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 1
말런 제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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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할 쉣스템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

 

  레게와 육상과 봅슬레이로 기억되고 있는 나라, 자메이카. 이곳 출생 작가 말런 제임스의 소설이다. 말런 제임스는 그의 첫 작품을 출간하기까지 출판사로부터 78번의 거절을 당했다고 한다. 적어도 한 곳 출판사에만 집중하지 않았을 것이니 70여 곳의 출판사를 향해 도전을 멈추지 않은 작가의 노력과 인내가 놀라웁다. 그런 힘을 가진 작가였기 때문일까. 세 번째 소설 <일골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는 작가에게 맨부커상을 안겨준 작품이고 수상작이자 소설 형식에 대한 거듭된 찬사를 받고 있다.

  문장이 완결되기도 전에 튀어나오는 많은 욕설과 비속어를 모두 걷어낸다면 1,176페이지의 분량이 절반으로 줄었을 소설이다. 안타까운 점은 그랬다면 소설의 묘미도 절반으로 줄었을 거라는 점이다. 사전 정보없이 소설을 읽어나갔기에 소설에 대한 흥미는 이 사건이 ‘현실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배가된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겪은, 겪고 있는 상황과 자메이카의 현실에 깊이 이입하며 1976년의 시간을, 밥 말리라는 가수를, 혼란에 끼인 자메이카를 그려나가게 된다.

  실존 가수 밥 말리에게 실제 일어난, 자메이카 역사의 비극적인 사건을 소재로 한 이야기의 소제목은 레게 가수의 곡과 앨범에서 따왔다. 총5부로 구성된 이야기가 방대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의 사건에 대해 13명의 화자가 등장하여 쉴새없이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떠들기 때문이다. 마치 구전처럼 이야기는 이야기를 파생한다. 이 사건이 자신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시간이 흘러도 또는 이미 생을 다하였어도 그들은 잊지 않고 있으며 여전히 영향을 받고 있음을 이 소설은 보여준다. 역사는 또다시 강대국의 이익에 휩쓸리는 한 나라를 보여준다. 그리고 권력욕에 희생되는 나라와 사람들의 모습을, 모든 욕망을 끌어모아 타인을 지배하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자메이카는 대한민국이 그랬듯이 식민의 잔재와 빈부 격차와 인종갈등이 넘치고 있었다. 그에 더해 1976년의 자메이카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대립하고 있었다. 정치권은 갱단과 연결되어 암살과 폭력이 난무하고 있었고 미국을 피해갈 수 없었던 냉전시대, 미국은 제 나라의 이익을 위해 자본주의를 내세운 노동당을 지원한다. 공작정치, 그것을 지원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렇다고 하자.

 

2주 후면 총선이다. CIA가 이 도시에 쭈그리고 앉아 그 투실투실한 엉덩이로 냉전 시대의 땀자국을 남기고 있다. 잡지사에서는 나한테 별다른 기대도 하지 않는다. 뭔지는 몰라도 롤링 돌대가리들이 녹음은 하고 있는지에 대한 기사나 한 문단 써오라는 것뿐. 헤드폰을 반쯤 걸친 믹이나 키프를 중앙에 배치하고, 배경 어딘가에 색감을 살려줄 자메이카인을 끼워넣은 멍청한 사진이 담긴 완성본으로 말이다. 그딴 건 씨발 좆이나 까라지. 마크 랜싱이 벌이고 있는 건 대체 무슨 게임일까? p132

 

  자메이카 국민에게 평화와 화합의 메시지를 전해주고자 콘서트를 여는 가수 밥 말 리가 콘서트 전 살해당할 뻔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갱단이 연루된 이 암살 기도 사건의 든든한 조력자는, 기획자는 과연 누구인가. 이 과정에 연관된 사람들은 말단 갱단원에서부터 CIA 직원까지 다양하다. 노동당과 인민국가당 각각의 갱단들, 갱단원이 된 소년들, 사람들. 이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사람들의 시선은 덤덤히, 격렬하게 이 이야기를 전한다. 이 사건을 겪고 본 자메이카 사람 어느 누구라도 트라우마를 겪으며 삶을 견디어 가는 모습은 애잔하기 그지없다. 모든 돈과 권력의 이해관계의 속살들을 보며 그것이 힘없고 가난한 이들의 희생을 담보로 전진하고 있음은 보는 내내 답답함을 안겨준다. 역사는, 이토록 같은 모습을 보여주며 민중들을 괴롭히며 파탄으로 몰고 간다.

레게 음악의 흥겨운 리듬 뒤편으로 마약이 총질이 끊이지 않는 자메이카를 떠올린다. 봅슬레이를 타며 웃는 자메이카 선수들의 모습은 사라지고 삶의 비애 속에 놓인 작은 섬 나라의 뒷골목이 떠오르는데 자메이카는 지금도 그런 모습일까. 그럴 지도 모른다. 어떤 한 사건이 오래전에 있었다고 해서 그것이 말끔히 지워지는 것은 아니니까. 대한민국이 그런 것처럼 그런 역사의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면 여전히 혼란스러움은 잔재할 것이고 아픈 역사를 겪은 이들의 트라우마는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암살 사건을 목격한 니나 버지스다. 많은 화자가 등장하는 가운데 홀로 여성인 니나의 삶도 직접적인 살인에 가담하고 마약에 빠지는 갱단원 이야기 못지않게 파란만장하고 애잔하다. 자메이카와 미국을 오가며 겪는 그녀의 삶은 인종과 여성의 차별을 버티어 나가고 있다.

  밥 말리는 여전한 평화운동을 위해 애를 썼지만 암살 기도 사건 5년 후에 암으로 사망한다. 밥 말리는 사망하기 전 평화콘서트를 한번 더 개최했지만 자메이카에 평화란 없었다. 자신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취득하기 위한 개인과 집단에게 ‘평화’에서 얻는 이익이란 게 없다는 점이 비극의 역사를 반복하게 하는 힘이 된다.

  그러니 이 소설의 모든 말들이 욕으로 시작해 욕으로 쉬고 욕으로 끝맺는 것은 당연하게 보인다. 이 자메이카의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일이란 끝없는 욕설 안에서 살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임산부도 어린 아이도 주저하지 않고 살해하는 잔혹한 폭력과 성에 대한 탐닉, 그리고 성적 폭력. 폭력이 난무하는 자메이카는 자메이카를 이끈다는 지도자들이 만들어 가는 작품이다.

 

나는 정치를 증오한다. 이 동네에 살자면, 정치의 틈바구니를 살아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정치의 틈바구니를 살아내지 않으면, 정치가 나를 통해 살게 된다. 1권. p69

 

  그러니 정말 피똥 쌀만하다. 거룩하고 대단한 정치를 보고 있는 기분이 말이다. 그래서 자메이카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쉣스템SHIT+SYSTEM’이라고. 부패한 정치들, 그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이 부패하고 난장판인 시스템들. 세상 어느 누구도 체제에 시스템에 영향받지 않을 사람은 없다.

  피똥 쌀! 피똥 싸게! 등장인물마다 입에 달고 있는 이 말이 웃프게 들리는 건 여전히 괴상망측하게 정치를 이해하고 정치를 행하려는 이들 때문이다. 정치는 인간의 삶을 보다 나아지도록 하는 것이지 특정한 이의 환희에 찬 삶의 송가가 아니다.

  변화에 대한 기대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 걸까. 희망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건가. 평화콘서트도 막을 내리고 레게 음악이 구슬프게 여겨진다. 지금 자메이카는 그때와 같지 않은데 대한민국은 어떤가. 젠장할 쉣스템. 젠장할 인간들. 정치인들에 의한 살인의 역사는 오래도록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유일한 시스템이다. 그리고 그 대상은 언제나 평범한 ‘나’ ‘너’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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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하지 않은 빛.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앤서니 도어, 민음사, 2015-07-10 .


  단문. 현재형 문장. 표현의 유려함. 인상적인 구성. 먹먹한 여운.

  이 소설에서 느끼는 특징이다. 2015년 퓰리처상 수상작으로 작가는 10년에 걸친 기간 동안 이 소설을 완성해 나간다. 10년이라는 시간, 오랜 시간일수록 많은 자료를 들여다보며 더 길게 이야기를 늘일 수 있을 듯도 싶은데 작가는 어쩌면 이토록 정갈하게 이야기를 풀어 놓았는지.

  처음 이 소설을 읽고 나선 먹먹하고 아린 마음이 지속되었는데 그렇게 1년 여의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흐른 만큼 마음이 안정되는가 했더니 표지만 봐도 아린다. 마리 로르와 베르너가 등장하는 이 소설은 여러 장르에서 자주 접한 2차 세계 대전의 고통을 겪는 인물들의 이야기다. 그럼에도 전쟁속에서 스러져간 인물들의 이야기는 늘 마음을 당기게 된다. 특히 이 두 주인공이 소녀와 소년이며 좀체 만나기 어려운 맑은 영혼이기에 그럴 것이다. 


실제로는 말이죠. 수학 상으로는 어떤 빛도 눈에 보이지 않는답니다. p230


  어떤 빛도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절망 속에서도 마리로르와 베르너는 ‘빛’을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들은 그 불친절하고 참혹한 시대에서도 그들 자신의 ‘빛’을 잃지 않고 성장한다. 그녀가 단지 볼 수 없기에 나치가 찾아 헤매는 보석에 초연한 것은 아닌 것처럼 베르너 역시 전쟁의 상흔 속에 자신을 파괴하지 않으려 애쓴다.


뇌는 완전한 암흑 속에 갇혀 있습니다. 당연한 사실이랍니다. 어린이 여러분. 그 목소리는 말한다. 뇌는 두개골 속 깨끗한 액체 속에 떠 있지, 빛 속에 있는 게 절대 아니거든요. 그런데도 뇌가 정신 속에 지어 올리는 세계는 빛으로 가득합니다. 뇌는 색과 움직임으로 넘실거립니다. 그런데 어린이 여러분, 뇌는 단 한 점의 빛도 없이 살아가면서 무슨 수로 우리에게 빛으로 가득한 세계를 지어 주는 것일까요? p80~81


  어릴 때부터 시력을 잃고 박물관에서 일하는 아버지와 둘이서 살아가던 마리로르는 아버지와 함께 프랑스 생말로로 피신한다. 박물관 관장의 명으로 전설의 133캐럿짜리 블루 다이아몬드 ‘불꽃의 바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 개의 모조품을 더한 총 네 개의 다이아몬드 중 아버지가 진품을 가진 것인지는 모르나 이로 인해 보석을 노리는 나치의 추적을 받는다. 상황을 보기 위해 파리로 갔던 아버지마저 실종된 상황에서 마리로르는 라디오를 송신하며 전쟁을 견뎌낸다.『해저 2만 리』를 읽어주면서, 도와달라는 메시지를 절박하게 전하면서 기다린다.

  베르너는 독일 탄광촌 고아원에서 여동생과 함께 지내며 쓰레기장에서 주운 고장난 라디오를 조립하며 프랑스의 과학 방송을 청취한다. 이것은 베르너를 통신 기계에 대한 관심과 재능으로 이끈다. 그리고 이 능력으로 인해 나치의 눈에 띄어 청년 정치교육원으로, 전쟁의 현장으로 투입된다. 그리고 마침내 독일군의 마지막 방어 기지인 생말로로, 연합군의 폭격이 무참하게 진행되는 그곳으로 가게 된다. 그리고 필연처럼 베르너가 듣게 되는 마리로르의 메시지. 독일 소년과 프랑스 소녀의 짧은 만남. 그러나 그 만남을 위해 두 아이의 인연의 끈은 오래 전부터 촘촘하게 이어져 있었다.


제파르 박사가 말한다.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끄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야. 예를 들어 진주, 그리고 왼편으로 감긴 조개류, 그러니까 왼쪽에 입이 달린 조개 같은 것들이 그래. 최고의 과학자들도 이따금씩 자기 주머니에 슬쩍 집어넣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거든. 그렇게 자그마한 것이 그토록 아름답다는 것에 혹해서 그런 거야. 값어치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귀하니까. 오직 강한 사람만이 그런 것에 끌리는 감정으로부터 등을 돌릴 수 있어.” p87~88


  마리로르에게도 베르너에게도 삶의 순간 순간마다 ‘혹’하는 때가 있었을지 모른다. 비단 보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리로르의 라디오를 송신하며 메시지를 전하는 레지스탕스 활동같은 것, 베르너가 나치에 순응하며 전쟁속 군인으로서의 행한 일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그대로 살아가는, 그런 ‘혹’. 그런 충동. 그러한 무수한 ‘혹’의 순간들에 등을 돌린 그들은 강한 사람이었다.  


내가 시력을 잃었을 때 말이에요, 베르너, 사람들이 나더러 용감하다고 했어요. 우리 아버지가 떠났을 때도 사람들은 내가 용감하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건 용감해서가 아니에요. 내겐 달리 방법이 없었는걸요. 난 자고 일어나면 그저 내 인생을 사는 거예요. 당신도 그렇지 않아요? p371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자고 일어나 제 인생을 묵묵히 살아나갔다. 또한 눈만 뜨면, 제가 혹한 탐욕을 찾아 남의 인생마저도 제 인생처럼 휘두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역사는 늘 이들이 반복되어 흘러갔다. 인간의 삶에 욕망이 무조건 나쁜 것도, 그래서 나쁜 결과로만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욕망엔 종류가 다양하니까. 당연 욕망을 욕망하는 종류와 방법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소설 속에 이야기의 줄기로 나오는 쥘 베른의 소설과 더불어 과학적 접근의 ‘빛’에 대한 이야기가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타인에게 까지 피해를 입히는 종류의 욕망에 집착할 때 찬란한 다이아몬드 ‘불꽃의 바다’의 저주처럼 영원히, 멈추지 않는 악운을 맞게 될 것이다. 그 찬란한 빛 속에 감겨 버린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될 때, 그 인생은 나의 인생이라 확신할 수 있을까. 그러니 눈을 뜨란 외침이 예사로이 들리지 않는다. 삶의 곳곳엔 언제나 선택의 순간이 있다. 그 순간에 잊지 말아야 할 그것들.


눈을 떠요. 그리고 영원히 감기기 전에 그 눈으로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걸 찾아봐요.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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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이는 모든 것이 금은 아니듯



루미너리스, 엘리너 캐턴, 다산책방, 2016.

   

 

   생각해보니까 천재라는 말은 좀더 어린 사람에게 더 잘 붙는 수식어인 듯하다. 루미너리스의 작가 엘리너 캐턴도 이런 수식어를 받는 ‘어린’ 작가다. 이 작품은 맨부커상 수상작이라는 것과 작가의 두 번째 작품이라는 점이 강조된다. 특히 맨부커상 수상 역사에서 최연소 수상 작가이며 수상작 중 가장 긴 분량이라는 기록을 세웠다며, 28세의 나이 두 번째 작품만으로로 맨부커상을 수상한 천재작가라고 소개하고 있다.

   <루미너리스>는 빅토리아 시대, 1960년대 뉴질랜드의 골드러시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다. 골드러시, 금광을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그렇듯 금광에 대한 욕망을 둘러싼 다양한 인물들의 욕망과 갈등이 산재되어 있다. 이 과정에선 당연 살인 사건이 있고 사건의 원인과 진실을 알아내기까지 시종일관 미스터리함이 긴장을 유지하게 하며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이 소설의 특징은 등장인물의 성격을 별자리와 점성술에 빗대어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요 등장인물 12명은 12개의 별자리를, 다른 5명의 남자는 행성을 상징하며, 천체의 움직임에 따른 인물과 사건의 연결이 흥미를 돋운다.

 

무디가 보기에는 굉장히 피상적인 모임이었다. 열두 명의 남자는 안나 웨더렐이 죽을 뻔했고, 크로스비 웰스가 죽었고, 에머리 스테인스가 사라졌고, 프랜시스 카버는 출항했으며 알리스테어 로더백이 마을에 도착한 1월 14일 밤의 사건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인 거였다. 게다가 모두가 모인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감옥을 관리하는 교도소장 셰퍼드도 없고, 교활한 미망인 리디아 웰스도 없었다. - 1권 p498

 

   소설의 제목인 루미너리스는 점성술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두 별인 해와 달을 가리킨다. 천체의 움직임이나 점성술에 대해 잘 모르더라도 소설을 이해하는데는 어렵지 않지만, 그것을 좀 더 잘 안다면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여전하다. 이야기는 많은 등장인물들처럼 다양한 시선으로 전개되고 흩어졌다가 모아지는데 마냥 암울하고 칙칙한 분위기만은 아니다. 희망과 좌절과 욕망과 배신이 난무하는 시대는 어디에나 있다. 오히려 이 빅토리아 시대엔 ‘낭만’이 가미되어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것이 지나간 역사라서일지도 모르겠다.


양자리는 집단적인 관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황소자리는 주관적인 태도를 단념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쌍둥이자리의 규칙은 배타적이고, 게자리는 원인을 찾고, 사자자리는 목적을 추구하며, 처녀자리는 계획을 바란다. 하지만 이것들은 제각기 진행되는 일들일 뿐이다. 12궁의 두 번째 행동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천칭자리는 개념으로, 전갈자리는 재능으로, 궁수자리는 목소리로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염소자리에서 우리는 기억을 얻고, 물병자리에서는 통찰력을 얻는다. 그리고 12궁에서 가장 오래되고 마지막을 점하는 물고기자리에 와서야 일종의 자아를 얻어 완전해진다. - 2권 p250~251

 

   많은 등장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성격은 과연 별자리와 어떻게 연결될까. 인간의 운명이란, 성격이란 정말 점성술이 말하는 대로 정해져 있는 걸까. 때로는 희망을 위해 내 운명에 무언가가 “적혀 있기를” 바라기도 한다. 운명, 인간의 운명, 삶….

이 모든 사건들이 해결되고 상황이 종결되는 그 긴 시간 동안 사람들이 생각하고 느끼

는 감정들을 들여다보면서 느끼게 되는 한가지는 확실하다. 어쨌든 그 누구라도 쉽게 삶을 놓으려는 사람은 없었다. 방법의 차이는 달랐을 뿐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금’을 움켜쥐려던 그들이었다. 그들의 ‘금’이 실제의 금이든 아니든 모두 반짝반짝 빛나는 내일을 위해 갈망하고 움직였다. 운명이 ‘쉽게 결정지어졌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희망이 몸짓이기도 하겠지만 패배의 몸짓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결국 모두는 깨달을지 모른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선택의 산물이고, 자신의 손으로 결말을 선택한다. - 2권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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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스파이다

 

고요한 밤의 눈, 박주영. 다산책방. 2016.

 

   스파이 소설이라 이름하는 이 소설에서 스파이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내려지지 않는다. 또한 익히 알고 있는 스파이들이 행하는 첩보 활동도 없다. 등장인물들 스스로가 ‘스파이’라고 칭하고 있지만, 그래서 ‘스파이의 정체는 뭔가?’라는 의문만으로도 끝까지 책을 붙들고 있게 된다.

이야기의 시작은 처음부터 누군가가 스파이임을 알린다. 그리고 세상에 살아있는 존재로 기록되지 않은 쌍둥이 중 한명이 기록되어 살고 있는 언니의 실종을 추적하면서 시작된다. 미스터리와 첩보로 가득하리라 생각했던 이야기는 등장인물들의 스파이 활동과 관련한 스토리가 중심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 각자의 사색이 주가 된다.

   사회 현실에 대한 상당히 익숙한 비판이 줄곧 등장인물에 의해 제기되는데 이러한 철학적이고도 비판적인 사회고발의 내용을 익숙하지 않게 잘 버무린 듯하다. 끝까지 내용에 관한 모호함을 유지하면서도 ‘이 사회가 이렇다’라고 분개하게 되는 내용을 사회학 책처럼 잘 정리하여 제시한다. 등장인물의 몇 이야기를 빼고 나면 자본주의 현실, 경쟁사회의 현실, 조직사회에 대한 것, 사회에서 한 개인으로 살아가는 일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점을 직시하는 말들이 줄줄이 열거된다. 이것이 소설의 형태로 제시되면서 이야기를 이끌고 있다.

   등장인물은 미지칭으로 알파벳으로 각 개인의 관점에서 사건이 서술된다. 또한 등장인물 자체가 많지 않다. 이들 몇 안되는 인물들은 ‘스파이’라는 이름으로 연결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스파이’임에도 불구하고 그 스파이라는 역할과 더불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고민하고 있다. 하나 분명한 것은 이 세상에선 많은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스파이들이 존재하는 것과 관련이 되어 있는 걸까.

   무엇이 그들을 스파이로 만드는가. 어쩌면 이 질문이 가장 중요한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을 스파이로 만드는 그 누군가는 누구인가도. 스파이는 사람들을 감시한다. 적어도 등장인물 몇은 그렇게 타인을 감시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위험이 되기 때문인지도 모르는 사람을 감시하는 일이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역할이니까 그렇게 하고 있다.

 

나는 나의 일을 하고 X는 X의 일을 하고 Y는 Y가 해야 할 일을 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스파이이고 각자가 해야 할 일을 한다. 그리고 우리의 목표는 하나이거나 하나가 아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세상, 그 세상의 이면에 우리가 있고, 우리의 이면에 또 누군가가 있다. 누군가 우리를 모른 체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등 뒤를 모른 체한다. 패자가 되지 않기 위해. 하지만 패자가 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 결국 우리 모두를 패자로 만든다. p134

 

   자기 일에 직업으로서 최선의 역할을 다하면서 그것 자체로 교묘하게 스파이일을 수행하기도 하는 이들은 왜 스파이가 되었는지, 목적이 무엇인지도 알 길 없다. 그저 그렇게 막연하게 그들은 스파이가 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스파이라는 삶이 가져다 줄 그들의 목적은 과연 무엇인지조차 모호하다. 그런 만큼 그들 각자의 스파이라는 삶에 대해 가지는 끊임없는 회의가 없다면 이 소설은 없을 지도 모르겠다. 마냥 모호한 스파이라는 존재, 그 역할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마치 작가가 말하는 ‘스파이’는 그냥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들인 것만 같아 보인다. 특정한 시스템에 그저 흘러가는. 생각을 잃어버린 채 그렇게 흘러가는. 그러니까 결국 권력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는 자들이 될 수 있겠다.

   어느 사회나 사회가 안정적으로 흘러가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 ‘안정’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처럼 특정한 사회를 위해 수많은 이들이 상처받고 희생되는 사회가 오래도록 흘러가고 있었고 그러한 사회의 변화를, 혁명을 인식한 자들에 의해 기존의 틀들이 조금씩 수정되며 사회가 흘러갔다. 그 과정 속엔 늘 힘과 권력이 있는 이들이 세상을 휘둘렀고 그들에 의해 나아갈 방향을 되돌려야 했던 수많은 이들이 있다. 마치 특정한 권력이 살아가기 위해 존재해야만 하는 것처럼 그들의 필요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는 사람들. 그래서 이 사회에 가장 위험이 되는 것은 ‘사색하는 사람들’이 되고 만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사람들, 나 하나만으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 이 소설은 결국 이 사회가 나아가고 있는 문제와 모순들을 외면한 채 그대로 굳어진 사회로 흘러가는데 일조하고 있는 각 개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원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위안을 주는 환상 속에서 살 수 있다. 거짓된 현실에 속아주기도 하고 본래 의도를 감추려고 그 현실을 이용하기도 하면서. 이 거짓으로 쌓은 도미노가 길고 크고 복잡해질수록 어쩌면 우리는 더더욱 환상을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성공적인 환상을 지키기 위해 거짓된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스파이의 삶이다. p164

 

   지금과 같은 경쟁사회, 누군가에 의해 감시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이 스파이들의 모습이 지금 현재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각 개인의 모습일 지도 모르겠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헬조선이라는 사람이 인간다운 삶으로 살아가기 힘든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타인을 ‘이겨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 우리 모두가 직접적인 지령을 받지 않은 채로 특정한 이들이 원하는 시스템의 안정화를 위해 자신과 같은 소소한 사람들의 일상을 견제하고 살아온 것은 아닌지. 그래서, 우리 모두가 스파이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은 지배하기 더 쉬워졌다. 가난은 극복할 수 없는 것이며 그저 그렇게 살다 죽는 건 억울한 일이 아니며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정해졌다. 원망해야 하는 건 오로지 당신 자신뿐이다. 그래서 자살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이 당연한 일이 당연하게 자꾸 일어나면 세계가 흔들린다. 먹이사슬의 바닥을 장식하는 인간들이 사라지는 것이니까. 최소한의 삶의 조건마저 고려하지 않은 생지옥으로 사람들을 몰아넣으면서도 자신들만의 세계는 굳게 유지되리라고 믿는 근거가 나는 정말 궁금하다. p211

 

   소설 속에서 작가가 외치는 이야기는 고스란히 지금 현재의 사회에 대해 수많은 이들이 느껴왔던 감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오래도록 패배주로 살아가던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변화의 기점을 맞이하는 순간은, 그들이 두려워하는 대로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이다.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지며, 목적에 대해 의문을 가질 때 무기력에서 벗어날 발판이 이루어지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때야말로 정말 ‘스파이’가 될 것이다. 시스템의 스파이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이 사회를 살아가는 주인으로서의 감시자, 스파이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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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지 않는 세계



혁명하는 여자들


조안나 러스・팻 머피・수전 팰위크・어슐러 K. 르 귄・

파멜라 사전트・히로미 고토・엘리자베스 보나뷔르・켈리 에스크리지・

반다나 싱・캐서린 M. 밸런트・캐롤 엠쉬윌러・안네 리히터・

카린 티드베크・에일린 건・앙헬리카 고로디스체르, 

아작. 2016-09-20.


  페미니즘이 과거에서부터 이어진 차별과 억압에 대한 것이기에 과거와 현재의 경험과 사건은 중요하다. 지금과는 다른 상황을 위한 페미니즘의 노력은 과거와 현재의 경험과 상황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미래는, 더 나은 사회에 대한 기대는 희망이자 노력이다. 그런데 미래에도 지금과 다르지 않다면, 이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면, 더 경악스런 일들이 이뤄지고 있다면, 어떤가. 미래의 생활이 어떠할지는 막연하게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이 소설에서 그리는 미래의 모습을 보는 것은 끔찍한 경험이다.

  페미니즘이라 불리는 소설들이 익히 알고 있는 사건과 경험 속의 여성과 남성의 모습과 내면을 부각하고 있다면『혁명하는 여자들』은 그 경험을 미래라는 진보된 과학과 접목한다. 이른바 SF 소설이다. 열다섯 명의 작가가 쓴 글을 묶은 SF 페미니즘 소설집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의 소설이 아니라 1960년대의 작품부터 최근의 작품이 수록되었는데 대체로 70, 80년대 소설이 많다. 그때에 이미 미래의 모습을 상정했는데도 현재에서 느낄 수 있는 여전한 차별과 고정된 인식들이 팽배하다. 도대체 사고의 전이는 어떠한 사건과 맞닥뜨려야만 가능한 걸까.

  이 많은 작가들 중 아는 이름은 어슐러 르 귄이 유일했다. 낯선 작가들의 이름만큼이나 낯선 미래의 상황. 여자들은 모두 현재의 순간에 느끼는 감정들을 그대로 안고 살아가고 있다. 기술의 발전이 이뤄진 공간에서 살고 있지만 그만큼 따라주지 않는 의식과 사고들은 삶을 근본적으로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데는 기여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미래의 삶 속에서의 여성들은 여전히 일상의 차별속에 놓인 채 살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집 속의 소설들은 기괴한 풍경 속에서 쓸쓸하고 안타까운 여운을 남긴다.

  어슐러 르 귄의 <정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초기 남극탐험에 관한 보고서이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그 탐험가 모두가 여성가였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그 탐험에 관해 자신들을 떠벌이지 않으며 심지어는 지금까지도 당부한다. 아문센에게는 절대 비밀이어야 한다고! 그가 끔찍스럽게 당황하고 실망할 것이라고.

  반다나 싱의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하는 여자>와 안네 리히터의 <식물의 잠>을 읽으면서는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생각났는데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각각 자신을 행성과 식물이라 생각하는 여자가 행성과 식물이 되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들이 자신을 다른 ‘모습’으로 생각하는 것은 타인들의 눈엔 비정상적인, 미친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여성’으로 가두는 사회의 억압 속에서의 의문과 스트레스에서 기인한 것이다. 

  파멜라 사전트의 <공포>는 제목만큼이나 공포스러운 감정에 휘말렸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답답함이 가득찼다. <공포>속의 세계는 극단적인 남성지배사회를 그린다. 그 속의 주인공이 낯설게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


그들의 에덴에 이브는 없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시내에 나갔던 일이 그런 생각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었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그러나 우리는 미래를 향한 신념도 함께 거둬 간다. 나의 소멸은 단지 개인적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가슴이 편평한 남성의 형태 안에 여성의 흔적만이 남을 것이다. 어쩌다 나오는 표정, 자세, 감정 따위, 사랑은 재생산과 결별하고 열매를 맺지 않는 결합 속에서 스스로를 증명해낼 것이다. 인간의 애정은 유연하니까.

나는 한 남자의 선물인 내 작은 자유를 애지중지하며 내 집에, 내 감옥 안에 앉아 있다. 나 같은 이들에게 주어졌던 자유는 언제나 그런 것이었고, 나는 과연 다른 가능성이 있었는지 다시금 의아해졌다. p314~315

 

   수잔 팰위크의 <늑대 여자>는 늑대와 인간의 삶을 사는 여성의 이야기다. 그 여성을 길들이는 인간 연인은 네 발일 때는 ‘제시’인, 두 발일 때는 ‘스텔라’인 이 여성과 어떻게 함께 할까. 결국엔 파국이 되고 마는 이 관계. 이러한 결말로 이끄는 것은 외적인 상황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나의 마음의 변화다. 늑대 여자의 연인은 제시일 때는 개로, 스텔라일 때는 여성으로 늑대 여자를 착취한다. 물론 사랑으로 보살필 때도 있었다. 그런 날들이 있었기에 제시가, 스텔라가 그의 옆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제시의 말에 스텔라의 사정을 깊이 이해하고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늑대 여자의 연인은 필요에 의해 제시와 스텔라를 대했고 그리고 필요가 떨어졌을 때 잔인하게 대했다. 늑대여자라는 설정을 빼고 본다면 현실의 남녀관계의 전형으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 그만큼 외적인 테두리의 변화가 남녀 관계의 근본적인 역할과 차별의 상황을 변화시키진 못하고 있다는 반증일지도.

   소설 속의 이야기들은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곳에서 살고 있는 인간의 모습은 별반 현실의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만큼 인간의 사고의 변화가 어렵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오래도록 이어온 관습인가, 생물학적인 요인인가. 물론 이 소설이 이야기하는 세계 자체는 극단적이라 할 지 모른다. 그러나 어차피 SF라는 장르가 가지는 특성 아닌가. 현실 자체도 디스토피아가 가득하다. 그렇지 않다 해도 현실의 상황에서 극단적이지 않은 것은 또 무엇인가 생각해 보면 딱히 낯설지도 극단적이지도 않다. 이 소설 속 세계의 개연성은 충분하다.

 안타까운 것은 책의 제목은 <혁명하는 여자들>인데 그런 여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미래 세계는 달라진 모습을 기대하건만, 그것이 여성이 남성을 정복하고 여성들을 위한 세상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과는 달라진 사회가 특정 성이 이루는 전쟁같은 승리 후의 세계가 아니라 이상적인 형태의 사회변화의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착취당하고 상처받고 억눌리는 그런 모습 속에 여성들은 놓여 있다. 남성들 역시도 현재의 정형화된 남성의 모습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모두가 꿈꾸는 이상적인 모습들을 그려볼 수 있는 모습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기에, 이러한 미래 사회를 살아가고 싶지 않기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현재의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의문을 제기하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 방법에 대해서는 각기 다른 의견이 있을 것이지만 그 근본에 대해서는 공감하며 그 방법들을 나누는 것이다. 이 소설 또한 그 역할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집의 작가들은 다양한 문학상을 수상했고 작품 또한 수상작인 경우가 많다. 소설의 취향을 떠나서 이 소설의 역할은 현재의 페미니즘에 대한 끊임없는 일깨움이다. 현실 자각인 동시에 미래에 대한 각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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