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에 한번은 스페인을 만나라 - 뜨겁고 깊은 스페인 예술 기행 일생에 한번은 시리즈
최도성 지음 / 21세기북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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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두고 책을 펼치면서, 책 제목 한 번 기가 막히게 뽑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생에 한번은> 시리즈가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친견하는 건 처음이었기에 인터넷으로 예의 시리즈를 찾아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21세기북스에서 세 번째로 출간된 <일생에 한번은 스페인을 만나라>를 읽으면서 안 그래도 언젠가 스페인에 한 번은 가봐야겠다라고 생각한 결심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역시 초짜 배낭여행객이 아닌 베테랑 나그네인 최도성 작가가 뿜어내는 스페인의 아우라는 멋졌다! 우선 태양의 나라 스페인을 네 개의 권역으로 구분해서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를 정점으로 한 카스티야 지방을 출발로 해서, 알람브라 궁전으로 대표되는 아랍 문화의 잔상이 깊게 배어 있는 안달루시아, 스페인이면서도 동시에 스페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사는 카탈루냐 그리고 북부의 바스크 지방을 아우르는 그야말로 스페인 전토를 상대로 맞짱을 뜬 멋진 기행문을 독자들에게 선사해 준다.

작가는 큰 도시에서는 주로 미술관을 둘러보고 작은 도시에서는 그네들의 삶을 훑어보라는 충고를 해주고 있는데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가 있었다. 자신의 말대로 작가는 마드리드에서 세계 3대 미술관 중의 하나라는 프라도 미술관에서 만난 고야의 그림 이야기를 들려준다. 19세기 초반 전 유럽을 석권했던 나폴레옹과 프랑스군의 점령에 대항했던 스페인의 위대한 게릴라 부대 항전의 역사를 미술로 표현한 고야의 예술혼이 느껴지는 듯했다.

아울러 전쟁사진가로 유명한 로버트 카파의 일화도 역시 스페인과의 인연을 빼놓을 수가 없다. 아직도 진위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카파가 스페인 내전 당시 찍은 <어느 인민전선군 병사의 죽음>은 그 극적인 찰나의 장면만큼이나 카파에게 세계적 명성을 가져다 준 작품으로 포토저널리즘의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기억되고 있다. 최도성 작가가 이후에 방문한 톨레도에서 자신의 아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모스카르도 대령의 일화에 대해서는 전혀 동의할 수가 없었다. 엄연히 모스카르도는 합법적인 선거로 선출된 인민전선 정부에 반란을 일으킨 프랑코 일당에 동조한 파시스트 반란군 지휘자였다. 글쓴이의 이런 이데올로기적 양비론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이미 다른 책에서 읽어서 알게 된 세고비아 특산의 애저구이, 코치니요 요리를 뒤로하고 스페인 중에서도 아랍 문화의 영향으로 가장 이국적인 풍광을 자랑하는 안달루시아 지방으로 이동한다. 축제의 도시라는 세비야에서 멋진 플라멩코 드레스를 입은 여인네들의 화려한 의상이 바로 눈길을 사로잡았다. 떠돌이의 삶을 사는 집시들의 이야기 그리고 신대륙을 발견(이미 존재하고 있던 대륙을 발견했다는 표현을 적절한지 모르겠지만)한 콜럼버스가 세비야와 스페인 왕국에 가져다준 물적 토대와 이를 기반으로 한 스페인 예술의 황금기에 대한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한 수 배울 좋은 기회였다.

스페인 본토라고 할 수 있는 카스티야와는 전혀 다른 문화적 그리고 역사적 배경을 가진 카탈루냐 지방에 대한 이야기는 FC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대결 구도로만도 충분히 설명할 수가 있을 것 같다. 역시 카탈루냐 지방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바르셀로나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가우디와 구엘 공원 그리고 지중해 바다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오히려 몬세라트와 이비사 그리고 분자요리로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레스토랑 <엘 불리>에 대한 이야기들이 좀 더 신선하게 와 닿았다. 초현실주의 화가이자, 광기 어린 예술가라고 작가가 규정한 살바도르 달리의 삶의 궤적을 추적하는 피게레스와 토마토 축제로 유명한 발렌시아의 부뇰 기행도 빼놓을 수가 없다.

최도성 작가의 스페인 순례는 아쉽게도 북부의 바스크 지방에 대한 이야기로 피날레를 내리게 된다. 스페인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대서양 연안의 비스케이만에 접해 있는 바스크 지방 역시 자신들만의 고유한 지방색을 갖추고 있으면서, 오랫동안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해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베스트셀러 작가 시드니 쉘던의 <시간의 모래밭>에 나오는 바스크 출신의 주인공 하이메 미로의 스페인 전역을 누비는 모험극이 떠오르기도 했다. 팜플로나의 소몰이 축제애 대한 스케치와 명화 게르니카에 대한 이야기는 그야말로 피날레에 어울릴만한 멋진 에피소드들이었다.

개인적으로 지나치게 개인적인 경험만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수년간의 스페인 여행의 내공을 잔잔하게 읊조리는 듯한 최도성 작가의 스페인 기행문이 참 마음에 들었다. 결국, 언젠가는 찾아갈 스페인 여행을 꿈꾸며, 이번에는 70년 전에 스페인을 다녀간 그리스 출신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스페인 기행>을 읽어 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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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폴 오스터 지음, 김경식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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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최근 폴 오스터의 책에 푹 빠져 버렸다. 어느 누가 올해 만난 최고의 작가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다음의 세 명을 꼽을 것이다. 작고하신 커트 보네거트 할아버지, 칠레 출신의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이 양반 책은 특히 짧아서 더 마음에 든다!) 그리고 다양성 그 자체인 브루클린을 나와바리로 삼아 작품활동을 펼치는 폴 오스터가 그들이다. 다른 책들도 그렇지만, 폴 오스터의 책도 바로 다 읽지도 못하면서 계속해서 사들이고 있다.

이 책은 파주에 내가 자주 들르는 이가고서점에서 보고서, 찜을 해둔 책이었는데 지난 주말 그동안 누가 사갔을 새랴 싶어서 바로 사서 단박에 읽어 버렸다. 이 책은 폴 오스터와 홍콩 출신의 감독 웨인 왕이 손을 잡고 만든 두 편의 영화 <스모크>와 <블루 인 더 페이스>의 제작과정과 시나리오가 담긴 책이다. 빡빡한 행간으로 유명한 열린책들에서 나온 책이지만 그런 연유로 쉽게 읽을 수가 있었다.

영화 <스모크>는 이미 십 년도 더 전에 보긴 했는데 세월과 망각이라는 파도에 휩쓸려 잘 기억이 나지 않던 차에, 그 원작이라고 할 수 있는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 시절의 추억이 그야말로 마법처럼 기억 저 너머에서 피어올랐다. 책을 읽기 전에 단지 오랜 기억 속에서 ‘참 따뜻했던 영화였지’라는 나의 영화에 대한 단상은 꼼꼼하게 책을 읽으면서, 그런 느낌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지를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이야기의 발단은 뉴욕타임스로부터 폴 오스터가 어느 크리스마스 즈음해서 단편소설을 하나 써달라는 청탁으로 시작된다. 주인공 오기는 브루클린의 가상의 담뱃가게에서 훔친 카메라로(!) 어느 특정한 시기에 매일같이 거리의 사진을 찍는다. 그는 지난 십여 년간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자신만의 의식을 엄숙하게 진행해왔다. 오기가 일하는 이 담뱃가게는 브루클린에 서식하는 이웃들의 소통 공간이다.

우리네 그것과 다를 게 없는 소시민들의 삶과 애환이 담긴 훈훈한 이야기들이 하비 카이틀과 윌리엄 허트라는 연기력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는 두 명의 걸출한 배우들과 수많은 단역 배우들의 열정과 에너지와 결합이 돼서 <스모크>가 탄생했다. 물론 그 배후에는 작가 폴 오스터의 시나리오 작업이 탄탄하게 뒷받침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혼자서 책을 쓰는 소설가의 그것과 수많은 사람이 기획과 제작 단계에 개입하게 되는 영화 작업은 그 근본에서부터 차이점을 보여준다. 영화 <스모크>의 후속편 격인 <블루 인 더 페이스>의 경우에는 촬영 기간이 단 6일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얼마나 급하게 촬영이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서로 바쁜 배우들의 촬영 스케줄 때문에 때로는 따로따로 촬영을 해서 편집의 묘미를 살린 비하인드 스토리의 소개에서는 ‘아, 그랬었구나!’하는 탄식이 절로 튀어나왔다.

오래전에 친구가 그린 만화에서 모티프를 잡아서 어설픈 시나리오를 써 본 적이 있는데, 개개인의 세부적인 감정의 기술과 함께 상황설정 그리고 공간묘사 등 일반적인 글쓰기와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뛰어난 작가가 훌륭한 시나리오 작가는 아니라는 공식마저도 폴 오스터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나 보다. 대개 시나리오 작가는 자신이 맡은 시나리오를 감독에게 넘겨 주면 자신의 임무는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는데, 영화 <스모크>에서 폴 오스터는 촬영현장은 물론 편집과정에도 흔쾌히 참가를 했다고 한다. 아마 그 덕분에 후속작 <블루 인 더 페이스>에서 웨인 왕 감독과 함께 크레딧에 공동감독의 타이틀을 올릴 수가 있었다.

<브루클린 풍자극>에 이은 두 번째 폴 오스터와의 만남 역시 흡족했다. 앞으로 계속될 폴 오스터 작품세계 탐험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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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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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팩션 장르를 굉장히 좋아한다. 역사 속에 실존했던 사건이나 인물들이 펼치는 가상의 미싱 링크를 훔쳐보는 재미를 즐긴다. 최근에 읽었던 김탁환 선생의 <노서아 가비>기 특히 인상적이었다. 나랑은 궁합이 잘 맞지 않는 작가인 김연수 작가가 1930년대 만주 간도 지방에서 실제로 있었던 ‘민생단사건’을 모티프로 삼아서 쓴 <밤은 노래한다>를 읽으면서 아주 오래전에 접했던 어느 공산당 출신 독립운동가 김산, 아니 장지락의 비극적인 삶이 떠올랐다.

경술국치를 겪고, 망국의 한(恨)을 품은 채로 살아야 했던 조선 사람들이 일제가 통치하는 조국을 떠나 중국과 조선의 사이라는 지명 간도(間島)에 정착해서 생활의 터전을 삼았다. 한편, 조선을 병탄한 일본의 제국주의 야욕은 드디어 9·18 만주사변이라는 폭력적인 방식을 통해 폭발하게 된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드넓은 만주벌판에서 일본을 상대로 활발한 무장투쟁을 벌이던 망국 조선의 열혈지사들은 일본이 중국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을 개시하면서 조선의 자주독립이냐 아니면 중국혁명을 우선 완수하고 난 뒤에, 조선혁명을 도모해야 하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뒤로하고, 김연수 작가는 김해연이라는 식민지 조선의 엘리트로 당시 잘 나가는 일본 기업이었던 만철의 측량기사를 주인공으로 삼아 독자를 잃어버린 고토 만주로 공간이동을 시킨다. 경남 통영 태생으로 민족이나 국가 의식 없이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나 자란 김해연은 기술학교를 졸업하고, 만철의 용정 사무소에서 근무하게 된다. 1932년 9월의 어느 날, 그에게 전해진 편지 한 통이 김해연의 운명의 수레바퀴를 돌리기 시작한다.

다른 김연수 작가의 작품들처럼 <밤은 노래한다>에서도 ‘사랑’이라는 조금은 진부한 주제가주인공의 운명을 가르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만주에서 용맹을 떨치던 일본의 최정예 부대 관동군의 나카지마 중위와 용정에서 음악 교사로 근무하던 이정희 간의 삼각관계는 소설의 주인공 김해연의 삶을 온통 혼란 속으로 빠뜨려 버린다. 소설의 초반에 나카지마가 인생을 바꿔 놓은 사랑이란 걸 한 번 해보라는 충고가 묵시록처럼 다가온다.

사랑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에서 출발한 내러티브는 주인공을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공산주의 항일투쟁의 장이라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는다. 공산주의와 국가주의 파시즘이 절대 양립할 수 없었다는 역사를 굳이 들추지 않더라도, 서로 상극에 서 있는 이데올로기의 충돌은 피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한 때, 공산주의 운동을 하던 이들도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말미암아 일제에 협력하는 변절자, 일제의 교묘한 선전에 넘어가 일국일당주의라는 코민테른의 원칙 대신 간도에 조선족이 자치하는 공동체를 수립하려는 민생단 운동가, 유격구에서 일가친척들을 토벌대에게 잃고 유격대원으로 변신해 가는 사람들, 그리고 낭만적 군국주의를 신봉하는 관동군 장교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글 속에서 펄떡이는 다양한 인물군들이 등장한다.

작가에게 만주 북간도는 선과 악이 혼재된 공간적 배경이다. 만주사변 후에 세워진 일제의 위성국가 만주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만큼이나 그 공간을 채우는 인물의 그것도 혼란스럽기는 매한가지다. 민족과 국가 의식 따위라고는 전혀 가지지 못했던 주인공이, 배신과 실연으로 두려움-분노 그리고 무기력에 떨면서 타인과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정신세계의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게 된다. 어쩌면 그것은 그에 앞서 선구자들이 이미 지나간 길을 되짚어가는 의식화의 과정일는지도 모르겠다.

김연수 작가는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소설의 갈등을 이루는 인물들의 악연에서 그 실마리를 제시한다. 톨스토이의 인도주의는 일제의 상상을 초월하는 폭력 앞에 그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마르크스-레닌주의 경도된 간도의 젊은이들은 더는 인도주의적 협상이나 대화로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무장투쟁에 나서게 된다.

중국 공산주의 혁명운동에 의존하지 않은, 조선인들만의 독립국 혹은 해방구로서의 한인(韓人) 소비에트를 만들겠다는 박길룡/박타이와 우선 중국혁명을 성공하고 나서 차후를 도모하자는 박도만의 대립은 그 내면에 깔린 이정희/안나 리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열망만큼이나 종잡을 수 없는 시대의 혼란상을 극명하게 도출하고 있다. 객관을 호소하면서도, 자신들의 주관적인 주장에서는 한발자국도 양보하지 못하는 그네들의 양가적 시선이 안타깝게 다가왔다. 도대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냐는 말인가? 그 어느 것도 정답이 될 수 없다고 작가는 빛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노래한다.

한편, 주인공 김해연은 이런 역사적 계급투쟁의 갈등 속에서도, 유격구에서 혁명의 도리를 배운 여옥과 다시 사랑에 빠지게 된다. 생과 사의 갈림길이 수도 없이 오가는 가운데서도 사랑하는 이에게 바다를 보여주마고 약속한다. 이것은 마치 격랑이 이는 역동적인 시대의 한복판에서도 인간의 숙명적인 개인화의 반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주인공의 감정의 흐름은 일본군 토벌대에게 포위된 어랑촌 소비에트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해서 용정에 잠입한 김해연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권총 한 자루로 무장한 채 총영사관으로 돌입하려는 장면이 묘하게 겹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소설에 나오는 민족주의와 쟁파주의 그리고 일본군 첩자라는 누명을 쓰고 혁명의 아수라장에서 죽어가는 민생단원들의 모습에서, 1938년 중국 연안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어간 희대의 혁명가 김산, 장지락이 떠올랐다. 혁명의 대의가 얼마만큼 중요한지는 모르겠지만, 무고한 이의 목숨까지도 담보해야 할 혁명이라면 단연히 거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억울하게 죽은 혁명가 장지락의 신원은 1983년에 회복되었다고 하지만, 만시지탄이었다.

김연수 작가의 글은 아무리 읽어도 빡빡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최근에 읽은 김훈 작가의 글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아마도 나의 부족함이거나 아니면 작가의 스타일이랑 나의 독서습관이 안 맞는 것일지도.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좀 더 형상화하는데 공을 들였더라면 하는 김연수 작가의 공력에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점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우리 역사의 한 모퉁이에 가려져 있던 잊힌 역사를 물 위로 부상시켰다는 점만으로도 <밤은 노래한다>는 충분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을 한다. 많은 역사가도 미처 하지 못한 잊힌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을 끌게 만든, 김연수 작가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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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니, 선영아 작가정신 소설향 18
김연수 지음 / 작가정신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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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작가의 책을 처음으로 읽었다. 사실 얼마 전에 새로 나온 <세계의 끝 여자친구>라는 단편선을 사서 읽다가 절반가량 읽고서 접어 버렸다. 풍문에 듣자하니 김연수 작가의 책들에 대해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뉜다고 하는데, 아마 <세계의 끝 여자친구>와 나의 궁합이 맞질 않았었나 보다. 대신 어제 읽은 <사랑이라니, 선영아>는 적은 분량 때문인지 쉽게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사랑이라니, 선영아>를 한마디로 요약해 보자면 김연수 작가식 사랑학 개론이라고나 할까. 격동의 세월이 지난 끝자락에서 대학생활을 한 세 명의 영문과 동기들의 엇갈리는 사랑, 그리고 다시 13년이 지나고 나서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는 사랑에 대한 고찰이 그 주를 이루고 있다.

사랑이 완성이 결혼은 아니라지만,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는 불완전하나마 어느 정도 완성품에 가까운 게 바로 그 결혼이라는 제도가 아닌가 싶다. 작가는 프랑스의 저명한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의 말을 빌려 결혼은 사랑하는 두 남녀의 결합이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집단의 ‘상호증여’에 그 핵심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정말 날카로운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최근 우리 사무실에서 결혼한 동료분이 접한 작금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어찌나 그렇게 가슴에 와 닿는 말인지 모르겠다.

동갑내기 친구들인 증권사 직원 광수, 그의 아내가 된 선영(오래전 광고 문구에서 화제가 됐던 바로 그 ‘선영’이다) 그리고 소설가로서 룸펜 인텔리겐치아의 모습으로 사는 진우가 김연수 작가가 펼치는 사랑학 개론의 당당한 주인공들이다. 현명한 독자 제씨라면 바로, 통속적인 삼각관계가 연상될 것이다. 세상에는 참으로 여러 가지 사랑이 있는데, <사랑이라니, 선영아>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부서진 감정의 껍질나부랭이들에게 둘러싸여 허우적대고 있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화자라고 할 수 있는 광수는 이제는 아내가 된 선영과 만인의 연인 진우와의 과거에 ‘오셀로’ 같이 시기와 질투심이라는 저급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고전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자기파멸로 치닫거나 그러진 않지만 아름다운 여인을 홀로 독차지하려는 고독에 쩔은 보노보(다른 말로 피그미침팬지라고 한단다!)의 몸부림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광수가 집착하는 팔레노프시스, 우리 말로는 호접란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면서 영어단어 deflower가 불현듯 떠올랐다. 결혼식장에서 미래의 아내 선영이 들고 있던 부케의 호접란 한 송이가 꺾여지는 것을 보고 불 같은 질투의 화신으로 변했던 그의 모습에서 순결강박증에 걸린 마초의 이미지가 선뜻 지나갔다. 어쩌면, 소설은 문학계의 자칭 서태지라는 진우가 아닌 광수가 써야 했던 게 아닐까?

사랑에 대해 김연수 작가가 글로 쏟아 놓은 이야기들이 너무나 많아서 알파와 오메가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 조금은 난감하다. 그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와 닿는 부분은 바로 사랑은 모든 감정의 ‘블랙홀’이라는 주장이었다. 작가는 인간이 살면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을 집어삼키는 게 바로 사랑이라고 했던가. 역시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부터 사랑할 줄 아는 이가 되어야 한다는 교훈도 빼놓을 수가 없겠다. 도저히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불타오르던 사랑에도 유효기간이 있듯이, 사랑이라는 환영 속에 자신을 홀라당 빼앗겼던 이들도 사랑이 끝나고 나면 조용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그의 썰이 그야말로 묵시록처럼 뇌리를 스친다.

마지막으로 사랑을 준비하거나 혹은 현재 진행 중인 이들에게 상대방의 정체성까지 요구하는 과도한 사랑은 될 수 있으면 피하라고 김연수 작가는 주문한다. 아마 작가는 그런 사랑일수록, 사람들이 거의 미칠 정도로 염원하면서도 이성적으로 거리를 두려 한다는 비밀을 남보다 먼저 깨달았나 보다. 마르크스 동무의 위대한 사회적 유산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자기애, 고학력, 그리고 자의식 과잉에 이르기까지 사랑하지 않고 결혼하지 않는 이들을 위한 핑계가 그야말로 차고 넘치는 시대에 멋진 사랑학 개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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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미 넉장반 세계일주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
모리미 도미히코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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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미 도미히코라는 이름은 작년에 나온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라는 재밌어 보이는 제목의 책으로 알게 됐다. 아직 읽지는 못하고 지인에게 선물한 기억이 난다. 그리고 작가가 당근 여자인 줄 알았다. 오늘 리뷰를 쓰기 위해 인터넷으로 작가를 검색해 보니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 책에서 내내 낭창낭창한 의성어와 의태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를 하기에 여성작가로 착각했다.

작가의 연보를 살펴보니 그동안 도리미 작가가 발표한 책들이 거의 다 국내에 출간됐다. 특이할 만한 점은 일본 유수의 명문대인 교토대를 졸업한 그가 쓰는 소설의 배경은 모두가 교토 그것도 사쿄구라는 곳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2002년 월드컵이 열렸던 해에 처음으로 교토를 찾았었는데 기온, 난젠지, 킨카쿠지 그리고 철학의 길 등 한번은 직접 가봤던 곳의 명칭이 아주 익숙해서 더 좋았던 기억이다.

주인공 나는 대학교 3학년생으로, 지난 2년을 무위도식하면서 보냈는데 그 연원을 거슬러가면 자신의 숙적이자 단짝인 오즈가 자리 잡고 있다. 주인공의 전언에 의하면, 타인의 불행을 반찬으로 삼아 세 공기 밥을 뚝딱 해치울 정도로 악당이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오즈가 해로운 행동을 하느냐 하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는 주장이다. 어디까지나 무익함에 초점을 맞춘 그야말로 일련의 얼간이 짓거리들로 하루해를 보낸다.

아마도 작가의 페르소나로 보이는 ‘나’는 검은 머리 아가씨와 감칠맛 나는 캠퍼스 연애 라이프도 꿈꾸고 하지만 태생적으로 게을러 먹은 위인이라, 귀차니즘으로 모든 것을 방치해 버린다. 대신 항상 ‘타기’할 대상인 오즈와 어울려 수상쩍은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갖가지 어처구니 없는 일들을 벌인다. 이런 일들에 대한 도리미 작가의 섬세하면서도 구체적인 묘사가 바로 이 책 <다다미 넉장반 세계일주>의 핵심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하지만, 정작 더 독자 제씨의 관심을 끄는 것은 모두 네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다다미 넉장반 세계를 중심으로 반복되는 메이트릭스(matrix) 같은 구성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똑같은 특징을 가진 캐릭터들의 등장과 같은 장소를 배경으로 해서 다만, 조금씩 다른 상황 전개가 읽었던 책을 두 번 세 번 읽는 것 같은 환영에 빠지게 한다는 맹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순 없으리라. 작가가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으로 추정되는 의고체(擬古體)의 문장들이 구어체에 익숙한 독자 제씨에게는 적잖이 당황활 수도 있겠지만, 세 번째 이야기와 네 번째 이야기로 넘어가면서부터는 뇌리에 의식화되어 어떤 색다른 전개가 펼쳐질지에 대해 기대감이 부풀기 시작한다.

책의 표지와 매장마다 오른쪽 페이지 끝에 매달려 있는 찰떡곰의 일러스트가 아주 마음에 들었는데, 교토에서 벌어지는 예의 상황극을 좀 더 시각화시킬 수 있는 다양한 일러스트들을 풍성하게 넣어 주었으면 책이 더 재밌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어떻게 보면 방향성을 잡지 못한 채, 무의미한 대학생활을 보내고 있을 청춘들을 계도하는 글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어느새 낭만이라는 어휘가 사라져 버린 채, 더 좋은 학점이수와 취업이라는 절체절명의 난제 가운데 허우적거리는 우리네 대학 청춘들이 떠올라 조금은 서글퍼지는 수상쩍은 청춘 사내들의 일탈기였다. 이제 곧 출간이 임박했다는 도리미 작가의 새로운 소설 <유정천 가족>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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