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41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치욕과 자존은 다르지 않았다”는 작가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나 이야기속의 등장인물 혹은 그들의 견해 어느쪽의 편도 아니다라는 말은 사실에 대한 빗나간 착상일뿐 무의미한 말싸움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다름아니다. 이러한 중도는 정말 의미없이 그리고 공허하게만 들린다.

그러나 이야기속에서 작가는 정말 명료한 메시지를 우리들에게 보내고 있다.

바로 지금의 한국사회와 한 치의 차이도 없어 보이는 17세기 조선조의 국왕과 그의 신하들이 주고받는, 어떠한 진정한 의미도 없는 말과 말들의 움직임은 청의 침입과 그의 굴복이라는 국가적 치욕의 사실보다 더욱 진저리나는 모멸감을 확실케 해준다. 작가 김훈은 성공했다. 아주 분명하게 소설에서 우리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우며 아둔하기까지한 한국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제발 변화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지독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청의 침입, 우리는 병자호란이라 부른다. 이 무슨 뚱딴지 같은 표현인지...
이러한 역사적 편견은 오늘의 우리 현실에 드러나는 국제관계의 무지함과 무능력한 외교역량과 다르지 않다.
이미 기울어버린 ‘명’에 대한 군신의 의리라는 뿌리깊은 유교적 명분과 세치 혀만으로 나라를 정치하는 천박한 사대부만 우글거리는 인조반정세력과 그 무리들의 무능함은 당시 동북아시아지역의 새로운 국제질서의 이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청이 국제질서의 핵심에 있었다.

국왕과 그의 신하들은 대략 47일간 좁디좁은‘남한산성’에 웅크리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국가의 무참함의 원인에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 오로지 유교적 명분만이 그들 삶의 모든 사고와 행위를 지배하고 있었다. 작금의 한국사회의 정치지도자와 행정권력자들의 행태와 다름이 없다. 지금도 세치 혀만 놀리고 있다..., 지금은 남한산성이 아니라 남한이라는 좁은 지역에서...

작가는 ‘영의정 김류’라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모호하고 의지도 없는 인물과 국제질서의 이해와 국가적 실리주의자인 ‘이조판서 최명길’, 그리고 유교적 명분으로 충효만을 내세우는 ‘예조판서 김상헌’을 그리고, 우직히 자신의 소임에 충실한 이시백, 무엇하나 자신의 결정이 없는 병조판서, 그리고 서날쇠라는 민초, 청의 통역관으로 잡배일뿐인 정명수등 나름의 등장인물에 현실의 성격을 부여했다.

우리가 생활하는 우리사회의 어느 조직에서든 볼 수 있는 인물들로 구성되어있다. 작게는 지역집단에서, 그리고는 기업조직에서, 나아가 정부조직에 이르기까지 남한산성에 있던 그 인물들과 아주 똑같은 행태가 아무런 변화 없이 약400년간을 지속되고 있다.

적군을 대적하는 무관으로서 자신의 소임에 진중한 의미와 그 실행에 힘을 쏟는 ‘이시백’이나, 무능하기 이를데없는 ‘묘당’의 정치권력자들을 비웃어 대는 그러나 자기의 이익을 잃지 않는 이기적 실속파로 묘사되는 민초의 대표격인 ‘서날쇠’는 오늘의 민중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작가는 우둔하고 좁은 시야와 탐욕에 그득한 우물안 개구리같은 우리한국사회의 세칭 ‘지도계층’과 그들과 하등 다를바 없는 우리 사회구성원들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작가는 이시백만을 사랑하고 있구나, 우리에게는 이시백만이 필요한 것 아닌가? 달달외워 명문대 나오고, 부모 후원받아 유학갔다 오면 말로만 한세상 살 수 있는 사회가 우리사회 아닌가 말이다. 남한산성의 그들의 삶과 어쩌면 이다지도 같은지...

우리민족을 이렇게 아둔하고 무능하며 탐욕스런 이기적 인간들로 4세기를 묶어둔 그 한국적 인식과 유전인자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지...

남한산성에서 왕과 신하는 삶과 죽음, 절망과 희망이 작가말대로 한 덩어리로 엉켜있었다.

그것은 원인을 빼어버리고 청의 칸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는 결과일뿐, 나라가 그 모양에 이를정도로 무지하고 준비없으며, 책임도 없이 굴러간 그 과정인 원인이 없지 않은가? 남한산성은 그래서 아쉽다. 작가는 바로 그래서 “내 약소한 조국의 운명 앞에 무참하였다”고 하였다. 우리는 약소한 국가가 아닐 수 있다. 오히려 약소한 국가 일 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혀야 했던 것 아닐까?

그럼에도 여전히 모처럼 우리의 치부를 그려준 ‘남한산성’이 고맙기까지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작품을 주인공의 생활무대로 구분하면 대략 3분 할 수 있겠다. 청진과 무산(북한)에서의 생활, 중국에서, 그리고 영국에서의 삶으로. 작가는 작금의 글로벌화하는 지구촌과 종족의 이동이 의미하는 경계의 모호함을 위한 구도로 도입한 듯하다. 이는 작품속에 스며들어 인류의 삶과 정신의 동질성이라는 인식의 기반위에 인류의 무지와 탐욕 그리고 절망등 본성을 그려내고 이의 이해와 구원을 이야기한다.

주인공 ‘바리’는 청진시 무역직 간부의 일곱째(막내)딸로 비감(悲感)하게 출생한다. 육공주 집안에 또다시 출생한 일곱 번째 공주님 핏덩어리 바리는 바로 버려진다. 우리네 삶 그자체가 이미 원죄이듯이 바리의 세상과의 대면은 버려짐이다. 이후 북선(북한)에서의 삶은 외삼촌의 남선(남한) 도피로 가족이 분열되기까지 행복과 화목함으로 그려진다.
작가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문체로 아기자기한 에피소드와 일상을 영상으로 담듯이 유연하게 북선의 삶을 그려내 독자의 흥미를 견인한다.

외삼촌의 탈출은 바리의 가족을 분열시키고 그들 모두를 어둠으로 내몬다. 무당의 염력이 전해져오는 할머니와 일곱 번째 딸‘바리’ 그리고 칠성이(개)는 우리네 무속설화인 ‘바리공주’와 교차한다. 두만강을 건너 오직 생존만이 삶일 수밖에 없는 처절함에서 어머니와 언니들, 그리고 할머니를 여의고 아버지, 칠성이를 잃고, 하늘아래 오직 어린소녀 ‘바리’만이 거칠고 낯선 이국의 질서에 남겨진다.

북쪽에 있는 우리의 피붙이들이 겪는 좌절과 회한의 단순한 이해를 떠나 인류의 연민과 구원이라는 차원의 시야를 만들어준다.
거칠고 사나운 대륙, 중국에서의 아슬한 생활과 15세 소녀 ‘바리’의 한 인간으로서의 삶의 궤적이 시작되고 죽음과 삶의 교차를 반복한다. 밀항선의 밑창, 그리고 컨테이너 바닥에 숨이 멋는 40여일간은 고통이 아닌 저승과의 수없는 왕래이다.

영국 런던에 기착한 ‘바리’의 삶은 그녀의 성품과 영험한 샤먼적 역량으로 이민사회집단의 무난한 정착과 동화를 가져다준다. 그러나 작품속의 종족은 유색인종 일색이다. 유일한 백인은 ‘에밀리’뿐, 그것도 흑색인종의 주술사를 연결하는 고리일뿐으로 ‘부 와 빈’ , ‘권력과 비권력’, ‘강대국과 약소국’등과 같은 양극화에 대한 이해와 해결의 접근으로서 못내 아쉬운 부분이란 생각을 갖게한다.

‘바리’의 결혼과 남편의 실종, 아이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18살 어린 아내이자 엄마의 번민과 고통은 다시금 ‘바리공주’설화의 환상을 빌려 인류의 본성과 구원을 꿴다.
“불행과 고통은 우리가 이미 저지른 것들이 나타나는 것”, 그리곤 ‘불바다’, ‘피바다’, ‘모래바다’, ‘무쇠성’을 여행한다. 굶어죽은 북선의 식구들, 죽고 죽이는 전쟁의 화신들, ‘목청껏 떠들지만 남의말을 삼켜버리는 아무런 의미도 전하지 못하는’ 종교인들의 허위를 내려다보며 서천의 하늘끝, 인류를 구원하는 생명수를 찾는다. 그러나 생명수는? “그런게 있나”.....

인간의 고통이란 그들의 묙망, 자신들의 절망일 뿐,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한 자는 아무도 없대 . 그래서 우린 목청을 합쳐 서로의 말을 해주든지, 아니면 그냥 침묵하는 것이 좋을텐데, 그리고 작가는 우리 스스로의 구원이란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고,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고 속삭인다.

작품 전편(全篇)의 이야기는 소설적 재미가 가득함에 틀림없다. 그러나 작가가 시사하고자 했던 집착화된 고정 관념과 의지가 상당히 표면화되어 있는 작품이란 생각을 갖게하며, 정교하게 조립된 기계와 같은 이성적 호소를 기저로 하여, 이 의도가 너무 불그러져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부담도 느끼게 한다. 특히, 작품의 마지막에 급작스런 결론을 내리려는 듯 ‘바리공주’설화의 환상을 현실인식에 무리하게 결부하려는 부조화는 작품의 내면과 흥미를 위축시키기기도 한다.
그럼에도 ‘바리데기’는 인류의 구원과 희망이란 메시지를 분명히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으며, 우리소설이 신자유주의의 질서와 인류라는 커다란 그릇을 활용한 새로운 시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작품이라 아니할 수 없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41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