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콜럼버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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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고발자


굿바이, 콜럼버스. 필립 로스, 정영목 옮김, 문학동네, 2014.8.29.


  1933년생인 필립 로스는 많은 책을 썼다. 가만 보니 핍립 로스의 소설을 제법 읽었다. 어째 필립 로스가 많은 책을 쓴 것보다 그가 쓴 책들을 거의 다 읽었다는 사실이 놀랍게 느껴진다. 그만큼 필립 로스의 책을 좋아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좋아함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확실한 건 필립 로스의 첫 번째 작품이자 청년기 작품인「굿바이, 콜럼버스」를 먼저 읽었더라면 그 뒤로 필립 로스의 책을 읽는 일은 더디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필립 로스의 문장과 이야기하는 방식과 이야기에서 받은 깊은 인상은 오랜 세월 다져진 필립 로스에게서 나온 진중함, 연륜에 있었나보다. 글이, 이야기가 몰입하게 하는 힘이 있어 반복된 주제의식에도 때론 비슷한 상황 설정에도 필립 로스의 책속으로 빨려가게 했다. 긴 호홉의 필립 로스의 글에 매료된 상황에선 청년기, 스물 여섯의 필립 로스의 작품은 재기발랄한 아이러니를 주긴 했지만 장년기 이후의 느낌보다는 확실히 가볍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이후 필립 로스에게 반복되어 나타난 유대인 문제에 관한 주제를 너무나 명확하게, 딱,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필립 로스의 소설 세계가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끔 되었다. 여전히 그의 글 속 등장인물들은 작가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는 듯하고.

  「굿바이, 콜럼버스」는 중편이고 이 책에는 다섯 편의 중단편이 더 실려 있다. 일평생 필립 로스는 유대인들의 비난을 받았는데 그의 작품의 주제가 유대인과 유대교에 대한 풍자와 신랄한 비판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유대인이 아니었다면 더한 공격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유대인이기에 어쩌면 그 자신에 대한 정체성이, 자신을 규정하는 문화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찰이 글로 표현된 것이라 한다면 이 내부고발자적 시선은 그에겐 고통을 깊이 담은 고통의 글쓰기였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필립 로스의 주제의식에 힘입어 이 중단편 속에서 「신앙의 수호자」와 「유대인의 개종」이 그토록 눈에 띄었는지도 모른다. 담담히 읽은 다른 작품에 비해 「신앙의 수호자」에서는 나도 모르게 감정을 노출하기까지 했다.    

 「굿바이, 콜럼버스」는 필립 로스의 소설에서 더러 봐온 이야기였다. 한창의 젊은 남녀의 사랑이야기, 라고 해야 하나. 그리고 사랑하지만 유대교 교리에 따른 갈등과 계층의 차이를 느끼게 되는 그런. 게다가 잘 사는 쪽은 늘 여자이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화자는 남자인. 그것은 청춘이 갖는 불안함인 걸까, 그들 세계가 주는 어쨌든 여기 등장인물들이 낯설지 않은데 이들이 자라, 결국 필립 로스의 다른 소설 속에 등장한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오지가 알고 싶은 것은 늘 다른 것이었다. 오지가 처음에 알고 싶어했던 것은 「독립선언서」에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고 나오는데 빈더 랍비는 어떻게 유대인을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빈더 랍비는 정치적 평등과 영적 정통성의 차이를 설명하려 했지만, 오지는 자기가 알고 싶은 것은 다른 것이라고 계속 우겼다. 그때 처음으로 그의 어머니가 학교에 왔다.


 「유대인의 개종」은 위와 같이 오스카 프리드먼의 궁금증에서 시작한다. 또한 유대인이 오직 유대인의 불행만을 슬퍼하는 것, 예수의 신성에 대해서도 궁금한 이 소년에게 랍비도 엄마도 아이의 뺨을 때리는 것으로 답한다. 이에 지붕으로 올라가 이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하는 아이. “약속해주세요. 하느님 문제로 누굴 때리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약속해주세요.”라는 아이의 외침이 안쓰럽게 귓가에 남겨져 있다.

 「신앙의 수호자」자야말로 유대인에 관한 가장 풍자적이고 또한 비판적인 단편이 아니었나 싶다. 등장인물인 셸던의 행동과 말로 인해 몇 번을 가슴을 쳐야 했다. 답답함으로. 오직 유대인으로 살고자 하는 이 어린 장병에게서 시오니즘의 절정을 본 기분이었다. 이 위선적인 신봉자의 행태는 그곳이 군대였기에 더욱 더 정점의 감정을 느끼게끔 했다. 생각거리를 주는 것만큼이나 셸던의 철없고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행태에 무조건적인 분노가 솟았다는 점에서 난 종교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구나를 느낌과 동시에 막스의 외할머니과는 아니구나를 함께 느꼈다. 그러니까 셸던의 행태에 대해 자비가 정의보다 우선한다라는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없었다. 군대에서 유대인의 전통과 교리를 들먹이며 유대인이 먹어야 할 음식을 요구하고 유대인의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며 외박을 끊어 중국집 요리를 즐기는, 자신의 인맥을 동원하여 부대 배치를 바꾸는, 그리고 그런 모든 일들이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라고 외치는, 그리고 그 행동에 아무런 거리낌없는 이 셸던에게서 많은 얼굴이 겹치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엡스타인」의 결말은 웃프다. 글쎄, “사람들이 자기 걸 빼앗아 가기 시작하면, 누구나 손을 뻗게 돼. 움켜쥐게 돼…… 어쩌면 돼지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라고 말하는 루 엡스타인은 무엇을 빼앗기고 있다고 느꼈을까. 열심히 일했고 사업에 성공했지만 가업을 이을 아들은 어린 나이에 사망했고 딸은 사회주의 운동이나 하며 말마나 ‘자본가’ 아버지를 비난하고 조카 녀석과 딸은 젊음의 몸매로 각자의 파트너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사랑에 몰두하는데 자신의 아내는 아름다움이 사라진 지 오래. 이웃집 여인에게서 품은 욕망이 자신이 움켜쥐고 싶은 것이었을까.

 「노래로 그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다」. 그렇다. 1950년대의 미국. 인간은 얼마나 개별적인가. 그러나 많은 이들이 누군가를 판별하는데 그렇게 열의를 보이지 않는다. 단편적인 것들로만 판단하며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도 다 예단해 버린다. 이런 일들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알면서도.

 「광신자 엘리」에서는 님비 현상을 느꼈다. 한뿌리인 듯한데, 이 종교의 갈라짐이 인간의 유대를 얼마나 막고 있는가 새삼 느껴진다. 공동체라는 것은 더불어 살아감이 아니라 그들끼리의 삶의 구축인듯하다. 공동체, 공동체 하면서도 갈등하는 집단 사이에서 미친듯한 이 엘리의 절규가 참 안쓰러웠다.

  결국 이 모든 이야기들 속에서 인간의 이기심을 보게 된 것인가 싶다. 소설이 작가의 경험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필립 로스가 얼마만큼의 갈등을 마음 속에 품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글로 자신의 내면을 표출할 수 있었기에 후련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또한 그만큼의 힘겨움도. 이러한 위선이나 허위들을 유대인이 아닌 이가 지속적으로 제기했더라면 그것은 문화에 대한 몰이해와 배타주의적인 사고 등등의 온갖 비난을 들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작품을 작품으로 보지 않는다거나 그 문제의식을 외면하는 일들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러니 문학성과 함께 이러한 ‘문제’들이 있음을 깊이 있는 성찰의 눈으로 보고, 느끼고, 깨닫고, 글로 써준 필립 로스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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챈들리스크


레이먼드 챈들러 - 밀고자 외 8편, 레이먼드 챈들러, 현대문학, 2016-04-08.


  새정부 들어 공인탐정제에 대한 논의가 있다. 탐정은 어린 시절부터 읽은 셜록 홈스 덕분에 익숙하고 열광적인 직업으로 여겨진다. 아니, 직업으로서의 탐정을 생각해보진 않았기에 왠지 로망이 현실가 맞물려 어떤 형태가 될지 궁금해지긴 한다. 실제 존재한다면, 실생활에서 적용한다고 생각하면 소설 속에서 보던 그 낭만적인 느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탐정’의 형태가 흥신소의 고급 버전이니까. 흥신소가 갖는 그 불법적이고 불쾌하고 음침한 이미지가 ‘탐정’에 드리워질까 염려되는 점이 있다. 그래도 나날이 범죄가 증가하고 CCTV 보관기일의 한계로 단서를 놓치는 경우도 많으니 이 제도가 도입이 된다면, 어떤 형태로든 범죄수사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물론 단점도 있을 테고 그 장단점이 잘 맞물려 해결되기를 희망할 뿐이다.

  범죄가 증가하는 것은 싫지만 범인을 잡고 사건의 해결하는 과정을 들여다보는 것은 분명 짜릿함 쾌감이 있다. 탐정소설, 추리와 미스터리 소설이 인기있는 이유일 것이다.

  레이먼드 챈들러는 이 탐정소설을 ‘문학’으로 이끈 작가로 유명하다. 또한 헤밍웨이체로 유명한 ‘하드보일드’를 장르화시킨 장본인이자 여타의 작가들-무라카미 하루키, 로스 맥도널드, 마이클 코넬리, 하라 료-이 그의 영향을 받았음을 얘기하고 있다. 1930~40년대의 미국의 분위기를 흠씬 드러내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은 영화계에서도 크게 호응해서 그의 작품은 영화화된 것이 많다. 그리고 그가 남긴 것이 바로 탐정 필립 말로이다. 유명한 캐릭터를 창조한 것이다.

  “하드보일드.” 이 말의 본뜻은 삶은 계란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푸욱 삶은 계란이다. 반숙이 아닌 완숙으로 팍팍하고 물기 없는 건조한 계란을 가리키는데 이 말이 소설과 영화로 넘어가면서 새로운 의미가 더해졌다. 바로 건조한 문체다. 수식이나 감정은 배제한 사실주의적인 표현을 쓰는 걸 가리킨다. 폭력의 잔인성 때문일까, 폭력적이니 주제에 주로 사용되어 오히려 더 공포감을 배가시키기도 한다. 당연, 탐정소설에서 자주 볼 수 있고 레이먼드 챈들러가 이런 스타일로 탐정소설을 가볍게 읽고 넘기는 글이 아니라, 문학적인 경지로까지 이끌었다고.

  작가의 생애 또한 흥미롭다. 1932년 대공황으로 일자리를 잃고 대중소설 잡지를 읽으며 지내다가 소설을 쓰고 마흔이 넘어서 작가로 데뷔한다. 하지만 대공황 이전에도 그는 특별히 ‘일’에 대한 애착이 있었던 것 같진 않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지만 6개월만에 그만두고 몇 번의 일자리를 얻었지만 그때마도 불성실한 근무태도를 보였다. 전쟁에 참전하였고 18세 연상의 여인과 연애를 했고 어머니의 반대로 어머니의 사망 후에 결혼했다. 다른 여성들과의 염문 이야기도 흘러나오는데 아내의 죽음 이후에는 과음과 우울증으로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고 건강악화로 입퇴원을 반복했다. 그가 사망하던 해엔 비서에게 병원에서 청혼했다고 한다. 70평생의 그의 삶을 보건대, 어쨌든 자유로운 영혼이었다고 느껴진다.

  고전적인 느낌이 드는 그의 소설은 탐정소설임에도 그 건조한 문체에도 불구하고 낭만성이 풍긴다. 시대적인 분위기가 가미되어서 그런가 싶기도 하지만 확실히 ‘흥신소’에 일을 맡긴 것이 아니라 고급 탐정에게 일을 맡긴 기분이 든다. 잔인하고 악랄한 느낌보다 쓸쓸한 느낌이 먼저 다가온다. 어쩌면  사건보다 인물, 탐정 필립 말로에 중점이 두어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날 밤 사막바람이 불었다. 고온 건조한 샌타애나의 전형적인 열풍이었다. 이 바람이 산 고개를 넘어 내려오면 머리카락이 곱슬곱슬 말리고 피부가 가려워지고 괜히 초조해진다. 그런 밤이면 어느 술판이든 한바탕 싸움으로 끝난다. 유순하고 가냘픈 아낙네들은 식칼의 날을 만지며 남편의 목을 노려본다. 어떤 일이든 가능하다. 칵테일 바에서 거나하게 맥주를 걸칠 수도 있다.

  

  사건이 있었고 문제가 발생했고 그것을 해결했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사건’보다 저런 묘사가 기억에 남는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이야기, 스토리를 이해하며 쫓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표현방식에도 눈길을 주고 있다는 걸 다시금 알았다. ‘챈들리스크Chandleresque’라 불리는 작가의 문체가 갖는 힘일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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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는 중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 은유, 서해문집, 2016.12.26.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는 제목을 보면서 감정의 분출로 인해 그 순간의 속시끄러움이 조금은 해소가 되었다는 그런 의미를 생각했다. 싸웠다는 자체로 뒤늦은 후회가 밀려오긴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카타르시스가 작용할 테니. 물론, 일방적으로 깨지는 싸움이라면, 아무런 말도 못하는 거라면 전혀 카타르시스를 느끼진 못하겠지만. 어쨌든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그렇기라도 하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제목이 좋다 생각했다.

  작가는 필명만큼이나 은유를 잘 다루는 것 같다. 수유너머에서 활동하고 있느니만큼 “수유너머향”이 글에도 풍긴다. 철학과 인문학의 접합, 니체향이 좀더 더해지고 일상의 행위와 사유에서 존재를 생각하는 것. 아무튼 글쓰는 일이 힘들다 하지만 삶의 희로애락을 다루는 방식이 글쓰기인 작가에게 부러움을 느낀다. 


사는 일이 힘에 부치고 싱숭생숭이 극에 달하는 날이면 글을 썼다. 오직 노릇과 역할로 한 사람을 정의하고 성과와 목표로 한 생에를 평가하는 가부장제 언어로는 나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었다. 몸에 돌아다니는 말들을 어디다 꺼내놓고 싶었다. 꺼내놓고 싶은 만큼 꺼내놓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고유한 슬픔일지라도 언어화하는 순간 구차한 슬픔으로 일반화되는 게 싫었다. 우리가 입을 다무는 것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하고 싶은 것을 모두 말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던가. 말하고 싶음과 말할 수 없음, 말의 욕망과 말의 장애가 충돌하던 어느 봄날, 나는 이미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여자, 존재, 사랑, 일. 책속에서 다루는 네 가지 주제다.

  이 땅에서 여성이란 존재로 살아가는 일이란 특히 피곤한 일이라 말하고 싶진 않지만 언제나 그렇게 되어 버린다. 본질적인 자아에 대한 성찰도 필요하지만 여성이란 명명에 타인의 시선과 제도와 관습으로 인해 전진하지 못하는 일들이 존재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이 땅의 여성들의 이야기는 표현의 방식이 다를 뿐 같다. 여자라서 엄마의 삶으로 더 살아가야 하는 것, 육아와 가사와 삶, 직장일을 공존시키며 행복하고 평화로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의 힘겨움, 남편과 아이에 종속된 삶의 존재로서의 ‘나’, 사랑하는 일과 노동하는 일의 기쁨과 슬픔에 대한 생각들.

 수많은 개인들을 만나 이야기하면 그들의 경험과 거기에서 느낀 감정은 너무나 같다. 그러니 특별히 공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단지 너무 같은 이야기의 돌림이라 지겨울 때도 있다. 그럼에도 왜 여성들의 글쓰기를, 페미니즘이란 책을 계속 읽고 읽는 것일까. 명백히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데도 왜.

  말하는 사람이 다르니까. ‘누가’ 이야기하느냐라는 점에서 접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누구나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그 각각에 대한 공감과 위로를 건네기 위함이 아닐까. 같은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같은 이야기를 하는 각각의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어 너의 생각이 이렇구나, 너의 경험에 네가 힘들었구나, 잘 버티어 주었다. 앞으로도 잘 버티어 나가자, 라고 말하기 위한 것 아닐까.

  

어디가 아픈지만 정확히 알아도 한결 수월한 게 삶이라는 것을,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 게 낫다는 것을, 시는 귀띔해주었다. “인간은 자기가 어떻게 절망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알면 그 절망 속에 살아갈 수 있다”는 벤야민의 말을 나는 시를 통해 이해했다.


  매번 이런 책을 찾아서 아픔의 지점을 확인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한결 수월하게 살아가기 위한 나름의 노력이자 발버둥. 이러한 책들이 많아진다는 건, 아픈 이들이 많다는 얘기인가. 발버둥치는 이들이 더 많다는 이야기인가. 사는 일에 부칠 때마다 글쓰기라도 된다면 좋으련만. 글쓰기로도 무엇으로도 위로되지 않는 시간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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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념


가만한 당신 - 뜨겁게 우리를 흔든, 가만한 서른다섯 명의 부고, 

최윤필, 마음산책, 2016-06-30.


  신문 속 단 몇 칸. 이름만 적힌 부고란을 보면서도 먹먹할 때가 있다. 누군지 전혀 모르는 이들의 이름이 사망자 명단에 있다는 것이 주는 느낌,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강한가. 그런데 이름 몇 글자에서 더 나아가 그들의 한 생애까지 알고 나면 그들이 보낸 한 생에 대한 연민이 더해진다. 이 책은 그렇게, 이 세상의 보다 나은 변화를 위해 한발짝 더 멀리, 깊이, 높이 움직인 이들의 ‘부고’와 함께 그들의 생을 담담히 요약하여 전하고 있다.

  그래서 아쉽다. 타인의 생에 대한 서술에 드라마틱함을 요구한다는 것이 송구하지만 ‘책’이라는 점으로 접근하면 담백함이 자칫 단순·지루함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객관적인 생애에 대한 서술은 좋지만, 전반적으로 단조롭게 느껴졌다. 이들의 생애 자체가 드라마틱한 것이지 구성과 서술은 아니었다. 저자는 특별히 이들 삶에 자신의 의견을 더하는 걸 자제했다. 여러 자료들을 더해 ‘보여주는 것’을 중점으로 했다. 평전이 아니라 ‘부고’라는 점을 다시 상기해야 했다. “뜨겁게 우리를 흔든” 그러나 “가만한” 서른 다섯에 대한 부고라는 점을.


낯선 이의 가만한 미소 혹은 가만히 건네는 손의 온기가 값진 위안이 될 때가 있다. 힘겨운 자리에 혼자 섰거나 그런 기분에 지친 이에게는 마주 서는 것보다 나란히 서서 가만히 같은 곳을 바라봐 주는 게 고마운 일일지 모른다.


  저자는 “가만한 당신”이란 제목을 붙였다. 가만하다는 말은 조용하다는 말이다. 사전은 “(움직임이)거의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고 차분하다”라고 정의한다. 이들의 삶은 결코 “가만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삶의 경험을 “투쟁화”하며 불의와 억압에 맞서려던 그들의 정신은 같은 경험을 공유한 이들의 아픔을 위로하며 감싸안고 차분히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낯선 이의 행동 하나가 오늘날 내가 누리고 있는 현실을 만들었다는 것을 요약된 그들의 생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아직도 여전히 변화는 필요하고, 또 필요하지만 그들이 시작점을 만들어 놓았다.

  그들은 페미니스트로, 인권운동가로, 장애인운동가로 거짓을 폭로하고 진실을 추구하는 자로, 차별과 억압을 철폐하는 것에 자유를 누릴 권리에 대해 온 힘으로 외치고 외쳤다. 저자가 어떤 기준으로 서른 다섯 명의 부고를 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서른 다섯 명 중에는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이 많았고 대체로 여성이기에 폭력과 차별을 경험한 이들이기도 했다.

  하요 마이어라는 유대인 강제수용소 생존자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는데 ‘시오니즘’에 대한 나의 관심 때문이었다. ‘시오니즘’이 갈수록 불편하게 느껴져 같은 지점의 생각을 만나서, 유대인의 시오니즘 비판이라 눈여겨봐졌다. 하요 마이어는 분명 강제수용소가 유대인을 비인간화하는 공간이고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런 아우슈비츠의 경험을 시온주의자들의 행태에 비교하면서 생각한다. “이스라엘이 시오니즘적 야심과 범죄를 감추기 위해 아우슈비츠의 의미를 왜곡하고 있다”고. 시오니스트들이 “아이들에게(영토 확장과 팔레스타인인 축출의) 편집증을 주입하기 위한 수단으로 홀로 코스트를 이용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1970년대 초 여성 최초로 뉴욕 중심부에 섹스토이숍을 연 델 윌리엄스의 이야기도 놀라웠다. 언뜻 “사업수완”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는데 델 월리엄스의 동기는 “여성의 주체성 성 의식의 자유와 권리”였다.

  호주의 백호주의 정책에 따라 수용소에 갇혀 살아야 했던, 그러나 두 어린 동생을 이끌고 수용소를 탈출해 9주 동안 맨발로 1600킬로가 넘는 거리를 걸어 고향으로 돌아온 원주민 몰리 캘리의 삶도 잊지 못할 것이다. 또다시 끌려가고, 탈출하고, 아이들을 빼앗긴.

  돌아보면 역사 속에서 인간은 참으로 가증스럽고 극악무도하게 등장한다. 결코 가만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이끌어 간 것은, 역사가 정의롭게 흘러가도록 이끈 것은 안타까이 부고를 전한 이들처럼, 끝끝내 ‘가만하게’ 미소를 짓고 손은 건넨 이들이었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역시 삶이란 이러한 이들을 만나는 희망에 의지해 살아볼 만하지 않은가, 이런 생각도 든다. 그래서 이들의 부고에 깊이 머리 숙여 묵념한다. 이들의 삶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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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풍경


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정희진, 교양인, 2013-02-12.


더욱 중요한 시사점은 평화시 남성 중심적인 놀이 문화가 바로 전쟁시에 집단 강간이나 대략 학살과 같은 폭력으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집단 강간, 고문 등 전시 폭력은 ‘광기’ 때문에 급작스럽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일상 문화의 연장선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남성들의 폭력적인 일상 문화를 성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납치살인사건 납치 목격자, 부부싸움하는 줄 알고 지나쳤다 

 ∙내연녀 말다툼 후 목졸라 살해, 시신 유기…지난 남자 만난 얘기에 홧김에

 ∙동거녀 목졸라 살해 교회 베란다 유기… “끝내겠다” 범행 암시

 ∙‘예전에’ 식당주인과 다퉜다고, 여친 창밖 던지려한 30대, 흉기도 휘둘렀으나…감형

 ∙하동 대안학교 40대男 교사 여중생 3명 강간·성추행, 현재 잠적. 교장, 교사 3명, 행정실장, 교직원 2명 같은 혐의로 입건


  지난 한주의 ‘흔한’ 기사다. 익숙한 사건에 놀람이 현저히 줄어든다. 다섯 개의 기사에서 세명의 여성이 ‘목졸라’ 살해됐고 버려졌다. 한명은 수없이 폭행당했고 죽을 뻔했다. 몇 명일지 모르는 중학생 아이들이 폭행당했고 어떤 아이들은 성폭행당했다. 한명이 아니라 몇 명일지 모르는 이들로부터 일 수 있다.

  내연녀가 “지난 남자를 만난 얘기를 해서” 홧김에 목을 졸랐다는 남편 있는 여자를 만나는 남자, “여자친구와의 관계를 끝내겠다”며 친구와 통화하고 실행한 남자, 관계를 끝내는 방법이 목졸라 화단에 버리는 것인가? 떡볶이를 먹는데 ‘전에’ 식당 주인과 말다툼을 했다는 이유로 격분해 여자친구의 머리채를 잡고 베란다로 끌고 가 창밖으로 던지려하고 흉기로 죽여버린다 위협하고 폭행했고, 이전에도 10여 차례 폭행하거나 상해를 가했으나 감형된 남자. 부부싸움을 하는 줄 알고 관여를 하지 않았다는 납치가 벌어진 장소에서 일하는 직원….

  떡볶이를 먹다가 여자친구가 ‘옛날에’ 식당 주인과 말다툼을 했다고 “격분”하는 이도 있는데 이런 뉴스를 보면서 “격분”하지도 못하는 난 뭔가. 다음 주에도 이런 기사들은 또 나타날 거라는 걸 아는 이의 반응이다. 인터넷에 파주에서 벌어진 최근 사건인 ‘파주 내연녀’만 검색해도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던 듯 연도별로 파주에서 벌어진 내연녀 살인·폭행 사건 기사가 쏟아진다. 성폭행, 강간 사건 역시 넘쳐나는데 단순히 ‘폭력’만 행사한 사건은 수두룩하다.

  개인의 비윤리성이라 성토한다 하더라도 반복된 이 ‘구조’를 들여다보면 역시 지친다. 정말 이 모든 기사들 속 가해자들의 인성과 윤리의 부족이거나 정신병의 문제일까. 기사는 A, B, C, 혹은 김모씨, 이모씨로 나타나니 넘치는 기사들 속에서 어떤 사건이 ‘나’에 대한 기사인지 쉽게 파악하기 힘들 정도다. 납치사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아는 이, 어쩌면 가까운 사람이 가해자이다. 부부 싸움의 경우 큰 폭력으로 번지기도 하고 이때 대체로 남성이 가해자인 경우가 더 많다. 그럼에도 생명이 오가는 상황일지라도 부부싸움을 말리기 위해 접근·관여하지 못하는 사회분위기가 여전히 있다. 아무리 사회가 변했다 해도, 아니라고 해도 이런 기사들을 반복적으로 접하다보면 정말로 남성들에겐 폭력의 ‘권리’가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정희진이 지적했듯이 말이다.


남성은 여성을 때릴 권리를 타고났다고 간주되기 때문에, 폭력 그 자체는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다. 폭력은 당연하거나 폭력이 아니다. 따라서 쟁점은 폭력이 아니라, 어느 정도인가, 왜 언제인가 따위다. 그래서 여성들은 “당신 미쳤어? 너도 나한테 맞을래?”가 아니라 “왜 이러세요?(지금이 그 때인가요?)”라고 가해자에게 묻는 것이다.


  벌써 한 해의 절반이 지나간다. 세상이 보다 민주적으로 변화되기를 갈망한 지난 겨울과 봄의 경험이 여전히 ‘대통령’만 바뀌고 다른 것은 바뀌지 않았다라는 현실에 직면해 있는 것처럼 남녀를 둘러싼 환경과 구조 역시 바뀐 듯 보일 뿐, 바뀌지 않았다. 인식에서도 마찬가지다. 일상의 이야기 중에 몇 번이라도 ‘여성’이 들어가면 당장 페미니즘이니 메갈이니 하며 성토하는 목소리가, ‘격분’하는 목소리가 있는 게 여러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게 한다. 슬픔과 분노와 비통함 등등의 감정이 마구 휘몰아친다.


폭력은 원래 이유가 없다. 권력 행동에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폭력에 이유가 있다면,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있을 뿐이다. 사회 운동은 그 이유를 묻는 것이 아니라 조건을 파악해 그것을 ‘제거’하고 제약하는 것이다.


  최근 모임 뒤풀이에서 후배가 여자 선배에게 선배를 보는 순간 자신의 시누와 너무 닮아서 지금까지 아무 말을 건네지 못했다라고 고백했다. 여전히 자신에게 트라우마로 남아있다는 걸 알았다며 오래도록 감정을 토로한 일이 없었는데, 시누와의 관계가 자신에게 미친 영향을 생애 ‘처음으로’ 털어 놓았다. 개인의 경험을 얘기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여성들이 뒷담화로 시댁을 “까는” 그런 것과는 다른 형태의 진솔한 성찰이었다. 그런데…얘기를 듣던 남자 선배가 “공통의 주제로 얘기를 하자”했다. 다른 남자들이 불편해 하는 것이 보이지 않냐며.

  이 말에 격분까지 갈 뻔한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공통의 주제라는 말도 그러했고 남자와 여자의 선을 긋는 태도에 불쾌함, 실망감, 섭섭함이 솟았다. 한 사람으로서, 선배로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남편’에 이입하여 이야기를 듣는구나 싶으면서도 개인의 무의식과 성찰을 주제로 한 이야기 끝의 그 말은, 배움이라는 것의 소용없음까지도 느껴졌다. 삐딱한 마음에 그 선배 앞에서 페미니즘과 관련된 이야기만 줄창 꺼내볼까 싶기도 했다.

  정희진은 페미니즘이니 여성주의니 하는 용어에 많은 이들이, 특히 남성들이 거부감을 느끼고 있고 “여성의 경험과 인식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고, 남성의 생각이 곧 인간의 생각으로 간주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남성적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라는 질문에, “당연하지요. 세상에 그것밖에 없으니까요.”라고 답한 프랑스의 철학자 뤼스 이리가레의 말대로, 세상에 하나의 목소리만 있을 때는 다른 목소리는 물론이고, 그 한가지 목소리마저도 알기 어렵다. 의미는 차이가 있을 때 발생하며, 인식은 경계를 만날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많은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여성의 목소리도 높아 가는 듯한데 여전히 하나의 목소리만이 힘을 뻗어가는 기분은 왜일까. 존중, 존중하면서도 뒤에서는 비난하며 ‘결정적인’ 상황에 수용되는 목소리가 따로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한국 사회의 일상화된 폭력, 폭력을 견인하는 이 권력의 힘. 여전히 페미니즘은 도전받고 있고, 도전해야 하고 갈 길이 멀다. 그나마 정희진처럼 풍부하고 쉬운 언어로 페미니즘에 대해 일상의 성정치학에 대해 글을 쓰는 이가 있어 감정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많이 배우게 되어 힘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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