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
라우라 레스트레포 지음, 유혜경 옮김 / 레드박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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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의 글을 좋아한다. 식민지 시절과 제국주의 침략의 시대 그리고 군사독재라는 역사적 공통분모가 우리네의 그것과 묘한 공명을 울리게 한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소설 <광기>는 콜롬비아 출신의 여류작가 라우라 레스트레포(1950년생)가 2004년에 발표한 그녀의 최근작이다. 대학에서 철학과 문학을 전공한 그녀는 국립대학에서의 교수직을 버리고 좌파 계열을 글을 쓰며, 스페인과 아르헨티나에서 저항운동에 가담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우리나라에는 라우라 레스트레포의 작품 중에서 두 번째로 소개된 <광기>는 그녀의 9번째 작품으로 작가에게 세계적인 성공을 가져다준 작품이다. 원제 <Delirio> 역시 섬망 상태 혹은 일시적 착란 상태, 광란을 의미한다.

<광기>는 작가가 존경하는 포르투갈 출신의 작가 주제 사라마구에 대한 오마쥬로 다가온다. 올해 초에 사라마구 선생의 책과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는데 바로 그 책 <수도원의 비망록>에 나오는 두 주인공 발타자르와 블리문다를 연상시키는 아길라르와 광기에 휩쌓인 여주인공 아구스티나의 이야기가 오버랩되고 있었다. 시제와 화자가 뒤죽박죽이 된 <광기>를 읽으면서, 왜 아구스티나가 미치게 되었는가에 대해 작가는 느리지만 치밀한 구성으로 독자들을 인도한다.

불행했던 아구스티나의 가정사와 그 선대에 독일에서 천국보다 낯선 콜롬비아의 사사이마에 정주한 그녀의 외조부 포르툴리누스의 이야기 그리고 실존했던 전설적인 콜롬비아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에 대한 이야기까지 그야말로 판타지와 실재를 오간다. 현재의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현대사회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순애보의 주인공 아길라르, 과거의 플래시백을 주로 풀어나가는 아구스티나, 포르툴리누스 할아버지와 블랑카 할머니의 이야기 마지막으로 아구스티나에게 독백 형식으로 진행되는 미다스 맥알리스터의 이야기들이 초반에는 좀 낯설지만, 본 궤도에 오르면서 가속을 내기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호기심을 끈 인물로는 미다스 맥알리스터를 꼽고 싶다. 아버지를 여의고 무일푼으로 시골애서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로 상경한 미다스는 론도뇨 패밀리의 장남 호아코의 친구로 상류사회의 단면을 엿보면서, 호아코로부터 사람들을 경멸하는 법을 배우고 미치도록 갖고 싶은 세계를 손아귀에 넣겠다는 야심을 불태우게 된다. 물론, 희대의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와 거래를 하게 되면서 점점 파멸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도 인식하지 못한 채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역시 소설의 핵심은 바로 아구스티나 광기의 근원은 어디일까하는 본질적인 질문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부끄러운 집안사로부터 시작해서, 론도뇨 자녀들의 성장과 더불어 마약과의 전쟁이라는 콜롬비아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로 나아간다. 어쩌면 개인과 사회 모두 미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아길라르 같이 이성적인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이 난망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다소 결말 부분이 만족스럽지는 못했지만, 새로운 작가의 글과 만난다는 즐거움이 훨씬 더 컸던 것 같다. 아울러 제3세계 작가들의 글과 만난다는 다양성의 확대라는 측면에서도 일독의 가치가 있었던 책이라고 생각한다. 라우라 레스트레포의 다른 책들의 출간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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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여자
오정희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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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독서클럽에서 오정희 작가의 이름을 처음으로 들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말은, 어느 문창과에 다닌다는 분이 오정희 작가의 글들은 정말 꼭꼭 씹어서 읽어야 한다는 표현이었다. 사실 그전까지 오정희 작가는 나에게 낯선 이름이었다. 그리고 2009년 이 만추의 계절에 <가을 여자>로 드디어 오정희 작가와 만나게 됐다.

내공이 쌓이지 않은 이들은 오히려 장편소설보다도 단편소설 쓰기를 더 두려워한다고 했던가. 오정희 작가는 이 단편집에서 모두 25편의 맛깔스런 이야기들을 기가 막히게 버무려낸다. 책 날개를 들춰보면 “일상의 슬픔, 고통, 허무의 정체”를 캐낸다는 이보다 더 적합한 표현이 있을까 싶은 글귀가 독자들을 맞이한다.

첫 이야기로 등장하는 <그 가을의 사랑>에는 남편의 여의고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어느 여인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연하남의 애틋한 사랑을 속삭인다. 노골적이지 않고 은근하게 다가오는 좀처럼 서로 들어내지 않는 은은한 사랑, 하지만 그 말미에는 연하남이 애용하는 은빛 펜치만큼이나 낯선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책을 읽을수록 이런 한 방이 과연 언제 터질까 하는 기대감에 몸이 달기 시작한다.

<첫눈 오던 날>에서는 결혼의 가능성과 독신생활의 매력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고민녀의 이야기를, <비오는 날의 펜팔>에서는 예전의 아련한 추억을 한 방에 날려 버리는 냉혹한 현실을, 사춘기에 접어든 자식의 다이어리를 훔쳐보며 한때 언어학자를 꿈꿨던 어머니의 모습을, 자신의 아이들은 내팽개쳐 두고 대신 자원봉사를 하러 다니는 어느 무책임한 엄마를 희화화하는 오정희 작가가 시전하는 촌철살인의 내공에, 웃다가 때로는 자괴감에 빠졌다가 하는 인간의 오욕칠정(五慾七情)을 있는 그대로 들어내고야 말았다.

많은 이야기 중에서 특히 펜팔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건 아마도 숱한 개인적 경험에 의한 공명에 의한 것이 아니었을까. 미지의 이성에 대한 동경으로 시작한 기다림과 편지의 나눔이 궁극적으로는 만남으로 이어지고, 그 만남이 참으로 부질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현세에서의 외로움을 견딜 수가 없어 편지하노라는 고백처럼 다가온다. 하긴 그 이야기에는 애수가 깃들어 있기라도 하지, 정말 오랜만에 만난 옛 펜팔친구로부터 예상치 못한 ‘제안’을 들었을 때의 당혹감이란! 개인적으로, 이런 경험을 직접 체험하거나 누군가한테서 듣지 않고서도 작가가 스스로 만들어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나이가 어려서는 삶의 진실이 무엇인가, 빨리 깨닫고자 하는 마음에 막무가내로 덤벼들었었다. 하지만, 연배가 들어가면서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때로는 삶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굳이 알 필요가 있을까 하는 달관하는 자세도 갖게 됐다. 예를 들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건망증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에서는 책망보다는 빙그레 작은 미소로 이해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오정희 작가가 빚어내는 이야기 묶음들의 갈피짬 속에는 아주 익숙한 우리네 평범한 일상의 향기가 다뿍하게 배어 있다. <가을 여자>를 통해 작가가 쫓는 “일상의 슬픔, 고통, 허무의 정체”에 한 발짝 더 다가선 느낌이 들었다. 깊어가는 가을 녘에 이렇게 멋진 책과 만나게 되어 참으로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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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을 속삭여줄게 - 언젠가 떠날 너에게
정혜윤 지음 / 푸른숲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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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에서 정혜윤을 검색해 봤다. 가장 먼저 툭 튀어나오는 사람은 기상캐스터란다, 어 이 사람이 아닌데…, 내가 정혜윤이란 이름을 처음으로 들은 것은 작년 여름에 읽은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였다. 표지가 아주 인상적인 책으로 라디오 PD 출신의 글쓴이가 11명의 명사의 책읽기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다만, 명사들의 이야기보다 자신의 책읽기 이야기가 너무 많아 입맛이 씁쓰름했던 기억이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 출간된 <런던을 속삭여 줄게>를 읽으면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글쓴이는 당당하게 “런던”을 제목에 집어넣었다. 기존에 나왔던 두 권의 책처럼 분명히 책에 대한 이야기들이 빠지지 않을 텐데 어떤 식으로 책 이야기를 하려나 하는 나의 궁금증 반, 우려 반이 시작됐다.

좀 냉정하게 말하자면, 런던은 그저 구실이었다. 여느 여행 에세이처럼 런던의 숨겨진 은밀한 비밀들을 속삭여 줄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철저한 오산이다. <런던을 속삭여 줄게> 역시 정혜윤식 책읽기 이야기였다. 이미 작년에 학습효과가 있어서, 지난번 만큼 실망스럽진 않았다. 역시 인간은 체험의 동물인가 보다, 기대치를 낮추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역시 타인의 책읽기 가운데, 나도 읽은 책을 만나면 참 기쁘다. 레이몬드 카버의 <대성당> 소개 편이 그랬다. 다 읽고 나서 다른 이에게 선물해 버려서 지금은 나의 수중에 없는 책이지만, 앞을 못 보는 이가 대성당을 그리는 장면은 눈에 선했다. 글쓴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독자들을 자신이 읽은 책과 지은이들에 대해 담담한 어조로 ‘썰’을 풀기 시작한다. 꼭 집어서 어디라고 말할 순 없지만, 작년보다 많이 부드러워졌다는 느낌이 든다.

개인적으로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아이작 뉴턴 그리고 불멸의 로맨티스트 바이런의 이야기들은 묘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 둘 다, 예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영면을 취하는 인물들이라고 했던가. 영국 문학을 대표하는 거장 찰스 디킨스의 이야기에서는 과연 내가 제대로 디킨스의 책이 얼마나 되나 부끄러워지는 순간도 있었다.

다음 편에 등장하는 세인트 폴 대성당은 나에게, 독일 나치 루프트바페의 런던 공습이 일상화되었던 1940년대의 어느 날 화염에 휩싸인 채 고고하게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놓은 흑백 사진 이미지 그대로였다.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가치로 국왕의 목마저 서슴지 않고 날려 버리는 영국인들의 책에서나 볼법한 합리주의적 사고의 단면을 엿볼 수가 있었다.

대영박물관은 영국이 세계 최강의 무력과 재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 각처에서 약탈해온 진귀한 인류의 문화유산들로 뒤덮여 있는 전시장이었다. 특히, 그리스에서 집요하게 반환을 요구하는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에서 통째로 뜯어왔다는 ‘엘진 마블’이 왜 아테네가 아닌 런던 복판에 있어야 하는지 그 당위성에 대해 자꾸만 생각해 보게 됐다. 영국인들이 드는 말도 되지 않는 핑계들은 그야말로 그리스 예술품을 반환하지 않으려는 그네들의 얄팍한 술수라는데 한 표 던지고 싶다! 어쨌거나 이웃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과는 달리 무료입장이라는 사실에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었다. 물론 지은이는 동서고금을 가로질리는 대영박물관에서 신화 속 세계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을 빼놓지 않고 독자들에게 속삭여 준다.

그 외에도 트라팔가르 광장의 주인공 넬슨 제독, 세계 최강의 식민제국이었던 대영제국의 영광을 이끌었던 빅토리아 여왕, 비운의 역사가 스며 있는 런던탑 그리고 영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만든 그리니치 천문대에 이르기까지 런던의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니며 자신이 읽은 책들에 대한 이야기를 퀼트 조각 이불을 맞추듯 그렇게 ‘패치워크’ 내공을 선보인다.

올해만도 런던이라는 제목이 들어가는 책을 두 권이나 읽어서였을까? 기대했던 색다른 감흥들이 실종되어 버린 느낌이 들었다. 책의 어디선가, ‘사랑에 이끌리면 미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표현을 보는 순간 그야말로 손발이 다 오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다. 아, 지은이는 참으로 자의식 과잉이구나 싶었다. 게다가 밀턴의 이야기를 하는 중에는 ‘예외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위대하다’는 말도 하고 있다, 아니 그럼 정말 예외적인 존재인 찰스 맨슨도 예외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그건 아닐 것이다. 책을 읽던 중에 순간 답답해져 오던 갑갑증을 달랠 길이 없었다.

그래도 글쓴이에게 정말 고마운 건 이 책을 통해 나에게 로이드 존스가 쓴 <미스터 핍>이란 책을 소개해 주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현혹되지 말지어다, 이 책에 나오는 런던은 프로파간다다! 런던을 빌미로 한 책읽기 에세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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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심연 을유세계문학전집 9
조셉 콘라드 지음, 이석구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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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콘래드의 <어둠의 심연>을 이야기하면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이 연출한 영화 <지옥의 묵시록>(1979)을 이야기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 사실 콘래드의 원작보다 코폴라 감독의 영화가 대중적인 게 사실이니까 말이다. 이번에 을유문화사에서 을유세계문학전집으로 출간된 이 책의 표지 역시 영화의 스틸컷이 장식하고 있었다.

폴란드 태생(정확하게는 우크라이나)의 조지프 콘래드는 폴란드 유수의 가문 출신으로 제정 러시아에 반대하는 반정부활동을 하던 양친을 차례로 여의고 1878년부터 영국 상선에서 일하게 됐다. 선원으로 인도와 인도네시아 그리고 콩고 등을 누비면서 훗날 작품 세계에 다양한 영감을 준 모티프들을 축적하게 된다. 세기말이었던 1899년에 발표된 <어둠의 심연>은 10년 전 벨기에령이던 콩고 자유주(벨기에 국왕이었던 레오폴드 2세의 사유지)를 직접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해서 쓰였다.

이야기는 착취와 억압의 식민제국주의가 전 세계를 호령하던 19세기 말,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불렸던 영국 템스강 위에서 넬리호라는 작은 배 위에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말로(Marlow)의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진다. 말로는 같은 배에 탄 다른 네 명의 동료에게 자신이 체험했던 기이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물론 화자는 다른 인물로, 소설 속의 소설이라는 액자식 구성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말로는 당시 영국의 식민주의를 고대 로마의 그것에 비유하며, 야만과 문명의 대결이라는 전통적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려서부터 지도에 많은 관심이 있던 주인공은 콩고 강에서(소설에서 실제 지명에 대한 언급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역업을 회사의 증기선 선장으로 채용되어, 미지의 탐험에 나서게 된다. 제국주의자들은 구슬이나 하찮은 면제품이나 황동선 같은 허섭스레기들을 가지고 원주민들로부터 귀한 상아를 착취하는 불공정 거래를 해오고 있다.

말로의 주된 임무는 강의 상류에 있는 내륙교역소에 가서 수집된 상아를 운반해 오고, 특히 커츠라는 이름의 신비에 쌓인 교역소장을 데려오는 것이다. 일단의 순례자들과 함께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이들의 여정은 미스터리 그 자체이다. 작가의 뛰어난 미개발 원시세계에 대한 묘사와 함께,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추어 가듯 커츠라는 인물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들이 조합을 이루면서 원주민과 커츠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우상화의 단계에 이를 정도의 외경심을 품게 되는 기이한 현실에 말로는 혼란상태에 빠지게 된다. 결국, 자신이 직접 커츠를 만나겠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소설을 통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커츠의 우상화는 마치 폴리네시아와 뉴기니 일대에서 행해지고 있다는 화물숭배(貨物崇拜)가 떠올랐다. 소설의 곳곳에서 보이는 야만과 문명의 충돌이라는 식민시대의 이분법적 구조는 아프리카/유럽 혹은 원주민/문명인이라는 대립각의 날을 세운다. 원주민들이 병든 커츠를 위해 벌이는 서구인들의 사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있는 의식과 제의들 역시 그 기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보인다. 소설이 쓰인 그 시절에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문화의 다양성이라는 주제가 보편화한 오늘날에 과연 문명이 선이고, 원시/야만은 악이라는 대결구조가 유효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한편, 서구인들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그렇게 원하던 상아를 얻기 위해 야만적 폭력도 서슴지 않는다. 문명인 대표로 나선 말로는 커츠를 찾아 나선 길에 오두막 근처 말뚝 위의 머리통을 보고서 기겁하지만, 자신의 표현대로 같은 조상을 하는 원주민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너무나 값없이 깎아내리는 역설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같은 인간으로서 그들도 이성과 지성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부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아직 독서 훈련의 부족 때문인지 무척이나 다양한 텍스트의 해석이 가능하다는 <어둠의 심연>의 단면만을 캐낸 것 같아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여전히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19세기 말, 상업 자본주의로 무장한 서구인들 침탈의 시기에 원시 자연의 세계에서 인간성 본질에 대한 질문과 자연에 대한 도전과 응전의 모험기를 그린 조지프 콘래드의 걸작을 만난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것에 대한 충분한 보답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다시 한 번 <지옥의 묵시록>이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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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 블루
김랑 글.사진 / 나무수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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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크로아티아의 색깔은 지붕의 주황색이었는데, <크로아티아 블루>의 작가 김랑 씨는 단호하게 크로아티아는 ‘블루’라고 책의 제목을 통해 선언하고 있다. 이미 지난봄에 <행복이 번지는 곳 크로아티아>와 KBS1에서 방영된 여행 다큐멘터리 <걸어서 세계 속으로> “크로아티아”편을 봐서 이제 크로아티아는 나에게 천국보다 낯선 지명이 아니었다.

역시 다른 책들과 비교를 의식해서였을까 우리가 이미 잘 아는 아드리아해의 보석 크로아티아의 도시들이 아닌 정말 생전 처음 들어보는 도시들을 작가는 한 달이라는 넉넉한 시간을 소비하면서 소개하고 있다. 그전에도 이미 크로아티아에 가보았는지, 뭐랄까 기시적인 여유가 느껴졌다. 작가의 글 속에 묻어나는 그런 여유감에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작가의 크로아티아 여정은 이탈리아와 맞닿은 국경의 이스트라 반도에서 시작한다. 로빈, 모토분 그리고 풀라의 사진들에서는 포토샵의 커브 기능이 불쑥 떠올랐다. 아마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보는 실제의 풍경들이 그런 빛깔을 띠고 있을까? 아마도 그건 아닐 것이다. 고대 로마유적들이 이탈리아의 그것보다도 잘 보존되어 있다는 말에 이탈리아 고대 유적이라면 깜빡 죽는 나는 호기심 어린 눈을 깜빡였다. 그래서였는진 몰라도 풀라의 고대 원형 경기장의 자태는 로마의 콜로세움 이상의 감동이었다. 아마 여행 에세이를 읽는 이유는 바로 이런 맛이겠지, 전혀 모르고 있던 것들에 대한 깨달음?

이스트라 반도에서 워밍업을 한 작가는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로 이동을 한다. 가장 가까운 서유럽의 도시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를 닮았다는 자그레브는 비엔나처럼 강을 끼고 있다고 한다. 비엔나에 다뉴브강이 있다면, 자그레브에는 그 다뉴브강의 지류인 사바강이 있었다. 동유럽과 서유럽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비엔나와는 한 때 같은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도시였던 만큼 그 동질감을 느낄 수가 있었다.

자그레브를 잇는 다음 여행지는 플리트비체로 유명한 디나라 알프스 지역이었다. 예전에 그림을 공부했다는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들에는 왜 이 책의 제목에 “블루”가 들어가는지 그 이유가 말없이 설명되고 있다. 게다가 작가가 길에서 만난 짧은 인연들을 조그맣게 속삭이는 글들 역시 마음에 들었다. 세상살이와 관계에 싫증이 난 나그네들이 길 위의 인연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건 참 역설적으로 다가온다. 아마 그래서 관계는 애증이 뒤범벅되어 있다는 말이 있는가 보다.

자, 이제 마지막 코스인 달마티아 해변으로 가보자. 작가는 책의 절반가량을 이 달마티아 해변에 할애하고 있다. 달마티아 코르출라 섬이 고향인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를 읽고서, 아메리카 대륙을 침탈하는데 선봉에 선 콜럼버스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달마티아 편은 정말 나그네의 본성을 가진 이들의 역마살을 자극한다.

자다르, 비비녜, 프리모스텐, 스플리트를 거쳐 두브로브니크에 달하는 작가의 크로아티아 탐험에 질투심이 일기 시작했다. 여행 초반부에는 버스와 기차 대중교통을 이용하던 작가가 어느 순간 렌터카로 달마이타의 곳곳을 누비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어쩌면 탁월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여행하다 보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차편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하기도 해야 하니 말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간택으로 황궁이 이어진 스플리트의 반질반질한 돌바닥길과 도대체 무슨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까 궁금한 골목길의 향연은 여전히 미지의 여행지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하지만, 역시 크로아티아 여행의 백미는 바로 두브로브니크였다. 지금도 나의 컴퓨터 스크린의 월페이퍼는 두브로브니크의 고성을 그린 일러스트가 차지하고 있다. “드디어 다시 왔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두브로브니크에 대한 작가의 애정 어린 고백이 참으로 사무치게 느껴졌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역시나 나의 습관대로 구글맵으로 작가의 이동 루트를 따라가 봤다. 두브로브니크는 모국 크로아티아에서 떨어진 육지의 섬처럼 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예전에는 같은 나라였던 보스니아에 의해 육로로는 분리되어 있었다.

<크로아티아 블루>는 멋진 사진과 감성을 자극하는 김랑 작가의 에세이들이 줄지어 소개되고 있다. 길 위에서 만난 인연들과의 사연에는 절대적으로 공감하게 되지만, 불쑥불쑥 등장하는 작가의 개인적인 연애담 편에는 솔직하게 말해서 짜증이 났다. 그 연애담의 알파와 오메가에 대해 전혀 모르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강요한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사실 타인의 연애담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알고 싶지도 않고,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닌가 말이다. 출판사에서 편집하는 과정에서 이 부분을 왜 집어넣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쨌든 달마티아 해변에서 바라보는 아드리아해의 옥빛 바다 색깔은 그 무엇에 비할 수가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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