엥케이리디온 - 단검처럼 빛나는 스토아의 지혜
에픽테토스 지음, 김재홍 옮김 / 그린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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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1세기 고대로마의 스토아철학을 대표하는 에픽테토스(AD 50?-135)의 도덕철학에 대한 강의이자 대화를 그의 제자 아리아노스는 강의8권으로 출판했다. 그중 주요주제를 요약하여 일종의 핸드북으로 별도로 만든 것이 이 책 앵케이리디온 Enchiridion이다.

 

나는 이 책에 어떤 독자적인 학문적 유혹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고대인의 윤리에 대한 이해란 어떤 것이었을까 하는 정도의 호기심에서 출발된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오늘날 고도로 섬세해지고 근본적 탐색에 이른 도덕철학의 원리와 비교한다면 도덕원칙이랄 수 있는 것의 기준, 또는 경계의 불완전성으로 다분히 자의적일 수밖에 없는 관점들이 드러나는 것은 불가피한 것일 게다. 그럼에도 바로 이러한 도덕기준들에 대한 사유의 축적이 칸트의 경험이라는 신뢰할 수 없는 내용을 제거한 선험적이라 할 형식에 의거한 도덕형이상학이 출현할 수 있었음을 우리들은 부인할 수 없다. 사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고대 철학자의 윤리학은 제법 흥미로운 독서가 된다.

 

첫 번째 챕터의 총 5절로 구성된 제 1장은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과 달려 있지 않은 것이라는 제목을 하고 있다. 아마 에픽테토스는 일종의 도덕적 힘을 지닌 어떤 기준으로써 인간의 내재적 자질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려 한 것으로 이해되는데, 비록 단순하지만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결정과 행동의 그림자가 엿보인다.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 자기 의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 즉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은 것에 우리들은 무력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 천명한다. 즉 재산, 평판(명예), 관직 등 우리자신에 달려있지 않은, 내 것이 아닌 다른 것들에 속한 것은 자기 행위의 도덕적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결국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는 판단, 충동, 욕구, 회피(혐오)와 같은 내재적인 것들이고, 이것만이 우리들 도덕성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즉 이들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들은 본성적으로 자유롭고 방해받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 책임 또한 오롯이 자신의 몫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에는 반드시 그 책임이 따른다. 그 책임, 혹은 의무를 따르는 것이 바로 도덕일 것이다. 도덕을 자유에 기초해서 이해했다는 점에서 이 고대철학자의 사유에서 현대적 도덕의 싹을 발견하는 것은 일종의 인간사유에 대한 경외심이다.

 

기독교 교부철학에 의한 오랜 인간 사유의 암흑기를 거친 후에 다시금 데카르트라는 인물이 에픽테토스의 도덕철학의 기준을 반복하는 것을 본다, 방법서설3부에서 그는 세 번째 격률로써 언제나 운명보다 나 자신을 이기며, 세계의 질서를 변화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내 욕망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이었다. 또 일반적으로 우리가 완전히 지배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우리의 생각밖에 없으며...”라고,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에서 도덕적 의무를 발견한다.

 

에픽테토스에게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위대한 개념은 프로하에레시스(prohairesis)’라는 의지로 해석될 수 있는 도덕적 결단을 함유하는 개인의 정체성으로서 자기 결정력이다. 프로하에레시스는 칸트의 의지와는 그 내용에서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인간 누구나 가지고 있으며, 평범한 이성으로도 알 수 있는 재능과 기질을 사용하는 내적 힘, 어떤 의도와 유사한 개념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의식에 제기되는 모든 감각현상인 인상(Phantasia)의 사용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는 원인이 된다는 말로 이해된다. 칸트는 이 의지에서 이성에 저항하는 욕망과 성향에 맞서 행동의 원리를 바로잡아주는 의지를 선한 의지라 정의하며, 이를 도덕철학의 근간이라 말할 때, 도덕적 품성인 프로하에레시스(의지)를 닮아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구절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13자연에 따른 삶을 살라에는 네가 진전되어 나아가기를 바란다면, 외적인 것들에 무감하고 어리석게 보이도록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문장이다. 16세기 네덜란드의 철학자 에라스무스는 우신을 예찬했는데, 그 어리석음이야말로 철저한 도덕성 위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에 따른 삶이란 나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는 외적 대상에 안달하지 말라는 의미 이상이 아니다. 부하직원을 불렀다. 그런데 그가 대답하지 않는다. 혹은 대답하더라도 내가 요청한 어떤 일을 전혀 하지 않는다.

 


이것은 도덕적 책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대답하지 않거나 요청한 일을 하지 않는다고 내가 화를 내고, 울화를 터뜨린다면 자신의 마음의 평정이 자신이 아니라 부하의 행동에 의존하는 꼴이 되고, 더구나 그 부하는 나보다 항시 훌륭한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됨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 도덕군자 따로없군! 하고 비아냥거릴 수 있겠지만, 대답하지 않거나 일을 하지 않는 부하의 도덕성은 나의 도덕성과는 다른 것이다. 물론 그 부하의 행위가 도덕적 비난의 대상임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저열성에 대해 나의 정념을 소모하지 말라는 얘기다. 그것이 곧 도덕이 지향하는 마음의 평화와 자유라는 것이다. 내 자유를 잃으면 나는 도덕성을 상실하게 된다. 다시 반복되지만 항시 도덕은 자유의 이면의 표상이다.

 

에픽테토스는 이를 다시금 정리하여 14장의 한 절에서 기술하고 있는데, 자유롭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다른 사람에게 달려있는 것을 원하거나 회피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노예의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14b)” 또한 이것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도 있다. 사람을 비탄에 잠기게 한 것은 일어났던 일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그의 판단이다.” 우리는 나의 외부에서 발생한 어떤 일, 즉 나에게 달려있지 않은 것으로 인해 결코 정념에 휘둘리지 않는다, 다만, 바로 그것들에 대한 내 인상으로 인한 판단에 좌우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자신의 자유를 속박하는 일이 되고 만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19장에서 이를 매우 간단하게 정리하고 있는데, 자유에 이르는 단 하나의 길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는 것들을 경멸하는 것이다.”라고. 이것은 에픽테토스 도덕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준칙이다. 외적 인상에 무감각하라처럼, 탁월한 도덕 행동 준칙이다. 먼저 인상에 마음 빼앗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만큼의 시간을 벌어 그 인상으로 인한 판단을 물리칠 수 있게 된다.

 

사실 이후에 펼쳐지는 사유들은 최초의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자유의 기준에 대한 현실에서의 다른 양태들이다. 24장의 너의 능력에 맞는 자리를 차지하라라는 말은 명예라는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으로 인해 자신이 얻지 못했다고 부끄럽다거나 자신의 무용성이라 생각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얘기처럼, 자신의 prohairesis(의지)가 책임질 수 없는 것은 도덕과 자유의 대상이 애초에 아니라는 말이다.

 

한편, 스토아철학의 독특한 관점을 몇 가지 알게 되었는데, 그 첫째는 악의 본성에 관한 것이다. 에픽테토스는 말한다. 어떤 것이 잘못되도록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노릇이다. 자연적인 어떤 것도 악하지 않고, 자연적으로 악한 것은 우주에 있을 수 없다.(kakou phusis en kosmÕ)”, 이로부터 곧바로 우주는 선의 본성을 지녔다고 말하는 것인데, 생성과 소멸의 순환, 그리고 그 정연한 우주의 법칙들에 대해 이라는 구별된 특정개념을 부여하는 것에 나는 조금 당혹감을 느꼈다. 아니 그것은 그 자체로 스스로 존재함일 뿐, 그것은 선도 악도 아닌, 다만 그러함일 뿐인 것이 아닌가? 사실 노자 장자를 들먹일 것도 없이 이러한 논리적 건너뛰기에서 사유의 미숙함이 발견된다.

 

둘째는 에픽테토스의 오늘의 말로 인식론이라 부를만한 것인데, 먼저 오는 것들과 그것에 따른 것을 생각하라. 그런 다름에 그 일에 착수하는 것이 좋다.”는 문장이다. 이것은 강의 384절의 인식론에서 상세히 설명되고 있는 모양인데, 이 고대철학자는 인상파악승인의 단계로 인간의 인식과정을 이해하고 있음을 알 게 된다. 이 일련의 인식과정을 그대로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적용하여 우리네 일상의 그릇된 판단들을 설명할 수 있는데, 자신이 무엇을 진정으로 해낼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자기 삶의 주도적 과업으로 실천해낼 수 있는지를 알아차리는 데 중요한 것이다. 에픽테토스는 레슬링 선수를 예로 들고 있는데, 고된 훈련과, 음식의 절제, 그리고 시합에서 패할 수 있음에도 그 과업을 계속해서 견뎌낼 마음과 행동의 다짐이 있는지를 살펴보라는 얘기다. 상대 선수에게 바닥에 냅다 꽂혀져서 입으로는 모래가 한 웅큼 들어오고, 얼굴은 부딪쳐 피멍울이 지고, 그리고서는 무참하게 패배했음에도 그것을 다시 하고 싶은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라는 얘기다.

 

인간아, 먼저 그 일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라. 그런 다음에 내가 그 일을 견딜 수 있을지 없을지 자신의 능력(Phusis)을 잘 살펴보아라.” 라고, 자신의 혼의 지도적 부분(헤게모니콘;hqgemonikon)’이 내리는 명령에 세심히 주의하라고 가르친다. 이성으로 번역될 수 있는 헤게모니콘이라는 단어가 정말 신선하게 여겨진다. 오늘날 감성과 이성의 무자르듯한 이분법과 달리 모든 정신을 통제하는 지칭으로 우리네 정신을 다시금 생각해 볼 일이다.

 

실생활에서 우리들이 저지르는 많은 생각의 과오를 일깨우는 명제들도 시선을 끄는데, 우리들은 수시로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추론으로 타자를 판단하는 어리석음으로 세상을 어지럽히고는 한다. 어떤 사람이 술을 많이 마신다고, 그 사람이 술을 아주 나쁘게 마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전혀 논리적인 추론이 아니다. 단지 그 사람은 술을 마시는 것이다. 그의 판단을 알기 전에 어떻게 그것이 나쁜지 알 수 있는가? 파악될 수 있는 외적 인상을 자기마음대로 판단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외적 인상, 즉 자신의 주관적 인상을 마치 사실의 판단인 것처럼 말함으로써 이 세계를 온통 거짓 판으로 왜곡하는 일이 만연하는 현실은 안타까울 따름이다.

 

사실 에픽테토스의 도덕철학은 도덕을 실제 경험 사례에 의존하여 이끌어내고 있는 한계로 인하여 그 자의성을 벗어나기 힘들뿐더러 자칫 오용될 여지가 넘친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매우 인상적인 문장을 마지막 장인 53명심해둬야 할 명제들에 이르러 선언하고 있는데, 마치 칸트의 정언명령과 같은 강제적 도덕원칙을 닮아 있어서였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경험적 한계를 넘어선 절대원칙인 자연 법칙에 대한 순응이다.

 

나를 이끄소서, 오 제우스신이여, 당신, 운명의 신이여, 당신이 나에게 정해 주신 그 어느 곳이라도 가도록. 나는 주저없이 따르겠나이다. 하지만 원하지 않는다 해도, 나쁜 자가 되어도, 그럼에도 다름없이 따르겠나이다.” (나는 이 문장을 인간의 모든 경험에서 독립한 순수 절대 이성의 명령으로 이해한다. 이 고대 철학자는 아마 도덕 최고의 원칙을 인식했는지도 모르겠다.)

 

최고 신인 제우스신은 도덕적 완전성의 상징일 것이고, 이 절대선의 개념은 인간의 경험에 앞선 선험의 영역으로서의 필연적 힘이다. 칸트는 진정한 도덕의 최상원리는 모든 경험으로부터 독립한 순수한 이성 인식이라고 말했다. 즉 도덕 원리를 사람마다 다른 본성에 대한 지식에서 찾는 것은 결코 도덕의 원칙이 될 수 없다는 것이라는 말처럼, 그것은 우주자연의 절대법칙인 신으로 일컬어지는 오직 형식이자 목적 그 자체인 명령이다. 그래서 에픽테토스는 주저없이, 자신이 원하지 않을지라도 따르겠노라고 말하는 것일 게다.

 

삶의 지혜란 무엇일까? 자연의 법칙, 자연과 일치된 행위를 쫓는 것, 필연의 힘에 잘 따르는 삶일까? 이미 자연의 내재적 결정이 있음을 알면서 그 결정된 조건 하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공포의 무게를 견디면서 결정해야하는 인간의 자유는 그만큼 참을 수 없는 어려움이다. 정말이지 인간 세계에서 도덕이란 지켜내기 어려운 것이고 그래서 더욱 지켜져야 하는 것일 게다. 스토아철학의 한 단면을 엿보는 흥미로운 읽기가 되어줄 책이자 도덕이란 무엇이어야 할지를 생각게 하는 책이기도 하다. 나아가 보다 심화된 스토아철학의 사유를 알고자하는 독자는 그의 강의를 읽어보는 것도 한 방편이 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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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언집 부클래식 Boo Classics 55
에라스무스 지음, 김남우 옮김 / 부북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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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는 이 책 격언집; Adagia에 나름의 엄중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듯, 격언(Paraoemia)의 정의에서부터 가치와 유익성, 그 용례에 이르는 거의 한 편의 논문이라 할 40여 쪽의 서문(序文)을 붙이고 있다. 에라스무스의 이 글을 찾은 이유는 우신예찬; Moriae Encomium의 참고문헌으로서의 의미였는데, 오히려 그 통렬하고 신선한 반전의 내용들로 주객이 전도된 느낌을 가질 정도였다면 지나친 말이 될까?

 

지나치다는 말을 해서 말인데, 절대 지나치지 말라!(Ne quid nimis)’는 격언도 설명되고 있어 이로부터 시작해야 할 모양이다. 이 문장은 고대 그리스 현자들의 가장 유명한 금언 세 가지 중 두 번째에 해당될 만큼 인간 삶에 있어 그 의미의 중차대함이 지극한 말이다. 무엇이든 정도를 넘어서지 말라는 지혜인데, 수시로 이러한 과도함 또는 미흡함에 머물고 마는 일이 허다한 내게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주문이겠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잘못은 모든 일에 있어 그 정도를 다스리지 못함에 있다고 지적했단다. 아무렴 고대 그리스 현자들은 절제, 중용의 덕을 합창하듯 반복한 모양인데, 이것은 인간의 언행에는 항시 지나침이 있기 마련이라는 반증일 것이다.

 

내 독서의 의도인 어리석음의 광범위한 편재성에 대한 혹독한 일깨움, 그 신랄한 자성(自省)의 문장들을 말해야겠다. 우신(愚神), 어리석음을 모티브로 한 격언들의 장은 여타 격언들보다 그 해설이나, 저자의 주장이 길게 서술되고 있다는 것도 이 격언집의 한 특징이라면 특징이겠다. 제일 먼저 마주하게 되는 어리석음에 관련된 격언은 고통을 겪으면 바보도 현명해진다( Malo accepto stultus sapit)'이다. 이 격언은 조금씩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데, 고통을 겪음으로써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된다는 인간의 태생적 미련함에 대한 지적이기도 하지만, 상처를 입는 것이 곧 배움이라는 고통의 긍정적 수용의 말이기도 한다. 어쨌거나 인간은 험한 꼴을 꼭 눈으로 보고서야 그 쓴맛을 알아차리는 종이라는 말일게다.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먹어 봐야 아는 미련함이 이 사회 기득계층이 자리한 곳곳에서 드러나니 말이다.

 

이어서 왕으로 태어나든지 바보로 태어나야 한다는 조금 독특한 격언도 있는 모양인데, 바보와 왕을 연결하여 어떤 의미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이 둘의 공통점은 바로 어리석음이다. 에라스무스는 제왕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실례들을 소개하고는 그들은 상당부분 대단한 어리석음을 갖추고 있었음이 명백하다고 단언한다. 우신예찬의 그 통렬한 풍자의 문장들과 상당부분 그 개념에서 겹치고 있는데, 국가 통치에는 전혀 지혜가 없으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물 모으는데 악착같은 제왕들의 숱한 어리석음이 끝도 없이 나열된다.

 

그러고서는 어리석음을 뽐내며 인류에게 커다란 피해를 주지 않은 왕은 찾아 볼 수 없다고 그 명단을 계속 늘려갈 수 있기에 멈춘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게 가능한 이유는 바로 제왕의 어리석음에 못지않은 멍청한 백성들이 바보같은 이유로 떠받들고 있음에 있다고 지적한다. 1510년의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에 살던 인간이나 2025년 동아시아 한반도의 인간들이나 그 변하지 않는 어리석음에서 소설가 한강이 말한 어떻게 인간을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통회(痛悔)의 물음을 떠올리는 건 아마 당연한 연상일 것이다.

 

이쯤에서 격언의 정의(定義)를 집고 가는 것이 타당해 보이는데, 에라스무스가 우신예찬에서도 혹여 특정 개인이나 정파를 겨눈 비판이란 누명을 피하고자 애썼듯, 격언(paroimia)이란 잘 닦여 왕래가 잦은 길이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오랜 인류의 시간을 거치며 세상을 살아가는 좋은 지침으로 불분명하면서도 상당히 유익한 진리를 오롯이 감추고 있는 널리 사용되는 통렬하고 신선한 반전을 그 특징으로 하는 말이다. 사람들이 그 함의(含意)에 대해 수긍해 온 인간 유익의 언어라는 것이다. 결국 이 격언집은 사태와 시기에 적절하게 표리에 드러난 말을 통해 속에 감추어진 진실의 의미로 넌지시 세상을 일깨우기 위한 지혜의 다름 아니다. 사실 이 책은 에라스무스의 수준높은 유머로 인해 읽는 즐거움이 배가 되는데, 하늘을 온통 자신의 사생아들로 채운 올림포스의 유피테르(제우스)를 우매한 탕아라고 그 사유를 적시할 때면 그 재치와 기발함에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한다.

 


정말이지 이 사회에도 바보들이 차고 넘침을 볼 수 있는데, 자신들에게도 유복(裕福)함이 전혀 없지 않다고 생각하는 자기애로 가득한 인간들이 뜬금없이 성조기와 태극기를 휘두르며 행복해하는 모양들에서 우신이 미소를 가득 머금는 이유는 타당할 것이다. 우신이 베푼 그 어리석음에 저들의 삶을 얼마나 즐겁게 해주는가!, 바보들이여 영원하라! 킬킬킬.

 

사실 격언집으로서 그 소임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저술이기도 하지만,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에라스무스가 당대의 정치와 사회 현실에 대해 지닌 날카로운 지성, 그 비판의식에 있다. 연기를 팔다(Fumos vendere)'는 격언이 있는데, 처음에는 대단히 큰 것처럼 보이지만 이내 사라져버리고 마는, 거짓과 과시로 뭉쳐진 어리석음과 사악함을 에두르는 말이다. 이로부터 연기를 판 자는 연기로 처벌한다.”로 이어지며, 역겨운 종류의 인간들로 득실거리는 권력의 주변부, 공직을 팔아먹으며, 약속된 대가로 뇌물을 받아 처먹는 연기 장사꾼들에 분노하여야 함을 역설하기도 한다. 이번만큼은 절대 관대함을 보여서는 안 된다.”.

 

잘못을 피하려다 헛되이 어리석게도 다른 잘못에 빠지는 것을 연기를 피하려다 불 속에 떨어진다(Fumum fugiens in ignem incidi)'라고 한다. 거듭되는 어리석음들이 벌써 6개월 째 계속되고 있음을 본다. 어쭙잖은 기득권의 그 달디 단 젖줄을 놓지 않으려고 온갖 불의한 술수를 반복해 저지르는 저들은 곧 화염에 달려드는 나방의 꼴을 면치 못하리라. 단 한 가지 일의 깊은 통찰력에 집중하는 지혜로운 이를 무수한 잔꾀들이 이길 도리가 없음을 말하는 격언도 있다. '여우는 많은 꾀를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큰 것 하나를 알고 있다(Multra novit vulpres, verum echinus unum magnum)' 승냥이의 이빨도 피하는 고슴도치의 지혜를 보라!

 

눈살 찌푸리게 하는 담론가 입네 하며, TV 화면에 등장하는 신발장이들이 자신들의 직업과 전문분야와 전혀 관련도 없는 일에 관해 왈가왈부하는 몽매와 교만이 얼마나 넘쳐나는가 말이다. 그리스의 유명화가 아펠레스가 자신의 그림을 행인들이 볼 수 있도록 걸어 놓았다. 어느날 지나가던 신발장이가 그림 속 신발 끈을 넣을 구멍이 너무 작게 그려진 것을 보고는 그림의 묘사가 틀렸다고 지적했다. 아펠레스는 그 지적을 듣고는 그림을 수정해 구멍을 정상적으로 그려 넣었다. 수정된 그림을 본 신발장이는 우쭐해서 이번에는 발이 잘못되었다고 지적질을 했다. 이때 아펠레스는 신발장이에게 신발장이는 신발에만 왈가왈부할 일이다.”라고 응답했다는 이야기에서 기원하는 신발장이는 신발을 넘어서지 말라는 격언을 생각해 볼 일이다.

 

내과의사란 자가 국가 경제정책 논의의 자리에서 분수도 모르는 헛소리를 지껄이고, 생물학자라는 자는 정당정치와 헌법을 얘기한다. 물론 국민으로서 말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담론 권력을 휘두르며, 대중에 올바른 정보의 판단을 가능케하는 자리라는 점에서 정말이지 우습기 그지없는 방자함이랄 수밖에. 오직 상업적 이익에 열을 올리는 종편채널들의 무책임한 방송정책이 한국사회의 전반적 지식정보수준을 상당히 후퇴시켰다고 보아도 될 것 이다. 이제 불편부당(不偏不黨)이라는 언론의 사명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사어(死語)가 되어버렸다.

 

'원숭이가 자주색 관복을 입는다(Simia in purpura)'고 원숭이가 아닌 것은 아닌 것일 게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식,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징을 걸친다고 그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순간적으로 자주색 관복에 현혹되어 속을 수도 있을 테지만, 곧 그 속임수는 들통나버린다. 바 로 지금 우리네가 답답하고 울화가 치미는 것이 바로 이 속임수에 넘어간 인간들로 인해 불필요하게 치러야 하는 홍역 아니겠는가. 자주색 관복으로 가장하고 이 나라를 저희들 뜻대로 주물럭거리며 국민을 기망해 온 것이 어언 70여 년이다. 이제 저것들에게서 겉옷과 장식을 걷어내고 그야말로 드러난 형편없는 인간들에게 제자리를 찾아주어야 할 터이다. 그것이 어떤 자리여야 할지는 국민이 판단 할 것이다.

 

그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는다는 16세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지성 중 의 한 명인 에라스무스의 이 절절하고 예리한 통찰력이 웃음과 재치로 넘쳐나는 해학과 수많은 사상의 편린들로 엮여 인간과 인간사회에 팽배한 그 어리석음에 거대한 한 방을 때린다. 그야말로 인류 최고의 풍자극이라 할 그의 대표작 우신예찬과 함께 인간 공동체의 실체를 다시금 반추해보는 것도 썩 괜찮은 독서가 되어 주리라. 자 이제 실제 능력을 증명해 보일 때다.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Hic Rhodus, hic saatus)" 떠벌리고 과시하기만 할 뿐, 능력을 입증해보이지 못하는 자들은 이제 그 자리에서 스스로 떠나라. 지금이 그럴 때이다. 막사발 자랑은 이제 그만 됐다. 때를 가려라!(Nosce temp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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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05-16 16: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두 이 책 있습니다! 읽었어야 했는데, 계속 다른 책들에 밀리다보니 여태 못읽었는데, 이런 내용의 책이었네요! 저도 얼른 읽어야 겠습니다~^^

필리아 2025-05-16 17:25   좋아요 0 | URL
네, yamoo님~ <우신예찬>과 함께 읽어보세요.
더욱 글의 진가가 배가 될 것 같습니다. 에라스무스는 풍자를 인간의 결점과 약점을 체계적으로 비난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죠. 해서 어리석음에 칼날을 겨냥하면서도 유쾌함을 잃지 않으려 하는 것일 겁니다. 이 격언집도 풍자에 대한 그의 신념이 결집된 산물인 것 같습니다.
 
프랑스 내전 맑스 엥겔스 에센스 3
칼 마르크스 지음, 안효상 옮김, 최갑수 해제 / 박종철출판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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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다급히 프랑스 내전을 펼쳐야 하는가!  

이 사회의 힘, 이제 국민이라는 신체가 돌려받아야 하는 까닭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1871530일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된 협회 회원들에 보내는 담화문 형태로 발표된 글로써, 같은 해 613프랑스 내전이란 이름으로 출간된 칼 마르크스의 저작이다. 이 글이 써진 시기를 무엇보다 주목할 이유가 있는데, 바로 파리 코뮌의 국민방위군을 포함한 추산 3만 명이 무참하게 도륙되던 523일에서 530일 사이에 작성된 것이라 점이다. 사건이 진행되고 있는 현재에 기술된 당대사(當代史)라는 이례성이다. 역사는 이 기간 521일에서 528일까지를 피의 일주간이라 부른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잔인한 대()학살극에 대한 표현치고는 지나치게 중립적인 명명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난폭한 기득 권력이 시민에게 어떤 짓을 할 수 있는가의 역사적 증거다.

 

대략 150년 전 유럽의 한 장소에서 발생한 국가 권력을 독점한 역사에 대한 반동 세력인 소수의 권력이 시민을 짧은 시간 안에 이렇게 대살육 한 것은 가히 인류 역사에서 발견하기 드문 사건이다. 부르주아 측에 서있던 에밀 졸라같은 작자도 이 시기를 묘사한 소설 패주를 썼는데, 시체가 마구 버려져 산더미처럼 쌓인 파리 시가지와 불에 탄 시체들의 냄새가 진동하는 것을 배경처럼 묘사할 정도였으니 그 끔찍함의 정도는 아마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18713월부터 10주 남짓 노동자시민을 비롯한 인민대중이 세운 최초의 정부였지만 이 코뮌정부는 실로 많은 정치적, 사회적 상념을 넘겨준다.

 

서울대 최갑수 교수의 이 책 해제(解題) 말미의 글처럼 2025년 지금 프랑스 내전을 다시금 펼쳐 읽는 이유는 인민대중에 대해 오만한 주인행세를 하며 이 땅에 기생충처럼 몸을 박아 넣고 이권으로서의 권력을 빨아대는 관료제적이고 엘리트주의적 족속들의 행태가 극단에 이르고 있는 까닭이다. 썩어빠지고 무책임하며, 무능력하기까지 한 1870년의 프랑스 권력집단들의 행태가 마치 2025년 오늘의 한국 사회로 옮겨온 듯 하기 때문이다.

 


1871년 피의 일주간을 내전이라 부르지만 사실 그것은 일방적인 살육전이었지, 쌍방의 전력이 동등한 총력전으로서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코뮌군은 방어전은 펼칠 수 있으나 공격전을 전개할 군사적 능력도 조직도 없는 시민저항군에 불과했으며, 더구나 코뮌의 국민방위대라 하지만 상당수가 배신하여 오히려 적군이 되어 시민 살육에 합세했기에 더욱 그렇다. 이러한 실상을 프로이센(독일)군에 대항하여 함께 했던 어제의 국민방위군 동료가 적으로 만나는 장면을 감상적으로 쓰고 있는 졸라의 상기 작품에서도 발견 할 수 있다. 사실 동료 시민의 잔혹한 살육의 역사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왜 이렇게 혹독한 사태가 일어나야 했는가와 코뮌이 후대에 남긴 역사적 교훈이 무엇인가에 대한 말을 하려는 것이기에 코뮌이 일어나게 되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배경에 대한 이해는 실로 중대할 것이다.

 

18707월에 개전된 프랑스와 프로이센(독일제국)의 전쟁발발에 대한 원인은 역사학자들마다 제각각이어서 단 하나의 중대 원인이 전쟁을 촉발했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제 2제정 황제 루이 보나파르트가 권력의 연장을 꾀하려다 실패한 전쟁이라는 마르크스의 판단에 동의하려 한다. 한 자연주의자의 소설이긴 하지만 패주또한 이 전쟁의 초기를 묘사하며, 권력 연장에 집착하며 서서히 고립되는 보나파르트와 독일을 향한 선제공격의 기회에도 불구하고 미적거리는 무력한 프랑스군을 묘사하고 있다.

 

물론 비스마르크가 판 함정에 프랑스가 걸려들었다는 시각이나, 룩셈부르크 지역 등에 대한 양국 간의 영역 다툼으로 인한 갈등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은 표면적이고 결과론적 판단일 뿐 모두의 이면에 도사린 궁극의 원인이 있었다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 즉 프랑스 내부에서의 권력 암투와 무모한 해외 식민지 쟁탈 전쟁으로 인한 이권을 두고 벌어지는 권력 상층부의 부패로 인한 분열의 심화다. 이로 말미암아 국내외로 고립된 보나파르트로서는 만회할 명분이 필요했고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는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얘기다. 마치 윤씨가 전쟁을 유발하려 했던 것과 같은 동기일 것으로 추측된다.

 

사실 전쟁 초기 프랑스군의 전력이 월등하게 압도적이었음에도 아군 전선 지휘관들의 상호 눈치 보기로 공격의 기회를 실기하기가 일쑤고, 그나마 전투에서는 먼저 도주하는 지휘관들이나 전략적 무능과 더불어 파리 제정 고위관료들과 황제의 주변 권력들의 중앙정부에서의 힘의 이동상황을 주시하는 지휘 장군들의 기회주의가 판치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권력 상층부를 점유하고 있던 소위 엘리트라는 소수 집단의 깊은 부패상을 엿볼 수 있다.

 

그 사회의 집단 내에 있으면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내겐 가장 중대한 것으로 보이는 것인데, 바로 인민대중의 인식수준이다. 졸라의 작품에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소위 교양을 가진 지식인 청년 모리스로 대변되는 당대 중산계층의 의식이다. 과거 제국의 영광에 사로잡혀있는 이 인물이 국민방위군으로 참전한 것은 애국주의의 발로다. 참전 초기부터 사고할 줄 아는 이 인물은 개인 화기는 물론 병참조차 제대로 이루어지 않으며, 전선에 이르러서는 군대를 이끌고 이리저리 도망만 다니는 이 무슨 해괴한 작전인가!” 라고 당혹스러워한다.

 

전쟁이 진행될수록 모리스는 민족적 퇴화라고까지 자신들의 무능과 부패성을 깨닫기 시작한다. 사회 대중의 전반적인 인식의 부패가 과거 제국의 환영에 도취한 프랑스인들의 정신에 깊숙하게 자리잡고 있었다는 자각일 것이다. 이 전쟁(일명 보불전쟁;普佛戰爭)은 애초에 승리 할 수 없는 전쟁이었으며, 항복 협상에 이르는 과정 또한 인민대중, 즉 국가의 이익과는 무관한 상부 계층들의 자리 보전이라는 권력 유지에 맞추어져 진행된다. 개전 두 달도 되지 않은 92일 보나파르트가 포로가 됨으로써, 제 2제정 몰락과 함께 95일 공화정이 선포된다. 그리고 들어선 자가 아돌프 띠에르라는 교활한 인물이 프랑스의 수장이 된다. 절대 항복하지 않겠다고 인민을 향해서는 떠들고 뒤에서는 독일과 항복 협상을 벌여 나라를 팔아먹는다.

 

1871128일 파리가 독일에 항복하자, 파리 시민의 대규모 시위가 잇따르기 시작했고, 민중의 정부에 대한 배신감은 극에 달했다. 2월 패전 끝에 파리에 집결해있던 국민방위군은 연맹을 결성하고, 임시중앙위원회를 결성, 새로운 혁명기구를 탄생시킨다. 사실 파리의 코뮌은 1871315일 이전인 18712월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 해야 하겠지만, 띠에르 정부가 파리에서 완전히 철수하여 오직 코뮌만이 파리의 치안과 정치경제 활동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기에 1871315일을 파리 코뮌의 단독 정부출발로 보는 것 같다. 띠에르는 코뮌에 유화적 제스처를 보이면서 뒤로는 비스마르크와 코뮌의 파괴 지원 협상을 하고 있었다는 것도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기득권을 누려왔던 권력집단이 하고 있는 짓거리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코뮌의 역사와 그 참살에 이르는 과정은 역사서들의 기술에 맡기기로 하고, 다시 인민대중의 보편적 인식 상태로 돌아가 살펴보는 것이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할 것 같다.

 

마지막까지 불의와 부패로 썩어 문드러진 소수 권력에 저항한 당시 파리 시민들이 공유하고 있던 이념을 이해하는 것은 오늘 우리네의 인식 교정에 적절할 것이다. 여기에는 아주 광범위한 이념적 스펙트럼이 공존하는데, 오늘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당대에 오늘과 같은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조차 성립되기 이전이고, 그들은 이러한 체제는 상상할 수도 없었으니 온전히 교차한다고 말 할 수는 없는 것이겠지만, 그들 또한 소위 애국주의(일종의 민족주의적 이해에 기반 한), 사회민주주의, 공산주의 등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애국주의의 믿음에 기반 한 다수의 시민들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이들이야말로 정치에 무관심한 지극히 평범한 생활인들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왜 코뮌을 지지하고 코뮌군이 되었을까?

 

이들은 가시적인 실상을 읽을 수 있을 뿐이기에, 독일에 항복, 적에 국토의 할양, 그리고 군주제의 부활을 꾀하는 띠에르 정부를 혐오스럽게 생각했다는 점에 있다. 그저 소박한 공화주의를 원했기 때문인데, 바로 이러한 정서적 신념이 바로 애국주의의 저류를 지탱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사실 마르크스는 바로 이러한 시민들의 대학살이 자행되던 시점에, 그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근간을 보았지만, 다른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파리 시민들의 의식에 폭넓게 자리한 정서적 공감은 자신들의 국가에 대한 애착이었다는 점이다.

 

국민과 국가를 배신하는, 국민의 의지를 배반하는 권력은 이 보수적 애국주의자들까지도 저항의 무기를 들게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자본가의 노동자 착취의 문제도 아니요, 공무원의 연봉 상한제, 무상 의무 교육의 확대, 영세 상인의 보호와 같은 제도 개혁의 문제라기보다는 권력 계급이 보인 계급적 속성에 대한 환멸과 그 권위의 청산에 대한 갈망이었으리라 이해된다. 작금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권력의 상층부로서 기득권을 누려왔던 검찰, 법원의 인력들을 비롯한 권력의 상층부 곳곳에 숨어있던 이러한 비루한 권력기생충들이 확연하게 추한 민낯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그 부패가 심화되고, 이것을 비추는 거울이 말끔할수록 그것들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그 거울을 깨부수려 못하는 짓이 없어진다.

 

항시 이것들은 누려오던 권력의 유지에 위협이 발생하면 그 민낯을 드러내고 거침없이 흉측함과 폭력성, 잔인성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파리 코뮌은 바로 이 모습을 후대에 전해주고 있다.  파리 코뮌은 시민들 자신에 의해 창출된 사회적 해방의 정치적 형태의 모습을 오늘의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들은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정치적 분투의 현장에서 살고 있다. 자신의 위치에서 한 걸음 벗어나 바라보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도 한다. 우리가 놓여있는 현재라는 역사의 위치를.

 

법치주의의 야바위꾼들에 우리들의 새로운 미래를 위한 운영권을 넘겨주어서는 안 될 일이지 않은가? 일제의 권위주의적 잔재를 그대로 물려받은 한국의 사법부와 검찰이라는 강고한 기득권력이 더 이상 국민의 삶을 자신들 마음대로 주물럭거리게 둘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이들이 지금까지 빨아먹은 모든 힘은 이제 국민들, 이 사회의 신체가 돌려받아야 할 중차대한 지점에 우리는 서있는 것이다. 기득권의 카르텔로 연결된 저것들에 대한 광범위한 수술은 불가피한 것이고, 우리들이 기필코 이루어야 할 개혁과제일 것이다. 대법관, 검찰총장과 같은 임명직 자리는 국민이 선출하는 선출직으로 전환되어야 하며, 하시라도 소환하여 해임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은 대법관 10인의 탄핵이다! 서둘러야 할 일이다. 저것들의 정의를 신뢰하는 것은 바보 짓이라는 것을 프랑스 내전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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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 수록,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문지 에크리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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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역사 속에서 호흡하고 있는 고통과 참담한 상처는 그저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통절하게, 그 이해를 지닐 수 있는 지극한 살핌의 능력을 일깨웠던 작품으로 나는 작별하지 않는다를 기억한다. 그건 아마도 시인의 물음처럼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라는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네의 삶에 와 닿은 고뇌어린 과제요, 각성의 문제일 것이다. 시인은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을 통해 이렇게 답하는 듯하다. 어떤 한 순간에는 (....).혼들과 함께, 단 한 순간 삶으로 건너 올 수 있지 않을까라고. 우리 둔감한 자들은 어렴 풋 이 글을 통해 그 순간들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일 게다.

 


그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작별하지 않는다이후, 작가 내면의 풍경에 보다 다가가고 싶었다. 이 작은 책이 그러한 욕심을 조금은 충족시켜주었을 것이다. 시인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 출간된 작품들을 집필하게 된 계기나 동기, 의도했던 글의 방향이나 그 여정에서 지녔던 감성과 생각들, 쓰기의 행위 자체로부터 파생되었던 사념들을 통해 시인과 작품의 숨결에 보다 더 다가가는 읽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북향 방, (고통에 대한 명상), 소리()등 몇 편의 시()들과, 산문 북향 정원정원 일기작별하지 않는다를 쓰는 과정에서 자신이 구해지는 부수적 결과였음을 말하듯, 시인의 글쓰기가 생명 쪽으로 가게 되었음의 증거들로 이해해도 될 것만 같다. 그럼에도 시인의 이 세계에 대한 인식은 햇빛 아래 고요히 마주 앉아 있을 때조차 비명 소리와 신음, 울부짖음 속에 있음을, 이 세상에서 하루 더 사는 자신(소리(),단성부에서)을 매 순간 잊지 않는다. 어쩌면 산문 출간 후에에서 말하는 생명의 힘으로 나아가는, 생명을 말하는것들에 대한 시인의 이후의 글쓰기는 작별 할 수 없는 고통의 목소리에서 연원하는 사랑에 대한 희망이라는 고된 작업일 것 같다.

 

그것은 소리()이성부의 마지막 연(), 살아있는 한 어쩔 수 없이 희망을 상상하는 일/ 그런 것을 희망이라고 불러도 된다면 희망은 있어의 산 자로서 가지는 희망에 대한 상상, 어쩌면 정원 일기속 벌레에 괴롭힘을 당하면서 기어이 일곱 송이 불두화를 피어내는 그 경이로움에 이르는 손길인지도 모르겠다. 하얗게 잎사귀를 마르게 하는 응애를 없애기 위해 잎사귀 하나하나의 뒷면에 약을 뿌리고, 닦아내는 손길, 그것이 곧 생명의 이야기이고, 희망이 아닐까?

 

열다섯 평 대지와 열 평의 집, 작은 마당(중정)이 있고, 옥잠과 불두화, 호스타, 소나무가 심겨져 있는 북향집, 그래서 빛을 주기 위해 햇빛을 반사하는 거울 여덟 개를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 맞추어 각도를 조절해주며, 함께 속도의 감각을 배우는 대지와 일체가 된 한 섬세한 존재를 보게 된다. 시인의 글쓰기와 닮았다. 죽음에 이를 때까지 계속 씀으로써 빛을 느끼는 작가의 행위가 곧 독자와 이 세계의 그늘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일체가 되어 수시로 반사해 사각의 빛을 쬐어주는 그것일 것이다.

 

산문 북향 정원, 97쪽에서

 

그것이 곧 생명의 얘기이지 않겠는가? 완전히 죽은 줄 알았던 둥글레에서 싹이 트는 것을 바라보며 꼭 죽은 것처럼 보여도 뿌리가 살아 있으면 되살아날 수 있음을 알게 되듯, 네 평짜리 정원이지만 들어 올만한 곳이라고 새들이 생각했음에 으쓱해지는 시인의 기분처럼, 20213월의 어느 날에서 20235월에 이르는 정원일기는 외부, 하늘로 열려있는 시인의 내향적 집에 온전히 흐르는 평화의 기분을 공유케 된다. 처음에 들어선 순간 시인이 사랑에 빠진 집의 온화함, 그 태곳적 안전함과 고요는 시인이 말하는 북향의 사람’, 바로 그만이 아는 변하지 않는 빛, 심장에서 심장으로 이어지는 금()”, 바로 그것 일 것이다.

 

시인의 소품 집이라 표현할 이 빛 같은 책자는 햇빛이 잎사귀들을 통과할 때 생겨나는 투명한 연둣빛, 거의 근원적이라 느껴지는 기쁨의 감각을 우리들에게 선사한다. 시인은 남쪽으로 비치는 햇빛을 거울이 되어 우리네에게 반사시켜준다. 그늘에서도 잘 자라도록, 생명의 힘을 넘겨준다. 절망의 바닥에 눕는 새는 죽은 새뿐임을 아는(, (고통에 대한 명상))시인은 그래서 북향 창 블라인드를 오히려 내리고 어둠 속에서 꼿꼿이 기다린다.(”, 북향 방)이제 독자인 나는 생명의 힘으로 나아가는, 생명을 말하는 작품을 기다리게 되었다. 고통을 함께 앓을 수 있게 된 많은 독자들 또한 시인이 온 정성을 다해 시시각각 빛의 각도를 조절함으로써 쬐어주는 거울, 그 거울의 글을 기다릴 수 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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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에 대하여
라헬 베스팔로프 지음, 이세진 옮김 / 미행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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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고뇌하며 산다, 진정한 평등은 이것 말고 다른 근간이 없다.”

- 76, 프리아모스와 아킬레우스의 만찬에서

 

라헬 베스팔로프’(1895~1949)는 자유와 윤리의 사유를 치열하게 고뇌했던, 잊혀진 사상가이며 비평가이자 문필가다. ‘지성과 영혼자체라 일컬어졌던 인물이 어떻게 50년 이상 도서관 아카이브에 잠들어, 사장되어 있어야 했는지 참으로 인간 세계의 아이러니는 차고 넘치는 듯하다. 그녀가 비평 활동을 하던 2차 세계대전 전후의 시기를 대표하는 여성 사상가로서 잘 알려진 한나 아렌트와 시몬 베유와 대비하면 말이다.

 

Rachel Bespaloff, 1895~1949

 

프랑스어로 글을 쓴 유대계 사상가와 문필가들의 글을 수집하던 텔아비브대학 교수 모니크 쥐트랭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아주 단순한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수년 전에 시몬 베유가 쓴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와 동시대에 동일한 대상을 주제로 발표된 글이라는 점이었고, 베스팔로프는 이 동일한 텍스트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그러나 이내 이러한 호기심을 훌쩍 뛰어넘는 독창적인 깊이와 또 다른 윤리적 통찰을 보게 됨으로써 한 지성의 지난한 통회(痛悔)의 응시에 잠겨들었다.

 

아름다움과 힘에 관해서는 충분하다가 절대로 충분치 않다는 것을 알기에 과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그리스의 지혜다. 절대 선인도 절대 악인도 없다. 힘 자체는 죄과(罪科)의 결정에서 벗어나 있다.” - 6쪽에서

 

베스팔로프 또한 일리아스서사의 궁극을 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시몬 베유와 같이한다. 그러나 시몬 베유가 말하는 은 힘 자체라기보다는 힘의 불순한 행사, 힘의 비윤리적 행사에 기초하지만, 베르팔로프는 힘 자체, 그 무엇으로부터도 비난당하지 않는 절대적이고 본질적 운동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뚜렷하게 구별된다. 시몬 베유가 일리아스에서 발견한 힘은  사람을 종속시키고, 그 앞에 서면 움츠러드는 힘"이지만, 베스팔로프는 삶의 궁극적 현실이고, 궁극적 환상인 존재들의 심원한 본성이다. 그래서 시몬 베유가 말하는 아킬레우스의 야만적 힘에 대한 저주 섞인 비난의 말은 여기서 자리를 잃고 만다. 헥토르의 지키려는 힘이나 다 부숴버리고 자신마저 부수는 아킬레우스의 힘은 모두 아름다운 것이 된다. 고대 음유시인 호메로스에게는 지키는 것과 파괴하는 것은 하나로 구성된 세계 일 뿐이며, 그들의 불행한 행위로 인해 생이라는 평등함, 경험을 통해 생성된 본질, 존재로의 생성의 소산을 보게 한다.

 

베스팔로프는 여기서 인간이 처한 세계의 현실을 마주보게 한다. 해결도 구원도 없는 우주적 공포의 토대가 되는 악몽같은 세계.제 힘을 마음껏 뽐내기 위해 원한을 돌보며 위대함을 향한 의지를 마구 휘두르는 아킬레우스인가, 아니면 백성, 아버지, 어머니, 형제들과 아내를 지키기 위해 행복을 향한 의지에 나서는 헥토르인가는 사실 무용한 물음이 되고 만다. 생 자체를 바쳐서라도 지켜낼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인가고 묻고는, 헥토르의 용기가 아킬레우스의 영웅심 앞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답하는 것은 괜한 생각이 된다. 하지만 인류사의 문제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행복의 의지라는 수호자의 도약은 거칠고 억센 공격자의 쉴 새 없는 힘의 의지, 위대함을 향한 의지에 패배하기 일쑤라는 것이다. 나치의 공포에 좌절했던 유대인 베스팔로프는 어느 한 편을 편드는 것이 아니라, 펼쳐진 인간 세계의 실체를 그대로 들여다보고 바로 그 실재의 양상으로부터 인간의 윤리와 종교를 이해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베스팔로프는 호메로스가 전사들의 아름다움을 기림에도 불구하고 그 인물들을 결코 이상화하거나 양식화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생성 그 파괴적 창조의 원천으로써, 혹은 이 원죄적 실체를 통해서 윤리의 원천을 발굴하는 것이다. 헥토르와 아킬레우스의 대결에 이르는 가히 공포의 전율이 지속되는 장면이 있다. 아킬레우스는 그날 자신에게서 달아나는 헥토르를 따라 잡지 못했고.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의 추적을 벗어나지 못했다.”, 약탈자의 추적과 피해자의 도주가 영원히 계속되는 악몽에 이어, 아레스는 공평하시니 죽이는 자들을 죽이신다.”는 말이 맴돈다.

 

베스팔로프는 이러한 힘의 공격적 행사가 없는 세계는 평화의 권태로  마비될 것이라 말하지만, 아마 이것은 겉보기일 것이다. 힘의 아름다움은 생기를 불어넣고 고양하지만, 동시에 불길하고 두려운 것이다. 결국 인생의 부침이란 정복하고 파괴하지만 풀어주고 해방하는 심오한 필연적 숙명이라는 것일 게다. 베스팔로프의 일리아스에 대한 해독은 헥토르, 테티스와 아킬레우스, 헬레네....프리아모스와 아킬레레우스의 만찬과 같이 인물 개인에 대한 성찰을 중심으로 하듯 그녀는 개인의 의지에 중심을 둔 영원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물론 트로이에서 모스크바까지신들의 희극, 두 글이 있지만, ‘힘의 숙명을 말하기 위해 비교 작품으로써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의 공통점과 차이를 부각하여 호메로스의 정신을 선명하게 말하거나 신이라는 한 존재자의 부재를 설명하기 위함이다.

 


테티스와 아킬레우스에서는 우주의 힘과 인간의 정념에 동시에 연결하는 이중의 유대를 지닌 아킬레우스의 어머니, 테티스가 우화와 실존에 맞닿게 하는 존재임을 알려준다. 한편 헬레네는 완벽한 미모가 어떻게 완벽한 불행의 의미가 되는 지, 흰 베일을 두르고 통렬한 고뇌에 싸인 노예보다 자유롭지 못한 신세의 여인이어야 하는지를 읽게 된다. 아름다움이 죽음과 기묘하게 들러붙는 그 필연, 아름다움이 닿은 것은 전부 시커멓게 타버리거나 돌처럼 굳어졌다.”, 아름다움에는 힘의 아름다움과 같이 필요악이 있음이다. 호메로스가 아름다움에 힘의 준엄성을 부여하고 숙명의 부류에 넣었다고 해독한다. 아름다움은 마치 힘이 그렇듯 정복하고 파괴한다. 헬레나의 아름다움이 숙명 앞에 서 생성의 막연한 죄의식에 휩쓸리는 것은 그렇기에 불가피한 것이 된다.

 

어쩌면 베스팔로프가 일리아스에서 읽어낸 정말의 사유는 신들의 희극이라는 글일지도 모르겠다. 전쟁과 평화의 사교계 파티 장면처럼, 신들이 모여 전쟁터가 된 도시 트로이아를 내려다보며 그 어떤 진지함도 없이 웃고 떠드는 것이, 마치 모든 것의 원인이면서도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은 전쟁과 평화속 귀족들이 보여주는 이 세계의 희극성과 같은 것이라는 말일 게다. 진지함의 부재는 호메로스나 톨스토이에게 인간 이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책임은 모순의 승리를 승인하는 신들의 웃음 속에 흩어지고 만다고.

 

아마 호메로스의 탁월한 장치였을 것이다. 제우스를 비롯한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 이들 신들은  선동분자이고 영리한 선전가이며, 살육의 냄새와 비극적 정념들이 부딪치는 소리를 싫어하지 않는.  그들은 안전하기에 전쟁이 없으면 심심해 죽을 지경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베스팔로프는 관조 하는자 제우스를, 다만 정신적 외관으로서 나타내긴 하지만 결코 구현하지 않는 현실의 상징임을 읽어낸다. 역사를 힘의 비극들, 집단적 정념의 연극이 벌어지는 장소로 본다고,  멀리서 벌어지는 일을 높은 곳에서 담담하게 내려다보는 시선만으로도 전쟁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우주적 차원으로 되돌려 놓는 동시에 인간의 실존에 형이상학적 기능을 부여하고 있다고 말이다. 즉 호메로스가 고양하고 신성화했던 것은 힘의 승리가 아니라 불행에 처한 인간의 에너지, 희생당한 영웅의 영광, 후대에 전해질 시인의 노래임을 통해 숙명에 패하지만 여전히 숙명에 도전하고 뛰어넘으려는 존재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존재의 소멸에 임박한 순간 가장 자기 자신답다.” -65쪽에서

 

아마 인간은 극단적 위협에 처했을 때 비로소 자기 세계의 중심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는 존재인 모양이다. 때문에 죽음으로 가득한 서사시는 끊임없이 개조되는 생성으로서의 존재, 세상을 변모시킬 진실, 새로운 현실을 수립하겠다는 원동력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제한된 시각의 오류들을 발견하고, 그 널브러진 잔해 속에서 구해낸 시험 재료들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넘어서게 된다. 사실 시몬 베유의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는 그녀의 사후인 1945년 출간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책의 번역자는 1939년이라 쓰고 있다. 베스팔로프의  『일리아스에 대하여1943년 출간 발표되었다. 장 그르니에를 통해 베스팔로프는 1941년 시몬 베유가 일리아스를 읽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고 하지만, 발표되지 않은 책을 베스팔로프가 읽었으리라는 억측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읽는 이의 관점은 천차만별이겠지만, 베스팔로프의 글은 철학적 이해와 깊이에서 시몬 베유의 그것을 몇 차원 능가한다고 말하고 싶다.

 

철학자 장 발의 서문이나 모니크 쥐스랭의 짧은 베스팔로프에 대한 전기와 그녀의 미출간 원고- 하이데거, 샤르트르, 카프카, 카뮈 등의 비평문 등 - 에 대한 소개와 비평의 글, 베스팔로프가 남긴 또 하나의 사유인 비극의 정신에 대한 성찰은 자유가 명확해지는 시련과 자유가 휘청거리는 함정을 동시에 제공함을 통찰한 실존주의자로서의 인간조건에 대한 절창의 글도 수록되어있다. 나는 신이 죽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죽은 것은 내가 신에 대해 품었던 이미지다. 다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신의 몫이다.”, 이 문장에서 베스팔로프의 쇼아에 대한 무기력과 신의 침묵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처절한 고뇌를 우리는 읽게 된다. 비극을 무시하고 생명을 축복할 수 있는가라는 이 윤리적 물음에 우리는 답할 수 있을까? 최후의 선택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가스실에서, 인간이 자신의 파괴를 넘어서까지 과연 자기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궁극적 방편을 찾아낼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다.

 

일리아스에 대한 6편의 글과 이 글들의 총체적 윤리적 사유인 한 편, 그리고 두 철학자의 각기 한 편씩의 글로 구성된 힘의 이원성이 투쟁하는 인간 세계의 진실을 엿보는 탁월한 저술이다. 또한 한 편의 대()古典 작품에 대한 절대적 침묵의 장면에서조차 힘의 사태를, 인류의 오래된 힘과 협잡사이의 협약까지 읽어내는 가히 독보적인 문학비평이기도 하며, 실존주의의 비판적 수용자로서의 심원한 윤리적, 종교적 사유를 읽을 수도 있다. 불행에 처한 인간의 에너지, 후대에 전해질 시인의 노래로써 숙명에 도전하는 인간의 의지와 그것의 영원성을 생각게 하는 호메로스(일리아스)를 이 책을 참고 삼아 읽어보는 것도 썩 괜찮은 취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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