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는 도시의 선택 - 자기다움으로 혁신에 성공한 세계의 도시
최현희 지음 / 헤이북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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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사랑받는 도시의 선택』은 도시 재생에 관한 연구이자, 도시 재생 방향과 방법 등을 두루 담았다. 저자 최현희는 우리나라 곳곳에 각자의 정체성을 살린 매력적인 도시가 많아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연구했던 내용을 다듬어 이 책에 담았다. 서울 등 우리나라 도시는 근대 이후 발전은커녕 오히려 쇠락의 길을 걸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의 필요에 따라 도시의 변화가 심각하게 왜곡되었고, 그나마 남은 도시도 6.25 한국전쟁으로 폐허화돼 간신히 살아난 국민들은 도시 재생 능력도 갖지 못했다. 휴전 협정으로 전쟁이 멈췄을 때는 도시 건설은커녕 재생도 꿈꾸지 못할 정도로 온 국토가 황폐화되었다. 겨우 산업화를 시작했을 때에도 도시 노동자들이 먹고 가르치기 위해 서울로, 서울로 집중됐다. 그나마 건물이 있고 교통 인프라가 조금 갖춰진 서울은 주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책 오로지 경제 발전에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적절한 도시계획도, 도시 노동자 수용 능력이 없는 도시에는 무허가 건물들이 난립했다. 서울을 '살 만한 도시'로 탈바꿈시킨다는 것은 요원한 길인 것만 같았다.

이로 인해 수도와 지방의 균형 발전은 후순위로 밀려났고, 인구의 도시 집중으로 도시와 지방의 인구는 기형적 인구 분포를 보였다. 경제 발전을 우선 국책 사업으로 진행하던 정부 역시 경제 발전의 주요 역할을 할 곳들만 먼저 발전시키기에 급급했다. 다행히 경공업 중심의 경제가 중공업으로 옮겨가며 도시 건설 능력도 차츰 생기기 시작했다. 국민들의 교육열은 수많은 인재를 길러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전 국토를 균형 발전시키기에는 부족했다. 정부 정책에 따라 서울과 주요 도시 몇몇은 발전하기 시작했지만 오히려 농촌 지역 등은 인구가 줄기 시작했다. 농사 지어 먹고 살기 어려우니 도시 노동자로 나섰기 때문이다. 1970년대까지 이런 현상은 지속되었다. 80년대 들어 산업화가 다소 진전되고 임금 수준도 향상되었지만 이젠 빈부의 차가 극심해지는 자본주의 허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파트 개발 붐이 일어났다. 집값은 도시 월급 생활자나 저임금 노동자가 넘볼 수 없을 정도로 치솟았다. 부동산 투기는 이런 과정에서 벌어진 자본 왜곡 현상이다.



그러나 이런 험난한 과정을 딛고 일어난 대한민국은 대단한 나라임에는 틀림없다고 독자는 믿게 됐다. 군부 독재를 딛고 민주화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민주 인사들이 희생됐지만 짧은 시간에 민주화가 진전됐고, 산업화도 성공해 경제적으로 안정돼 갔다. 90년대는 OECD 가입 등 선진국 흉내를 내려다 IMF 금융위기를 겪었다. 이것도 국민들의 일치된 힘으로 극복해 냈다. 지금은 세계 경제력 10위 안의 '경제 대국'의 평가를 받고 있다.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는 자부심이 느껴질 정도로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나라를 다시 세워 건설하고 민주화 과정이 반 세기만에 이루어진 나라는 없다고 하니 '한강의 기적'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독일이 제1, 2차 세계대전의 패전을 딛고 다시 일어선 것을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말한 데서 인용된 것이지만 독일과 일본의 기적과는 또다른 의미가 있다. 

사실 독일과 일본은 전쟁 전에 이미 선진국들이어서 인프라와 국민들의 의식이 선진화되어 있어 회복하기가 더 쉬워졌다. 더욱이 일본은 전후 복구 보상에 대한 책임도 면제됐다는 게 알려진 이야기니 그들은 기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 한국전쟁의 호기를 맞아 미국이 군수품을 일본에서 만들어 보급한 데 따른 이익을 얻어 챙긴 일본은 우리보다 훨씬 좋은 조건을 갖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순전히 '운이 좋아서'라고 폄훼할 이유는 없다. 독일, 일본의 도시 재생을 보면 역시 선진국의 자격을 갖춘 것이라고 할 만하다. 

저자 최현희는 요즘 이 책에서 인구 소멸과 도시 소멸이 급속히 진행되는 시대라고 전제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 북적이던 도시가 쇠락의 길을 걷는 일을 어렵지 않게 불 수 있다는 것이다. 크고 작은 도시들이 도시 재생, 도시 혁신을 목표로 새로운 프로젝트를 야심차게 발표하고 추진하지만 성공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이에 저자는 도시 재생이나 도시 혁신을 위해서는 어떤 문제들을 선결해야 하고,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를 사례 중심과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을 집필했다. 특히 국내 〈1913송정역시장〉, 〈위례스토리박스〉 등의 프로젝트 기획에 참여하고 성공으로 이끌었던 저자가 가파른 내리막길에서 변화를 만들어 낸 세계의 도시들을 연구했다. 혁신을 위한 조직을 구성하고, 원활한 진행을 위한 법률과 제도를 개선하며, 고유한 자원과 재원을 바탕으로, 도시 안팎의 사람들에게 문화예술 활동을 통한 특별한 경험을 제공하며 사랑받는 도시로 자리매김하기까지 어떤 선택을 했는지 하나하나 분석하고 짚어준다.



저자는 또 이 책을 통해 각자의 도시에 적용할 수 있도록 고안한 〈도시 혁신 다이아몬드 프레임워크〉를 제시한다. 이는 도시 혁신을 통합적인 시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도구로서 저자가 직접 고안했다. 저자에 따르면 도시 혁신을 추진할 때 문화예술 활동과 자산, 커뮤니티, 행벙적 요소를 통합하는 총체적인 접근 방식 채택은 필수다. 한발 나아가 성공적인 해외 사례에서 배우고 지역 상황에 맞게 전략을 조정해야 우리의 도시가 활력을 얻어 지속 가능하고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도시로 살아남을 수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사람으로 가득했던 거리에 빈 상가가 늘고 있다는 소식이 전국 곳곳에서 계속해서 들려온다. 인구 소멸과 도시 소멸의 시대, 살고 싶고 방문하고 싶은 매력적인 도시를 만들기 위한 사람들의 관심과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글로벌 성공 사례에서 영감을 얻어 우리만의 고유한 상황에 맞춰 독특함을 펼칠 수 있기를 저자는 기대하고 있다. 이 책이 문화예술로 재미있는 도전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전하고, 다양한 도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집필된 것임을 「당신은 어떤 도시에 살고 싶나요?」란 제목의 〈프롤로그〉에서 분명히 하고 있다.

도시, 특히 우리 도시는 지금 급격한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그 어느 때보다 도시 혁신에 대한 방향성이 중요해졌다고 말한다. 도시는 단순히 건물과 인프라의 집합체가 아니라 우리의 문화적 가치, 경제적 성장, 사회적 결속을 반영하는 살아 숨 쉬는 실체로 변화,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시의 활력은 단순히 미적 매력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거하는 도시민의 삶의 질을 풍요롭게 하고자 하는 노력에서 시작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우리나라의 도시 혁신은 정부 주도의 사업 추진, 민간 부문의 토지 개발, 지역·지방과 각종 위원회의 참여가 결합되어 추진된다. 문화도시 선정을 통해 문화예술 활동을 도시 혁신의 요소로 끌어들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정치 논리로 프로젝트가 중단되고 단절되는 일은 여전히 빈번하게 일어난다고 꼬집는다. 특히 인구 감소로 도시 소멸 위기에 처한 지방 도시에게는 도시의 경쟁력이 절실할 수밖에 없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 책은 모두 6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도시의 시대」, 2장 「도시, 변화가 필요한 순간」, 3장 「도시, 문화예술로 새로 태어나다」, 4장 「도시 혁신에 성공한 네 개 도시」, 5장 「도시 혁신 사례, 다이아몬드 프레임워크 분석」, 6장 「살고 싶은 도시 만들기」 등이다. 각 장마다 2~4개의 하부 항목을 두고 각 장의 주제로 수렴된다. 1장에서는 〈도시를 도시답게 만드는 문화예술 활동〉, 〈모든 도시는 문화예술로 통한다〉, 〈창조도시에 필요한 창조계급〉, 〈도시, 문화예술 영역을 스토리텔링하다〉 등 4개의 항목을 두고 설명한다. 파리의 '모나리자'에 이어 '명실상부한 현대 문화예술의 중심지 뉴욕'의 거듭남을 말한다. 책에 따르면 뉴욕은 금융, 패션, 미술, 출판, 방송, 연극, 영화, 광고의 중심지로서 세계 경제와 문화 수도로 불릴 정도의 명성을 지녔다. 도시 곳곳에 수많은 미숡롼과 박물관, 연극 극단이 자리잡고 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1970년대 뉴욕은 오일쇼크로 재정이 파탄 난 폐허 같은 도시였다. 영화 〈배트맨〉의 매춘과 마약이 넘쳐나는 악명 높은 범죄도시 고담 시티가 바로 황폐했던 옛 뉴욕의 모습과 비슷하다. 그 즈음 뉴욕에서는 한 해 동안 2300건 정도의 범죄가 일어났다. 범죄를 피해 80만 명에 가까운 인구가 뉴욕을 떠나 도심 공동화 현상까지 발생했다. 뉴욕시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여러 방면으로 노력했다. 그중 하나가 공연 산업을 부흥시키는 일이었고, 브로드웨이 쇼가 그 결과다.

뉴욕은 '텍사스에 석유가 있다면, 뉴욕에는 예술가가 있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수많은 문화예술 단체와 500개 이상의 크고 작은 아트 갤러리가 자리 잡고 있다. 뉴욕시의 문화예술 관련 지출이 미국 정부의 예술 기금 예산보다 많다는 마이 있을 정도로 뉴욕시는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정부의 투자에서 시작, 문화예술 기업이 모이고, 창조적 에술가와 관람객이 모이며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크가 뉴욕을 배경으로 형성되었다. 그리고 뉴욕은 세계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도시의 독보적 경쟁력도 생겼다. 이를 바탕으로 뉴욕은 뮤지컬을 도시 브랜드의 자산으로 삼았다. 매력적인 도시 브랜드가 확립되면 관광객이 모이고 경제 발전의 발판이 되며 나아가 도시 전체를 이끌어 갈 수 있는 동력이 된다. 

이 장을 통해 저자는 "21세기에는 문화예술이 사람을 유인하는 가장 강력한 자산이다. 창조적 인재가 도시의 고유한 역사와 환경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예술 콘텐츠를 생산해 낼 때 도시에는 활력이 생긴다. 이는 도시의 가치를 높이고, 도시에 고유성과 정체성을 부여한다. 도시 혁신은 여기에서 일어난다."고 밝힌다.



2장 「도시, 변화가 필요한 순간」에서 저자는 도시에도 인간처럼 생애 주기가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생처럼 탄생의 순간이 있고, 성장의 순간, 그리고 발전의 순간이나 쇠퇴와 지속 가능의 기로에 선 순간이 도시에도 있다는 것. 때로는 도시의 발전이 멈춰 정체기를 맞거나, 상황이 나빠지면 쇠퇴해 소멸로 갈 수도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도시가 쇠퇴 또는 소멸하지 않고 성장과 발전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도시 스스로 변화하거나 혁신해야 할 시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에 따라 도시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해 관계자들의 니즈를 먼저 잘 파악해야 한다. 도시에서 도시민과 도시 사회가 처한 절박한 문제를 먼저 인식하고, 그 문제를 풀기 위한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일이 필요하고 한다. 

저자는 유럽문화 수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개발이냐, 보존이냐의 갈림길에 섰던 이탈리아 볼로냐를 사례로 들고 있다. 옛날에는 화려한 번영의 시대가 있었지만 지금은 과거가 거추장스러울 만큼 가난한 도시의 모습이다. 차가 다닐 수 없는 좁은 뒷골목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고, 낡은 건물이 빼곡하게 들어서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쇠퇴하는 도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낡고 어두운 이미지의 볼로냐에도 남은 것이 있었고 그것이 희망이 되었다고 한다. 오렌지색 벽돌로 만들어진 13세기 중세 건축물과 그 건축물에 남아 있는 긴 주랑 포르티코였다. 볼로냐가 간직하고 있는 문화유산 포르티코는 중세시대 건축물의 특징 중 하나다. 비를 피할 수 있는 천장이 있고 바깥쪽으로는 아치형으로 뚫린 회랑이 건물 외벽을 둘러싸고 있다. 포르티코가 중세시대 건축물의 특징이기는 하지만 볼로냐처럼 건물 대부분에 적용된 것은 없다고 한다. 볼로냐의 건물로 연결된 그물망 같은 포르티코를 모두 이으면 약 38킬로미터 정도가 된다니 조선시대 수도 한양(한성)을 방불케한다. 더욱이 볼로냐에는 중세시대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4킬로미터의 성곽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중세의 흔적을 유지하며 리모델링하는 방법을 선택하면 모두 허물고 새로 지을 때보다 두 배 이상의 비용이 필요하다는 진단이 나왔다. 다각도의 논의 끝에 도시 당국과 시민들은 비용이 더 들더라도 전통적인 중세 도시 건축물과 포르티코의 외관을 유지하고 쓰임에 문제 없도록 내부는 리모델링을 하는 방향을 선택했다.



책에는 도시 재생으로 활기를 찾은 도시 영국의 '리버풀'에 대한 소개도 있다. "리버풀이 비틀즈의 스토리를 중심으로 문화예술 도시로, 음악 도시로 혁신에 성공하였지만, 귿 ㅟ에는 단계적이고 계획적인 도시 재생 과정이 있었다. 리버풀은 시티센터를 중심으로 낙후 지역을 개발했고 문화 인프라를 단계적으로 늘려 가면서 지속적인 발전을 꾀하는데 그중 오래된 부두를 문화단지로 재탄생시킨 앨버트 독 보존 지역이 있다. 앨버트 독은 부두와 물류창고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곳으로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인 알버트 공의 지휘 아래 1846년 오픈했다. 돌을 이용하여 화재에 강한 물류창고 시스템을 세계 최초로 건축한 사례이기도 하다. 이곳은 20세기 중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입항 선박 크기의 변화로 물류창고로서의 경쟁력이 떨어지며 쇠퇴하기 시작했고 1972년, 126년 만에 파산하여 폐쇄되었다. 

1981년 리버풀 재생 사업을 착수하여 1984년부터 차례로 앨버트 독 오피스 건물과 창고 건물을 재생하고, 1986년 해양박물관 이전 개관, 1988년 테이트 리버풀 미술관 개장까지 진행하며 리버풀 경제의 부활을 알리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1990ㄴ녀 비틀즈 스토리, 2007년 국제 노예 박물관 등 박물관과 미술관, 레스토랄ㅇ, 카페 등이 들어서면서 연간 6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p.225~227)


저자 : 최현희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 그리고 문화예술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현대카드에서 일하며 ‘1913송정역시장’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성공으로 이끌어 대통령상 등을 수상했다. 이후 성남문화재단으로 옮겨 ‘위례스토리박스’ 공간 구성과 운영 프로그램 기획을 총괄하고, 유네스코 창의도시 가입 추진 등 도시의 활기와 성장에 기여하는 비전과 전략 수립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기업 브랜딩, 마케팅을 연구하며 서강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문화예술을 통한 도시 혁신 성공 사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자기다움을 바탕으로 구성원 모두가 핵심에 집중할 때 혁신에 성공하고, 생명력 넘치는 브랜드로 누군가의 마음 속에 자리 잡게 된다고 믿는다. 도시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곳곳에 각자의 정체성을 살린 매력적인 도시가 많아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연구했던 내용을 다듬어 책으로 담았다. 대한민국 국무총리 자문위원, 유네스코 국제기록유산센터 심사위원, 성남시 공유무역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고, 현재는 예술과 도시 연구소 소장, (주)에이빅파트너스 대표컨설턴트를 맡아 기업컨설팅, 멘토링, 혁신 등의 강의를 한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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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위험한 이름, 비너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하빌리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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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Venus)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랑과 미와 풍요의 여신을 일컫는 명칭이다. 원래 로마 여신의 이름이었으나 이후 아프로디테 등과 동일시되면서 모성과 아름다운 여성성을 상징하는 말로 폭넓게 사용되었다고 한다. 일본 최고의 추리소설 작가로 평가되고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비너스'를 표제어로 쓴 것은 심상찮다. 특히 비너스가 원래 품고 있는 의미와 같지 않을 것 같다는 강한 인상을 표제어로부터 받은 독자들의 머릿속은 시작부터 혼란스럽다. 소설의 시작은 천재 IT 사업가인 동생 아키토가 실종되고, 어느 날 낯선 여자가 주인공 데시마 하쿠로를 찾아오면서부터다.

“동생이…… 행방불명이에요.”

이 소설 작품 『아름답고 위험한 이름, 비너스』는 어느 날 낯선 여자에게서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부터 시작된다. 여자는 주인공 데시마 하쿠로가 10년 넘게 얼굴 한번 보지 않고 지내 온 이부동생과 갓 결혼한 사이라며 자신을 야가미 가에데라고 소개한다. 그러고는 한술 더 떠 그 동생이 실종되었다면서 동생의 행방을 함께 찾아 줄 것을 부탁한다.

도입부부터 예사롭지 않은 이 작품은 전체 31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500페이지가 넘는 장편소설임에도 예측할 수 없는 반전이 거듭되어 독자로 하여금 그야말로 책에서 손을 뗄 수 없게 한다. 처음에는 사라진 IT 사업가(아키토)를 찾기 위해 그의 아내(라고 소개한 여자) 가에데와 형(하쿠로)이 합심해서 진상을 파헤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내막에는 일본 의학계 명문가의 유산 상속 갈등이라는 복잡한 속사정이 얽혀 있다는 사실이 서서히 드러난다. 이 과정에서 하쿠로가 과거에 묻어 둔 인물들-치매로 투병 중인 재력가 새아버지, 뇌종양을 앓다 세상을 떠난 무명 화가 출신의 친아버지, 16년 전 의외의 장소에서 갑작스러운 사고사를 당한 친어머니-이 현재로 소환된다. 그리고 철저한 주변인이자 조력자로서 ‘동생 실종 사건’에 뛰어들었던 하쿠로는 어느새 사건의 당사자 위치에 서게 된다.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한 잠깐의 틈을 두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행방불명이에요, 아키토 씨가. 벌써 며칠째 돌아오지 않고 있어요.”(p.11)



이 소설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수수께끼는 네 가지로 요약된다. ① 성공한 IT 사업가의 실종과 그를 찾기 위해 분투하는 아내(?) ② 의학계 명문가의 유산 상속을 둘러싼 친족 간의 복잡한 속사정 ③ 사망한 부친의 불가사의한 병과 관련한 뇌 의학의 허와 실 ④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진상 등이다. 하나하나의 스토리가 상당한 무게감을 가진 문젯거리로 마지막 페이지까지 긴밀하게 얽히면서 독자들의 미스터리 추리 능력을 한껏 발휘하게 한다. 아니 어쩌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노련한 소설 구성 능력에 휘둘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가진 채 출발해야 한다. 

소설의 주인공인 하쿠로는 38세의 독신 남성으로 동물병원 수의사이다. 소설이 처음 시작하는 부분에서 그는 '두 마리째의 환자'인 갈색 얼룩무늬 수컷 고양이의 찢어진 항문낭을 치료하려던 차다. 한 통의 전화에 고양이 수술이 뒤로 미뤄진다. 전화를 걸어 온 사람은 남동생 아키토와 비밀 결혼을 했다는 가에데라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아키토가 실종되었다는 급박한 소식과 함께 하쿠로에게 도움을 청한다. 하쿠로를 찾아 온 여성의 옷차림은 하쿠로로 하여금 꽤 이지적이고 도덕적인 성품의 여성으로 보였다. 미모도 특출할 정도로 미인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녀의 미모를 직접적으로 거론하지는 않지만 하쿠로의 마음이 흔들리면서 점점 윤리적 갈등이 깊어진다고 우회 표현하고 있다. 그녀의 옷차림은 공들여 세팅한 웨이브 머리, 어딘지 모르게 작위적인 그녀의 태도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다. 

하쿠로는 적어도 겉으로는 '마음이 올곧고 옳지 않은 일은 정말 싫어하는' 도덕적 성품을 가진 인물이지만 그의 내면에는 매우 세속적인 욕망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그런 하쿠로에게 평일 낮 시간 호텔 라운지에서 당당히 만남을 갖는 비정상적 커플, '나인틴 바'에서 자정이 넘은 시각에 목격되는 호스티스와 고객의 뒷모습 등 마치 불륜이 당연한 일상이 된 듯한 세상 흐름이 자꾸 하쿠로의 의식에 걸려든다.



그러나 히가시노 게이고는 여간 노련한 작가가 아니다. 만일 하쿠로의 속마음과 가에데의 겉모습이 한마음으로 뭉친다면 소설의 향방은 뻔한 삼류 소설로 흐를 위험이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하쿠로가 자칫 위험에 빠지려 할 때마다 '멀리서 울리는 클랙슨 소리'로 퍼뜩 제정신을 차리도록 하는 장치를 아끼지 않는다. 아슬아슬하고 긴장감 넘치게 이끌기 위해서다. 장(章)을 달리하며 하쿠로의 집안 내력이 소개된다. 앞서 언급한 대로 하쿠로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가 다섯 살 때 떠났기에 기억에도 별로 없다. 하쿠로의 아버지는 데시마 가즈키요라는 화가였다. 어머니 데이코의 말에 따르면 무명화가였고 작품도 거의 팔리지 않았다. 

데시마가의 생계를 책임 진 것은 간호사로 일하던 데이코였다. 당시에는 간호사가 아니라 '간호부'라고 했다. 그림 붓을 드는 것 말고는 아무 재주도 없는 가즈키요는 당연히 집안일도 일절 못 했을 것이고, 데이코는 병원 일에 집안일까지 두 가지를 병행하느라 상당히 힘들었을 게 틀림없다. 두 사람이 알게 된 곳은 데이코가 근무하던 병원이었다. 맹장염으로 입원한 가즈키요가 침대에서 쓱쓱 그려낸 그림을 보고 데이코가 저도 모르게 말을 건넸던 게 계기였다.

"처음 네 아버지 그림을 봤을 때 이 사람은 틀림없이 화가로 성공해서 세상에 이름을 떨칠 거라고 생각했어. 보는 눈이 없다는 거 보통 무서운 게 아니라니까."(p.13)

결혼한 지 3년 만에 아이가 태어났다. 하쿠로라는 이름을 지은 것은 어머니 데이코라고 했다. 아버지 가즈키요와는 결국 인연이 없었던 '화백(畵伯)'이라는 호칭의 '백(伯)'이라는 한자에 거장 피카소의 이름 '파블로'를 조합했단다. 반쯤은 오기로 붙인 거야, 라고 데이코는 태연한 얼굴로 하쿠로에게 설명했다.

아버지가 그리는 그림은 하쿠로의 기억에 크게 남아 있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다섯 살 이전의 기억을 상세히 되새길 수는 없을 테니. 그러나 정확하지는 않지만 무슨 도형 같기도 하고 단순한 무늬 같기도 하고, 한참 들여다보면 현기증이 날 것 같은 그림이었단 사실이 떠오를 뿐이다.



게다가 아버지는 아팠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보다 자리에 누워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고 어슴푸레 기억하고 있을 정도니 꽤 오랫동안 앓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하쿠로가 아버지의 병명을 알게 된 것은 하쿠로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였다. 뇌종양이라고 어머니 데이코가 알려 주었다. 데이코가 병원에 일하러 간 동안 하쿠로는 근처에 사는 준코 이모가 맡아 주었다. 준코는 언니와는 달리 전업주부였다. 이모부 겐조는 '대학교 선생'이었다. 무엇을 가르치는 선생인지는 꽤 오랜 동안 알지 못했다. 수학과 교수님이라고 알게 된 것은 중학생이 되고 난 다음이었다. 이후 아버지를 잃은 슬픔도 별로 없었고, 어쩌면 처음부터 없었다고 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하쿠로가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모집과 가까운 곳에 서로 의지하고 살던 어느 날 어머니는 재혼을 한다. 남자는 '야가미 씨'라고 성씨만 들었을 뿐 이름까지는 듣지 못했다. 무척 부자인지 첫 만남에서 하쿠로와 어머니에게 고급 식당의 프랑스 요리를 사준다. 

야가미는 대단한 부자였고, 차도 메르세데스 벤츠 대형차다. 집은 대저택이라고 할 만한 크기다. 그렇게 셋은 맨션에 따로 나와 살았다. 동생 아키토가 태어났을 때 하쿠로는 아홉 살이었다. 어린 하쿠로 입장에서는 갓 태어난 모습이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어쨌든 동생이 태어나 기쁜 일이란 것을 실감했다. 준코 이모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좋겠다' '축하한다'라고 말하고 하쿠로도 순순히 인정했다. 실제로 그 새로운 존재는 매우 신선한 공기를 실어 왔기 때문이다. 야가미가의 분위기가 환해지고 데이코와 야스하루는 항상 명랑함이 넘치는 표정이었다. 함께 살아야 할 하쿠로도 딱히 싫어할 이유는 없었다. 남동생에게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어떻게 지은 이름인지는 알지 못한다. 하쿠로 때처럼 데이코가 '반쯤은 오기로' 붙인 건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했다. 

하쿠로를 찾아온 가에데는 전직 일본 항공 승무원이었다. 아키토와 만나 집안에 알리지도 않은 채 두 사람은 비밀리에 결혼을 했고, 자신의 집안이나 이부 형인 하쿠로에게도 연락을 잘 하지 않은 채 오로지 사업에만 몰두했을까. 그래서 그가 실종되자 각종 의문이 끊이지 않지만 속시원히 말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듯하다.



하쿠로 어머니의 '변사'는 소설 전체를 뒤흔든다. 어머니는 하쿠로가 대학 다니느라 독립 생활을 하면서 조금 멀어지긴 했지만 언제나 마음의 고향이지 않은가. 그런데 어느 날 이부 야스하루에게서 전화가 왔다. "하쿠로, 있잖아, 힘들 일이 생겼어. 정말 힘든 일이······." 신음하는 듯한 야스하루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가슴속에 검은 안개가 뭉클뭉클 퍼져 갔다. 무슨 일입니까, 라는 질문이 쉰목소리로 튀어나왔다.

"데이코가, 자네 어머니가······ 죽었어."

머릿속이 하얘지고 눈앞이 일순 캄캄해졌다. 청각도 마비된 것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처음 귀에 들어온 것은 자신의 목소리였다. 사고가 거의 정지된 상태에서 "왜요? 어떻게요?"라고 묻고 있었다. 

"사고야, 욕실에서 머리를 부딪혔는데 그대로 정신을 잃고 욕조에······, 그래서 익사라고 얘기하고 있어."

"욕실? 어째서요? 왜 그걸 못 막았어요!" 휴대 전화를 움켜쥐고 야스하루를 비난하듯이 소리쳤다. 

"그게 우리 집 욕실이 아니야."

"우리 집 욕실이 아니라니, 그럼 대체 어딘데요?"

"고이즈미 집이야."

헉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고이즈미라면 데이코의 본가, 즉 외할머니가 사는 동네였다.(p78~79)



어머니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는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요한 기둥이다. 16년 전의 뜻하지 않은 사람의 진상을 밝히는 것은 오랜 세월 이들 형제에게 남겨진 마음의 응어리였다. 고전적인 추리 소설의 재미는 아마도 이 부분에서 맛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악인처럼 보였던 누군가는 오히려 도움을 죽는 인물이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뜻밖의 범인이 드러난다. 누가 한편이고 누가 편집증적인 집착을 가진 자인가. "관계가 없다는 근거라도 있나요? 단순히 착한 사람들이라서?"라는 가에데의 말은 독자들의 허를 찌르는 명대사였다고 책의 역자 양윤옥은 「관서의 망」이란 제목의 〈옮긴이의 말〉에서 적고 있다. 역자는 이 작품에서 조연으로 등장한 인물들도 수수께끼 같은 분위기를 더해 주고 있다고 말한다. 매사에 원리 원칙을 따지는 동물병원 보조 간호사 '가게야마 모토미'의 딱 부러진 캐릭터는 특히 매력적이라고 역자는 서술하고 있다. 


저자 : 히가시노 게이고(ひがしの けいご, 東野 圭吾)


일본 추리소설계를 대표하는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 추리소설 분야에서 특히 인정받고 있는 그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소재를 자유자재로 변주하는 능력을 가진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그의 작품은 치밀한 구성과 대담한 상상력, 속도감 있는 스토리 전개로 처음부터 끝까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해 독자를 잠시도 방심할 수 없게 만든다. 일본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히가시노 게이고는 첫 작품 발표 이후 20년이 조금 넘는 작가 생활 동안 35편이라는 많은 작품들을 써냈음에도 불구하고 늘 새로운 소재, 치밀한 구성과 날카로운 문장으로 매 작품마다 높은 평가를 얻고 있다.

『비밀』로 1999년 제52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했으며, 2006년 초에는 『용의자 X의 헌신』으로 제134회 나오키상과 제6회 본격미스터리대상 소설부문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2012년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으로 제7회 중앙공론문예상, 2013년 『몽환화』로 제26회 시바타렌자부로상, 2014년 『기도의 막이 내릴 때』로 제48회 요시카와에이지문학상을 수상했다. 이제까지 나오키 상에 『비밀』, 『백야행』, 『짝사랑』(片想い), 『편지』(手紙), 『환야』(幻夜)등 다섯 작품이 후보로 추천받은 바 있으나 전부 낙선하여, 나오키 상과는 인연이 없는 남자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여섯 번째 추천작 『용의자 X의 헌신』으로 결국 상을 거머쥐게 되었다. 2012년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으로 중앙공론 문예상을, 2013년 『몽환화』로 시바타 렌자부로상을 수상했으며, 2014년에는 『기도의 막이 내릴 때』 로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방황하는 칼날』, 『흑소소설』, 『독소소설』, 『괴소소설』, 『레몬』, 『환야』, 『11문자 살인사건』, 『게임의 이름은 유괴』, 『호숫가 살인사건』, 『브루투스의 심장』, 『한여름의 방정식』, 『몽환화』, 『그 무렵 누군가』, 『가면 산장 살인 사건』, 『인어가 잠든 집』, 『살인의 문』, 『백야행』, 『기린의 날개』, 『한여름의 방정식』, 『신참자』, 『탐정 갈릴레오』, 『예지몽』, 『다잉 아이』, 『뻐꾸기 알은 누구의 것인가』, 『학생가의 살인』, 『오사카 소년 탐정단』, 『천공의 벌』, 『붉은 손가락』 등이 있다. 『방과 후』, 『쿄코의 꿈』, 『거울의 안』, 『기묘한 이야기』, 『숙명』, 『백야행』, 『갈릴레오』등 지금까지 20편이 넘는 작품들이 드라마로 제작되었으며 『비밀』, 『변신』, 『편지』,『용의자 X의 헌신』, 『더 시크릿』등 10여편이 영화로 제작되는 등,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역자 : 양윤옥


일본 문학 전문 번역가. 2005년 히라노 게이치로의 『일식』으로 일본 고단샤에서 수여하는 노마문예번역상을 수상했다.

사쿠라기 시노의 『호텔 로열』, 『별이 총총』,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 스미노 요루의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또다시 같은 꿈을 꾸었어』 『밤의 괴물』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눈보라 체이스』, 『그대 눈동자에 건배』, 『위험한 비너스』, 『라플라스의 마녀』, 『악의』, 『유성의 인연』, 『매스커레이드 호텔』, 『매스커레이드 나이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지옥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아사다 지로의 『철도원』 『칼에 지다』, 마스다 미리의 『5년 전에 잊어버린 것』 오카자키 다쿠마의 [커피점 탈레랑의 사건 수첩] 시리즈, [가가 형사 시리즈], [라플라스 시리즈], [매스커레이드 시리즈], 사쿠라기 시노의 『굽이치는 달』 등 다수의 작품을 우리말로 옮겼다.





<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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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세상과 사랑에 빠지기 열다
헤르만 헤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림원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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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아픔에도 나는 여전히 이 미친 세상과 사랑에 빠져 있다.” 이 책 『미친 세상과 사랑에 빠지기』를 편집해 출간한 폴커 미헬스는 〈서문〉의 첫 문장을 헤르만 헤세가 쓴 유명한 시 「가지치기를 한 떡갈나무」의 마지막 행을 인용했다. 이 시는 온몸 곳곳이 짧게 잘려 나갔음에도 계속 새로운 잎을 틔우는 나무의 예를 들어 자연을 대하는 우리의 이면을 지적하고, 그럼에도 우리에게 자연처럼 용기를 잃지 말라고 격려한 시라는 해석을 덧붙였다. 편집자 미헬스는 이 시를 통해 헤세가 추구한 모든 문학 작품의 단면을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헤세는 나무의 가지치기가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음에도, 평생 살아 있는 모든 것과 사랑에 빠졌다고 헤세를 평하고 있다. "그러다 남들이 비통해하거나, 체념하거나, 냉소적으로 변할 때면 오히려 위기를 성장의 기회로 보면서 새로운 저항력을 키우라고 하며, 독자들에게 아무리 힘들어도 버티라고, 그런 상황을 더 나은 성장을 위한 발판으로 삶으라고 북돋았다."고 말한다. 

미헬스의 주장은 「가지치기를 한 떡갈나무」가 쓰인 시점을 생각해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1919년 7월'.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항복으로 끝나고, 패전국 독일의 청춘들은 나라와 자신들의 앞날이 너무도 고통스러우리라고 매우 우울한 분위기였을 것이다. 헤세는 독일뿐만 아니라 전후 모든 나라의 젊은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날마다 야만의 고통을 견뎌 내며 또다시 저 빛 속으로 얼굴을 내민다. 세상은 죽도록 조롱했지만, 내 본질은 파괴될 수 없는 것. 나는 만족하고 화해하며 참을성 있게 새로운 잎을 틔워 내"듯이 나무에 비유적으로 오늘의 고통을 참고 견디고, 용기를 내라고 주문한다. 

이런 재생력은 헤세의 문학에서 여러 방식으로 형상화되어 있다고 미헬스는 강조한다. 심지어 그런 힘은 그의 정치적, 문화비평적인 글들과 독자 편지에 대한 무수한 답장들에서도 주된 모티브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에 미헬스는 이 책 『미친 세상과 사랑에 빠지기』에서는 헤세의 성찰과 편지 중에서 특히 그런 세계관이 잘 표현되어 있는 것들을 뽑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이 책을 새롭게 엮어 선보인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미헬스에 따르면 국경과 세대를 초월해 헤세를 현재의 개인적 생활 방식의 선두 주자로 만들어 준 것도 바로 그런 글들이다. 왜냐하면 헤세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진지하고 중요하고 진기한 존재로 받아들이고, "세상의 현상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반복되지 않고 오직 단 한 번만 그렇게 교차되는 점"(『데미안』)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사이 헤세의 전 세계적인 부흥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이 세상의 유일무이한 개인이 자기 속의 잠재력을 충분히 펼칠 수만 있다면 인간의 삶과 문화는 더욱 풍요롭고 다양해지리라는 생각이 큰 몫을 차지한다.

헤세가 죽고(1962) 몇 년 뒤 미국에서는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던 젊은 세대들이 헤세를 발견해 냈는데, 1970년대 이후 그것이 전 세계적인 현상으로 굳어진 것이다. 독일 문학사에서는 유례가 없던 일이었다. 지금까지 헤세의 책은 60여 개 언어로 번역되넝ㅆ고, 세계적으로 1억 부 이상이 팔렸다. 그런데 헤세 생전에 발표된 작품은 전체의 절반이 채 되지 않는다고 미헬스는 지적한다. 방대한 유고는 1965년부터 단계적으로 발굴되었다. 색감이 다채롭고 표현력이 강한 3,000여 점의 수채화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다 오래지 않아, 총 20권에 1만4,000여 페이지 분량의 첫 번째 전집이 출간되었는데, 거기엔 그의 중요한 문화 비평 및 정치적 고찰, 자전적 저작, 칼럼, 일기까지 총망라되었다고 미헬스는 설명한다. 독일 문학을 새로운 차원에서 풍성하게 하는 사건이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미헬스는 헤세가 생전에 이미 나이를 떠나 기성세대의 경직된 생활 방식에 저항하는 젊은 작가였다고 평가한다. 그 자신도 부모 집으로 대변되는 세상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했듯이, 그의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들도 자신의 내적 성향에 반하는 온갖 형태의 외적 강요에 저항한다는 것. "중요한 한 것은 개인적인 것이다!" 삶을 긍정하는 이 모토는 적극적이고 지혜롭고 책임감 있는 사회봉사를 위한 전제 조건이라고 미헬스는 언급한다.



이 책은 헤세의 이러한 힘과 세계관이 잘 표현되어 있는 글들을 모아 엮었다. 삶의 현장에서 길어 올린 헤세의 사유의 정수가 담긴 명문장들을 엄선했다. 미헬스는 최초의 헤세 전집을 발간하고 평생 헤세의 수많은 저작들을 연구 및 편집한 이 분야의 권위자이다. 국경과 세대를 초월해 헤세를 오늘날의 상징적 위치에 있게 만든 것은 바로 이러한 글들이라고 〈서문〉에서 밝힌다. 번역은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등 헤세의 대표작을 비롯해 카프카, 무질, 프로이트, 뷔히너와 같은 수많은 독일 고전들을 유려하게 번역해 온 박종대가 맡았다.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싯다르타』 등 세 작품은 방황하는 청춘을 위한 헤르만 헤세의 내면 탐구 3부작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데미안』은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헤르만 헤세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져 있다. 『유리알 유희』 등 세계문학의 기념비적 걸작을 남기며 독일 문학의 거장으로 우뚝 선 헤르만 헤세는 그의 사후 60년이 지나도 여전히 독일은 물론 세계 모든 지역에서 청소년들의 필독서로 지정받고 있을 정도다. 고통 속에서도 삶을 사랑하고, 위기를 성장의 기회로 보았던 헤세의 재생력은 그의 문학과 삶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는 개인의 개성을 말살하고 획일화하려는 사회의 모든 시도에 대해 격렬히 저항했고, 외부의 평준화 압력에 맞서 자기만의 개인적이고 고유한 영역을 지키라고 끊임없이 말했다. 이 일은 헤세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패전국이 된 어수선한 독일의 분위기에서 싹트는 전체주의에 맞서 스위스로 망명한 일도 그의 세계관과 맞물린 것이 아닌가 쉽게 짐작케 한다.

자신의 길을 확신하지 못하는 한 청년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한창 성장 중인 청년이 고유한 개인이 되려는 강한 열망을 갖고 있고, 그래서 평균적이고 일상적인 삶에서 강하게 이탈할수록 남의 눈에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며, “내면에 깃든 이상과 꿈이 시들지 않도록 세계에 맞서 자신을 지키라”(p.22~23)고 조언한다.



또 다른 글에서는 “올바른 길로 나아가는 방법”은, “자기 자신을 깨닫되 스스로에 대해 판단하거나 스스로를 바꾸려 하지 말고, 우리 속에 예감의 형태로 미리 그려져 있는 삶의 모습으로 최대한 가깝게 다가가는 것”(p.34)이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삶의 표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삶은 우리 각자에게 고유한 임무를 맡길 뿐”이기 때문이다. 그 임무를 따라가는 과정은 비록 쉽지 않지만, 그렇기에 “자신의 삶”이란 “언제나 고되면서도 아름다운 것”이라고 헤세는 말한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헤세 자신이 그렇게 살기 위해서 노력했다. 헤세의 작품들이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은, 그의 글 속에 그의 삶 자체가 신실하게 녹아 있기 때문이다. 미헬스는 작가로서 보기 드문 헤세의 미덕으로 무엇보다 그의 “인간적인 고결함”을 꼽으며 “그는 작가로서 말한 대로 살았다. 세상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삶의 마지막까지 상처받으며 살았다”고 말한다. “그의 삶과 작품은 마지막 순간까지 나머지 없이 딱 떨어지는 방정식과 비슷해 보인다.” 헤세는 삶과 글이 분리되지 않은 작가였다. 그의 삶이 고통스러웠던 것은 그가 세상 속에서 부단히 자신의 신념대로 살고자, 작가로서 자신의 고유성을 지키며 살아가고자 노력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상처받고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러한 삶을 사랑하며 나아가고자 투쟁했던 헤세의 생생한 육성이 이 책에 담겨 있다. 그 기록들이 안겨 주는 격려와 위로가 독자들에게도 생생히 가닿기를 바란다고 미헬스는 기대한다.

헤세의 견해에 따르면, 오늘날 "정치권력이 있는 곳"에서는 "정치적 이성"이 거의 작동하지 않기에 "재앙을 막거나 완화하려면 비공식적인 집단의 지성이 유입"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정신적 자극은 헤세의 전 작품에 스며들어 있다고 미헬스는 역설한다.



문명 비판적인 『페터 카멘친트』에서부터 학업에 치인 한 학생의 비극적 삶을 다룬 『수레바퀴 아래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토마스 만이 그 감동적 전율을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 슬픔』에 비교한 『데미안』, 부르주아지의 해체를 다룬 『황야의 이리』, 그리고 모든 학제의 통합적 유토피아를 꿈꾼 『유리알 유희』에 이르기까지 조목조목 작품과 해석을 곁들이며 증명하듯 작품의 성격을 정리해준다. 『유리알 유희』에서 주인공은 대안적 교육 이상향 역시 관료주의와 비사회적 자기 목적에 매몰되기 시작하자 그곳을 떠난다. 

미헬스는 지금껏 거의 다섯 세대 전부터 헤세를 읽는 독자층은 주로 14~35세 사이의 젊은이들이다. 아직 이상을 꿈꾸고, 사회에서 되도록 자신에게 의미 있는 일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 말이다. 이들은 헤세의 작품에서 격려와 응원을 느낀다. 그의 작품들은 외부의 평준화 압력에 맞서 자기만의 개인적이고 고유한 영역을지키라고 끊임없이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시기를 지나 양보와 굴복 없이는 버틸 수 없눈 생업 전선에 뛰어들면 많은 사람이 헤세를 불편하게 여긴다. 그의 책을 읽으면 자신이 예전의 이상을 배신하고 있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러다 가식적 삶을 살았던 생업 전선에서 은퇴하면 헤세와 청춘의 선한 의지로 다시 돌아가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것이 헤세의 독자 통계에서 청년층과 노년층이 최상위를 차지하고, 반면에 소의 사회에서 기득권을 형성하는 연령대는 거의 보이지 않는 이유이다. 헤세 저술의 테마는 정치, 문학, 음악, 회화, 종교, 정신분석, 교육, 행복, 유머, 사랑, 청춘, 노년, 죽음에 이르기까지 굉장히 다채롭다. 게다가 그의 인상적인 자연 및 풍경 묘사와 여행기는 무척 간명하고 사실적이어서 따로 해석에 의지하지 않고도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그의 책 속에 꾸며 낸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그건 헤세가 우선적으로 대중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글을 쓰기 때문이라고 미헬스는 분석한다. 헤세는 이런 식으로 삶과 시대가 개인에게 부여한 여러 문제들, 그러니까 재능 있고 양심적인 사람이라면 더더욱 어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는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한다. 그는 모든 걸 직접 체험했고, 엄청난 고통 속에서 글을 쓸 때가 많았기에, 복잡한 이슈도 지극히 단순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고 풀이한다.



한창 성장 중인 청년이 고유한 개인이 되려는 강한 열망을 갖고 있고, 그래서 평균적이고 일상적인 삶에서 강하게 이탈할수록 남의 눈에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나는 당신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당신이 그 필요성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게 당신의 ‘광기’를 세계에 강요하거나 세계를 혁명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건 당신의 내면에 깃든 이상과 꿈이 시들지 않도록 세계에 맞서 자신을 지키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꿈의 아성인 우리의 어두운 내면세계는 끊임없이 위협받고, 동료들에게 조롱받고, 교육자들에게 기피되고 있습니다. 그건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만들어져 가는 과정입니다.(p.22~23)


저자 :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년 독일 남부 뷔르템베르크의 칼프에서 태어나 목사인 아버지와 신학계 집안의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1890년 신학교 시험 준비를 위해 괴핑엔의 라틴어 학교에 다니며 뷔르템베르크 국가시험에 합격했다. 1892년 마울브론 수도원 학교에 입학했으나 기숙사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시인이 되기 위해 도망쳐 나왔다. 1899년 낭만주의 문학에 심취하여 첫 시집 《낭만적인 노래》와 산문집 《자정 이후의 한 시간》을 출간했다. 첫 시집 《낭만적인 노래》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인정을 받았고 문단에서도 헤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후 1904년 장편 소설 《페터 카멘친트》를 통해 유명세를 떨치면서 문학적 지위도 확고해졌다. 같은 해 아홉 살 연상의 피아니스트 마리아 베르누이와 결혼했으나 1923년 이혼하고 스위스 국적을 취득했다. 1906년 자전적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를 출간했고, 1919년에는 자기 인식 과정을 고찰한 《데미안》과 《동화》, 《차라투스트라의 귀환》을 출간했다. 인도 여행을 통한 체험은 1922년 출간된 《싯다르타》에 투영되었으며, 1946년 《유리알 유희》로 노벨문학상과 괴테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1962년 8월 9일 뇌출혈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기실현을 위해 한시도 쉬지 않고 꾸준히 노력했다.


엮은이 : 폴커 미헬스


1943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마인츠 대학에서 의학과 심리하긍ㄹ 공부한 후 독일의 주어캄프 출판사와 인젤 출판사에서 독일 문학 전문 편집자로 일했다. 특히 헤르만 헤세의 유고집을 출판하는 일에 헌신했으며, 20권으로 된 최초의 헤세 전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1990년에는 헤세의 고향 칼프에 헤세 박물관을 건립하는 일을 담당했ㅎ으며, 출판사를 퇴직한 후에도 계속 헤세의 작품을 연구하고 편집하는 일에 몰두했다. 


역자 : 박종대


성균관대학교 독어독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쾰른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사람이건 사건이건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이면에 관심이 많고, 환경을 위해 어디까지 현실적인 욕망을 포기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 자신을 위하는 길인지 고민하는 제대로 된 이기주의자가 꿈이다.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의 『세상을 알라』, 『너 자신을 알라』, 『사냥꾼, 목동, 비평가』 , 『의무란 무엇인가』, 『인공 지능의 시대, 인생의 의미』를 포함하여 『1일無식』, 『콘트라바스』, 『승부』, 『어느 독일인의 삶』 ,『9990개의 치즈』,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등 1백 권이 넘는 책을 번역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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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애플 스트리트
제니 잭슨 지음, 이영아 옮김 / 소소의책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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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시공간은 21세기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정치적 체제는 민주주의이다.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체제이다. 즉 시장에서의 자유 경쟁, 사유재산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왕과 귀족 중심의 정치제도에서 실시된 자본주의는 지나친 부의 편중으로 많은 폐단이 드러나 민주주의 정신에 어긋난다는 시민 계급이 등장해 국민이 통치자를 직접 선거로 뽑고, 국민의 뜻을 대신할 의원을 뽑아 통치자를 감시 견제하는 역할을 맡겼다. 이것이 현대 자본주의 민주주의 체제다. 그러나 이것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민 계급의 혁명으로 공화정으로 바뀌었으나 공화정 통치자들의 권력은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과정에서 안정된 사회를 이끌지 못했다. 결국 왕정 복귀 세력이 다시 세력을 잡으면 반대로 숙청을 단행했다. 안정된 사회로 유지되기까지는 많은 기간이 소요됐다. 이런 사회에서는 새로운 시민 계급에게나 혜택이 돌아갈 뿐 일반 피지배 계급이었던 무산 계급은 핍박 받고 부를 쌓기는 어렵기만 했다. 더욱이 러시아는 서양에서 사라진 봉건 시대의 유물인 농노 제도를 20세기 들어설 때까지 유지하고 있었다. 

카를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9세기 등장했다. 이들은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계급(무산 계급)의 혁명으로 공산주의에 의한 정부를 수립할 것을 촉구했다. 공산주의란 함께 일하고 똑같이 나눈다는 원칙을 말한다. 토지는 실제 농사를 짓는 농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이론을 앞세웠다. 서양 각 나라의 무산 계급은 환영할 만한 일이었지만 이들이 혁명을 주도하고 정부를 수립하도록 방치할 귀족들은 없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농노뿐만 아니라 노동자 대부분이 환영했다. 일은 죽도록 했지만 늘 굶주리고 교육을 받는 것은 생각도 못할 정도였으니 어쩌면 공산주의 자양분이 되기에 충분히 준비된 셈이다. 러시아 로마노프 가문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는 레닌을 앞세운 '노동자 계급 해방투쟁동맹'의 지도자들에 의해 축출되고 가족과 함께 처형됐다. 러시아는 공산주의가 지배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서양 문명은 20세기 초 민주주의·자본주의 체제의 나라와 공산주의 체제로 양분된다. 실험적으로 들어선 공산주의 러시아는 채 한 세기도 넘기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패권을 차지한 미국과 소비에트 연방(소련)은 결국 세계의 주도권을 차지하려는 '냉전' 체제로 돌입했다.



미·소의 냉전은 미국의 승리로 끝났지만 러시아는 완전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아직도 러시아는 러시아의 패권 부활을 위해 여전히 독재 체제에 별 다른 거부 의사가 없는 듯하다. 스탈린 시대처럼 냉혹한 정치를 펼치지는 않지만 러시아는 20년이 지나도록 푸틴의 권력 아래에서 러시아 부활을 여전히 꿈꾸고 있는 듯하다. 사실 우크라이나 전쟁도 과거 러시아 입장에서 생각하면 소련의 속국이었지만 소련 붕괴 후 독립했다가 이젠 서방 문명과 함께하고자 했다.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을 인정할 수 없다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불법 침략한 후 지금 3년째 전쟁 중이다. 

명실상부한 세계의 패권국이 된 미국은 또다른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외부의 러시아의 팽창 의욕과 G2로 떠오른 중국의 급부상으로 패권 다툼을 벌여야 할 상황이 된 것이다. '세계의 경찰'을 자임하고 세계 분쟁에 관여하고 끊임없이 영향력을 늘려가던 미국의 앞날이 탄탄대로를 벗어나 있다는 것은 세계 곳곳에서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베트남 전쟁 미군 철수 때는 소련이 건재한 데다 중국이 아직 힘을 갖추지 못해 견제가 비교적 쉬웠으나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더욱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발을 뺀 것도 이익이 없이 자국내 문제로 등장하기 전에 스스로 퇴각을 결정하는 바람에 위신도 깎였다. 뒤이어 우크라이나 전쟁, 오랜 분쟁 지역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도 터졌다. 이래저래 사면초가 형국이다. 특히 미국은 인종차별과 빈부의 극심한 차이에 의한 사회 정의에서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 세계의 경찰국으로서 군림했던 미국의 자칫 자국의 문제마저 해결하지 못한다면 세계에서 패권국의 위치는 흔들릴 수 있다. 막강한 군사력도 내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힘을 쓸 수 없다. 

이 책 『파인애플 스트리트』는 미국의 거부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춘 소설 작품이다. 이는 읽는 독자들 입장에 따라서 '빈부격차'의 심각성을 부각시킬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이 소설 작품은 부동산으로 막강한 부를 쌓은 '스톡턴 가'의 세 여성에 대한 이야기다. 집안의 맏딸인 달리는 두 아이의 엄마로, 출산과 함께 회사를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한다. 그리고 둘째 딸 조지애나는 유쾌하고 때로 철부지같이 구는 밀레니얼 세대로, 비영리 단체에서 일하면서 한 남자를 짝사랑한다. 마지막으로, 스톡턴 가의 아들과 결혼하면서 뜻하지 않게 파인애플 스트리트의 대저택에서 살게 된 사샤는 가족 모임에서 외부인 취급을 당하기 일쑤다.



소설의 주요 무대인 뉴욕에서 스톡턴 가는 부동산 투자로 막대한 재산을 축적해 '파인애플 스트리트'에 자리 잡은 하나의 특권이자 차별적 지위를 형성한다. 그곳에서 펼쳐지는 일상적인 모습에는 다양한 욕망과 편견, 그리고 차별이 꿈틀댄다. 그것은 곧 독자들의 마음속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저자 제니 잭슨은 케빈 콴, 코맥 매카시 같은 유명 작가들을 담당했던 베테랑 편집자 출신이라고 한다. 소설의 배경이 된 곳은 뉴욕 브루클린 하이츠에 있는 과일 이름의 거리 중 하나인 파인애플 스트리트다. 표제어로도 쓰였다. 뿐만 아니라 저자인 제니 잭슨이 현재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뉴욕의 거리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다단한 일상생활이 생동감 넘치면서도 세밀하게 그려진다. 책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소설은 〈뉴욕 타임스〉를 비롯한 여러 매체에 실린 자본주의와 세대 간 자산 이동에 대한 밀레니얼 세대의 인식을 다룬 기사가 그 출발점이 되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소설의 중심에는 세 명의 여성이 있다. 한 집안 사람인 이들은 서로 다른 입장과 시선으로 가족, 사랑, 돈, 그리고 관계의 문제 등을 바라보면서 고민하고 갈등하고 화해한다. 그 이야기는 곧 많은 이들이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일상으로,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시시때때로 느끼는 감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해준다. 부동산 투자로 엄청난 부를 쌓은 스톡턴 가의 아들과 결혼한 사샤가 주인공이나 다름없다. 물론 스톡턴 가에는 세 여인이 함께 산다. 파인애플 스트리트의 대저택이다. 모두가 부러워할 만하지만 그녀는 남편의 식구들이 사용한 온갖 물건이 여전히 남아 있는 집 안에서 타임캡슐에 갇힌 듯한 기분이 든다. 게다가 무엇 하나 자기 마음대로 바꿀 수가 없다. 시댁 사람들의 추억이 깃들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남편의 여형제들에게 꽃뱀’이라 불리며 자신이 외부인 취급을 받는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다. 그들은 왜 사샤를 진정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못할까? 상대적으로 소박한 집안 때문에? 아니면 부자들끼리만 결속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그 답은 결국 사샤 자신의 이야기에 있었다. 그녀 또한 누군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밀어내기만 했음을 인지하게 된다.



스톡턴 가의 막내딸인 조지애나는 비영리 단체에서 일한다. 밀레니얼 세대인 그녀는 친구들과 자주 어울리고, 파티에 입고 갈 옷을 신중하게 고르고, 가끔 어머니와 테니스도 친다. 그런데 그녀는 엄청난 비밀을 숨기고 있다. 프로젝트 매니저와의 불륜, 그리고 갑작스런 비행기 추락 사고. 조지애나는 슬픔과 죄책감에 시달리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고, 물려받은 신탁재산 전액을 기부하기로 결심한다.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재단을 설립하고 새로운 출발점에 선 그녀의 행보는 향후 10년간 수십 조 달러가 세대 간에 이동할 것이라는 〈뉴욕 타임스〉의 기사와 그 궤를 같이한다. 이러한 조지애나의 이야기는 개인의 행복이 자신에게 주어진 맹목적인 조건이 아닌 타인과의 나눔에 의해 좌우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스톡턴 가의 맏딸이자 두 아이를 키우는 달리는 한국계 이민자 2세인 남편이 실직하자 후회가 밀려든다. 막대한 유산을 포기하고 사랑에 모든 것을 걸기로 한 것부터 인종차별적이고 족벌주의적인 시스템에 휘둘려 결국 자신의 경력이 끝나버린 것까지. 한국계 이민자 2세라고 해서 사실 관심이 컸으나 그 문제는 집중적으로 다뤄지지 않는다. 사실 주제와는 관련 없는 인물 설정이 아닐까 하는 게 독자의 솔직한 심정이다. 이전에는 몰랐던 돈의 위력이 현실로 다가오고 가족에게도 남편의 실직 사실을 말하지 못한 채 깊은 고민에 휩싸인다. 그러면서 화려하고 흥미진진한 인생을 꿈꾸었던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며 남편을 원망하지만 그 역시 많은 것을 희생했음을 깨닫는다. 그녀가 돈을 벌어야만 스톡턴 가 사람으로 환영받을 수 있다고 은연중에 말해온 것은 아니었는지 되돌아본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책 『파인애플 스트리트』의 기저에는 차별 또는 불평등이라는 현대 미국 사회가 풀지 못한 숙제가 광범위하게 깔려 있다. 속물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뉴욕의 근성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으면서 각각의 캐릭터가 은밀하게 속삭이는, 때론 내면에서 강렬하게 폭발하는 감정의 선율이 소설의 매력을 배가시킨다. 언뜻 무게감이 느껴질지도 모르는 메시지는 경쾌하고 유쾌하게 전해진다. 저자의 역량일 것이다.



소설 속 스톡턴 가가 흔히 졸부로 지칭되는 이들처럼 속물적으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부를 상속받은 뉴욕 상위 1퍼센트 가문이지만 부정한 이득에 신중한 편인데다 장거리 비행이 아니면 이코노미석을 이용하고, 철커덕거리는 소리를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직접 차를 몰고, 절대 집을 개조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들은 매일 엄청난 생활비를 쓰고 있다. 대저택과 별장에 드는 관리비와 세금, 각종 클럽의 회원비, 아이들의 학비, 가정부의 급료 등등. 부자들은 이를 알고나 있을까? 이러한 특권이 자신들에게 원래부터(대를 이어) 당연하게 주어진다고 여기는 건 아닐까? 어쩌면 그들은 이제껏 한 번도 가난한 생활을 해본 적이 없기에 자신이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사회적 차별 또는 불평등은 분명 누군가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된다.

소설에 등장하는 세 여성은 나이도, 상황도 다르지만 가족을 매개로 이어지면서 각자가 생각하고 느끼는 돈, 사랑, 그리고 관계의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짚어낸다. 이 소설은 가족의 의미를 한 번쯤 깊이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어줄 뿐만 아니라 뉴욕의 상류사회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슬그머니 들춰보는 흥미진진한 읽기가 될 것이다. 빈부의 차를 지적하는 데에만 치중해서는 소설의 유쾌함을 느끼기 힘들다. 다만 차별이나 빈부의 문제를 티내지 않지만 슬그머니 흘리는 듯 독자들이 의식해서 읽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미국 사회는 이미 부에 대해 '환상'을 가진 자들이 넘져나고 있다. 이를 지적한다는 것은 미국 사회에 부적응자로 낙인 찍히기 십상이다. 독자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의 미래를 보는 듯한 안타까움이 있다. 


사샤는 결혼 후 몇 달 동안 파인애플 스트리트의 새집에 적응하려 애썼다. 남편의 식구들이라는 고대 문명을 연구하는 고고학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녀가 발견한 것은 투탕카멘의 무덤이 아니라 달리가 6학년 때 만들었다는 기형 버섯을 닮은 재떨이였다. 사해문서가 아니라 코드가 초등학교 때 솔방울의 종류에 관해 쓴 과학 에세이였다. 병마용이 아니라 애틀랜틱 애비뉴의 한 치과에서 받아온 공짜 칫솔이 한가득 들어 있는 서랍이었다.(p.25)



이 소설을 번역한 번역가 이영아는 책의 뒷 부분 〈옮긴이의 말〉에서 스톡턴 가의 실세라 할 수 있는 '틸다'에 주목하고 몇 가지를 밝힌다. "그녀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극단적인 성격의 부잣집 마님이다. 그야말로 온실 속 화초 같은 그녀는 뻔뻔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순진하고, 순진함이 지나쳐 가끔은 천박해 보이기까지 한다. 갈등을 일으킬 만한 문제는 고의로 피하고, 그저 그녀의 세상이 영원한 꽃다발이기를 고집한다. 그녀가 자녀를 대하는 태도는 돈을 대하는 태도와 닮았다."고 지적한다. 어떤 문제를 깊이 파고들어 분석하는 법이 없는 성격을 지적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그녀를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다. 그 뻔뻔스러운 속물근성과 별난 성격은 소설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가장 큰 요소이기도 하다. 저자 제니 잭슨은 얄밉게 비칠 수 있는 상류층 인물들의 인간적 허점이나 약점을 드러내어 매력적인 캐릭터를 구축한다."고 말한다. 미국 거부인 스톡턴가 사람들에 대해 비판의 말보다는 '그렇게 살아가도록 된 사람들'이라는 면죄부를 주는 것 같아 독자로서는 다소 씁쓸하다. 하지만 그것도 한국적 시선이라는 되치기를 당할까 우려된다. 그냥 독자의 혼잣말임을 양해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부자들끼리 결속이 잘되는 또 다른 이유는, 입에 올리기 싫은 사실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이용당할지 모른다는 은밀한 걱정 때문이었다. 그들의 주말 별장, 좋은 술, 큰 아파트, 파티, 인턴직, 벽장, 그리고 돈을 이용해먹으려는 인간들이 두려운 것이다. 달리는 이런 행태를 다양하게 목격했다. 여자친구에게 보석과 노트북을 사주고 거액의 휴가비를 대주는 남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여자들은 이 남자들이 연애를 하려고 뇌물을 먹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뿐이다. 또 어떤 남자들은 보틀 서비스 비용을 대주거나 햄튼스에 있는 저택을 사주면서 식객을 그러모았다. 큰 재산을 나눠 쓰는 것과 이용당하는 것은 다르고, 그 차이를 알아차리는 것이 가끔은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나를 좋아하지만 내 신용카드로 재미를 볼 마음은 없는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는 편이 어떤 면에서는 더 편했다.(p.330)


저자 : 제니 잭슨(Jenny Jackson)


앨프레드 A 크노프의 부회장 겸 편집장. 윌리엄스 칼리지를 졸업하고 컬럼비아 출판 과정을 수료했으며, 현재 가족과 함께 브루클린 하이츠에서 살고 있다. 2023년에 발표되어 화제를 불러일으킨 ??파인애플 스트리트??는 세계적인 도시 뉴욕의 상위 1퍼센트에 속하는 집안의 세 여성이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과 현대 사회의 가족, 돈, 사랑, 상실에 대한 재기발랄한 탐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역자 : 이영아


서강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사회교육원 전문 번역가 양성 과정을 이수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걸 온 더 트레인』, 『몹쓸 기억력』, 『스티븐 프라이의 그리스 신화』, 『쌤통의 심리학』, 『민주주의는 여성에게 실패했는가』, 『익명의 소녀』, 『라이프 프로젝트』, 『행복은 어떻게 설계되는가』, 『도둑맞은 인생』, 『마음의 문을 닫고 숨어버린 나에게』, 『쌤통의 심리학』 등 다수가 있다.




<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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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유를 읽는 시간 - 국내 최초 아이유 음악 평론
조성진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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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유는 처음부터 솔로였다. 수많은 쟁쟁한 팀들 사이에서 솔로로 등장해 홀로서기에 성공한, 정말 대단한 아티스트다."(p.18)

"아이유는 음악 하는 순간, 자신을 그곳에 몰입시키는 집중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p.21)

"아이유는 언젠부턴가 전문가들 사이에서 감정이입, 표현 등에서 텍스트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p.23)

"한글의 음절 하나를 이렇게 아이유처럼 해부하듯 다채롭게 접근하며 듣는 이에게 온갖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가수를 찾는다는 건 쉽지 않다."(p.25)

"노래할 때 자신의 소리를 어떻게 써야 한다는 걸 아는 가수는 드물다. 하지만 이미 아이유는 이 노래에선 이런 소리를 내야 하고 또 이런 곡에선 저런 소리를 내야 한다는 걸 정확히 알고 있다."(p.26)

"아이유는 이미 그 자신이 높은 수준의 문장가, 문인이다. 아이유의 탁월한 가사 쓰기는 이미 많은 히트곡이 증명한다. 특히 「밤편지」 가사는 고등학교 국어 교사들이 수업 중에 예제로 사용할 만큼 명문으로 알려져 있다."(p.30)

"아이유의 가성은 통상적 가성 수준을 넘어서는, 무척 난도 높은 발성이다. 여러 보컬트레이너들은 아이유의 이러한 방식의 발성 스킬에 대해 일반인이 흉내 내기엔 어려운, 굉장한 내공이 필요한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p.34)

"아이유는 안정적 발성의 전형이다. 초기엔 소리가 확실하게 정립되지 않은 점도 보였지만 이후 체스트보이스-미들보이스-헤드보이스-팔세토 네 가지 소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음역대 제한 없는 차원까지 올랐다."(p.37)

"아이유는 어떠한 곡에[서건 그 쓰임에 맞게 창법이 유연하게 매칭되며 듣는 이를 즐겁게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음악인·아티스트로서 더욱 강력하게 업그레이드되고 있다."(p.41)



앞선 문장들은 국내 최초 아이유 음악 평론집이라는 이 책 『아이유를 읽는 시간』 앞 부분 20페이지 정도에 나타난 아이유에 대한 저자 조성진의 찬사다. '찬사'나 '찬가'라기보다 오히려 '찬양'에 가깝다는 게 독자의 솔직한 심정이다. 독자도 아이유를 좋아한다. 독자는 음악에 소질도 없고, 그래서인지 음악과 별로 가까이 하지 못했다. 대학 다닐 때 트로트 몇 곡과 포크송 몇 곡 따라부를 정도로 음악과는 거리가 멀었다. 따라서 좋아했던 가수는 '조용필' 이외에는 없었다. 물론 포크송 가수 대부분을 싫어할 이유도 없고, 실제 싫어해본 적도 없지만 누군가 "좋아하는 가수는?"이란 질문을 한다면 독자의 대답은 오로지 '조용필' 한 사람뿐이었다. 그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돌아와요 부산항에」, 「창밖의 여자」,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라는 노래를 독자가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노래를 누가 독자에게 시킨다면 입은 닫힌다. 독자처럼 중년 세대는 노래를 부르라고 마이크를 들이대면 도망다녔을 정도니 크게 못난 행동은 아니었다. 

독자가 학교 다닐 무렵 우리 한민족의 특성을 선생님들에게 배울 때 "음주가무를 즐기는 평화적 민족이었다. 평화를 상징하는 흰옷을 즐겨 입었고, 5,000년 역사 동안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전쟁을 일으킨 적도 한 번도 없다"고 배웠다. 그야말로 선량한 선남선녀의 나라라는 말이다. 그런데 농경 사회는 대체로 침략의 필요성이 별로 없다. 사회도 안정되고 먹을 것도 자신이 일해서 만들어 먹는 것, 자급자족이 가능하니 굳이 목숨 걸고 남의 나라의 것을 빼앗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논리는 아마 일본의 우리나라 강제 점령한 일에 대한 반일·항일 정신을 교육시킨 게 아닐까 지금 와 생각해본다. 그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했던 곡은 대부분 트로트라는 장르다. 한이 많아서일까? 민족의 한과 얼이 서려 있다는 가사와 곡이 「아리랑」과 비슷해서일까? 

그리고 조용필이 갑자기 우리에게 다가왔다. 특히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광폭풍이랄 만큼 인기를 끌었다. 한 맺힌 울분을 풀어내는 듯한 가창력이 가장 돋보였을 것이다. 포크송 가수 송창식처럼... 아무튼 80년대에는 애창곡이 트로트에서 조용필 식 가창, 송창식의 발성 등 밴드나 록이 꽤 힘을 얻는 시대였다. 어쩌면 사회 분위기 탓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90년 대에 들어서며 대중 음악의 흐름을 바꾼 이들은 '서태지와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우상이었다. 가사에서 뿜어낸 강력한 메시지는 그들의 음악과 춤과 잘 어울렸다고 한다. 이때의 이야기는 모두 친구나 TV에 나와서 평가하는 음악하는 사람들이 평가한 내용이다. 독자는 그런 수준에 못 미치니까 "그런가보다" 하고 인정할 뿐이다. 이 책 『아이유를 읽는 시간』은 우리 대중 가요 흐름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문제점이 있어 변화를 모색하는 비평서도 아니다. '아이유'란 천재적 가수에 대한 최초의 평론집이다. 평론에는 으레 문제점도 지적하게 마련이지만 이 책은 찬사 일색이다. 앞서 독자가 언급한 대로 '찬양' 수준이다. 독자도 아이유란 가수를 좋아하지만 이 정도의 평가를 받으리라고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몰랐다. 

걸 그룹이 장악했고, 아이돌이 장악한 대중 가요를 아이유는 홀로서기 해서 누구보다 뒤지지 않게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쌓아온 것으로 독자는 알고 있다. 거기에 〈국민 가수〉란 호칭이 붙을 정도가 되어서야 그렇게 노래를 잘 부른가? 인지하게 됐다. 독자의 낮은 음악성과 낮은 애호도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곧 아이유를 좋아하게 됐다. 그가 공연하는 곳에는 직접 가지 못했지만 영상을 통해 몇 번 본 적이 있다. 그의 노래가 압도적이란 사실을 슬슬 느껴지기 시작했다. 단 한 번의 기회로 쉽게 친하기 어려운 중년이 아이유를 좋아한다면 '주책'이란 말을 들을까 걱정돼 가끔씩 이어폰을 끼고 들은 적이 있지만 누구에게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기부 천사'란 소식과 함께 그를 이야기하는 시간이 TV에 비쳤다. 물론 '기부 천사'가 주제가 아니고 그의 노래와 인기에 대한 프로그램이었다. 이후 〈국민 가수〉, 〈국민 여동생〉이라는 호칭도 별스럽지 않았다. 그의 음악은 더욱 발전해 가고 있었다. 

이 책은 아이유의 발성·가창과 음악 전반을 집중 분석한 평론에서부터 데뷔 때부터 현재까지 아이유와 관련한 A부터 Z까지 모든 사항을 담아낸 말 그대로 아티스트 아이유에 대한 완벽한 바이블이라고 출판사 소개글은 말한다. 저자 조성진은 80여 명이 넘는 관계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방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정리했으며 평론가, 실용음악(보컬) 교수, 보컬트레이너, 작곡·편곡자 등을 통한 전문적 깊이와 다양한 시각으로 아이유의 음악을 분석했다. 또한 이 책을 통해 처음 공개되는 아이유의 비하인드스토리는 그의 팬들에게 읽는 즐거움을 더해준다.



저자는 「아이유, 비교하기 어려운 몰입의 미학」이란 제목의 〈프롤로그〉에서 '몰입'에 대한 이야기부터 꺼낸다. 저자에게 몰입은 집중과 비교한다. 집중은 시간만큼 피로도 동반하지만 몰입은 그 순간부터 몇 시간이 찰나처럼 짧게 느껴진다는 차이점을 제시한다. 저자는 예전부터 아이유가 부른 노래와 출연한 드라마를 접할 때마다 집중과 몰입이란 단어가 자연스럽게 오버랩됐다고 털어놓는다. 아이유는 '이번에는 이걸 해야지' 하는 순간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한다고 밝힌다. 이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목적한 대상에 몰입해 무아의 경지로 치닫는다고 강조한다. 아이유가 목적한 대상이고 목격한 대상이 아이유가 되는 것이란 설명이다. 

저자에 따르면 2024년 7월 아이유 공식 유튜브 채널 구독자 수는 971만 명을 넘어섰다. 솔로 가수로서 이만큼 적극적인 팬덤을 지니고 있는 아티스트는 없다. 말 그대로 독보적이다. 그는 무려 5장의 정규앨범과 6장의 미니앨범을 보유한 음악가다. 나이는 31세지만 디스코그래피의 양과 질로 본다면 이미 ‘중견’ 가수다. 여기에 싱글 및 각종 콜라보 음원, OST까지 합치면 200여 곡에 달한다. 비슷한 또래의 가수들이 정규앨범 1?2장 또는 미니 앨범 몇 장 정도 발표한 게 대부분인 점을 감안하면 아이유가 음악적으로 얼마나 치열한 행보를 걸어왔나 짐작할 수 있다. 아이유는 한국 음악이 보여주는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그는 수많은 아이돌이 탄생하고 명멸해간 시간 속에서 자신만의 가치를 오롯이 빛내며 지금보다 앞으로의 행보에 더욱 기대를 갖게 하는 몇 안 되는 아티스트이다. 때문에 아이유가 만들어 온 시간을 살펴보고 앞으로 만들어 갈 시간을 생각해보는 것은 대한민국 음악의 미래를 한발 앞서 엿보는 것과도 같다.

이 책은 5장의 정규앨범과 6장의 미니앨범 및 디지털 싱글과 듀엣/콜라보 음원들, 그리고 2장의 리메이크 앨범에 이르기까지 총 124곡을 모두 리뷰했다. 또 평론가 및 실용음악(보컬) 교수, 보컬트레이너, 작곡-편곡자 등의 인터뷰를 통해 최대한 전문적 깊이와 다양한 시각을 반영했다. 곡마다 아이유가 사용한 발성 방식, 그리고 창법 스타일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고 그 곡에선 왜 그런 발성으로 노래했는지, 곡 가사와 딕션 연출의 특장점, 사용한 코드 보이싱의 의미 등등 다양한 각도에서 심도 높은 분석을 시도했다. 관심도가 높은 몇몇 유명 곡은 전문가들의 평을 더 많이 담으려고 했다.



이 책은 4개의 파트로 구성돼 있다. 1부 〈아이유의 의미: 깊이를 알 수 없는 몰입의 미학〉, 2부 〈아이유의 시간: 앨범을 통해 본 아이유의 발성 · 가창 변화와 특징〉, 3부 〈우리가 만난 아이유-전문가들이 생각하는 아이유〉, 4부 〈올어바웃 아이유: 아이유의 모든 것〉 등이다. 1부에는 14개 장(章)으로 나누어 아이유의 대중 음악사적 의미를 다진다. 14개 장에 담긴 많은 이야기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으니 제목 몇 개로서 내용을 짐작하자면 「소리로 하는 ‘연기’, 곡에 자신을 캐릭터화시키는 극한의 몰입력」, 「곡 쓰기와 딕션, 대중음악사의 이정표」, 「탁월한 리듬감」, 「개성과 깊이, 독창적인 ‘작가주의’ 근성」, 「최고 수준의 마이크 활용술」, 「콜라보의 의미를 가장 잘 아는 아티스트」 등이다. 제목만 보아도 그가 어떤 가수인지, 아이유란 가수는 어떻게 평가되고 있는지에 대해 짐작할 수 있다. 저자가 아이유를 탁월한 아티스트로 표현하는 이유에 대해 충분히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최고 수준의 마이크 활용술」에서 저자는 아이유만의 음악적 매력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탁월한 마이크 활용이라고 말한다. 마이크는 음파를 전기적인 에너지 변환기나 센서로 전달해 소리를 같은 파형의 전기신호로 변환해주는 장치다. 귀가 감지할 수 있는 음압·주파수의 범위는 넓은데, 마이크의 출력은 음성 톤과 범위뿐 아니라 귀의 감도와 일치하도록 필터링될 수 있다는 것. 마이크의 특장점을 잘 활용할 줄 안다면 장르마다 그에 어울리는 감정선을 연출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아이유의 마이크 테크닉이 예사롭지 않다는 뜻이다. 노래하는 방식에 따라 소리도 다양하게 연출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이를 테면 상반신을 많이 움직이는 가수도 있고, 미동도 없이 노래하는 가수도 있으며, 온몸을 떨어대며 열정적으로 노래하는 가수도 있다. 마이크를 입에서 멀리 떨어지게 해 사용하거나 입 바로 앞에 또는 아예 대고 노래하는 가수도 있다. 이 같은 마이크 공학적, 기술적 발전으로 마이크는 이제 정확하고 안정된 최적의 소리를 전달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에 맞춰 세계적 가수 비욘세, 머라이어 캐리 등이 각종 공연과 녹음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는 것. 아이유 또한 수십 개가 넘는 마이크를 사용하며 자신이 원하는 색상으로 커스텀한 마이크도 애용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아이유는 데뷔 10주년 투어 콘서트 〈이 지금dlwlrma〉에선 보라색부터 은빛, 파스텔 톤 등 다양한 커스텀 마이크로 노래한 바 있다고 알려준다. 또 데뷔 11주년을 맞아 마이크를 신상으로 바꿨다고 팬들에게 알리기도 했다고 전한다.



음악 문외한인 독자에게는 아이유 찬사보다 저자의 음악 해설 수준의 각종 부분적 디테일한 설명에 적지 않은 음악 지식을 챙길 수 있었다. 아이유에 대해 더 알고 싶은 것들을 저자가 미리 짐작하듯 차근차근 말해준다. 음악 상식이 크게 업그레이드됐을 것으로 믿는다. 아이유 밴드를 따로 소개하는 화면을 본 적이 없어 아이유 밴드가 따로 있다는 말은 호기심을 자극했다. 책의 4부 '카테고리 2'에서 아이유 밴드가 소개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아이유의 공연 등 각종 활동을 서포트하기 위해 결성된 밴드로 홍소진(건반·밴드 마스터), 김승호(드럼), 최인성(베이스), 김동민(기타), 조재범(퍼커션), 김현(세컨드 건반) 등 각 분야 실력파 연주자 6인으로 구성됐다. 오랫동안 함께 연주 생활을 해온 사람들끼리 뭉친 팀인 만큼 남다른 호흡이 강점이다. 사정이 생겨 공연을 함께하지 못한 최인성 대신 구본암이 2~3차례 객원 베이스 연주를 하기도 했다. 최인성은 아이유 밴드의 특장점을 이렇게 말했다. “오랫동안 함께 연주해온 멤버끼리 함께하다 보니 호흡이 남다르다는 게 아이유밴드의 가장 큰 장점이다. 또한 멤버별 뮤지션으로서도 월등한 연주력을 갖추고 있어 어떠한 연주도 가능하다. 함께 연주하는 가운데 서로를 고무하고 발전시켜준다.”(p.294)


정규 4집 〈Palette〉로 아이유는 음악적 깊이와 감성 표현, 그리고 이젠 발성 스킬을 초월했다고 할 만큼 노래를 ‘부르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완벽하게 ‘연기’하는 ‘베스트 오브 베스트’ 아티스트로 자리했다. 〈Palette〉는 20대 아이유의 예술적 감수성이 가장 높게 구현되고 있는, 한국 대중음악사에 빛나는 명반 중의 하나다. 「밤편지」, 「잼 잼」, 「이 지금」, 「사랑이 잘」, 그리고 타이틀곡인 「팔레트」와 「이름에 게」까지 어느 것 하나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진정한 ‘웰메이드’ 명품의 보고다.(p.146)


저자 : 조성진


언론인 겸 음악평론가 조성진은 1,000여 장이 넘는 음반 해설 및 월간 〈뮤직랜드〉와 〈핫뮤직〉 편집장, ‘벅스뮤직’ 미디어/콘텐츠 팀장, 서울재즈아카데미(SJA) 학과장, 아주경제 문화연예부장을 거쳐 스포츠한국 연예부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시계에도 조예가 깊어 럭셔리 시계 전문기자로도 활동 중이다. 2006년 일간지 최초로 중앙일보에 가수 발성을 분석 시도한 〈조성진의 음치불가〉 칼럼을 8개월 연재하기도 했다. 《우리가 몰랐던 임영웅 이야기》, 《록 음악에 열광하는 당연한 이유들》, 《헤비메틀 대사전》, 《재즈 음반 가이드 300》, 《모던록 음반 가이드 319선》, 《초보 그룹 사운드 길들이기》, 《HOT GUITAR PLAYERS 515-세계의 기타 영웅 515인의 연주세계》, 《문답식 기타 수리법》 등 다수 저작물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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