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엔 카프카를 - 일상이 여행이 되는 패스포트툰
의외의사실 지음 / 민음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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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일주일 전에 눈여겨보고 있다가 <삼국지>부터 읽고 나서 오늘 결국 읽을 수가 있었다. 결국 읽게 될 책들은 읽게 되는구나. 오늘 아침에는 도서관에 가서 빌려서 읽지 못한 책들을 다 반납하고 왔다. 그리고 다시 빌린 책들도 있고 말이지. 책에 대한 욕심이 끝이 없구나 싶다.

 

의외의사실 작가가 소개하는 책들을 보니 참 다양한 생각이 들었다. 분명 춘수 쌤의 <노르웨이의 숲>은 독서모임 책으로까지 읽었는데 왜 기억이 나질 않는 거지. 그 책이 우리나라에 소개되었을 적에는 센세이션 그 자체였지만,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 읽어 보니 그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춘수 쌤 특유의 허세 그런 느낌 때문일까. 건강하게 오래 살면서 글을 쓰기 위해, 매일 같이 하루에 10KM를 뛰신다고 하니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 졸업하고 나서는 재즈 카페를 운영하기도 했다고. 살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을 마음껏 하면서 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인이 바로 춘수 쌤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식의 흐름으로 유명한 버니지아 울프의 <등대로>는 다른 버전으로 두 권이나 사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호기롭게 읽어 보겠다고 도전장을 던졌으나... 결국 읽지 못한 것으로. 그런데 또 의외의사실 작가의 액기스를 읽어 보니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잠깐 들었다. 그전에 <등대로>가 책무더기 어디에 끼어 있는지 찾아야 하는 건 아니고. 그리고 보니 <댈러웨이 부인>도 비슷하지 않나 싶다.

 

맨 끝에 실린 가즈오 이시구로 작가의 <나를 보내지 마>는 항상 영화의 애절한 장면들이 계속해서 생각나게 만들어 준다. 물론 책도 읽었다. 내가 책을 먼저 읽었던가? 아니면 영화를 먼저 보았던가. 어쩌면 이시구로 작가의 책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책을 꼽으라고 한다면, 헤일셤 출신 복제인간들의 삶에 대한 책인 <나를 보내지 마>를 꼽을 지도 모르겠다. 어떤 면에서 우리 인간이나 복제인간들이나 유한하다는 점에서 같으면서도 동시에 어떤 특정한 목적을 위해 살아간다는 결정적 차이를 보이지 않았던가. 영화의 스산한 엔딩은 다시 생각해도 참 슬프고 뭐 그렇다.

 

도끼 선생의 <죄와 벌>은 다른 출판사 버전으로 두 번 읽었다. 처음에는 열린책들에서 나온 책으로. 그리고 두 번째는 문동판으로. 처음에는 여러 개의 다른 이름을 가진 라스콜니코프 때문에 좀 헷갈렸지 아마. 그리고 특별한 이유도 없이 전당포 자매를 참혹하게 살해한 주인공의 행동에 충격을 먹었지. 살면서 모든 이들의 행동의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걸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됐다. 문득 어디서 일러스트로 그린 예의 장면을 보고 따라서 그려본 기억이 난다. 지금이라면 AI의 도움을 받지 않았을까. 물론 바로 제한 조치를 받았겠지만 말이지.

 

셰익스피어의 <오셀로> 이야기도 재밌었다. 이아고라는 악당이 불러일으킨 데스데모나에 대한 오셀로의 의심이 결국 모든 이들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17세기 막장 드라마라고 불러야 하나.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이 그의 생전에 책의 형태로 있지 않았고, 사후에 기억과 배우들에게 주어진 대본을 기초로 해서 만들어진 거라는 사실도 흥미로웠다. 그렇다면 기억의 왜곡과 편집의 오류 같은 건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까. 그런 이유로 그의 작품들이 더 흥미진진하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무려 2,500년 전에 소포클레스에 의해 쓰인 막장 오브 막장 드라마인 <오이디푸스> 서사가 여전히 건재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변용되고 있다는 점도 놀랍지 아니한가.

 

인상 깊게 읽은 어떤 책들은 의외의사실 작가의 도움으로 생생하게 기억이 나기도 하고 또 언젠가 읽어봐야지 하는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반대로 분명히 읽고 리뷰까지 써서 기록해 두었지만, 지금은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는 책들도 있고 말이지. 그렇다면 우리는 왜 굳이 시간과 에너지 그리고 비용을 동원해서 책을 읽는 건가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도 가질 수가 있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어쨌든 고전의 반열에 오를 만한 책들에서 엑기스만 쪽쪽 뽑아내는 기술? 실력에 그저 놀랄 뿐이다. 그렇게 얻은 경이가 새로운 독서나 재독으로 이어진다면 아마 더 바랄 게 없겠지. 그중에 가장 관심이 가는 책은 바로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었다. 가까운 중고서점에 있다고 하기에 사러 가야 하나 싶어서, 혹시나 하고 주문도서들을 검색해 보니 2년 전에 이미 산 책이다. 그런데 그 책은 어디에 가 있나 그래. <보이지 않는 도시들>도 찾게 되면 한 번 읽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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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삼국지 1 - 도원(桃園)에 피는 의(義)
나관중 지음, 이문열 평역, 정문 그림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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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폭염의 계절이다. 이럴 적에는 그저 시원한 곳에 가서 책 읽는 게 상책이다. 계곡이나 이런 데 가서 시원하게 흐르는 말에 발을 담그고 원없이 책이나 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해본다. 대신 근처 카페에 가서 저렴이 팥빙수를 한 그릇 먹고 나서 자리를 옮겨 독서삼매에 빠져 본다.

 

어려서부터 중국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이런저런 책들을 많이 읽었다. 나관중의 역사소설 <삼국지연의>도 아마 읽었지 싶다. 그런데, 정작 정본(?)으로 해서 읽었나 싶다. 마침 진흥원 서가에 <삼국지> 시리즈가 있어서 이번 여름에는 이걸 한 번 읽어봐야지 하는 마음에 책을 펼쳐 들었다.

 

거의 모든 역사 소설들이 그렇듯 역사적 사실과 인물들을 가지고 가공한 소설이야말로 서사의 원천이 아닌가 싶다. 워낙에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니, 다채로운 해석도 충분히 가능하고 또 무엇보다 중국 특유의 허풍까지 곁들인다면 인기를 끌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다. 또 아직까지도 계속해서 여러 비유들이 등장하는 걸 보면 역시 동양의 고전으로 불릴만한 이유가 있겠지.

 

각설하고 본론에 들어가 보자. 한나라 영제 시절, 무려 400여년 역사를 자랑하는 한고조가 세운 한나라는 외척의 발호와 환관의 국정농단 그리고 제국의 무능과 부패가 겹치면서 한 마디로 망해 나라가 망조가 들었다. 이런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할 정도다. 그나마 한실에 충성하는 다수의 충신지사들의 활약으로 당장의 위기와 파고들을 넘으며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는 중이다.

 

보통 중국 역사에서 보면 이럴 때, 항상 반군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태평도에서 출발한 황건적이 난이 바로 한나라 망조에 결정타가 아니었을까. 아 그전에, 일단 나관중 선생은 이야기를 이끌어갈 일단의 주인공들을 소개한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인물은 유비나 조조 손견 같은 인물이 아닌 바로 유비의 스승 노식이었다. 이 또한 사제관계를 무척이나 중시하는 고대 중국 특유의 설정이 아닌가 싶다.

 

노식에 배운 유비는 한실 중산정왕의 후예로... 사실 그 당시 DNA 조사를 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중이 떠중이가 종실 행세를 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유비 역시 과연 한실의 후예인지에 대해서는 알 도리가 없다. 어쨌든 그의 주장대로, 어느 정도 연관성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대신 누구라도 품을 수 있는 유비의 인품과 인덕을 가진 마성의 남자라고나 할까. 그리하여, 연인 장비와 중죄를 짓고 숨어 살던 관우와 더불어 복사꽃밭에서 결의를 맺는 이른바 도원결의(184)로 삼국지 무대의 시작을 알린다. 물론 도원결의는 정사에는 등장하지 않는 이야기로, 이런 출발점 정도는 있어야 서사의 힘이 실리니 꼭 필요한 과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다음 등장인물은 삼국지의 실질적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패국 초현 사람 맹덕 조조다. 환관 계열의 조상을 둔 조조는 아버지 조숭이 억만금을 써서 태위를 자리를 매수했다고 했던가. 어쨌든 후한 말기 일상이 된 벼슬자리를 금전을 주고 사서 중앙 관계에 진출하는데 성공한다. 유비가 첫 등장 이후, 고향 탁군에서 7년 정도 유협 생활을 하며 대인관계를 쌓은 데 비해 조조는 수도 낙양에서 서슬퍼런 십상시의 아재를 사소한 법위반으로 냉정하게 처리하면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다. 어쩌면 이런 것조차 선전활동을 위한 조조의 도박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언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은 시절, 적어도 이 정도의 도발은 해주어야 자신의 방명을 날릴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위촉오로 불리는 삼국시대의 마지막 파트를 담당하게 될 강동의 호랑이 문대 손견도 빼놓을 수가 없다. 연의에서 사실, 초반에 무력으로 가장 돋보이는 활약을 한 선수는 바로 손권의 아버지 손문대였다. 오와 회계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지역에서 탄탄한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비슷한 또래의 한당을 필두로 해서 황개, 정보 그리고 조무 같은 장수들과 함께 도적들을 정벌하면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다. 그 결과, 중앙 조정에서 황건적의 반란이 발생했을 때, 노식-황보숭-주준으로 토벌군을 조직했을 때에도 손문대를 선봉으로 세웠지 아마.

 

한나라를 상징하는 황천이 쇠하고 창천을 타령을 하면서 무서운 기세로 기의한 황건적은 각지에서 종이호랑이 같은 신세로 전락해 버린 관군들을 차례로 격파했다. 이에 지방 토호들을 중심으로 적도로부터 자신의 고장을 지키기 위해 의군들, 그러니까 사병집단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 지점이 후한 말기 군벌의 등장을 예고하는 그런 장면이 아닌가 싶다.

 

그동안 초야에 묻혀 있던 유관장 삼형제 역시 자신들의 무명을 만방에 떨칠 수 있는 난세의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이런 난세야말로 호시탐탐 천하의 주인 자리를 노리는 영웅호걸들이 바라던 그 무엇이 아니었을까. 유관장 트리오는 당장 탁현에서 의군 500을 소집해서 병장기를 갖추고, 소쌍과 장세평에게 군마와 군자금까지 얻어 의용대 비슷한 조직으로 황건적과의 전투에 투입된다.

 

500의 군세로 초전부터 100백에 달하는 5만 군세를 자랑하는 황건적을 무찌르는 엄청난 전과를 올리는데 성공한다. 물론 전세를 읽는 유비의 전략과 만인부당의 무용을 자랑하는 관우/장비가 선봉에 서서 그야말로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면서 상승군으로서의 모습을 유감 없이 보여주었다.

 

각지에서 기의한 의군들과 관군들의 활약으로 황건적의 반란은 오래가지 않아 진압되었다. 문제는 논공행상 과정에서 유비처럼 관군 소속도 아니면서 맹활약한 의군들에 대한 평가가 환관들의 농락으로 무시되었다는 점이다. 유비도 결국 조그마한 현의 수령 자리가 하나 주어지긴 하지만, 나중에 복이 아니라 화가 되고 말았다.

 

유관장 삼형제의 이야기는 그 정도로 마무리되고, 나머지는 영제가 죽고 아들 소제 변을 미는 하태후와 훗날 헌제가 되는 진류왕 협의 후견자 동태후가 맞붙은 치열한 권력 투쟁 그리고 그 와중에 하태후의 오빠 대장군 하진의 십상시들의 농간으로 죽고 서량의 이리 동탁이 하진의 밀서를 받고 중앙무대로 진출하는 과정들이 이어진다. 나중에 조조와 더불어 중원에서 맞대결을 펼치게 되는 사세오공 집안 출신의 본초 원소는 자신의 주군 하진이 죽자 병사들을 동원해서 한실을 위기로 몰아넣은 환관집단들을 몰살시키는데 성공한다.

 

문제는 서량 자사 동탁이 그 때 마침 등장해서 모든 실권을 장악했다는 점이다. 황건군 진압에서는 별다른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유관장 삼형제의 도움을 받을 정도로 코너에 몰렸던 동탁이 모사 이유를 필두로 해서 이각-곽사-번조-장제 4총사를 이끌고 대병을 몰아 한나라의 수도 낙양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내친 김에 소제 변을 폐위시키고, 허수아비 같은 어린 황제 진류왕 변을 헌제로 옹립했다.

 

황제를 포로로 삼고 중앙정부의 실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동탁의 전횡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자신에게 반항하는 한실의 충신들을 가차 없이 처형하고, 황제 버금가는 행세를 하면서 갖은 악행을 서슴지 않고 저지르기 시작했다. 이에 한줌도 채 남지 않은 한조의 충신들이 사도 왕윤을 중심으로 결집해서 조정의 역도 동탁 토벌을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에 호응해서 삼십대의 조맹덕이 사도 왕윤이 소장하고 있던 보검을 빌려 동탁 암살 시도에 나섰다가 그림자 경호를 하던 여포의 등장으로 실패하고, 그대로 도주해 버렸다.

 

도주하던 조조는 중모 현령 진궁의 도움으로 동탁의 마수를 벗어나는데 성공하지만, 오해로 여백사 집안 식구들을 몰살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이에 놀란 진궁은 조조의 곁을 떠나는 장면으로 삼국지 1권이 끝난다.

 

처음에 조조는 한실을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의지를 품은 한조 충신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황건적 소탕과 엉망으로 돌아가는 조정의 모습을 보고서 한실 부흥의 꿈을 완전히 접어 버렸다. 그리고 난세를 대비해서 고향 패군 초현 그리고 다음에는 진류를 거점으로 삼아 무력의 근원이 되는 사병집단 양성에 나선다. 조조는 결국 무력이 모든 것을 말하게 되는 군벌이 난립하게 되는 시절을 정확하게 예상했던 것이다.

 

유비도 마찬가지였다. 한실에 대한 희망을 버린 조조와 달리, 처음부터 자신의 슬로건이었던 한실 부흥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한중왕을 거쳐 신하들의 추대 속에 촉한의 황제에 자리에 오르지 않았던가. 물론 말년의 그런 성공을 거두기 전까지, 아무런 기반도 없이 맨주먹으로 전장의 누빈 유협 집단의 수장 노릇을 해야만 했다. 아마 유비가 제갈 공명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저 그런 이류 군벌집단의 두목으로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을까.

 

이번에 다시 읽는 <삼국지>는 마치 예전에 한 번 읽었던 내용을 복습하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나관중이 연의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유비 중심의 촉한 정통론의 실체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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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7-14 08: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삼국지는 참 여러가지 번역본이 있는데,실제 나관중의 원본 삼국지연의에는 우리가 읽은 내용과는 달리 너무 간단하고 빠르게 묘사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문열의 평역 삼국지에서는 유비,관우,장비의 도원결의가 길게 묘사된 것으로 기억합니다.아무래도 이는 번역을 할 때 원본에 없던 것을 구성하여 넣거나 있는 것을 삭제하는 등 번역자가 자신의 관점으로 재해석한 평역의 탓이 아닌가 싶습니다.

레삭매냐 2025-07-14 09:04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나관중 선생의 원전에 평역를 맡은
분의 주관적 해석과 견해가 다수
반영되었다고 생각합니다.

2차 창작이라고나 할까요.

고양이라디오 2025-07-15 16: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권에 생각보다 많은 내용이 있군요. 작년에 <삼국지>를 재밌게 읽었던 터라 반갑네요^^
 
울지 마, 아이야
응구기 와 시옹오 지음, 황가한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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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가 가고 있다. 우연히 응구기 와 티옹오(1938.1.5.~2025.5.28.) 작가가 하늘의 별이 되었다는 소식을 인스타를 통해 알게 됐다. 기록을 찾아보니, 응구기 선생의 책은 <한 톨의 밀알> 읽은 게 전부인가 보다. 그래서 그를 추념하는 의미에서 역시 책쟁이는 고인의 책을 읽는 방식을 선택했다. 응구기 선생은 총 8편의 소설을 썼는데, 그의 첫 작품이 바로 <울지 마, 아이야>였다. 어제 퇴근길에 도서관에 들러 이 책을 빌려서 읽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피의 꽃잎들><십자가 위의 악마>가 국내에 소개되어 있다. 이달에는 그의 작품들을 좀 읽어봐야지 싶다.

 

소설 <울지 마, 아이야>의 주인공은 학교에 다니길 간절하게 소망하는 십대 소년 은조로게와 그의 가족들이다. 은조로게의 아버지 소작농 출신 응고토는 첫 번째 큰 전쟁(1차 세계대전)에 참가해서 영국 식민주의자들을 위해 짐을 나르고, 길을 닦는 일을 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 오니 땅을 빼앗기고 소작농 신세가 되었다.

 

두 번째 큰 전쟁에는 응고토의 장성한 아들 둘이 참전했다. 흑인들에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은 백인 히틀러와 싸우다가 므왕기는 전사했고, 보로는 고향으로 돌아와 이전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제대로 교육 받지 못한 이들은 번듯한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다. 응고토는 아들 은조로게에게 기대를 걸고, 없는 살림에 은조로게를 학교에 보낸다. 배움에 대한 열의가 누구보다 강렬했던 은조로게는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이 행복할 따름이다. 모름지기 배움은 이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오늘날의 현실이 좀 갑갑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응구기 작가는 백인 지주 미스터 하울랜즈 수하에서 일하는 응고토의 고단한 삶을 있는 그대로 독자에게 보여준다. 케냐 땅의 진짜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응고토들은 먹고 살 수 있는 기반이 되는 땅이 없어 고통받는다. 응고토의 아들들은 백인 지주의 하수인 역할을 아버지에게 반발한다. 또 한편에서는 같은 흑인들에게 배신자 취급받는 매판자본가 자코보와의 갈등에도 방점을 찍는다.

 

두 번째 '큰 전쟁'이 끝난 뒤, 1950년대 초반 전세계적으로 민족해방운동이 대세를 이루는 가운데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케냐와 키쿠유족들의 세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검은 모세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조모 케냐타의 등장과 마우마우단의 활동은 응고토의 아들들인 보로와 코리의 뜨거운 가슴에 불을 질렀다. 백인 식민주의자들의 오랜 억압과 착취의 사슬을 끊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이들은 대대적인 파업을 조직했다가, 자코보를 앞세운 지배계급의 강력한 진압에 무릎을 꿇게 된다. 어쩌면 이런 실패는 뒤에 도래할 더 큰 도약을 위한 준비단계가 아니었을까.

 

1부에서 이런 다양한 위기들이 조성되었다면, 2부에서는 파국으로 치닫는 어둠의 시기에 대한 서사가 이어진다. 검은 모세가 19521021일 체포되었고, 재판에서도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지방관이 된 하울랜즈와 치프이자 시민군의 대장이 된 자코보는 키쿠유랜드의 사람들을 가혹하게 탄압하기 시작한다. 특히 하울랜즈는 이른바 이이제이 전술로 치프를 앞세워 응고토들을 괴롭힌다. 자코보는 같은 흑인들에게도 지지를 받지 못하고, 민족의 배신자라는 굴레를 쓰게 된다.

 

서로 증오하고 분열한 이들을 기다리는 건 파국 뿐이었다. 통금이 선언되고, 응고토 식구들이 잡혀갔다가 벌금을 내고 풀려나는 일이 벌어진다. 가부장으로서 응고토의 권위는 바닥으로 추락한다. 결국 숲을 기반으로 한 마우마우단의 저항과 발호가 시작된다. 파업이나 항의 같은 방식으로는 키쿠유 사람들이 원하는 자유와 잃어버린 유산 그리고 땅을 되찾을 수 없다는 절망에 도달한 것이다. “큰 전쟁에서 전쟁기술을 배운 보로는 숲 사람들의 두목이 되어 자코보를 없앨 것을 다짐한다. 결국 피를 피로 씻는 복수가 시작된다.

 

서로에 대한 폭력이 난무하는 가운데, 교육을 통해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은조로게의 꿈마저 허망하게 무너져 내린다. 어쩌면 이 과정들은 19631212일 케냐의 독립까지 계속될 키쿠유 사람들 투쟁의 역사를 직접 보고 느낀 응구기 선생의 체험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두 번이나 협박을 받던 자코보가 살해되고, 범인으로 지목된 응고토의 아들들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는 기꺼이 자신이 범인이라고 자백한다. 무장 순찰대원을 동원한 지방관 하울랜즈는 응고토를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고문한다. 이런 가운데 은조로게는 집안 원수의 딸인 므위하키와의 사랑을 키워 나간다. 물론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는 없었다. 아버지 응고토는 결국 죽고, 보로는 사형을 앞두고 있고, 카마우는 종신형 그리고 코리는 강제수용소에 갇히게 됐다. 한 마디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 버렸다. 어찌어찌해서 간신히 살아남은 은조로게의 내일에 과연 태양이 떠오를 것인가.

 

응구기 선생이 이 책을 발표한 19627월은 아직 케냐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이었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가장 어두운 그런 시기가 아니었을까. 응고토와 그의 아들들은 식민제국주의자들을 위해 큰 전쟁에 나가 죽고 다쳤지만, 아무런 보상도 주어지지 않았다. 아니 가지고 있던 땅마저 빼앗기고 고향에 돌아와서는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 그들에게 교육을 통한 성공은 너무나 요원한 기대일 뿐이었다.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각성한 보로와 카마우 그리고 코리들은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와 상실한 유산을 되찾기 위해 투쟁에 나선다. 그 누가 이들을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할 것인가.

 

사랑하는 므위하키마저 잃고 삶의 의미를 상실한 은조로게를 마지막 순간에 구한 것은 이제는 해체된 가족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을까. 삶의 터전을 구하고 가족들을 위해 싸움을 불사한 응고토는 어쩌면 아들들의 비난을 받을 만큼 겁쟁이는 아니었다. 은조로게 역시 자책하는 것만큼의 겁쟁이는 아니었노라고 위로해 주고 싶다.

 

이제야 응구기 선생의 책을 두 권 읽었다. 기회가 된다면 <피의 꽃잎들><십자가 위의 악마>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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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은 악마의 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1
에드나 오브라이언 지음, 임슬애 옮김 / 민음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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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작고하신 아일랜드 출신 작가 에드나 오브라이언의 책들을 읽으면서 공통적으로 느끼게 되는 점들이 있다. 주체적 인간으로 거듭나게 되는 소설의 주인공들에게서 일종의 색정증 증세가 보인다는 점이다. 그런데 뭐 어쩌라구. <8월의 악마의 달>이 발표된 해가 무려 60년 전인 1965년이다. 작가는 아일랜드 여성의 지위를 혁신한 중요한 인물이라는 평가가 수긍되는 지점이었다.

 

제목부터 도발적인 <8월은 악마의 달>의 주인공은 런던에 사는 아일랜드 출신 스물여덟의 빛나는 여성 엘런 세이지다. 남편과는 현재 이혼한 상태고, 7살난 아들 마크와 살고 있다. 마크는 이혼한 남편이 캠핑을 데리고 간다고 해서, 잠시 이별하게 되었다. 어린 아들 마크에게는 조지라는 보이지 않는 친구가 존재한다. 그리고 엘런에게는 휴 휘슬러라는 파트너가 있다. 오로지 성적 관계만 위한 그런 사이였던가. 휴는 엘런의 관계를 진전시킬 생각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애인 미란다를 포기할 생각도 없는 빌런에 가까운 인물이다.

 

휴에게 질린 엘런은 계획한 휴가를 떠나리고 결심한다. 그리고 프렌치 리비에라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그리고 휴가지에 만난 이들과의 다양한 관계, 불가피한 원나이트 스탠드 등이 이어진다. 엘런이 휴가지에서 만난 이들은 하나 같이 부유한 인사들이지만, 샐러리맨인 엘런은 당장의 택시비 걱정을 해야 하는 신세다.

 

매력적인 엘런에게 호텔 종업원 위고를 비롯한 숱한 남자들이 꼬인다. 시드니 역시 그 중의 하나다. 사실 엘런은 늙다리 시드니보다 배우 출신 바비에게 더 끌리지만, 바비는 엘런 대신 데니스와 잠자리를 같이 한다. 뜨거운 태양이 쏟아지는 프렌치 리비에라의 바닷 바람은 그곳을 찾은 이들에게 어떤 일탈의 기회를 제공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사실 전 남편과 아들 마크에게서 해방된 엘런에게는 세속의 걱정을 잊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그런 무한대의 자유가 주어진 것도 사실이니까. 물론 나중에 휴가지에서 사용한 비용이 그녀를 압박하게 되지만.

 

어느날 저녁 떠들썩한 분위기에 취해 시드니의 대저택으로 향하는 길에 마주하게 된 교통사고 현장에서 죽은지 얼마 되지 않는 시신을 목격하게 되는 엘런과 그 일행들. 나중에 후술하게 될 결정적 사건에 대한 하나의 전조처럼 다가온다. 계속되는 시드니의 유혹에 넘어가 엘런은 그와 하룻밤 사랑을 나눈다.

 

자 이제 비극이 벌어질 차례인가. 한 때 간호사를 꿈꾸었던 엘런에게 생각하지도 못한 끔찍한 사고에 대한 뉴스가 전 남편을 통해 전해진다. 그것은 바로 꼬마 마크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이다. 믿을 수가 없는 소식이다. 엘런이 남프랑스에서 지중해 태양을 즐기는 동안, 아들 마크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지금 같은 세상이라면 휴대전화로 바로 연락할 수가 있었겠지만,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무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이다. 아들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함께 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엘런은 그만 무너져 버리고 만다. 과연 "8월은 악마의 달"이라는 제목이 딱 맞아 떨어지는 그런 느낌이다.

 

런던으로의 복귀를 포기하고, 엘런은 휴가지에서 정신없는 그런 나날들을 보낸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곁에서 위로해주는 사람이 바로 바비였다. 바비는 엘런에게 수영도 가르쳐 주고, 맛있는 음식과 드레스도 사주면서 그녀의 환심을 사는데 성공한다. 바비가 바람둥이 나쁜 남자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엘런은 자신에게 망각을 선사해주는 바비에게 넘어가 오죽하면 그의 안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다 했을까 싶을 정도다. 궁극적으로 바비는 사악한 악마 같은 존재였다.

 

소기의 목적을 이룬 바비는 엘런을 호텔에 놔두고 도망가 버렸다. 도대체 엘런은 왜 이런 불행의 연속선상에서 고통 받아야 하는가. 자신이 내린 잘못된 결정은 엘런은 지속적으로 괴롭힌다. 심지어 수치스러운 몹쓸 병에 걸려 육체적 고통까지 받아야 할 처지가 됐다. 호텔 숙박비까지 밀려, 엘런은 쫓기듯 런던으로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휴가지에서 처음 마주했던 뜨겁고 맹렬하고 찬란했던 미지의 파랑은 엘런에게 인생에서 가장 쓰라린 경험을 제공했다.

 

집으로 돌아온 엘런은 전 남편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가 젊은 여자가 어디론가 떠났다는 소식을 이웃에게 전해 듣는다. 그 사실은 어쩌면 자신을 평생 괴롭혔을 지도 모를 평생의 죄책감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 자신의 육체만 탐하던 휴 휘슬러와의 관계에도 마침표를 찍는다.

 

<8월은 악마의 달>은 에드나 오브라이언 작가의 모국인 아일랜드를 비롯해서 여러 가톨릭 국가에서 "인간의 심성과 미덕"을 타락시킨다는 이유로 금서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소설에서 엘런 세이지는 결혼과 육아라는 전통 자본주의적 가부장 시스템에서 벗어나면서 비로소 주체적 인간으로 거듭나기 시작한다. 스토리 전개상 가장 극적인 사건인 아들 마크의 죽음에 가장 큰 책임은 그를 돌보고 있던 이혼한 남편이 당연히 져야 했다. 마치 엘런의 책임이기라도 하듯 그가 몰아붙이는 장면은 지독한 책임회피의 전형이었다.

 

아들의 죽음 앞에 속수무책이었던 엘런이 어떻게 행동해야 했을까? 그녀가 무슨 행동을 하더라도, 사회적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으리라. 그런 점에서 엘런의 일탈이 이해되기도 했다. 그녀가 그런 일탈로부터 개인의 행복으로 이어졌다면, <8월은 악마의 달>은 더욱 비난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에드나 오브라이언은 몹쓸 병이라는 장치를 동원해서 엘런에게 어떤 탈출구를 마련해 주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을 찾아온 휴 휘슬러의 유혹에 넘어 갔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떤 선은 넘지 않는다는 점을 작가는 강조하고 싶었던 걸까.

 

분량은 얼마 되지 않지만,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여러 사건들 그리고 시시각각 표변하는 주인공 엘런의 심리상태를 따라 가기가 쉽지 않았다. 주인공이 단장의 슬픔을 겪는 장면에서는 잠시 책장을 덮어 두기도 했다. 이제 에드나 오브라이언의 데뷔작인 <시골 소녀들>을 읽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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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5-06-09 16: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작가도 있군요@_@;; 레삭매냐님 덕분에 읽고 싶은 책이 한 권 더 생겼네요 감사합니다^^

레삭매냐 2025-06-09 17:21   좋아요 1 | URL
우연히 알게 된 작가인데,
아일랜드에서는 널리 알려
진 작가더라구요.

세상은 참 넓고, 모르는
작가들은 여전히 많네요...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모신 하미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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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전 여름에 읽은 모신 하미드의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를 다시 읽는다. 이유는? 새로 개정판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는 모클 60번으로 나왔었다. 이제는 사라진 모클에 대한 추억이라고나 할까. 다시 읽어도 대단한 소설이라는 생각이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파키스탄 동부의 대도시 라호르다. 아나르칼리 거리에서 수상해 보이는 미국인을 만난 화자 찬게즈는 거침없이 자신이 살아온 삶의 여정을 풀어 놓는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점 중의 하나는 미국 일류대 프린스턴 출신의 찬게즈는 진짜 미국인보다 더 영어를 잘한다는 사실이다. 청자 미국인과의 대화는 그래서 아무런 소통의 문제가 없다.

 

미국 뉴저지의 명문대에서 좋은 학점을 받고 졸업한 찬게즈의 미래는 그야말로 하이웨이처럼 펼쳐져 있다. 무엇보다 명문대 졸업장은 뉴욕의 감정회사 언더우드샘슨에 취업하는데 있어 하나의 보증서처럼 작동한다. 미국의 직장은 일을 배우기 위한 곳이 아닌, 당장 투입할 수 있는 자본주의 산업 역군을 필요로 한다. 그런 점에서 본토 사람들도 들어가기 어려운 회사에서 뽑는 6명 가운데 찬게즈는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물론 면접에서 전무이사 짐이 낸 모의 문제를 현란한 기술로 풀어낸 찬게즈의 능력 덕분이기도 했다.

 

프린스턴 대학의 졸업장은 찬게즈가 미국 사회의 편입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그 무엇이었다. 소설의 다른 한 축에서는 여자 친구인지 그냥 친구인지 사람 헷갈리게 만드는 에리카의 존재가 있다. 찬게즈가 꿈도 꿀 수 없는 그런 다른 세계에 사는 에리카와 그리스 산토리니 여행 중에 만나, 그는 사랑의 감정을 키워 나간다. 문제는 에리카는 죽은 남자 친구 크리스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산 사람이라면 몰라도 죽은 사람과 경쟁할 수 있을까?

 

에리카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내면에 담은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탈출을 도모한다. 동시에 자신에게 계속해서 접근하는 찬게즈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밀어냈다가 당겼다가를 반복한다. 이거야말로 진정한 밀당의 표본이 아니던가. 정말 자신과 미래를 설계할 수 없을 것 같다면 그냥 찬게즈를 밀어내면 될 텐데 그것도 아니다. 사람 미치게 만드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점에서 자신의 본질을 결코 이방인에게는 허용하지 않는 미국의 본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결국 에리카가 경험하는 정신적 위기는 찬게즈와의 관계를 파탄으로 몰아간다.

 

라호르의 찬게즈와 모종의 임무를 띠고 그곳을 찾은 미국인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언더우드샘슨에서 자신의 특출한 능력을 인정받은 찬게즈는 직장에서 그야말로 승승장구한다. 이윤의 극대화라는 자본주의의 신화를 달성하기 위해 냉정한 재정 모델을 개발하라는 회사 전무이사의 짐의 오더는 명징하다. 필리핀 마닐라에서는 레코드 회사를 감정하고, 뉴저지의 케이블 서비스 회사에서도 잇달아 성과를 내는데 성공하는 찬게즈. 그의 삶에 균열은 2001911일 월드트레이드 센터 공격으로 시작된다.

 

역사상 처음으로 외부 세력에게 본토 공격을 당한 미국인들의 노이로제는 극에 달했다. 뉴욕의 잘나가는 비즈니스맨 찬게즈는 마닐라에서 귀국하던 중, 공항에서 거의 발가벗긴 채로 수색을 당하는 수모를 겼는다. 아 그전에 WTC가 공격받는 장면을 보고 일종의 즐거움을 느꼈다고 고백했던가. 거대한 미국이 외부의 공격을 받고 무너질 수도 있다는 상징성에 모신 하미드 작가는 방점을 찍는다.

 

찬게즈가 현재 살고 있는 최첨단 자본주의 국가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전쟁을 하기 이전부터 자신의 고향 라호르에서는 문명이 꽃을 피웠었는데, 형세가 역전되어 라호르는 그저그런 제3세계 국가의 이름 모를 도시가 되었고, 뉴욕은 이른바 밀레니엄 캐피탈로 세계 자본주의의 중심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잃어버린 되찾아야겠다는 심정의 발로로 WTC 공격을 받아들이지 않았나 싶다.

 

찬게즈의 숱한 노력에도 에리카와의 관계는 개선되지 않고, 결국 에리카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어쩌면 에리카와의 만남 그리고 이후의 관계 발전은 찬게즈가 미국에 남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을 지도 모르겠다. 20019월에서 12월로 이어지는 시간은 이십대 초반의 청년 찬게즈에게 그야말로 위기였다. 설상가상으로 20011213일 벌어진 인도 의사당 공격 테러 사건으로 인도와 파키스탄은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다. 왜 내가 처음에 이 책을 읽을 적에는 이 사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에리카의 실종과 언더우드샘슨에서의 마지막 미션이었던 칠레 발파라이소 일정을 마지막으로 찬게즈는 미국을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자신의 가족들이 고향에서 어쩌면 전쟁에 휘말릴 지도 모른다는 위기 상황에서 자신만 잘 먹고 잘 살겠다고 미국에 남는다는 건 찬게즈의 양심이 허용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자신의 정체성 위기를 겼던 찬게즈는 발파라이소 출판사 감정 와중에 만난 후안 바우티스타로부터 오스만 제국 시절 용병이었던 예니체리에 대해 듣게 된다. 그전의 리뷰에서는 바로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인용해서 리뷰를 쓰지 않았나 싶다. 결국 찬게즈 역시 서방 세계에 고용한 예니체리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쓸모가 있을 적에는 무척 유용하게 쓰이다가 결국에 가서는 용도 폐기되는.

 

9-11 사건이 일년 정도 지난 시점의 라호르에서 대학 강사로 변신한 찬게즈의 현재 모습이 소개된다. 그 사이에 찬게즈는 서방 세계의 총아에서, 이슬람 근본주의자로 변신한 모양이다. 라호르는 무슬림 세계에서 서방의 모로코에 대척점에 놓인 동방의 거점 도시라고 했던가. 물론 동방에도 방글라데시와 말레이시아 그리고 인도네시아 같은 무슬림 국가들이 있긴 하지만, 정통적인 의미에서 무슬림국가의 중요한 도시들 중에서는 라호르가 가장 동쪽에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서구식 교육과 자본주의 세례를 받은 유능한 무슬림 청년이 자신의 정체성 위기를 겪으면서 반서방 지식인으로 변신해 가는 과정을 모신 하미드는 유감 없이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한다. 아무리 서구식 물질주의가 영혼을 지배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근본을 바꿀 수는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편으로 미국 주류 사회에 편입하고자 했던 청년 찬게즈가 결국 실패하게 된, 더 이상의 모욕과 수모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 정도에서 그치게 된 것을 안도해야 할까.

 

무려 십년 만에 다시 만나는 모신 하미드의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는 사반세기 전에 시작된 미국 패권주의의 균열이 가속화되어 가는 시점에 적절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시스템에 적응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못한 이방인의 삶을 통해, 날이 갈수록 맹위를 떨치는 미국 우선주의로 동맹국들의 이탈을 막을 수가 없게 된 2025년을 겨냥한 모신 하미드의 예언이 아닌가 싶다.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아직까지도 영화는 보지 못했다. 문득 작가의 데뷔작이라는 <나방 연기>도 읽어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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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6-07 2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재밌을듯
레삭매냐님 서재에서는 모르던 작가를 알게되어 좋습니다

레삭매냐 2025-06-08 08:18   좋아요 0 | URL
다시 읽어도 너무 재밌는 책이었습니다.

역시 좋은 책은 재독인가 봅니다.

꼬마요정 2025-06-08 08: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저도 읽어보고 싶습니다! 재밌을 듯 합니다. ㅎㅎ

레삭매냐 2025-06-08 20:00   좋아요 1 | URL
주류 시선이 아닌,
다른 시선으로 엮어낸
9-11 사건에 대한 해석
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재미는 물론이고 여러
가지로 접근해 볼 수 있
는 그런 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