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독자가 이 책 『료의 생각 없는 생각』을 읽게 된 것은 우연히 책의 〈서문(프롤로그)〉에서 발견한 '진짜 나'란 문구 때문이다. 고백하자면 저자 '료'가 어떤 인물인지, 어떤 일을 했던 사람인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책의 제목이 묘(?)하다는 느낌이 들어 독자의 시선을 잡아 당겼다. 저자 료가 직접 쓴 〈서문〉의 첫 문장을 여기에 옮겨 적어본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진짜 나로 살 수 있는 용기를 논하게 되는 것이 아이러니해서 '왜 우리는 이렇게나 진짜의 나로 가는 길에 용기까지 필요하게 된 걸까?"
이 문장에 담긴 '진짜 나'란 어떤 의미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나'는 '가짜'로 살았던 것일까? '진짜'란 단어는 사실 알게 모르게 우리가 하는 말 중에 섞여 '참'과 '거짓' 중 '참'을 의미하는 것이고, 부족한 영어 실력을 동원하자면 'real' 'true'쯤 아닌가? 독자가 이 단어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최근 혼란했던 대한민국의 정국이 차츰 안정되면서 대통령 선거에서 새로 뽑힌 이재명 대통령이 선거 전까지(정확하게는 취임사에서도 들었다) '진짜 대한민국'을 만들어 나가겠다는 의지를 여러 번 천명했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까지 살아왔던 대한민국은 '가짜'란 말인가? 국가 공동체가 진짜가 있고, 가짜가 따로 있진 않을 텐데··· 때문에 대통령 선거에서 이 후보자가 이런 뜻으로 썼을 리는 없다. '더 나은 대한민국'이란 표현을 놔두고 왜 '진짜 대한민국'을 외쳤을까? 더욱이 우리가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이 단어는 사실 한자와 우리말이 복합적으로 합쳐진 것이다. '眞'짜와 '假'짜는 상대적 개념이란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독자는 대선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가짜(거짓말 잘하는) 정치인'이라는 자신에게 붙은 별칭의 허위를 강조하는 의미에서 '진짜'를 반복 주장한 것으로만 생각했었다. 반대 세력이나 정당에서 비방하기 위해 가짜 프레임을 씌운 것 정도로 독자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렸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저자 료가 사용한 '진짜 나'는 문맥상 '허상(虛像)'의 반대되는 뜻의 '실상(實像)'을 의미하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이 표현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자 이 대통령의 '진짜 대한민국'의 참뜻에 한층 가까이 다가갔다고 생각하게 됐다. 이 대통령이 정치적 구호처럼 내세우는 '실용주의'에서 그 깨달음은 '참'에 가깝다고 독자는 생각한다.

출판사 측에 따르면 저자 료는 ‘런던베이글(bagel)뮤지엄’, ‘아티스트베이커리’, 카페 ‘하이웨스트(high waist),’ ‘레이어드(Layered)’ 등의 감각적 공간 브랜드를 창업하고, 브랜드를 전국의 ‘빵지순례객’들이 찾는 명소로 만든 분이다. 그녀가 창조한 공간은 ‘꾸며진 컨셉’이 아닌, 감정이 축적된 풍경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줄 서는 공간을 만든 그녀는 브랜드보다 오래 남는 감각과 마음을 믿는다. 그 믿음은 그녀가 만들어온 시간의 결, 그리고 켜켜이 쌓인 감정의 레이어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다층적인 시간과 감정을 자신만의 언어로 길어 올려, 자신의 첫 산문집 『료의 생각 없는 생각』에 담아냈다고 출판사 측은 소개하고 있다. 이 책 속의 글은 생생한 언어이거나,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는 언어이거나, 비유적 표현이거나 모두 독자들이 바로 이해하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밝힌다. "언제나 말보다 시선을 먼저 보내는 그녀의 문장은 조용하지만 단단하다. 장르와 형식에 갇히지 않고, 온전히 ‘나다움’을 지켜내는 그녀의 글은 얼핏 가벼운 일상의 스케치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삶에 대한 깊은 애정, 인간을 향한 다정한 시선,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이 담겨 있다"는 출판사의 글에 공감한다.
이 책을 읽은 후 독자의 감상을 굳이 묻는다면 "자신의 마음을 오롯이 담아 과장 없이, 실제 모습 그대로 표현했다"고 독자는 답할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이 거창한 성공담이 아니라, 마음속 작은 울림을 꾹꾹 눌러 담은 이야기라는 뜻이다. 저자 료는 무심코 들어간 런던의 한 카페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작고 소박했던 런던의 한 카페에서, 다양한 인종과 연령의 사람들이 완벽한 하나의 합을 이루며 각자의 방식으로 일하는 모습을 보고, 형언할 수 없는 에너지에 커다란 울림을 받았다고 저자는 회상한다.
“오랫동안 저는 타인을 관찰하며 살아온 사람이었는데, 그날 처음으로 ‘나는 나 자신을 진심으로 바라본 적이 있었나?’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고, 그 순간 생각했어요. ‘어쩌면 내가 원했던 것은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아무런 조건 없이 몰입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었을까? 평생 하리라 믿었던 일을 그렇게 내려놓고, 직업을 일순간에 바꾸고 싶다는 마음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저를 뒤흔들었습니다.” 그렇게 “목표 대신 자유를 원했다”고 저자는 털어놓는다.
이 고백은 저자가 "진짜의 나로 가는 길에 용기가 필요한 것은 지금 살아가는 나의 많은 모습들이 사실은 진짜가 아닐 수도 있다고 묻는 것 같다."며 "내가 나로 태어나 내가 되는 일이 왜 이렇게 어려운 것인지를 자주 스스로에게 물었던 생각들이 모여 이 책이 된 것"이라고 말로 대신한다.

저자는 이에 따라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아티스트로 태어났으며, 삶이라는 무대에서 모두가 배우로서 각자 자신만의 연기를 해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은 무얼까?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는 저자가 추구하는 삶의 핵심 가치이며, 그녀가 만들어 온 브랜드의 철학이라고 답변한다. 매일, 매 순간을 ‘진짜 나’로 살아가고자 하는 그녀에게, 일과 삶, 일상과 예술의 구분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공간을 만들고, 옷을 입고, 음식을 만들고, 타인과 함께하는 모든 사소한 일상의 아름다움 속에서 일관되게 발견되는 점이 저자의 말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것은 결국 ‘고유함에 대한 예찬’이다.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녀는 “나에게 가장 좋은 레퍼런스는 결국 나 자신”이라고 말한다. “누군가가 이미 만들어놓은 정답을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내가 직접 보고, 듣고, 느끼고, 만지고, 기억하는 모든 것들을 ‘물리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영어로 쓰고 사진도 책 속에 담겨 있다. “Being yourself, not being someone.” 그 과정 속에서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실질적인 감각이 생긴다.”고 말하는 저자의 말 속에는 진실과 진심이 잘 녹아 있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 중에 하나는 ‘아름다움’일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아름다움은 겉모습의 화려함이나 장식적인 감상과는 다르다. 그것은 그저 바라보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무언가를 저 끝까지 알고 싶은” 사랑의 마음과 맞닿아 있다. 대상과 내가 하나가 되어보려는 이와 같은 ‘몰입’은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감정의 동일화”이다. 바게트를 들고 돌아오는 길, 오래된 찻잔의 무늬, 해 질 녘 창문에 드리운 빛과 같은 순간들을 붙잡으며, 저자는 말한다. “그저 세상의 아름다움을 빠짐없이 낚아채는, 아름다운 사냥꾼으로 살고 싶어요. 순간의 위트를 잃지 않으면서요.”라고. 그리고 그 모든 아름다움의 끝자락에는 언제나 ‘사랑’이 있다고 독자는 짐작한다. “"매일 순간의 아름다움을 스치지 않고 기록하고 싶었다.”는 단순한 집필 취지와도 일치한다.

저자가 이 책을 내며 강조하는 말처럼 들리는 반복되는 '나로 사는 것'은 두려움이 동반될 수도 있다. 수많은 사람과 섞여 살아야 하는데, 그것이 인간이기에 불가피하다고 배웠기에 '나답게' '진짜 나로' 산다는 것은 혁명적인 관점의 차이가 있는데 쉽게 가능할까? 이 책을 읽는 독자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면 가질 만한 두려움이다. 두려움을 알고도 그저 시작할 수 있던 '용기'가 필요하며 누구나 낼 수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비에 젖은 작은 새’와도 같은 마음이 들 때, 우리를 다시 날아오르게 하는 건 무엇일까. 무심코 들어간 런던의 한 카페에서 삶의 전환점을 맞이하고, 오래된 빈티지 물건에서 누군가의 시간을 마주하며 저자는 말한다.
“어쩌면 내가 제일 성장할 수 있었던 시간은 가장 약하고 두려움이 가득한, 비에 젖은 작은 새 같던 시절이었다. 열두 번 바뀌는 생각과 출처 없는 공포에 손도 못 쓰고 자꾸만 숨이 차던, 그 안에서 지도 같은 건 손에 쥐지 못한 걸 알면서도, 소맷부리로 눈물을 훔쳐내고, 캄캄한 길목에서 한 발자국 용기를 낼 때, 그 어떤 일의 시작은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 성장했다는 것은 꼭 성공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두려움을 추구했음을 의미한다. 작든 크든 성장했다는 것은 어둡고 보이지 않음을 알고도 발을 내디딘 용기에서 출발했다는 것이, 그 어떤 성공보다 훨씬 큰 의미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는 말한다. 두렵지만 “첫선을 그을 용기만 있다면 우리는 그저 시작할 수 있다.”고.
어쩌면 내가 제일 성장할 수 있었던 시간은 가장 약하고 두려움이 가득한, 비에 젖은 작은 새 같던 시절이었다. 열두 번씩 바뀌는 생각과 출처 없는 공포에 손도 못 쓰고 자꾸만 숨이 차던, 그 안에서 지도 같은 건 손에 쥐지 못한 걸 알면서도, 소맷부리로 눈물을 훔쳐내고, 캄캄한 길목에서 한 발자국 용기를 낼 때, 그 어떤 일의 시작은 바로 그때였다. ‘무엇을 알아냈다.’고 강하고 단단하게, 부족함 없이,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고, 자꾸만 우스워 눈치 없이 그저 서 있던, 알고 보면 더없이 지루했던 때가 아니라.(p.82)

이 책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인터뷰)〉를 제외하고 모두 8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나를 뒤흔든 런던〉, 2장 〈그저 시작할 수 있는 용기〉, 3장 〈진짜의 베이스는 외로움〉, 4장 〈매일의 아름다움〉, 5장 〈생각 없는 생각〉, 6장 〈준비된 즉흥성〉, 7장 〈내가 나로 산다는 것〉, 8장 〈모든 질문의 끝에 사랑이〉 등이다. 제목을 잘 살펴본다면 차근차근 설명하듯이 순서로 배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8개 장에는 모두 186개의 단상(斷想)이나, 짧은 생각 등이 수록돼 있다. 모든 내용이 별도의 생각이나 내용이지만 각 글은 모두 한 가지로 수렴된다. '사랑'이다.
6장 121번째 글을 여기에 옮겨본다. 타인의 경험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내 것이 될 수 있으리라는 착각은 금물이다. 내가 눈을 떠 직접 느끼는 모든 것들만이 결국은 내가 풀어내는 과정에 베이스가 될 거라는 사실을 제법 정확하게 알게 된 뒤로는, 운전을 하거나, 출근길을 걷거나, 회의를 하거나, 팀원들의 스타일을 구경하거나, 줄 서서 커피를 주문하는 사운드들을 라디오처럼 듣거나, 같은 책을 계속 읽거나, 컨펌을 하거나, 수정을 하거나, 스케치를 하거나, 테스트를 하거나, 해의 크기와 높이의 다름을 보거나, 물이 끓고 있는 형상을 보거나, 길 건너 신호 대기 중인 사람을 관찰하거나, 무작정 선 채로 매장의 바이브를 느끼는 일까지. 사소한 발견과 미미할지도 모르는 반응과 기억을 의심하던 매일의 사진과 잊지 않기 위해 써댄 글들의 반복이, 매번 기분 좋은 공짜 학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 하고 있는 일들에 그대로 내가 투영될 때, 그 언젠가의 분주했던, 차분했던, 어려웠던, 즐거웠던 나를 빌려 쓰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저 멀리 언젠가 또 다른 일을 하게 된다면, 두서없이 무엇이든 채우고, 보고, 쓰던 나를 빌려 쓸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기분 좋게 두 눈과 귀와 맘이 바빠진다.(p.229)
아무것도 하지 않고는 내가 무엇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없다. 나를 알아가는 방식이란, 결국 물리적으로 자꾸만 써대는 뭔가라는 점을 나는 잘 알고 있고, 택하고 있다. 고민 같은 것 없이, 자주 생각하고 자꾸 써대는 것들이 모여 잘하는 일이 되는 과정임을 알고 있다. 더 이상 의심 같은 건 접어 두고, 거창하든 사소하든 그저 끌리는 대로 쌓여가는 거대한 시간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믿으며, 나는 그저 간다.(p.247)

마지막으로 〈에필로그(인터뷰)〉에서 두 가지 질문과 답변을 그대로 적는다.
- 예술과 일상이 분리되지 않는 삶을 살고 계신 것 같습니다. 료가 생각하는 ‘예술’과 ‘생활’, 혹은 ‘예술’과 ‘일’ 사이의 경계는 어떤 것인가요?
네. 우리는 이미 예술 안에 살고 있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아티스트’로 태어났으니까요. 인간의 탄생, 나무의 성장, 벌레의 움직임, 돌과 대리석의 질감 - 이 모든 것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너무나 경이롭고 완벽한 질서 속에 존재하고 있어서, 결국 ‘존재 자체가 이미 예술’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거창하거나 특별한 것이 아니라, 나를 나답게 표현하는 모든 방식들, 글씨체, 말투, 먹는 방식, 작은 습관들까지 모든 것이 예술 활동이죠. 그렇게 보면 이 지구에 수십억 개의 예술이 존재하는 것이고, 우리 모두가 저마다의 아티스트로 살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저는 ‘일할 때의 나’, ‘집에서의 나’, ‘사랑할 때의 나’처럼 나를 분리하는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데, ‘워라밸’이라는 개념이 필요하게 된 건 삶이 이미 너무 분절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요. 특히 요즘 많은 사람들이 취미 대신 SNS에서 인증된 즐거움으로만 행복을 추구하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데요. 하지만 예술은 그런 것들과 별개로, 하루하루 나를 발견하고 바라보는 과정 안에 있다고 생각해요. 내 몸의 모양을 관찰하거나, 피부의 감각을 느끼는 것, 발가락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는 것, 그런 일상이 곧 예술 활동인데, 중요한 건 ‘나는 어떻게 남들과 달라질 수 있는가’가 아니라, ‘이미 다르다’는 점을 아는 것입니다.(p.342~343)
- “나에게 가장 좋은 레퍼런스는 결국 나 자신”이라는 자각에 대해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물리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소셜 미디어에서 레퍼런스를 찾거나, 누군가가 이미 만들어놓은 ‘정답’을 따라가는데, 오히려 가장 강력한 레퍼런스는 이미 내 안에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 가장 ‘나’다운 자료이고,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출처인 것이죠. ‘자기 자신을 레퍼런스로 삼는다.’라는 자각은 이런 인식에서 출발했는데, ‘자아’라는 것은 처음부터 정해진 본질이 있는 게 아니라, 순간순간 내가 내리는 선택들의 합으로 구성된다고 생각해요. 그렇기에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 것을 스스로 표현하고, 그것에서 ‘어떤 것을 선택해 지켜낼 것인가?’가 나를 결정하기 때문에, 타인의 정답을 따라가며 성공하려는 건 위험한 오해입니다. 결국 그것은 나에게 맞는 삶이 아닐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자신을 표현하고, 스스로에게 시간을 내어주며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실질적인 감각이 생기고, 그 과정이 진짜 나를 찾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p.344~345)
저자 : 료
런던베이글뮤지엄, 아티스트베이커리, 카페 하이웨스트, 카페 레이어드를 창업하였으며, 현재 브랜드 총괄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