더라도 초능력자가 아니면 실천하기 어려운 난해한 범행 설정은 사실감을 떨어뜨렸는데, 훌륭하고 매력적인 재료들을 갖췄지만 적정량보다 지나치게 많이 투입된 탓에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고 할까요?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은 보통의 책읽기보다 두 배 이상의 에너지를 소모시킵니다. 읽는 내내 유지해야 하는 바른 자세 때문이기도 하고, 읽고 난 후의 음울하고 묵직한 여운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동안 계속 피하다가 읽게 된 것이 ‘D의 복합인데, 아무래도 다음 작품은 넉넉히 시간을 두고 올 겨울쯤에나 다시 한 번 고민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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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째 아들 1 - 마녀의 복수 일곱 번째 아들 1
조셉 딜레이니 지음, 김옥수 옮김 / 까멜레옹(비룡소)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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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물은 책이든 영화든 그리 즐겨 찾아보는 편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선과 악이 처음부터 선명하게 설정되어 있고, ‘누가 이기냐?’보다 어떻게 이기냐?’가 주안점이다 보니 스펙터클한 비주얼이나 화려한 문장들 외에는 딱히 눈길 끌릴만한 지점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간혹 인연이 닿아 읽거나 보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일곱 번째 아들역시 그런 경우입니다. 하지만 가끔 이렇게 별난 간식처럼 읽게 된 작품에서 낯설고 새로운 재미를 느끼는 것도 유쾌한 경험이긴 합니다.

 

일곱 번째 아들이 낳은 일곱 번째 아들만이 유령사냥꾼이 될 자격이 있는데, 토머스 J 워드는 13살이 되던 해, 유령사냥꾼의 도제가 되기 위해 집을 떠납니다. 그 후로 한 달 동안의 테스트를 거쳐 유령사냥꾼 그레고리의 정식 제자가 됩니다. 그러던 중, 묘령의 또래 여자아이 앨리스를 알게 되면서 톰은 마녀 멀킨과 악연을 맺습니다. 그녀는 스승인 유령사냥꾼 그레고리가 13년 전 생매장했던 마녀입니다. 중반부까지가 톰이 도제로 성장하는 과정의 이야기라면, 나머지는 마녀의 복수라는 부제처럼 톰과 멀킨의 두 번에 걸친 대결을 그리고 있습니다.

 

여러 종류의 유령, 혼령, 마녀, 그리고 보가트라는 특이한 존재가 등장합니다. 유령사냥꾼은 여러 곳을 떠돌며 이 귀신들을 상대하는 임무를 수행하는데, 특이한 것은 그의 보호를 받는 일반 시민들로부터도 그리 환영받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아마 유령사냥꾼의 카리스마나 고독함을 표현하기 위한 설정 같은데, 그 나름의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어서 시리즈물로서는 좋은 장치라는 생각입니다.

 

영국에서 이런 스타일의 판타지물이 자주 출간 혹은 제작되는 이유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음산하고 우울한 날씨, 곳곳에 산재한 척박한 황무지, 섬이라는 지리적 특징들이 문학이나 음악, 미술 등에 영향을 미친 게 아닌가 짐작됩니다. 독특한 정서이긴 한데, 아무래도 서양의 귀신 이야기이다 보니 흡인력이나 공감도는 크게 높진 않았습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미야베 월드 2은 에도 시대의 괴담을 그리는데, 같은 문화권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상대적으로 더 재미있고 긴장감 있게 이입해서 읽었던 것을 보면 아무래도 귀신 이야기는 같은 문화권에서 더 환영받고 공감될 수 있는 장르인 것 같습니다.

 

주인공 톰의 성장기나 여주인공 앨리스의 이야기는 당연히 기대되는 대목이지만, 애초에 톰을 유령사냥꾼으로 보낸 어머니 역시 이후에 이어질 시리즈에서 여러 번 뒤통수를 칠 수 있는 캐릭터로 보입니다. 분명 뭔가가 있는 역할인데, ‘일곱 번째 아들에서는 살짝 일부만 노출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성장하는 유령사냥꾼 톰, 그의 적이 될지 아군이 될지 오리무중인 앨리스, 그리고 톰의 가장 큰 조력자인 그레고리와 톰의 어머니 등 이들이 2권 이후부터 끌고 갈 이야기는 사이즈도 좀더 커지고, 우여곡절도 더 심하게 겪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영화로도 제작된다고 하는데 성공한 다른 판타지물들의 뒤를 이을 수 있을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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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불임 클리닉의 부활
가이도 다케루 지음, 김소연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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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도 다케루의 광팬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뒤늦게 읽게 된 마리아 불임클리닉의 부활입니다. 가이도 다케루가 창조한 명콤비 다구치&시라토리가 활약하는 시리즈 작품은 아니지만, 불임이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어서 관심을 갖게 됐는데, 저출산에 대한 관료 체제의 잘못된 대처, 불임 치료에 관한 국가의 무관심, 그리고 인공수정과 대리모에 관한 도덕적 논란 등 민감하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데이카 대학의 32살의 유망한 산부인과 조교 소네자키 리에는 곧 문을 닫게 될 마리아 불임클리닉에서 마지막 다섯 명의 임산부를 진찰합니다. 세 명은 자연임신, 두 명은 인공수정을 통해 임신을 했는데 모두 제각각 기구한 사연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편 리에가 속한 데이카 대학에서는 리에의 클리닉 진찰을 못마땅해 하던 차에 그녀가 불법적인 대리모 출산에 손을 대고 있다고 의심합니다. 리에의 파트너이자 멘토인 기요카와는 행정관료나 다름없는 야시키 교수의 명령으로 리에의 불법 행위에 관한 증거를 캐려 하지만 여의치 않습니다. 운명처럼 한날 거의 동시에 모든 임산부가 출산을 하게 되고, 리에는 때를 기다렸다는 듯 파격적인 행보를 통해 야시키 교수는 물론 기요카와까지 패닉 상태에 빠뜨립니다. 그리고 리에의 비밀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기요카와는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리에는 자신들의 영역과 이익을 위해 의료시스템을 붕괴시킨 관료체제와 대학병원에 저항하며 불임 치료에 헌신합니다. 최선을 다한 의료행위에 대해 함부로 사법적 판단을 내리는 썩은 사회 시스템에 대해서도 몸을 사리지 않고 공개적으로 저항합니다. 동시에 리에는 한 여자로서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삶 속에는 미국에 있는 남편도 있고, ‘적이자 동지이자 연인 같은기요카와도 있습니다. 또 불임치료, 인공수정, 대리모 등 논란이 되는 모든 영역에 그녀 자신이 개입되어 있기도 합니다. 의사로서도, 한 개인으로서도 행복하고 안정된 삶이라고 할 순 없지만 자신만의 의지와 목표로 치열하게 살아가는 리에의 불꽃같은 열정이 작품 내내 그려집니다.

 

워낙 민감한 사회적 이슈를 놓고 캐릭터들이 첨예한 갈등을 하는데다 독자들의 궁금증을 야기하는 비밀들도 여러 가지라 쉽게 눈을 떼지 못합니다. 물론 재미보다는 메시지에 더 방점을 둔 작품이다 보니 오락성 강한 메디컬 미스터리 장르인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에 비해 긴장감이 덜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이도 다케루만의 매력은 작품 전체를 통해 충분히 만끽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메디컬 소재를 쉽고 간결하게 묘사하는 능력, 언제나 희망이라는 것을 품은 채 마지막 페이지를 덮게 해주는 배려, 그리고, 정곡을 찌르는 적절한 비유 등이 그것입니다. 불임과 대리모 등 임신을 둘러싼 다양한 논쟁을 픽션을 통해 깊이 각인시킨 점은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에 못잖은 힘과 매력을 갖고 있습니다.

 

다만, 거대한 공룡 같은 시스템에 저항하는 리에가 슈퍼 울트라 초능력자처럼 묘사된 점은 아쉬웠습니다. 대학교수든 행정관료든 상대를 가리지 않고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계산으로 상대방을 넉 다운 시키며 기어이 체제 전복적인 결단까지 마다하지 않는 터미네이터 급 여전사인 리에는 의사로서의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여자로서의 매력, 훌륭한 카운슬러로서의 자질, 심지어 예지력에 이르기까지 사회파 장르물의 주인공이 갖출 수 있는 모든 덕목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유들 때문에, 가끔은 어라?’할 정도로 멈칫멈칫하게 만드는 챕터들이 등장합니다. 너무 쉽게 국면이 전환되는 부분도 있고, 너무도 비범한 나머지 현실감이 떨어지는 대목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저런 아쉬움이 들긴 했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마지막 장을 덮을 때는 저도 모르게 간절한 희망과 바람을 지니게 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멀지 않은 미래에 리에에게 행복한 날들이 찾아오기를, 또 리에가 꿈꾸는 세상이 허황된 공상이 아니라 조금씩이라도 현실의 모습을 갖춰가기를 응원하게 되는 건 비단 저만의 경험은 아닐 거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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