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것과의 결별
구본형 지음, 윤광준 사진 / 을유문화사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


  지금까지 몇 번의 개정판이 나온 <익숙한 것과의 결별>은 IMF 당시를 휘감은 베스트셀러다. 누구랄 것도 없이 혼란과 울분과 자괴의 분위기에 듬뿍 젖어 있을 때, 분위기의 반전을 일깨운 책이다. 아마도 그 상황을 타개하기를 원하던 모든 이들의 마음이 이 책 속에서 희망을 발견했던 건지도 모른다.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하려는 의지가 남아 있던, 어떤 힘이라도 끌어 모으려던 사람들에게 건네진 ‘지푸라기’ 아니었을까.

  분명 IMF는 위기였고 상황의 변화는 연쇄적인 변화를 요한다. 그 변화의 방향과 농도를 찾아가는 것은 한편으론 개인의 일이다. 하지만 IMF 같은 상황에선 한 개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변화의 방향과 농도를 정리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 책은 그 때에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혁명적’ 변화를 역설했다. 변화에 대처하는 방법은 그보다 더 ‘변화해야 할 것’이라는 점을 그러나 변화에 대처하는데 주저하고 망설이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 변화의 방향과 농도를 찾는 방법을 얘기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한국IBM에서 경영혁신 팀장으로서 자신의 업무 경험을 바탕으로 한 변화경영의 방법들을 여운있는 글로써 표현해낸다. 이 책 뿐만 아니라 저자의 책 전반이 자기계발서로 분류되지만 이 갖는 도식적인 글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마냥 선동적이지도 않고 누구나 쉽게 아는 것을 장황하게 떠들어 대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니가 잘 해야지”하는 식의 찍어 누르는 듯한 압력도 질책도 없다. “난 이렇게 잘했어”와 같은 자기 과시 또한 없다.

  깊은 생각과 깊은 공감의 힘을 느낄 수 있는 글들로 사람들이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감소시킨다. 동시에 ‘변화’에 대한 의지를 가능케 하고 싶은 욕구를 증가시키며 의지를 독려케 해준다. 그런 힘이 조용히 파고드는 글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미풍처럼 조용하고 잔잔하게 다가오는 글귀들이 많은 독서와 사색의 힘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려주며 다정한 이의 위로 같기도 하다.

  이 책이 1998년의 시간에 절대적인 힘을 가진 책이었다고 지금 읽는다고 해서 그 전하고자 하는 의미가 다르진 않다. 그때에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화두가 되고 있는 ‘변화’에 대해 또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다. 역시 IMF 만큼의 격랑이 일고 있는 나라이고 세계이니까.

  여전히 변화는 ‘나’ 하나만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서 달라질 리 없는 사회에 나 혼자 변해서 이 세상에 맞춰가리라는 생각은 적극적인 생각인가. 아니면 패배주의적 생각인가. 기회주의적인 건가. 변화는 안팎으로 필요하다. 세상에 맞추어 변화하겠다는 것을 잘 생각하고 잘 골라내야 한다. 그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권력의 세상인지 아닌지를.


‘하고 싶은 일을 하다 보면,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없다’는 잘못된 깨달음으로 우리를 몰아간 것은, 우리를 기존의 체제에 묶어두고 통제하고 싶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세상이란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일’과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때때로 우리 부모의 모습으로, 선생의 얼굴로, 직장 상사의 이름으로, 그리고 친구의 한숨 섞인 충고로 우리를 설득시켜 왔다. 그들의 말을 따르는 것은 어쩌면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무난한 처신이었는지도 모른다. p15


  우리의 변화는 나의 변화와 세상의 변화를 같이 생각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변화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고선 ‘변화’의 긍정성은 상쇄될 뿐이다. 내가 변화해야 한다는 혁명적인 변화에의 욕구는 ‘내가 잘 살기 위해서’인 것을 부정할 순 없다. 그러나 그것이 ‘나만, 나라도 잘 잘기 위해서’라면 변화의 종착역에 서 있을 때 환하게 웃을 수 있을까. 나만 달라져서는 안되는 상황일 때, 우리는 진정 ‘변화의 대상’에 대해 ‘변화의 목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욕망이 반사회적일 때, 인간은 불행해진다. ‘욕망은 개인적인 것이므로 사회 속에서 필연적으로 부딪히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통제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개인이 가져야 할 생각이 아니다.

그것은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을 주장한 홉스로부터 시작된 지배자들의 논리이다. 자율성이 없는 사회가 붕괴하는 것은 외부에서 눌러오는 욕망에 대한 압살 때문이다. 욕망이라는 걷잡을 수 없는 에너지에 대한 통제와 관리는, 각 개인의 몫이다.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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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에 대한 연민과 위로


백영옥, 애인의 애인에게


  백영옥 작가의 그들은 스타일리쉬한 느낌이다. 제목이나 느낌 때문에 그런 듯하고 패션잡지에서 일한 작가의 이력 때문에 은연 중 그런 생각이 굳어진 것도 같다. 작가의 첫장편 <스타일>이 출간될 시기에 한창 칙 릿(Chick Lit, chick + literature)이 인기를 끌던 시기였다. 아니, 작가가 이런 소설을 써서 한국의 칙 릿 분위기를 이끌은 건가. 칙 릿 소설은 젊은 현대 여성, 대체로 20대 여성 독자를 겨냥한 소설이라 하는데 이런 스타일의 책 중엔 마음에 드는 작품도 있었고, 전혀 그렇지 않은 작품도 있었다.

  백영옥 작가가 기억 속에 특별히 자리한 것은 칙 릿의 선두 작가라서가 아니었다. 어쩌다 읽게 된 작가의 단편 제목 때문이었다.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제목이었다. 이 책 출간 당시(2007년 봄)는 언론을 통해 지속적으로 저 말을 달고 사는 분위기였던 것을 기억하기에 그것을 소설화 한 작가에게 놀랐던 기억. 이 작가는 정말 트렌드에 밝구나라고 느끼기도 했고. 작가의 의도는 무엇인지 사실 글을 보면서 파악하기엔 애매했던. 작가 역시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 소설을 쓴 건 그저 그런 이야기들이 나오기 때문이고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걸 원치 않는다고 했던 듯한데 언젠가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이 소설을 다시 찾아보려니 제목이 바뀐 듯 했던 것도 같아 이상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있는데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생각해보니 그때엔 저런 소설 제목도 그런 이야기도 쓸 수 있었고 당당히 출간이 되는 시대였구나! 검열이란 것이 존재하지도 언론이든 정치권에서든 문제로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지도 않는 시대였기도 한, 온전히 문학은 문학으로서 바라보는 시대였구나 싶기도 하고. 아니면 2007년은 대선이 있던 시기였으니 세기말적인 분위기로 묻혀진 것인가, 아니면 오히려 부추겨진 것인가. 어쨌든 새삼, 검열이 일상화된 시대에 저 소설의 제목이 너무나 달리 느껴진다.

  


  이 책은 <애인의 애인에게 들은 말>이라는 단편을 확장시킨 것이다. 이 단편은 여러 작가들과 함께 여행 소설 형태로 출간된 책에 삽입되어 있다. 짝사랑하는 남자를 알고 싶어 서블렛을 이용하여 남자의 자취를 느끼는 여자, 이정인의 이야기를 그려낸 이 단편의 뒷이야기가 궁금한 사람이 많아 장편으로 만들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리고 제목은 <애인의 애인에게>로. 이정인이 바라보고 서술하는 이야기에서 더 풍부하게 나아간 이야기의 시점은 2부와 3부가 첨가되어 이정인이 짝사랑하는 조성주의 아내 장마리의 시점이 2부에서, 조성주가 짝사랑하는 김수영의 시점의 이야기가 3부로 전개된다. 세 사람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주요 등장인물은 그렇게 4명이 된다. 먹이사슬이 아닌데도 이렇게 물리고 물린 관계의 양상을 보다 보면 아련하고 쓸쓸한 맛이 맴돈다. 젊은 청춘들의 어긋나는 사랑의 작대기는 그들이 가진 아릿한 사연을 서로에게 품어주는데 사용되지 못한 채 서로를 밀어버린다. 우습게도 표면적으로 보면 한 남자를 사랑하는 세 명의 여자 이야기다. 무대는 뉴욕이고 이들은 예술가들이고.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서 생기는 외로움과

사람을 좋아해서 생기는 서러움 중 어느 것이 더 힘든 건지 모르겠다. p18


  분명 어긋난 사랑의 이야기인데 내가 이 이야기를 읽으며 떠오른 생각은 분명,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랑에 적극적이구나, 그런 생각이었다. 아마도 누구보다 이를 대표하는 이가 이정인이다. 정인은 짝사랑하는 성주를 조금이라도 알고 싶어 그가 한달간 세놓은 집으로  들어가는 적극성을 보인다. 정인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서 생기는 외로움과 사람을 좋아해서 생기는 서러움 중 어느 것이 더 힘든 건지 모르겠다”라고 말하는데 아마도 후자를 선택하기로 한 건가. 아이러니하게도 그 공간에서 정인은 성주의 흔적 위에 놓인 그의 아내 마리의 흔적에 점점 끌려간다. 그의 아내에게 느끼는 연민은 아마도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가 아니라 또다른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쯤되면 세 여자의 감정을 쥐고 있는 조성주가 궁금하다. 아내가 있고 사랑하는 여자가 있으며 자신을 짝사랑하는 여자가 자신의 주위에 맴돌고 있는 남자. 포토그래퍼란 직업을 가진 이 남자는 예술가의 성공에 집착하는 남자로 그것을 위해 마리에게 적극적이었다. 그런 욕망과 병행한 또다른 욕망이 그에겐 있다. 남편이 있는 여자에 대한 사랑이다. 조성주가 사랑하는 여자 김수영은 큐레이터로 결혼 10년차지만 계속된 유산과 더불어 불행한 결혼생활에 지쳐 있는 중에 조성주의 끈질긴 구애에 흔들린다. 이들 등장인물들 모두 예술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열정적인 듯 혹은 무모한 듯한 기질을 예술가적 기질이라 뭉뚱그리면 너무나 단순하고 단정적인 편견이겠지. 


자기 결혼이 영주권 획득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때문이었다는 걸 법적으로 증명해야 하는 남자가 있어요. 아마 그건 가장 숨기고 싶은 사적인 경험을 온갖 공식적인 서류들로 증명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일일 거예요. 여전히 사랑하지만 남편이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그와 헤어져야 한다고 결심한 여자가 있어요. 그런데 만약 이혼 소송 중인 남편이 이미 깨져버린 사랑이 진실한 사랑이었다는 걸 법적으로 증언 해달라고 부탁한다면 그건 어떤 고통일까. 남자의 변호사가 하루에도 몇 번씩 도움을 요구하듯 끝없이 전화를 해댄다면. 남자와 여자.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힘들고 괴로울까. p258

      

  글쎄. 누가 더 힘들고 괴로울까. 여기 등장하는 이정인, 장마리, 김수영, 조성주. 그들 각자는 닿지 않는 욕망 속에 힘들어 하고 충분히 괴로워 한다. 뉴욕이란 도시에서의 그들의 삶은 화려한 도시 뉴욕만을 생각하며 보지 못한 뉴욕 골목의 풍경처럼 감춰진 속내가 보이는 것과는 다른 삶들이었다. 사랑이란 이토록 제도와 어긋난 미묘함을 안고 있다. 그렇기에 이 뉴욕의 연인들은 어긋난 사랑의 감정을 품고 있는 잔뜩 쓸쓸한 표정으로 각인된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연민을 이용한다. 사람은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의 감정을 손쉽게 착취한다. 나의 부모님이 그것을 ‘상황이 거짓말하게 한다’라거나 ‘철든다’라고 말하는 걸 들었을 때, 나는 그 말의 뜻을 몰랐다. 진실과 진심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 것인지도. p100


  그럼에도 놀라운 것은 이 애인들의 행동이다. 아마도 가장 관찰자적인 눈으로 조성주를 바라보기만 할 것 같은 이정인은 뉴욕 조성주의 집에 찾아 들어가고 그의 감정, 불륜까지도 알아낸다. 조성주는 어떤가. 사랑인듯 열병처럼 행동하며 자신의 성공을 위해 장마리를 이용하는데 적극적인 남자. 그런 적극성으로 또다시 김수영에 대한 사랑을 갈망하는 남자. 거침없이 제 욕망을 발산하는 그런. 이들은 자신의 마음을 감추고 속으로 울부짖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엔 아주 미세하게 자신의 마음을 애인의 애인에게 툭, 뱉는다.


건너편 창틀에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여전히 길가를 내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 누구의 사랑도 이어지지 않는 저녁 속에 앉아 있었다. 그런 것들이 더 이상 서글프지 않았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기 때문에 나 이외의 누구도 상처받지 않을 것이란 점에서 짝사랑은 선한 인간들이 선택하는 자학이며 자책이니까. p36


  작가는 “실패로 끝난 누군가의 사랑 이야기는 아무리 길어도 귀 기울여 듣게 된다”라고 말한다. 그런 것도 같다. 하지만 고약한 심보로 듣는 것이 아니라, 안타까움과 연민으로 이야기를 듣는다. 어쨌든 누군가의 감정에 대한 위로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내 감정에 대한 연민과 위로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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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그닥' 정상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는



 도시와 나-소설로 만나는 낯선 여행


성석제·백영옥·정미경·함정임·서진·윤고은·한은형


  여행에세이가 여행지에서의 감상과 안내를 서술하는데 치중되어 있다면 이 책은 ‘이야기’에 힘을 쏟는다. 낯선 여행지에서 만나게 되는, 만들게 되는.

  성석제, 정미경, 함정임, 백영옥, 서진, 윤고은, 한은형. 연령과 성별과 문단 경력이 각기 다른 소설가들은 각각 떠난 일곱 개의 도시에서 이야기를 가지고 돌아온다. 배경이 해외라는 것, 여행이 깃들어 있다는 것, 낯선 도시의 느낌이 가미되는 것, 이런 특징을 가지고서 일곱 명의 소설가들은 어떤 이야기들을 엮어 낼까. 그들이 찾아간 도시에서 각기 다른 것에 시선을 두고 써내려간 일곱 개의 소설을 만나면 생생한 여행에세이와는 또다른 느낌으로 낯선 도시를 여행하고 있는 나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성석제 작가는 프랑스 아비뇽을 보여준다. 주인공은 연극제에 초대받아 극단과 함께 아비뇽을 방문한다. 이곳에서 주인공은 홀로 자전거 여행에 도전한다. 성석제 작가 특유의 입담으로 주인공의 자전거 모험의 익살스러움을 잘 보여주는데 주인공이 희곡작가이기에 더욱 더 연극적인 느낌이 든다. 작가의 유도대로 자연스레 주인공의 험난한 자전거 여행에 동참하며 프로방스의 모습을 훑는다. 결국 자전거로 통과하지 못하는 노후화된 다리를 맞닥뜨리고 마는 그런 자전거 여행을.

  백영옥 작가의 '애인의 애인에게 들은 말'은 미국 뉴욕의 도시를 보여준다. 뉴욕의 서블렛 문화를 통해 짝사랑하는 남자의 자취를 엿보고 싶어하는 여성의 이야기가 감각적으로 그려진다. 스토커 같은 여성의 모습과 기이한 부부의 모습, 인간의 관계란 정말 다양하구나 싶은 이 이야기는 관찰자적으로 지켜보며 내면의 일렁임이 짝사랑하는 남자에게서 그의 아내에게로 옮겨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소설의 반응이 좋았던지 작가는 이 단편에 이야기를 더 엮어 장편소설 <애인의 애인에게>를 만들었다.  

  정미경 작가는 일본 도쿄로 향한다. 공항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남녀가 나오시마 섬으로 동행하는 여정을 그린 <장마>. 여행이란 그런 것인지, 여자의 특별한 사연과 분위기에 이끌린 남자는 제 일정은 잊어먹고 여자의 여행 경로에 동승한다. 일본 공연예술 부토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남자의 여행 일정이었다. 이 부토에 대한 묘사가 남다르게 다가왔는데, 두 사람 모두 이 부토를 찾아 관람하고 서로의 일정을 오가며 서로를 이해하며 마음을 나누게 되는 이야기다. 한번쯤 우연히 만난 낯선 이와의 교감에 대해 꿈꾸게 되는 것, 그것도 여행의 한 부분인 것도 같다. 이것 역시 영화와 드라마가 주입해 놓은 건가.


네온의 명멸처럼 짧지만 환한 어떤 것이 가슴속에서 반짝 빛났다. 지나온 삶에서 우연히 다가온 따뜻하고 빛나는 시간들은 언제나 너무 짧았고 그 뒤에 스미는 한기는 한층 견디기 어려웠다. 그랬다 해도, 지금 이 순간의 따뜻함을 하찮게 여기고 싶지 않다. p119 정미경, <장마>


  함정임 작가는 여행을 많이 떠나고 여행책을 많이 쓴 모양이다. 정미경 작가는 프랑스 브장송으로 간다. 그곳에서 사라진 남편의 자취를 찾아 호텔들을 순례하는 여자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여자에게 매혹된 프랑스인의 모습도.

  윤고은 작가는 스페인의 세비야에서 아버지의 존재를 찾는 딸의 모습을 그려보인다. 주소 하나만을 가지고서 지난 아버지의 흔적을 찾는 주인공의 세비야를 돌고 돌며 흔적을 찾는 모습이 애잔하게 다가온다.

  서진 작가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최초로 머물렀었는데 그 기억을 가지고 <캘리포니아 드리밍>을 전개한다. 꿈을 찾아 로스앤젤레스를 가지만 향수만 쌓아가는 88만원 세대의 안쓰러운 모습들을.

 한은형 작가는 아프리카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로의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작가 자신은 이 도시를 방문한 적 없다 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온전히 머릿속에서 상상력으로 그려낸 것이다. <붉은 펠트 모자>라는 제목으로 2010년 시민혁명으로 운명이 바뀐 튀니지 고위관료의 이야기를 상상으로 풀어내고 있다. 소설을 읽으며 튀니스의 모습을 그려보는 재미가 있었는데, 결국 작가도 그려낸 것이라니. 물론 수많은 자료를 참고하여 형상화 한 것이겠지만.

  책 뒷부분에는 소설가들의 인터뷰를 싣고 있다. 이들의 여행경험과 여행에 대한 정의를 이야기하는데 서진 작가의 여행의 의미가 딱 눈에 띈다.


  우리가 사는 삶이 '그닥' 정상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는 과정.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여행이란 잠시 제정신을 다른 곳에 두고 머물다 오는 듯하다고. 어디를 가든. 그래서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 정신을 차리는 일은 더딜 때가 있다. 아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일이 제정신을 버리고 사는 거였던가. 어쨌든 여행에서 마냥 그곳에서이 사건과 감상이 아니라 이 소설들처럼 상상의 세계 속에 나를 두어 보는 일도 재밌으리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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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


이현석, 여행자의 인문학 노트 - 스페인에서 인도까지,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여행지의 아름다운 경관을 사진에 담고 그 속에 함께 풍경이 된 나를 사진 찍어오는 일이 여행의 시작에서 끝을 장식하는 외향이라면 여행에서 느끼는 모든 생각과 느낌들은 내향이 될 것이다. 이 책은 외향보다 내향이 가득해서 책을 덮어도 시각적인 사진 한 장 없음에도 보이지 않는 의미의  끈이 계속해서 나오는 것만 같다.

   


 길을 오래 걷는다면 비움은 미학의 차원을 넘어 생존의 문제가 됩니다. p6


  사색적인 이 여행의 기록들은 저자의 여행의 이유와 닿아 있을까. 배낭여행이 계속되면 배낭은 간소해질 수밖에 없는 이 당연함 속에 저자의 배낭은 가벼워졌고 그만큼 저자의 가슴은 채워졌다. 십 년의 시간 틈틈이 여행을 다닌 저자는 그곳에서 타인들을 만나며 생생히 살아올 때의 전율이 글들을 쓰게 했다. 현지에서 편지로, 엽서로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전하기도 했고 고스란히 그때의 기록들을 서랍 속 노트에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여행이 아니었다면 떠나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많은 사람들. 그들은 저자에게 사회와 문화와 역사에 대해 재인식할 수 있도록 했다. 일상에 한정되어 갇힌 인식의 벽을 넘는 것, 그것이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자유의 느낌이라고 저자는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생각들을 담은 책이기에 여행지에 대한 정보도 여행에 대한 풍경도 사진도 없다. 오직 그곳에 역사와 현재를 아우르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소제목 역시도 그곳에서 만난 이들의 이름으로 하고 있다. 그 자신, “누군가를 기억하는 일(보유)은 누군가를 잊어가는 일(망각)인 셈(p104)"이라 말하지만 그가 선택한 건 오롯한 기억의 틀 안으로 그들을 들이는 것이다.

  여러 모로 “이게 어떻게 여행책이야?”라는 누군가의 소리가 들릴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일정도 장소에 대한 소개도 시간적 순서에도 의하지 않은 이 책이 오히려 가보지 못한 나라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그릴 수 있도록 도와 준다. 더불어, 눈에 현혹되지 않은 채 나 역시 저자와 같이 어떤 것들, 삶에서 이루어지는 면면에 대한 재인식의 시간을 경험한다.

  가령, 스페인의 교역의 중심지이자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가 전파되어 있는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문명의 충돌에 대해 생각한다. 그 대립의 시기와 이유를. 그리고 그로 인해 벌어진 상황들에 대해 좀더 깊게 생각한다. 한마디로, ‘부질없이’라고. 그것은 전쟁으로 이어져 각각 승패를 거듭하며 팔백 년을 이었기 때문이다.

  우즈베키스탄에선 김병화박물관과 마주한다. 연해주에서 강제 이주되어온 조선인들이 농업노동인력으로 일했고 김병화는 그 리더였다. 이 곳에서 저자는 우리의 ‘디아스포라’에 대해 가지는 협소한 사고에 대해 생각한다. 그렇기에 적지 않은 이들이 그들에게 상처가 되는 말들을 함부로 내뱉고 대한민국의 틀 안에서 훈육된 국가주의의 사고의 수준에서 행동하고 있다고. 수많은 침략을 당하는 역사에 우리나라 역시 수많은 디아스포라들이 있다. 더구나 남북으로 분단된 이 상황에서 더더욱 떠돌 수밖에 없는 수많은 이들이 있지만 우리가 이들을 대하는 태도는, 권력자들이 이들에 대하는 태도는 어떤가. 일상 속에서 사는 데 지장없기에 스스로 의심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며, 그래서 저자에게는 일상을 벗어난 시공간에서 게으른 관념의 틀을 산산조각 내준 풍경을 잊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사하라의 사막 마을 시와에서 사구 넘어 사막의 지평선을 바라보는 저자는 지평선으로 넘어가는 노을이 절경인 풍경 앞에서, 아름다운 풍경에 대한 찬사가 아니라 규준과 척도에 대한 개념을 떠올린다. 또한 이것을 사회와의 연관성과 연결짓는다.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는 미담은 늘 숭고하고 아름답게 그려진다. 환경이 가능성을 구속하고 있는 사회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 ‘대단한 이들’의 뒤편에는 낙오된 수많은 이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렇게 잉여가 된 이들이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상품으로 환치되고 포장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지금 이곳에서 그들을 주목하는 이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되기란, 인간의 영역을 침범한 들개가 등짝을 맞는 일만큼이나 흔하고 쉽게 일어난다. 작은 사막 마을 안에서 한계를 가지고 살아온 삶은 다재다능하고 리더십도 있는 그가 더 넓고 더 나은 세상으로 나가려는 의지를 꺾었을지도 모르겠다. p77


  저자가 현지인들을 만나 그들의 생활 속에서 이끌어내는 사유의 면면을 보면 그것이 단지 ‘사유를 위한 사유’가 아님을 알게 된다. 그것조차 철저하게 생활이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관념, 그것은 생활을 이끌고 생활 또한 관념을 이끌고 그렇게 서로가 맞물리기에 중요한 요소이다. 내 삶의 진정을 위한 사유의 여행은 저자의 여행 내내 계속된다. 저자가 소제목으로 기억하는 나라의 저자가 만난 사람들은 그를 생각 속으로 이끌어주는 현지인들이다. 그들은 그를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기도 하지만 그 나라의 삶이 어떤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도 하며 어떤 때는 저자가 생각할 수 있는 포인트를 집어주기도 한다.

  저자가 여행한 나라들을 살펴보면 스페인, 우즈베키스탄, 홍콩, 베트남, 캄보디아 등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의도한 바는 아닐 지 모른다. 이들 나라들은 모두 전쟁을 겪었고, 사실 역사에서 그 어떤 나라도 전쟁을 피해갈 수 없었다. 그 점을 생각하면 전쟁의 상처가 없는 나라는 없는 것이다. 그 전쟁의 기억에 대한 시간 차이가 있을 뿐. 전쟁의 대상이 다를 뿐. 같은 경험을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저자가 이것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그래서 저자는 도미야마 이치로의 ‘전장의 기억으로부터 인지된 폭력의 예감’을 생각한다. 불확실함 속에서 권력의 파괴성을 과거로부터 배운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는 권력의 주체로 인해 폭력 또한 예측불가이므로 국가에 대해 자발적이 되고 만다는 것을.


역사는 살인사건처럼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 그것이 피와 땀으로 얼룩진 근현대사라면 더욱 그렇다. p262


   세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와 다르지 않던가. 저자와 마주친 사람들은 이 역사가 남겨놓은, 권력자들이 지져놓은 모순과 삶의 피폐성을 보여주는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그런 존재들은 있었다. 그래서 저자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 나라의 역사, 사회적 배경을 떠올렸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거듭 생각했다. 나아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했다. 다른 나라의 여행객이 찾아오면 자신의 나라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려 하지만, 그러나 정작 아름다운 풍경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들의 모습들. 저자의 이 고민의 시간들은 아름다운 풍경이 되지 못하는 ‘사람의 삶’을 더욱 철저하게 보여준다. 그래서였던가? 사진도 없고 그들의 이름도 가명이 된 것은.


'연대와 동정의 차이‘를 들이민다든가, ’나눔과 봉사의 차이‘를 들이민다든가 하는 것은 오히려 합리성에 경도된 스스로가 낳은 모순이 아닐까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여행 중이든 일상에서든 어디에선가 마주칠 수밖에 없는 구걸과 동정에 대해 고민하는 동안 쌓아온 논리는, 동정은 연대보다 열위에 있으며 계급을 고착시키는 반동적 행위라는 것이었다. 그런 논리에 따라 구걸에 요지부동 무반응이었던 나는 현실의 ’고통‘들을 대면하면서 그것이 관념적으로 이성을 따르는 이의 어쭙잖은 형식이 아닌가를 의심했다. p283~284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하기 전에, 어쨌든 생각과 고민은 인식의 확산을 한다는 점에서, 일단 문제를 인지한다는 점에서 대안을 위한 첫걸음이 될 수 있다. 그것이 관념적이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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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욕구는 한국이 싫어서


   올림픽에 각 나라의 선수단의 행렬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줄기차게 등장하는 피켓을 보며 ‘저긴 어디지?’ 하는 나라들도 등장한다. 그렇게 수없이 많은 나라가 있는데 가본 곳은? 조금이라도 아는 곳은? 참……. 80일간의 세계일주도 가능한 시대지만 내가 그것이 가능하지 못하는 이유는 셀 수 없이 많다. 이유없는 사람은 없겠지만 이유가 있거나 없거나 세계를 누비는 사람도 많다. 이 세계는 수많은 나라에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만큼 여행, 다른 곳을 방문하는 일은 무한대로 일어날 일이다. 그 무한대 속에 역시나 증가하는 여행기는 크게 두 가지 특징이 있는 것 같다. 여행지에 대한 소개 책자가 아니라 순수 여행기, 여행에세이의 특징은 첫째 누가 썼느냐다. 그 글을 쓴 이가 아주 유명한 사람이거나 일반인이다. 너무도 당연한 걸. 그럼 일반인의 여행기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 아주 특별하게 ‘여행을 떠난’ 이야기다. 그러니까 본질적으로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여행기라 분류되는 여행의 에세이가 가진 차별성이 사실 없더라는 것이다.

   유명한 사람의 여행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의 여행이든 동경을 일게 만드는 여행을 떠나고 그 곳에서 자신의 감상을 가지고 그것을 서술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여행기가 하고자 하는 말은 늘 ‘나는 그곳에서 나를 찾았다’, ‘여행은 전환과 변화의 기회다’, ‘여행을 떠나지 않으면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떠나라, 여행을 가보지 않고는 말하지 말라’. 뭐, 이런 이야기를 특별히 감상적인 문체로 글로 쓰고 있다.

   그 기록을 읽는 독자에게는 특정한 곳에 가기 위한 참고용이거나 대리만족을 얻기 위함이거나 유명하다니까, 베스트셀러라니까 하면서 책을 읽지만 가끔 타인의 여행기는 씁쓸한 만족을 남긴다. 여행기란 그래서인지 나의 여행의 기록이 아닌 다음에야 글쓴이들 자신의 힐링이 될 뿐 나의 힐링이 되지는 못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취향, 스타일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여행을 떠난 두 사람이 여행스타일이 맞지 않아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여행기에 대한 감상 역시도 책들과 마찬가지로 스타일이 있으니까, 같은 뉘앙스를 풍기는데도 어떤 글은 와닿고 어떤 글은 그저 그렇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스타일을 얘기하니 여행기에 대한 나의 취향은 여행에 대한 소개와 감상보다는 인문학이 가미된 책을 더 선호하는 듯하다. 다양한 사람들이 어떻게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지 그곳 풍경을 바라보며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이야기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어떤 여행기는 여행 자체에 대한 이야기보다 오히려 여행을 떠나기 전, 여행을 결심하기 전의 이야기에 솔깃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또한 기억에 남는 여행에세이 또한 흐릿한 이유가 될지 모른다. 저마다 사연을 가지고 탄생한 이야기일 것이지만 모두 그런 이야기를 향해 가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기억에 남는 여행에세이가 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스페인 기행>이나 괴테의 여행기록처럼 문학작가들의 여행 기록은 인상적으로 남는다. 이들이 작가라는 점 때문인가 생각도 했지만 또한 시대적인 묘미도 있는 듯하다. 최근의 여행이 아니라 그들이 떠났던 시대의 느낌을 아울러 볼 수 있기 때문에. 읽은 여행책 중 좋은 느낌이었던 건 <여행자의 인문학 노트>였다. 

작가도 낯선 이름이었고 처음 책을 쓴 사람이었지만 여행에 관한 책 중에서 다시 읽고 싶은 몇 안되는 책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런 스타일을 내가 선호하나.

 가을이 되었고 축제의 향연이다. 폭죽소리와 음악소리가 땅을 울리며 귀로 전해지는데 같이 마냥 즐겁지가 않다. 여행을 맘속에 품지만 발로는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를 또 생각하지만 맘속의 그 열망이 적극적이지 않다는 것이 이유인 듯도 하다. 아주 강렬한 열망으로 여행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면서도 미미하게 여행을 마음 속에 드리우고 있는 것은 여행이라기보다 그저 “떠남”에 대한 욕구라는 생각이 든다.

   마침 떠오르는 책이 <한국이 싫어서>이다. 이 책은 소설책으로 문학적으로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다. 문체며 전개방식이며 말들이 전혀 울림이 없었다. 그저, 책 제목만이 인상적이었다. 나의 스타일과는 역시 달랐다고 말하면 되겠다만 이 책이 그토록 열광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것을 보면 나만큼 한국이 싫은 사람들이 수두룩하고 이 얘기에 공감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이 떠남에 대한 욕구는 다른 이유 없이 한국이 싫어서이다. 그러니 여행에 대한 욕구와는 다른 종류의 욕구이다. 축제의 음악이 난무하는 현장에서도 이탈하고 싶은 마음 가득한데 이 난장판인 나라를 뜨고 싶은 마음이랴 오죽하랴. 한국의 뉴스가 들려오지 않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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