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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케이리디온 - 단검처럼 빛나는 스토아의 지혜
에픽테토스 지음, 김재홍 옮김 / 그린비 / 2025년 3월
평점 :
AD 1세기 고대로마의 스토아철학을 대표하는 에픽테토스(AD 50?-135)의 도덕철학에 대한 강의이자 대화를 그의 제자 아리아노스는 《강의》 8권으로 출판했다. 그중 주요주제를 요약하여 일종의 핸드북으로 별도로 만든 것이 이 책 《앵케이리디온 Enchiridion》이다.
나는 이 책에 어떤 독자적인 학문적 유혹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고대인의 윤리에 대한 이해란 어떤 것이었을까 하는 정도의 호기심에서 출발된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오늘날 고도로 섬세해지고 근본적 탐색에 이른 도덕철학의 원리와 비교한다면 도덕원칙이랄 수 있는 것의 기준, 또는 경계의 불완전성으로 다분히 자의적일 수밖에 없는 관점들이 드러나는 것은 불가피한 것일 게다. 그럼에도 바로 이러한 도덕기준들에 대한 사유의 축적이 칸트의 경험이라는 신뢰할 수 없는 내용을 제거한 선험적이라 할 형식에 의거한 도덕형이상학이 출현할 수 있었음을 우리들은 부인할 수 없다. 사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고대 철학자의 윤리학은 제법 흥미로운 독서가 된다.
첫 번째 챕터의 총 5절로 구성된 제 1장은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과 달려 있지 않은 것」이라는 제목을 하고 있다. 아마 에픽테토스는 일종의 도덕적 힘을 지닌 어떤 기준으로써 인간의 내재적 자질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려 한 것으로 이해되는데, 비록 단순하지만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결정과 행동의 그림자가 엿보인다.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 자기 의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 즉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은 것에 우리들은 무력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 천명한다. 즉 재산, 평판(명예), 관직 등 우리자신에 달려있지 않은, 내 것이 아닌 다른 것들에 속한 것은 자기 행위의 도덕적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결국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는 판단, 충동, 욕구, 회피(혐오)와 같은 내재적인 것들이고, 이것만이 우리들 도덕성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즉 이들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들은 본성적으로 자유롭고 방해받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 책임 또한 오롯이 자신의 몫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에는 반드시 그 책임이 따른다. 그 책임, 혹은 의무를 따르는 것이 바로 도덕일 것이다. 도덕을 자유에 기초해서 이해했다는 점에서 이 고대철학자의 사유에서 현대적 도덕의 싹을 발견하는 것은 일종의 인간사유에 대한 경외심이다.
기독교 교부철학에 의한 오랜 인간 사유의 암흑기를 거친 후에 다시금 데카르트라는 인물이 에픽테토스의 도덕철학의 기준을 반복하는 것을 본다, 《방법서설》 3부에서 그는 세 번째 격률로써 “언제나 운명보다 나 자신을 이기며, 세계의 질서를 변화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내 욕망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이었다. 또 일반적으로 우리가 완전히 지배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우리의 생각밖에 없으며...”라고,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에서 도덕적 의무를 발견한다.
에픽테토스에게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위대한 개념은 ‘프로하에레시스(prohairesis)’라는 의지로 해석될 수 있는 도덕적 결단을 함유하는 개인의 정체성으로서 자기 결정력이다. 프로하에레시스는 칸트의 의지와는 그 내용에서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인간 누구나 가지고 있으며, 평범한 이성으로도 알 수 있는 재능과 기질을 사용하는 내적 힘, 어떤 의도와 유사한 개념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의식에 제기되는 모든 감각현상인 인상(Phantasia)의 사용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는 원인이 된다는 말로 이해된다. 칸트는 이 의지에서 이성에 저항하는 욕망과 성향에 맞서 행동의 원리를 바로잡아주는 의지를 선한 의지라 정의하며, 이를 도덕철학의 근간이라 말할 때, 도덕적 품성인 프로하에레시스(의지)를 닮아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구절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13장 「자연에 따른 삶을 살라」에는 “네가 진전되어 나아가기를 바란다면, 외적인 것들에 무감하고 어리석게 보이도록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문장이다. 16세기 네덜란드의 철학자 에라스무스는 우신을 예찬했는데, 그 어리석음이야말로 철저한 도덕성 위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에 따른 삶이란 나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는 외적 대상에 안달하지 말라는 의미 이상이 아니다. 부하직원을 불렀다. 그런데 그가 대답하지 않는다. 혹은 대답하더라도 내가 요청한 어떤 일을 전혀 하지 않는다.

이것은 도덕적 책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대답하지 않거나 요청한 일을 하지 않는다고 내가 화를 내고, 울화를 터뜨린다면 자신의 마음의 평정이 자신이 아니라 부하의 행동에 의존하는 꼴이 되고, 더구나 그 부하는 나보다 항시 훌륭한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됨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흥, 도덕군자 따로없군! 하고 비아냥거릴 수 있겠지만, 대답하지 않거나 일을 하지 않는 부하의 도덕성은 나의 도덕성과는 다른 것이다. 물론 그 부하의 행위가 도덕적 비난의 대상임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저열성에 대해 나의 정념을 소모하지 말라는 얘기다. 그것이 곧 도덕이 지향하는 마음의 평화와 자유라는 것이다. 내 자유를 잃으면 나는 도덕성을 상실하게 된다. 다시 반복되지만 항시 도덕은 자유의 이면의 표상이다.
에픽테토스는 이를 다시금 정리하여 14장의 한 절에서 기술하고 있는데, “자유롭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다른 사람에게 달려있는 것을 원하거나 회피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노예의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14b)” 또한 이것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도 있다. “사람을 비탄에 잠기게 한 것은 일어났던 일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그의 판단이다.” 우리는 나의 외부에서 발생한 어떤 일, 즉 나에게 달려있지 않은 것으로 인해 결코 정념에 휘둘리지 않는다, 다만, 바로 그것들에 대한 내 인상으로 인한 판단에 좌우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자신의 자유를 속박하는 일이 되고 만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19장에서 이를 매우 간단하게 정리하고 있는데, “자유에 이르는 단 하나의 길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는 것들을 경멸하는 것이다.”라고. 이것은 에픽테토스 도덕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준칙이다. “외적 인상에 무감각하라”처럼, 탁월한 도덕 행동 준칙이다. 먼저 인상에 마음 빼앗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만큼의 시간을 벌어 그 인상으로 인한 판단을 물리칠 수 있게 된다.
사실 이후에 펼쳐지는 사유들은 최초의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자유의 기준에 대한 현실에서의 다른 양태들이다. 24장의 「너의 능력에 맞는 자리를 차지하라」라는 말은 명예라는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으로 인해 자신이 얻지 못했다고 부끄럽다거나 자신의 무용성이라 생각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얘기처럼, 자신의 prohairesis(의지)가 책임질 수 없는 것은 도덕과 자유의 대상이 애초에 아니라는 말이다.
한편, 스토아철학의 독특한 관점을 몇 가지 알게 되었는데, 그 첫째는 ‘악의 본성’에 관한 것이다. 에픽테토스는 말한다. “어떤 것이 잘못되도록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노릇이다. 자연적인 어떤 것도 악하지 않고, 자연적으로 악한 것은 우주에 있을 수 없다.(kakou phusis en kosmÕ)”, 이로부터 곧바로 우주는 선의 본성을 지녔다고 말하는 것인데, 생성과 소멸의 순환, 그리고 그 정연한 우주의 법칙들에 대해 ‘선’이라는 구별된 특정개념을 부여하는 것에 나는 조금 당혹감을 느꼈다. 아니 그것은 그 자체로 스스로 존재함일 뿐, 그것은 선도 악도 아닌, 다만 그러함일 뿐인 것이 아닌가? 사실 노자 장자를 들먹일 것도 없이 이러한 논리적 건너뛰기에서 사유의 미숙함이 발견된다.
둘째는 에픽테토스의 오늘의 말로 인식론이라 부를만한 것인데, “먼저 오는 것들과 그것에 따른 것을 생각하라. 그런 다름에 그 일에 착수하는 것이 좋다.”는 문장이다. 이것은 《강의 3권》 8장 4절의 인식론에서 상세히 설명되고 있는 모양인데, 이 고대철학자는 “인상→파악→승인”의 단계로 인간의 인식과정을 이해하고 있음을 알 게 된다. 이 일련의 인식과정을 그대로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적용하여 우리네 일상의 그릇된 판단들을 설명할 수 있는데, 자신이 무엇을 진정으로 해낼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자기 삶의 주도적 과업으로 실천해낼 수 있는지를 알아차리는 데 중요한 것이다. 에픽테토스는 레슬링 선수를 예로 들고 있는데, 고된 훈련과, 음식의 절제, 그리고 시합에서 패할 수 있음에도 그 과업을 계속해서 견뎌낼 마음과 행동의 다짐이 있는지를 살펴보라는 얘기다. 상대 선수에게 바닥에 냅다 꽂혀져서 입으로는 모래가 한 웅큼 들어오고, 얼굴은 부딪쳐 피멍울이 지고, 그리고서는 무참하게 패배했음에도 그것을 다시 하고 싶은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라는 얘기다.
“인간아, 먼저 그 일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라. 그런 다음에 내가 그 일을 견딜 수 있을지 없을지 자신의 능력(Phusis)을 잘 살펴보아라.” 라고, 자신의 ‘혼의 지도적 부분(헤게모니콘;hqgemonikon)’이 내리는 명령에 세심히 주의하라고 가르친다. 이성으로 번역될 수 있는 헤게모니콘이라는 단어가 정말 신선하게 여겨진다. 오늘날 감성과 이성의 무자르듯한 이분법과 달리 모든 정신을 통제하는 지칭으로 우리네 정신을 다시금 생각해 볼 일이다.
실생활에서 우리들이 저지르는 많은 생각의 과오를 일깨우는 명제들도 시선을 끄는데, 우리들은 수시로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추론으로 타자를 판단하는 어리석음으로 세상을 어지럽히고는 한다. 어떤 사람이 술을 많이 마신다고, 그 사람이 술을 아주 나쁘게 마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전혀 논리적인 추론이 아니다. 단지 그 사람은 술을 마시는 것이다. 그의 판단을 알기 전에 어떻게 그것이 나쁜지 알 수 있는가? 파악될 수 있는 외적 인상을 자기마음대로 판단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외적 인상, 즉 자신의 주관적 인상을 마치 사실의 판단인 것처럼 말함으로써 이 세계를 온통 거짓 판으로 왜곡하는 일이 만연하는 현실은 안타까울 따름이다.
사실 에픽테토스의 도덕철학은 도덕을 실제 경험 사례에 의존하여 이끌어내고 있는 한계로 인하여 그 자의성을 벗어나기 힘들뿐더러 자칫 오용될 여지가 넘친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매우 인상적인 문장을 마지막 장인 53장 「명심해둬야 할 명제들」에 이르러 선언하고 있는데, 마치 칸트의 정언명령과 같은 강제적 도덕원칙을 닮아 있어서였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경험적 한계를 넘어선 절대원칙인 자연 법칙에 대한 순응이다.
“나를 이끄소서, 오 제우스신이여, 당신, 운명의 신이여, 당신이 나에게 정해 주신 그 어느 곳이라도 가도록. 나는 주저없이 따르겠나이다. 하지만 원하지 않는다 해도, 나쁜 자가 되어도, 그럼에도 다름없이 따르겠나이다.” (나는 이 문장을 인간의 모든 경험에서 독립한 순수 절대 이성의 명령으로 이해한다. 이 고대 철학자는 아마 도덕 최고의 원칙을 인식했는지도 모르겠다.)
최고 신인 제우스신은 도덕적 완전성의 상징일 것이고, 이 절대선의 개념은 인간의 경험에 앞선 선험의 영역으로서의 필연적 힘이다. 칸트는 진정한 도덕의 최상원리는 모든 경험으로부터 독립한 순수한 이성 인식이라고 말했다. 즉 도덕 원리를 사람마다 다른 본성에 대한 지식에서 찾는 것은 결코 도덕의 원칙이 될 수 없다는 것이라는 말처럼, 그것은 우주자연의 절대법칙인 신으로 일컬어지는 오직 형식이자 목적 그 자체인 명령이다. 그래서 에픽테토스는 주저없이, 자신이 원하지 않을지라도 따르겠노라고 말하는 것일 게다.
삶의 지혜란 무엇일까? 자연의 법칙, 자연과 일치된 행위를 쫓는 것, 필연의 힘에 잘 따르는 삶일까? 이미 자연의 내재적 결정이 있음을 알면서 그 결정된 조건 하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공포의 무게를 견디면서 결정해야하는 인간의 자유는 그만큼 참을 수 없는 어려움이다. 정말이지 인간 세계에서 도덕이란 지켜내기 어려운 것이고 그래서 더욱 지켜져야 하는 것일 게다. 스토아철학의 한 단면을 엿보는 흥미로운 읽기가 되어줄 책이자 도덕이란 무엇이어야 할지를 생각게 하는 책이기도 하다. 나아가 보다 심화된 스토아철학의 사유를 알고자하는 독자는 그의 《강의》를 읽어보는 것도 한 방편이 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