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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말제르브에게 보내는 편지 외 ㅣ 루소전집 4
장 자크 루소 지음, 진인혜 옮김 / 책세상 / 2013년 1월
평점 :
로베르트 발저는 단편 「노동자」에 이렇게 쓰고 있다. “아무도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아무도 그를 알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좋았고 기뻤다.”고. 발저는 실제로 이렇게 살았다. 그를 아는 작가들 모두 한결같이 세상의 명예와 권력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이라고, 또한 결코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기억되지 않고 잊히기를 진심으로 바랐던 인물로 증언되고 있다. 장 자크 루소의 책에 대한 감상이 아니라 발저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산책자의 몽상’을 읽게 된 기원을 밝히는 것이 이후 감상글의 변명이 될 수 있는 까닭이다.
나는 발저의 산문들을 읽고 거슬러 횔덜린을 읽었다. 그리고는 다시 시간을 거슬러 루소의 몽상에 이르렀는데, 그것은 삶의 무수한 형태들이 자극하는 고통으로부터의 해방, 사람들로부터 벗어난 즐거움, 온전히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감미로운 도취와 함께 존재 그 자체만을 향유하는 평온의 드라마에 대한 계보를 따라 올라가 본 것이다. 물론 이 여정을 이렇게 단선적으로 직진한 것은 아니지만, 결국 이 흐름이 약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진정한 즐거움일랑 찾지 말자. 이 땅에는 그런 것이 없으니까.”
- 장 자크 루소, 「몽상의 초안」 17절에서, 197쪽
시인 횔덜린은 임종 무렵 쓴 시에서 ‘거주하는 삶이 인간의 길’이라고 말한다. 삶의 토대인 세계를 점령 소유하려는 인간의 무한한 욕망이 삶을 고통에 빠지게 하고, 그것이 악의 근원이라고 비판했다. 때문에 그는 미친 척이라도 해서 이 세계로부터 벗어나야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망할 때까지 36년간을 네카 강변 목수의 집 옥탑 방에 은둔한 광인으로 지낸 하나의 이유였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이때의 횔덜린의 일과를 엿볼 수 있는 집주인 목수 치머의 편지가 있다.

【횔덜린이 36년간 머물렀던 네카 강변의 목수 치머의 탑이 있는 집,
출처: 『횔덜린의 광기』 2025.7 현대문학 刊, 26쪽 사진】
“그는 이제 60세쯤 되었지만 여전히 건강하고 평화롭고 만족스럽게
살고 있습니다. 아주 가끔 불만을 드러내는데, 그 또한 그의 상상 속에서 학자들과 논쟁을 벌일 때 뿐입니다.”
- 1829.7.18. 치머가 횔덜린의 후견인 하인리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횔덜린의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오직 이 세계에 대해 아는 체 하는 지식인들이었다. 그네들의 권력과 평판과 명예를 향한 집요한 욕구들이 발하는 부질없고 의미 없는 헛소리들이 삶의 온전한 평온을 파괴하는 것이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목수 치머에게는 횔덜린의 고독한 삶이 “‘철학적 평화’속에서 살만큼 운 좋은” 것으로 비추어졌던 모양이다. 어쩌면 그렇게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지만, 그것은 세계의 고통에서 멀리하기 위한 불가피한 최후의 방편이었으니, 결코 행운이라 할 것은 아닐 것이다.

【출처: 『세상의 끝』, 2018.3 문학판 刊, 1966.12.25. 눈길 위에서 殞命한 발저】
삶은 이 세계를 잠시 거쳐 가는 여정이라는 횔덜린의 이해는 발저에게 현실적 삶의 전체를 이룬다. 발저는 고정된 직업도 거주지도 없는 유목민의 삶을 살았다. 실업자를 위한 필경사 사무실의 필경사로 일하기도 하며 평생을 일자리를 구하는데 소모했으며, 말년 28년을 스스로 걸어 들어간 정신병원 요양소에서 산책하며 살다가 그가 꿈꾸던 하얀 눈 길 위에서 세계를 모두 품은 세상의 끝에 감싸여 운명했다. 이제 묻는다. 루소는 「세 번째 산책」의 글에서 “죽어야 하는 순간에 어떻게 살았어야 했는지를 배우는 것이 과연 시기적절할까?”라며 늙어가는 자가 너무 늦게 운명의 지혜를 얻은 것이 무슨 소용인가라며 자문한다. 그리고는 자조석인 목소리로 “늙은이의 공부는, 아직도 해야 할 공부가 남아 있다면, 오직 죽는 법을 배우는 것뿐”이라고.
진실성의 추구란 무엇인지, 세계의 소음으로부터 떨어진 은신처에서의 고독과 몽상을 통한 지극한 행복의 발견, 선함의 동기에 대한 윤리적 성찰, 자애심과 이기심 등의 명상이 책의 주요한 내용을 이루고 있지만, 내가 이 책을 찾은 이유는 冒頭의 기원처럼, 늙어가는 자가 그 순간에도 해야 할 공부로써 고독과 몽상에 가닿아 있었기에, 생피에르 섬 호숫가 은신처에 앉아 “과거를 회상하거나 미래를 기웃거릴 필요도 없이 전(全) 존재를 집중할 수 있는 상태, 영혼에게 시간이라는 것이 아무 의미도 없는 상태”에 젖어든 채 지고의 행복을 느끼는 순간들의 문장을 추적하는 읽기가 중심이 되었다.
물론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이하 ‘산책’이라 표기함)』의 글들인 열 번의 산책은 예순 살이 넘어 쓴 루소의 생애 말년의 글들이지만, 늙어가는 자만의 고유한 특수한 지혜라고 협소하게 이해할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생에 숨겨진, 아마도 보편성의 진실이라 할 수 있기에 인간들과 인간구성사회가 지닌 여실(如實)한 속성들을 이해하고, 그로부터 자기 삶, 즉 나의 삶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는 지혜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산책’은 프랑스 사회 기득권의 저변을 이루는 사제들과 이에 기반을 둔 정치권력의 음해와 박해로 인한 세상에 대한 환멸이 집필 동기라 할 수 있다.
젊은 시절 아비로서의 책임을 회피하고 자신의 아이를 고아원에 맡긴 것과 같은 그의 사생활의 설명되지 않은 지점들을 찾아 한 천재의 업적을 모두 부인하고, 나아가 인간 자체를 매도하는 상황은 그를 처참한 고통에 빠뜨렸다. 더구나 집에 돌을 던지고 폭력을 행사하도록 마을 주민들을 부추기기까지 한 1765년 몽믈랭 목사가 주제한 루소를 겨냥한 음모사건은 이후 세상에 대한 혐오와 분노의 감정을 더욱 짙게 만들었을 것이다. 횔덜린이나 발저의 유폐와 다름없는 생활의 기저(基底)가 이 세상에서 타인이나 자신을 위해 더 이상 유익하고 좋은 일을 할 수 없다는 강한 믿음을 내면화한 불행한 사람들의 자발적 격리라면, 루소는 반(半)만큼의 타의에 의한 수동적 격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상태에서 모든 인간적 행복에 대한 보상으로써 관조와 몽상의 자유를 발견한 지점에서는 동일한 깨달음이 있다.
흥분과 열정의 짧은 순간들의 강렬함은 아주 빨리 지나가 버렸음을 느낀다.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보면 그 순간들은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점에 불과할 뿐 아니라 너무도 드물고 빨리 지나가버리므로 하나의 온전한 상태를 구성할 수조차 없다. 때문에 삶의 행복이란 것은 이러한 덧없는 강렬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 영구적인 어떤 평온의 상태가 지속되어 증가하는 지고의 안락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루소는 “지속적으로 마음을 둔 견고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이 세상에 지속적 행복이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만, 언제까지나 지속되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한 순간, 그 몽상의 순간이 삶을 지탱하는 동력이 되어주는 것이라고.
「여섯 번째 산책」에는 많은 후세의 철학, 문학가들이 즐겨 인용하듯 잘 알려진 절름발이 소년의 동냥 이야기가 있다. 루소가 익숙하게 다니던 길에는 다리를 저는 어린 소년이 있었으며, 루소는 그와의 소박한 대화를 즐기며 소년에게 동냥을 주곤 했다. 마음에서 우러난 그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점차 이것이 습관이 되자 의무로 변질되고 그 의무가 불현 듯 부담스러워져 마침내 장애물로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늘 다니던 그 길을 우회하여 걷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선한 동기가 결국 그가 함정에 빠지는 미끼가 되었음을 자각한 것인데, 대부분의 행동에서 최초의 참된 동기는 상상하는 것만큼 그렇게 명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행 뒤에 이어지는 의무의 사슬이 선행에 대해 중압감으로 작용하고, 참을 수 없는 거북함이 되면 곧 세상의 비난거리로, 음해의 재료로 이용되곤 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성향마저도 해로워지게 하곤 한다.
그런데 루소가 내리는 결론은 내가 생각하는 도덕과 매우 다르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선을 행하려면 아무 구속 없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이 의무로 변하면 선행의 달콤함이 달아나버린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도덕적 선이 개인의 즐거움과 취향에 터전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도덕이란 하기 싫을지라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에 하는 것이지 않은가? 즉 도덕적 선의 행함은 의무에 기초하는 것일 텐데, 루소는 이를 개인의 덕성에 기초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산책’ 속 루소의 많은 명상의 글들에는 지나치게 ‘자애심(자존심; amour de soi)’이라는 감정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이 자애심이야말로 “모든 동물이 자신을 보존하고자 애쓰도록 만드는 자연적 감정으로, 이것이 이성의 인도를 받고 동정심에 의해 변모되어 인간미와 덕을 낳는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을 정당화한다. 그리고는 이의 대척개념으로 ‘이기심(amour-propre)’을 상대적이고 인위적 감정으로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중시하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서로에게 저지르는 모든 악행의 근인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 두 개념어의 경계를 칼같이 절단할 수가 없다. 둘 모두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인데, 이를 마치 명확하게 분리할 수 있는 감정처럼 말하는 것은 한낱 자의적 정의처럼 느껴진다. 그가 말하는 도덕의 토대가 의무라기보다는 순전히 개인의 양심이나 덕성과 같은 감정에 기초하기에 자기 합리화를 위한 다분히 위선적 언어로 여겨진 것이다.
이에 따라 “내 의무와 마음이 대립하면 의무가 승리하는 일은 드물었다.(89쪽)”며, “명령하는 것이 사람이든 의무든 필연이든, 마음이 침묵하면 의지가 귀머거리가 되어 나는 복종할 수가 없다. (...) 즐거운 마음으로 하지 않는 일은 이내 할 수 없게 된다.”고 말한다. 루소의 도덕은 다분히 개인의 성향에 따른 자의성으로 채워진 불완전한 도덕이다. 자기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은 도덕이 아니라는 얘기니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도 않을 것이고, 즐거움이 없는 것도 역시 제아무리 선행일지언정 결코 하지 않을 것이 된다. 이것은 그의 자유에 대한 개념에까지 이어지는 데, “자유란 (...) 원하지 않는 것을 절대로 하지 않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자기 싫으면 절대 하지 않으려는 것은 아집이요, 독단이지 않은가? 사실 이러한 극히 주관적 진술들이 마치 진실의 목소리인 양 기술되는 내용들이 이 책에는 즐비하다. 거짓말에 대한 불완전한 정의들을 계속하며 진실성의 정의에 이른 「네 번째 산책」의 글도 이러한 주관적 편향의 증거가 될 것이다.

사실 루소에 이른, 세계의 총체성을 오롯이 포용하고자 하는 불가능에 매달렸던, 세계의 불모성과 그의 교정 불가능성이란 체념에서 비롯된 유목민처럼, 거주하는 자의 삶을 살았던 발저와 횔덜린의 생의 각성의 계보로서 루소를 찾은 것은 어쩌면 실수였는지도 모르겠다. 루소는 자신이 그토록 그리워하는 생의 온전한 즐거움인 존재로 가득 채워진 무위(無爲)의 행복을 선사하는 몽상의 환경을 벗어나 사람들, 특히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도처에 있는 파리를 말년의 터전으로 삼은 것도 모순으로 보인다. 그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원한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세계에 대한 적개심을 보이면서도 그 한가운데서의 삶을 고집하면서 그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기를 바라는 심각한 이중성은 그가 실은 기득권의 세계에서 수동적으로 격리된, 즉 추방되었기에, 다시 그 세계로 진입하기를 소망했음의 반증일 것이다.
때문에 발저와 횔덜린의 세계의 끝에 이르려는 자발적 고독과 루소의 고독은 현저하게 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루소의 몽상은 향수어린, 과거의 행복에 대한 추억의 몽상이다. 그에게는 진정한 존재적 체감의 지향, 불가능성의 끝에 이르기 위한 우주자연과와의 합일을 향한 고독, 생에 대한 지고한 체득이 아닌 것이다.
루소는 여전히 육체를 정신에 종속된 한낱 껍데기로의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도처의 글에서 읽을 수 있다. 늙어가는 자의 깨달음 혹은 지혜란 몸의 시간성 자체, 그 실존성을 체감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에게는 그러한 이해가 없다. 그는 고독과 몽상을 말했을지언정 실존이 무엇인지, 고독이 무엇인지 영원히 모른 채 죽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마지막 열 번째 산책인 바랑 부인에 대한 사랑의 추억의 기술을 마치지 못하고 죽은 것을 보면 말이다.
더구나 “고백하건대, 내 얼굴이 알려지지 않는 한 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 여전히 즐겁다(「아홉 번째 산책」,141쪽).”고 쓰듯, 루소에게 고독과 몽상은 단지 삶의 주변부로 밀려남이 주는 고통을 잠시 유예해주는 도취의 순간일 뿐이었다. 물론 그의 진실에 대한 정의의 한 문장처럼 ‘산책’의 글들은 “사실에 인위적 장식을 덧붙이거나”,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진실함을 잃지 않는다. 그러나 발저의 고독한 산책과 거의 대척에 있는 점에서 내가 의도한 계보(系譜)적 읽기의 실패 사례로 남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는 고독한 자가 될 수 없는 사람이었음을 발견했을 뿐이다. 아마도 브렌타노나 클라이스트 혹은 멜빌로 발길을 돌려야 할 것 같다.
어쩌면 「나의 초상」이라는 산문 24절의 문장이야말로 그가 말하는 고독의 성격에 대한 진실한 고백일지도 모르겠다. 그 문장으로 감상을 맺어야겠다. “나는 그저 아프고 게으르기 때문에 고독한 것이니까, 만일 건강하고 활동적이라면 나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행동하리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나의 초상」-24, 159쪽)” 그는 선인(善人)에게 있어 홀로 자신과 사는 것은 천국이라고 말하며, 자기 자신의 의식보다 더 유쾌한 장관(壯觀)은 없다고 설레발치지만, 그에게 선이란 곧 그의 취향이므로 우리는 그의 글에서 사실 아무것도 받아들일 것이 없어진다. 스스로 만족 할 수밖에 없기에 고독으로 내몰린 사람의 삶을 견뎌내기 위한 하나의 방책으로서 루소의 명상 또는 몽상은 의미를 지닐 수도 있을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