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여인의 속삭임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6
알론소 꾸에또 지음, 정창 옮김 / 들녘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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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녘 출판사의 일루저니스트 그 여섯 번째 이야기인 <고래여인의 속삭임>을 읽었다. 책을 다 읽고 나자마자 바로 작가인 알론소 꾸에또를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다. 분명히 페미니즘 계열의 소설인데, 이 글을 쓴 이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너무나 궁금했다. 왜냐구? 어쩌면 이렇게 여성들의 심리 묘사를 잘 집어내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하지만, 결과는 남성 작가였다. 그는 현재 라틴아메리카의 페루 리마에서 열심히 작가 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페루 가톨릭 대학교에서 저널리즘을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고래여인의 속삭임>의 플롯은 간단하다. 사십 대 초반의 유능한 국제부 신문기자인 베로니카 로스가 주인공이자 화자로 등장한다. 이야기의 맨 마지막에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그녀에게 벌어진 한 편의 공포드라마 같은 이야기들을 글 속의 글, 다시 말해서 액자식 구성으로 풀어낸다.

이웃 콜롬비아 보고타 출장길에서 돌아오는 길에, 고래 같이 거대한 옛 친구(그녀는 친구라는 표현을 거부한다) 레베카를 만나게 된다. 어린 시절, 다른 친구들 몰래 만나 같이 읽은 책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마리아 칼라스의 노래를 같이 듣던 친구였지만 어느 사건으로 말미암아 지난 25년간 전혀 교류가 없다가 우연을 빙자한 필연으로 만나게 된다.

주인공 베로니카는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피트니스 센터를 다니면서 다이어트를 하고 파티에 갈 때마다 타인에게 돋보일 화장과 드레스를 고르는데 시간 투자를 아끼지 않는 그야말로 사회에서 성공한 인텔리 여성의 전형으로 묘사된다. 특히 알론소 꾸에또 작가의 베로니카 화장술에 대한 묘사는 이 작가가 정말 남자인가 할 생각이 들 정도로 세심한 터치를 보여준다.

한편, 페르난도 보테로의 화풍을 연상시키는 레베카는 뚱뚱한 몸매와 튀지 못하는 외모 때문에 늘 고독이 그녀의 벗이자, 먹을 것으로 위로로 삼는다. 이모가 물려준 유산으로 백만장자, 아니 천만장자가 된 레베카는 어느 순간 오래전 친구 베로니카의 삶 속으로 뛰어들면서 이 두 친구 간의 관계는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관계에 초점을 맞춘 이 소설이 순간, 미스터리 스릴러로 돌변한다.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레베카가 베로니카가 일하는 신문사로 수도 없이 전화를 걸고, 베로니카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심지어는 그녀의 정부 패트릭이 사는 아파트 위층 맨션을 사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베로니카는 경악한다. 하지만, 그녀 역시 과거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걸까? 이 모든 사단의 원인이 됐던 25년 전의 사건으로 알론소 꾸에또는 독자들을 유인한다.

베로니카와 레베카라는 상반된 캐릭터들의 대비를 통해, 꾸에또 작가는 현대인들의 외모 지상주의에 일침을 가한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절대 자유로워질 수 없는 캐릭터인 베로니카의 강박적 다이어트는 레베카의 폭식과 상극을 이룬다. 하지만, 그 둘의 내면에는 모두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또 사랑받고 싶은 심리가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베로니카의 흔들리는 가족과의 관계 역시 문제로 다가온다. 첫 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일 니코와의 관계를 끝내고, 서둘러 결혼하게 된 지오반니와의 결혼생활은 열정, 애정 그리고 의무감의 관계로 소멸하여 간다. 오로지 아들 세바스티안만이 가정에서 그녀의 위로가 될 뿐이다.

25년 전 주변 사람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던 레베카는 자신의 비밀친구 베로니카로부터 적극적 옹호를 원했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결정적인 순간에 레베카와 선을 긋고, 그녀를 모욕한다. 그 순간, 레베카는 그야말로 끝 모를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아니었을까? 자신이 믿고 의지했던 이로부터의 배신은 그 숱한 시간이 지나도 절대 잊을 수가 없는 모양이다. 결국, 레베카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참을 수 없는 분노를 폭발시키면서, 이 둘의 위태위태한 우정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제목만 듣고서는 마누엘 푸익의 <거미여인의 키스> 같은 에로틱한 느낌이 들었다. 고래여인의 속삭임이라니……. 하지만, 책을 읽을수록 캐시 베이츠 주연의 영화 <미저리>가 떠올랐다. 한편, 다른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의 작품들과는 달리 암울했던 과거의 정치적 이야기들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알론소 꾸에또 작품의 변별력을 느낄 수가 있었다.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꾸에또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이 국내에 소개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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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피부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1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 지음, 유혜경 옮김 / 들녘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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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동안 두 개의 영화에서 보고 느낀 기시감이 엄습해 왔다. 하나는 1982년 존 카펜터 감독의 <괴물>(The Thing) 그리고 다른 하나는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데블스 오운>이었다. 전자는 카탈루냐 출신의 문화 인류학자이자 작가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의 <차가운 피부>의 전반적인 줄거리가, 그리고 후자는 이 소설의 주인공의 인생의 궤적을 조명해 준다는 점에서 서로 공명하고 있었다.

소설의 초반부에서는 어떻게 해서 화자이자 주인공인 내가 남대서양의 외딴 섬에 흘러들어오게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지난 세기 초반까지도 해도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 고아 출신의 주인공은 후견인을 만나, 인생 전반에 대해 배우게 된다.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반란의 기질을 지닌 아일랜드인의 후예답게 공화국군에 가담하면서, 삶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결국, 영국으로부터 그렇게 원하던 독립을 쟁취했건만 새로 들어선 신정부 역시 기존의 영국과 다를 것이 없는 전제정치를 펼친다. 이에 환멸을 느낀 주인공 나는 자발적 망명길에 나서게 된다.

그렇게 해서 이 이름 모를 섬에 기상관으로 발을 내딛게 된 나는, 행적을 찾을 수 없는 전임자의 부재 가운데 곧 삶을 위한 치열한 투쟁에 나서게 된다. 밤만 되면 출몰해서 습격을 가하는 정체불명의 ‘괴물’들로부터 오로지 살아야겠다는 생각밖에 할 수가 없다. 이런 인간과 괴물 간의 이분법적 대립구도 속에서, 다른 것들은 돌아볼 여지가 없다. 이런 치열한 생존경쟁을 하는 주인공과 이웃 등대에 거주하는 오스트리아 사람 바티스 카포라는 역시 신원을 알 수 없는 동지와 공통의 목적인 생존으로 의기투합한다.

끝없이 밀려드는 괴물들의 공격 앞에, 주인공과 바티스 카포는 바리케이드와 소총 심지어는 다이너마이트까지 동원해서 무자비한 폭력으로 맞선다. 하지만, 어느 순간 주인공은 괴물들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설정은 마치 영국 식민주의자들이 남아프리카를 침략할 당시, 그에 대항해서 맞선 줄루족 전사들과의 전쟁을 연상시켰다. 철저하게 서구인들의 처지에서 본 야만족들이 소설 <차가운 피부>에서는 무식하게 아무런 전략도 없이 오로지 인해전술로 밀어닥치는 “괴물”로 치환되고 있었다.

하지만, 주인공의 평화와 공존에 대한 생각은 소수의 의견일 뿐이다. 자신과는 다른 의견과는 일체의 소통을 거부하는 바티스 카포야말로 주류 식민주의자들의 표상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바티스 카포가 마스코트로 데리고 있는 아네리스는 성적 착취의 대상이자 쾌락의 도구일 뿐이다. 왠지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노라는 침략과 폭력 그리고 수탈로 일관했던 식민제국시대의 변명처럼 들릴 뿐이다.

주인공은 그 와중에서도 자신이 섬에 파견된 임무를 다하기 위해 나름대로, 일지도 기록하지만 거듭하는 괴물들의 공격 앞에 모두 무의미한 노력이었다. 어느 순간, 괴물들의 세계에 침입한 인간들이야말로 이질적인 존재로 이 모든 갈등의 원인이 아닐까 하는 깨달음에 도달하게 된다. 물론 바티스 카포의 비협조 탓도 있지만, 여전히 총을 내려놓지 못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하나 있었다. 바티스 카포도 그리고 주인공도 마침내 1년마다 한 번씩 들르는 구원의 손길이 도착했을 때, 왜 그 지옥 같은 섬을 떠나지 않았을까? 거의 광기에 사로잡히다시피 해서, 살기 위해 수도 없이 총질을 하고 다이너마이트로 거의 자신들의 아지트인 등대를 날려 버릴 뻔 했으면서도 끝내 섬에서 벗어나는 걸 거부한 이유가 무얼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작가의 첫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놀라운 흡입력이 점층적으로 작동하면서, <차가운 피부>에 몰입하게 하여 주었다. 괴물들에 대항하기 위해 마련된 레밍턴 소총과 2천 발의 탄알 그리고 어마어마한 양의 다이너마이트라는 소설적 장치들이 조금은 부자연스럽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한 편으로는 이해가 됐다. 그 수많은 괴물을 달랑 두 명이 함께 도끼나 칼로 상대하는 게 말이 되지 않았을테니까 말이다.

<차가운 피부>에 이어 우리나라에 두 번째로 소개된 같은 작가의 <콩고의 판도라>가 기대된다. 이번에도 완전히 예측할 수 없고, 전혀 새로운 이야기로 만나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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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밑 악어
마리아순 란다 지음, 아르날 바예스테르 그림, 유혜경 옮김 / 책씨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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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기시감으로 서가에서 이 책을 골라냈다. 그 제목만으로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책이 아닌가 말이다. 침대 밑에 악어라니,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우선 글쓴이는 마리아순 란다라는 이름의 스페인 출신의 작가다. 이 책외에도 <벼룩, 루시카>라는 책을 한 권 봤는데 그 책 역시 재밌을 거 같다는 예감이 든다.

우선 주인공으로 작가는 JJ라는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금융업계에 종사하는 샐러리맨을 등장시킨다. 도대체 JJ라는 이름은 뭐의 이니셜일가? 호세 훌리오(Jose Julio) 정도 되려나, 나의 상상력의 한계는 그 정도로 만족하고 물러선다. 어쨌든 잠자리에서 일어난 JJ는 자기 침대 밑에 회색빛을 한 파충류 악어가 떡하니 도사리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여행용 가방 크기만 한 녀석은 JJ의 구두를 씹고 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구두를 먹이로 삼는 악어라니.

도대체 악어가 어디에서 나왔건 간에 독신자 JJ는 그 녀석을 원래 있던 곳에 돌려보내고자 한다. 동물원에서 탈출했을까? 하지만 그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층수를 생각해 본다면 그것도 황당한 일이다. 악어가 있었음직한 동물원 놀이동산에 전화해 보지만, 미친 놈 취급을 받는다. 그의 유일한 친구인 정육점의 주인장 세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역시 예상대로 그 구두 먹는 악어는 JJ에게만 보이는 슈퍼 투명 악어였다!

사무실의 참견쟁이 에우랄리아 아줌마와 JJ의 짝사랑녀 엘레나의 시선을 피해 가며, 자기 친구 이야기인양 악어 이야기를 꺼내본다. 결국 JJ는 에우랄리아의 아줌마의 조언대로 병원을 찾는다. 의사에게서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처방전을 받은 JJ는 약사로부터 악어병이 거미병보다는 나은 증상이라는 위로를 받는다. 하지만 도대체 약을 먹어도 낫지 않는 그의 악어병은 점점 더 심각해지기만 할 따름이다. 우리의 JJ는 과연 어떻게 이 지긋지긋한 악어병으로부터 탈출할 수가 있을까.

일견 황당해 보이는 악어의 상징성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보게 됐다. 도대체 이 소설에서 악어는 JJ에게 어떤 의미일까? 그거야말로 이 소설을 이해하는 결정적 코드가 아닐까 싶었다. 그 실마리는 의사가 처방해준 크로커다일 알약에서 찾을 수가 있었다. 독신의 광기에 사로 잡혀 홀로 사는, 현대인들의 번뇌, 고독 그리고 불안에서 비롯된 복합적 증세가 타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악어라는 실존적 괴물의 정체인 것이다.

동시에 그 큰 도시에서 친구라고 마땅하게 부를만한 사람이 달랑 한 명 있다는 설정 또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직장 동료로 나오는 매력녀 엘레나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고 싶지만, 소심하게 말도 채 꺼내지 못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악어에게 잡아 먹힐까봐 전전긍긍하는 JJ에 대한 묘사가 현대인의 심리에 대한 직격탄처럼 날아든다.

이런 불안과 현실로부터의 괴리들은 타인과의 통섭과 교류를 통해 치유된다. 자포자기한 상태의 JJ에게 갑자기 찾아온 엘레나와의 대화를 통해 드디어 주인공은 악어병을 극복하기에 이른다. 흉악한 포식자로 알았던 악어가 알고 보니 보잘 것 없는 도마뱀이었다는 설정에 그만 웃음이 터져 버렸다. 역시 모든 것은 나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유심론(唯心論)의 변주였던걸까.

개인적으로 이런 소품 스타일의 글들이 좋다. 곧바로 마리아순 란다의 다른 책 <벼룩, 루시카>에 도전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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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트 Young Author Series 1
남 레 지음, 조동섭 옮김 / 에이지21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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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책읽기 즐거움 중의 하나는 바로 책에 나오는 지명들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읽은 남 레 작가의 <보트>는 나에게 여러 가지 도전을 제공해 주었다. 물론 뉴욕이나 히로시마, 카르타헤나 그리고 테헤란 같이 누구나 다 알만한 지명 말고, 정말 낯선 곳 말이다. 책 속에서 천국보다 낯선 느낌을 구가한다고 해야 할까?

그런 점에서 남 레 작가의 세계를 돌며 펼쳐지는 7개의 이야기들 중에서 그 첫 번째 이야기의 배경은 그야말로 미스터리였다. 베트남 출신으로 호주에서 교육받고 자란 작가는 미국 아이오와의 모처에서 작가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던가. 호주에서 살고 있는 그의 아버지와 4년 만의 만나게 되는 곳이 어디일까. 벌링턴 스트리트와 서미트 스트리트만으로 단서로 그가 사는 도시의 이름을 찾는 재미란, 낯선 작가의 이야기의 작은 길을 따라 가는 것만큼이나 즐거웠다. 구글맵을 이용해서 아이오와 주와 이웃 위스콘신 주를 가르는 미시시피 강 연안의 더뷰크(Dubuque)라는 도시라는 것을 알아냈다.

창작의 고통에 빠져 있던 작가는 아버지의 이야기로부터 자신이 쓰고 싶었던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나간다. 자신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작가적 임무가 새삼 다가온다. 1975년 사이공 함락, 무력통일, 재교육 수용소 그리고 1979년의 탈출은 맨 마지막 이야기 <보트>의 선순환적 구조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그 사이에 5개의 세계의 곳곳의, 때로는 아마도 어느 부분에 있어서는 작가의 개인적 체험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 이야기들이 전개된다. 사실 이 책의 목차를 보고 가장 관심이 갔던 이야기가 바로 <카르타헤나>였다. 하지만 그 배경은 콜롬비아의 카르타헤나가 아니라, 14살짜리 킬러 주인공이 주무대로 활동하는 메데인이었다. 이 단편의 플롯은 브라질 영화 <시티 오브 갓>을 바로 떠올리게 했다. 무엇보다 과연 14살짜리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태어나 산 햇수만큼의 사람을 죽이고, 생활비를 벌고 어머니를 위해 집을 샀다는 주인공의 무용담이 허공을 휘젓는다.

그 다음으로 가장 마음을 끄는 이야기는 <히로시마>였다. 2차 세계대전 막바지의 일본을 그 무대로 하고 있다. 이오지마와 오키나와 후, 1억 총옥쇄를 운운하면서 미군의 상륙에 대비하고 있는 모습과 세계 최초로 원폭 피해지인 히로시마의 이미지가 중첩되고 있었다. 원자폭탄 한 방으로 악랄한 침략자·가해자의 입장에서, 피해자로 거듭난 그네들의 변신에 씁쓰름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개인적으로 <보트>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꼽자면, 죄책감이 아닐까 싶다. 전쟁과 탈출이라는 고통의 순간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죄책감, 어려서 이별한 딸과 함께 하지 못한 죄책감, 죽어가는 어머니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자신에 대한 자책감 등의 비애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다. 그런 비슷하면서도 다양한 상황 가운데 전개되는 이야기의 서술이 매력적이었다.

아쉬운 점은 서로 연관되지 않은 이야기들 때문인지, 책을 읽다가 어느 순간 동력의 실종된 지점에서 책읽기가 버거워져 버렸다. 사실 <테헤란의 전화>는 여전히 이해불가 코드다. 그래도 <보트>는 막 포기하려던 순간에, 작가의 글처럼 “종일 기다리다가 막 떠나려 할 때 무엇을 내놓는다.”(208쪽) 남 레 작가의 타이틀이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보트>에 등장하는 죽음의 여행은 사이공 함락 이후, 역사적 고찰 대신에 오로지 탈출과 생존만이 선이었다는 아버지 세대의 변명처럼 다가온다. 보트피플인 마이, 퀴엔 그리고 트렁 간의 죽음 가운데 삶의 희망을 건져 보려는 노력이 그저 무망할 뿐이다. 정말 그런 처참함을 경험한, 세대의 추억담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위험한 과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말하지 않는 과거는 더욱 치명적이겠지만.

책 속에서 남 레 작가가 말했듯이, 오직 자신만이 쓸 수 있는 그만의 다음 글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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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 라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권미선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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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그동안 누군가 나에게 전작주의를 하는 작가가 있냐고 물으면 없다고 자신 있게 대답해 왔다. 하지만 올해 들어 나에게 전작주의에 도전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두 명의 작가를 만났으니 한 명은 커트 보네거트이고, 다른 한 명은 루이스 세풀베다다. 뒤늦게 루이스 세풀베다의 작품세계와 만나게 된 나는 그 늦음을 만회하기 위해 부지런히 세풀베다의 책들을 구해서 읽고 있는 중이다. 아쉬운 점 중의 하나는, 출간된 지 채 몇 년이 되지 않았지만 그의 책들이 절판의 운명에 처해 있다는 점이다.

<감상적 킬러의 고백>, <파타고니아 특급 열차>, <귀향>(모두 절판되었다)에 이어 네 번째로 내가 만난 루이스 세풀베다의 책은 바로 <핫 라인>이었다. 그의 작품 세계는 친환경적인 자연과 동화된 삶을 그린 자연주의적 색채를 가진 작품 군과 추리소설의 양식을 품은 흑색소설 혹은 누아르 소설로 나뉜다고 한다. 폰 섹스를 뜻하는 <핫 라인>은 후자의 분류에 속한다고 할 수가 있겠다.

이번에도 이야기의 시작은 파타고니아 아이센 부근해서 가축도둑과 밀매업자들을 사냥하는 마푸체 인디오 출신 형사 조지 워싱턴 카우카만으로부터 시작된다.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즐겨 읽었다는 아버지가 지은 이름 조지 워싱턴은 한 때 사회주의 국가 칠레를 전복시키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보부까지 동원해서 군부의 쿠데타를 유도한 어느 나라의 초대 대통령 이름에서 유래한다. 자기 동네 쇠똥의 냄새만으로도 사건을 해결해낸다는 카우카만 형사는 어느 날, 가축도둑질을 하던 유력자의 아들의 엉덩이를 장총으로 날려 버리게 되면서 폭력형사로 낙인이 찍혀 수도 산티아고의 성범죄 연구소로 좌천(?)이 된다.

깡촌 파타고니아에서 서울 산티아고로 전보된 것이 영전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상상을 다스리면서 다시 소설에 집중한다. 사실 평생을 파타고니아에서 자고 나란 인디오 형사가 수도에서 할 일은 그다지 없어 보인다. 게다가 자기 부서 사람들조차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인종적 차별과 더불어 “폭력”이라는 딱지가 붙은 형사를 환영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아이러니는 피노체트 독재 아래서, 수십 년간 참을 수 없는 끔찍한 폭력들을 경험한 이들이 여전히 사회에서 횡행하고 있는 군사독재의 찌꺼기들에 대해 관대하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작가는 여전히 칠레의 민주화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는 것일까?

퇴근길에 택시 기사 아니타 레데스마와 우연하게 만나게 된 카우카만 형사는 곧 자신을 옭아매는 이전의 가축도둑 사건과 연계된 <핫 라인> 사건을 맡게 되면서 위기 속으로 뛰어든다. 파타고니아에서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 최소한의 매너가 필요했다는 회상을 통해 다른 차원의 똥이 차고 넘치는 수도 산티아고에서는 그런 절차들을 모두 생략해 버리고 오로지 자신의 성적 욕구들을 충족시키기 위한 욕망들만이 들끓는다고 작가는 지적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 필적할만한 서민적 주인공의 도전을 주로 그리고 있는 세풀베다의 캐릭터 창조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핫 라인>에서도 작가는 깡촌 출신의 촌뜨기 형사와 한가닥 한다는 마누엘 칸테라스 장군(아주 의미심장한 안티 캐릭터 설정이다)의 대결 구도로 몰고 간다. 이는 개인과 권력의 실체로서의 도전과 응전을 형상화하고 있다. 물론 그 한편에는 사회적 부조리와 민주화가 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경직된 사회 체제에 대한 분노가 그야말로 악머구리 끓듯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서론에서 작가가 말했다시피, <핫 라인>은 대중 연재소설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세풀베다의 작품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키워드는 바로 “대중”이다. 다른 책들도 물론 대중적인 책읽기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지만 <핫 라인>은 지금까지 읽을 책 중에서도 다른건 몰라도 그 점에서만큼은 최고다. 오히려 책의 말미로 갈수록 이렇게 짧아도 되는거야?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 전개와 결말의 속도감이 빠르다. 물론 그에 대해 전혀 불만은 없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곳곳에서 흘리고 있는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의 칠레식 사회주의 실험과 그 실패의 단서들을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그 중에서도 피노체트의 쿠데타 이후, 비극적인 최후를 마친 빅토르 하라의 이름이 접하는 순간은 그야말로 전율 그 자체였다. 1973년 9월 쿠데타 당시 아옌데 대통령의 듣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는 마지막 연설은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한 때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하던 이들의 숱한 변절을 목도하면서, 이 시대 지식인과 작가들에 대한 실망은 거의 좌절의 수준에까지 도달했다. 하지만 그들과는 달리 <잊지도 말고 용서하지도 말자>는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고, 여전히 글을 통해 실천에 옮기고 있는 루이스 세풀베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작가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충실한 한 인물과 만난 즐거움이 그 자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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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남두리 2009-10-01 0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풀베다의 책, 구입해 놓고 아직 읽기를 미루고 있는데 꼭 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