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예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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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독자 쿠보의 투고 때문에 오카야 맨션의 괴담을 조사하기 시작한 는 맨션과 인근 주택단지에 살고 있거나 예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비슷한 현상을 목격했거나 경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목을 맨 기모노 차림의 여자 형체, 그 여자의 허리띠가 사악사악 다다미를 쓰는 소리, 벽을 기어 나오는 아기의 형상, 찰싹찰싹 뺨을 만지는 차가운 촉감 등이 그것입니다.

와 쿠보의 탐문은 오카야 맨션과 주택단지의 과거 속으로 향하고, 그곳에 오래 살았던 인물이나 절 관계자 등을 통해 거의 1백 년 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끔찍한 괴담의 실체와 근원을 조금씩 파악합니다. 오카야 맨션이 자리 잡은 터에서 오래 전부터 참혹한 사고, 방화와 살인, 자살 혹은 강제 동반자살 등 비극적인 사건들이 반복적으로 벌어졌다는 점을 알게 된 는 그 시작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던 중 웬만한 괴담수집가도 다루기를 꺼려한다는 오쿠야마 괴담에 도달합니다.

 

오노 후유미 스스로 라는 작가로 등장하여 괴담의 근원을 쫓는 이야기로, 소설이라기보다는 르포에 가까운, 그래서 독특한 공포감을 주는 작품입니다. A 집안의 흉사를 조사하다 보니 B 집안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드러나고, B 집안을 조사하다 보니 그 선대에서 C 집안과 연루된 사건이 있었고...

결국 오카야 맨션과 주택단지에 현재 거주 중인 인물들에서부터 시작된 의 취재는 금세기 - 지난 세기 - 고도성장기 - 전쟁 후 - 전쟁 전 - 메이지&다이쇼 시대까지 이릅니다. 자연히 수많은 인물과 가계(家系)가 등장하고, 또 그만큼의 괴담들이 쉴 새 없이 등장합니다. (등장인물과 가문 이름 때문에 읽는 내내 꽤 스트레스를 받긴 했지만, 이야기 구조 상 불가피한 설정이라 여기저기 메모를 남겨가며 읽어야만 했습니다.)

 

이 작품의 포인트는 잔예라는 제목에 있습니다. 그 의미를 찾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첫 페이지부터 읽어나갔는데, 엔딩에 이르러서야 그 뜻을 미리 알고 읽었다면 훨씬 더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알아두면 유용한 팁이라서 본문에서 잔예의 뜻을 소개한 문장들을 발췌, 편집해봤습니다.

 

일본에는 예로부터 촉예(触穢)라는 사고방식이 있다. 더러움에 접촉하면 전염된다는 사고방식이다. 특히 죽음에 의한 더러움은 사예(死穢)라고 해서 중시했다. 죽음은 모종의 더러움을 낳는지도 모른다. 더러움에 닿은 우리도 주술적으로 방어한다. 죽은 이를 공양하고 땅을 정화한다. 하지만 너무 강한 탓에 그러고 나서도 남는 무엇이 있다면? 그곳에는 더러움의 잔여물인 잔예(殘穢)가 남았다.”

 

즉 메이지와 다이쇼의 교체기에 일어난 끔찍한 죽음이 탄생시킨 더러움(사예)이 시간의 흐름과 주술적인 정화의식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잔여물(잔예)로 살아남아 끊임없는 전염(촉예)을 만들어낸다는 뜻입니다. 오염된 땅과 집이 그곳을 찾는 사람을 오염시키기도 하고, 오염된 자가 누군가를 방문하거나 누군가가 오염된 자를 방문할 때 전염되기도 합니다. 또한 그림이나 칼, 가구나 건축 자재 등이 매개체가 돼서 전염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전설 중 하나인 사또와 처녀귀신(부임하는 사또마다 첫날밤에 처녀귀신을 보고 죽어나간다는 이야기)처럼 붙박이 더러움이 아니라, 강력한 전염력을 지닌 탓에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무차별로 퍼져나가는 잔예라는 개념을 미리 염두에 두고 이 작품을 읽는다면 조금은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르포에 가까운 의 탐문기를 재미있게 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이제까지 읽은 소설 중 가장 무섭다라거나 손닿는 곳에 책을 놓기조차 두렵다는 야마모토 슈고로 상 심사위원의 심사평은 조금 과장된 면이 있습니다. 물론 늦은 밤, 혼자 책상에 앉아 읽다보면 자꾸 등 뒤가 서늘해지거나 무슨 소리가 들리거나 문득문득 천장을 올려보거나 멀쩡한 벽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경험을 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막판에 진실이 밝혀지는 미스터리보다는 이런 종류의 무서움이 있다는 식의 평면적인 르포에 가깝기 때문에 소설적 재미는 떨어집니다. ‘흑사의 섬을 통해 호감을 갖게 된 오노 후유미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별 세 개에 그치게 만든, 그리고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완독하는데 사흘씩이나 걸리게 만든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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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릭스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정경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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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freak

1. ~에 광적으로 관심이 많은 사람

2. 괴짜, 괴물 같은 사람

3. 기형아, 기형인 것

4. 기이한 일

 

K** 종합병원 정신과 병동에서 일어난 세 가지 기이한 이야기를 다룬 호러 미스터리입니다. ‘프릭스라는 제목대로 정신과 병동에 입원한 기형적인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태어난 직후부터 외부와 완전히 통제된 채 완전한 어른이 되기 위한 약을 먹어온 다다시, 교통사고로 전신에 화상을 입은 채 자신의 정체성과 죽은 남편의 과거를 추적하는 소노코, 그리고 추악한 외모의 의학자에 의해 곱사등이, 외눈박이, 비늘얼굴, 세 개의 팔, 누에인간 등 끔찍한 기형으로 개조된 다섯 명의 프릭스와 그들에 관한 악몽을 꾸는 작가가 등장합니다.

 

수록작 세 편 모두 진실 찾기를 뼈대로 삼은 미스터지만, 워낙 극단적인 이야기들이라 줄거리를 정리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거나 불가능합니다. 그저 상상의 범위를 한참 벗어난, 무척이나 곤혹스러운 캐릭터와 상황들로 꽉 차있고, 엔딩에 이르러서는 놀랄만한 반전이 숨어있다는 정도가 소개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수록작 모두 1989~1996년에 초고가 쓰인 이력을 갖고 있는데, ‘어나더어나더 에피소드S’에서 맛봤던 아야츠지 유키토의 호러 미스터리의 매력이 실은 꽤 오래 전부터 쌓여온 내공 덕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야츠지 유키토는 작가의 말을 통해 이 작품이 에도가와 란포의 외딴섬 악마와 토드 브라우닝 감독의 영화 프릭스라는 두 걸작에 대한 오마주라고 밝혔습니다. ‘외딴섬 악마는 미스터리 마니아라면 읽어봤거나 제목이라도 들어본 작품이지만, 영화 프릭스는 영 낯설어서 검색을 해보니 1932년 작품이었습니다. (참고로 2002년에 개봉된 괴물거미가 나오는 프릭스는 전혀 무관한 작품입니다.) 사지가 없는 자, 샴쌍둥이 자매, 팔로 걷는 사람, 난쟁이 등이 모인 서커스단이 등장하는데, 수록작 중 마지막 편인 프릭스-564호실 환자의 등장인물 설정과 거의 비슷합니다.

 

문득 쓰하라 야스미의 일레븐중 첫 번째 수록작인 오색 배가 생각났습니다. 거기에도 배에 머물며 흥행을 벌여 연명하는 기형의 존재들이 다수 등장하는데, 소의 몸에 인간의 얼굴을 한 구단을 비롯, 팔 없는 청각장애인 가즈오, 무릎 관절이 거꾸로 달린 기요코, 분리된 샴쌍둥이 사쿠라, 다리가 없는 유키노스케 등입니다. 괴담이나 전설, 신에 대한 서사가 풍부한 일본 미스터리의 특징에 기형역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한국 독자들에겐 낯설기만 하지만 프릭스일레븐을 보면 호러에 대한 그들의 상상력은 그저 신기해 보일 뿐입니다.


요즘 같이 덥고 습한 날이라면 프릭스를 읽기에 딱 알맞은 시기입니다. 이왕이면 어나더시리즈와 시리즈까지 아야츠지 유키토의 미스터리를 연이어 읽는다면 책과 함께 하는 피서로는 제격일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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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블루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해용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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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약간 상세한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장래가 촉망되는 고교 야구선수 가쓰히코가 변사체로 발견되고, 그와 함께 선수생활을 하다가 폐인이 되다시피 한 야마세 역시 의문의 익사체로 발견됩니다. 가쓰히코의 동생 신야 문제로 우연히 사건에 휘말린 탐정 하스미와 딸 가요코는 영리한 전직 경찰견 마사와 함께 살인사건의 진상 파악에 나섭니다.

한편, 아내의 죽음 이후 대형 제약사 총무과장 보좌라는 한직으로 밀려난 기하라는 고다 전무의 협박범 소다와의 연락책이라는 불쾌한 미션을 맡습니다. 뒤늦게 고다 전무가 협박당하는 이유를 알게 된 기하라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만 인질로 잡힌 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다 전무의 부당한 요구를 받아들입니다.

가쓰히코의 죽음에 소다라는 인물이 연루된 사실을 알게 된 가요코는 그의 행방을 찾던 중 누군가에게 납치된 뒤에야 사건의 전말을 깨닫습니다. 5년 전, 고다 전무가 벌였던 끔찍한 만행이 당시 12살 소년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그 만행의 유산이 오늘에까지 이어져 일련의 참혹한 사건들을 일으켰다는 것을...

 

미미 여사의 첫 장편이라는 이유만으로 색다른 기대감을 가졌던 작품입니다. 1989년에 발표됐다고 하니 25년 전입니다. 좋아하는 작가의 첫 장편을 너무 늦게 읽게 된 건 유감이지만, 어쨌든 파릇파릇했던(?) 미미 여사의 과거와의 만남은 괜찮은 느낌이었습니다.

 

미미 여사답게 첫 장편부터 사회적 문제를 정공법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탐욕스러운 대형제약사의 만행, 그것을 미끼로 협박과 사기를 일삼는 쓰레기 같은 어른, 그리고 형을 잃고 남은 가족들마저 해체되는 참담함을 겪어야 하는 어린 신야의 운명 등 분노를 자아내는 사회적 이슈를 한데 버무려놓았습니다.

이야기는 심플해 보이지만 캐릭터와 사건은 꽤 복잡하게 이뤄져있고, 무관해보이던 두 사건 - 가쓰히코의 죽음과 대형제약사 협박범 - 이 접점을 이루는 지점은 정교한 장치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설정되어 있습니다. 부녀 탐정 하스미 일가와 탐정견 마사가 신야와 함께 하나씩 단서를 찾아가는 과정이나 단서 속에 숨은 의미들을 조합하고 결론을 이끌어내는 과정도 흥미진진합니다. 특히 마지막 반전은 - 어디선가 비슷한 장면을 본 것 같기도 하지만 - 허망함과 안타까움을 함께 전해주면서 수사에 참여한 모든 인물들과 독자에게 더 큰 분노를 불러일으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첫 장편인데다 25년 전의 작품이다 보니 미미 여사의 저력이 발휘된 모방범이나 낙원을 읽은 독자라면 이런저런 아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한 사건 속에 담으려다가 혼란을 야기한 부분도 있고, 모든 사건의 출발점이 된 퍼펙트 블루의 정체는 적잖은 설명에도 불구하고 선명하지 않으며, 사건을 일으키거나 끌고 가는 인물들에게 부여된 동기도 조금은 모호한 점들이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친절하게사건의 전말을 설명한 부분은 오히려 사족이 됐습니다.

 

사실, 제 경우 이 작품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평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미미 여사의 작품이라는 이유만으로 무턱대고 좋은 점수를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25년 전의 첫 장편이라는 정보 때문에 어딘가 좀 어설픈 데가 있겠지라며 마치 대리인이나 변호인이라도 된 듯 편파적인 호평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애써 중립적인 태도로 결론을 내리자면... 미미 여사 본인의 역작들과 비교하면 역시 설익은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이 작품 정도의 완성도도 갖추지 못한 채 이름값만으로 버티고 있는 작가들에 비하면 퍼펙트 블루는 별 4개는 충분히 자격이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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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버 소울
이노우에 유메히토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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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바이퍼 피쉬라는, 저절로 얼굴을 돌리게 만드는 끔찍한 외모를 가진 심해어가 있습니다. 누군가 그의 외모를 보고 그런 별명을 붙였습니다. 그의 얼굴의 일부라도 본 사람들은 얼어붙거나 공포에 질리거나 도망갈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양쪽 다리 길이가 5cm나 다른 탓에 늘 균형을 잡기 위해 팔을 허우적댑니다. 그로 인해 어릴 때부터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온 남자의 이름은 스즈키 마코토. 그에게 삶은 지옥이고, 타인과의 소통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습니다.

그런 스즈키가 난생 처음 사랑에 빠집니다. 물론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이고, 그 상대는 21살의 모델 미시마 에리입니다. 어느 날 우연히 자신의 차 조수석에 그녀를 태운 뒤로 그는 다른 세상을 살게 됩니다. 에리가 준 충격은 중1 때 새 세상을 안겨준 비틀즈의 음악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녀는 살아갈 힘을 주었고, 자연히 그녀를 지키는 것이 스즈키의 삶의 목적이 됩니다. 그녀를 관찰하고, 카메라에 담은 뒤, 그녀의 사진으로 온 벽을 도배합니다.

그런데, 그녀 곁을 맴도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녀의 상처를 보듬는 척 하며 그녀를 괴롭힙니다. 스즈키에게 있어 그런 자들은 마땅히 처리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스즈키는 기쁘게 그런 자들을 처리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녀 앞에 자신을 내보이기로 결심합니다.

 

어나더 에피소드S’에 버금가는, 주인공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강렬한 표지디자인 덕분에 호기심은 물론 읽고 싶은 욕심이 저절로 들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간혹 표지와 제목에 속아 뒤통수를 맞는 경우도 있었지만, ‘러버 소울은 표지디자인 이상의 만족감을 준 작품입니다.

 

스토커 스토리입니다. 그것도 끔찍하리만큼 집요하고 잔인한 스토커가 주인공입니다. 집착처럼 비틀즈의 모든 것을 끌어 모으던 스즈키는 그 열정을 무한히 증폭시켜 미시마 에리에게 바칩니다. 그녀를 관찰하고 녹음하는 것은 물론, 그녀를 괴롭히거나 추근대는 자를 살해합니다. 그리고 비틀즈의 앨범 Rubber Soul에 실린 노래들을 소제목 삼아 소설과 수기를 남깁니다. 스타가 되기를 꿈꾸는 여자와의 드라이브를 노래한 Drive my car, 재워준 여자의 방에 불을 지르는 내용의 Norwegian wood,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는 여자를 노래한 You won’t see me, 그리고, “네가 다른 남자와 있는 걸 보느니 네가 죽는 꼴을 보고 말겠다. 평생 달아나 봐. 그럴 수 있다면..”이라 노래한 Run for your life 등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흔하고 상투적인 기성 작품과는 전혀 다른 스토커 스토리입니다. 그것은 독특한 형식미 또는 뒤통수를 치는 교묘한 트릭에 기인합니다. 스즈키의 1인칭 서술과 관련자들의 심문 답변으로만 이뤄진 구성은 그저 형식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반전과도 큰 관련이 있습니다. 나름 적잖은 미스터리를 통해 수많은 트릭과 반전을 겪었음에도 마지막에 이르러 또 속았다!’라는 어이없는 자조와 마주치게 됩니다. “보세요. 웃고 계시네요.”라는 마지막 문장은 작가의 KO 펀치입니다. 물론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에둘러 이야기해도 스포일러가 될 수밖에 없으니 이 정도만 언급하겠습니다.

 

엔딩을 읽다가 문득 표지를 다시 한 번 들여다봤습니다. 그의 눈빛, 수많은 빛깔로 불타는 머리칼, 전력을 다해 진심을 드러내는 몸짓... 그제야 왜 이 표지디자인이 그토록 강렬한 느낌을 줬는지, 새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왜 스즈키 마코토가 이 작품의 주인공인지도 100%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아쉬운 점 하나만 얘기하자면, 여러 화자가 심문에 답변하는 형식이다 보니 같은 상황에 대해 동어반복적으로 서술된 경우가 많았는데, 그러다 보니 600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이 조금은 부담스러웠습니다. 쉽고 편안한 문장들이라 하루 안에 충분히 달릴 수 있는 작품이지만, 중복된 서술을 정리했더라면 좀더 밀도 있는 러버 소울이 될 수 있었을 듯 합니다. 아쉽지만, 그래서 만점에서 별 반 개를 뺄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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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성당 이야기
밀로시 우르반 지음, 정보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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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상세한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프라하의 중세 역사와 문화에 빠져있는 크베토슬라프 슈바흐는 경찰에서 해고된 지 얼마 안 돼 복직의 기회를 잡습니다. 프라하의 건축물을 14세기 고딕 양식으로 복원하겠다고 나선 재력가 마티아슈 그뮌드가 경찰서장에게 슈바흐를 안내 겸 경호역할로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뮌드가 슈바흐를 요구한 이유는 그의 특별한 능력 - 옛 건물이나 바위에 손을 대면 과거의 사건들을 볼 수 있는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사실을 모른 채 그뮌드의 카리스마에 푹 빠진 슈바흐는 그의 은밀하고 엄청난 계획에 일조하게 되고, 그뮌드의 고용인 프룬슬릭, 특수반의 여경 로제타와 함께 프라하 신시가지의 성당들을 면밀히 살피기 시작합니다.

한편, 그 무렵 프라하에선 기이한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하는데, 희생자들은 하나같이 살인예고 메시지를 받은 후에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살인사건 수사까지 맡게 된 슈바흐는 희생자들이 모두 건축 종사자들이라는 점과 그뮌드 일행이 일련의 사건에 연루됐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만, 서장은 그의 추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동유럽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90년대만 하더라도 냉전과 민주화라는 이념적 이미지가 대세였지만, 요즘의 동유럽은 중세의 유산이 고스란히 간직된 클래식한 풍경을 먼저 떠올리게 합니다. 프라하는 그런 동유럽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대표적인 도시입니다. 하지만 대도시의 숙명을 완전히 피해갈 수는 없었던 것 역시 사실입니다. ‘일곱 성당 이야기는 모더니즘과 현대화의 물결에 휩싸인 현재의 프라하를 붕괴시키고 고딕 양식으로 빛나던 14세기의 프라하로 복원시키려는 비밀결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보기 드문 체코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 외에도 과거를 볼 수 있는 기이한 능력자, 중세로의 복원을 꿈꾸는 수수께끼 같은 세력 등 소재나 캐릭터 모두 독특함을 넘어 판타지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역사소설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체코의 역사와 건축, 종교 이야기가 그려져 있고, 거기에 스릴러라는 형식까지 더해져 방대한 서사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역사-판타지-스릴러라고 할까요?

 

연쇄살인의 진상은 (작가의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쉽게 짐작이 되지만, 특별하고 의미 있는 살인수법과 동기 때문에 진범 찾기 이상의 긴장감을 느끼게 해줍니다. 건축 종사자들의 연이은 죽음, 연쇄살인과 무관해보이던 10대 소년들의 죽음, 특수반 여경 로제타의 비극적인 과거 등을 통해 드러나는 살인수법과 동기는 잔혹함을 넘어 마치 중세와 현대의 정면충돌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보면 비틀려 버린 과거와 더 좋고 아름다울 수도 있었을 현재에 대한 안타까움이라는 카피가 있는데, 말하자면 그 안타까움의 극단적인 발현이 연쇄살인이었던 것입니다.

 

번역자가 옮긴이의 말을 통해 한국독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정서나 역사적, 사회적 사건들에 대한 암시가 곳곳에 깔려있다라고 언급했듯이 과할 정도로 친절하고 상세하게 묘사된 14세기 이래 체코의 역사에 관한 언급은 한 권으로 읽는시리즈처럼 쉽고 편안한 체코 중세사의 미덕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는 물론 스릴러로서의 긴장감을 상쇄시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인지 움베르토 에코의 작품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에게는 일곱 성당 이야기가 반갑고 흥미진진하게 읽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독자에게는 좀 당혹스러운 책읽기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불어, 예상치 못한 전개나 설명 때문에 순간순간 뭐지?’라고 자문하곤 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작가 역시 본문에서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독자 여러분은 이 모든 것이 무슨 뜻인지 묻고 싶을 것이다. (중략) 여러분은 내가 어떤 부분을 일부러 설명하지 않고 넘어갔다고 의심할 것이다. (중략) 진실을 찾는다면 이 단어의 미로 사이에서 내 뒤에 바짝 붙어있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 문장을 읽고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군.”이라며 조금 위로를 받긴 했지만, 어쨌든 쉽고 빠르게 읽히는 작품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중세와 현대를 오가며 판타지와 스릴러를 함께 버무린 독특한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어떤 반응을 이끌어냈을지 개인적으로 많이 궁금합니다. 무척 다양한 서평들이 올라올 것 같은데, 제 느낌과 얼마나 같은지, 또 얼마나 다른지 꼭 한번 확인해보고 싶어지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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