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
샤를로테 링크 지음, 강명순 옮김 / 밝은세상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샤를로테 링크의 소설 『수사』는 추리소설이면서 심리소설이기도 하다. 등장인물이 꽤 많은데도 캐릭터의 개성이 뚜렷하게 잘 표현되어 있다.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기 좋다. 심리는 얼굴 표정이나 동작 등을 '표현'하기보다는 '묘사'하는 것이 더 실감난다. 독자가 이해하기도 쉽다.

이 소설을 읽을수록 샤를포테 링크의 심리 묘사는 탁월해 보인다. 아마 작가를 추리소설의 대가로 불리우게 하는 이유일지 모르겠다. 여성이어서 섬세한 문체가 작용했을지 모르지만 상황을 표현하는 능력도 돋보인다.

덕분에 소설을 읽어가면서 논리가 없이 막연히 느낌으로 범인을 추적하는 독자에게는 낭패가 될 듯도하다.

그래도 글의 구성 능력이나 전개 능력이 뛰어나 독자가 조금만 관심 있게 추적하면 범인의 단서를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범죄 추리소설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책이 두꺼워 시간이 좀 걸릴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하룻밤에도 충분히 읽을 수 있도록 잘 읽힌다.





샤를로테 링크의 소설은 독일 내에서만 3천만 부가 판매되었고, 전 세계 30여 개국에 번역 출간되고 있다.

『수사』는 2018년 슈피겔 지 집계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며 독자들로부터 널리 사랑받았다.

샤를로테 링크의 소설은 인간심리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로 작중인물들의 감정변화를 섬세하게 포착해내는 한편 다양하고 개성 있는 캐릭터들을 통해 현대사회의 이면에 감추어진 허위와 모순을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다.

짜임새 있는 구성, 세밀한 심리묘사, 팽팽한 긴장감이 살아있는 흡인력 있는 내용 전개는 샤를로테 링크 소설 특유의 장점이다. 거의 모든 작품이 드라마로 제작되었고, ‘스릴러의 여왕’이라고 불릴 만큼 현재 독일에서 가장 많은 독자들을 보유한 작가이다.

작가로 활동한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일찍이 10대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고, 심리스릴러, 사회소설, 역사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발표했다.





강명순 옮긴이의 작품해설에 따르면 샤를로테 링크의 범죄소설은 사건과 수사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작중인물들의 감정과 심리변화를 세밀하게 추적하는 가운데 흥미로운 추론과 분석, 허위와 진실의 대비를 통해 다양한 사회문제와 인간관계에 대해 깊이 있게 탐구한다.

샤를로테 링크의 범죄소설에 등장하는 수사관들은 뛰어난 두뇌를 바탕으로 날카로운 추리를 뽐내거나 뛰어난 액션으로 범죄자들을 혼쭐내는 민완형사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하고 허점 많은 인물, 지질하고 속물적인 갈등에 매몰되어 있는 인물, 고뇌에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들이고, 그들이 범죄 해결을 위해 분투해가는 과정을 보는 재미가 각별하다.

샤를로테 링크는 인간의 내면을 형성하는 심리를 다양한 형태로 보여준다. 사람이 살다보면 뜻하지 않은 실수를 저지르거나 이기심과 욕망에 사로잡혀 범죄의 유혹에 휩쓸리기도 한다. 살아가는 동안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상처와 실패가 축적되고, 저마다 겪은 체험에 따라 삶을 대하는 시각과 태도가 다양하게 표출되기 마련이다.

샤를로테 링크의 소설에 등장하는 범죄자들은 대부분 힘겨운 삶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들, 주어진 생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애쓰지만 번번이 좌절을 겪는 사람들, 거듭되는 실패로부터 탈출하길 바라지만 결국 현실의 장벽을 넘지 못하고 주저앉는 사람들, 선을 추구하며 살아왔지만 한순간 잘못된 판단으로 범죄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사람들이다.





샤를로테 링크의 범죄소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벌어질 수 있는 사건들을 토대로 하고 있고, 범인이 누구인지보다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 배경과 원인, 인간의 내면을 채우고 있는 욕망과 집착, 불안과 공포 등 다양한 심리적 요소들이 지난날 어떤 경험을 통해 내재화되었는지 치밀하게 추적하고 분석하는 방식을 통해 각각의 인물에 대한 입체적인 이해를 가능하게 해준다. 작중인물들의 어떤 경험이 고통과 상처로 각인되고, 분노와 증오심을 키운 원인이 되었는지 지켜보는 재미도 흥미롭다.

샤를로테 링크의 소설을 읽다보면 공감능력과 균형 감각, 이해심과 배려, 용서와 화해가 인간관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절실히 느낄 수 있다. 오해와 편견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가하고, 헤어나기 힘든 고통과 절망을 안기는지도 생생하게 보여준다.





샤를로테 링크는 독일 작가이지만 주로 영국을 무대로 하는 작품을 많이 쓰는데, 『수사』 역시 영국의 스카보로가 주요 배경이다.

스카보로에서 열네 살짜리 소녀들이 실종되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한다. 헐에 사는 할머니 집에 갔다가 스카보로의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기차를 놓친 이후 종적이 묘연해진 한나 캐스웰 실종사건을 시작으로 고원지대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사스키아 모리스 사건, 엄마와 마트에 갔다가 주차장에 세워진 차에서 기다리던 중 돌연 사라진 아멜리 골즈비 사건은 스카보로 지역사회를 큰 혼란과 공포에 빠뜨린다. 엄마가 잠시 장을 보러 간 사이 주차장에 세워둔 차 안에서 기다리다 사라진 아멜리 골즈비 사건은 가출일까, 누군가에게 납치된 걸까? 고원지대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사스키아 모리스 사건과 아멜리 골즈비 사건은 별개의 사건일까, 동일범이 저지른 연쇄납치사건일까?

4년 전 최초로 발생한 한나 캐스웰 사건과 두 사건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연쇄실종사건의 공통점은 범인이 열네 살짜리 아이만을 노린다는 것이다.





스카보로경찰서 강력반의 케일럽 헤일 반장이 동료 형사들과 수사에 나서지만 사건은 미궁에 빠지고 언론에서는 연쇄납치범에게 ‘고원지대 살인마’라는 말을 붙여주면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한편 변변한 단서를 찾아내지 못하는 경찰 수사를 압박한다. 개인적인 이유로 고향인 스카보로에 내려와 있던 런던경찰국 소속 형사 케이트 린빌이 비공식적인 단독수사에 착수한다. 케일럽 헤일 반장과 케이트 린빌은 샤를로테 링크의 전작 『속임수』에도 등장했던 형사 콤비이다.

원칙적으로 하자면 관할이 아니라서 수사에 개입할 권한이 없는 케이트 린빌은 공식적인 수사팀과 다른 시각과 방향에서 수사를 펼친다. 공식적인 수사 책임자 케일럽 헤일과 비공식적으로 수사를 진행하는 케이트 린빌은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견제하면서 사건 해결을 위해 매진한다.

수사선상에 오른 용의자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는 재미도 각별하다. 천차만별의 경험과 이력을 가진 인물들이 다양한 에피소드와 풍성한 이야기를 제공한다. 대부분 지나치게 이기적이고, 속물근성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지질한 인물들이다.

『수사』에서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심리기제는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과 집착이다. 누구나 사랑을 한다고 믿는다.

스토커도, 사이코패스도, 정신질환자도 나름 사랑을 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욕망과 집착은 사랑의 변이인가?

『수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심리구조에서 각자의 욕망과 집착이 어떻게 발현되는지 지켜보는 재미도 각별하다.





샤를로테 링크의 다른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수사』 역시 분량이 많지만 일단 책을 손에 들면 흥미진진한 전개에 끝까지 책을 내려놓을 수 없게 된다. 사건 자체보다는 작중인물들의 심리변화에 천착하는 작가의 깊이 있고 섬세한 묘사는 독자들이 쉽게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돕는다.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감정변화를 따라가다 보면 작중인물들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 의심과 시기, 절망과 분노 등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이되는 느낌을 받게 된다. 엎치락뒤치락하며 전개되는 스토리의 끝에서 독자들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놀라운 반전을 접하며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영국 북부 해안도시 스카보로를 배경으로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 주변사람들에 대한 무관심과 몰이해,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의 상처와 증오심이 어떤 비극을 낳을 수 있는지 그리고 있는 『수사』는 샤를로테 링크가 빚어낸 또 하나의 걸작이라 할 수 있다.





바다로부터 얼음처럼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알라드의 집은 창문틀이 낡고 오래 되어 외풍이 심했다.

캐롤은 주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어찌나 공기가 차가운지 화들짝 놀랐다. 팻시는 짜증난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고, 말론은 식탁 의자에 앉아 멍하니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우린 아무것도 몰라요.”

팻시가 가스레인지에 기댄 자세로 말했다. 그녀는 절대로 의자에 앉지 않았다. 제발 오래 머물지 말고 돌아가 달라는 나름의 압박이었다.

“저도 상담하면서 알게 된 맨디의 몇몇 지인들을 찾아가봤는데 다들 행방을 모르더군요. 맨디는 분명 누군가의 집에 있을 거예요. 날씨도 몹시 추운데 몇 주 동안이나 길거리에서 노숙할 수는 없으니까요. 게다가 수중에 남아 있는 돈도 없을 테고, 팔에 화상까지 입었어요.”

“뜨거운 물이 좀 튀었을 뿐인데 화상이라니요?”

팻시가 즉각 반박했다.

캐롤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당신은 딸이 걱정도 안 되나 봐요?”

“대체 내가 뭘 어쩌라고요? 맨디는 제 발로 걸어 나갔어요. 우리 집 현관문은 항상 열려있으니까 원한다면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어요.”

캐롤이 생각하기에 맨디는 집으로 돌아오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것 같았다.

“사스키아 모리스라는 아이가 납치됐다가 피살됐어요. 아멜리 골즈비는 납치됐다고 겨우 도망쳤고요. 납치범이 어딘가에서 계속 활보하고 있는데 어쩜 이리 무심하죠?”

“맨디는 영악한 아이라서 절대로 납치범을 따라가지 않아요.”

- pp.186-187





알렉스가 어서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는 게 데보라의 생각이었다. 행색이 단정해야 일자리를 구하는데 도움이 될 듯해 옷을 사주었다. 무슨 수를 쓰든 그를 취직시켜야 했다. 그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계속 기대려고 할 테니까.

알렉스는 오후 늦게 헐에서 면접이 예정돼 있었다.

“건축회사 사무직 일자리인데 그런 분야에는 전혀 관심도 없고 문외한이긴 하지만 그냥 면접을 보기로 했어요. 마음에 드는 일자리가 나오길 기다릴 수는 없잖아요. 게다가 헐은 스카보로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조금 망설여지긴 하네요.”

데보라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알렉스가 그 일자리를 얻게 되면 헐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차를 구입하더라도 날마다 헐까지 출퇴근하는 건 불가능했다. 알렉스가 이번에는 제발 취직해 멀리 사라져주길 간절히 바랐다.

“내가 헐까지 데려다줄게요.”

그런 다음 알렉스를 미용실에 데려가 머리를 손질하게 하고, 상가를 몇 바퀴나 돌며 비싼 옷을 사주었다.

알렉스는 번번이 분에 넘치는 호의를 받아들이기 곤란하다며 거부의사를 표했지만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거절하지 않은 셈이었다.

데보라는 왠지 그가 입 꼬리를 올리고 비웃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는 잔뜩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지만 내심 이 상황을 즐기는 눈치였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새 옷을 구입하게 되어 기분이 좋은 건가? 제이슨의 예상대로 상대의 부담감을 이용해 얹혀살기로 작정한 게 분명했다. 알렉스의 요구는 앞으로도 끝이 없을 것이다.

- p.225





케이트는 노트북을 켜고 이름을 적었다. 라이언 캐스웰과 데이비드 채플랜드.

이 사건의 실체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몰랐지만 만약 수사 담당자라면 그 두 사람에게 승부를 걸고 싶었다.

왠지 그 두 사람을 면밀히 수사해볼 필요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케이트는 아멜리가 납치된 직후 케일럽과 대화할 때 한나 캐스웰 사건과 사스키아 모리스 사건, 아멜리 골즈비 사건은 서로 연관되어있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동일범이 저지른 납치사건일 수도 있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케일럽은 시간적으로 너무 차이가 크다며 그녀의 말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케일럽의 판단이 옳을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동일범이 저지른 범죄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일련의 사건이 동일범의 소행이라면 한나 캐스웰 사건이 시작이었을 수도 있었다.

케이트는 수사할 때 최초의 발단 지점으로 돌아가는 걸 선호했다. 그래야만 수사에 일종의 구조가 형성되었다.

최초의 범행은 범인의 범행동기를 알아내는 데 용이했다.

- pp.238-239





저자 : 샤를로테 링크


1963년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에서 태어났다. 작가로 활동한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10대 때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1985년《크롬웰의 꿈, 또는 아름다운 헬레나》를 발표하며 데뷔했다. 샤를로테 링크의 소설은 현재까지 독일 내에서만 3천만 부 이상 판매되었고, 전 세계 30여 개국에서 출간되어 호평 받았다.

독일에서는 ‘스릴러의 여왕’이라 불리며 높은 인기와 명성을 구가하고 있고, 다수의 소설이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샤를로테 링크의 소설은 인간심리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로 인간의 감정변화를 섬세하게 포착해내는 한편 다양하고 개성 있는 인물들을 통해 현대사회의 이면에 감추어진 허위와 모순을 예리하게 파헤친다. 한시도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는 탄탄한 스토리와 구성은 스릴러 마니아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

현재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2018년 작 《단독수사》는 출간 직후 《슈피겔》지 집계 베스트셀러 1위에 랭크되며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미궁에 빠진 연쇄실종사건을 해결해가는 여형사의 활약과 다양한 인물들의 심리를 들여다보는 재미가 각별하다.주요 작품으로 《속임수》, 《다른 아이》, 《죄의 메아리》, 《폭스 밸리》, 《숭배자》, 《착각》, 《침묵의 끝》, 《낯선 손님》, 《섬》 등이 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에서 진행하는

체험단,리뷰단에서 제공 받아 작성한 솔직 후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생의 절반쯤 왔을 때 읽어야 할 맹자 - 마음을 바르게 하면 맹자가 들린다 인생의 절반쯤 왔을 때 읽어야 할 시리즈
맹자 지음, 박훈 옮김 / 탐나는책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맹자(孟子)의 성은 맹(孟)이며 이름은 가(軻)이다. 추(鄒)라는 지방 출신이다.추는 공자가 태어난 노(魯)나라에 속한 지방이라는 설도 있고 독립된 나라라는 설도 있다. 어느 쪽이든 공자의 고향인 곡부(曲阜)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교육에 열심인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어머니가 아들의 좋은 교육환경을 위해 이사를 세 번 했다는 일화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고 우리에게 알려진 유명한 말이다. 중도에 공부를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들에게 명심시키기 위해 자신이 짜던 베를 잘랐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온다.

맹자는 인의(仁義)의 덕을 바탕으로 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가 당시의 정치적 분열상태를 극복할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왕도정치를 시행하라고 제후들에게 유세하고 다녔다. 기원전 320년경에 양(梁)나라(하남성 개봉시)에 가서 혜왕에게 왕도에 대해 유세했으나, 얼마 안 가 혜(惠)왕이 죽은 뒤, 아들인 양(襄)에게 실망해서 산동에 있는 제(齊)나라로 옮겼다. 그곳에서 제나라의 선(宣)왕에게 기대를 걸고 칠팔 년을 머물렀으나, 역시 자신의 이론이 채용되지 않자 떠날 수밖에 없었다.





맹자는 혼란한 춘추전국시대를 끝낼 수 있는, 즉 하나로 통일할 수 있는 대안으로 요순하은주의 왕도덕치를 주장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으로 낙향하여 제자들과 토론한 내용을 책으로 저술한 것이 도서가 『맹자』다.

이 책 『인생의 절반쯤 왔을 때 읽어야 할 맹자』는 이러한 맹자의 사상을 담은 <맹자> 14편을 이해하기 쉽도록

저자의 의역이 추가된 해설을 먼저 싣고, 원문을 독음과 함께 실었다.

맹자는 오직 정심(正心)을 요점으로 하고, 존심(存心)과 양성(養性)을 가르치고, 또 방심(放心)을 수습하기를 주장하고, 더 나아가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논함에 있어서는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의 마음을 사단(四端)이라 했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맹자의 근본 사상인 인의예지에 대해 더욱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





#인의효제의 실천

“인(仁)의 실천사항은 바로 부모를 사랑으로 섬기는 일, 즉 효(孝)다. 의(義)의 실천사항은 바로 형을 공경하고 따르는 일, 즉 제(悌)이다. 지(智)의 알찬 실천은 곧 이 두 가지, 즉 인과 의의 도리를 바르게 알고 행하고 이탈하지 않는 것이다. 예(禮)의 알찬 실천은 곧 인과 의 두 가지를 절도에 따르고, 또 문화적으로 실천하고 행하는 것이다.

음악의 알찬 실천은 곧 즐겁고 온화한 마음으로 인과 의를 실천하게 함이다.

즐거우면 인의효제(仁義孝悌)를 실천하려는 마음이 더욱 생생하게 살아난다. 생생하게 살아나니,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그만둘 수 없으니 자기도 모르게 손발을 놀리면서 춤을 추게 된다.”





#세상의 다섯 가지 불효

맹자의 제자 공도자가 물었다.

“제(齊)나라의 대부 광장(匡章)은 전국의 사람들이 불효(不孝)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와 사귀시고, 또 교유하실 때에는 예의를 갖추시니 어째서인지 감히 묻고자 합니다.”

맹자가 대답했다.

“세상에서 말하는 불효에 다섯 가지가 있다. 사지를 놀리고 일하는데 게을러 부모에 대한 공양을 돌보지 않는 것이 첫째 불효이다.

노름을 하고 음주를 좋아해서 부모에 대한 공양을 돌보지 않는 것이 둘째 불효이다.

돈이나 재물을 지나치게 좋아하고 자기 처자만을 사랑하고, 부모에 대한 공양을 돌보지 않는 것이 셋째 불효이다.

귀나 눈의 욕구, 즉 관능적 쾌락을 마냥 누리고 향락만을 일삼고 부모를 욕되게 하는 것이 넷째 불효이다.

만용(蠻勇)을 좋아하고 싸움을 심하게 하여 부모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 다섯째 불효이다. 광장은 그 다섯 가지 중 어느 한 가지가 있느냐? 해당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 왕이 되어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그 속에 들지 않는다.”

“양친이 생존해 계시고, 형제들이 탈 없이 잘 지내는 것이 첫째 즐거움이다.”

“우러러보아도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보아도 모든 사람에게 창피하지 않으니, 이것이 둘째 즐거움이다.”

“천하의 영재들을 모아서 교육하는 일이, 셋째 즐거움이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 그러나 왕으로서 천하를 통치하는 것은 그 속에 들지 않는다.”

이 가운데 두번째 항목은 유독 더 관심이 간다.

'우러러보아도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보아도 모든 사람에게 창피하지 않는 것'은 어디서 많이 들은 느낌이다.

바로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 나오는 대목과도 일치한다. 일제강점기 때 지식인으로서 아무 힘도 없는 점을 부끄럽게 느낀 것이다.

하늘과 세상에 당당하고 떳떳하게 산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통해 인간 삶의 목표이자 바람이다.





'인생의 절반 쯤 왔을 때'라는 문구는 출판사가 동양고전을 시리즈로 내면서 붙인 이름이다.

인생의 절반이라는 말은 그 말 자체가 주는 요즘 얘기로 짐작한다면 40~50세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시리즈의 일곱번째 책이다. 기다리던 '맹자'가 나와 반갑다.

'인(仁)'과 의(義)를 강조하며 인(仁)은 모든 사람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집이고 의(義)는 모든 사람이

따라가야 할 바른 길이다라고 말하는 맹자의 가르침의 세계로 들어간다.





맹자는 직접 스승은 아니지만 공자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켰다는 의미에서 공자의 제자로 알려진다.

스승 공자처럼 현실 정치에 맹자의 이상이 제대로 먹혀들지 않았다. 결국 '덕치'를 주장하던 맹자는 어디를 가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낙향한다. 공자가 그랬던 것처럼.

맹자는 장수 오획의 예를 들며 자신이 스스로 하지 않는 것을 걱정하라고 한다. 아무리 힘이 좋은 장사라 할지라도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양식만 축내면 그는 약한 사람이며, 조금의 힘밖에 없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으로 모든 일에 임하면 그가 바로 힘이 센 사람이라는 의미다. 이 가르침은 23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권력과 힘에 의지하여 행세하기 좋아하는 이들이 스스로를 경계해야 할 적절한 말이다.





맹자는 또 군자의 길을 하나 제시한다. '군자가 신의를 지키지 않으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孟子 曰 君子不亮 惡乎執)다. 여기서 오호집(惡乎執)은 '모든 일이 구차하여 무엇을 잡을 수 있겠느냐'는 의미이다. 군자의 도리가 '인과 예'이기에 군자에게 있어 신의(信義)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특히나 요즘 신의를 밥 먹듯이 저버리는 이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이 책은 오늘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어떤 삶을 살든 인간으로서 양심을 부각시키는 귀절이다.

책의 묵직한 부피감이 지혜를 내게 건네듯 책장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곱씹고 되새기며 읽었다.

독자로서는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고 각오와 다짐을 위해 꼭 읽어야 할 책으로 각인됐다.

나이가 들면 더 인자해지고 물 흐르듯이 순리에 맞게 살아갈 것 같지만 그것이 쉽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반드시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올곧게 살아가기를 다시 한 번 다짐하는 계기가 된 책이다.





저자 : 맹자


주나라 때(BC 372 ~ BC 289 추정) 사람이다. 맹자는 공자시대 이후 유가에서 가장 큰 학파를 이룬 사람으로, 제나라, 위나라, 등나라 등을 다니면서 제후들에게 인의(仁義)의 덕을 바탕으로 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가 춘추전국시대의 정치적 분열 상태를 극복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강의하고 다니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 70세 가량으로 추정된다.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과 함께 『시경』과 『서경』, 공자의 뜻에 대해 토론했으며, 그때 만들어진 책이 오늘날 전해지는 『맹자』 7편이다. 후한의 조기가 『맹자장구』를 지으면서 각 편을 상하로 나누어 현재의 14편이 된 것이다.


역자 : 박훈


경향신문사와 웅진출판사에서 다년간 근무하고 인문학 강의를 통하여 현대인들의 일상생활과 문화는 동양의 오랜 전통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에 동양의 정신과 철학 사상을 연구하고 학습하며 다양한 독자들에게 정기간행물을 통해 소개하였다. 최근 복잡하고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현대사회에 마음의 안식과 즐거움, 평화와 행복을 위한 동양 철학의 대표적인 철학가들의 사상을 이해하기 쉽게 옮김으로써 지금 세대들의 삶의 휴식처 역할을 적극 자처하고 나서며 열성적熱誠的 활동으로 독자와 함께 소통하고 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에서 진행하는

체험단,리뷰단에서 제공 받아 작성한 솔직 후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스탄불, 이스탄불
부르한 쇤메즈 지음, 고현석 옮김 / 황소자리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터키가 우리나라와는 6.25 UN군 파병과 월드컵 4강(3, 4위전)을 함께 거치며 우호가 돈독한 나라이다.

이슬람 국가이지만 경제적 이유 아니고 친교를 맺은 몇 되지 않은 나라 중 한 나라다.

옛날 오스만 투르크는 막강한 국력으로 아시아와 유럽 일대를 장악한 적도 있다. 화려한 문화 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영토도 큰 나라다.

지리적으로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곳에 위치해 두 문명을 복합적으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독특한 헬레니즘 문화를 이룩한 나라이기도 하다.

이스탄불은 터키의 수도이면서 동로마시대 수도,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렸던 곳이다. 우리나라는 1990대 들어 해외 여행이 자유로워지면서 가장 많이 찾는 나라 중 한 곳이다.

문학적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아 노벨상 수상작가 오르한 파묵과 그의 작품 몇몇만 알려져 있다.(이것은 필시 독자의 과문 탓이리라)

이 책 『이스탄불 이스탄불Istanbul Istanbul』은 물론 작가 부르한 쇤메즈도 독자로서는 생소하다.

그러나 작품의 내용은 몹시 재밌다. 문학성도 높고 상상력도 기발하다. 이 책을 통해 작가와의 상견례도 멋진 셈이다. 그를 좋아하게 됐으니까. 기발한 상상력이란 것은 한 작품 안에 도스토옙스키와 《데카메론》을 만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다.

현실의 고통을 잘 표현하는 도스토옙스키, 신비로운 이야기를 재미 있게 풀어낸 《데카메론》, 모두 이 작품 안에서 발견된다.





“여기가 이스탄불인가?”

“예, 아저씨. 스스로 신이라 믿는 남자들의 도시, 가출한 소녀의 꿈이 통곡하는 도시, 흰고래를 찾아 바다를 떠도는 늙은 어부의 도시, 평생을 살아도 그리운 도시 이스탄불이에요. 먼 길을 돌아 이 도시에 온 아저씨는 이스탄불에서 그 무엇을 찿으셨나요?”

오르한 파묵 이후 터키가 배출한 가장 걸출한 문인으로 평가받는 소설가 부르한 쇤메즈가 마침내 우리나라 독자들과 만난다.

이 책 『이스탄불 이스탄불』 은 현재 활동하는 전 세계 작가들 중 가장 유니크한 소설가라 칭송받는 부르한 쇤메즈의 세 번째 소설이자 대표작이다.





잔인하리만큼 고혹적인 도시 이스탄불의 깊디깊은 지하감옥. 시멘트벽으로 구획된 좁디좁은 감방 안에 나이도 직업도 성향도 전혀 다른 네 남자가 함께 갇혔다.

아마도 혁명운동에 연루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네 남자는 서로의 비밀을 지켜주기 위해,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를 고문의 두려움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재미난 이야기를 풀어낸다.

흰고래를 찾아 평생 먼바다를 떠돌다 패배한 늙은 어부, 해도(海圖) 위에 가상의 섬을 그린 후 자신이 사랑한 여인의 이름을 지어주는 해도 담당 선원, 기발한 수완으로 강간을 모면하는 수녀, 벽의 거짓말에 속는 외딴마을 사람들, 사람의 영혼을 가진 늑대, 딸의 딸이자 손녀이자 남편의 여동생인 아이와 둘이 살아가는 노파…. 여기에 에피소드 사이사이를 메우는 네 남자의 사적인 내러티브는 땅 위와 땅 아래, 이야기 안과 이야기 바깥, 수천년 시공간이 얽히고설키며 거대한 태피스트리로 완성된다.

보이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그들의 대화가 곧 현실의 우화가 되어 자유와 연민, 욕망과 기억이라는 철학적 주제를 흡사 환상동화처럼 풀어내는 이 소설은 “머잖아 고전의 반열에 우뚝 설 위대한 작품”이라는 상찬 속에 전 세계 34개국으로 판권이 팔렸다.





흑사병이 창궐하던 14세기, 피렌체에 살던 한 무리의 귀족들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냄새를 피해 시골 별장으로 은신했다.

두려움과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그들이 택한 것은 이야기였다. 음탕하고 우스꽝스러운 이야기. 순진한 사랑 이야기, 기발한 복수 이야기….

인간의 본능과 악덕, 탐욕과 허영, 선량함과 예지를 유쾌하게 일깨우는 서사를 통해 그들은 폐허가 된 삶을 북돋울 용기와 지혜를 모색했다.

조반니 보카치오의 소설 『데카메론』이 이렇듯 역병을 피해 자가격리된 귀족들의 서사라면, 『이스탄불 이스탄불』은 타의에 의해 한순간 지하세계로 떨어진 네 남자의 서사이다.

자발적 격리와 강제 격리, 삶 쪽에 가까워진 현실과 죽음에 바짝 다가선 운명이라는 차이는 분명했지만, 이스탄불 지하감옥에 갇힌 그들 역시 천일야화처럼 끝나지 않을 이야기를 통해 견디기 힘든 상처와 두려움을 치유하려 했다.

그렇게 열흘 동안, 삶과 죽음 사이에 가로놓인 연약한 문턱에 선 채 각자 체험하거나 듣거나 읽은 온갖 이야기를 변주하면서 시시각각 부옇게 흐려지는 땅 위의 삶, 한 줄기 꿈에 매달렸다.





“실은 긴 얘기지만 짧게 할게요, 이스탄불에 그렇게 눈이 많이 온 적은 없을 거예요. 한밤중에 수녀 두 명이 안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카라쾨이의 성 조지 병원을 출발해 파두아의 성 안토니오 성당으로 가고 있었어요. 그때는 4월이었는데, 유다나무 꽃들은 얼어서 갈라지고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바람 때문에 거리에 돌아다니는 개들은 추위에 진저리를 칠 정도였어요. 수녀들이 갈라타 탑에 거의 도착했을 때 젊은 수녀가 같이 가던 나이든 수녀에게, 어떤 남자가 계속 자신들 뒤를 따라 언덕을 올라오고 있다고 말했어요.”

- p. 7

보스포루스 해협을 휘감아 돌며 숨 막힐 듯 아름다운 첨탑과 돔들이 스카이라인을 이루는 오래된 도시 이스탄불. 그 아래, 죽은 자들의 묘지보다 깊고 음습한 지하감옥으로 던져진 네 남자가 가로 1m 세로 2m 좁은 감방에 함께 갇혔다.

칼날 같은 추위가 찾아오는 초겨울 무렵이었다. 열아홉 살 대학생 데미르타이가 원한 건 단지 가난한 엄마가 밤마다 눈물 흘리지 않는 세상에 사는 거였다. 그런 세상을 만들자고 혁명운동을 하다 이곳까지 왔다. 고문 끝에 정신을 잃고 죽은 개처럼 축 늘어져 여기에 처박힌 그를 살려낸 건 의사 아저씨라고 불리는 남자였다.

동정과 연민, 완전성에 대한 믿음을 지닌 의사는 병든 도시를 구하겠다며 혁명집단에 들어간 의대생 아들이 폐결핵에 걸린 병자로 나타나자 다른 이의 이름으로 아들을 입원시킨 뒤, 아들 신분으로 여기에 끌려왔다.

그리고 이발사 카모. 고통만이 생의 유일한 스승이었던 그는 이 좁은 공간에서도 철저히 외로운 시인으로 존재하기를 택했다.





이곳은 항로에서 벗어난 배의 짐칸이었을까, 아니면 카모가 어떻게 탈출해야 하는지 몰랐던 위기의 바닥이었을까?

세 개의 벽, 하나의 문, 그리고 피를 뒤집어쓴 남자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카모는 눈을 감으면 다른 곳에서 깨어날 거라고, 한순간 장소가 바뀔 거라고 믿는 듯했다. 자신을 믿는 것과 자신을 잃는 것 사이에는 아주 미세한 경계가 있을 뿐이었다.

- p. 72





어느 날 피투성이 거구의 노인 퀴헤일란이 이 감방에 들어왔다. 멀고 먼 마을에서 평생토록 이스탄불을 동경하다 생의 끄트머리에 이 도시에 도착한 퀴헤일란은 무아지경의 시인, 무모한 탐험가, 격정에 사로잡힌 연인들처럼 이스탄불을 찬미했다.

현실과 상상이 따로 분리되지 않는 그에게 이곳 지하는 그래서 좋았다.

통제 불가능한 속도로 탐욕의 희생양이 되어가는 이스탄불을 지상에서 보았다면 그는 절망했을 테니까.

유혹에 저항하지 못하는 몽상가들처럼, 퀴헤일란의 열정에 이끌린 세 사람은 이야기의 향연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들었다. 흡사 꿈이 거세된 도시를 새롭게 설계하는 정복자들같이…





그동안 국내에서 출간된 터키 문학을 접할 때면 당연히 떠오르는 작가가 바로 오르한 파묵이다. 꾸준히 이 작가의 번역을 도맡아 하다시피 한 번역가 님의 이름이 친숙할 정도로 터키 문학에서 차지하는 오르한 파묵의 절대적인 문학의 세계는 기타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접할 때마저도 비교하게 되는 확고한 고정팬을 갖고 있다고 출판사 측은 밝혔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접한 터키의 새로운 신예라고도 할 수 있는, 나에게 있어서 처음으로 만나 본 부르한 쇤메즈란 작가는 터키의 문학의 또 다른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이 책의 제목인 이스탄불이 주는 책의 화려한 표지도 그렇지만 내용 또한 동양적인 냄새와 서양적인 냄새가 은연중 혼합의 느낌으로 다가오게 한다.





터키 쿠르드인 마을에서 자란 쇤메즈는 이스탄불 대학교를 졸업한 뒤 인권변호사이자 저술가로 활동하던 중 정치적인 이유로 고문당했고 영국으로 망명해서 치료받은 이력의 소유자다.

자신의 투옥체험이 투영되었을 이 소설은 그럼에도 경쾌한 문장으로 삶의 다채로운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도시는 경제 교환 장소 이전에 말과 욕망과 기억의 교환 장소이다.” 이탈로 칼비노의 말이다.

고전적인 플롯과 구전설화의 서사를 차용해 주제의식을 강화하는 이 작품은 도시의 일상 속에서 하루하루를 건너는 우리에게 변하는 풍경과 변치 않는 가치들, 욕망하는 것과 기억해야 할 것들을 찬찬히 돌아보자고 다정하게 속삭인다.

저자 자신의 경험담이 녹아들었다고도 생각되는 구절들의 표현은 차세대 터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서의 역량을 발휘했다는 소개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게 한 책이다.

이스탄불에 대한 끝없는 찬미를 하던 노인 퀴헤일란처럼 세월의 흔적을 남기도고 여전히 자신의 모습을 통해 과거와 현대를 아우르는 도시, 이스탄불에 대한 연가처럼 들리기도 한 작품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혼전계약서 1
플아다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2의 성』을 쓴 프랑스 보부아르는 중등학교 철학 교사로 근무 중(21세)에 지적인 동반자 샤르트르와 만나 사랑에 빠졌다.

죽는 날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잘했고 행복했던 것은 '샤르트르를 만난 것'이었다는 말을 남겼다.

『제2의 성』(1949년 출간)은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페미니즘 저서였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1986년에 죽었을 때 추도사에는 '페미니즘의 성서', '여성운동의 최고사제' 또는 '페미니즘의 어머니' 등과 같은 말들이 사용됐다.

보부아르와 샤르트르의 만남은 매우 지적이었고, 서로를 인정하는 실존적 차원에서 이뤄졌다.

1929년 두 사람은 '계약결혼'을 한 후 반세기 동안 자유로운 연인 관계를 유지했다.

이는 서로 구속하지 않으면서 연인이자 지적인 동반자로 오랜 세월을 함께 보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기존 질서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한 그들은 “우리는 한 사람입니다.

너와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에서 두 사람의 정신적 교감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이 결혼에는 세 가지 조건이 따랐다. 첫째, 서로가 다른 사랑을 하는 것을 허용할 것.

둘째, 거짓말하지 말고 서로에게 솔직할 것. 셋째, 경제적으로 독립된 생황을 할 것이 그 조건이었다.

이후 '계약결혼'은 여성 지식인들의 자유와 경제적, 성적 독립의 원전처럼 사용되기도 했다.





네이버웹소설 최고 인기작가 플아다의 장편소설 《혼전계약서》(전 2권)도 페미니즘 경향의 로맨스 소설이다.

《반드시 해피엔딩》 《당신을 주문합니다》 《일상의 히어로》에 이어 다시금 로맨스 NO.1을 증명한 플아다 작가의 신작 《혼전계약서》는 2019년 5월 4일부터 10월 22일까지 6개월간 총 94화가 연재되는 동안 네이버웹소설 로맨스 1위, 네이버 시리즈 400만 다운로드를 달성하며 이미 그 매력을 입증했다.

이번 단행본에는 ‘싱크로율 100%’의 주인공을 그려낸 팻녹 작가의 감수성 넘치는 삽화가 함께 수록되어 종이책으로 처음 만나는 독자뿐 아니라 네이버 연재를 통해 작품을 읽은 독자들에게 소장 가치가 있는 의미 있는 선물이 됐다.





《혼전계약서》는 계약 결혼 때문에 만난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고 성숙한 연애로 나아가는 과정을 그려낸 로맨스소설이다.

특히 이 소설은 비혼주의자이자 커리어우먼인 우승희가 사랑 속에서 일과 자신의 삶을 지켜내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계약서를 사이에 둔 갑-을 관계로 만난 두 사람이 서로를 존중하는 법을 배우고, 더 나아가 시대착오적 가치관과 가풍까지 바꿔내는 청량감 있는 서사를 통해, 두 인물의 사랑은 더욱 아름답게 완성된다.

작가는 매력적인 캐릭터와 속도감 있는 서사에 지금 시대의 젊은 독자들도 공감할 수 있는 직접적인 연애의 문제를 녹여낸 이 작품을 통해 로맨스소설의 매력을 오롯이 드러냈다.





탁월한 경영감각으로 스타트업 회사를 설립한 젊은 CEO 우승희. 그녀는 어느 날 금왕그룹의 상속자 한무결과 결혼계약이 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계약을 이행하지 않을 시에는 50억을 갚아야 하는 상황. 승희는 결혼을 하지 않기 위해 ‘계약서를 붙들고 있는 한 혼인 전’이라는 마음으로 혼전계약서를 제안한다. 그러나 밀당의 귀재, 한무결과 만날수록 그의 매력에 속절없이 빠져들게 된다.

혼전계약서

우승희와 한무결은 혼인에 앞서 다음과 같이 계약을 체결한다.

- 두 사람은 결혼식 이후 10년간 혼인 신고를 하지 않는다.

- 각각의 가족 행사 참석은 연 1회로 제한한다.

- 가족 행사 참석 시간은 세 시간을 넘기지 않는다.

- 기타 다른 가족의 부양은 하지 않는다.

- 부부관계는 갖지 않는다.

-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는다.

- 간통 시 위자료 50억을 지급한다.

- 부동산은 공동명의로 한다.

- 서로 경어를 사용한다.

- 두 사람은 언제든 합의하에 이혼할 수 있다. ( p.93)





“오케이. 혼전계약서 쓰죠, 까짓 거.”

그리고 기어이 합의의 물꼬를 텄다. 하지만 그 또한 조건을 내걸었다.

“협상을 하려면 대화할 시간이 필요하겠네요. 매일 하루 한 시간씩 만납시다.”

매일 하루 한 시간? 승희의 눈이 커졌다.

“이동시간 같은 거 계산할 필요 없어요. 내가 매일 그쪽 있는 데로 갈 테니까.” (p. 67)





하지만 보수적인 금왕 한씨 가문은 승희에게 ‘며느리다움’을 요구하며 승희에게 결혼을 한 뒤에는 사업을 그만두고 무결을 내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게다가 무결의 매형이 될 사람은 대학시절부터 승희를 못마땅해 하던 그녀의 동기 명중우. 같은 학과 여학우 외모에 순위를 매기는 질 나쁜 무리의 리더였던 중우를 승희는 가능한 무시하려하지만, 중우는 승희의 일거수일투족에 개입하고 승희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퍼트리기까지 한다.

무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결과 승희의 관계는 바람 앞 촛불처럼 위태로워지는데…….





“그리고 네가 건강해지면서 혼인계약서도 잊었다. 아니,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어. 네가 네 스스로 좋은 사람을 만나길 바랐다.

그러니 돈이든 땅이든 갚지 않아도 된다고 전해라.”

“못 해요.”

무결은 한 손을 올려 제 눈을 가렸다. 표정이 일그러져가고 있었다.

“그걸로 붙잡아두고 있는 거예요.”

무결은 아프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내가 매달리고 있는 거예요, 할아버지.” (p. 428)





짧은 이별과 우여곡절 끝에 다시 만난 무결과 승희는 채무관계 없이 성숙한 성인으로서 다시 연애를 시작하려고 하지만, 금왕그룹을 노리는 명중우의 야욕은 하루하루 더 커져만 가고, 설상가상으로 명중우가 퍼트린 과거의 소문들이

승희를 노리며 시시각각 가까워진다. 과연 승희는 일도 사랑도 모두 지켜낼 수 있을까? 무결과 승희는 어두운 과거를 딛고 혼전계약서를 혼인증명서로 만들 수 있을까?





당신은 나의 모든 걸 알 필요가 없다. 내 밑바닥이 어디인지 손을 넣어 더듬어보길 원하지 않아. 그냥 그대로 여기 있어줘. 그저 여기 이렇게 가만히 서서 내 과거로 색을 입히지 않은 눈으로 나를 바라봐줘. 지금 당신이 마주하고 있는 내가 우승희의 전부라는 듯이. 그것만으로 나는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아. (p. 144)

서로에게 물들어가고 길들어간다.

승희는 속으로 조심스럽게, 행복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내가 널 가져서 미안하다고.

아직은 행복하면 안 될 것 같은데, 너무 빨리 행복해해서 미안하다고. 하지만 고맙다고.

이런 내게 와줘서. 행복에게 고맙다고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인사했다. (p. 404)





이 소설은 몇 곳에서 비현실적인 점이 눈에 띈다.

재벌인 데다 어느 것 하나 빠진 것 없는 남자가 왜 그토록 쉽게 여주에게 몰입할까.

여주가 혼전 계약서라는 것을 빌미로 남자와 밀당을 하는 과정도 필연적 원인이 그닥 눈에 띄지는 않는다.

'센 여자'라 하기엔 너무 약하고, 스스로 헤쳐갔던 일은 그닥 없는 예쁜 여자. 이것만으로는 결말에 이르는 과정에 약간은 아쉽다.

사실 쉽게 술술 잘 읽혔고, 그 속에서 더한 두근거림과 몽글몽글한 로맨스도 충분하다.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필연적인 원인과 결과, 복선과 대반전을 바라는 독자로서는 약간은 아쉽다. 로맨스 소설을 많이 읽지 못한 독자가 진부한 관점일 것 같다.





저자 : 플아다


충북 보은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광고회사에서 AE로 근무했다. 네이버웹소설 《당신을 주문합니다》 연재를 시작으로 《누구에게나 악마가》 《오빠의 정석》 《가르쳐주세요》 《일상의 히어로》 《반드시 해피엔딩》 등의 로맨스 소설을 발표했으며, 2015년 《당신을 주문합니다》가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에서 진행하는

체험단,리뷰단에서 제공 받아 작성한 솔직 후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염병이 휩쓴 세계사 - 전염병은 어떻게 세계사의 운명을 뒤바꿔놓았는가 생각하는 힘 : 세계사컬렉션 17
김서형 지음 / 살림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극도의 복잡성과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불안감과 초초함은 거의 패닉 수준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후 코로나19)의 확산에 전 세계 인류가 공포와 불안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코로나 펜데믹으로 WHO가 공식 선언한 이후 정확한 사망자 수를 헤아리기도 어렵게 확산되고 있다.

백신은커녕 치료제도 없어 뒤늦게 본격 연구에 들어섰지만 언제 개발돼 나올지도 미지수다.

희망마저 안 보이는 암흑 세계로 치닫는 정세 속에서 일상은 자취를 감췄고, 유령도시도 속출하고 있다.

치료제나 백신이 개발되도 코로나19 이전의 일상 복귀는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온 인류를 불안하게 한다.





다행히 코로나 방역에 아직까지는 비교적 방역을 잘한 우리나라도 아직도 국민의 관심이 코로나에 쏠려 있다.

뉴스에서 매일같이 치솟는 코로나19 확진자 수를 확인하면서, 너도나도 마스크를 쓰고 손소독제로 손을 씻어내고, 유례없는 온라인 개학과 화상 수업도 실시하는 등 최선의 대응을 하지만 전염병의 위력을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느꼈다.

전염병은 먼 나라에서 일어나는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뒤바꿔놓은 나의 일이 된 것이다.

사스나 에볼라와는 다르게 전염력이 엄청나 정부의 필사적인 방역 대책도 빛이 바래고, 무력감을 느끼기도 했다.

이제는 더 이상 코로나19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사실 전염병은 어제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역사학자인 윌리엄 맥닐이 ‘인류의 역사는 곧 전염병의 역사’라고 주장한 것처럼, 전염병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늘 인류와 함께해왔다. 전염병에 대한 높아진 관심을 방증하듯, 전염병을 다룬 역사책들도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앞서 재레드 다이아몬드 미국 학자는 저서 『총, 균, 쇠』에서 병균을 인류의 운명을 결정지은 핵심 요소로 꼽았다.

지금도 의학계나 역사학계에서는 전염병의 역사에 관한 연구를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국내에서 출간된 전염병 관련 역사책들은 의학사에 한정해 역사적 인물이 걸린 질병에 초점을 맞춘다거나 전염병이 세계사에 미친 영향만을 주요하게 다뤘다.





이 책 『전염병이 휩쓴 세계사』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질병사(史)를 전공한 역사학자 김서형 교수는 전염병의 발생 원인과 역사에 미친 전염병의 영향뿐만 아니라, 전염병이 확산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배경에도 큰 방점을 둔다.

빅히스토리(거대사) 분야의 탁월한 연구자이기도 한 저자는 좀 더 거시적으로 ‘글로벌 네트워크’라는 새로운 개념을 가지고 전염병의 역사에 접근한다.

요약하자면, 인류가 이동하고 교류하면서 형성된 글로벌 네트워크를 통해 물건이나 지식뿐만 아니라 전염병도 함께 퍼져나가면서 역사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크게 고대의 ‘아프로-유라시아 교환 네트워크’, 대항해시대와 식민지시대의 ‘아메리카 네트워크’, 산업혁명 시기의 ‘산업 네트워크’, 현대사회의 ‘글로벌 네트워크’로 나누어서 알아본다.

이로써 독자는 인류의 운명을 뒤바꾼 전염병의 역사를 좀 더 입체적이고 다각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더불어 역사 속에서 전염병의 도전에 인류가 어떻게 응전해왔는지 성찰해보면서, 이른바 ‘전염병의 시대’가 되어버린 21세기에 소중한 지혜와 교훈도 얻게 될 것이다.





‘글로벌 네트워크’는 빅히스토리(거대사)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개념이다. 데이비드 크리스천 교수가 제시한 ‘빅히스토리’는 민족이나 국가, 문명 단위를 뛰어넘어 전 지구적 패턴으로 세계사를 조망하는 역사관이다.

특히 빅히스토리에서 말하는 ‘글로벌 네트워크’는 역사의 흐름을 혁명적으로 바꿀 만큼 전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막대하다.

글로벌 네트워크는 16세기 대항해시대의 항로 개척이나 20세기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지구 전체가 하나로 연결되는

현대적인 현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호모사피엔스가 전 지구적으로 이동하면서 이미 글로벌 네트워크가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전염병의 확산에 주된 원인이 된 글로벌 네트워크를 시대별로 소개한다.

고대의 ‘아프로-유라시아 교환 네트워크’인 실크로드와 바닷길, 몽골제국의 넓은 영토와 체계적인 도로망은 전염병의 이동 경로가 된다. 대항해시대 이후에는 대서양 삼각무역을 비롯한 ‘아메리카 네트워크’가 전염병을 교환하는 통로가 된다. 산업혁명 시기에는 농촌에서 도시로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산업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전염병이 도시를 휩쓸면서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대두되기도 한다. 네트워크가 전 지구적으로 촘촘히 연결된 오늘날에는 전염병의 확산 속도가 무섭도록 빠르다.

최근 코로나19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국경을 폐쇄하는 극단적인 조치까지 취해야 할 정도다.





코로나19의 전 세계적 확산으로 전염병의 세계사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국내에서도 십수 년 전에 나온 전염병 관련 역사책이 ‘역주행’하면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이 시기를 놓치지 않고 서둘러 전염병 관련 해외 역사책들이 번역되어 소개되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책들은 의학사적 관점에서 전염병 자체에만 집중하거나 결과론적으로 전염병이 역사에 미친 피해나 영향 정도만 서술한다. 하지만 이것으로 전염병의 세계사를 충분히 설명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전염병은 제아무리 전염성이 강하더라도 접촉이나 교류가 일어나지 않으면 파급력 있게 확산되지 않는다.

하지만 『전염병이 휩쓴 세계사』는 역사상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 전염병이 어떻게 그런 결과를 낳게 되었는지 주된 원인 또는 배경으로 ‘글로벌 네트워크’에 집중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역사를 다룰 때 엄밀히 말해서 ‘인간에 의한’ 역사만 살펴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적인’ 활동만 역사를 형성하는 데 유의미하고 다른 것은 부차적인 요소로 치부했다. 하지만 지구의 전체 역사에서 인간이 거주한 시기는 한 점에 지나지 않는다. 더군다나 지구상에는 인간만 홀로 살지도 않았다.

인간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인간을 둘러싼 외적 요소까지 총체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전염병을 역사의 무대 위로 다시 올려놓는 작업은 매우 뜻깊다고 하겠다.

역사학자 윌리엄 맥닐도 ‘인류의 역사는 곧 전염병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인류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전염병을 알아야 하고, 반대로 전염병을 이해하려면 인류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나아가 인류의 미래를 대비하고 예측하기 위해서도 전염병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전염병은 인류 역사의 총체적인 국면과 맞물려 있는 ‘역사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전염병이 어떻게 세계사를 뒤바꿔놓았는지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실크로드를 따라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전파된 천연두는 거대한 서로마제국을 멸망시킨 결정적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바닷길을 통해 전파된 페스트도 동로마제국을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했다.

유라시아에서 대제국을 건설한 몽골제국은 의도치 않게 중국에서 발생한 흑사병을 유럽에 퍼뜨렸다.

흑사병은 십자군전쟁과 함께 중세 교회를 붕괴시키고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힌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아메리카 식민지 개척 시대에는 아프로-유라시아에서 유럽인 개척자나 아프리카 원주민(노예)과 함께 건너간 온갖 전염병으로 아메리카 원주민이 멸종되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염병 치료약 개발이 비극을 낳는 경우도 있었다. 아프리카의 풍토병인 말라리아 치료제가 개발되자 유럽의 강대국들은 너도나도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삼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식민 지배를 받은 아프리카는 지금도 전염병을 통제하거나 예방할 능력이 없다. 전염병이 전쟁에 미친 영향도 무시하지 못한다.





수많은 병력이 대륙과 대륙 사이를 이동하면서 전염병을 옮기게 되는데, 전염병 자체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기도 하고, 총칼보다 전염병으로 인한 전사자가 훨씬 더 많을 때도 있었다.

국제보건기구(WHO)는 21세기를 ‘전염병의 시대’로 규정했다. WHO는 1968년 홍콩독감과 2009년 신종플루에 이어 코로나19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을 선포했다. 세계사는 코로나19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코로나19를 비롯해 에볼라바이러스, 사스, 조류인플루엔자, 신종플루가 전 세계를 불안에 떨게 했듯이, 21세기에는 ‘글로벌 전염병’이라는 유령이 전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

세계는 그 어느 시기보다 가까워지고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 전염병도 전 지구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반대로 전 세계적으로 발생한 전염병이 식민지를 오래 경험한 아프리카처럼 한 지역에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따라서 글로벌 전염병이 만연하는 시대에 사는 우리는 전염병 확산 방지를 위한 국제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앞으로 인류의 미래는 전염병의 도전에 전 세계가 어떻게 응전하느냐에 달려 있다.





전염병은 인류의 이동으로 그 세력을 더욱 키워나갔고, 글로벌 네트워크가 확장되면서 전염병의 확산은 인류의 생각 이상으로 크게, 또한 빠르게 퍼져나갔다. 이 책에서 앞서 일례로 든 실크로드의 경우를 살펴보면 로마 제국의 멸망에

상당 부분 영향을 미친 전염병은 다름 아닌 천연두였다. 당시 천연두로 사망한 로마인들은 400-500만 명이라고 하는데, 이는 로마 전체 인구의 1/3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이 사례만 보더라도 전염병이 세계사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추측해볼 수 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전염병이 남긴 상흔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염병’이라는 단어가 총 736회가 등장한다고 한다. ‘염병’은 주로 장티푸스를 가리키는데, 이 전염병은 대체적으로 극심한 기근과 함께 창궐했다고 한다.

영양실조 상태의 사람들이 더욱 쉽게 전염병에 걸리고, 전염병을 이겨낼 면역력도 낮을 수밖에 없음을 생각한다면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 아닌가 싶다.





이처럼 전염병은 인류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세계사에 큰 획을 그었다. 코로나 19가 오늘날 우리의 사회를 완전히 바꿔놓은 것처럼...

아마 앞으로도 수많은 전염병들이 그렇게 인류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단순히 치료제를 개발하는 것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이 책은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면면들을 전염병의 확산의 원인이 되는지도 돌아봐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한다.


저자 : 김서형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에서 논문 「1918년 인플루엔자와 미국 사회: 전쟁, 공중 보건 그리고 권력」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화여자대학교 지구사연구소 연구교수,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연구원을 지냈고, 현재 러시아 빅히스토리 유라시아센터 연구교수로 활동 중이다.

『인류 최대의 재앙, 1918년 인플루엔자』 『세계사의 새로운 대안 거대사』(공역) 『왜 유럽인가』(공역) 등을 옮겼고, 『TEACHING BIG HISTORY』 『EDUCATION AND UNDERSTANDING: BIG HISTORY AROUND THE WORLD』 『빅히스토리: 인류 역사의 기원』 『김서형의 빅히스토리: FE 연대기』 『그림으로 읽는 빅히스토리』 『초등학생을 위한 빅히스토리』 등을 집필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