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일
히라야마 유메아키 지음, 윤덕주 옮김 / 스튜디오본프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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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이라는 특이한 제목의 단편집을 통해 처음 만났던 히라야마 유메아키의 호러는 여느 작가와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와 잔인하고 섬뜩한 묘사로 가득 찬 수록작들을 읽으면서 인간 상상력의 한계에 도전하는 듯한 작가의 뇌 구조가 궁금해질 정도였습니다.

 

표지 자체부터 으스스한 느낌을 주는 남의 일유니버설~’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수록작마다 피와 살점이 튀고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는,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를 다룹니다. 특히 유니버설~’이 비현실적이거나 SF적인 설정을 종종 활용한 반면, ‘남의 일15편의 수록작 가운데 위안 로봇의 반란을 다룬 크레이지 하니를 제외하곤 하나 같이 일상 속에서, 내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엽기적인 상황들을 다루고 있어서 읽는 내내 놀라움과 역겨움, 불편함과 호기심이 번갈아 진동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쇠톱으로 자신의 다리를 자르고 칼과 전동톱으로 가족을 살해하는가 하면, 상처가 썩어 팔다리가 뽑힌 채 죽거나 하찮은 이유로 죽을 때까지 몰매를 맞기도 합니다. 그밖에도 인육, 납치, 토막살인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잔혹함을 목격할 수 있는데, 독자들을 더욱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이런 끔찍한 소재들이 너무도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스토리 속에 녹아있다는 점입니다. 증오심과 공포만 남은 가족들의 이야기(‘남의 일’, ‘자식해체’, ‘딱 한 입에’, ‘어머니와 톱니바퀴’), 오로지 재미를 위한 살인과 폭력(‘새끼 고양이와 천연가스’, ‘정년 기일’, ‘인간실격’) 둥 이즈음 들어 심심찮게 인터넷을 통해 접하게 되는 엽기적인 현상들이 현미경 속 확대 영상처럼 생생하고 집요하게 묘사되다 보니 말 그대로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처럼 느껴지는 공포감이 고조될 수밖에 없습니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딱히 엔딩이라 할 만한 대목 없이 그저 툭, 하고 끝나곤 합니다. 독자는 아직도 긴장감과 흥분에 사로잡혀 한껏 고조돼있는데 작가는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주지 않고 느닷없이 막을 내려버리는 것입니다. 남는 것은 둘 중 한가지입니다. 가라앉지 않은 흥분과 공포심이 전해주는 여운이거나 마치 씻기지 않을 그 무엇이 몸에 묻기라도 한 것 같은 불쾌감이거나...

사실 히라야마 유메아키 만큼 호불호가 갈리는 작가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 역시 그의 작품을 쾌감을 느끼며 읽는 독자는 아니지만,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통해 불쾌감과 호기심을 동시에 느끼고 싶은 욕망은 관음증과도 비슷해서 본능처럼 자꾸만 기웃거리거나 찾아 읽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히라야마 유메아키는 이건 아무리 무서워도 픽션이야라는 심리적 안전판을 부수고 언제든 나의 일이 될 수도 있는 일상의 공포를 강조함으로써 독자들의 불온한 본능을 더욱 강하게 자극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서평 때문에 히라야마 유메아키를 블랙리스트에 올리는 독자가 적지 않겠지만, 반대로 그의 작품을 찾아 읽는 독자도 꽤 되지 않을까 추정해봅니다)

 

국내에는 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남의 일두 권만 출간됐지만 그만의 독특한 세계를 맛볼 수 있는 단편들이 계속 출간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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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릴리언스
마커스 세이키 지음, 정대단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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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적인 지능과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신인류 브릴리언트는 인구의 1%에 불과하지만 나머지 99%를 상대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해왔습니다. 한때 모든 부모가 자신의 자식이 브릴리언트로 태어나기를 기원한 적도 있었지만, 현재는 돌연변이나 변종으로 불리며 노멀이라 칭해지는 보통 사람들과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전능한 권력과 무한대의 예산을 보유한 국가기관인 분석대응팀의 닉 쿠퍼는 불순한 브릴리언트를 색출하고 제거하는 임무를 맡은 유능한 요원입니다. 그는 세상을 전복시키려는 브릴리언트 테러 집단의 수장 존 스미스를 체포하기 위해 자신의 상관 피터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홀로 적진으로 뛰어듭니다. 하지만 쿠퍼가 브릴리언트의 세상에서 마주친 진실은 그를 큰 충격에 빠뜨립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모든 것, 믿어왔던 모든 것이 붕괴됐기 때문입니다.


 

한 편의 잘 만들어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연상시키는 작품입니다. 미스터리나 반전에 강점이 있는 스토리는 아니지만 엔터테인먼트 액션 스릴러로는 별 5개 이상의 재미를 맛볼 수 있습니다. 마커스 세이키의 데뷔작 칼날은 스스로를 상처 입힌다를 인상 깊게 본 덕분에 그의 신작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설정 자체가 독특해서 더 기대감이 컸습니다.

 

과거에도 그래왔고 지금도 그렇지만, 인문과 과학, 역사와 예술 등 모든 분야를 막론하고 인류는 극소수의 브릴리언트, 즉 능력자들 덕분에 첨단의 발전을 거듭해왔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이뤄낸 업적 못잖게 희소성, 즉 희귀한 존재감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선망,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 희소성이란 것이 무려 1%에 육박한다면, 그리고 그 1%가 불순한 의도를 갖고 세상을 전복시킬 힘과 세력을 갖추게 된다면, 또 실제로 테러와 살인을 자행하며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시키려 한다면 99%의 보통 사람들은 그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노멀’, 즉 보통 사람들은 좋은 능력자나쁜 능력자사이에서 갈등합니다. 뛰어난 두뇌와 감각으로 일상에서 첨단과학에 이르기까지 발전을 이끄는 능력자가 있는 반면, 그 능력을 이용해 악의 행보를 걷는 능력자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능력자 모두를 싸잡아 국가와 보통 사람들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라고 주장하고, 누군가는 관리와 통제와 효율적인 공존을 모색할 것을 주장합니다. 사실 어느 쪽으로도 쉽게 결론내기 힘든 문제입니다. 주인공 닉 쿠퍼는 분석대응팀 내에서도 가장 훌륭하고 냉정한 요원으로 손꼽혔지만, 그 역시 능력자의 세상을 정면으로 마주한 뒤에는 가치관의 혼란을 겪게 됩니다.

 

악당을 상대로 눈 하나 깜짝 않고 주먹과 총알을 날리는 쿠퍼의 무자비한 폭력은 잔인함보다는 속 시원한 쾌감을 먼저 자극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가족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는 헌신적인 남자로서의 모습이나 여러 차례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위기일발 속의 모습은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쿠퍼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켜줍니다. ‘브릴리언스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의 소제목이 추격자/도망자/반역자로 돼있습니다. 소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쿠퍼는 극적인 신분 변화를 겪으며 위태로운 여정을 걷게 됩니다.

 

브릴리언스는 단순히 부와 권력에 미친 악당들을 때려 부수는 블록버스터가 아닙니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탐욕이라는 모든 죄악의 근원이 기저에 깔려있고, 미국식 가족주의가 주인공의 가장 큰 동력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는 할리우드 서사의 전형적인 면을 품고 있지만 그보다는 생존, 도덕, 균형, 미래 등 다양하고 묵직한 문제를 화두로 삼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딱딱하거나 어렵게 읽힌다는 뜻은 아닙니다.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지만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도 달릴 수 있을 정도로 이야기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표현과 묘사는 쉽고 선명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특히 적절한 비유와 생략, 촌철살인 같은 적확하고 간결한 문장, 독자의 감정선을 자유자재로 들었다 놓았다 하는 마커스 세이키 특유의 필력은 읽는 내내 짜릿함을 전해줍니다.

 

단순히 킬링 타임을 위한 블록버스터를 찾는 독자는 물론, 군더더기 없이 잘 빠진 액션 스릴러를 기대하는 독자 역시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동시에 마커스 세이키가 묘사한 가까운 미래 속 불안과 공포가 워낙 생생해서 다소 암울하면서도 긴 여운을 느낄 수도 있는 의미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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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삼킨 소녀 스토리콜렉터 28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전은경 옮김 / 북로드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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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90년대 중반, ‘전 세계에서 가장 지루한 곳가운데 하나이며 주민이라곤 1,500명에 불과한 미국 네브라스카 주 소도시 페어필드에서 10대 시절을 보낸 셰리든 그랜트의 성장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말랑말랑함이나 천진난만함과 거리가 멀었던 셰리든의 성장기는 롤러코스터보다 더 아찔하고 위태로웠던 것은 물론 어른조차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뜨겁고 무자비하고 잔혹했습니다.

 

셰리든 그랜트는 버넌과 레이첼의 양녀이자 책과 음악을 사랑하며 무한한 자유를 갈망하는 15살 소녀입니다. 하지만 보수적이고 억압적인 분위기가 만연한 소도시 페어필드는 그런 셰리든에겐 악몽 그 자체와도 같아서 언제라도 탈출하고 싶은 지옥이나 다름없습니다. 더구나 한시도 쉬지 않고 악의와 저주를 퍼붓는 양어머니 레이첼의 존재는 셰리든에겐 감당하기도, 벗어나기도 불가능한 끔찍한 재앙입니다.

세 번의 여름 동안 셰리든은 여러 남자와 만남과 이별을 주고받습니다. 풋풋한 첫사랑을 지나 그리 개운치 못했던 첫 경험을 통해 성()에 눈을 뜬 후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의 정점을 찍은 뒤 뒤늦게야 제대로 된 사랑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사랑은 손가락질 받거나 허락되지 않거나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이었고 매번 관습의 틀 밖에서 생성과 소멸을 거듭합니다.

그 와중에 셰리든은 입양아로서의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애씁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항상 든든한 보호막이었던 양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멀어지기 시작한 이유, 자신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괴물이라고 비난하던 양어머니의 비밀과 거짓말, 그리고 자신을 낳아준 친어머니의 정체와 버넌 부부에게 입양되기까지의 과정 등 자신의 출생과 성장을 둘러싼 그랜트 가문의 비극적인 과거사를 알아내게 됩니다.

 

첫사랑, 첫 경험, 처음으로 맛보는 인생의 잔인함이라는 출판사의 홍보 카피는 이 작품의 내용에 비하면 너무 얌전하거나 수수해 보이기만 합니다. 어쩌다 한 번씩 행복한 순간을 만끽하기도 하지만 셰리든에게 있어 페어필드에서의 세 번의 여름은 평생 지워지지 않을 화인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또 벼락처럼 찾아온 몇 번의 사랑은 기쁨보다는 고통, 배신, 절망, 상처만 남긴 채 사라져갔고, 평범한 사람이 평생 한 번 겪을까 말까한 살인을 비롯한 온갖 종류의 정신적, 물리적 폭력은 쉴 틈 없이 셰리든의 인생을 두들기며 그녀를 까마득한 심연 속으로 밀어 넣기 때문입니다.

 

장르물은 아니지만 셰리든이 친어머니의 흔적을 쫓는 미스터리를 바탕에 깔아놓음으로써 넬레 노이하우스는 자신에 대한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합니다. 물론 그녀의 타우누스 시리즈에 비하면 미스터리는 소소할 따름이고, 반전이란 게 등장할 틈도 없게끔 대부분의 정보를 그때그때 독자에게 제공하지만, 시종일관 긴장감을 만끽하게 되는 이유는 셰리든이 알아낸 시한폭탄 같은 그 정보들이 언제 어떤 모양새로 그녀의 들을 향해 터질지 너무나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시한폭탄이 터졌을 때의 쾌감은 타우누스 시리즈의 피아 키르히호프 형사가 산전수전 끝에 악당들을 잡아들일 때 못잖게 짜릿하고 통쾌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유별난 조연들의 캐릭터나 출생의 비밀, 불륜, 가정폭력, 근친상간 등 셰리든이 겪는 험난한 사건들은 한국에서 막장이라고 불리는 극악스러운 드라마의 설정들과 비슷해 보입니다. 하지만 끔찍한 통과의례들을 겪으며 어른으로 성장하는 셰리든에 대한 넬레 노이하우스의 진심어린 시선 덕분에 간혹 무리수처럼 보이는 설정조차 큰 거부감 없이 읽힌 게 사실입니다. 소재가 막장이더라도 작가의 진정성이 가미된다면 품격 있는 작품이 탄생될 수 있다는 교훈은 여러 고전을 통해 경험해봤지만, ‘여름을 삼킨 소녀역시 그런 범주에 들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처음엔 장르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곤 약간 맥이 빠지기도 했지만, 넬레 노이하우스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한 것 같아 다 읽고 난 후에는 오히려 반갑고 기분 좋은 여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작년(2014) 여름에 출간된 상어의 도시는 넬레 노이하우스의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타우누스 시리즈의 명성에 힘입어 출간된 것 같아 읽기를 주저했는데, ‘여름을 삼킨 소녀를 보고나니 역시 기우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머잖아 셰리든의 두 번째 이야기가 출간될 것 같은데, 세 번의 여름을 견뎌낸 그녀에게 어떤 나날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벌써부터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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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차관의 살인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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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 시리즈첫 편인 십각관의 살인을 읽은 지 거의 5년 만에 2편을 읽게 됐습니다. ‘십각관의 살인이 특이하긴 해도 현실적인 상황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을 다뤘다면, ‘수차관의 살인은 이야기의 무대와 서사 모두 호러와 미스터리가 융합된 기이한 분위기를 품고 있어서 긴장감을 더욱 끌어올린 작품입니다. 1년 전 경찰에 의해 어정쩡하게 마무리됐던 살인사건과 1년 후인 현재, 같은 인물들이 같은 공간(수차관)에 모여든 상황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이 번갈아 전개됩니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과거와 현재를 정교하게 교차시킨 뛰어난 구성의 진가는 후반부에 가서 모든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제대로 빛을 발하게 됩니다.


 

과거와 현재의 차이라면 어딘가 삐딱해 보이는 괴짜 탐정 시마다 기요시가 가세한 점뿐인데, 그는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거리낄 것 없이 수차관을 휘젓고 다니며 크고 작은 단서들을 바탕으로 2년에 걸쳐 벌어진 참혹한 연쇄살인의 진상을 추리하다가 결국 아무도 예상 못한 진범을 확정합니다. 시마다 기요시의 이런 추리는 십각관~’ 때와는 전혀 다른 패턴을 보여주는데, 두 작품의 차이는 작가의 후기를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십각관의 살인은 커다란 한 방으로 승부한, 말하자면 기습적인 놀라움을 노린 작품이었다. 이번에는 반대로 본격 미스터리의 경향이 조금 더 강한, 즉 주어진 단서를 이용해 진상을 논리적으로 이끌어내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자 특징은 주 무대인 수차관의 독특한 분위기와 구조, 그리고 그런 공간에 걸맞은 평범하지 않은 인물들의 조합입니다. 수차관은 일본 미스터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어딘가 음산해 보이는 서양식 저택으로, 그 자체만으로도 으스스한 느낌을 주는 공간이지만, 거기에 덧붙여 발전(發電)을 위해 설치한 거대한 3대의 수차가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더욱 배가시킵니다. 등장인물 중 한 사람은 거대한 3개의 수차는 이 저택을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이 골짜기에 정지시켜놓기 위해 움직이는 것 같다.”라고 표현할 정도입니다. 더구나 수차관의 설계자가 시리즈 첫 편의 무대인 십각관을 지은 나카무라 세이지라는 설정은 이곳에서 벌어질 참혹한 비극에 대한 예고나 다름없습니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도 공간적 배경 못잖게 특이합니다. 10여 년 전 끔찍한 사고로 인해 평생을 휠체어에 의지하게 된 것은 물론 화상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고무가면 뒤에 숨긴 채 살아가야 하는 41살의 후지누마 기이치, 9살 때 고아가 된 자신을 거둬준 22살 연상의 기이치의 아내가 된 후 수차관의 탑에 갇혀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고 있는 19살의 유리에를 비롯하여 호러물에 어울릴 듯한 다양한 조연들이 수차관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킵니다.

 

의문의 추락사, 토막 난 채 소각로에서 발견된 피살자, 밀실에서 증발된 용의자 등 1년 전 태풍이 몰아치던 밤에 벌어졌던 기이한 사건들에 이어 1년 후 같은 날, 똑같이 태풍이 다가오는 순간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을 한꺼번에 해결하는 시마다 기요시의 본격 미스터리 수차관의 살인은 출간된 지 30년 가까이 된 역사도 역사지만, 내용이나 완성도 면에서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아도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선지 이 작품을 읽기까지의 5년이란 공백이 너무나도 아쉽게 느껴졌는데, 소장하고 있으면서도 저의 게으름과 신간들에 대한 욕심 때문에 이젠 거의 방치 수준에 이른 관 시리즈를 조만간 책장에서 모두 구해줘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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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1970
유하 원작, 이언 각색 / 비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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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잘 것 없는 넝마주이에서 말단 정치깡패를 거쳐 폭력과 살인, 협잡과 배신의 삶을 살다가 끝내 신기루나 다름없던 강남을 향해 불나방처럼 뛰어들었던 두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1970년대의 극빈한 삶 속에서도 끈끈한 우정을 간직했던 종대와 용기는 논밭뿐이던 강남이 정치꾼과 복부인에 의해 기형적으로 개발되는 과정에 휘말리면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 각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때론 너무나도 간절한 욕망 때문에, 때론 어떻게든 지켜주고 싶은 사랑 때문에 두 사람은 언제 자신을 향해 칼날이 날아올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뒷골목의 삶을 견뎌냅니다. 시기와 질투, 의심과 배신이 난무하는 주먹판에서 살아남기 위한 목숨을 건 분투는 잠시나마 그들이 꿈꾸던 새로운 세상을 눈앞까지 갖다 놓기도 했지만, 강남 개발을 통해 권력과 부를 움켜쥐려는 대한민국의 최상류층은 결코 그들만의 세상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유하 감독의 거리 3부작의 완결편인 강남 1970’의 소설판입니다. 불패의 부동산 신화를 자랑하는 강남이 그야말로 상전벽해를 거치는 과정은 물론 당시 국가권력과 부유층의 탐욕스러운 축재 구조까지 상세히 묘사된 덕분에 등장인물들의 불나방 같은 삶을 현실감 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유하 감독이 짜놓은 1970년대의 강남 개발기의 서사가 작위적으로 보이는 독자도 있겠지만, 지금의 양재역 부근인 말죽거리가 개발되기 직전 모습을 조금이라도 기억하는 중장년의 독자라면 현미경 같은 사실적 묘사에 감탄하면서도 당시 권력층의 탐욕에 대한 공분이 강렬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문장은 간결하고 이야기는 거침없이 속도감 있게 전개됩니다. 두 남자의 기구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파란만장한 인생이 롤러코스터처럼 전개되고, 그들이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했던 폭력적인 삶은 잔혹하기 그지없습니다. 가족이나 친구, 강남개발의 주역들, 명동파와 영등포파의 깡패 등 다양한 조연들도 적절히 배치되어 두 남자를 향한 안타까움과 긴장감을 고조시켜줍니다.

 

다만, 영상화를 염두에 두고 쓰인 작품이라 어쩔 수 없이 갖게 된 한계들이 종종 목격되는데, 우선 사건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다 보니 감정적인 몰입이 쉽지 않았던 점입니다. 서사의 규모만 보면 400페이지를 훌쩍 넘기고도 남을 것 같지만 실제론 250페이지가 채 안된 것을 보면 얼마나 빠르고 간략하게이야기가 전개됐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90년대 유행했던 조폭 영화투 톱 남주의 서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전형적인 캐릭터와 예상대로 전개된 이야기 구조입니다. 특히 영화 친구를 연상시키는 몇몇 시퀀스들은 아쉬움이 많이 남은 지점이었습니다.

 

아직 영화를 보진 못했지만 강남 1970’ 역시 영상을 통해 소구하는 힘이 클 것으로 보입니다. 소설에서 느낀 재미와 아쉬움들이 영상에서 어떻게 배가되거나 보완됐을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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