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 짓는 사람
누쿠이 도쿠로 지음, 김은모 옮김 / 엘릭시르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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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내와 딸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니토 도시미는 책이 늘어나 집이 비좁아지는 바람에... 아내와 딸이 사라지면 그만큼 책을 더 둘 수 있을 것 같아서...”라는 범행 동기 때문에 전국을 들끓게 만듭니다. 소설가인 는 관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니토에 관한 르포를 쓰기로 결심합니다. 주변 인물을 탐문하며 살인마 니토의 흔적을 찾아내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니토에 관한 험담을 입에 올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너 좋고, 능력 있고, 다정다감했다는 호평뿐입니다. 그 무렵, 니토의 아내와 딸이 살해된 곳과 가까운 호수에서 예전 니토의 동료가 백골 사체로 발견되자 다시 한 번 세상은 흥분합니다. 별 다른 성과도 못 내고 의기소침해졌던 는 다시금 힘을 얻어 니토의 과거를 더 깊이 파고들어갑니다. 니토의 학창시절을 차례로 거슬러 올라가던 의 추적은 결국 니토의 유년 시절에서 충격적인 사실과 맞닥뜨립니다.

 

누쿠이 도쿠로는 범죄를 저지른 자와 희생된 자 모두의 심리를 아우르며 독자를 결코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 작가였다. ‘미소 짓는 사람은 아마 그중에서도 최대의 절망감을 안겨 줄지도 모른다.” (‘해설)

 

후반부에 실린 옮긴이의 말이나 해설을 꼼꼼히 읽는 편이 아니지만, ‘미소 짓는 사람은 제 이해력 부족 탓인지 작품이 난해해서인지 해설만 세 번을 거듭 정독해야 했습니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느낀 얼떨떨함이 최대의 절망감정도까진 아니었지만, 어쨌든 일반적인 미스터리와는 전혀 다른 엔딩을 내놓고 있는데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심리학이나 철학의 범주에 더 가까운 인상을 남긴 작품이긴 합니다.

 

줄거리만 보면 전형적인 미스터리로 보이지만, ‘니토의 유년 시절의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난 이후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궤적을 그립니다. 내용 대부분이 에 의해 진행된 탐문 기록들로 채워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누쿠이 도쿠로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탐문의 결과가 아니라 탐문 그 자체라서 그런 인상을 받게 됩니다. 또한 주인공 는 막판 반전을 겪은 후에야 탐문을 통해 많은 사실을 알게 됐지만, 역으로 많은 사실들이 가려지기도 한다.”는 것을 깨닫는데, 바로 이 한 줄이 누쿠이 도쿠로의 작의란 점은 이 작품의 성격을 잘 대변하는 사실입니다. 어쨌든, 약간은 허무하기도 하고, 약간은 ... 그런 거였군.”이라며 스스로 위로하게 되는, 다른 말로 하면, 난해하지만 다들 명작이라고 칭하는 이야기를 읽은 느낌입니다. 좀 뜨악하긴 해도, 스포일러 없이 소개하려다 보니 이렇게 밖에 정리가 안 됩니다.

 

누쿠이 도쿠로의 작품 중에서도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갈릴 것이 분명해 보이지만, 개인적으론 기존 작품들에 관한 호감 때문인지 조금은 자의적인 호평을 내리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해설까지 정독한 후의 느낌은, 그동안 미스터리를 읽으며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던 점들 - 주인공의 입을 빌어 작가들이 설명했던범죄 혹은 범인에 관한 틀에 박힌 정의들(억지스런 동기, 작위적인 잔혹함, 뻔한 트라우마 등) - 이 실은 얼마나 쉽고 안이하게 설정됐는지, 또 독자로서 그런 것들에 대해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던 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었는지를 새삼 떠올리게 됐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미소 짓는 사람은 누쿠이 도쿠로가 자신을 비롯한 미스터리 작가들에게, 또는 그들의 작품에 등장한 훌륭한 명탐정이나 슈퍼히어로 형사들에게 던지는 질문또는 반문일 수도 있습니다.

 

내용 자체가 쉽지 않다 보니 길지 않은 서평을 쓰는데도 꽤 많은 시간을 흘려보냈습니다. 그나마도 작품의 윤곽조차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애매모호한 서평이 됐지만 도리가 없는 일입니다. 누쿠이 도쿠로의 팬이라면 저처럼 어느 정도 열린 마음으로 그의 진의를 이해하려 애쓰거나 이 작품의 미덕을 찾아보려 노력하겠지만, 평소 그의 어둡고 무거운 문체와 엔딩에 비호감이었던 독자라면 해설 속 표현처럼 최대의 절망감만 느끼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미스터리 독자라면 혹시 안티 누쿠이진영에 있더라도 한번쯤은 읽어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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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블론드 데드
안드레아스 프란츠 지음, 서지희 옮김 / 예문 / 2013년 6월
평점 :
품절


안드레아스 프란츠의 율리아 뒤랑 시리즈는 한국에서 미완성 유작(‘신데렐라 카니발’)이 먼저 출간되고 뒤이어 데뷔작이 출간된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시리즈 첫 작품인 영 블론드 데드1996년에 출간됐는데, 정밀한 과학수사가 제대로 기능하기 직전의 시기이다 보니 아날로그적인 수사의 흔적을 곳곳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제목대로 금발머리의 10대 소녀들이 연쇄살인의 피해자로 설정되어 있고, 그 범행수법은 거의 파괴와 해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잔혹합니다. 사체는 길거리에서 발견되기도 하고, 집안에서 발견되기도 합니다. 부자부터 빈민에 이르기까지 계층도 다양합니다. 이 끔찍한 연쇄살인을 수사하는 주인공은 율리아 뒤랑과 수사반장 베르거 등 프랑크푸르트 경찰청 형사들입니다. 수사는 탐문 이상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 채 미궁에 빠지지만, 사체는 연이어 이곳저곳에서 발견되고 수사팀은 거의 패닉에 빠집니다. 율리아 뒤랑은 나름 유력한 용의자를 특정하지만, 증거는 찾을 수 없고 단지 우연히 얻은 정보와 심증만 가득합니다.

 

오랜만에 매력적인 여형사 캐릭터를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헤비 스모커에 맥주를 즐겨 마시는 터프한 이미지와 함께 거침없는 언변과 정의감 등 주인공의 덕목을 고르게 부여받았으며, 넬레 노이하우스의 피아 키르히호프만큼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 여형사입니다. 이 작품의 대부분의 미덕은 율리아 뒤랑에 의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새로운 독일 미스터리 시리즈를 만나서 반가웠고, 출퇴근길에 주로 읽었음에도 금세 마지막 장에 이를 만큼 페이지도 잘 넘어갔습니다. 아직까지 안드레아스 프란츠의 작품이 국내에는 두 편밖에 출간되지 않았지만, 나머지 시리즈들도 빠른 시간 안에 만나보고 싶은 기대감을 갖게 한 작품이었습니다.

 

다만, 데뷔작의 한계라고 할까요? 읽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그런 느낌을 받곤 했는데, 줄거리를 정리하다 보니 이야기 자체가 빈약했고 꽤 많은 인물들과 서브 사건들이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들의 역할은 거의 미미했다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말하자면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약점입니다.

수사팀 가운데 베르거 반장은 오프닝을 장식했지만, 정작 수사에서는 별 볼일이 없습니다. 심각한 가정문제를 지닌 슐츠 형사 역시 따로국밥처럼 겉돕니다. 율리아 뒤랑이 혐오하는 페터 쿨머는 등장 초반 내내 깐족거리는 얄미운 캐릭터였다가 어느 순간 아무런 동기도 없이 진지한 자세로 수사에 임하며 율리아 뒤랑을 돕습니다. 그야말로 수사팀 모두 병풍에 불과한 역할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피해자 가족이나 수사선상에 오른 인물들 역시 하나같이 성적(性的)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고, 형태만 다를 뿐 위태위태한 가족 불화를 겪고 있으며, 심리 상담을 받아야할 만큼 정신적 장애를 안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인격을 가진 인물을 찾아보기 힘든, 다분히 작위적인 설정들입니다. 물론 어느 누구도 불필요한 캐릭터는 아니지만, 대부분이 존재감이 부족하거나 도식적이거나 작위적인 느낌을 줬고, 그 때문인지 마지막 장을 덮은 후 율리아 뒤랑 외에 딱히 기억나는 인물이 없었습니다.

수사 과정의 경우 사건 발생 - 탐문 - 미궁 - 우연한 정보 - 범인 특정이라는 공식이 단선적으로 적용돼서 이야기는 대부분 예상한 대로 흘러갑니다. 특히 주인공의 철저한 추리와 계산, 고된 노력의 대가보다는 예상치 못한 제보나 우연히 취득한 정보에 의해 수사가 진전되는 점은 이 작품이 데뷔작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내내 아쉬움이 남았던 대목입니다.

 

이후의 활약을 기대하게 만든 율리아 뒤랑의 매력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유들 때문에 높은 평점을 주기 어려웠습니다. 말미에 보니 출판사에서 율리아 뒤랑 시리즈의 이후 출간 계획을 밝혀놓았습니다. 독일 미스터리만의 독특한 색깔을 좋아해서 새로운 시리즈의 출간 계획은 무척 반갑지만, 이후 작품에서는 ‘550만부의 전설적 판매량의 진가를 맛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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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사랑 세계문학의 숲 32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사 / 2013년 5월
평점 :
일시품절


(약간 상세한 줄거리가 포함돼있으니 아직 읽지 않으신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결혼 제도에 반감을 갖고 있던 28살의 가와이 조지는 클럽의 여급으로 일하던 15살 나오미에게 관심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훌륭한 여자로 키우고 싶다.”는 생각에 클럽에서 빼낸 후 동거를 시작합니다. 가와이는 나오미에게 음악과 영어를 배우게 하고,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등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을 제공하며 훌륭한 여자의 자질을 갖추게 만듭니다. 하지만 어느 새 주종 관계는 역전되고 맙니다. 저축이 바닥나고 월급이 빠듯해져도 가와이는 극에 달한 나오미의 사치를 다 받아줬고, 또래 남자친구들을 거침없이 집으로 불러들이는 상황도 애써 참아냅니다. 시간이 갈수록 가와이는 점점 나오미의 노예로 추락했고, 결국엔 몸과 마음을 모두 지배당하는 마조히즘에 가까운 늪에 빠집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이력을 보니 네 번이나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고, 일본인 최초로 미국 예술원 명예회원으로 선출됐을 정도로 걸출한 인물이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좀 오래된 작가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1886년에 태어났으며 이 작품이 1920년대 중반에 쓰였다는 건 첫 페이지를 펼친 뒤에야 알게 됐습니다. ‘일본 탐미주의 문학의 상징이라는 홍보 문구 덕분에 책을 집어 들긴 했지만, 거의 90년이 지난 시점에 세계문학의 숲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새롭게 출간된 이유가 무척 궁금했습니다.

 

한 소녀를 친구로 삼아 그녀가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산다는 것은 정식으로 가정을 꾸리는 것과는 다른 각별한 재미가 있을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가와이 조지의 1인칭 서술로 이뤄진 8년의 기록은 파괴적이고 자유분방한 삶을 누린 팜므 파탈 나오미의 성장기이자, 욕망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잃어가는 가와이의 몰락기입니다. 원제인 痴人에서 痴人은 바보 또는 미치광이라고 해석되는데, 가와이는 두 가지 해석이 동시에 가능한 인물입니다. 그는 서양식 욕조에서 나오미의 몸을 닦아주며 차츰 성장해가는 그녀의 육체에 빠져듭니다. 특히 그녀의 발은 가와이에게는 페티시즘의 대상인데, 그를 바보 또는 미치광이로 만드는 중요한 상징입니다. 노골적인 성적 묘사는 거의 한 줄도 등장하지 않지만, 나오미의 몸 곳곳을 바라보는 가와이의 눈빛은 탐미주의 거장의 작품답게 집요하지만 천천히, 농밀하지만 은근하게 묘사됩니다.

나오미와의 동거가 시작된 뒤 가와이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녀의 언행에 무조건적으로 헌신합니다. 천진난만했던 10대 소녀가 시간이 흐를수록 상스러운 말과 천박한 행세에 찌든 길거리 여자로 변신할 때도, 그리하여 안하무인 여주인처럼 가와이 자신을 깔아뭉개기 시작했을 때도, 또 수많은 남자에게 거리낌없이 몸을 내맡길 때도 가와이는 채 1시간도 지속되지 못할 순간적인 분노만을 느낄 뿐 결국엔 그녀에게 굴복하고 맙니다. 말 그대로 바보이자 미치광이일 수밖에 없는 인물입니다.

 

이 작품의 배경인 1920년대의 도쿄는 서양문물의 빛과 그림자가 어지럽게 뒤엉킨 혼돈의 도시였습니다. 가와이가 나오미에게 가르쳤던 음악과 영어, 나오미가 빠져들었던 화려한 댄스홀, 퇴폐적인 프리섹스와 물질만능주의, 한 여자를 육체적으로 공유하는데 동의한 엘리트들의 문란함 등 욕망이 일그러진 형태로 자유롭게 분출되던 그곳에서 나오미를 훌륭한 여자로 키우겠다며 고군분투했던 가와이의 전근대적이고도 왜곡된 심리는 당시 문화적 충돌이 몰고 온 사회적 혼란을 잘 반영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다만, 작품 자체로만 보면 창녀에 가까운 나오미의 패륜을 수차례 목격하고도 차마 그녀를 버릴 수 없어 번번이 그녀 앞에 무릎을 꿇는 가와이는 요즘 기준으로 보면 민폐 캐릭터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또 나오미의 방탕함과 가와이의 초조함 외엔 별다른 이야기가 전개되지 못한 탓에 좀더 극단적이고 파괴적인 상황까지 이어지지 못한 것은 가장 아쉬운 대목이었습니다. 이 작품이 연재됐던 1920년대에는 가와이의 관능적 욕망과 마조히즘이 탐미주의라는 이름 아래 독자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겠지만, 요즘의 독자들에게 어필하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리메이크가 가능한 영상물이나 재해석이 가능한 음악과 달리 문학은 작가 스스로 손대지 않는 이상 그 오리지널리티가 그대로 이어지는 장르인 만큼 1920년대의 작품을 접할 생각이라면 어느 정도의 올드함은 감수해야 되겠지만,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미친 사랑은 그렇게 감수해야 할 올드함이 조금은 많아 보이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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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와 몬스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8
가이도 다케루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약간 상세한 줄거리가 포함된 서평입니다. 아직 읽지 않으신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인구 800만의 거대 도시 나니와를 배경으로 세 챕터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첫 챕터인 캐멀은 신종 인플루엔자에 대한 중앙정부의 과잉 대처와, 첫 환자가 발생한 탓에 인적, 물적 교류를 봉쇄당한 나니와 시민들의 절망적인 상황을 다룹니다. 질병의 위력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강경책을 주장하는 후생노동성과 매스컴의 호들갑은 거대한 음모론을 연상시킵니다.

두 번째 챕터인 가마이타치1년 전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도쿄지검 특수부 에이스 가마가타 마사시는 나니와 특수부로 자리를 옮긴 뒤 나니와 지사 무라사메 고키, 정체불명의 인물 히코네와 조우하곤 중앙정부의 부당한 정책을 정면공격합니다. 나니와의 공격에 당황한 중앙정부는 비밀회의체인 불상사 뒷수습 회의를 통해 나니와를 철저히 뭉개버리기로 결정합니다.

마지막 챕터인 드래건은 다시 현재로 돌아와 나니와가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중앙정부와 벌이는 전면전을 그립니다. 나니와의 정치적 이상의 근간은 이른바 의익(醫翼)주의입니다. 말하자면 국민의 행복을 위한 선결 과제는 완벽한 의료 시스템이며, 그러기 위해 의료는 사법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하고, 그를 통해 중앙정부로부터 진정한 독립을 이뤄낸다.”는 것입니다. 무라사메 지사는 독단적으로 나니와에 대한 봉쇄를 푸는 것은 물론, 신종 인플루엔자의 발발과 확산 뒤에 숨은 중앙정부의 정치적 의도를 폭로합니다.

 

가이도 다케루의 작품을 읽고 별 세 개짜리 서평을 쓰려니 여러 가지로 아쉽고 속상합니다.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에 푹 빠져 메디컬 엔터테인먼트의 진수를 맛봐온 독자 입장에서 나니와 몬스터는 무척 당혹스러운 작품이었습니다. 그동안 전작들을 통해 권력과 이익 중심으로 꾸려진 의료 체계의 문제점을 폭로하고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해온 것에 반해, 이번 작품에서 가이도 다케루는 다소 과격하고 혁명적인 주장을 펼칩니다. 그러다 보니 소설이라기보다는 성명서를 읽는 듯한 느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두 번째 챕터 중반부까지만 해도, 신종 인플루엔자를 악용한 중앙정부의 음모에 맞서 특수부 에이스 검사 가마가타가 나니와의 소시민들과 함께 저항하는, 말 그대로 메디컬 엔터테인먼트가 전개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암담한 상황에서도 소신껏 진료를 펼치는 기쿠마 의사 父子와 슈퍼 히어로 검사 가마가타의 연대는 다구치-시라토리 콤비를 능가할만한 매력을 품었고, 대학병원을 벗어나 일본 전역을 무대로 삼은 점이나 정계의 거물까지 대거 포진된 캐릭터들은 가이도 다케루의 전작들에 비해 훨씬 더 긴장감을 느낄 수 있는 설정들입니다.

하지만 나니와 지사 무라사메가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엉뚱한 곳으로 흘러갑니다. ‘의료입국이라는 허황된 정치적 이상론과 함께 일본 3분할론이라는 비현실적인 주제가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합니다. 대신 첫 챕터의 주인공 기쿠마 의사 父子는 두 번째 챕터부터 사라져버렸고, 두 번째 챕터의 주인공 가타가마 검사 역시 세 번째 챕터에서 꼬리를 내려버립니다. 나니와 지사 무라사메도 뜬금없는 캐릭터지만, 세 번째 챕터의 주인공이자 거물 정치인들을 만으로 좌지우지하는 정체불명의 히코네라는 인물은 황당함 그 자체였습니다.

 

메디컬로 시작해서 허황된 정치 드라마로 마무리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가이도 다케루의 무리수에 대해 의문점과 동시에 큰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를 통해 제기해온 의료 현장의 문제점은 한국의 현실과는 조금은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깊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니와 몬스터는 한발 더 나아가 의료만이 사법을 통제할 수 있고, 의료만이 제대로 된 입국(立國)의 기반이라는 납득하기 쉽지 않은 주장을 일관되게 제기합니다. 소설보다 성명서에 가깝다고 느낀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정제되지 않은 작가의 감정 폭발, , 후생노동성으로 대표되는 중앙 관료체제에 대한 증오심, 의료입국의 당위성 및 사법에 대한 불신 등 현직 의료인으로서 자신이 꿈꾸는 이상과 주장들을 치기어린 이야기를 통해 드러낸 것이 전부였습니다. ‘의익주의자이자 의료 신격화를 주장하던 정체불명의 히코네라는 인물은 그저 가이도 다케루의 분신에 다름 아니었을 뿐입니다. 그의 팬으로서 많이 실망스럽고, 그만큼 아쉬움이 큰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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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머즈 하이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박정임 옮김 / 북폴리오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올해(2013)는 말 그대로 요코야마 히데오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오래 전부터 읽고 싶은 목록에 그의 여러 작품들을 올려놓고도 정작 올해 들어서야 종신검시관얼굴()’로 첫 테이프를 끊었는데, ‘64’클라이머즈 하이로 이어지는 연이은 대작을 통해 그동안 과소평가했던 요코야마 히데오의 진면목을 발견하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습니다. 특히 2005년에 1~2권으로 발간된 적이 있는 클라이머즈 하이가 지금까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는 건 신기하게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64’의 영향 때문에 새삼 개정판이 나왔다고 하기엔 왠지 오비이락 같고, 최근 그의 작품들이 여러 출판사에서 출간되는 것을 보면 올해가 한국에서 요코야마 히데오를 제대로 조명하기 시작한 첫해라는 느낌이 듭니다.

 

군마 현의 지방지 긴타칸토의 기자 유키 가즈마사가 주인공입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진행되는데, 1985년 군마 현 산악지대에 추락한 일본항공 사고를 둘러싼 긴타칸토의 긴박한 1주일간의 취재 전쟁이 하나이고, 또 하나는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현재, 유키 가즈마사가 57세의 나이에 쓰이타테이와라는 험준한 암벽등반에 도전하는 이야기입니다.

520명의 사상자를 낸 세계 최대 항공사고는 긴타칸토라는 지방지를 거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고도의 긴장상태로 몰아갑니다. 총괄데스크를 맡은 유키는 부서 간 이기주의, 개인 간의 이해의 충돌, 사내의 정치적 대립구조 등 전쟁터에 다름 아닌 편집국 속에서 특종과 언론의 사명을 위한 총성 없는 전쟁을 진두지휘합니다. 사고 뉴스를 한 줄이라도 더 싣기 위해 광고를 전격 삭제하기도 하고, 최신 뉴스를 싣기 위해 윤전기를 멈추거나 배급트럭의 키를 훔치기도 하고, 유족들의 분노를 일으킬 독자 투고를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게재하기도 하고, 후배 기자의 특종을 위해 상사들과 멱살잡이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로부터 17년이 흐른 현재, 유키는 자신의 인생에 큰 궤적을 남긴 친구의 아들과 함께 수백 명의 산악인의 목숨을 앗아간 쓰이타테이와 암벽등반에 나섭니다. 그것은 단순히 등반이란 행위가 아니라 유키 가즈마사 일생의 화두 - 내려가기 위해 올라간다 - 를 실천하기 위한 일종의 고행입니다. 더불어, 30년이 넘는 기자로서의 삶을 정리하는 참회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에 잘 어울리는 한마디 평“‘64’의 신문사 버전!”입니다. ‘범인 찾기미스터리는 아니지만 그 이상의 긴장감과 속도감이 있습니다. 비록 작은 규모의 지방신문이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부서 간의 격렬한 대결과 특종을 위한 기자들의 필사적인 노력은 희대의 연쇄살인마와 그를 쫓는 주인공의 이야기보다 더 강력한 페이지터너입니다. 주인공 유키를 비롯하여 너무나도 생생하고 개성 강한 캐릭터들은 피아를 떠나 자신만의 카리스마를 온전히 발휘하여 작품 자체를 뜨거운 용광로로 만듭니다. 그리고 요코야마 히데오의 가장 큰 매력인 휴머니즘은 마지막 방점처럼 빛납니다.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눈물까지 쏙 빼놓는 진하고 묵직한 감동이 유키를 통해 수시로 전해집니다.

 

유키의 이야기는 불가능한 미션을 성공시킨 영웅담도 아니고, 눈물을 짜내기 위한 억지 휴먼스토리도 아닙니다. 오히려 작지만 소중한 가치들에 대한 애정, 잔머리보다는 열정을 앞세우는 순수함, 무모하게 보일 수도 있는 올곧음 등이 유키가 끌고 가는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더불어, 방대한 서사 중에 유키의 개인사 역시 눈길을 끄는데, 불행한 가족사와 가족관계, 산에 대한 사랑과 조직에서의 미션 사이에서 고민하던 안자이 교이치로와의 우정과 회한, 수년 전 자신 때문에 죽음으로 내몰린 후배 기자에 대한 죄책감 등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여러 요소들 덕분에 단순히 반항적인 슈퍼히어로 유키가 아니라 고민하는 인간 유키에 대한 작가의 성찰이 작품 전체에서 살아 숨 쉬는 듯 전해집니다.

 

실은 읽으면서 서평에 인용하기 위해 몇 개의 문장을 적어놓았는데, 막상 서평을 쓰다 보니 굳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문장이더라도 마지막 장까지 직접 읽고 난 후에야 그 맛과 깊이를 제대로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취향의 차이 때문에 웬만해선 남들에게 책을 강추하는 경우가 잘 없는데, ‘클라이머즈 하이는 올 여름 must-read 목록에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유키 가즈마사의 전쟁 같은 1주일을 통해 ‘64’ 이상의 감동과 여운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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