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보고싶은 영화를 어디서 볼 수 있는지 검색해보곤 합니다. 최신 영화가 아니거나 개봉 예정작인 경우가 많습니다. 고전 영화나 미개봉 영화를 찾아보던 시절에는 대학과 요즘으로 말하자면 커뮤니티 모임의 상영회를 찾아가기도 했었어요. 그때에 비하면 요즘은 영화를 보기가 무척 편해졌습니다. 디지털에서 많은 영화를 볼 수 있습니다.

디지털 조각들을 모으다 보면 모든 영화가 어딘가에 아카이브가 되어 있겠지요. 그래도 집에 있는 DVD와 비디오 테이프를 꺼내서 바로보는 것만 못합니다. (넷플릭스도 25년간 운영한 DVD 우편 대여 서비스를 2023년 9월에 접었습니다. 이용자가 아쉬워한 이유도 저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찾는 영화의 대부분은 찾기 어렵거나 서비스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영화를 제공하다가 중단한 경우가 대부분이고 가끔은 검색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유행하는 혹은 회자되는 영화를 올려놓고 시간이 지나면서 검색 빈도나 시청 빈도가 줄어들면 서비스를 종료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무한한 자유는 아닙니다. 관심의 구간에서 벗어나는 시점에 보고자하면, 오히려 더 보기가 어려워졌다고 할까요?

우리의 기억과 우리의 생각이 꼭 요즘의 영화만을 혹은 누군가 큐레이션하는 영화만을 볼거라는 생각은 안 하기를 바랍니다. 영화라는 것 자체가 세상에 하고 싶은 다양한 얘기를 담아내는 매체이니까요.

도서관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있지만, 사람을 넓히고 성장시키는 좋은 영화들을 보고 싶을 때 볼 수 없다는 것이 매우 아쉽습니다.

결국 디지털의 시대이더라도 사람의 생각을 담을 수 있는 효과적이고 친절한 서비스는 아직은 제공되지 않는 것 같아요. 모두다 자기들이 어떤 놀라운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내세우기 바쁘지 어떤 기본을 놓치고 있다고 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입니다. 돈이 되지 않더라도 좋은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 자체는 인류에게 필요한 일일겁니다. 매일매일 떼돈을 벌겠다고 마음먹지 않는다면, 영화를 아카이브에 올려놓고 어떤 사람들이 보러올지 기다리는 설레임이 있을 것 같은데요.

또 하나는 저작권이라는 제도가 덜 발달되었기 때문이겠지요. 어디로 향해야 할 지 모르는 열정들이 만들어냈던 영화가 그립습니다. 요즘도 그런 영화를 찍는 사람들과 상영하는 곳이 있어, 볼 수 있는 곳과 매체가 있어 고마운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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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퀴즈, 대체로 절반을 맞춥니다. ㅎㅎ
‘비쓸비쓸’은 ‘비실비실’인 줄 알고 있었어요. ㅎㅎ

우리말에 관한 책도 읽고 읽고 또 읽어도 자꾸 잊어버립니다.

* 찾아보니 ‘비실비실’도 있고 ‘비슬비슬(비쓸비쓸)’도
있어요. 이번에는 둘의 차이가 뭔지...잘 모르겠네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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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 아쓰코 작가의 새 책입니다. 작가는 이미 고인이 되었으니 새로운 번역본이 나왔다고 하는게 정확하겠지요.

각자의 화면이 다 다르게 보이겠지만, 화면에 보이는 표지보다 실물 표지가 더 예쁩니다.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라는 곳은 가본 적이 없고, 움베르토 사바라는 시인도 몰랐습니다.

여행을 가는 듯 읽어보려고 합니다. 차분한 문체가 좋습니다. 간략한 문장이 아름답습니다.

* 일본어 문체가 우리말로 번역되면 좋았을 표현이 있어요.
‘신사연하는’, ‘옥호’ 등은 자연스러운 우리말로
번역되었다면 작가 글의 아름다움이
더 잘 전달됐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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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 - 활자중독자 김미옥의 읽기, 쓰기의 감각
김미옥 지음 / 파람북 / 2024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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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많은 책들에 대한 작가의 사랑과 열정에 감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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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잘 읽었습니다. 어디선가 어긋나고 비껴간 순간을 잘 그린 것 같아요. 절망의 순간,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 그런데 놓을 수 없는 순간들... 이런 순간들이 잘 그려져 있어요. 오히려 크게 바꿀 수 있는게 없어보이는 무력감, 뭔가를 낫게 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오래된 무기력 상태들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실제 상황이 많이 반영된 소설이라고 봤습니다. 작가에게 응원을 전합니다.

그런데, 글쎄요.
이 시대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떠오르지는 않았어요.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다는 것은 충분히 가난을 떨칠 수 있었던 기회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었겠지요. 오히려 남편과 아내가 왜 대학을 나오고 공장에 갔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어 아쉬웠습니다. 아내의 아버지 집안 내력으로, 넓은 집이 있었다는 것으로도 최하층의 가난을 그린다고 생각하기 어려웠어요. 오히려 왜 운동권의 길을 지속하기로 선택했는 지에 대해 명확하게 그려졌다면 좋았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80년대 대학생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공장에 갔다고 하더라고 마음만 먹었다면 충분히 먹고 살만했을텐데, 자식을 가진 부모로 그런 기회와 가능성을 내려놓고 아무런 대안이 없는 생활을 계속 했을 것 같지는 않아서요. 그리고 주말에 마트에 가서 시식하고 중고서점에서 싼 책을 사는 생활은 즐거운 생활이었다고 묘사되어 있었어요.

명문외국어고 러사아어과에 입학한 아들은 아직 진행 중이니까요. 선행학습을 못 해서 겪는 어려움, 고1이니까 놓아버리든 다른 방법으로 극복하든 하지 않았을까요? 사회에서 최고의 주유층이나 지도층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곧 가난을 의미하는 곳은 아닐테니까요. 왜 삶의 고무줄이 끊어졌는지 모른 채로, 중간 중간에 끊어진 고무줄을 보는게 어려웠어요. 포기하지 않고 글을 쓰는 엄마를 보면서 자란 아이들이라면...어떤 상상력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실력이 좋은 만큼 선행의 장벽을 넘어 다른 길을 찾을거라고 응원하고 싶습니다.

다만 외국인 노동자 아불의 이야기는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어떠한 배경을 가졌더라도 한 번 궤도에서 이탈하면 다시 본 궤도에 오르기가 쉽지 않다는 관점에는 동의합니다.

학생 운동했던 이들의 대학 졸업 이후의 행보를 본다면, 이 책의 아내와 남편과 같은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아 보입니다.

* 좋은 책입니다.
그렇지만 절대적 빈곤을 다룬 «난쏘공»과는
너무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절대적인 빈곤이라기 보다는 상대적 빈곤,
선택적 빈곤이라고 느껴졌어요.

** 적어도 80년대 후반에 고등학교 졸업자의 일부만
대학으로 진학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의 대학진학률과는 아주 다릅니다.

*** 1987년 학생운동 현장에서 남편을 만났다고
읽어서 남편도 대학생이라고 생각했어요.
만약에, 남편이 당시 대학생이 아니었다면
다르게 읽을 수 있겠어요.

**** 작가가 조세희 선생님을 떠올린 것과
소설이 «난쏘공»을 닮은 것은 다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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