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성당 이야기
밀로시 우르반 지음, 정보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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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의 작품 중 완독한 것은 [장미의 이름]밖에 없지만 그 작품을 생각하면 여전히 제 마음 속에는 ‘굉장했어, 재미있었어’ 라는 감정이 솟아납니다. 물론 그 작품도 처음부터 완독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장미의 이름]을 처음 집어들었을 때의 나이가 무척 어렸기(?) 때문에, 그 때는 읽다가 중간에 포기하고 덮어버렸죠. 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른 뒤 다시 읽기 시작했을 때는 금방 빠져들었답니다. 특유의 분위기에 매료되었다고 할까요. 그 움베르토 에코의 이름을 이어받아 ‘체코의 움베르토 에코’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체코작가 밀로시 우르반. 체코문학에 고딕 느와르 장르를 부활시켰다는 평가와 함께 현재 체코에서 가장 핫한 작가로 떠오르고 있는 듯한데요, 사실 전 이 ‘열린책들’이라는 출판사에 묘한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어요. 미리 말씀드리자면, 출판사 자체는 좋아해요! 정말입니다! 그런데 이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들 중에는 제가 쉬이 읽을 수 없는 작품들이 꽤 있었어요. [장미의 이름] 때도 그랬지만, 순간 정신이 어디 다녀온다고 할까요. 그래서 [일곱 성당 이야기]에도 흥미가 동하긴 했지만 내심 걱정도 했습니다. 읽다 포기하게 될까봐요.

그런데 체코를 좋아하는 저의 성향이 작품 읽기에도 도움이 되었나 봅니다. 올 겨울 다녀왔던 프라하의 모습이 다시 떠오르면서 생소한 지명들도 전혀 생소하지 않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생각보다 쉽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야기는 한 남자가 종탑에 매달려 그 스스로의 신체로 종을 치고 있는 사건이 벌어지며 진행됩니다. 주인공은 좀 소심하고 편집증적으로 느껴지는, 체코의 역사에 깊이 빠져있고 현실감각은 약간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전직 경찰이에요. 슈바흐 크베토슬라프라는 이름-슬라브 민족의 나약한 꽃 이라는 의미-으로 인해 콤플렉스도 가지고 있고, 직접 보지 않아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왠지 왜소하고 자신감 없어보이는 외모를 가지고 있을 듯한 그런 인물입니다. 그에게는 경찰로서 실수했다는 트라우마가 있어요. 자신이 보호하던 여성이 자살로 결론 났지만 심상찮은 죽음을 맞았기 때문이죠. 그 일로 인해 경찰 일을 그만두어야 했지만 종탑에 매달려있던 남자로 인해 조건부로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의 앞에 나타난 그뮌드라는 남자와 그의 친구이자 하수인인 프룬슬릭, 그리고 매력적인 여성경찰 로제타와 함께.

저에게만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분위기가 밝지는 않습니다. 고딕. 느와르. 이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저는 프라하나 체코에 대해서도 또한 편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어쩐지 흐린 날이나 어두운 분위기가 어울릴 것 같다는-오히려 그 점이 더 마음에 들었답니다. 작품은 저에게 [장미의 이름]을 처음 읽던 때를 떠올리게 했어요. 이야기는 살인사건이 주가 된다기보다 체코에 존재하는 6개의 성당과 제7성당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많은 사실들이 작품의 중반 정도는 가야 밝혀지기 때문이에요. 만약 제가 인내심이 부족한 독자였다면 진즉 책을 덮었을지도 모르지만, 이상하게 문장 한 줄 한 줄을 읽어내려가다보면 마치 체코의, 작품의 배경이 되는 한가운데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서 도중에 포기하는 게 또 쉽지는 않더라고요. 기묘하게 그려져 있는 그림들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읽어왔던 작품들과 비교하면 그리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은 아닙니다. 하지만 종교와 건축, 문화와 역사가 어우러진 이야기에 흥미를 가지셨다면, 그리고 아름다운 도시 프라하를 동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 작품이 충분히 매력적으로 다가오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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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슬로우 라이프 - 천천히, 조금씩, 다 같이 행복을 찾는 사람들
나유리.미셸 램블린 지음 / 미래의창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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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바로 이런 책이 필요했다는 생각이 든다. 단순히 핀란드를 여행한 책이나 핀란드를 소개하는 책이 아닌, 핀란드의 사회와 문화에 대해 다룬 책이. [카모메 식당]으로 핀란드에 대한 동경의 감정이 생기기는 했지만, 그 책을 읽을 당시만 해도 핀란드에 대해 이렇게 애틋한 마음이 생길 줄은 몰랐다. 나의 마음속에 –꼭 가봐야 하는 나라-로 드디어 자리 잡은 것이다. 계기는 간단했다. 모 방송국에서 언뜻 보게 된 핀란드의 교육. 국가가 교육에 대한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사교육을 해도 그 사교육이 학교 성적에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말. 경쟁이 아니라 협력을 중시하며 심지어 시험 시간에도 학생이 교사에게 조언을 구하는 나라. 한 반에 학생이 많아야 열 명 정도일까.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모습에서, 진심으로 공부를 즐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세계적인 학업성취도평가인 피사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하고, 2위를 차지한 우리나라가 건넨 ‘근소한 차이로 졌다’는 말에 ‘당신네 나라 학생들은 울면서 공부하지만 우리나라 학생들은 웃으면서 공부하기 때문에 월등한 차이로 이겼다’고 뼈있는 말을 던졌다는 일화에는 그만 찔끔했다. 교육에서 시작한 관심은 이제 핀란드 사회 전반으로 번져가고 있다.

저자는 핀란드의 예술에 끌려 핀란드에서 공예와 디자인을 전공했다고 한다. 스위스와 프랑스, 캐나다 국적을 갖고 있고 두바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미국에서 공부를 한 남편과 핀란드에서 학생의 신분으로 보고 듣고 느꼈던 것들. ‘레스토랑 데이’로 시작한 특별한 문화행사부터 교육과 복지에 관한 이야기, 친환경적인 생활방식 등 넓고 깊은 정보들로 꽉꽉 차 있다. 각자가 준비한 음식을 판매하며 행복을 느끼는 레스토랑 데이, 집 주변 텃밭에서 야채를 키우며 느끼는 충족감, 각자의 집을 공개하는 헬싱키 어반 하우징 페어, 반려동물에 관한 이야기, 학생과 엄마를 위한 복지, 핀란드의 디자인을 다룬 내용들은 역동적이거나 맛깔난 재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 조금 덤덤하게까지 느껴지는 문체와 내용들이 참 좋았다. 그 동안 내가 보고 있던 핀란드는 어쩌면 환상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환상이 이 책으로 인해 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는데 이 책은 오히려 핀란드에 대한 나의 기대를 증폭시켜 주었다.

가장 인상적이고 또한 책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는 ‘경쟁’이 아니라 ‘협력’과 ‘배려’다. 인구가 많은 편이 아니기 때문에 경쟁하는 것보다 협력을 택했다는 핀란드. 높은 세금을 내고 있지만 그에 따른 혜택 또한 뒤떨어지지 않아 국민들이 모두 충분히 국가를 믿고 있다는 느낌까지 받았다. 경쟁으로 점철된 우리 사회를 다시 되돌아보게 된다. 과연 행복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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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슈라라봉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3
마키메 마나부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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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 마키메 마나부라는 작가는 엉뚱하고 코믹한 상상력의 소유자라는 이미지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호루모’라는 독특한 경기를 만들어냈고 그 ‘호루모’를 소재로 [가모가와 호루모]와 [로맨틱 교토, 판타스틱 호루모] 두 작품을 썼죠. 그 밖에도 최근 우리나라에서 리메이크 된다고 알려진 일드 <노다메 칸타빌레>에서 신이치 역으로 열연한 배우 타마키 히로시 주연의 <사슴남자>도 마키메 마나부 작가의 작품이랍니다. 인간과 개의 말을 알아듣는 영특한 능력을 가진 고양이 마들렌이 등장하는 [가노코와 마들렌 여사] 까지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데요, 예전부터 저는 이 작가와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를 쓴 모리미 도미히코 작가가 헷갈리더라고요. 독특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 때문일까요. 어떤 의미인지 짐작도 되지 않는 [위대한 슈라라봉]이라는, 다소 만화스러운 제목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 작품, 아무생각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어느 새 이 상상력에 푹 빠져버렸네요.

히노데 료스케는 신비한 힘을 지닌 가문의 자손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사람을 자신이 원하는대로 행동하게 만들 수 있죠. 이를테면 나중에 히노데가 영업사원이 되었을 때 어떤 물건을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팔아야 할 때, 사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들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정작 그는 그런 힘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어해요. 그런 마음을 안고 어쩔 수 없이 수련을 받기 위해 이와바시리의 큰아버지댁으로 들어가는 히노데. 엄청나게 커다란 저택에서 수상한 가정부 씨를 만나고, 사촌인 단주로도 만납니다. 독특한 성격의 단주로로 인해 전학 첫날부터 붉은 교복을 입고 등장한 히노데. 자신을 기피하는 것 같기도 하고 노려보는 것 같기도 한 반 친구들 중 유일하게 그를 상대해 준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도 무척 특이한 방법으로요. 전학 첫날부터 이 나쓰메 히로미에게 얻어맞은 히노데는 그가 자신의 가문과 라이벌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두 가문뿐만 아니라 또 다른 존재들이 있습니다. 바로 히노데 가문에게 쫓겨나다시피 했던 원래 번주였던 하야세 가문. 그 가문의 후손은 히노데와 가 나쓰메가 있는 반의 반장으로 당차고 똘똘한 여학생입니다. 이 여학생에게 첫눈에 반해버린 히로뚱 단주로. 하지만 그녀가 관심있어 하는 것은 나쓰메죠. 이로 인해 더욱 서로를 라이벌로 의식해가는 와중, 하야세의 아버지인 교장이 두 가문에게 시간을 줄테니 당장 이 땅을 떠나라고 경고해요. 다른 두 가문의 아버지들을 볼모로 잡고. 이에 고민에 빠진 세 명의 어린양들. 교장의 위협에 최대한 맞서는 순간 요상한 소리를 내며 엄청난 힘이 쏟아지고, 영문도 모르는 이 어린양들은 서로 너의 힘이니, 아니다 너의 힘이니 티격태격합니다. 결국 협상 없이 결투하게 되는 어린양들은 의외의 반전을 보이며 아련한 결말까지 선사합니다.

마키메 마나부 특유의 코믹한 요소가 잘 녹아들어있는 작품이에요. 주된 시각인 히노데 료스케는 오히려 주변인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그의 캐릭터가 강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나머지 캐릭터들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단주로의 히로뚱이라는 별명은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하지만 코믹한 부분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살짝 건드리는 재능도 여전하네요. [로맨틱 교토, 판타스틱 호루모]에서 느꼈던 아련한 기분이 이 작품에서도 잘 살아있습니다. 결말뿐만 아니라 소년들이 협력하는 과정이라거나 그들을 위협했던 존재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왜 그랬는지 이해하게 만드는 부분도 꽤 설득력이 있거든요. 그저 웃긴 코믹소설이 아니라 세 소년의 성장을 다룬 작품이기도 하고, 누군가를 위해 희생한다는 묵직한 메시지를 지닌 소설이기도 해요.

[위대한 슈라라봉]에서 ‘슈라라봉’이 대체 뭘까 정말 궁금했었는데, 정말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었습니다. 엉뚱한 데서 허를 찌르는 것도 대단한 재능이겠죠. 시종일관 코믹과 아련함을 번갈아가며 구사하는 것도요. 작가의 머릿속은 어떤 상상들로 가득 차 있을지 한 번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나저나. 일본에는 정말 이런 가문들이 있을까요. 마키메 마나부가 써서 그런지 정말 있을지도 모른다는, 요상한 기분이 들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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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산행 테마 소설집
박성원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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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와 바나나]가 역사 속 인물을 소재로 했다면, [한밤의 산행]은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억을 소재로 한 테마 소설집이다. 역시 각각 13명의 작가들의 작품이 실려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키스와 바나나]보다 분위기 전체가 조금 어둡다 느껴졌다. 소재 면에서는 비슷한데 한 두편의 이야기가 유독 어둡게 느껴졌던 탓이었을까. [한밤의 산행] 속에는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세상 밖으로 걸어나가지 못했던 군인이 몇 십년만에 조국으로 돌아갔으며, 김광석을 중심으로 여러 사람의 사연이 펼쳐지기도 한다. 사회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 혹은 이유있는 불신이 존재했던 시간들이 흘러가고 오싹한 현실을 보여주는 작품도 여럿이다.

[잘 가, 언니]는 주인공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언니에게 보내는 연가다. 몸이 약한 동생에게 온 가족의 신경이 쏠리고 치료비로 인해 넉넉하지 않았던 집안형편. 그 때문에 하고싶은 미술을 하지 못한 채 서둘러 떠나버리듯 누군가와 결혼한 언니. 주인공은 언니가 죽은 나이를 뛰어넘은 나이에 언니의 흔적을 좇는다. 어디선가 본 듯한 소재와 내용임에도 굉장히 애틋한 무언가가 느껴져 생각보다 곱씹어 읽고 말았다. 한국적인 정서를 약간 멀리했음에도 곳곳에서 보이는 -내가 생각하는-한국적인 정서에 스며들었던 것 같다.

정용준의 [아무도 잊지 않았다]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음에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오랜 세월 혼자만의 전쟁을 계속해왔던 오노다의 이야기다. 예전 재연 프로그램을 통해 그의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는데 그 때 나의 눈에 오노다는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고 일본에 충성하는 무서운 군인에 지나지 않았다. 전쟁의 끝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포기하지 못하고 집에 돌아가지 못했던 사람. 하지만 작가 정용준은 그런 비이성적인 면보다 그가 지니고 있던 인간적인 면모에 좀 더 집중한 느낌이다.

개인적으로 [한밤의 산행]보다는 [키스와 바나나]에 실린 작품들이 더 좋았던 것 같다. 누군가는 나와 같을 수도, 누군가는 나와 반대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 더 좋게 느껴졌든 풍부한 단편들을 만나볼 수 있어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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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와 바나나 테마 소설집
하성란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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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나라 작품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다. 인정한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도 느끼고 있는 부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우리나라 작품의 무거움이 별로 와닿지 않았더랬다. 간결하게 느껴지지 않는 표현들도, 간단히 파악할 수 없는 메시지들도 그저 작가들의 멋부리기 정도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번역문학, 특히 일본문학의 문체들에 길들여졌기 때문인가 싶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작품들에서는 느껴지는, 이를테면 한(恨)의 정서라든가 질척거리는 듯한 감정들의 표현에 질렸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번에 [키스와 바나나], [한밤의 산행]을 읽으면서 우리나라 문학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불만같은 것, 뭔가 만족되지 못하고 있던 부분들이 조금 채워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같은 책을 읽어도 얻게 되는 감상과 눈에 보이는 것들은 다르므로 어디까지나 지극히 나의 개인적인 감상이겠지만 정말 오랜만에 재미있게 읽은 한국 ‘단편’문학이었다.

 

[키스와 바나나]는 역사 속 인물을 소재로 한 테마 소설집이다. 각각 13명의 작가들의 작품이 실려 있어 조금 짧은 듯한 느낌도 있지만 상당한 완성도를 자랑한다. 읽는 내내 –이런 작품을 쓸 수도 있구나-라고 감탄했고, 그 동안 내가 우리나라 문학을 너무 읽지 않고 있었다는 것, 그러면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낄 정도였다. 어쩌면 역사와 기억을 소재로 한 작품의 취지가 나의 취향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대체 역사 픽션, 논픽션과 픽션, 판타지 장르를 넘나들고 있는 작품들이 글을 읽는 내내 나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유명 작가인 남편의 그늘에 가려 답답함을 느꼈던 아내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아내였던 젤다 세이어와 오버랩되고, 역사 속 강자들의 뒤에 서 있었던 약자들의 입장에서 새로운 역사가 쓰인다. 작품을 쓰던 작가는 작품 속에서 빠져나와 후대에서 자신의 흔적을 찾아내기도 하고, 한 인물의 일대기가 덤덤하게 재조명되기도 하고 일본인인 줄 알았던 조선인 선생님을 짝사랑했다가 그가 조선인임을 알고 야유하는 친구들 속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소녀는 순수를 잃는다.,

[소년 7의 고백]은 진실이 강압에 의해 어떻게 변질될 수 있는가, 폭력에 의해 진실 아닌 진실이 얼마나 많이 난무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좋지 않은 환경에서 그저 그렇게 태어나 그저 그렇게 자랐고 공부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려 짓궂은 장난을 치며 살아왔던 소년은 자신의 동네에서 일어난 한 사건에서 절대 자유롭지 못하다. 잠을 재우지 않고 진행되는 취조에 소년은 겁을 먹었고 잘 말하기만 하면 집에 보내주겠다는 형사의 강압에 있지도 않은 일을 있었다고 대답하게 되는 그. 발악하고 소리 지르고 그런 일은 없었다고 도리질도 쳐보지만 소년은 어렸고, 권력은 너무나 강했다. 소년의 입에서 나온 진실의 껍데기를 쓴 거짓이 세상 밖으로 알려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자명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결국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새삼 일깨워주었던 안보윤의 작품. 

 

대구 지하철 사건 속에서 살아남은 그는 사고 때 겪은 일을 소재로 작품을 쓰고 문단의 주목과 찬사를 받았다. 친구 윤기의 장례식 장에서 그의 기억을 떠올리는 준석은 윤기가 항상 가지고 다녔던 만년필에 주목하고 어째서인지 그 만년필의 소재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윤기의 부인으로부터 USB를 받게 된 준석은 미발표된 원고 속에서 그 날 윤기에게 있었던 일과 만년필의 소재를 알게 된다. 순간의 선택이 그 후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지배하고 결국 그 선택의 무게가 삶 전체를 내리누를 수 있다는, 조금은 잔혹한 조영아의 [만년필]이다.

 

많은 작품들이 모두 인상적이다.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것도 있고, 어떤 메시지를 지니고 있는가 곱씹게 만드는 것도 있으며, 가슴이 먹먹해져 다시 읽게 되는 작품들도 있었다. 단편에 대한 기대도 없었고, 잘 알지 못하는 작가들의 작품이라 큰 기대 없이 읽었는데 그래서인지 더 깊게 다가왔던 것 같다. 역사와 시간을 소재로 한 테마 소설집.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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