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들에게


    슈테판 츠바이크


   츠바이크의 글을 읽고 있다 보면 깊이 빠져든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 안타까운 건 그의 평전을 읽다 보면 평전의 ‘대상’에 집중하는 것보다 그의 글에 홀린다. 그렇게 그 대상에게 츠바이크가 생각하고 느끼는 그대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철학을 공부하고 문학과 역사, 심리학 등에 두루 관심을 가지고 써내려간 그의 글은 딱딱하고 건조하지 않고 부드럽고 강단있다. 평전의 대상의 실제의 생활과 생각들, 느끼는 바를 생생하게 포착하고 있는 듯 감정과 이성이 마구 휘몰아치며 감정이입하게 된다. 문학적인 느낌도 강하다. 그래서인지 츠바이크는 전기 작가로 유명하지만 그의 소설 또한 상당히 매력적이다. 아무튼 츠바이크의 글을 읽을 때면 마냥, 마음이 아련해진다.

  <우정, 나의 종교>는 츠바이크가 쓴 글들의 묶음이다. 장례식장에서 발표한 글도 있고 발표하지 못한 글도 있다는데 핵심은 츠바이크의 글들 중에서 ‘인물’에 관한 글을 추린 것이다. 로맹 롤랑은 츠바이크에 대해 “그에게 우정은 종교와 같다”라는 말을 했다는데, 책의 제목은 이 말에서 따온 모양이다.


로맹 롤랑은 츠바이크에 대해 “우정이야말로 그의 종교”라고 말한 적이 있다. 츠바이크처럼 우정과 의리를 중시한 사람은 보기 드물다. 그는 말만 하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p11~12


  수많은 평전을 쓰게 된 것은 츠바이크 자신이 거기에 재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자신이 많은 이들과의 교류를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츠바이크가 많은 언어를 익힌 것도, 여러 나라를 다닌 것도 그렇고. 평전을 쓸 때도 인물과 작품과 자료들을 깊이 연구하고 심리를 분석하는 만큼 사람들과의 교우에서도 섬세함과 감성으로 사람들을 대했을 것이다.


츠바이크는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사업에 성공하고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면서도 겸손했다. 스승에게는 늘 제자의 예를 갖추었고, 스승이나 벗한 선배들에게 존경, 앙모, 감격의 정을 품었다. 이는 그의 성품뿐 아니라 그가 큰 스승들에게 받은 가르침을 자양분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이었음을 보여 준다. 그는 프로이트는 물론이고 베르하렌, 고리키, 로맹 롤랑에게도 같은 태도를 취했다. p11


  그의 인물 평전은 특정한 분야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과 나눈 우정들이 그가 삶을 살아가는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츠바이크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들을 둘도 없는 친구로 여겼고 이 책 속에서도 그의 우정에 찬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여기엔 프루스트, 프로이트, 베를렌, 롤랑, 톨스토이, 호프만, 슈바이처, 바이런, 말러, 발터, 토스카니니, 릴케, 열 두 명의 이야기들이 있다. 벗들에 대한 짧은 글에서도 이 인물들의 생애와 그들의 감성과 그들에게 가지는 츠바이크의 마음이 섬세한 필치 속에 생생하기에 이들에 대한 평전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시대가 그러했던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츠바이크의 마지막 선택 역시도 너무나 아쉽고 안타깝다. 그래도 조금만 더 힘을 내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의 고통을 어찌 가늠하겠냐만 그 시대 수많은 이들이 그와 같은 상황에 있었던 만큼 지식인의 나약한 모습으로도 비춰진다. 츠바이크의 자살을 알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 것이 생각난다. 이미 그가 사망한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러할진대 그와 함께 우정을 나누었던 그와 함께 했던 수많은 이들은 나보다 더했을 것이다. 더 이상 친구이자 풍부한 감성과 지식을 지닌 작가를 만날 수 없음에, 그 안타까운 선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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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름이 뭐더라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과 유사한 줄기로 흘러간다. 100세 노인이 요양원 창문으로 탈출해 트렁크를 받아 쥐고 영락없는 모험의 세계에 빠졌듯이 까막눈이 놈베코는 가난한 남아프리카공화국 흑인 빈민촌에서 분뇨통을 나르며 생계를 이어 가는 삶에서 탈출한다. 역시 놈베코도 우연찮게 얻게 된 다이아몬드가 그녀가 떠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끔 한다. 하지만, 100세 노인 알란의 트렁크 속 돈과 대비되는 것은 놈베코에겐 핵폭탄이다. 잉여의 핵폭탄이 놈베코에게 쥐어지면서 놈베코는 격렬한 모험의 길로 거침없이 빠져든다. 이 모험의 길에 알란의 과거의 역사가 펼쳐진다면 놈베코에게는 홀예르의 인생이 겹쳐 진행된다.

  놈베코에겐 비상한 재주가 있다. 까막눈이지만 빠른 셈법과 대담한 기지를 가졌다. 아니, 드러낼 때가 없다 보니 묻혔지만 영락없는 천재적인 기질이 있었다. 정확이 말하자면 놈베코는 ‘까막눈이였었던 여자’다. 호색한이자 문학 애호가로부터 글을 배워 까막눈이에서 벗어난 것이다. 여러 모로 문학 애호가는 놈베코에게 ‘개안’을 해주고 떠났다. 글을 깨치게 해주고 반짝반짝 빛나는 다이아몬드까지 선사해 주었으니.

   

학교 문턱에도 가본 적이 없고, 소웨토 밖으로 한 걸음도 내디뎌 본 적이 없는 여자아이가 물었다. 이 질문을 받은 담당관은 지배 엘리트의 대표자요, 대학까지 나왔지만 탄자니아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날 때부터 허여멀겋던 위생국 직원의 얼굴은 소녀의 조리 있는 말 앞에서 백지장이 되었다. 열네 살 먹은 까막눈이 계집애에게 모욕당하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이 건방진 계집애는 자기가 위생 시설에 책정한 예산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었다. p34


  세상은 존재를 부정하는 것을 쉽게 여긴다. 놈베코라는 이름을 가진 이 아이는 가난하고 글을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흑인이라는 이유로 이름이 까막눈이, 검둥이 등으로 불린다. 아니면 그저 “네 이름이 뭐더라”가 되거나. 조금만 이야기를 해보면 어떠한 사람인지 알 터인데도 그저 태생으로 판단하려 든다. 또한 이름을 가졌으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홀예르 역시 마찬가지다. 왕권 신봉자이지만 국왕에게 모욕을 받은 후 왕권철퇴를 외치는 쌍둥이의 아버지는 자식들의 이름을 모두 홀예르로 만든다.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홀예르가 두 명이지만 홀예르 2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

  이 책 속에 등장하는 많은 사건들은 물론 ‘우연’이 겹친다. 역시나 황당한 사건과 사고들이 속출한다. 하지만 이 우연한 일들이 남발되는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김없는 법칙들이 있다. 그것은 누군가에 의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해야 하는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또는 생각없이, 또는 아무거나 막 생각하면서 ‘일’들을 저지른다. 이렇게 저지르는 일들을 뒷수습하는 이들은 언제나 생각하는 놈베코와 홀예르의 몫이다. 놈베코와 홀예르가 만나는 사람들은 늘 한가지 생각에 집착하거나 너무나 많은 생각에 몰두해 있어서 그들이 벌이는 일들이 어떤 파장을 불러오는지 생각하지 못한다.


그다음에는 더 이상 덧붙일 말이 없었으므로 홀예르는 허공으로 점프했고, 약 1초간 모종의 내적 평화를 느꼈다. 딱 1초 동안이었다. 그러고 나서 권총을 요원에게 사용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번쩍 깨달았다. 「에혀, 내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홀예르는 한탄했다. 늘 멍청하게 판단하고, 뒤늦게야 머리가 돌아가는 것, 이게 언제나의 자신이었다. p306


  그것은 글을 읽을 수 있느냐 , 배웠느냐, 경제력이 있느냐, 권력이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세상에 대한 이해의 깊이의 차원인 듯하다. 놈베코와 홀예르는 이 복작대고 정신없는 이야기 속에서 비교적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생각을 가지고 상황을 판단하는 이들로 대변된다. 하지만 끊임없이 덜 생각하고 제 생각만을 일삼는 이들이 있는 한 삶은 언제나 예측불가한 상황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이 어처구니 없는 하루는 대체 언제야 끝나려나?

「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어.」 놈베코가 대답했다. 「왜냐하면 삶이란 원래 이런 식인 것 같으니까…….」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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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계속된다


  모험은 그의 의지에서 시작되었다. 운이 그의 의지와 병행하며 때론 뛰어넘어 그와 함께 했다. 이제 막 백세 생일을 맞이한 알란이 살아온 100년의 역사는, 그의 역사이자 세계사였다. 그런 과거를 지닌 노인이었기에 알란은 인생을 돌아보며 회한에 젖지 않는다. 다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기로 한다. 새로운 세기의 새 인생은 한계를 뛰어넘는 것에서 시작한다. 알란은 양로원 창문을 가뿐히 뛰어넘는다. 산책이라도 가는 마냥 슬리퍼를 신고서. 그렇다. 알란은 산책을 가듯 여유롭고 즐거운 마음으로 남은 생을 보내리라 다짐한다.


알란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쓸데없는 기대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또 반대로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될 터, 쓸데없이 미리부터 골머리를 썩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p271


  하지만 지난 100년 동안 이미 겪었듯이 그의 의지대로 움직여지진 않았다. 눈깜짝할 사이에 알란은 새로운 상황에 휩쓸린다. 의도치 않은 상황에 당황할 법 한데도 알란의 행동들은 여유가 있다. 의뭉스럽기까지 하다.    


 노인은 자기가 왜 트렁크를 훔칠 생각을 했을까 자문해 보았다. 그냥 기회가 왔기 때문에? 아니면 주인이 불한당 같은 녀석이라서? 아니면 트렁크 안에 신발 한 켤레와 심지어 모자까지 하나 들어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에서? 그것도 아니면 자신은 잃을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정말이지 이 중에서 무엇이 정답인지 알 수 없었다. 뭐, 인생이 연장전으로 접어들었을 때는 이따금 변덕을 부릴 수도 있는 일이지……. 그가 좌석에 편안히 자리 잡으며 내린 결론이었다. p15~16 


  현재의 삶이 어떻게 전개될까를 지켜보는 맛은 버르장머리 없는 젊은 놈의 트렁크 속에 든 ‘돈’을 찾으려는 자들과의 추격전이다. 과연 이 거금을 가진 알란은 무사히, 도망칠 수 있을까. 그 무리들에게서. 하지만 이 대결은 코믹의 극대화처럼 알란에게 연승을 안긴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알란과 알란의 친구들은 이 무리들을 완벽하게 사고로 ‘처리’하니까. 하지만 이 황당한 전개보다 더 황당한 전개는 알란의 과거 행적이다. 그는 전세계의 역사적 현장에 있던 인물이다. 그리고 그가 한 행동과 말들이 오늘날의 이 현대사를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알란이 1905년생이니 그가 지나온 시대에는 이데올로기와 전쟁이 있었다. 어쩌면 이 전쟁은 알란 때문이기도 하다. 알란은 폭탄 제조 기술을 터득했고 폭탄 터뜨리는 일을 잘 활용했다. 스페인 내전에서도 이 폭탄 덕분에 프랑코 장군을 살리고, 미국 과학자들에게도 핵폭탄을 만드는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다. 그는 냉전과 이데올로기 시대 각 나라의 지도자, 정치적 인물들과 엮이며 그들과의 친분 또는 미움으로 목숨을 유지하기도 하고 노역을 당하기도 한다. 끊임없이 사건과 사고 속에 휘말리는 알란의 능력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고통스러운 상황에 맞닥뜨려서도 낙천적인 알란의 성격이 그의 생을 좌지우지하는 듯하다.


자기가 세상을 돌아다니며 한 가지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해결하기 힘든 분쟁은 대개 "네가 멍청해!" "아냐, 멍청한 건 너야!" " 아냐, 멍청한 건 너라고!"라는 식으로 진행된다는 거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결책은 둘이서 보드카 한 병을 함께 비우고 나서 앞일을 생각하는 거란다. p256


  알란은 <우생학적이며 사회학적인> 이유로 거세당했다. 우생학적인 이유라면 알란은 약간 저능아라는 것이고, 사실 무엇보다 결정적인 이유는 사회학적인 이유일 것이다. 알란의 몸에 아비의 유전자가 너무 많이 섞여 있기 때문에 칼손 집안이 번식하게 놔두면 안 된다는 국가의 진단. 알란의 아버지는 사회주의자였다. 하지만 알란 아버지의 신념은 흔들리고 있었고 조그만 땅을 소유하며 레닌에게 맞서다 사망했다. 어쩌면 알란이 옳았는지도 모르다. 정치는 복수와도 같이 좋지 않은 것이라는 걸. 그래서 결국 최악에 이르게 되는 것이라는 걸.


아이는 자라나 어른이 되었고, 부모의 의견에다 자신의 의견을 첨가했다. 그것이 공산주의자건 파시스트건 인종주의자건 자본주의자건 간에, 어떤 정치적 신념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모두가 똑같았다. 하지만 믿을 만한 사람은 과일 주스를 마시지 않는다는 아버지의 말에는 여전히 동감이었다. 또 사람이 가끔 술을 한잔할 수는 있지만 이성을 잃으면 안 된다는 어머니의 말에도 공감했다. p178


  알란은 정치적 견해도 종교도 가지지 않고 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한다. 확고한 믿음과 신념보다 알란의 견해가 목숨을 유지하는데 더욱 필요한 처방이었을지도. 아니면 그것이 알란이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인물들과 연결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로 인한 사건들을 일으키는 상황을 만들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에겐 정치적 견해보다 그 당시의 상황과 인간이 더욱 중요하게 작용했으니까.

  

사물을 폭파시키는 것과 사람을 폭파시키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어요. 만일 커다란 바윗덩어리가 길을 가로막고 있다면, 다이너마이트로 그걸 반으로 쪼개 버리면 기분이 좋은 게 사실이에요. 하지만 거기 서 있는 게 사람이라면, 그냥 잠시 옆으로 비켜 달라고 부탁하면 되지 않을까요? p50


  그래, 거기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때로 정치는, 어떤 정치가는 거기 있는 사람을 보지 않고 그들에게 부탁하는 일을 너무나 어려워한다. 아니 싫어한다. 그저 길을 막고 있는 바윗덩어리라고 생각한다. 알란이 지나온 그 시간들 속에, 사람을 바위로 인식하는 인지장애의 정치인들 덕분에 여전히 이 역사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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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게 죽고 싶습니다



  오베는 쓸쓸한 남자다. 그 역시 노년의 외로움에 고리를 만든다. 59세가 노인이 맞긴 한가? 항상 함께 해 오던 그의 아내도 곁에 없다. 그리고 인생의 1/3을 보낸 직장에선 그의 나이의 절반쯤인 관리자들이 말한다. “이제 좀 쉴 때도 되지 않았냐”라고.

  오베는 자신의 원칙이 있고 그를 충실히 지킨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베의 원칙을 ‘흑백’이라 칭한다. 오베가 볼 수 있는 색깔의 전부인 아내가 죽고 직장에서도 잘린 오베. 외로움 더하기, 자신이 할 일이 정말없구나라고 느끼는 오베의 선택이 애잔하다.

  한국의 자살사망률은 여전히 세계최고다.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은 이 기록은 한두 해 세운 것이 아니다. 자살의 이유 중 대표적인 것이 우울증이다. 특별히 한국인들만 우울증에 잘 걸리는 기질이라도 된다는 말인지. 노년의 자살도 높다. 노년의 우울증엔 경제적 이와 더불어 외로움과 쓸쓸함이 큰 몫을 차지한다. 오베도 시간에 밀려 이 전철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현실에 맞닥뜨린다. 하지만, 인생 100세 시대 오베는 환갑도 되지 않았는데.

  오베는 오베는 친절할 수 있는 남자지만 친절한 ‘척’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친절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야만 하는 것을 하는 것이기에 그것은 하나의 포장도 없이 단순하고, 직선적이고, 뻣뻣한 행태로 행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드러나는 모습에 질겁한다. 한국에서라면 웬 꼰대?라고 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베가 꼰대라고 불리면 억울할 듯하다. 오베가 가지는 삶의 철학은 확고하고 그것은 오베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도 아니다. 부당한 것을 정의로 둔갑시키지 않고 무엇이 중요한지를 항상 알고 있는 원칙이다. 그것은 지금 우리 사회가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것을 꼭 잡고 있다. 그래서 오베는 답답하게 보이고 다른 이들과 부딪치지만 이 사회에서 어떤 경우라도 잊지 않아야 할 최상의 원칙들이 인간을 향해야 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일깨워 준다. 오베가 융통성없고 고루하다고 여길지 모르나 오히려 오베는 사람들이 ‘꺼려’ 하는 동성애에 대해서도 편견없는 사람이다. 다만, 오베는 표현력만을 ‘좀 더’ 길러야 한다.


아마 그녀에게 운명이란 ‘무언가‘였을 텐데, 그건 오배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오베에게 운명이란 ’누군가‘였다. p103 


  ‘누군가’는 오베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이 거침없이 폭력적인 사회에서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끊임없이 린치당하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그 린치를 거두어 가는 것고 ‘누군가’인 것이다. 오베는 ‘뒤치다꺼리’를 남겨주는 이웃 사람들오 인해 ‘어쩔 수 없이’ 그의 아내 곁으로 가는 것을 미룰 수밖에 없다. 여전히, 오베는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슬픔을 공유하지 않을 경우, 슬픔은 대신 서로를 더 멀리 밀어낼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p333


  사람들이 원칙을 깨고 무질서하게 살아가는 것을 정리해 주면서 오베는 이웃 사람들에게  스며든다. 그것은 이웃들도 마찬가지다. 서로가 밀어내지 않고 공유하게 되는 그들의 정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무엇이 우선이 되어야 하는지를 아는 이들의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혼자서는 살 수 없다라고 하면서도 생존을 들먹이며 공존을 무색케 하고 있다. 공존이라는 말과 방식이 있음에도 어느새 생존이 급박성을 강조하며 ‘경쟁’이 당연한 것처럼 만들고 있는 이 사회,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원칙이 무엇인지를 서로 잊지 않게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죽음이란 이상한 것이다. 사람들은 마치 죽음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양 인생을 살아가지만, 죽음은 종종 삶의 유지하는 가장 커다란 동기 중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 중 어떤 이들은 때로 죽음을 무척이나 의식함으로써 더 열심히, 더 완고하게, 더 분노하며 산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죽음의 반대 항을 의식하기 위해서라도 죽음의 존재를 끊임없이 필요로 했다. 또 다른 이들은 죽음에 너무나 사로잡힌 나머지 죽음이 자기의 도착을 알리기 훨씬 전부터 대기실로 들어가기도 한다. 우리는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지만, 대부분은 죽음이 우리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데려갈지 모른다는 사실을 더 두려워한다. 죽음에 대해 갖는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이 언제나 자신을 비껴가리라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우리를 홀로 남겨놓으리라는 사실이다. p436


  사실, 우리는 누구나 죽는다. 죽음을 향해 가기 전까지 좀 더 아름답게 살고 행복하게 죽고 싶은 것은 모두의 소망이다. 치열함이라는 게 꼭 필요한가. 남을 죽여야 내가 죽는 상황이 피해지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렇게 만들어가는 상황이 지속되지만 인생의 마지막 즈음에 돌아보면 작가의 말처럼, 내 사랑하는 이들이, 내 이웃들이 죽고 홀로 남겨진 나 자신이 가장 안쓰러운 모습이 아닌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행복하게 죽었습니다. 그렇게 이 세상과 작별할 수 있으려면 우리 모두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 내가 오베와 같은 사람이 되고 오베의 이웃과 같은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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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슬로우 욕구 5단계의 노인들


카타리나 잉엘만순드베리, 감옥에 가기로 한 메르타 할머니




   제목을 보고 창문 넘어 도망친 노인의 작가 책인 줄 알았다. 제목에서 풍기는 이 유사함. 내용 역시 조금은 비슷한 면이 있다고 해도 될 듯하다. 작가는 카타리나 잉엘만순드베리로 역사 소설, 어린이책, 유머, 에세이집 등의 여러 장르에서 두루 글을 써온 작가이다. 또다른 이력이라면 15년 동안 수중고고학자였다는 점이다.

   창문을 넘으신 노인에 비해선 까마득한 젊은 할머니, 79세의 메르타 안데르손과 네 명의 친구들의 이야기다. 메르타 할머니와 친구들 역시 지금, 요양원에 갇혀 있다. 이 다이아몬드 노인 요양소는 메르타 할머니가 지내기엔 너무나 버겁다. 잠은 8시에 자야 되고 간식도 없고 어쩌다 한번 산책이 허용된다. 메르타 할머니는 이에 생각한다. 차라리 감옥이 낫다고. 감옥은 하루 한번씩은 꼬박 산책을 시켜준다니까! 그래서 할머니는 결심한다. 감옥에 들어가기로. 감옥에 들어가야 할 그 좋은 이유를 합창단 친구들과 함께 공유한다. 그리하여 메르타 할머니의 뛰어난 언변과 열의에 노인들은 모두 은행강도가 되기로 결심했고 실행한다.

   쭈뼛거리지도 않고 아주 유머러스하고 시종일관 이게 뭐야, 싶은 이야기가 바로 감옥에 가기로 한 메르타 할머니의 감옥에 가기 위한 처절한 은행털이 계획과 실행 과정에 담겨 있다. 황당하고 무모한 계획, 그러나 끝까지 실행하는 할머니들의 치열한 의지. 그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인한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이 이 이야기의 장점이라고 할 것이다.

  일부러 그러기라도 한 듯, 아니면 운이 이들 노인들에게 전해 내려온 듯한 전개 속에서 황당한 범죄를 저지르는 이 노인들의 범죄 행각의 성공 여부에 주목하게 되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노인들이 ‘돈’을 노린 범죄를 꾸미지 않는다는 진심만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계속 그렇게 되겠지라고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니 노인들 역시도 경찰서에 찾아갔을 것이다.

   스웨덴이라는 나라가 가지는 세계 제일의 복지국가라는 이미지는 창문을 넘어야 했던 할아버지나 감옥에 가기로 결심하는 할머니 얘기에서 거듭 놀라움을 겪는다. 시설이나 여러 가지 제도가 잘 정비되어 있을 텐데. 다이아몬드 요양소와 같은 규칙은 이 요양소만의 특성이고 원칙이겠지, 다른 곳으로 옮기면 되지 않을까. 전반적으로 잘 정비된 복지제도에서 이분들이 왜 이렇게 적응하지 못하시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메르타는 유난히 빨리 늙어 갔고 가정을 갖는 꿈은 자연히 포기해야 했다. 아이가 없다는 슬픔은 너무나 큰 것이었지만 메르타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는 슬픔과 고통을 숨기고 살았던 것이다. 우리는 모두 웃는 얼굴 밑에 참으로 많은 것들을 숨기고 산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웃음에 얼마나 잘 속는가! p45


   나 역시 속았다. 어느 곳보다 잘되어 있다는 복지국가 스웨덴이라는 이미지에 가려 좀더 세밀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나라에 비해서는 너무나 월등하다보니 스웨덴이 복지제도의 완벽한 이상이라 착각한 것이다. 물론 지금으로선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낙엽 지는 황혼기를 맞아 인생을 조금 즐겨 보고 싶은 노인들이 강도가 되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면 그 사회는 분명 뭔가 잘못된 사회임에 틀림없다. p208


  차이가 있다면 그것이다. 소설 속 스웨덴 요양소의 풍경을 살펴보면 어쨌든 노인들은 기본적인 생계에 대한 불편함을 토로하지 않는다. 물론 식사 외에 간식이 없고 더 풍부한 메뉴에 대한 요구가 있지만 형편없이 열악한 시설에 대한 불만과 학대, 억압으로 인한 인권유린이나 착취에 힘들어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노인들이 강도가 되는 이유가 대한민국이 “기본적인 의식주가 열악하기 때문에” “착취와 억압으로”라는 이유가 더 많다면 스웨덴에선 “자유!”에 더 초점이 맞춰진 느낌이다.


지금 세상은 무언가 비정상적이다. 그렇지 않은가. 노인들이 나쁜 범죄를 저지르면서야 비로소 자기들 속에 숨어 있던 힘을 체험하고 존재를 과시하고 있지 않은가. p244 


  매슬로우가 인간의 욕구에 대해 말한 5단계가 떠오른다. 인간은 기본적인 의식주와 안전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이것들이 충족되어야만 자아존중과 자아실현의 욕구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런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를 대입하면 우리의 메르타 할머니는 이미 다른 것은 충족되어 있고 자아실현의 욕구를 너무나도 펼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노인’이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경제적인 활동이 없는 존재로 이미 신체적인 활동력이 떨어지는 존재로 그들을 치부함으로써 자신들의 존재를 제대로 ‘보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엄마는 마침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한 거야! 엄마는 이전에는 늘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자기가 아닌 남들의 마음에 들려고만 했지.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완벽한 아내와 엄마가 되기 위해 좋은 교육을 받아야 하며 그런 다음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세대에 속해 있었던 거지. 아빠는 그런 엄마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며 지냈는지 전혀 헤아리지 못했어!”

 “맞아, 너도 알겠지만, 되돌아보면 아빠는 자기 생각만 하고 살았어. 이제 엄마는 잃어버린 자기만의 삶을 되찾으려고 하는 거야.”p276


  제도의 필요성은 인간의 필요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 제도는 인간의 필요를 뛰어넘는다. 오히려 제도가 인간의 필요를 억압한다. 제도가 순기능을 역행하여 역기능으로 고착되면 인간은 한없이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지금 사회는 비정상적이다.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닌 기본적인 의식주는 물론이거니와 안전에도 위협받고 있는 이 사회는 분명 잘못되었다. 노인들이 나쁜 범죄를 저지르도록 내모는 이 사회는 정말이지 잘못되었다. 인간의 욕구를 한없이 1,2단계에 머물도록 만드는 이 사회에서는 산책을 하루에 한번 가기를 원하던 메르타 할머니처럼 하루에 세 끼를 먹을 수 있어서 감옥에 가기를 원하는 다른 메르타 할머니를 만들어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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