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 그림과 만나다 - 젊은 인문학자 27인의 종횡무진 문화읽기
정민.김동준 외 지음 / 태학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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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한 장의 그림이나 사진이 어떤 기록물보다 충실한 역사 자료가 된다.

당시의 인물과 풍물은 물론 역사의 현장까지도 우리 눈앞에 가감 없이 전해주기 때문이다.

'옛글을 읽는 묘미! 옛 문인들의 삶을 한눈에 보는 재미!'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한문학,국어학,

철학,음악사,미술사와 같은 각종 한국학 양념들을 적절히 버무려 스물 일곱가지의 맛깔난 만찬이

차려진 괜찮은 식탁이 차려졌다.

 



 

학교나 전공에 상관없이 그 분야에서는 내노라하는 전문가들이 가장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는

주제를 가지고 솜씨있게 뽑아낸 작품이니 아마 한국 최고의 교양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과거 선비들이 즐길 수 있었던 문화는 시를 짓고 술을 나누는 정도의 소박한 것들 이었을것이다.

굳이 사치스러운 취미가 있다면 겨우내 추위를 이기고 가장 먼저 핀다는 매화 한그루를 작은 분을

옮겨 달빛을 벗하고 은은한 촛불아래에서 그윽한 매화향을 즐기는 '매화음'정도가 아닐까.

화원 신분의 김홍도역시 2000전을 들여 매화를 사고 800전으로 술 몇되를 사서 동인들을 모아

매화음을 마련하였다니 당시 매화 완상의 풍조가 대단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1810년, 두릉에서 다산 초당으로 편지와 함께 치마가 배달되었다. 빛 바랜 낡은 치마, 아내가 시집올 때

입었던 옷. 부부의 인연을 맺은 지 어언 34년, 떨어져 산 세월이 어느 덧 10년이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보기와 달리 곰살궂은 데가 있었다. 친한 벗과 제자를 위해 낡아 헤진 천을

잘라 멋진 글과 글씨를 써서 작고 예쁜 첩으로 만들어 선물한곤 했다. 그의 아내가 굳이 낡아 못 입게

된 치마를 보내온 것은 남편의 이런 소용을 헤아렸기 때문일 터.'       -본문중에서-

 

 

다산은 치마 솔기를 뜯어 잘라낸 다음 풀 칠하고 배접해서 공책을 만들어 잔뜩 풀 죽어 낙담해 있을

두 아들에게 줄 훈계의 말을 적어나간 가르침이 '하피첩' 세 책이 되었다.

실물은 몇 년 전 온전한 상태로 세상에 처음 공개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덥혔다.

 

'하피첩'을 만들고도 자투리 천이 남아 3년 뒤인 1813년 마침 강진사는 친구 윤서유의 아들 윤창모에게

시집간 딸을 위해 매조도(梅鳥圖) 한폭을 그려준다.

 



 

펄펄 나는 저 새가           

내뜰 매화에 쉬네

꽃다운 향기 매워

기꺼이 찾아왔지

머물러 지내면서

집안을 즐겁게 하렴.

꽃이 활짝 피었으니

열매도 많겠구나.

 

안마당에 찾아든 새 두마리는 사위와 딸이다. 멀리 떨어져 가까이 데려와 짝지어준

기쁨을 '머물러 지내면서 / 집안을 즐겁게 하렴'으로 표현했다.

꽃이 많이 피어 열매도 주렁주렁 달리겠다고 하여 딸에게 자식을 많이 낳으라고 축원했다.

 

 

2009년 6월 다산의 매조도 한 폭이 새롭게 공개되었다. 글씨도 그림도 영락없이 그의 솜씨다.

 



 

묵은 가지 다 썩어 그루터기 되려더니

푸른 가지 뻗더니만 꽃을 활짝 피었구나.

어데선가 날아든 채색 깃의 작은 새

한 마리만 남아서 하늘가를 떠돌리.

 

시가 왠지 슬프다. 1813년 8월19일에 지었다. 앞서 시집간 딸에게 준 매조도를 7월 14일에

그렸으니, 이 그림은 그로부터 35일 후에 그린 것이다.

누구를 위해 그린 그림인가?

 

다산은 초당 생활 중에 얻은 소실에게서 홍임이란 딸을 두었다.

혹시 이딸을 염두에 두고 그린 그림이 아닐까.

 

----------------------------------------------------------------본문발췌정리-----

 

다산이 강진 유배시절 소실을 두었다는 것도 의외이지만 이렇게 매조도를 그리고 시를 지었다는

것도 처음 안 사실이다.

정실에게서 난 딸이 시집을 간 며칠 후 소실 정씨에게서 딸을 얻었다니 우리나이로 52세의 나이에

얻은 딸이니 얼마나 귀여웠겠는가. 유배생활이 끝나고 1818년 두릉으로 돌아오면서 다산은 홍임

모녀를 함께 데리고 왔으나 다시 초당으로 쫓겨 내려갔다. 본가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긴...어진 아내라도 어찌 시앗을 좋게 보겠는가.

다산이 아들에게 준 편지에서 '네 어머니의 속이 좁다'고 탄식하였다니 무릇 남정네의 이기적인 속성은

다산도 어쩔수 없었던 모양이다.

소실 정씨는 떠도는 얘기처럼 주막집 노파의 딸이 아니었다고 한다.

정씨가 두릉 본가에서 쫓겨나서 강진으로 내려와 지었다는 '남당사'를 보면 눈물겹기만 하다.

 

어린 딸 총명함이 제 아비와 똑같아서

아비 찾아 울면서 왜 안 오냐 묻는구나

한나라는 소통국도 속량하여 왔다는데

무슨 죄로 아이 지금 또 유배를 산단 말가.

 

'아빠 언제와"'하며 이제 대 여섯살 난 딸이 우는 모습을 상상하니 또 다른 유배의 모습이 아니던가.

결국 그녀는 평생 다시 다산을 만나지 못한 듯 하다. 그렇게 모녀는 무심히 잊혀졌다.

만년의 다산에게는 지울 수 없는 큰 상처였을 것이다.

인륜의 정도 여인의 투기앞에서는 어쩌지 못하는 것인가. 두 모녀의 삶이 슬프기만 하다.

홍임모녀를 생각하며 그렸다고 추정되는 다산의 두 번째 매조도는 절친인 이인행에게 건네어져

이인행의 집안과 누대 연비로 맺어진 문한가의 종손에게 물려진 모양이다.

 

정실 아내가 보낸 치마를 잘라 시집간 딸과 소실의 딸인 홍임을 위해 두 점의 매조도를

남겼다니...치마를 보낸 정실의 입장에서 보면 원통할 일이었을 것이나 다행히 정실부인이

살아생전에는 이 사실을 몰랐을테니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긴 하다.

정민교수님은 유배지인 초당에 열 여덟의 제자들이 와글와글하여 살림을 해줄 누군가가

필요하여 어쩔 수 없이 소실을 들였으리라고 변명(?)을 해주셨지만 남정네의 마음을

어찌 알겠는가. 다산도 남자인 것을.

다산과 소실 정씨와 딸 홍임의 사연이 어린 매조도를 보니 사랑하는 이에게 잊혀지고 홀로

쓸쓸이 늙고 죽어갔을 한 여인네와 아비를 그리며 평생 서녀로 살아갔을 홍임의 삶이 아프기만 하다.

 

 

 '나는 초정 박제가(1750~1805)가 중국 지식인과 교류하는 과정을 주목하고서 그 증거물을 물색해왔다.

조선과 청의 지식인들은 시문과 서책, 그리고 서화를 주고 받았으나 그 밖에도 적지 않은 물건을 주고 받았다.

박제가는 그들에게 주로 청심환과 조선종이와 접부채를 선물했다. 또 조선 소주를 가지고 가서 맛을 보이기도

했고, 조선의 갓과 복건, 일본도 따위도 주었다. 그에 대한 답례로 중국 지식인도 적지 않은 물건을 박제가에게

선물했다. 박제가가 나빙(1733~1799)에게 준 시에 "나는 은화를 주고 산 물건이 하나도 없나니/ 시 주머니

그림 축이 엉성함을 비웃노라"고 읆은 구절이 있는데 그가 조선에 가지고 온 물건 중에는 은자로 산 것보다

선물로 받은 것이 많음을 실토했다.'                 

 

'박제가에게 많은 물건을 준 인사 가운데 손형이란 사람이 있다. 총독을 지낸 손사의의 아들이다.

그는 유독 박제가를 만나고자 늘 목을 빼고 기다렸고, 늘 선물을 주려고 안달이었다. 그 손형이 1790년에

초정 박제가에게 의미 있는 선물을 했다. 다름 아닌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황제 의종(1628~1644)이

황궁에서 사용하던 현금(玄琴)을 선물한 것이다. 검은 옻칠을 했고 휘는 자개로 만들었다.

줄은 일곱이고 길이는 가로로 무릎보다 길며 복판은 푹 파여 비어 있는 물건이었다.'

 



 

'손형이 박제가에게 이 물건을 준 이유를 명나라 황제의 물건이라 꺼림칙하여 자기 집에 두고 싶지 않아서라고

했는데, 설득력이 충분한 추정이다. 숭정제의 유품을 꺼림칙하게 느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본문중에서------------------------------------------------

 

청나라 건룽제 치하에서 총독까지 지낸 손사의의 아들 손형의 입장에서는 명나라 숭정제의 유물을 소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청조에 대한 반감의 표시로 해석 될 수도 있었겠다.

박제가는 1790년 선물받은 숭정제의 유물를 가지고 귀국하여 1792년 돌연 석재 윤행임에게 찾아가 건넸다고 한다.

윤행임은 병자호란때 청나라에 굴복하기를 거부하고 심양에 끌려가 죽임을 당한 삼학사 윤집의 후손이다.

당연히 청나라에 의리를 지키는 집안이 유품을 지니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였던 모양이다.

후에 윤행임은 사사되는 사건을 발생하여 숭정금은 다시 떠돌아 추사 김정희에게 흘러 들어갔다가 1853년 후손인

윤정현이 돌려 받았다고 한다.

 



 

안대회교수님은 윤행임의 사후 이 숭정금이 추사에게 흘러들어갔다는 증거를 추사가 쓴 <숭정금실>이란

네글자로 추정하고 있다. '글씨의 내용이 숭정금이 보관된 집이란 의미이므로 달리 생각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최완수 선생의 '숭정고금가 서문'을 들었다.

윤정현이 함경 감사로 재직 할 때 마침 이 지역에 유배온 추사를 만나 선친이 애지중지하던 숭정금의

존재를 물었고 추사는 지금도 잘 보관하고 있다고 했고 모두 서울로 돌아온 위 추사는 숭정금을

윤정현에게 보냈다고 한다.

교수님은 아무래도 추사가 숭정금을 윤정현에게 돌려주며 숭정금을 보관하고 즐기는 집이라는 의미로

써서 보내준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정작 김정희는 숭정금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남기지 않은 것이 그 이유의

하나로 들수 있다는데..

추사가 숭정금을 실제로 보관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 나라의 왕이 애지중지하던 거문고가 어찌어찌하여 조선의 박제가에게 전해지고 다시 윤씨집안으로

흘러들어왔던 사연이 기구하게만 느껴진다. 그후 숭정금이 어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하는데

이렇듯 한 학자에 의해 다시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었으니 한 때는 찬란했던 명나라의 시간들이

퉁땅뚱땅하면서 들려오는 것 같지 않은가.

 

이렇듯 지나간 시간이 그대로 느껴지는 그림 한장 한장을 들여다 보니 그 곳에는 종이와 물감이 아닌

살아있는 인물과 사연들이 그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박물관에 걸려있는 그림들을 각 분야에 전문가들이 훅 펼쳐서 3D의 생생한 입체감으로 전달해주니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의 시간속을 다녀온듯 뿌듯하기만 하다.

13년의 세월을 순수한 학문의 열정으로 나누고 조언하고 비판하며 이 책을 만들어 주신 젊은 인문학자

27분에게 진정한 감사의 마음을 보낸다. 내 서고에 아주 소중한 유산으로 남길 책을 만들어 주셨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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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열기 - 최일도 목사가 시편에서 건져 올린 삶의 지혜, 개정판
최일도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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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는 갈라진 논 바닥에 물 들어가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고 했고

가난한 엄마는 자식입에 밥들어가는 일이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소외되고 밥 굶는 사람들에게 밥퍼주는 일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는 목사님이 있다.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추구한다’는 뜻을 가진 ’다일공동체’의 설립자이며

수녀였던 아내와의 사랑이야기로도 유명하신 최일도 목사님이 전하는 희망과 치유의 메시지이다.

 



 

성경구절 중에서도 하필 시편에서 건져 올린 삶의 지혜는 무엇일까.

 

’도대체 시편이란 무엇이었나? 시편 속에 실린 시 한 편 한 편이 결국은 당시의 유행가

가사를 채록해 놓은 것이 아닌가!’ 71p

 

실제로 당시 시편은 예배 교독문으로 낭송되기 위해 쓰인 것뿐만 아니라 당시 히브리인들이

악기 반주에 맞춰서 누구나 부를 수 있는 노랫말로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찬양과 경배로 가득한 노래를 지은 시편속에 깃든 진실함이 너무 좋아서 청량리 뒷골목의

가난한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내내 성경의 시편으로 내내 기도했다고 했던가.

 

성적순으로 의사가 되고 법조인이 되는 이 시대의 풍조는 확실히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목사님의 말씀처럼 공부 잘하는 사람은 과학자가 되고,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남다른 사람은

의사가 되며, 사회정의 구현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사람, 인권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법조인이

되어야 한다. 이런 당연한 진리를 무시한 사회이다 보니 이 땅의 의사는 그저 돈만 아는 단순

기능인으로 전락하고 죄를 심판하는 법조인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도 함부로 반말이나

하는 불경을 서슴치 않는 몰상식의 사회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보면 가난하고 병든자에게 밥만 퍼주는 봉사자가 아닌 병든 영혼을 치유하는

진정한 의사가 바로 최일도 목사가 아닌가 싶다.

 

정작 자신의 가정은 돌보지 못하고 이웃에게만 봉사하는 삶에 대한 고뇌는 너무도 안타깝고

그런 이웃의 어려움을 모른척 하고 살아가고 있는 내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또한 가장의 역할을 대신하여 돈을 벌고 양육하는 짐을 나누어진 아내의 헌신이 어찌나

고맙고 존경스러운지...부창부수라고 하더니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고 사는 가정의 모습이

너무나 부럽기만 하다.

 

때로는 멀쩡한 몸을 지니고도 당당하게 밥을 얻어먹고 구걸을 하며 폭행을 일삼는 무뢰한들에게

미운마음이 든다고 말씀하시는 장면에서는 차라리 너무나 인간다워서 더욱 가까운 느낌마저 든다.

 



 

라면을 끓여주다가 밥을 퍼주는 남자가 된 목사님이 이제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허기진 영혼을 위해 이렇게 많은 삶의 양식을 차려 놓으셨다.

여전히 바람은 차갑고 세상 곳곳은 전쟁과 기아와 지진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는 소식 뿐이다.

그래서 일까.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은.

목사님의 말대로 마음을 열고 소중하게 나눈다면 이 가난한 영혼이 채워진다니 그저 나누어

주신 이 책을 양식삼아 허기를 채워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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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어 장수 문순득, 조선을 깨우다 - 조선 최초의 세계인 문순득 표류기
서미경 지음 / 북스토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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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아직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우물안 개구리로 살아가던 시절에...물론 정조는 이 우물안에서

빠져나오고자 애를 쓰긴 했으나 안타깝게도 병인지 독살인지로 삶을 마감한 뒤에 우이도가 고향인

홍어장수 문순득은 3년 2개월에 걸친 표류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흑산도에서 잡은 홍어를 나주 영산포에 가서 팔고 쌀과 물품을 사서 섬에 되파는 업을 하고 있던

문순득은 갓 혼인을 한 스물다섯 살의 나이에 홍어를 팔고 돌아오는 길에 태풍을 만나 고달픈 표류자의

신세가 된다. 보잘 것 없던 배를 타고 거대한 태풍에 맞서 살아 귀환했다는 것으로 보면 행운은 분명한데

만약 그가 단순히 살아 왔다는 것으로만 한다면 그의 이름을 지금 내가 만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죽음과 맞서는 험난한 여정속에서도 그의 의지와 빛나는 관찰력과 강렬한 호기심은 결국 그의 고향에

유배와 있던 정약전을 만나 그의 표류담은 '표해시말'이란 책으로 남았다.

그리고 정약전은 그 젊은이에게 '하늘 아래 최초의 세계 여행자'라는 뜻으로 천초(天初)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처음 홍어장수 문순득이란 인물을 만난 것은 KBS역사스페셜이란 방송에서였다.

섬에서 나고 자란 그가 바다에서 표류하지 않았다면 기껏 섬과 육지나 오가는 장사치로 일생을 마쳤을 것이다.

그에게 태풍은 재앙이었겠지만 당시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실학자들이나 이 글을 읽고 있는 후세에

우리들은 분명 어둠에 갇힌 눈을 뜨고 도대체 그 시대에 다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지에 대한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가뭄에 단비와 같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아마 세상을 떠나기전 문순득 자신도

그 시간들을 재앙으로만 기억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의 풍습과 많이 닮았다는 오키나와의 역사는 눈여겨 볼만한 기록이다.

단지 전후 그 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미국에게 일본은 반환을 요구했고 굉장한 이슈가 되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던 그 곳이 사실은 독립된 나라였다는 것도 놀랍고 언어와 풍습등이 일본에 복속되는 과정이

그저 남의 얘기로만 흘려 들기에는 우리와 비슷한 상처를 지닌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놀라운 것은 조그만 섬출신의 장사치가 험난한 여정을 견디면서도 총기를 잃지 않고 새로운 것들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응용하려했던 그의 지적 호기심이었다. 그런 점에서 다른 수많은 표류자들과는 확실히

다른 인물임에는 분명해보인다. 더구나 정약전,정약용 형제를 만나 이렇듯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는 것은

아마 운명이 아니었을까. 그의 눈을 통해 조금이나마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던 간절함 바람같은 것이 하늘에

닿았던 것이 아닌지. 그가 사상이나 당파에만 얽매인 양반이었다면 결코 이런 생생한 기록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잘 어울리고 적극적인 장사치로서의 사고가 큰 도움이 되었던지 마치 영화를

보는 듯 생생한 여정이 흥미롭기만 하다.

조선의 신통치 않은 배라도 제대로 만들어 보기를 소망했던 염원조차 이루어지지 못하고

그 넓디 넓은 세상에서 보고 들은 문순득의 귀중한 체험들이 가난과 억압으로 신음하던

불쌍한 백성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음은 당파싸움에만 연연하던 무지몽매한 양반네들의

한심함이었으니 어찌 다 말로 할 것인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외로운 유배생활을 했던

두 형제들에 의해 수많은 저서로 남으니 그것으로 위로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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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 야스나리 상 수상 작품집
아오야마 고지 외 지음, 양윤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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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일본의 대표 작가이다. '이즈의 무희''설국''금수'와 같은

명작을 탄생시킨 그의 이름으로 시상되는 순수문학상을 받은 작품들의 모음집이다.

 

여류작가인 이나바 마유미의 청각(靑角)은 도쿄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여자가 여행중에 발견한

시마반도의 바닷가 마을에 집을 짓고 정착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가끔 멧돼지가 출몰하고 마을 사람들과 만날일이 없을 정도로 한가롭기만 마을에서 고양이와

생활하던 여자가 실종된 할머니의 그림자를 보면서 허공에 떠버린 시간들을 매듭짓기 위해

그동안 보지 못했던 빛을 보러가기로 결심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정확히 그녀가 매듭지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김장철에 가끔 봐왔던

청각이란 해초가 문득 그녀에게 어떤 영감을 주었던 모양이다.

누구든 생각지도 못했던 계기로 자신을 돌아보고 잊었던 기억을 찾기도 하고 새로운 일에대한

결심을 하게도 만든다. 나는 어떤 계기로 그동안 보지 못했던 빛을 찾을 수 있을지..

 

호리에 도시유키의 스탠스 도트는 작가의 나이로 봤을 때 상당히 윗세대의 느낌을 잘 전달하고

있어서 놀라웠다. 외지인들도 거의 오지 않을 시골의 한적한 마을에 이제는 더 이상 볼링을

치러 오는 사람도 없는 볼링장에서의 마지막 영업일의 모습은 주인공의 약해진 청력만큼이나

쓸쓸한 느낌이다. 너무나 사랑했던 아내도 세상을 떠나고 한때는 예약을 해야 할만큼 북적거리던

영업장을 폐쇄해야 하는 늙은 주인의은 볼링핀의 독특한 파열음을 사랑했지만 이제는 그 것조차

잘 들리지 않는 귀때문에 자신의 삶도 같이 저버리는 것 같은 안타까움이 잘 그려져 있다.

누구든지 기어이 다가오는 저무는 시간들을 볼링장의 마지막 영업일에 맞추어 담담히 잘 그려져 있다.

 

아오야마 고지의 '슬픈 나의 연인'또한 황혼녘의 쓸쓸함과 한때는 열렬했지만 이제는 더이상

타오르지 못하는 슬픈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목숨과도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던 사랑과 결혼,

그리고 수십년을 같이 살아온 아내의 치매를 지켜보면서 늙은 작가는 지나간 시간들을 추억하고

조용히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본다. 기저귀를 차야 할 만큼 심해지는 아내의 병을 귀찮아 하지 않고

보살펴주는 늙은 남편의 모습은 눈물겹고 감동스럽다. 누구든 이런 노후를 맞기는 싫을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맞게되는 병과 죽음! 삶은 쓸쓸하다. 하지만 어느 시간을 살든 치열하게 그리고

후회없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했던 노을의 빚깔을 닮은 아름다운 작품이다.

 

일본의 순수문학상을 대표하는 작품답게 하나같이 작품이 뛰어나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우연히 일본의 대지진의 재앙이 있었다. 첫번째 작품의 무대였던 시마반도는

안녕할까? 대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또한번 절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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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이영수(듀나)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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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부터 우리는 미래의 어느 행성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지구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행성과 무량1호, 혹은 어떤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행성들이

우주에 흩어져 있는 그 어느때 시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단지 과거에 이런 일이 일어났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음으로..미래의 어느 시간쯤으로

설정하도록 하자. 지구에 외계인들이 쳐들어왔다. 물론 식민지를 만들고 싶어서 왔을 것이다.

지구에 있는 수많은 자원과 에너지를 충원시켜줄 인간들이 필요했다.  지구는 우주의 수많은

행성들을 식민지를 만들기 위한 말하자면 외계인의 본부인 셈이다.

몽땅 부수고 죽이기 보다는 필요한 만큼만 취하고 재생산하면서 지구를 보존하기로 결정한

모양인지 오랜 시간이 지나 로봇과 시원찮은 인간들이 나타나는 시기가 있긴 했지만 그럭저럭

굴러가기는 했다. 물론 그 인간을 지배하는 건 시스템이라고 불리는 지도자이지만.

아주 오래전에 '빅 브라더'라고 불리는 지도자가 잠깐 지구를 조종하던 시기도 있긴 했었다.

암튼 인간을 뛰어넘는 로봇과 자신의 의지를 잃은 인간들이 그럭저럭 얼키고 설켜 살아가고 있는

지구를 떠나 외계로 떠난 지구인들도 있다.

이리저리 우주를 방황하다 텔레토비 동산처럼 아름답고 골프장을 닮은 풀밭과 초록색 털이

복슬복슬한 동그랗고 살찐 모양이 마치 브로콜리와 닮은 초식동물이 느리게 살아가는 행성에

도착한 남자들과 아이들도 있다.

외계인의 침입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북한에서 탈출해온 남자와 군대 가기 싫어 지구에서

도망친 남한 남자는 서로가 왜 적인지도 모른 채 총을 겨누다가 결국 그 '브로콜리 평원'에서

최후를 맞는다. 살아남은 아이들은 링커 바이러스의 간섭으로 변형된 유전자로 태어난 아이를

낳고 또 낳아서 좀 더 수명은 짧아지고 이성과 언어를 잃은 후손들이 되어 행성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가끔은 태평양에 떠있는 조그마한 섬을 소유할 수도 있었던 것 처럼 우주에 떠있는 자그만

행성하나를 차지한 늙은 교수도 있다.

잘 만들어진 기성품 시스템을 마다하고 스스로 시스템을 만든 덕분에 나무가 되어버리긴 했지만.

 

아주 오래전에 지구에서 조선이라고 불려지던 어느 나라에 이생이란 선비가 과거를 보러 가다가

인간의 탈을 쓴 여우족에게 죽임을 당하고 여우의 육신을 감싸는 인간의 탈이 되었다는 옛이야기를

기억하는 인간은 더 이상 지구상에 남아있지 않다.

 

DJUNA(듀나)라는 필명으로 SF소설이나 영화평론을 쓴다는 이 작가는 미래지향적이고 환상지향적인

인물인 모양이다. 지금 일본은 지진으로 공포의 도가니가 되었다고 난리이고 지구의 에너지의 보고인

중동 어디에선가는 더 이상 자유를 구속하지 말라는 사람들이 총을 들고 전쟁을 치루고 있다.

하긴 이런 현상이 계속되면 그동안 영화나 소설에서만 보았던 지구종말이 현실이 될지도 모르겠다.

브로콜리 평원이 있는 어느 행성에 도착하여 최후를 맞거나 유전자가 변형된 후손을 남길 바에는

차라리 지구가 제 몫을 못하는 마지막 날에 같이 최후를 맞고 싶다.

다소 엉뚱하고 엽기적인 이 책이 문득 공포스러워 지는 것은 정말 미래의 어느 날, 듀나가 상상으로

썼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 책이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처럼 '예언서'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갑자기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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