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관의 피 - 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2
사사키 조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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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전편에서 두 건이 미제 살인사건과 그 사건들을 풀기 위해 매진하던 안조 세이지 주재 경관의 의문사 그리고 덴노지 화재 사건 현장을 떠나 순직처리조차 되지 못한 아버지의 원한을 풀기 위한 아들 다이조의 노력이 가중되는 가운데 아쉽게도 후속편으로 그 바통을 넘겨주게 되었다.

어느 미스터리를 다룬 소설도 마찬가지겠지만, <경관의 피> 역시 예의 공식을 따른다. 하지만 그 몫은 세이지의 아들 다이조의 몫이 아닌 듯 싶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관이 된 다이조는 자신이 희망하는 보직인 주재경관 대신에 공안경찰로 발탁이 되어, 뛰어난 공훈을 세우지만 경찰이면서도 자신의 신분을 감춘 채, 본의 아니게 적군파 조직에 몸을 담게 되면서 극심한 자아의 충돌을 경험하게 된다.

결국 공안 임무를 마치긴 했지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가정불화를 겪게 된다. 한편 아버지의 친구들로 다이조의 후원을 도맡았던 삼총사들은 이제 경찰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어 다이조의 희망대로 주재경관이 될 수 있도록 힘을 써준다. 주재경관이 된 다이조는 다시 자신의 아버지의 오명을 벗기기 위해, 발생한지 근 30년 된 사건들을 탐문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주재경관으로서 본연의 임무를 다하고 있는 다이조지만, 아들 가즈야와는 어머니인 준코를 폭행했던 기억으로 인해 서먹서먹하기만 하다. 별다른 일 없이 평화롭기만 하던 어느 날, 다이조의 끈질긴 노력으로 마침내 아버지의 의문사에 대한 단서를 밝혀내게 되지만 관내에서 발생한 인질 총기사고로 인해 다이조는 유명을 달리하게 된다. 그리고 아버지 다이조의 뒤를 이어, 가즈야 역시 도내의 국립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다음 경찰에 지원한다.

3대째 경관을 배출한 집안이라는 화려한 타이틀을 달고, 경찰직에 첫발을 내딛은 가즈야에게 주어진 첫 임무는 경시청 본청으로부터 오직 혐의를 받고 있는 동료 경관에 대한 내사임무였다. 수사과의 능력 있는 경관이지만, 어쩐지 경찰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보이는 고급 세단과 옷차림의 가가야 경부. 그의 수하로 들어간 가즈야는 충실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 나간다. 책을 읽으면서 점점 결말은 다가오는데, 도대체 이 모든 미스터리의 끝을 어떻게 내려고 작가 사사키 조는 이렇게 질질 끄는 건가라고 생각하는 순간, 가즈야의 에피소드는 마무리가 지어지고 할아버지의 의문사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비밀들이 차례로 밝혀진다.

<경관의 피> 상하권을 다 읽고 나서 바로 든 생각은, 그 엄청난 스케일이었다. 전후시대 일본에서부터 시작해서 오늘날의 일본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경찰이라는 특정 집단을 주제로 해서 일관된 모습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가 사사키 조의 구성력에 감탄을 마지않았다. 시대상의 변화에 담보된 소설 내의 사건들에 대한 전개 역시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3대에 걸친 이야기를 풀어 나가면서, 소설에서 크든 작든 등장한 인물들을 나중에라도 다시 등장시켜 독자들로 하여금 아 그 때, 그 사람이라고 연상시키는 방법은 정말로 기발했다. 더불어 등장인물들이 내던지는 말들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큰 줄거리인 미결 살인사건과 세이지의 의문사에 대한 미스터리에 연결시키는 집중력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물론 재일 조선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과 사회주의 노동조합 운동에 대한 편향적인 사고에 바탕한 흑백논리가 조금은 부담스럽긴 했지만, 너무 정치적이지 않으면서도 중용적인 태도로 이에 대한 논쟁을 살짝 빗겨 나가는 기술 역시 인정해줄만한 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족으로 결말 부분에 가서 너무 쫓기는 듯한 인상으로, 엔딩을 처리한 점이 좀 불만스럽긴 했지만 대체적으로 만족할만한 수준이었다.

옥의 티를 하나 꼽자면, 하권 394페이지에서 작가는 안조 세이지가 2차 세계대전 당시 북인도에 갔었다고 언급을 하고 있는데 지리적으로 북인도라 하면 델리와 캐슈미르 지방을 지칭하는데 아마 이것은 일제의 1944년 임팔-코히마작전을 착각한 기술로 보인다. 굳이 정정하자면, 북인도라기 보다는 동인도라고 하는게 맞는 표현이다.

사사키 조 작가의 또 다른 작품들의 조속한 소개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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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관의 피 - 상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1
사사키 조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경관의 피>라……. 책을 읽으면서 두 가지 생각이 중첩되고 있었다. 하나는 대대로 경찰이라는 직업을 물리고 있는 안조 집안의 내력과 그러기 위해 희생되는 경찰의 피라는 점이 말이다. 경찰을 주인공으로 한 추리소설을 쓰기로 유명하다는 사사키 조의 가장 뛰어난 수작으로 알려진 <경관의 피>가 드디어 출간이 되었다. 도대체 얼마나 유명하길래 영화 그리고 드마라 제작까지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걸까? 책을 통해 직접 체험해 볼 수가 있었다.

이야기의 배경은 전후 아직 패전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일본이다. 상하권으로 이루어진 책에는 모두 세 명의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모두 안조 집안의 남자들이다. 1대 안조 세이지, 2대 안조 다미오 그리고 3대 가즈야. 상권에서는 다미오의 이야기까지만 나와 있었다. 군 출신으로 전후 사회혼란기에 경찰훈련소를 통해 경찰직에 투신한 안조 세이지는 주재 경관이라고 하는 어떻게 보면 작은 업무에 자신의 인생을 걸고자 한다.

지극히 소시민적인 삶을 사는 안조 일가. 박봉의 월급이지만, 민중의 지팡이이자 민주경찰이라는 말처럼 2차 세계대전 중 국민을 억압하던 세력에서 새로운 경찰조직으로 태어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물론, 군 출신 인사들이 여전히 고위직을 장악하고 있는 관계로 세이지의 상사 중에는 그렇지 않은 이들도 많지만 말이다. 태생적으로 체제 유지를 위한 조직인 경찰 조직 내의 인사들은 말할 것도 없다. 초반부 경찰학교 훈련 과정에서 알게 된 구보타, 가토리 그리고 하야세 등의 인물들이 소개된다.

세이지는 경찰훈련을 마치고, 여느 경찰들처럼 일선 파출소에 순사로 근무하게 된다. 첫 근무지로 그가 주로 활동하게 되는 우에노 공원과 아메야요코초는 작년 가을에 가본 적이 있어서 그런지 무척이나 익숙한 지명이었다. 그의 관할 구역 내에서 알고 지내던 미도리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몇 년 후에 야나카 묘지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에 의혹을 느낀 세이지는 은밀한 조사에 나선다. 하지만 주재경관이 된 어느 날, 인근의 덴노지에서 화재가 일어나고 알고 지내던 지인으로부터 범인이라고 지목을 받은 사내를 쫓다가 의문의 사고사를 당하게 된다.

세월은 흘러, 세이지의 큰아들 다미오 역시 경찰직에 투신하고자 한다.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들이었던 하야세 삼총사들은 다미오의 학업을 지원한다. 고등학교에서 뛰어난 성적으로 대학 진학을 할 수도 있었지만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대째 경찰을 지망하겠다는 다미오는 경찰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경시청의 공안부로부터 은밀한 제안을 받는다. 홋카이도 대학에 진학을 하면, 경찰로 인정해 주면서 그에 해당하는 대우도 해주겠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그것은 바로 경찰의 프락치로 60년대 말 70년대 초에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던 일본 적군파 색출을 위해 내부 침투를 하라는 것이었다. 바로 여기서 영화 <무간도>의 비정한 경찰과 폭력조직의 암투가 떠올랐다. 다미오는 예상대로, 적군파 내부에 무사히 침투해서 혁혁한 공을 세우긴 하지만 언제나 거짓을 말하고, 자신을 철저하게 감추어야 하는 이중생활 앞에서 무너지는 자신을 느낀다.

모든 공안 임무가 종결된 후, 다미오는 자신을 간호해 주던 호리고메 준코와 결혼해서 평범한 경찰관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은 주재경관을 희망하면서, 억울하게 유명을 달리한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고자 하는 사명감과 유능한 공안경찰로 활약하던 시기에 얻게 된 신경불안증으로 고달픈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 와중에 아내 준코에게 손찌검을 하는 등, 극도의 스트레스로 인한 불안증상을 보인다.

아직 하권을 다 읽지 못해 앞으로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무척이나 궁금한 가운데, 역사적 사실들과 함께 하는 사사키 조가 쓴 <경찰의 피>의 묘미를 느끼게 됐다. 전후 일본 사회의 불안은 당연히 강력한 경찰력을 요구하고 있었다. 아마 지금까지도 그런 전통이 이어왔는지 일본 경찰의 사회질서 유지력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그냥 언뜻언뜻 들어왔던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한국전쟁이 전후 일본이 다시 경제대국으로 부흥하게 된 계기였다는 역사적 사실이 <경관의 피>의 서술을 통해 직접적으로 느껴졌다.

아울러 예의 전쟁이 일본 내의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활동에도 영향을 미쳐, 일단의 사회불순세력들이 경찰서를 습격해서 무기를 탈취하는 일들이 빈번했다는 기술도 흥미로웠다.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마무리되면서 사회불안이 안정되었다는 이야기에도 수긍이 갔다. 쿠바 혁명과 베트남전의 영향으로 60년대부터 시작해서 70년대에 이르기까지 일본 전공투 세력과 적군파의 등장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 일본 경찰에서 프락치를 동원해서 그들을 제압했다는 가설도 인상적이었다.

각 시대마다 경찰들이 주목하는 대상에 대한 작가의 분석도 예리했다. 전후에는 주로 생계형 범죄들이 난무했었지만, 전후 고도 성장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기존의 사회적 모순들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지면서 무장폭력투쟁에 대한 경찰력의 대응이라는 시기적절한 주제에, 대를 이어 경찰을 업으로 삼는 안조 집안의 내력이 결합되면서 소설은 더욱 독자들의 흥미를 끌고 있었다.

더군다나 대를 이어 경찰직을 자원한 아들이 의문의 사고사를 당한 아버지의 죽음의 비밀을 쫓는다는 대의명분을 독자들에게 주지시키고 있는 작가의 소설작법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과연 하권에서 다미오는 아버지 죽음에 대한 진실에 얼마만큼 다가갈 수 있을 것이며, 세이지의 손자 가즈야는 또 어떤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들려줄 것인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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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
메리 앤 셰퍼.애니 배로우즈 지음, 김안나 옮김 / 매직하우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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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나서, 한동안 어떻게 북글을 써야 할지를 몰랐다. 솔직하게 말해서, 책을 읽는 내내 쩌릿쩌릿하게 느꼈던 그 많은 감동들을 도대체 글로 풀어낼 자신이 없었다. 한 권의 책이 이렇게 다양한 감정들을 담아낼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놀라웠다. 이 책의 저자인 메리 앤 셰퍼는 안타깝게도 이 책의 마무리를 조카인 애니 배로우즈에게 맡기고 타계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엘리자베스의 운명처럼 내게 다가왔고, 소설의 마무리를 지은 애니 배로우즈는 극중 인물인 줄리엣 애쉬튼과 공명을 이루고 있었다.

이야기는 참혹했던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위치한 영국령의 채널 제도 중 가장 큰 섬인 건지 아일랜드의 독일군 점령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전쟁 중에 르포 작가로 유명세를 탄 줄리엣 애쉬튼에게 어느 날 편지가 한 통 날아들면서 이 멋진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편지는 건지 섬의 도시 애덤스라는 남자가 찰스 램의 책을 통해 알게 된 줄리엣의 주소로 쓴 것이다. 물론 작가가 치밀하게 배열한 구성이겠지만, 짧은 한 통의 편지로 이렇게 황홀하면서도 감동적인 서사시의 시작을 알리는 것은 너무나도 멋진 발상이었다.

한 때 전 세계에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통했던 대영제국은 전 유럽을 석권한 히틀러의 위협으로 유서 깊은 자치를 자랑하는 채널 제도를 포기하고, 건지 섬에 진주한 독일군의 점령으로 너무나 평화로웠던 건지 섬 주민들에게 아득하게만 느껴졌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차가운 현실로 다가온다. 독일군의 침입에 앞서, 어린 아이들을 본토로 소개하는 과정은 애끓는 이별의 현장이었다. 아울러 독일은 전세가 기울면서 대서양 방벽을 구축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으로 건지 섬에 독일이 제압한 유럽 각국에서 차출된 토트 노동자들을 데려다가 열악한 환경 아래서 강제 노동을 시킨다.

이런 역사적 배경과 함께 그동안 책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던 건지 섬의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감자껍질파이 클럽>이라는 문학회를 조직하고, 책을 읽고 토론하는 과정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또 그 가운데 책에 대한 재발견을 이루게 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과정들이 줄리엣과 그의 친구들 그리고 건지 섬의 문학회원들이 주고받은 수많은 편지들을 통해 독자들에게 소개되고 있다.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에는 어둠처럼 스며든 죽음과 고통, 억압 그리고 굶주림이 상존하는 전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지상과제 아래, 한줄기 희망으로 건지 섬의 주민들에게 다가온 책들과 그 책들이 그들의 영혼에 부여한 인간 존엄 그리고 지고의 휴머니즘의 흔적들이 곳곳에 배어 있다. 물론 항상 우울한 이야기들만 있는건 아니다, 유쾌한 유머와 상대방에 대한 진실함을 배경으로 한 부러울 정도로 멋진 관계들이 있다. 이런 다양성이야말로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을 더욱 빛나게 만드는 자산들이다.

줄리엣과 미국 출신의 자기 밖에 모르는 ‘선샤인 보이’ 마컴 V. 레이놀즈의 풋사랑 로맨스와, 조실부모하고 어려서부터 홀로 자란 줄리엣과 그녀의 절친 소피의 과거를 공유할 수 있는 진한 우정과, 비록 이루어질 수 없을 사랑이었을지 모르지만 건지 섬의 영웅 엘리자베스와 독일군 장교 크리스티앙 헬만 대위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들은 씨줄과 날줄처럼 교차하면서 독자들에게 희로애락, 다시 말해서 인간관계를 통해 드러날 수 있는 거의 모든 감정들을 전달해 주고 있다.

어디 그 뿐이랴. 자신보다 타인의 안위를 걱정하고 몸소 실천하는 엘리자베스는 폴란드 출신 토트 노동자를 구하려다 자신은 어린 키트를 남기고 유럽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기도 한다. 불의를 보고서는 참지 못하는 엘리자베스의 그런 용감한 행동들을 읽으면서, 숙연해지는 나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등장하는 도시 애덤스, 이솔라 프리비, 아멜리아 등 하나 같이 개성이 넘치는 건지 섬 문학회원들의 에피소드들은 감동 그리고 또 감동 그 자체였다.

나중에 북글을 쓰게 되면 꼭 쓰고 싶은 내용이 있었다. 조각을 좋아하는 일라이에게 판목을 줄리엣이 선물하자 바로 에벤이 답장을 쓰면서 (일라이가) 나무 조각 안에 숨겨진 모양을 본다고 쓴 장면에서는, 바로 그 옛날 최고의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자신이 조각할 대리석 안에 사로잡힌 영혼을 본다고 했던 말이 불쑥 생각이 났다. 세월과 공간을 초월하는 예술혼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앗아가는 전쟁은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그 전쟁의 와중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더군다나 그 매개체가 책이라면 더더욱!, 우리의 영혼을 인도해줄 수 있는 대상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위대한 인간 승리의 현현이었다. 개인적으로 해피엔딩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지만, 이렇게 끝날 것 같지 않은 기나긴 고통의 터널을 헤쳐 나온 이들에게 이 정도의 작은 해피엔딩은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을 다 읽고 나서, 넘치는 감동으로 북글을 썼는데 여전히 책을 읽으면서 내가 느낀 감정의 1/10도 채 담지 못한 것 같아 내내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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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의 비망록
주제 사라마구 지음, 최인자 외 옮김 / 해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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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올해 우리 나이로 88세의 노대가 주제 사라마구의 책을 드디어 읽게 됐다. 이미 작년에 <눈먼 자들의 도시> 영화로 접했었는데, 주위에 원작을 읽은 이들에게 물어 보니 영화가 도저히 책의 감동을 따라갈 수가 없다고 했던가. 영화만으로도 그의 글이 뿜어내는 심오한 아우라를 느낄 수가 있었는데, 그렇다면 그 멋진 영화조차도 한낱 사라마구의 작품세계의 “시뮬라크르”에 지나지 않았단 말인가.

작년 말 해냄 출판사에서 새로 펴내기 전인 10년 전에 문학세계사에서 1,2권으로 해서 국내에 처음 소개된 바 있는 <수도원의 비망록>은 사라마구의 13번째 작품이자(1982년), 영어로 번역된 첫 작품(1987년)이기도 하다. 이미 그의 고국인 포르투갈에서는 중견작가로 추앙 받고 있었지만, 그에게 비로소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준 매우 뜻 깊은 작품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수도원의 비망록>은 한 때 초강대국으로 전 세계를 호령했던 스페인도 아니고 우리에게는 너무나 생소하기 그지없는 작가의 조국 포르투갈을 배경으로 해서 펼쳐지는 주인공 발타자르와 블리문다의 연애 스토리다. 리스본 외에는 포르투갈의 지명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책의 곳곳에 등장하는 지명들과 친숙해지기 위해 인터넷으로 포르투갈의 지도를 찾아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가장 궁금했던 장소가 바로 예의 ‘수도원’이 건립되는 장소인 마프라(Mafra)였다. 마프라의 왕궁/수도원은 지금도 포르투갈의 유명한 관광명소라고 한다.

동시에 책에 등장하는 포르투갈의 국왕 주앙 5세와 그의 왕비인 오스트리아 출신의 마리아 아나 조제파에 대해서도 조사를 해봤다. 모두 실존했던 인물들이었다. 이 놀라움이란! 이 과정을 통해, <수도원의 비망록>이 실제 역사와 픽션을 다룬 팩션이라는 사실도 알 수가 있었다. 본격적으로 우리의 두 주인공이 등장하기 전에, 왕위 계승을 위한 국왕 부부의 후계자 생산을 위한 노력이 기술된다. 책에서도 언급되었다시피, 부부는 모두 6명의 아이들을 생산했는데 성인이 된 자식들은 셋뿐이라고 하는 부분도 역사적 사실이었다.

포르투갈 절대왕정 시대의 군주 주앙 5세는 후계자를 간절하게 원하는데, 이 때 프란시스쿠 수도회의 한 늙은 수사가 나서서 국왕의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과 중재하겠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마치 무슨 미신처럼 이 사실에 기뻐한 주앙 5세는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마프라에 수도원을 짓겠다는 서원을 한다. 그 다음 이야기는 뻔하지 않은가. 마리아 아나 왕비가 오랜 기다림 끝에 회임을 하고, 우리의 주인공 발타자르 마테우스가 1711년 전투에서 왼손을 잃은 채, 고향으로 귀환하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이단자를 처벌하는 종교재판이 이루어지는 현장에서 발타자르는 이 소설의 여주인공 블리문다와 운명적으로 만난다. 의례적인 신부의 성혼의례 없이 실제적인 부부가 된 그들은 발타자르의 고향인 마프라로 향하고, 그곳에서 <수도원의 비망록>에 등장하는 삼각 축의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는 바르톨로메우 로렌수 드 구스마웅 신부(이하 바르톨로메우 신부라 칭하도록 하자!)와 만나게 된다. 여주인공 블리문다는 아침에 금식한 상태에서 타인의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진기한 능력을 가졌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블리문다의 능력은 당시 종교재판에서 이단으로 몰리기에 적합한 기능이기도 했다. 한편, 바르톨로메우 신부는 당시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소위 말하는 신지식인의 표상으로 부각된다. 다른 캐릭터와는 달리 그는 실존 인물이기도 하다.

<수도원의 비망록>은 주앙 5세의 서원으로 건립되는 마프라의 수도원과 발타자르-블리문다 그리고 바르톨로메우 신부가 비밀리에 만들고 있는 날틀 파사볼라(Passarola: 포르투갈 말로 ‘큰 새’를 뜻한다고 한다)의 제작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해서 전개된다. 이에 덧붙여져서 바르톨로메우 신부와 함께 주앙 5세의 장녀 마리아 바르바라 공주의 하프시코드 교수였던 이태리 나폴리 출신의 도메니코 스카를라티가 등장한다.

계몽주의자이자, 신지식인 바르톨로메우 신부는 발타자르와 블리문다에게 파사볼라를 만들라는 지시를 하고, 자신은 포르투갈 중심부에 있는 코임브라에 가서 학업을 계속해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따기에 이른다. 현실과 판타지를 오가면서, 18세기 기술로는 하늘을 나는 날틀을 만들 수 없다는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바르톨로메우 신부는 하늘을 날기 위해서는 “인간의 의지”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블리문다에게 그 ‘의지’를 모아 오도록 지시한다. 마침 포르투갈 전역을 휩쓸었던 역병의 유행에 편승해서, 블리문다는 근 2,000개에 달하는 의지를 모아오는데 성공한다. 과연 그들의 비행은 성공할 것인가?

반면, 마프라 수도원 건축이 자신의 삶에 있어 지상과제가 되어 버린 주앙 5세는 국가의 재정과 인력을 총동원해서 자신의 살아생전에 수도원 건축을 할 것을 명령한다. 평범한 포르투갈 민중들의 삶은 고려치 않은 절대왕정 시절 국왕의 명령은 필연적으로 백성들의 노동력의 강제동원과 함께 많은 원성을 사게 된다. 오늘날에도 그 화려함을 자랑하는 왕궁이자 수도원의 위용의 뒤안길에는 그렇게 많은 민중들의 피와 땀이 서려 있었다는 사실을 작가는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었다.

1961년부터 근 15년을 끌어 온 포르투갈 식민지의 독립전쟁으로 앙골라, 기니비사우 그리고 모잠비크가 차례로 독립을 이루고, 1974년 4월 좌익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비로소 포르투갈에서는 근대적인 민주주의 시스템이 도입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포르투갈의 현대사는 작가들로 하여금, 역사적 사실보다는 사건들을 집중적으로 그 주제로 삼도록 강제해왔다. <수도원의 비망록>에서도 주제 사라마구는 역사적 기술보다는, 역사에 기반을 둔 몇몇 사건들을 바탕으로 한 역사에 대하 재해석 혹은 다시 읽기를 시도하고 있다.

절대왕정의 두 축인 왕조국가의 절대 권력과 그 절대 권력을 뒷받침해 주는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하고 있는 가톨릭교회와의 결합과 이를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주제 사라마구의 시선들은 곳곳에서 충돌하고 있었다. 페루 피녜이루에서 마프라까지 31톤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석재를 온전히 인력과 마소의 힘으로 운반하는 과정에 대한 작가의 너무나 자세한 묘사는 차라리 희비극에 가까웠다. 한낱 돌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어머니의 돌” 때문에 무고한 백성들이 쓰러져 가지만, 수도원 건립이라는 대전제 앞에서는 사소한 희생에 불과했다. 소설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5만 명이나 되는 인력들이 강제동원 되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상의 천국을 보여 주기 위해 만들고 있다는 수도원 건축이, 천국을 보기 원하는 이들을 천국으로 보내 버리는 비극은 오늘날에도 재현될 조짐이 보이고 있지 않은가.

모두가 즐거워야 할 성축제의 시가행진에서도, 고난에 참석하는 이들은 순수한 의도라기보다는 사랑하는 연인이나 혹은 사제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고행에 뛰어 들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본래의 의도에서 벗어나, 사도매저키즘적인 고통들의 행진은 당시 사회의 지배계층에 포진하고 있던 사제계급의 위선적인 일면들을 지적하고 있었다. 게다가 바르톨로메우 신부는 사제로서 당연히 믿고 따라야할 삼위일체설(Trinity)에 대해서 갈팡질팡한 모습(300페이지)을 보여 준다.

바르톨로메우 신부, 발타자르 그리고 블리문다가 전력을 다해서 만들었던 파사볼라는 18세기 당시, 유럽에서 발흥된 계몽주의 사상에 대한 기호학적 접근으로 보인다. 파사볼라가 궁극적으로 뜻하는 자유를 위해, 이 세 명의 주인공들은 각각 이상주의, 실용주의 그리고 신비주의에 입각한 관념론으로 재현된다. 마프라 수도원을 건립하고 있던 사람들이, 파사볼라를 우연히 보았을 때 그것을 성령(Holy Spirit)이라고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아예 인용문을 사용하지 않는 사라마구의 문체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거부감이 안 들지도 모르겠지만 나처럼 사라마구와 처음 만나는 이들에게 예전에는 상하권으로 나뉘어져 나왔던 책이 합본으로 되어 장장 600페이지나 된다고 하면 선뜻 손이 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18세기 초반의 포르투갈에서 벌어지는 매혹적이면서도 신비로운 대서사시를 다 읽고 났을 때, 얻을 수 있는 그 뿌듯한 느낌은 그 무엇에도 비할 수가 없을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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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밥바라기별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참 책 이름 한 번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밥바라기별이라, 책을 읽으면서 이 말이 금성, 샛별의 다른 이름이라는걸 알게 됐다. 모두들 식사를 마치고 날 무렵, 개가 자기도 밥을 바랄 즈음에 보이는 별이라고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나. 마치 책의 주인공인 준 그리고 그 준에게 투영된 황석영 작가 자신이 모습이 느껴졌다. <개밥바라기별>은 이 세상에 태어나, 무언가를 희구하면서 살지만 정작 그 무언가를 찾는 질풍노도의 시기에 이루어지는 만남과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과 허무적인 방황을 통해 성장해온 우리네 부모 세대의 이야기다.

물론 작가가 말한 대로 그 사이에는 수십 년의 세월이 가로 놓여 있지만, 청춘의 본질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가 보다. 학교라는 제도교육을 통해, 사회가 요구하는 규격화된 인간상으로 제조되어지면서도 우리의 뜨거운 가슴은 그런 위선과 허울들을 견뎌내지 못한다. 게다가 4월 혁명과 5월의 쿠데타를 경험한 이들에게는 오죽하겠는가. 그런 정치적 격랑의 세월과 근대화를 통한 수출입국의 기치 아래 무한경쟁으로 내몰리던 세대에게 평범한 삶에서의 일탈은 바로 낙오를 의미했다.

이야기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문학청년의 꿈을 꾸던 준이 월남파병을 앞두고, 자신의 청소년기에 대한 자조적인 회상으로 시작된다. 자신의 친구가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총탄에 맞아 죽는걸 목격한 이들에게, 삶은 그야말로 치열한 전장이 아니었을까. 고도 성장기의 과정에서, 넘쳐나는 수많은 서적들은 그 어느 누구도 제도화 교육 내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현실들과 만나게 되는 유일한 해방구였다. 그렇게 독서를 하고, 몰래 담배와 술을 배우며 성장통을 앓아 나간다.

준과 그의 친구들에게 학교는 그들을 가두는 울타리였고 족쇄였다. 그들은 학교를 빼먹고 산행을 즐겼고, 연상의 여대생들과 얼치기 연애를 했으며, 서울 인근의 산에 아지트를 만들고 보급투쟁을 한다. 그런 모든 과정들은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한 과정으로 형상화된다. 때로는 명상을 통해, 때로는 자신만의 절대고독을 통해. 예나 지금이나, 젊은이들은 혼란스럽다.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앞으로 뭘 해먹고 살 것인가와 같은 생존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이들의 성장과정은 그에 대한 자신만의 해답을 찾기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준은 지기 인호와 휴학과 자퇴의 어중간한 선상에 있던 어느 해 여름, 전국을 일주하는 무전여행에 나서게 된다. 어떤 여행의 뚜렷한 목적 없이 때로는 고적답사의 길을 가기도 하다가, 고향에 내려가 있는 친구들의 집을 찾아가기도 하고 자신들의 나름의 모험을 경험한다. 그리고 여행의 말미에서 소년에서 청년으로 다시는 되돌아 올 수 없는 여정에 올랐음을 인지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도, 사회는 그들의 장기적인 일탈을 용서하지 않는다. 결국 그들은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쳐 대학이라는 관문에 들어선다. 다시 제도권이라는 소행성 궤도에 오른 이들의 고민들은 여러 갈래로 분열하게 된다. 어떤 이는 연애라는 방법으로,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미래의 설계로 또 누구는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면서 자신의 삶을 길을 개척해 나간다. 준은 한일회담 반대시위에 가담했다가 유치장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대위 장 씨와 두해 남짓 전국을 떠도는 부평초 인생길에 나선다. 동래에서는 승려가 되기 위해, 행자생활을 하기도 하고 나중에는 자신을 버리려는 시도도 해본다. 아버지의 부재 가운데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 버린 걸까? 다시 삶과 죽음이 확연하게 갈리는 월남이라는 미지의 세계로 뛰어든다.

황석영 작가의 젊은 날의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나의 그 때는 어땠나 하는 생각이 자동적으로 들었다. 콩나물 시루 같은 교실에서 12년간의 제도 교육을 받으면서, 단 한 번도 일탈을하지 않았었다. 아니 그런 시도조차 해볼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였을까? 대학에 가서는 그동안 억눌려 왔던 감정들이 일순간에 폭발해 버렸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순 유치한 감정처럼 보이지만, 당시에는 참 많이도 고민했던 것 같다.

주인공 준을 중심으로 해서, 상진 영길 정수 등 그의 친구들의 시선에서 서술되는 이야기의 전개가 마음에 들었다. 어찌 보면 주인공 한 명이 말하는 것보다 다양성의 측면에서 볼 때 다채롭기도 하고, 타인의 속마음을 엿보는 재미도 있는 것 같다. 소설 속의 준이 무전여행을 떠나던 시절만 해도, 세상을 경험해 보겠다는 젊은이들의 낭만적인 무전여행에 호의적인 시선들이 있었음을 읽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취업이라는 명목 아래, 다른 것들은 모두 부차적인 것들이 되어 버렸다. 이제 젊은이들 사이에서 낭만을 논하는 것은 정말 “개밥바라기별”에서나 가능한 이야기가 된게 아닐까하는 자조감이 문득 들었다.

실용, 경제 그리고 취업이라는 살풍경한 키워드들이 점거한, 그야말로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보다 더 격렬한 생존경쟁에 내몰리고 있는 새로운 천년에 이순(耳順)의 나이를 훌쩍 넘긴 작가의 자전적 소설 <개밥바라기별>이 누구든지 삶의 본질을 물으며, 이 세상을 살아 보려고 노력하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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