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인의 뒤를 따라 정원을 가로지르는 동안 나는 그 저택을 일종의 호화 유배지 혹은 요새라 불러야 마땅하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손질이 잘된 꽃나무들의 열립 사이로 뻗어나간 돌바닥 끝자락에 보이는 삼층 건물은 층마다 조금씩 어긋난 각도로 쌓아올려 일종의 나선층계 형태를 이룬 디자인이라, 누군가의 손에서 고심과 망설임 끝에 돌아가다 그대로 방치된 삼단 구조의 큐브 블록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전면 통창이나 발코니는 없이 한 마리 참새나 고양이 정도 드나들 만한 창이 드문드문 났을 뿐이어서, 살림집이라기보다는 안에 담긴 예술품과 귀중품에…… 혹은 그보다 더 금이 가거나 부서지기 쉬운 어떤 존재에 직사광선과 습기가 닿지 않도록 함을 최우선 과제로 두고 설계한 개인소유 박물관으로 보이기도 했습니다. 가문의 진귀한 소장품을 자랑할 의도로 조성한 옛날 메디치 사람들의 스투디올로 같은 것 말입니다.

-알라딘 eBook <절창> (구병모 지음) 중에서 - P14

저만치 앞 넝쿨무늬가 돋을새김된 쌍여닫이 현관문을 향해 나아갈 줄 알았으나 관리인이 건물 외곽의 왼쪽 벽을 끼고 돌기에 지금 건 본채고 후원에 별채라도 있나 싶어 잠자코 따라갔는데, 뒤뜰에 닿기 전 문득 쇠붙이 냄새가 코끝을 잡아 비틀었습니다. 그와 함께 들려오는 말소리는 자음과 모음이 분별 없이 허공에 던져져 우연한 음절을 이룬 무언가이자 웃음과 신음이 서로의 경계를 망각한 분요紛繞의 소리에 가까웠기에, 정체 모를 부흥회에서 강렬한 종교적 경험에 탐닉하는 이의 방언처럼 들리기도 했습니다.

-알라딘 eBook <절창> (구병모 지음) 중에서 - P15

첼로의 C현에 활을 댄 듯한 음성이 평화로운 템포로 귓바퀴를 타고 미끄러져들어와서 외이도의 그물망에 걸렸지만, 눈앞의 장면은 전혀 장르가 다른 이야기를 잘못된 자리에 따다 붙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원래 얼굴이 어땠을지를 짐작하기 어려운 거구의 남성이…… 어쩌면 덩어리가……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은 맞는 듯싶은데 아닐 수도 있고, 아무튼 그 무언가가 의자에 묶여 있었습니다.

-알라딘 eBook <절창> (구병모 지음) 중에서 - P16

말하기와 듣기, 쓰기와 읽기란 비록 그것으로 인해 변하는 실재가 없음은 물론 그것이 거쳐가는 길이 모순의 흙과 불화의 초목으로 닦이고 마침내 도달하는 자리에 결핍과 공허만 남아 영원한 교착상태를 이룬다 한들, 그 행위가 한때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누군가의 영혼이 완전히 부서져버리지 않도록 거드는 법입니다. 언어의 본질과 역할을 두고 명멸하는 무수한 스펙트럼 가운데 그것만큼 괜찮은 구실이 또 있는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알라딘 eBook <절창> (구병모 지음) 중에서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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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가 힘들어 당장 멈추고 싶을 때 한 번쯤 떠올려보자. 내가 무거운 다리를 끌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이 순간 나의 몸과 뇌, 그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무엇인가 한창 건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하고 있는 행위의 진짜 가치와 의미를 떠올린다면, 고통을 줄어들고 한 발자국이라도 더 내게 될 것이다.

-알라딘 eBook <길 위의 뇌> (정세희 지음) 중에서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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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과 형식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서술하라 하셨으니 그리하겠습니다. 비단보로 감싼 은수저도 시나브로 닿은 공기에 검게 변해버리듯이, 사태는 굳이 그것을 훼손할 의도가 없다 하더라도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할 때부터, 펜을 들어 글을 쓰는 순간부터 재구성이라는 명분으로 변질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머리와 심장이 그리 안전하지도 무결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온 우주에서 제일 불안정한 공간임을 상기하면, 뭐라도 말하거나 쓰는 편이 아무것도 말하지 않거나 쓰지 않기보다는 한 발자국만큼이나마 낫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말로도 하고 글로도 써내려가겠지만 가능한 한 저의 해석과 감정이 그 일들을 덜 변색시키기를 바라는 마음에 몇 겹의 문장으로 감싸게 될 것 같습니다. 어떤 진실은 은닉과 착란 속에서 뒹굴 때 비로소 한 점의 희미한 빛을 얻기도 합니다.

-알라딘 eBook <절창> (구병모 지음) 중에서 - P7

하지 말라는 걸 해야만 비로소 세상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이치를, 이야기의 배태란 일상의 붕괴와 질서의 와해 그리고 소망의 파탄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만한 시기는 아니니까요.

-알라딘 eBook <절창> (구병모 지음) 중에서 -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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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부터 시험과 결과로 평가를 받아온 탓인지 한국인들은 유난히 ‘합격’이나 ‘통과’에 대한 학습된 행동패턴을 보이는 듯하다. 그러니 건강검진마저 시험공부 하듯 준비하고, 학창시절에 그러했듯 시험만 잘 보기 위해—또는 무사히 넘기기 위해—벼락치기를 한다. 비정상 수치를 망한 시험 성적표라도 되는 듯 여긴다.

-알라딘 eBook <길 위의 뇌> (정세희 지음) 중에서 - P107

그런데도 우리는 굳이 이분법적 구도를 만든 다음, ‘나는 건강하니 건강 관리는 남의 얘기’라는 극도의 회피성 또는 ‘나는 환자이니 누가 날 치료해 줘야 한다’는 극도의 수동성 중 하나를 선택한다. 두 태도 모두 나의 책임은 배제하니 속은 시원하고 몸은 편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내 몸은 주인을 잃어버렸다. 그에 다른 결과는 철저히 내가 책임져야 할 몫이다.

-알라딘 eBook <길 위의 뇌> (정세희 지음) 중에서 - P109

그렇게 우리 몸은 잉여 칼로리의 약 90%는 피하지방으로, 나머지는 내장지방으로 저축해 둔다.
우리 뇌는 무게는 체중의 2%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평상 시 우리 몸의 에너지 중에 약 21%나 쓰는 기관이다.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뇌는 에너지, 즉 지방을 평소에 비축해 두어야 한다.

-알라딘 eBook <길 위의 뇌> (정세희 지음) 중에서 - P110

이렇게 뇌세포의 활동과 뇌혈관의 활동이 긴밀하게 연관되어 일어나는 것을 ‘신경-혈관 커플링neurovascular coupling’이라 한다. 신경-혈관 커플링은 우리 뇌에서 쉬지 않고 계속 일어나고 있다.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여러분의 뇌에서도 말이다.

-알라딘 eBook <길 위의 뇌> (정세희 지음) 중에서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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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달리는 시간은 좋다. 음악도 듣지 않는다. 속도에 따라 거칠어졌다 잠잠해지는 숨소리, 타닥타닥 발소리가 친구다. 새 소리는 자유롭고, 사람들의 대화는 가까워졌다 멀어지고, 여름이면 개구리는 꽤 요란하게 울었다. 은근히 다가오지만 끼어들지는 않는 이런 소리가 있어 지루하지 않다. 아, 바람소리를 빼먹을 뻔했다. 거기에 어렸을 적 기억을 소환하는 풀냄새, 나무타는 냄새, 흙냄새까지. 딱 적당하다.

-알라딘 eBook <길 위의 뇌> (정세희 지음) 중에서 - P91

달리지 않는 사람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달리는 사람만의 성취가 있다. 본인에게만 의미가 있을지라도 분명 매우 크고 중요한 성취다. 달리다 보면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계속된다. 하지만 그때 포기하지 않고 견뎌야 한다. 그저 버티고 있으면 좀 수월해지고 고비를 넘길 수 있다. 달리기와 마찬가지로 재활 과정에서도 끈기와 인내, 회복탄력성은 무척 중요하다.

-알라딘 eBook <길 위의 뇌> (정세희 지음) 중에서 - P93

달리기는 타인과 경쟁하려 들지 않는다. 달리는 사람은 그저 내 한계를 시험해 볼 뿐이다. 달리기를 하다 보면 고통과 기쁨 사이를 수시로 오간다. 그리고 마침내 완주하면, 인생은 진짜 살아볼 만하게 멋지다는 사실을 느낀다.

-알라딘 eBook <길 위의 뇌> (정세희 지음) 중에서 - P94

우리가 성인병이라고 부르는 질환은 압도적으로 후천성이다. 병에 걸리게 한 과거의 나와 이별하지 않으면 병과도 이별할 수 없다. 수십 년간 살아온 방식 그리고 가치관과 헤어지는 것이기에 당연히 힘들고 어렵다. 그래도 어떻게 하겠는가, 앞으로의 나를 책임질 사람은 나 말고는 없다.

-알라딘 eBook <길 위의 뇌> (정세희 지음) 중에서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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