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O 모중석 스릴러 클럽 43
제프리 디버 지음, 이나경 옮김 / 비채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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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거장이라고 부르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제프리 디버의 작품 중 <링컨 라임 시리즈>가 가장 유명하다고 알고 있는데, 전 그 중 [본 컬렉터] 만 기억나요. 그것도 책을 읽어서가 아니라 안젤리나 졸리 주연의 영화로요. 제가 그의 작품 중 정말 대단하다고 박수 친 작품은 [옥토버리스트]였어요. 사건이 시간의 역순으로 전개되는 작품인데, 전 이사하면서 잃어버린 줄 알고 한 권 더 샀더랬지요, . [XO] 와는 별도로 [옥토버리스트] 는 정말 추천하는 작품이니, 꼭 한 번 읽어보세요! 이야기가 옆으로 새기는 했지만 결론은 [XO] 도 무척 재미있었다는 거예요. <링컨 라임 시리즈> 의 일곱 번째 작품인 [콜드문] 에 등장했던, CBI 요원이자 동작분석가인 캐트린 댄스를 주인공으로 한, [잠자는 소녀][도로변 십자가]에 이은 세 번째 작품입니다.

 

아름답고 실력있는 뮤지션 케일리 타운은 에드윈 샤프라는 남자로부터 스토킹을 당하고 있습니다. 메일, 편지는 물론 그는 케일리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는지의 기본적인 사항부터 노래와 관련된 모든 것을 알고 있어요. 자신의 고향에서 예정되어 있던 콘서트 준비 중인 케일리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위협을 느끼고 있습니다. 어느 날 케일리의 노래 <유어 섀도>가 배경으로 깔린 전화가 그녀에게 걸려오고, 그녀의 동료였던 보비가 살해당한 채 발견돼요. 그 후 이어지는 살인사건. 캐트린은 휴가였지만 케일리와의 인연으로 사건에 뛰어들고 그녀 특유의 실력으로 수수께끼를 하나씩 풀어가기 시작합니다.

 

에드윈은 미꾸라지 같은 인물이에요. 모든 단서를 피해가며 유려한 말솜씨로 상황을 모면합니다. 아스라한 연기 같기도 해요.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손에 잡히지 않죠. 여러 가지 사건이 복합적으로 얽히면서 에드윈은 범인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가 케일리의 스토커임을 이용해 다른 상황을 만들어내려는 사람들이 존재하거든요. 그는 그저 케일리의 순수한 팬이라고 자처하면서, 케일리가 자신을 정말 좋아해준다고 믿지만 그녀가 왜 자신을 멀리하고 무서워하려하는지 어리둥절해하기도 해요. 알쏭달쏭합니다. 도저히 범인을 단정짓기가 힘들었어요. 그저 속수무책으로 작가가 창조한 세계에 얌전히 몸을 맡길 뿐이었습니다. 사뿐히.

 

이 작품에 담긴 또 다른 재미는 캐트린 댄스의 러브 스토리입니다. FBI였던 남편을 사고로 잃고 지금 만나는 남자가 있지만, 그녀의 마음 속에는 마이클 오닐이라는, 동료이자 소울메이트 같은 사람도 존재하거든요. 어떻게 마이클과 마음이 통하는가 싶더니, 이런. 그녀의 러브스토리는 다시 제자리, 아직 결말이 맺어지지 않은 듯 보입니다. 사건도 사건이지만 전 그녀의 마음이 누구를 향하고 있을지 다음 작품이 무척 기대되네요.

 

작가는 작품 속 핵심 테마인 <유어 섀도>를 실제 음원으로 제작, 웹사이트를 통해 들어볼 수 있게 서비스를 제공했다고 해요. 뿐만 아니라 [XO] 뒤편에는 케일리 타운의 노래 전곡의 가사가 실려 있습니다. 마치 케일리 타운이 현실에 존재하는 것 같은, 실제로 만나보고 싶다는 마음이 살짝 듭니다. 이렇게 매력적인 노래를 만든, 아름다운 뮤지션으로부터 키스와 포옹을 뜻하는 XO라는 문자를 메일로 받는다면, 혹하고 넘어가는 사람들이 정말 있을 것 같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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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행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김해용 옮김 / 예담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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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시절 다니던 영어회화 학원 동료들과 구라마 진화제(교토 구라마에 있는 유키 신사에서 불이 나지 않도록 신에게 기원하는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교토로 온 오하시. 그와 나카이, 다케다, 후지무라, 다나베는 10년 전에도 구라마 진화제를 보러 갔다가 일행인 하세가와가 홀연히 사라진 기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일행을 만나기 전, 오하시는 시간이 남아 길을 둘러보다가 하세가와처럼 보이는 여인을 발견합니다. 그녀를 따라 어떤 화랑에 들렀는데, 그 곳에서 기시다 미치오라는 작가의 <야행(夜行)>이라는 동판화를 보게 되죠.

 

-야행 열차의 야행일 수도 있고, 아니면 백귀야행(온갖 귀신이 밤에 나다닌다는 뜻)의 야행일 수도 있죠. -

 

낮의 경험이 머릿속에 남아있던 오하시는 무심코 일행에게 하세가와를 본 것 같다는 말을 꺼내고, 더불어 화랑에서 본 기시다 미치오의 작품 얘기까지 거론됩니다. 순간, 모두의 얼굴에 무엇인가 숨기는 듯한 기색이 엿보이고 가장 먼저 나카이가 오노키치의 호텔 로비에서 그의 동판화를 본 기억이 있다면서 경험담을 이야기해요. 작품에는 이렇게 모두가 만난, 기시다 미치오의 <야행(夜行)>을 중심으로 그들이 겪은 기이한 경험담이 실려 있습니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여우 이야기]를 통해 만난 작가 모리미 도미히코의 작품입니다. 앞의 두 작품도 재미있었지만 특히 이번 [야행]에 마음이 끌렸던 이유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선 이야기라는 문구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이에요. 지금은 여름, 그 어느 때보다 이야기가 필요한 계절이죠. 그 중에서도 기이한 이야기가요. 하세가와의 실종을 둘러싼 미스터리인가, 스릴러인가 싶었지만 그들 각각의 이야기가 하나씩 풀어지다보면 정체 모를 오싹함에 침을 꼴깍, 삼키게 되었죠. 기시다 미치오의 작품 <야행(夜行)>에는 동일한 등장인물이 있거든요. 머리가 길고 마치 이쪽을 보고 손짓하듯 오른손을 들고 있는, 마네킹처럼 눈도 입도 없는 여자. <야행(夜行)>은 연작 작품이라 <야행(夜行)-오노미치>, <야행(夜行)-오쿠히다>처럼 각각의 등장인물이 방문한 곳의 지명이 붙어 있고, 각각의 등장인물들은 동판화에 그려진 여자에게서 모두 자신이 알고 있는 그 누군가를 발견합니다.

 

이 세계는 과연 이 세계만 존재하는 것일까요.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면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시공을 초월한 공간이 무수히 존재하죠. 그런 것처럼 다른 공간의 나도 분명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기시다 미치오의 그림 <야행(夜行)>이 있는 것처럼 서광(단 한 번뿐인 아침을 그린 것)도 존재하는 것처럼요. 각각의 이야기들은 도저히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경험들이었어요. 이 이야기들이 사실이라면 이 작품은 과연 어떻게 결말을 맺을 것인가 무척 궁금했습니다. 각 동판화에 항상 등장하는 기묘한 여자, 등장인물들이 겪은 괴이한 경험들은 책을 읽는 내내, 책을 읽고 있는 나의 존재조차 의심하게 만들 정도로 혼란스럽고도 무섭고, 한편으로는 가슴 설레는 여정이었습니다.

 

그 동안 독서가 좀 미진했는데 이 책을 읽으니 다시 책에 대한 애정이 무한 샘솟습니다. 더불어 모리미 도미히코에 대한 기대치도 더욱 높아졌어요. 워낙 교토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특히 교토를 배경으로 작품을 쓰는 작가를 애정하지 않을 수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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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사람을 죽여라
페데리코 아사트 지음, 한정아 옮김 / 비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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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맥케이가 권총으로 자살하려는 순간, 현관의 초인종이 울립니다. 마치 그가 자살하려는 것을 막으려는 것처럼, 쉴 새 없이, 계속. 무시하고 자살을 감행하려 하는데 급기야 방문자는 고함을 지르고 문을 두드리며 그를 방해하기 시작해요. 중요한 결정의 순간, 책상 위에 놓인, 그의 기억에 없는 쪽지가 눈에 띕니다. 쪽지를 펴서 읽은 순간, 테드는 자신의 글씨체로 쓰인 문장에 깜짝 놀라죠. 게다가 문 밖의 방해자는 그의 이름을 불러대며 지금 하려는 일이 무엇이지 알고 있다는 말까지 꺼내요.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불쑥 튀어나옵니다. 이건 뭐지, 외계인인가, 타임슬립인가. 방문자는 제안합니다. 테드 당신이 지금 하려는 일을 우리 조직의 누군가가 대신 해 줄 거라고, 그러니 당신은 우리가 제안하는 누군가를 죽여주기만 하면 된다고. 그래야 당신의 자살로 인해 가족들이 받을 고통이 덜어지지 않겠냐고. 아하. 그렇다면 테드는 조직이 제안하는 그 누군가를 죽이면서 암흑의 구렁텅이에 발을 들이게 되는 거군. 그리고 그게 다가 아니겠지. 조직의 함정에 빠져 목숨에 위협을 받으며 쫓고 쫓기면서 사건을 해결하고 결국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다시 삶의 의지를 불태운다는 엔딩이 될거야-라고 추측하신 분이 비단 저뿐만은 아닐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이후 진행되는 전개내용과 사건들은 더 많은 수수께끼들을 토해내고 의문들을 깊게만 만들 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독자는 그저 두 손 놓고 휘말려 들어갈 뿐입니다.

 

일본작가 미쓰다 신조는 이 작품에 대해 독자의 모든 예상을 가차없이 배신하는 소설-이라고 평했습니다. 스릴러 소설이라면 꼭 한 번씩 들어봤던 독자의 예상을 배신한다는 표현이 이렇게도 잘 어울리는 작품은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아요. 이 작품의 결말을 예상하는 사람은 작가가 아니라면 불가능할 정도라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요. 게다가 작품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 모든 사건들이 잡다하지 않고, 불필요하지 않고, 모두 각자의 소임을 다하고 있습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스릴러라는 표현은 이 작품을 두고 나왔다고 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다고 할까요. 이만하면 힘이 빠질 때가 됐는데, 이쯤이면 지루할 때도 됐는데. 그런 부분이 이 작품 안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 TV에서 영화평론가이자 책덕후로 유명한 이동진님의 강연을 보았어요. 거기에서 책을 고를 때 그 책의 2/3 지점을 읽었어도 재미있다면 그 책은 정말 재미있는 책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재미가 아닌 다른 단어일 수도 있겠지만, 작가들이 책을 쓸 때 2/3 지점에서는 힘이 빠지기 마련이라고, 그 지점이 괜찮으면 그 책은 괜찮은 책이다-라는 의미였습니다. 작품의 어느 부분도 지루하지 않고 커다란 물줄기를 이루기 위해 모든 에피소드들이 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에 괜한 뿌듯함까지 맛볼 수 있었어요.

 

어떤 결말을 보여줄 것인가-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과연. 의문과 여운이 남는 결말은 저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혹시 저처럼 재미있는 책은 읽고 싶지만 시간도 부족하고, 기운도 부족한 분이 계시다면 올해 이 작품만은 꼭 읽어보시라고 추천해드리고 싶어요. 물론 읽을 책도 많고, 기운이 넘치신 분도요. 기분 좋고, 성취감까지 얻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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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살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5
나카마치 신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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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가 될지도 모르는 내용이 약간 있습니다 ^^


1935년 출생 작가의 이 작품은, 작가가 태어난 지 그리도 오래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하지 못했습니다. 보통은 시대적으로 다른 분위기가 조금이라도 드러날 법도 한데 읽는 내내 그런 어색함을 느끼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추리소설을 즐겨 읽는 사람이라면 이 작가의 트릭을 금방 눈치챘겠지만, 트릭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작품 자체에 넓게 퍼져있는 것은 바로 사람의 마음이거든요.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기술이 발전해도 변하지 않는 것도 있겠죠. 사람의 마음도 세세하게 들여다보면 비록 미묘한 흔들림은 있을지라도 보편적으로 느끼는 감정에 그리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마음에 집중된 사건이었기에 시간적 간극을 못 느꼈던 게 아니었을까 싶어요.

 

작품은 한 명의 작가가 자살하면서 시작됩니다. 청산가리를 마신 사카이 마사오는 고통에 몸부림치다 결국 창문 밖으로 떨어져 죽음을 맞아요. 추리소설로 신인상까지 받았지만 수상 후 이렇다 할 작품을 써내지 못해 괴로워하던 중 [77일 오후 7시의 죽음]이라는 작품을 잡지에 투고한 뒤 자살이라니. 그의 죽음에 이상한 점을 느끼고 조사하기 시작한 사람은 경찰도 아니고 탐정도 아닌 출판사 편집자인 나카다 아키코와 잡지에 살인 리포트라는 글을 싣는 쓰쿠미 신스케입니다. 아키코와 신스케의 조사가 양쪽에서 진행될수록 사카이 주변의 의심스러운 인물들이 하나둘 떠오르고, 사카이가 숨기고 있던 비밀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 사건의 결말에서 범인을 예측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예측도 작가의 힌트가 있어서 가능했다고 할까요.

 

작가에게 있어 작품상을 수상하는 것은 큰 영광이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라고 해요. 재능이 있어서 당선된 것인지, 우연한 행운으로 당선된 것인지 알려주는 것이 두 번째 작품이라고 하니 두 번째 작품에 대한 스트레스가 얼마나 굉장할까요. 이 작품은 소설로서의 재미도 있지만, 작가로서의 삶이 녹록치 않다는 것, 그 뒤편에서 행해지고 있는 불합리한 일들에 대해서도 독자들에게 제시해줍니다. 어쩌면 작가의 고뇌가 반영된 것은 아니었을까 싶어요. 글쓰기를 좋아하고 자신의 작품을 탄생시키는 것은 크나큰 업적이겠지만 한편의 작품이 출간될 때마다 자신의 살을 깎아내리는 일이 된다고도 하죠. 독서를 좋아했던만큼 한때는 멋진 작가를 꿈꾸기도 했었는데 이 작품을 읽고나니 작가가 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모방살의]에는 여러 사람의 마음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어떻게든 성공적인 두 번째 작품을 탄생시켜야 한다는 작가의 욕망, 병든 아들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아버지의 절망, 그 절망을 이용해서 자신의 배를 채우려는 이기심, 노쇠한 몸이지만 작가로서의 명성을 끝까지 지켜내고 싶었던 작가의 한순간의 잘못과 그 잘못을 덮어주고 싶었던 딸의 마음. 한 편의 소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이야기 속에 다양한 사람들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고 각각의 시선에서 작품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초고가 탄생한 이래 40년이 흐르는 동안 미스터리 팬들의 요청에 힘입어 여러 작품이 다시 출간되었고, 2012년 일본에서 다시 베스트셀러에 오른 것을 보면 작품을 보는 사람의 눈은 거의 비슷한 것 같습니다.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단순하지 않은 트릭 속에서, [모방살의]라는 제목의 여운을 곱씹으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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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 다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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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을 걸어, 어둠 너머로]

오랜만에 읽는, 얇지만 뭔가 형용할 수 없는 묵직함이 느껴지는 하루키의 작품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이 책이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되었을 때 한 번 읽었던 적이 있는 것 같아요. 그 때는 어리기도 했고 하루키의 글에서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터라 훌렁훌렁 책장을 넘기는 데 의의를 두었었는데 시간이 흘러 다시 읽으니 새로운 느낌이 나긴 합니다. 전 하루키의 소설보다는 에세이를 더 선호하는 편이라 사실 이 [애프터 다크]도 조금 어렵게 다가왔어요. 과연 소설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일까,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거에요. 그러다 문득 깨달았습니다. 어쩌면 작가는 우리 모두, 각자가 걷고 있는 어둠을 마리와 에리, 주변인물들을 통해 형상화하려 했던 게 아닐까. 그 어둠을 벗어나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 어둠이란 고민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삶의 무게, 혹은 마음 속 깊은 곳 숨어있는 악의도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애프터 다크]에서 작가가 보여준 서술방식은 촬영 카메라 같았어요. ‘보이는 것은 도시의 모습이다로 시작하는 문체는 담담히,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며 인물들을 관찰합니다. ‘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지 않는 이상, 우리는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절대 알 수 없어요. 한밤중에 식당에 홀로 앉아 책을 읽는 마리가 있습니다. 그런 그녀 곁을 우연히 스쳐지나가는, 예전에 한 번 어울린 적이 있는 다카하시가 있죠. 일상대화 같으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헤어지고, 마리는 의도치 않게 알파빌이라는 모텔에서 온 연락을 받으며 새로운 인물들과 마주합니다. 밤을 보내는 사람들, 밤을 걷는 사람들과. 그 와중에 사이사이에 잠들어있는 마리의 언니 에리의 모습을 보여주며 그녀에게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암시하죠.

 

처음 몇 장을 읽었을 때는 말 그대로 우와, 이게 뭔가했어요. 알쏭달쏭, 하루키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 보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끝으로 갈수록 메말라있던 부분에서 감정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에리와 마리의 관계도 생각해보면서 조금씩 서정적인 부분도 느껴집니다.


시간을 들여서 자기 세계 같은 걸 조금씩 만들어왔다는 자각은 있어요. 혼자서 거기 들어가 있으면 어느 정도 마음이 놓여요. 하지만 그런 세계를 구태여 만들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제가 상처받기 쉬운 약한 인간이란 뜻 아닌가요? 게다가 그 세계란 것도 다른 사람들이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보잘것없는 세계라고요. 종이 상자로 지은 집처럼 조금만 센 바람이 불면 어디론가 날려갈 것 같은...

이도저도 다 떠나서 저는 이 문장들에 마음을 뺏겼습니다. 마치 제 마음을 그대로 글로 옮겨놓은 것 같아서요. 저는 매우 방어적이고 겁도 많고, 확실하게 저만의 세계가 있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으니까요. 나만 그런 게 아닐까 라는 두려움은 더 강하게 저를 저만의 방 안에 앉혀놓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마리가 몰랐던 에리의 고민이 있듯이, 누구에게나 각자의 삶의 무게와 어둠이 있듯이 저만 아니라 모두가 각자의 세계, 각자의 방이 있는 게 아닐까요. 하루키의 이 문장들을 보는 순간, 어째서인지 안도감이 밀려왔다고 한다면 저는 약한 인간인 걸까요. 잠들었던 에리가 이쪽으로 징표를 보이는 것처럼 우리의 어둠을 희미하게 만들어줄 계기를 발견한다면 행복하겠죠. 하루키는 어둠이라는 소재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절망보다는 희망을 더 말하고 싶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모차르트 <마술피리>의 시련처럼 얼마간의 고통을 직접 겪으면서 스스로 공포를 헤쳐나가지 않으면 진짜 성장이란 없을 겁니다. 진짜 어른이 될 수 없습니다.

아하. 그래서 마리와 에리, 그리고 마리가 도와준 중국인 소녀의 나이가 열아홉이었던 걸까요. 어른과 아이의 모호한 경계를 이루는 나이.

 

여담이지만 속표지가 정말 예쁘네요. 이사한 지 꽤 되었는데도 노트북 설정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사진을 올릴 수 없는 점이 꽤 안타까울 정도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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