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너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호밀빵 햄 샌드위치 Ham on Rye (1982년)

찰스 부코스키, 박현주 옮긴이, 열린책들, 2016.


  자연스레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 생각난다. “호밀”이 들어간 제목도 그렇거니와 남자 아이가 등장하는 성장소설이라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작가 자신이 그 당시 자신이 쓴 소설 중 제일 좋아하는 작품으로 꼽았고, 평론가들에게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물론 독자들도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는 작품이라고 한다. 찰스 부코스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헨리 치나스키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인데, 작가의 분신인 주인공을 내세운 찰스 부코스키의 이야기라고 대체로 보고 있는 모양이다. 작가의 어린 시절의 모습이라 생각한다는 건, 거리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묘사한 작가의 거리 속에서 살아온 작가의 모습, 그런 이야기를 쓰는 작가의 어쩌면 근원과도 같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면서도 아이의 이야기이기에 거칠게 표현하는 작가에게 있어서도 조금은 완화된 표현과 연민과 그리움이 깃든 언어로 표현되지 않았을까.

  어린 헨리 치나스키가 겉도는 삶을 살아가는 시초는 역시 사정에서부터 시작한다. 어린 소년은 그저 끔찍하기만 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아버지도 끔찍하고 교실도 끔찍하고,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이 끔찍하기만 하다. 또한, 그 자신 역시도 끔찍함의 대상이 된다.


바깥, 뒤쪽 블라인드 사이로 아버지의 장미가 자라는 것이 보였다. 빨갛고 하얗고 노란, 커다랗고 탐스러운 꽃송이들이었다. 해는 아주 낮게 걸렸지만 아직 지지는 않았고, 마지막 해조차 아버지의 소유물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해는 아버지의 집 위로 비치니까 나한텐 아무런 권리도 없다는 기분. 나는 아버지의 장미 같았다. 아버지의 소유물이지 내게는 아무런 권리도 없는 물건…….p51


  헨리의 아버지는 키우는 장미에겐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장미에겐 가시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장미는 장미하고만 어울릴 테니까. 헨리의 아버지는 가난하기 때문인지 가난을 경멸한다. 나아가 가난한 아이들과 헨리가 어울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리고 헨리보다 잘난 아이들과 비교하며 폭력을 행사한다. 어머니는 헨리를 적극적으로 구원하지 않는다. 어머니 역시도 폭력을 당하며 살고 있고 그런 모습을 헨리에게 보여주기만 할 뿐이다. 사랑받지 못한 헨리가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런 헨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것도 쉽지 않다. 독일 이민자 가정 출신이란 아웃과도 같은 말이다. 헨리는 친구들로부터 일찌감치 ‘아웃’의 대상이 된다. 이유가 없이도 미워하고 이유를 만들어 미워한다.

  그런 헨리가 가장 진정으로, 순수한 칭찬을 받은 것은 글짓기 수업일 것이다. 그러나 헨리는 그 글짓기가 상상으로 채워진 글이기에 이런 결론을 내린다.


그래, 사람들이 원했던 건 그거였다. 거짓말. 아름다운 거짓말. 그게 바로 사람들이 필요로 했던 것이었다. 사람들은 바보였다. 내게는 삶이 더 쉬워지겠지. p115


  다니던 학교에서는 쫓겨나고 아버지로 인해 형편에 맞지 않는 학교로 진학해 사는 모양 때문에 오히려 더욱 적응하지 못하고 소외감을 느끼는 헨리에게 또다른 위기가 다가온다면 그것은 이유모를 피부병이다. 그것은 학교를 그만둘 만큼 심각한 상태에 이르고 치료를 해도 나아지지 않는다.


드릴을 이용한 치료 과정은 끝이 없었다. 서른둘, 서른여섯, 서른여덟번. 더는 의료용 드릴에 대한 공포는 없었다. 결코 있었던 적 없었다. 오로지 분노뿐이었다. 하지만 분노도 사라졌다. 내 쪽에선 체념도 없었다. 오로지 혐오, 내게 일어났던 건 혐오뿐이었다. 아무것도하지 못하는 의사들에 대한 혐오였다. 그들은 무력했고 나도 무력했지만, 유일한 차이는 내가 희생자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집에 돌아가 삶을 누리고 잊어버릴 수 있었지만, 나는 꼼짝없이 똑같은 얼굴을 들고 다녀야만 했다. p210


  더욱 더 껍질 속으로 들어가고 냉소적이 되어가는 헨리에게 있어 그나마 위안이라면 책이라고 할까. 헨리는 다양한 작가들의 책들을 읽으며 자신의 영혼을 채운다. 헨리는 그것을 마법이라 표현한다. 비록 밤에는 불을 끄라고 호통치는 아버지로 인해 글을 읽을 순 없지만. 그렇게 밤에는 글을 읽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아버지가 어떡하든 헨리가 대학에 진학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아버지의 욕심과 허영 때문이긴 하지만 이곳에서도 헨리의 적응력은 발휘되지 않는다. 물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일한 백화점 물류창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교수에게도 학교에서도 낙인찍힌 자가 되지만, 세상은 또한 그러한 괴짜에게 기이한 이에게 관심갖는 이도 있는 법이다. 그렇지만 헨리는 사람들에게서 도망치고 싶었고 혼자 있고 싶었다. 어떤 것에도 아무 흥미가 없었고 종종 열등하다고 느꼈으며 가난했고 주욱 가난하게 살 것이지만 딱히 돈을 원하지도 않았다.


나는 세계사에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나의 역사에만 관심이 있을 뿐. 무슨 헛짓거리인가. 부모가 성장기를 지배하고, 마음대로 휘두른다. 그런 다음 자기 혼자 나설 준비가 되었을 땐, 다른 사람들이 제복을 억지로 입혀서 엉덩이에 총을 맞도록 내보낸다. p384


  그렇지만 그가 도서관을 다니며 책을 읽는 것처럼 그의 마음 속엔 글을 쓰고 싶은 열망이 있었는지 모르고, 그것을 헨리의 친구는 알아봤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 말을 한다.


「현실로부터 숨어 버리면 결코 작가가 될 수 없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바로 그게 작가들이 하는 짓이지!」 p375


  작가가 될 생각이 없다, 관심이 없다가 아니라고 하는 것에서 헨리의 마음이 드러난다. 적어도 글쓰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헨리가 지속적으로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다고 말하지만 헨리는 떠돌이 개에게도 늘 괴롭힘을 당하는 고양이에게도 이제 막 거미에게 잡아먹히려는 파리에게도 관심을 쏟았다. 이들 뿐만 아니라 장애인과 이민자들과 아이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들을 향한 헨리의 관심은 그들에 대한 연민이자 자신에 대한 연민이었을 것이다.

  헨리는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살에 대해서는 귀찮아지기만 할 것이라 생각한다. 지나치도록 세상에 대해 관심없다고 말하는 헨리에게, 조용하게 혼자 있고 싶다고 말하는 헨리에게, 자살은 귀찮다고 말하는 헨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원하는 건 3년 치 식량이 있는 콜로라도의 동굴이었다. 엉덩이는 모래로 닦으면 된다. 무엇이든, 이 지루하고, 사소하고 비겁한 존재 속에서 익사하지 않을 수 있는 무엇이든. p302


  일찌감치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며 학교와 사회에서의 위선적인 일들을 겪으며, 세상의 온기보다는 자신의 냉기에 더 익숙해 있던 헨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냉기를 세상의 위기를 허위를 날려버릴 따스한 온기였을까. 헨리에게 마법이 되는 책이 없었다면 헨리가 그나마의 삶을 버틸 수 있었을까.

  친구는 전쟁에,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헨리는 그를 배웅한다. 늘 혼자라고 생각하지만 길을 걸을 때면 혼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헨리는 멕시코 소년과 마주치며 기계로 권투 게임을 한다. 그리고 이겨야겠다는 기분을 느낀다. 그것이 왜인지는 모르지만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 여긴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그냥 중요하다고만 생각한다. 그것은 생존일까.


길을 걸으며 나는 혼자라 느끼지 않았고, 실제로도 혼자가 아니었다. 굶주린 잡견 한 마리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불쌍한 동물은 끔찍할 정도로 앙상했다. 갈비뼈가 피부를 뚫고 나올 듯했다. 털은 대부분 빠져 버렸다. 남아 있는 털도 마르고 뭉쳐서 군데군데 붙어 있었다. 그 개는 사람들에게 매 맞고 위협당했으며 버림받아 겁을 먹었다. 호모 사피엔스의 희생자였다.

나는 멈춰서 무릎을 꿇고 한 손을 내밀었다. 개는 뒷걸음질 쳤다.

「이리 와봐, 난 너의 친구야…… 이리 와, 이리…….」

개는 더 가까이 왔다. 무척 슬픈 눈을 갖고 있었다.

「야,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한 거냐?」 p288~289


  헨리. 그는 친구라는 말도 알았고 손을 내밀 줄도 알았다.

  호모 사피엔스의 희생자, 헨리. 아, 사람들이 너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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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음의 여름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

  한은형, 문학동네, 2015.



   여름이 작가에게 선사한 것은 무엇이기에 작가는 ‘여름’ 이미지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까. 장편 소설에서도 계절 느낌이 묻어났는데 단편 역시도 그렇다. 단편집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는 여름을 어떻게 보냈을까. 참 이상하게도 여름과 너구리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동물들에게 사계절은 존재함에도 너구리가 여름 속에 있는 동물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생각하고 보니 이상하지만 계속 그렇게 생각한다. 모든은 아니라 어떤 동물에게는 털이 있는데, 강아지도 고양이도 털이 있지만 여름이라고 특별히 잘 지내지 못한다거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너구리가 그 털을 몸에 덮고 여름을 어떻게 견디지라는 하릴없는 걱정을 한다. 이거야말로 작가가 말하는 ‘쓸데없음의 헌신일까. 참, 그런데 너구리를 본 적은 있던가.

  작가의 등단작이자 문학동네 신인상 수상작인 「꼽추 미카엘의 일광욕」은 여름에서 시작해서 여름으로 끝난다.

 

이 이야기는 내가 미카엘을 만난 그 짧았던 여름 저녁에 있었던 일이다.

이 이야기는 내가 꼽추 미카엘을 만난 그 길었던 여름 저녁에 있었던 일이다.

 

  여름은 그런 것인가. 짧게도 길~게도 느껴지는. 나 역시도 시작은 짧은 여름날의 이야기로 들어갔다가 되돌아 나올 땐 기인 시간을 보낸 느낌이다. 단편집의 소설 하나하나가 짧은 여름을 겪으리라 생각하며 발을 들여놓았다가 푸욱 여름 속에서 잠기다 나온 듯하다. 여름 속에서 잠기다 나왔다라… 그 느낌이 결코 맑고 경쾌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한여름의 더위에 무료함과 무력함이 겹쳐지는 절정에 있는 것 같다. 무엇에 눈을 돌리려고 하나 열정과는 다른 그 행동의 기저에는 권태가 잔뜩 자리잡아 있다 칙칙함을 한여름의 열기가 말려주는 듯 싶다가도 이내 습기로 흩트려 놓기를 반복하는 기분이다. 현실의 이야기인데 비몽사몽간에 겪은 일인 듯 이야기들이 먼 곳에 있다. 내 주위에서 이러한 이들을 만난다면, 그들과 함께 나는 어떻게 물들어 갈까.

  한낮인데도 작가의 이야기 속 인물들은 잠들어 있는 듯, 여전히 깨어나지 않고 있는 듯하다. 잠에 취한 것인가, 술에 취한 것인가.

  「꼽추 미카엘의 일광욕」 속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일상성에서 벗어나 있는 듯하고 여기서의 일상성을 일반적인 상태로 바꾸어도 무방하다. 모두 사회에서 가늠하는 지위를 무겁게 걸치고서 그들의 언행은 그 무게에 걸맞지 않다. 아니, 전반적으로 그렇지 않다. 그래, 사회적 지위란, 사회속에서 차지하는 역할이란, 직업이란 나를 이루는 하나의 요소일 뿐 본질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 역시 외피일 뿐이고 온전한 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든 어쨌든 사력을 다해서 그것을 이루었을 것인데 사력을 다해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것인가. 상식적이지 않은 행동을 하려는 이유를 생각해 보건대 그것이 권태와 고독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더 우스워진다. 하나같이 정형화된 것처럼 일탈을 향해 뛰어드는 모습이란 성인의 사춘기를 겪고 있는 어른을 보는 것 같다.


미카엘의 집을 뒤로하고 다시 숲 밖으로 걸어나가는 동안 나는 무언가가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총소리 같은 게 나기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기회에 듣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꼽추 미카엘의 일광욕, 34


  많은 이들이 이러한 일들을 겪어서 힘이 들거나 겪을까봐 힘들어 한다면 소설 속의 인물들은 이러한 일들을 겪고 싶어서, 겪지 못해서 힘들어 한다. 그래서 총소리 같은 게 난다면 그들의 삶이 완전한 전환이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총소리를 그들에게 들려줘야 한다고 총소리 같은 것으로 그들의 삶을 바꾸어야 하리라고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누군가를 향해 총은 난사해댈 것만 같은 불길함이 스치기도 한다.

  여름은, 습기 가득 먹은 여름이란 그런 것일까. 작가의 글이 반짝반짝 햇빛을 쪼인 것이 아니라 습기 가득 먹은 여름 날씨 같다. 마냥 그리워하는 일상이 가득한 그들. 그것이 개이거나 로봇이어도, 아니 개와 로봇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 세상이 커다란 꿈같다”(붉은 펠트 모자, 132)고 하지만, 작가의 소설 자체가 꿈같다. 현실이 아닌 꿈, 한여름밤에 꿀 꿈, 그런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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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그 아이는.


  거짓말 

  제2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한은형, 한겨레출판, 2015.


   1996년의 여름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겁 많은 ‘자살 수집가’의 기억은 습관적인 거짓말을 내뱉는 열일곱 살, 최하석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땅의 고등학생들에게 모범생에서 물러나는 일은 성적 때문일까. 공부하는 것이 싫고 성적이 좋지 않아 모범생이 되지 않는 것인지, 모범생이지 않기 때문에 성적이 안 좋은 것인지, 그 선후관계를 명확히 따진들 무엇하랴. 어쨌든 이 땅의 고등학생들에게 성적 순위를 묻는 일 말고는 다른 어떤 물음도 주어지지 않는데. 한발 더 나아가 최하석은, 자신이 정박아가 된 기분이라 말한다. 그리고 퇴학이라고 해도 무방한 자퇴를 한다. 성적이 좋지 않아서라기보다 남학생과 커튼을 덮고 자다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장소가 교실이기도 했고 커튼 속에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는 이유도 중요했다.

  어쨌든 ‘왜’ 그랬는지는 아무도 물어주지 않았고 하석은 전학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지만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채 학교생활을 한다. 책읽기를 좋아하고, 취미는 자살 수집인 하석으로. 그리고 늘, 반복적으로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하면서. 하석은 진심을 말하는 것보다 거짓을 말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상대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다. 가장 싫어하는 말이 ‘솔직’이니까.


'거짓이나 숨김이 없이 바르고 곧다‘, 이게 솔직의 뜻이란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거짓말을 즐겼고, 늘 뭔가를 숨겼으며. 바름을 혐오했고, 곧은 건 내 취향과 거리가 멀었다. 나는 불투명한 사람이 좋았다. 어떤 투명함은 하나의 폭력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p34


  자신을 드러내는데 서투르며 거짓말로 그 시절을 견딘 하석. 왜 그토록 하석은 그때에 거짓말로 버터야 했을까.


어떻게 하더라도 나는 이 여자를 이길 수 없는 것이다. 진지하고 모범적인 인생을 살다가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죽은 뛰어난 여자를. 내가 언니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즉 부모의 관심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은, 죽는 것이 유일했다. 언니보다 더 일찍. 그리고 더 애절하게.

나는 죽어서라도 사랑이라는 걸 듬뿍 받고 싶었다. 내가 언니보다 사랑스럽지 않다고 해도 불쌍하게 여겨진다면, 사랑 비슷한 걸 얻을 수 있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p184


  그러니까 하석의 거짓말의 이유는 보다 사랑받기 위함이었던가. 부모의 관심을 갈구하는 어린 아이였다. 하석은 스무살이 되기 전에 죽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자신은 겁이 많은 터라, 자신과 함께 죽거나 자신을 죽여줄 사람을 찾으려 한다. 자신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부모님은 자신에 비해선 나이가 너무나 많으셨고, 무엇에도 무덤덤한 분이었다. 그리고 집안에는 한번도 본 적 없는 언니의 그림자가 늘 드리워져 있었다. 60대의 부모님과 스무살이나 나이차가 나는 언니. 아마도 그 부모들의 사랑이 향한 곳은 그렇게 사라져버린 언니였다는 생각이 가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랑을 자신에게로 향하게 하고 싶은 고교생 하석의, 그 불안한 생각들.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는다면 언니를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언니의 첫 자살 시도도 열일곱 살 때였다. 나는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그때를 넘기면 죽지 못할 거라고 여겼을 거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서 잘 안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멈춰야 한다. 낡기 전에 사라져야 한다. 완결된 이야기에 뭔가를 더 붙이는 건 억지로 늘려놓은 대하소설이나 다름없으니까. p203


  거짓말을 좋아하는 하석이 거짓말의 많은 부분은 자신에 대한 것이다.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 거짓말이기에 하석이 소통할 수 있는 이는 없다. 그러나 하석이 유일하게 거짓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진실을 이야기함으로써 만나는 이는 PC통신 속 ‘프로작’일 뿐이다. 전제를 깔고 있어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사실은 제 엄마인 언니를 하석은 그리워하는 것이었다면, 하석이 자신의 출생에 대해 관심과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사실은 할아버지, 할머니이지만 부모인 그들이 만들어 준 것이다.

  성장소설의 특징은 항상, 모범생이라 불리는 아이들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일이 벌어져야 하니까. 그 애들은 늘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 시기에 가지게 되는 온갖 의문에 대해 참으로 관조적으로 생각하며 또, 그러면서도 행동력이 끝내준다. 그러니까 성장소설 속에서 늘 ‘문제’가 있는 부모가 있고, ‘문제’가 되는 가정환경이 있고 그 ‘문제’를 문제화하는 아이들이 있다. 도식화하면 항상 아이들은 ‘사랑’과 ‘관심’을 필요로 한다는 것과 ‘성적’에 얽매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문제로 규정되는 행동을 하는 이들이 있고 그렇지 않는 이들이 있다.

  소설이 되기 위해선 언제나 ‘문제’가 되는 이들의 이야기가 필요하겠다만, 소설에서 바라보는 하석과 현실에서 바라보는 하석의 괴리가 참으로 크다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현실에선 ‘사건’만 보고 하석의 내면을 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에선 그들의 내면 따위야. 그러면서도 성장소설 속 아이들에게 붙이는 관용구 같은 말, “어른보다 더 어른 같다”는 표현이 참 낯설게 느껴진다. 이 무슨 말장난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도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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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발자국


 L의 운동화

 김숨, 민음사, 2016.


   뜬금없이, 놓인 물건을 보며 감상에 젖을 때가 있다. 그것이 그 장소에 새로이 놓인 것이 아님에도 갑자기 과거의 기억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그것은 밥일 때도, 간단한 필기도구일 때도, 달력이라도, 운동화라도 상관없다. 물건이 상기하는 것은 물건 자체가 아니라, 과거 경험한 사건과 감정들이니까.

  여기 김숨은 소설을 통해 한 사람의 과거가 모두에게 공유되는 매개물을 놓아둔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그 과거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결국 이 소설은 실화라는 이야기다. L의 운동화가 실재하듯 L은 실재하는 사람이었고 그가 살았던 시대가 살아 있고 존재한다. 이야기는 그 과거를, 그 시대를 불러오고 현재는 그 기억으로 들어가기 위해 애를 쓰고 그 기억을 통해, 그 과거로 돌아가 과거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하게끔 한다.


그러고 보면 그 어떤 존재를 가장 강렬하게 느끼는 때는, 그것이 죽어 갈 때가 아닐까. 희미해져 갈 때, 변질되어 갈 때, 파괴되어 갈 때, 소멸되어 갈 때. p33


  최근 한달여 사이 수많은 운동화가 전국 곳곳에서 한 공간에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 촛불을 들고 움직이는 광장의 발자국과 마찬가지로 1987년의 6월에도 L이 제 신발을 이끌고서 촛불을 들 듯 자신의 신념을 들었다. 청년 이한열. 최루탄이 공식적으로 언제 사라진지는 모르겠으니 적어도 1997년에도 최루탄은 있었다. 그때에도 최루탄을 얼굴에 맞은 사람이 있으니까.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은 끊임없이 발포되었다. 민주항쟁이 일어난 10년 뒤에도 상황은 그랬다. 10년 전 1987년 6월, 최루탄은 이한열의 머리로 날아든다. 2015년 11월에 물대포가 백남기 농민의 머리로 날아든 것처럼. 두 사람은 기인 시간 생명을 붙들기 위해 싸우다 결국 사망한다. 이한열은 당시 22살이었다.

  피격 당시 이한열은 오른쪽 운동화 한짝을 남긴다. 270㎜ 흰색 ‘타이거’ 운동화. 28년이 지나는 동안 밑창은 100여 조각으로 부서졌고 2015년 미술품 복원 전문가인 김겸 박사는 이한열의 운동화를 3개월 동안 복원한다. 이 복원의 과정이 이 소설의 핵심이다.

  하지만 운동화가 어떻게 복원되는지를 그리는 것이 소설의 전부는 아니다. 물건으로서의 운동화의 복원과정과 더불어 ‘왜’ 그것이 복원되어야 하는가를, 그리고 그 운동화가 지닌 물건 이상의 가치를 생각하게끔 이끈다. 운동화를 기억하는 이들의 기억을 모으고 그 시대를, 그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더불어 복원 진행과정을 이야기하면서 다양한 미술품의 복원 이야기를 곁들인다. 마크 퀸의 자화상이 대표작이다. 마크 퀸은 자신의 두상을 모형으로 한 석고 거푸집에 자신의 피를 부어 응고시킨 「셀프」를 제작했다. 그런데 청소부가 작품을 보관한 냉동고의 전원 코드를 실수로 뽑는 바람에 피가 녹아내려 작품이 훼손되었다. 이 작품이 마크 퀸이 죽은 뒤 훼손된다면 어떻게 복원할 것인지, 마크 퀸의 피를 대체할 물질이 있는지, 타인의 피를 넣으면 그것은 마크 퀸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을지를 묻는다.


내가 복원해야 하는 것은, 28년 전 L의 운동화가 아니다. L이 죽고, 28년이라는 시간을 홀로 버틴 L의 운동화다. 1987년 6월의 L의 운동화가 아니라, 2015년 6월의 L의 운동화인 것이다. 28년 전 L의 발에 신겨 있던 운동화를 되살리는 동시에, 28년이라는 시간을 고스란히 담아내야 하는 것이다. p100~101


  ‘L의 운동화’를 복원하는 복원가 역시 끊임없이 질문한다. ‘L의 운동화’를 복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를. 운동화가 생산된 때, L이 운동화를 처음 신은 때, 최루탄을 맞을 때, 얼마만큼, 최대한, 최대한, 보존 처리만 할 것인지, 운동화끈을 풀 것인지, 묶을 것인지 등등 운동화를 복원하기 위한 기술적인 것부터 개념적인 것을 고민하며 복원의 의미를 되새긴다.


L의 운동화를 그대로 두는 것이, 운동화를 신화화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L의 운동화는 시위 현장에서가 아니라 보관 과정에서 파손되었다.


    L의 운동화가, L을 넘어서서는 안 된다.

    L을 집어삼켜서는. p110


  L의 운동화가 L을 넘어선다는 의미는 어떤 것일까. L의 운동화가 보관되고 복원되는 것은 그것이 운동화 자체의 가치가 아니라 ‘L’의 운동화이기 때문이라는 말로 이해될 수도 있다. 또한 복원이란 단어를 역사로 대체해도 의미가 된다. 복원은 곧 역사로서 우리가 역사를 기억하는 과정인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것은 반복된 역사를 통해 배우고 미래지향적인 세상을 위해서라고 했던 교과서적 답변이 생각난다. 그날 왜 누군가는 그 사건이 벌어진 현장에 있었고 소중하게 L의 운동화를 줍고 보관하고 있는지, 우리가 그것에서 배우고자 하는 것은, 배울 것은 무언지를 L의 운동화가 보여주고 있다. 또한 미군 장갑차에 의해 사망한 효순이와 미선이 산건, 제주4.3사건, 일본군 위안부 사건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여전히 규명되지 않고 규명할 의지도 없는 사건으로 이를 바라보는 정부와 대비해 독일 정부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대응을 비교한다.

  이러한 내용들을 담고 있어서인지 구성과 이야기의 방식에서 소설보다 약간 르포, 다큐 느낌이 든다. 그래서 역사에 대한 인식 방식이나, 그 역사의 현장에서 늘 정부에 희생되었어도 민주주의를 위해 힘을 쏟은 국민들에 대한 생각들이 더욱 난다. 아마도 현시국과 맞닿아 있어서일 것이다. 불행한 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는 지금도 거짓을 들이미는 정부에 의해 강제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 희망은 우리는 또한 여전히 L처럼 운동화를 남기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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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아이러니

 

 살고 싶다

 2014년 제10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이동원,  2014.

 

 

   ‘살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

   그 사람의 말 앞에 “더 잘”이 또는 “죽음을 앞두고”가 생략되어 있다면. 열정없이 그저 살아가는 삶에 대해 반성하게 될까. 어느 누구의 외침인지, 어떤 삶을 살고 있기에 그런지, 그 처한 상황이 무엇인지 강렬한 삶의 의지를 전달받기 위해 그 외침이 울리는 상황을 살펴보게 된다면 더욱 더 그 말의 울림을 잘 느끼게 될까.

   최근에도 폭탄이 터져 많은 군인들이 부상당했다.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군대에선 각종 의문사가 많이 발생한다. 이 책 속 장소 역시 군대다. 군대 속 병원이 더 근접하다고도 볼 수 있겠다. 이필립 상병은 의문의 남자로부터 자살 사건 조사를 제안받는다. 남은 군 생활을 편히 지내게 해주리라는 대가를 제시하면서.

   자신이 유격 훈련 중 다쳐서 입원했던 국군병원에 같은 시기 입원했던 친구의 사건을 조사한다는 것에 부담도 느끼지만 어쨌든 이필립 상병은 조사를 진행한다. 어쨌든 이야기가 흘러가야 하니까. 자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이필립 상병의 활약은 조사를 제안하는 이의 의도와 맞게 진행이 되어 갈까. 진실은 무엇일까. 진실을 아는 이필립의 조서는 어떻게 작성될까. 특히나 그 자신이 군대 부적응자로 인식하고 있다면.

 

폭력을 제대로 묘사하면 아무도 그것을 따라 하지 않는다. 맞는 자의 아픔뿐 아니라 때리는 자의 아픔까지도 표현되기 때문이다. 반면 폭력이 멋지게 혹은 우스꽝스럽게 그려질 경우 상처와 고통이 있어야 할 자리를 허세와 웃음이 대신한다. 그런 것을 보며 자란 사람은 폭력을 휘두르며 스스로를 멋지다 생각하고 아파하는 사람을 보며 웃게 된다. p87

 

   그가 보는 조직사회 군대는, 그가 조사한 자살 사건 속 군대는 폭력이 만연되었고 또한 죽음을 희화하는데 익숙했다. 그렇기에 자살은 반복되고 폭력은 확장된다. 곳곳에 서열이 존재한다. 계급이 존재한다.

 

나는 가끔 궁금했다. 무릎을 다치지 않았다면 나는 멀쩡한 다리로 어떤 길을 걸어갔을까. 그 길의 끝에서 나 역시 나도 모르던 내 안의 괴물과 마주했을까. 한두 마디 말로 쉽게 그들을 욕하고 침을 뱉지 못하는 건 한때는 선해 보였던 그들의 눈빛을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가장 두려웠던 건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그들처럼 될 수 있는 나 자신이었다. p66

 

   조직 속의 그들과 같아 질까봐 스스로를 두려워하던 이필립은 그렇기에 한편으론 자신이 부적응자인 것을 다행으로 여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다행인지 운명인지 자살하지 않고 생각을 바꾸고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런 반복된 자살 사건을 조사하는 위치에 선다. 그가 조사한 친구 정성한은 참 따뜻한 시선을 가진 사람이다. 반면 필립은 냉정하다. ‘살고 싶다’는 글을 남기며 자살한 이 시인을 꿈꾸는 친구의 자살을 그가 너무 여리기 때문에 죽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자살이, 그 모든 것이 여린 그 개인의 성격탓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필립은 사건의 진실을 알아간다. 단지 정성한의 자살 사건이 아니라 더 많은 이들이 자살한 이 사건을.

   작가는 사건 조사를 하면서 자신의 내면에 대해 더 깊은 성찰을 하도록 이필립을 이끈다. 자신이 군대의 부적응자가 된 것만큼이나 부적응자가 아니라 가치있는 사람임을 입증하고픈 욕구가 있었던 이필립의 내면은 정성한의 간절함과 처절함을 알아가면서 조금은 변하고 조금은 단단해진다. 삶의 아이러니는, 항상 누군가의 죽음으로부터 내 삶을 돌아본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내 삶의 희망을 의지를, 살아 있음에 대해 감사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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