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하는 역사학 공부 EBS 30일 인문학 2
김서형 지음 / EBS BOOKS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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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의 아버지'라고 하면 헤로도토스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으실텐데요, 그 이유는 그의 역사 서술 방법 때문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집필한 <역사>를 통해 역사의 흐름이 신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을 거부했다고 해요. 호메로스를 생각해봅시다. 그가 쓴 <일리아스>에는 신들의 개입이 너무나 당연하게 등장하지만, 헤로도토스는 과거의 사건을 직접 조사해서 기술했습니다. 여기에서 과거의 사건은 '페르시아 전쟁'입니다. 그리스가 페르시아의 침략을 격퇴하고 민주주의와 자유를 수호하는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역사>를 썼다고 전해져요. 그렇다면 과거 사실의 객관화라는 점에서는 떨어지지만, 그러나 신화적 시간과 공간에서는 분리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 역사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역사'도 아닌 '역사학'이라니, 역사를 좋아하지만 책 제목에서 '어려울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런데 [처음 하는 역사학 공부] 책을 받아보니 생각보다 두께도 얇고 담겨 있는 내용들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역사가와 그가 쓴 책을 중심으로 한 또 다른 역사 이야기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무엇보다 다양한 역사가들의 시각을 통해 역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를 한 번 생각해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는데요,  대체로 '역사는 과거의 객관적인 사실' 이라는 입장과 에드워드 카처럼 '역사란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니다'는 입장으로 나누어지는 듯 합니다.

 

무엇보다 저를 놀라게 한 것은 헤이든 화이트의 입장이었습니다. 그는 <메타 역사>라는 책을 통해 '역사는 이야기이고, 모든 이야기는 픽션'이라고 주장해요.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강조하는 역사관은 에드워드 카를 거치면서 이미 거부되었는데, 그는 아예 역사 서술의 문학적 성격을 강조합니다. 역사는 역사가의 상상력과 비유 언어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라고요. 제가 들어도 엄청 획기적인 이론인 듯 한데 어쩐지 그의 주장이 발표되었을 때 많은 역사가들로부터 비난과 반발을 샀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아예 수긍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현재 이야기로 접하는 역사는 어떤 역사적 사건을 토대로 한 누군가의 '서술'이니까요.

 

대부분의 학문들이 이제 융합을 목표로 하는 시대, 역사학도 빠질 수 없습니다. 138억년 전 발생한 빅뱅으로부터 현재와 미래까지 수많은 시공간을 다양한 규모에서 살펴보려는 '빅히스토리'는 지금까지 인간만을 대상으로 했던 관점에서 벗어납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역사 뿐만 아니라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거론되어 왔죠. 시대의 변화와 함께 역사학이 어떤 모습으로 다른 학문들과 함께 걸어갈 지, 궁금하고 기대됩니다.

 


 

 

총 30명의 역사가들이 역사학을 무엇이라 정의하며 그 역할에 대해 설명한 교양 인문학. 하루에 한 명씩, 깊은 만남을 가지면서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 네이버 독서카페 '리뷰어스클럽'을 통해 <EBSBOOKS>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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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의 아이
시게마쓰 기요시 지음, 권일영 옮김 / 크로스로드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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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히코는 벼랑 끝에 서 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된 괴롭힘. 잔인한 손길은, 자신 뿐만 아니라 이혼하고 홀로 아들을 키우는 엄마 가나에게까지 뻗어나간다. 여기가 바로 지옥이라고 느낀 순간 하루히코에게 다른 선택이 있었을 리 없다. 엄마를 슬프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 그 남자, 시미즈가 나타난다. 낳아준 아버지는 아니지만 엄마와 결혼하고 자신의 아버지가 되겠다고 결심한 사람.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정말? 당신과 내가 진짜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될 수 있다고?

 

자신의 반 친구들이 먹을 채소 수프에 발키리라는 독극물을 넣어 수많은 아이들을 죽거나 다치게 만든 아이, '우에다 유타로'. 범행 전에 '목요일의 아이'는 모두 죽을 거라며 예고 편지를 보냈다고 해서 <목요일의 아이> 사건으로 불리는 잔혹 범죄가 일어난 후 7년. 사건이 일어났던 동네 아사히가오카로 이사한 시미즈와 가나에, 하루히코에게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자신의 세계는 이제야말로 끝났다고 생각하는 하루히코 앞에 누군가가 나타난다.

 

집단 괴롭힘, 가정 내 폭력, 소년 범죄, 사회적 광기 등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사회적 메시지에 주목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이것을 가족소설로 읽었다. 마흔이 넘어 결혼하면서 얻게 된 아들 하루히코. 비록 생물학적인 아버지는 아닐지라도 그를 지켜주겠다고 다짐하는 시미즈는 각오를 다지지만, 그는 갈수록 하루히코가 두렵다. 얼굴에서 떠나지 않는 미소, 막힘없는 대화. 겉에서 보면 아무 문제 없는 부자의 모습이지만, 당연히, 그들 사이에는 행성에서 다른 행성에 이르는 정도의 거리가 있다. 이 두려움은, 이 거리감은, 십대인 자녀를 둔 가정이라면 모두 느끼는 그런 종류의 것인가.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시미즈에게는 기반이 없다. 하루히코와 십 몇 년을 함께 해왔다는 과거가.

 

하루히코와의 굳건한 추억 없이 분투하는 시미즈의 모습은, 그렇지만 모든 부모의 초상이기도 하다. 한발만 내딛으면 추락할 아들. 그 아들을 앞에 두고 제발 돌아오라며 울부짖을 우리는 하나같이 나약하다. 소설이기에 어떤 거창한 말이나 감동적인 행동으로 하루히코를 구하는 장면이 등장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작가는 그런 기대를 간단히 무시하고 나약한 부모의 모습을 들이민다. 영웅이 아닌 아버지의 모습이라니, 나는 그래서 좋았다. 현실에 영웅인 부모는 없다. 우리는 그저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아이를 지키려고 발버둥치는 존재들일 뿐이다.

 

무엇이 아이들을 구원할 수 있을지, 책을 읽는 내내 슬픔으로 마음이 묵직했다. 현실에서 부모인 우리가 손에 쥘 수 있는 무기는 무엇인가. 우리가 가진 것은 다만, 진심. 너를 구하겠다는, 네가 돌아올 날을 위해 여기서 계속 기다리겠다는 마음. 애처롭고 보잘 것 없어 보일지라도 그것만이 우리의 무기다. 그러니 부디, 그대로 영원히 떠나지 말고 한 번만 더 손을 내밀어주기를.

 


목요일의 아이는 멀리 떠난다. 그러나 아이는 언젠가 집으로 돌아온다.


p429

 

평소 따뜻한 작품만을 접해왔던 시게마쓰 기요시였기에 미스터리 작품은 어떨지 궁금했는데, 역시 이번 작품도 내가 간직해왔던 이미지의 이야기인 것 같다. 비록 앞날을 긍정할 수만은 없는 질문들에 여전히 마음은 어지럽지만, 그래도 그가 작품 끝에 이야기하고자 한 메시지대로 희망의 줄을 잡아본다.

 

**출판사 <크로스로드>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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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속도
엘리자베스 문 지음, 정소연 옮김 / 푸른숲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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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내가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신경 쓰지 않는다. 내가 변화하기를 바란다. 내 머릿속에 이것저것 집어넣고, 내 뇌를 바꾸고 싶어 한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지만, 사실은 그렇다.


p 63

 

한 사람을 알게 되는 것은 하나의 우주를 이해하는 것과 같다는 말을 들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아주 일부분일 뿐, 우리는 누군가를 알고 깊이 이해하게 될 때까지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한다. 그것은 자폐를 안고 있는 사람의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될 것이다. 어쩌면, 더욱. [어둠의 속도]를 읽으면서 든 생각은, 어느 한 우주에 대해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이란 과연 무엇일까-에 대한 것이었다. 일반 사람과 같지 않으면 비정상인 걸까, 성인이 되어 시설이나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아픈 사람일까 비정상인 사람일까, 어쨌거나 자신의 우주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게 너도 우리와 똑같이 이렇게 해야 해, 치료를 받으면 우리처럼 될 수 있어 라고 하는 건 폭력일까 아닐까.

 

참으로 복잡하고 섬세한 작품이고 한 자 한 자 적어내려가기 어려운 이야기다. 나는 자폐를 안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 내 아이를 비롯해 주변에도 자폐 증상을 보이는 사람이 없다. 자폐 스펙트럼을 보여서 힘들어하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 알고는 있지만 정확히 어떤 것인지 명확히 알지는 못한다. 그저 추측할 뿐. 그러니 내가 단순히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누구도 개인의 삶에 자신만의 기준을 제시해서는 안 된다' 같은 말을 하는 것조차도 굉장히 힘이 든다. 주인공 루가 자폐를 안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당연하다는 듯, 나 잘났다는 듯 할 수 있는 뻔한 소리도 도저히 꺼낼 용기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것 같아서.

 

이 작품은 자폐증을 앓고 있는 아들을 둔 작가였기에 쓸 수 있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사회에서 비정상으로 분류되는 루를 통해, 작가는 구태여 감동을 자아내려 하지 않았다. 그저 루가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 기술이 발전되는 것으로 질병과 장애를 구원할 수 있을지, 독자들에게마저 냉정한 시각을 요구한다.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등장인물들이 내린 결정에 누군가는 동의하고 누군가는 만족하지 않겠지만, 그들의 선택과 사랑이 이러이러할 것이라 예측하는 것에도 우리의 편견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작가는 은연 중에 비판하고 있는 듯 하다.

 

결코 해답을 내놓지 못할 질문들 속에서 소소하게 결심한 것은 하나 있다. 크랜쇼나 돈 같은 사람은 절대 되지 말자는 것. 그리고 톰이나 루시아처럼, 설사 타인의 결정에 개입하고 싶어도 자신의 과도한 오지랖을 내려놓고 누군가의 결정을 지지하는 사람이 되자는 것. 그의 우주는 그의 것이고 결코 나의 것이 될 수 없으며, 나의 속도와 타인의 속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서로를 응원하는 것 뿐.

 


** 네이버 독서카페 '책과 콩나무'를 통해 <푸른숲>으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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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위험하다
마리아나 엔리케스 지음, 엄지영 옮김 / 오렌지디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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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간해서는 공포소설이라고 해도 그리 무서워하며 읽는 편은 아니지만 이 마리아나 엔리케스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순수하게 '무섭다'. 마치 길은 건너야 하는데 깊고 어두운 늪을 앞에 두고 발을 내딛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마음이라고 할까.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에서는 그런 두려움을 희미하게 느꼈다면 이번 작품집에서는 아주 확실해졌다. 이 작가의 이야기들은 범상치 않다고. 그러니 '어디 한 번 읽어보자!'고 굳세게 마음 먹지 않고서는 덤벼서는 안 된다.

 

그녀의 이야기는 흡사 우물처럼 우리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이 '우물'이라는 단어가 뇌리에 깊이 박혀버린 이유는 작품집에 실린 단편 중 하나인 <우물> 때문이기도 하다. 작가가 이 작품집에 수록된 작품들 중 가장 먼저 쓴 단편이기도 한 <우물>은 저주를 받아 심각한 정신 질환에 걸린 어느 젊의 여성의 이야기다. 저주와 정신병이라는 전통적인 고딕 소설의 소재를 모두 다루고 있지만, 여기에서 문제는 이 소재들이 아니다. 그 젊은 여성에게 저주를 내린 존재들은 과연 누구인가. 사실은 그들이 제일 무서운 요소다. 자신들이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멀쩡한 아이를 이용했다는 것, 심지어 그들이 가까운 사람들이라는 것. 인간은 과연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의 답을, 이 이야기에서라면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남아메리카 특유의 공포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다면 <땅에서 파낸 앙헬리타>를 추천한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내륙 지방에서는 아기가 죽으면 천국의 일원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등에 날개를 붙여서 장례를 치르는 관습을 주요 소재로 삼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땅에 묻었던 그 아기가 어디를 가든 따라다닌다면?! 사실 '남아메리카 특유의 공포'에 대해서 아는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 후기를 읽기도 전에 이 <땅에서 파낸 앙헬리타>가 지역 특성을 가장 잘 반영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던 이유는 왜였을까.

 

엽기적인 호러 이야기도 등장한다. 망가진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을 때 쾌감을 느끼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심장이여, 그대는 어디에 있는가>. 급기야 그녀가 다다른 마지막에 경악하고 말았다. 그리고 어쩌면, 정말 어쩌면 현실에서 일어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카르네>에서는 동경하던 연예인의 죽음을 알게 된 두 소녀의 극단적인 선택을 다룬다. 이 두 작품은 읽다 속이 울렁거릴 수도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겠다!

 

사회와 관련된 두려움, 자신의 어린 시절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비극적인 역사와 관련된 공포 이야기도 등장한다. 각각의 이야기들에 기본적으로 '공포'라는 기본 재료를 깔아두고 다양한 소재로 양념을 한 듯한 이미지라고 할까. 그저 단순히 '무서운' 이야기가 아니라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위해 공포라는 장르를 선택한 것도 같다. 우물과도 같은, 늪과도 같은 이야기라 호불호가 갈릴지도 모르지만, 다음 작품이 출간된다면 나는 더 읽어보고 싶다. 묘하게 끌어당기는 마력을 느낀다. 감히 말한다면, 스티븐 킹에 필적한다고 여겨질 정도!!

 

**출판사 <오렌지디>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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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공적인 연애사 - 당신을 사랑하기까지 30만 년의 역사
오후 지음 / 날(도서출판)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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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마음을 나누는 일은 늘 어렵지만, 특히 남자와 여자 사이의 일은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은 지금까지도 알쏭달쏭하다. 좋으면 좋은 거고 싫으면 싫은 거지-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나에게 '밀당'이라는 개념은 무척 생소한 것이었다. 좋아하는데 왜 좋아하는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면 안 되는 건지, 좋아한다고 말하는 게 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인지.  마음이 가지 않는 상대에게 최대한 정중하게 나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왜 그리 어려운 시대가 된 걸까. 물론 후자의 경우에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어려울 수 있다. 누가 나를 좋아한다는데, 상대는 애써서 어렵게 꺼냈을 마음인데 그 호의에 응답하지 못한다는 건 어쩌면 비극이니까. 하지만 좋아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미안하지만 나는 너에게 마음이 가지 않는다'는 말을 꺼내지 못해 그 사람의 시간을 낭비하게 만드는 게 더 슬프지 않을까. 그래서 내가 옆지기와 결혼한 것인지도 모른다. 옆지기에게는 나의 감정을 숨길 필요도 없었거니와, 옆지기 또한 그런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책의 첫 장을 읽는 순간부터 작가가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원래 이 책의 맨 앞에는 100페이지 분량의 한 개 챕터가 더 있었다고 한다. 주 내용은 '성선택'에 관한 것으로, 그러나 작가의 이런 욕망은 출판사의 만류로 좌절되었다니, 어째 짠하기도 하고 웃음이 나오기도 하는 도입부였다고 할까. 더불어 삭제된 내용이 궁금한 사람은 영수증이나 구매 내역 등으로 구매인증을 하면 이메일로 보내주겠다고 하면서 책은 꼭 사서 보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그런 작가가 풀어내는 허심탄회하면서도 은근 심각한 우리들의 연애 이야기.

 

작가가 이야기를 진행시키면서 풀어내는 연애사에서 힘의 중심은 주로 남성 쪽에 존재했다. 그런데 현존하는 모계사회인 모수오족의 가장 큰 어른은 외할머니이고, 아이는 어머니의 성을 따르며, 재산도 어머니에서 맏딸로 이어진다. 사랑을 지속시킬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도 여성 쪽이다. 부인과 남편의 개념이 없으며 아버지라는 호칭도 없는 데다, 덕분에 이 공동체에는 경쟁이나 질투, 탐욕, 분노 등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니 어쩌면 연애의 '유토피아' 같은 곳 아닐까.

 

고대 사회의 연애를 다룬 챕터에서 가장 충격적이면서도 웃음이 터진 부분은 단연 <공개 자위에 시달리 이집트 왕>이었다. 이집트 파라오가 누구인가. 태양신의 기운을 받아 그 누구보다 신성시되는 사람 아니던가. 그런 파라오가 이집트에 가뭄이 100일 연속으로 이어지면 강 위에서 공개 자위를 해야만 했다니, 민망하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상상이 되면서 그 동안 파라오와 이집트에 느꼈던 경외감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뭐랄까, 굉장히 인간적이기도 하면서, 친근한(?)!!

 

다소 익살스러운 분위기로 이어지던 연애사는 중세와 근세를 거쳐 현대로 진입하면서 심각해진다. 공식대로라면 결혼과 출산으로 이어졌을 연애와 사랑이, 오늘날에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해진 가족과 삶의 형태. 이성이 줄 수 있는 친근감을 생각하면 연애와 데이트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데 의외로 섹스에 관심 없는 싱글들도 많다는 연구에 이 사회마저 얼어붙어 가는 듯한 느낌이다. 과연 미래의 연애와 사랑은 어떤 모습을 갖게 될지, 우리 아이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지 무척 궁금하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연애의 전체적인 개괄을 만날 수 있어서 시작은 가벼웠으나 끝은 살짝 무겁다. 현실과 맞닿아있기 때문에 그럴지도. 깔깔거리며 읽다가 또 작가가 던지는 논제에 이런저런 생각도 할 수 있었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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