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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삼국지 1 - 도원(桃園)에 피는 의(義)
나관중 지음, 이문열 평역, 정문 그림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3월
평점 :
무더운 폭염의 계절이다. 이럴 적에는 그저 시원한 곳에 가서 책 읽는 게 상책이다. 계곡이나 이런 데 가서 시원하게 흐르는 말에 발을 담그고 원없이 책이나 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해본다. 대신 근처 카페에 가서 저렴이 팥빙수를 한 그릇 먹고 나서 자리를 옮겨 독서삼매에 빠져 본다.
어려서부터 중국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이런저런 책들을 많이 읽었다. 나관중의 역사소설 <삼국지연의>도 아마 읽었지 싶다. 그런데, 정작 정본(?)으로 해서 읽었나 싶다. 마침 진흥원 서가에 <삼국지> 시리즈가 있어서 이번 여름에는 이걸 한 번 읽어봐야지 하는 마음에 책을 펼쳐 들었다.
거의 모든 역사 소설들이 그렇듯 역사적 사실과 인물들을 가지고 가공한 소설이야말로 서사의 원천이 아닌가 싶다. 워낙에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니, 다채로운 해석도 충분히 가능하고 또 무엇보다 중국 특유의 허풍까지 곁들인다면 인기를 끌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다. 또 아직까지도 계속해서 여러 비유들이 등장하는 걸 보면 역시 동양의 고전으로 불릴만한 이유가 있겠지.
각설하고 본론에 들어가 보자. 한나라 영제 시절, 무려 400여년 역사를 자랑하는 한고조가 세운 한나라는 외척의 발호와 환관의 국정농단 그리고 제국의 무능과 부패가 겹치면서 한 마디로 망해 나라가 망조가 들었다. 이런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할 정도다. 그나마 한실에 충성하는 다수의 충신지사들의 활약으로 당장의 위기와 파고들을 넘으며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는 중이다.
보통 중국 역사에서 보면 이럴 때, 항상 반군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태평도에서 출발한 황건적이 난이 바로 한나라 망조에 결정타가 아니었을까. 아 그전에, 일단 나관중 선생은 이야기를 이끌어갈 일단의 주인공들을 소개한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인물은 유비나 조조 손견 같은 인물이 아닌 바로 유비의 스승 노식이었다. 이 또한 사제관계를 무척이나 중시하는 고대 중국 특유의 설정이 아닌가 싶다.
노식에 배운 유비는 한실 중산정왕의 후예로... 사실 그 당시 DNA 조사를 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중이 떠중이가 종실 행세를 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유비 역시 과연 한실의 후예인지에 대해서는 알 도리가 없다. 어쨌든 그의 주장대로, 어느 정도 연관성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대신 누구라도 품을 수 있는 유비의 인품과 인덕을 가진 마성의 남자라고나 할까. 그리하여, 연인 장비와 중죄를 짓고 숨어 살던 관우와 더불어 복사꽃밭에서 결의를 맺는 이른바 도원결의(184년)로 삼국지 무대의 시작을 알린다. 물론 도원결의는 정사에는 등장하지 않는 이야기로, 이런 출발점 정도는 있어야 서사의 힘이 실리니 꼭 필요한 과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다음 등장인물은 삼국지의 실질적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패국 초현 사람 맹덕 조조다. 환관 계열의 조상을 둔 조조는 아버지 조숭이 억만금을 써서 태위를 자리를 매수했다고 했던가. 어쨌든 후한 말기 일상이 된 벼슬자리를 금전을 주고 사서 중앙 관계에 진출하는데 성공한다. 유비가 첫 등장 이후, 고향 탁군에서 7년 정도 유협 생활을 하며 대인관계를 쌓은 데 비해 조조는 수도 낙양에서 서슬퍼런 십상시의 아재를 사소한 법위반으로 냉정하게 처리하면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다. 어쩌면 이런 것조차 선전활동을 위한 조조의 도박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언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은 시절, 적어도 이 정도의 도발은 해주어야 자신의 방명을 날릴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위촉오로 불리는 삼국시대의 마지막 파트를 담당하게 될 강동의 호랑이 문대 손견도 빼놓을 수가 없다. 연의에서 사실, 초반에 무력으로 가장 돋보이는 활약을 한 선수는 바로 손권의 아버지 손문대였다. 오와 회계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지역에서 탄탄한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비슷한 또래의 한당을 필두로 해서 황개, 정보 그리고 조무 같은 장수들과 함께 도적들을 정벌하면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다. 그 결과, 중앙 조정에서 황건적의 반란이 발생했을 때, 노식-황보숭-주준으로 토벌군을 조직했을 때에도 손문대를 선봉으로 세웠지 아마.
한나라를 상징하는 황천이 쇠하고 창천을 타령을 하면서 무서운 기세로 기의한 황건적은 각지에서 종이호랑이 같은 신세로 전락해 버린 관군들을 차례로 격파했다. 이에 지방 토호들을 중심으로 적도로부터 자신의 고장을 지키기 위해 의군들, 그러니까 사병집단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 지점이 후한 말기 군벌의 등장을 예고하는 그런 장면이 아닌가 싶다.
그동안 초야에 묻혀 있던 유관장 삼형제 역시 자신들의 무명을 만방에 떨칠 수 있는 난세의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이런 난세야말로 호시탐탐 천하의 주인 자리를 노리는 영웅호걸들이 바라던 그 무엇이 아니었을까. 유관장 트리오는 당장 탁현에서 의군 500을 소집해서 병장기를 갖추고, 소쌍과 장세평에게 군마와 군자금까지 얻어 의용대 비슷한 조직으로 황건적과의 전투에 투입된다.
500의 군세로 초전부터 100백에 달하는 5만 군세를 자랑하는 황건적을 무찌르는 엄청난 전과를 올리는데 성공한다. 물론 전세를 읽는 유비의 전략과 만인부당의 무용을 자랑하는 관우/장비가 선봉에 서서 그야말로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면서 상승군으로서의 모습을 유감 없이 보여주었다.
각지에서 기의한 의군들과 관군들의 활약으로 황건적의 반란은 오래가지 않아 진압되었다. 문제는 논공행상 과정에서 유비처럼 관군 소속도 아니면서 맹활약한 의군들에 대한 평가가 환관들의 농락으로 무시되었다는 점이다. 유비도 결국 조그마한 현의 수령 자리가 하나 주어지긴 하지만, 나중에 복이 아니라 화가 되고 말았다.
유관장 삼형제의 이야기는 그 정도로 마무리되고, 나머지는 영제가 죽고 아들 소제 변을 미는 하태후와 훗날 헌제가 되는 진류왕 협의 후견자 동태후가 맞붙은 치열한 권력 투쟁 그리고 그 와중에 하태후의 오빠 대장군 하진의 십상시들의 농간으로 죽고 서량의 이리 동탁이 하진의 밀서를 받고 중앙무대로 진출하는 과정들이 이어진다. 나중에 조조와 더불어 중원에서 맞대결을 펼치게 되는 사세오공 집안 출신의 본초 원소는 자신의 주군 하진이 죽자 병사들을 동원해서 한실을 위기로 몰아넣은 환관집단들을 몰살시키는데 성공한다.
문제는 서량 자사 동탁이 그 때 마침 등장해서 모든 실권을 장악했다는 점이다. 황건군 진압에서는 별다른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유관장 삼형제의 도움을 받을 정도로 코너에 몰렸던 동탁이 모사 이유를 필두로 해서 이각-곽사-번조-장제 4총사를 이끌고 대병을 몰아 한나라의 수도 낙양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내친 김에 소제 변을 폐위시키고, 허수아비 같은 어린 황제 진류왕 변을 헌제로 옹립했다.
황제를 포로로 삼고 중앙정부의 실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동탁의 전횡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자신에게 반항하는 한실의 충신들을 가차 없이 처형하고, 황제 버금가는 행세를 하면서 갖은 악행을 서슴지 않고 저지르기 시작했다. 이에 한줌도 채 남지 않은 한조의 충신들이 사도 왕윤을 중심으로 결집해서 조정의 역도 동탁 토벌을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에 호응해서 삼십대의 조맹덕이 사도 왕윤이 소장하고 있던 보검을 빌려 동탁 암살 시도에 나섰다가 그림자 경호를 하던 여포의 등장으로 실패하고, 그대로 도주해 버렸다.
도주하던 조조는 중모 현령 진궁의 도움으로 동탁의 마수를 벗어나는데 성공하지만, 오해로 여백사 집안 식구들을 몰살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이에 놀란 진궁은 조조의 곁을 떠나는 장면으로 삼국지 1권이 끝난다.
처음에 조조는 한실을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의지를 품은 한조 충신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황건적 소탕과 엉망으로 돌아가는 조정의 모습을 보고서 한실 부흥의 꿈을 완전히 접어 버렸다. 그리고 난세를 대비해서 고향 패군 초현 그리고 다음에는 진류를 거점으로 삼아 무력의 근원이 되는 사병집단 양성에 나선다. 조조는 결국 무력이 모든 것을 말하게 되는 군벌이 난립하게 되는 시절을 정확하게 예상했던 것이다.
유비도 마찬가지였다. 한실에 대한 희망을 버린 조조와 달리, 처음부터 자신의 슬로건이었던 한실 부흥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한중왕을 거쳐 신하들의 추대 속에 촉한의 황제에 자리에 오르지 않았던가. 물론 말년의 그런 성공을 거두기 전까지, 아무런 기반도 없이 맨주먹으로 전장의 누빈 유협 집단의 수장 노릇을 해야만 했다. 아마 유비가 제갈 공명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저 그런 이류 군벌집단의 두목으로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을까.
이번에 다시 읽는 <삼국지>는 마치 예전에 한 번 읽었던 내용을 복습하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나관중이 연의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유비 중심의 촉한 정통론의 실체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