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의 산을 넘고 1, 2장의 돌산도 지나 3, 4장의 가시밭길을 지나고 5장 유토피아의 가파른 언덕을 지나고 달래는듯 다정한 역자후기를 만났더니 아, 벌써 2월입니다. 


기존 사회주의, 자본론 등의 이론서와 스터디들의 정리 및 비판은 정말 정신 없이 구경했습니다. 학생이던 시절의 약점, 이론 텍스트들을 다시 만나니 반가운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어렵긴 매한가지입니다. 그러니까, 과로를 당연시하는 분위기, 일 자체가 사람의 정체성이 되어버리는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매몰되지 않고 게으른 위험인자가 되지 않으며 자유로운 '삶'을 즐길 수, 아니 적어도 살아갈 수 있을까. 


가정에서 해방, 혹은 가사임금 지불도 또 다른 차별을 낳을 뿐이라는 걸 몰랐겠습니까. 그나마 그게 방법이었을 뿐이지요. 가족 안에서 내가 생산 임금 시스템에 기여를 하고 있었습니다. 달리 뭘 어쩌겠습니까. 내가 애들 안 챙기면 남편이 더 큰, 더 높은 보수의, 더 안정적인 일에 집중을 못하니까요. 집안일이 쌓이고 넘쳐서 어쩔 수 없는 경우엔 가사도우미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 연속적인 일들이 차별을 낳고 구별을 더 공고히 하고 그럴수록 일이 사람을 삼키는 세태는 심해집니다. 차별과 격리가 특정 일과 계급을 더 높이, 낮게 만듭니다. 


그럴수록 필요한 게 '기본임금'이라고 이 꿈 같고 유토피아 같기만 한 이야기를 떠들어야 합니다.(토마스 모어 아즉 안 읽었고요) 현실의 고통을 징징대고 과거를 탓하기만 하는 (르센티먼트) 대신 주장하고 요구하고 상상해서 결국은 만들어야 합니다. 이 용감한 주장은 읽고 듣는 입장에서도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듭니다. 이런 방법도 있는 거군요? 기본임금을 요구하고 내 일과 부담이 당장 바로 내 눈앞에 없더라도 계속 생각하고 더 넓은 범위에서 고민하며 상상하고 '인간'의 진심을 믿는 일을 해오고... 그런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많군요. 일을 안하며 게으르고 나쁜 사람을 경계해서 벽을 치는 게 정답이 아니었어요. 일을 떨쳐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일 안에 담긴 오래된 사회 통념도 의심하고 함께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꾸만 자기검열 같이, 내가 감히 그래도 되...까?... 하는 마음이 드는군요. 쫄보인 제가 노동윤리와 가정신화에 그간 아주 푹 절여져 있었습니다.  

노동을 둘러싼 투쟁은 그저 더 나은 노동조건을 위한 것이 아니라 노동 바깥에서의 삶을 누리기 위한 시간과 돈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 P29

자유는 규율에 반하는 행위로 그려진다. 브라운의 표현을 빌리면 투쟁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우리를 위해 행해졌을 것에 맞선 항구적인 투쟁인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자유는 창조적 행위이기도 하다. [...] 미래를 헤쳐 가거나 그저 살아남기 보다는 함께 미래를 만들어 가려는 소망이라고 보았다. 고로 자유는 개인의 의지보다는 집단의 행위에 달려 있고, 이 때문에 자유는 정치적인 것이 된다. - P43

노동 거부는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활동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노동사회의 구성과 일의 도덕화된 개념을 거부하는 것이다. - P57

미국 노동윤리의 역사를 보면 이런 금욕주의적 이상이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얼마나 잘 적응하고 변화해 왔는지 알 수 있다. 목적은 변화하는데 수단만은, 즉 윤리가 요구하는 행동만은 변하지 않는다. 언제나 윤리는 임금노동에 자신을 투사하고 구조적으로 헌신하도록, 일을 삶의 중심으로 끌어올리도록, 그리고 일 자체를 목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요구한다. 하지만 윤리가 제시하는 목표, 윤리적 실천을 통해 주어지는 보상은 놀랄 정도로 변화무쌍했다. - P81

델라 코스타는 가족을 임금 시스템과 연결 지어 노동의 자본주의적 조직화를 이루는 한 축으로 설명함으로써 가족 제도가 노동 가격 인하를 흡수하며, 저렴하고 더 유연한 여성화된 노동 형태를 제공하도록 도울 뿐 아니라, 국가와 자본에게 사회적 재생산 비용의 책임을 상당 부분 면제해 주는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 P193

가사임금의 요구는 가사노동을 칭송하려는 것이 아니며, 신성시 하고자 의도한 것 역시 아니다. [...] 노동 거부는 무급 가사노동에 적용될 때, 현재의 가족 중심 조직화, 노동의 젠더 분업을 거부한다는 의미가 된다. 나아가 가정 영역 내의 관계와 의식에 대한 너무도 익숙한 그 모든 낭만화에 기댄 비판을 옹호하길 거부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 P198

이제 우리는 아이들을 더 많이 기대하도록 기를 것이다. 자기희생은 전략으로서도 이상으로서도 거부된다. - P213

가사임금을 주부들에게 지급함으로써 젠더 분업이 더 공고해질 ㅜ 있다. [...] 더 많은 형태의 일에 임금을 지급함으로써 임금 시스템의 완전성이 의문시 되기보다는 옹호된다.[...] 기본소득 요구는 이에 비해 더 실효성 있는 대안이다. 기본소득은 모든 개인에게 보편적으로 소득을 지급하자고 제안하고, 그리하여 일에 대한 소득의 의존을 낮춘다. 이를 통해 임금 시스템과 가족 제도가 소득 분배의 신뢰성 있는 메커니즘으로서 기능할 수 없는 현실을 인식하게끔 할 뿐 아니라, 그에 대한 해법을 내놓는다. - P230

기본소득을 가치의 보편적 생산이 아니라 삶의 보편적 재생산에 대한 것으로 보면 어떨까? - P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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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2-02 15: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직 이 책에서 비판하는 노동윤리를 버리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자꾸만 삐죽삐죽 열심히 일한 사람만이 달콤한 휴식을 가져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고 말이지요. 일하지 않았는데 돈을 주는 것이 타당한가.. 막 이러면서 자꾸 노동윤리가 저를 후려치려고 해요. 그래서 이런 책을 좀 더 많이 읽어야 하는 것 같아요. 3월달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그래서 더 기대되는 부분입니다.

어렵고 힘든데 이렇게 읽기를 마치셨다니, 고생하셨습니다.

유부만두 2020-02-03 08:37   좋아요 1 | URL
어렵고 힘들었어요. 그래도 이렇게 단단한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내가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을 의심하고 다시 보는 것을 배우게 돼요. 그리고 속마음을 더 들여다 보고요. 3월 책으로는 아마 분노 폭발이 아닐까 싶고요. ^^

단발머리 2020-02-03 07: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부만두님 문장들이 저의 속마음 토크 같아서 읽는내내 시원했습니다.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도 더 많이 생겼구요.
잘 읽고 갑니다, 유부만두님^^

유부만두 2020-02-03 08:38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님과 공감했나요? 슬프면서도 반가워요.
요즘 전 책을 읽으면서 자꾸 자괴하게 되어서 .... 그래도 계속 읽어요.
 

올핸 책 덜 산다며? 라고 하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연초엔 막 비장해지는 나;;;
잊지마라 프루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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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01-30 1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최근에 <독서의 즐거움>에 자꾸 눈이 가더니만 유부만두님 서재에서도 만나니 제가 꼬옥! 읽어야될 책인거 같아요^^

유부만두 2020-02-01 23:15   좋아요 0 | URL
같이 읽어요~ 이렇게 야심차게 사놓기만 한 책이 계속 늘어갑니다~ ^^

2020-01-31 1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01 2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멋진 이동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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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도서관이다.

1986년 LA 중앙도서관 화재를 시작으로 용의자의 인생사, 재판 과정, LA 도시역사, 도서관 사서직의 역사, 정치, 분서갱유, 인터넷과 이북의 출현, 도서관의 지역 사회에서의 역할 등... 쭉 쭉 뻗어나가는 이야기가 항상 책을 소중하게 중심에 두고, 사람을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 <뉴욕 라이브러리에서> 가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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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길에 두 권을 골라갔는데 표지가 비슷하다. 

가볍게 사랑하는 이야기를 읽어야지 하면서 골랐는데 단편집 '캣퍼슨'의 이야기들은 기대 이하였다. 정제되지 않은 ... 이라고 쓰려니 솔직하고 당돌한, 이라는 형용어구가 연상되는데 새롭지도 않고 스마트하지도 않고 그냥 흔한 저질 이야기 모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만남, 이런 플러팅, 그리고 이런 결말과 ... 그런데 표지만 이쁨. 하지만 표제작 '캣퍼슨'이 실린 뉴요커의 삽화는 비슷했지만 살짝 달랐지. 




Bad Kiss 라는 주제에 어울리는 사진이다. 만약 이 사진이 표지에 실렸더라면? 난 읽을 생각도 않았겠지. 로맨틱하거나 애틋하지 않아서 라기 보다는 새롭거나 하다못해 '젊은' 느낌도 받지 못해서 실망했다. 화제가 되었던 표제작 '캣퍼슨'이 그나마 나았다. 


정세랑 작가의 등단작은 기대치를 낮추고 시작해서인지 (지구에서 한아뿐이 인상적이지 않았기에) 재미있게 읽었는데 특히 챕터 마다 소개되는 재화의 작품이 흥미로웠다. 재화와 용기의 연애 이야기 이지만 정작 '덧니가 보고 싶어'라고 말하는 인물이 따로 있다는 게 뽀인트.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거였나 싶었지만 두두둥. 억지 같기도 하지만 (녹색 광선은 안나옴) 클라이막스와 정리가 추접스럽지 않아서 좋았다. 깔끔한 문장이 산뜻하기도 했다.


즐거운 책 읽기! 속도를 내보자며 선택한 책은 아디치에의 '보라색 히비스커스'. 하지만 이 책은 빠르게 후루룩 넘길 수가 없다. 숨을 고르면서 천천히 조용히 아프게 읽어나갔다. 대충 지난주의 책 읽기는 2승 1패 정도. 삼할이면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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