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젤라의 재
프랭크 매코트 지음, 김루시아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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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슬픈 레모네이드


안젤라의 재, 프랭크 매코트, 문학동네, 2010..


  월식이 있었다. 옛 사람들은 재앙의 징조로 여기고 두려워했다. 달이 붉게 보이는 개기월식을 더욱 두려워했다. 달이 지구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인 줄 몰랐다. 갑자기 하늘에서 달이 사라졌다 생각했다. 과학이란 이런 맹목적이고 막연한 두려움을 ‘다소’ 해소하는 역할을 했다.

  과학이 아무리 ‘그것은 이러이러하다’라고 해도 이미 싹틔운 믿음이나 두려움은 쉽게 바뀌지 않기도 했다. 이제 월식은 일부러 찾아보려는 핫한 아이템이거나 소망을 선사하는 ‘지니’, 불운을 암시하는 징크스 등 개인의 경험과 느낌이 결합한 상징이 되었다. 퓰리처상 수상작『안젤라의 재』속 미국으로 떠나는 작가와 가족들이 나누는 대화에서처럼 말이다.

 

오늘 이 시각에 월식이 있을 거라고 했어요.

우리는 모두 골목으로 나가 달이 둥그런 검을 그림자 뒤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본다. 파 이모부가 말한다. 프랭키, 미국으로 떠나는 네게 아주 좋은 징조로구나.

애기 이모가 말한다. 아니에요. 이건 나쁜 징조라구요. 신문에서 읽었는데 월식은 세상의 종말을 예고하는 거래요.

종말은 무슨 얼어죽을 놈의 종말이야. 이건 프랭키 매코트의 새 출발을 알리는 좋은 징조란 말이야. 이제 몇 년만 있으면 프랭키는 양키처럼 살이 통통하게 올라서 멋진 양복을 입고, 새하얀 이를 가진 예쁜 여자를 옆구리에 끼고 돌아올 거야. 어디 두고 보라고.

 

  프랭크 매코트의 자전적 회고록 『안젤라의 재』는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 내내 애잔함을 드리우는 이야기다. 마냥 청량하고 미학적 이미지로 꽉 찬 아일랜드가 오물처럼 지저분하고 검은, 회색빛으로 순식간에 덮이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 그런 얘기 속 이 월식 장면은 참 아리게 다가왔다. 그래서일지 모르겠다. 월식이 일어났다는 얘기에 월식을 바라보며 미래 소망의 징조를 갈구하던 이 가족들의 바람이 생각나는 것은.

 『안젤라의 재』를 줄거리로 요약하자면 1930년대~1950년대의 삶이란 전쟁과 대공황으로 인한 기근으로 온세계가 처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모습, 그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나라의 부모세대들이 얘기하는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와 고스란히 닮아 있다. 아일랜드인 작가의 엄마 안젤라 시언은 미국에서 아일랜드계인이자 구IRA 말라키 매코트를 만나 결혼과 출산을 하고 다섯 아이를 낳는다. 그동안 가난은 지겹도록 붙어 있었고 말라키는 무능 더하기 술꾼의 면모를 발휘한다. 태어난지 몇 주 되지 않은 딸이 사망하자 견딜 수 없는 슬픔과 가난과 굶주림으로 가족은 아일랜드로 귀향한다. 그곳의 삶 역시 나아질 것은 없다. 나아질 것 없다는 얘기는 가장 말라키의 태도 역시 변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일하기보다는 실업수당에 의존하고 그마저도 술로 탕진하는 말라키는 자신이 조국 아일랜드를 위해 전쟁에 참여하고 다친 것만을 기억하고 부르짖는다.

  장남인 작가는 쌍둥이 동생과 또다른 동생의 연이은 죽음을 겪는다. 아이의 흔적을 보며 살아갈 수 없는 안젤라는 또다시 가족을 이끌고 이사를 가는데 그곳은 마을의 공동변소 옆이다. 매일을 역겨운 냄새와 생활하기에 질병마저 떠나지 않는 그곳에서 프랭크는 동생들과 성장해 간다. 아빠의 실업수당에 의지해 겨우 살아가지만 말라키는 결국 가족들에게 실업수당도 일을 해서 돈을 쥐어주지도 않은 채 사라져버리고 가족은 빈민구호를 받거나 구걸을 통해 생계를 겨우 이어간다. 그리고 프랭크는 열두살, 교육이 아니라 직업전선에 뛰어들어 엄마와 어린 동생들을 보살핀다.

  작가는 가난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세세하게 묘사한다. 가난이 그들의 삶을 어떻게 만들어가는지 보다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이 그 시절의 보편적인 그렇고 그런 ‘가난한 시절을 보낸 이야기’와 차별적인 것은 무얼까.

  소설이 아니라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 회고록이라는 데서 더욱 애잔한 감정을 느낀다는 점이 있다. 모든 이야기는 작가가 경험한 것이고 등장인물들은 실제 가족의 이름이자 실존인물이다. 이웃들 모두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모습 그 자체다. 그럼에도 묘하게 다른 느낌.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그것은 작가의 지난 얘기에 대한 현재형 서술에서 느껴지는 생생함과 슬픔의 절묘한 절제와 극대화, 아일랜드와 아일랜드인의 삶을 엿보는 맛에 있다.

  아일랜드인은 8백년 동안의 시달림으로 영국에 대한 반감이 크고 차라리 전쟁이 아니었다면 그 누가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으랴 생각한다. 깊게 박힌 민족주의 또한 가득하고 생각보다 불끈 불끈 소리부터 지르고 보는 기질이 있어 보인다. 카톨릭 사제들은 그들의 기본적인 존재이유를 잘 살리는 듯 보이지 않고, 가난한 이들 앞에선 벌컥벌컥 문을 닫아버리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이 힘들고 가난한, 또한 지긋지긋한 삶을 작가는 잘 버티었고 질병으로 인한 몇 번의 위기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그리고 희망의 땅이 된 미국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때 그 삶속에서, 현재의 삶에서의 작가는 마냥 절망적이지 않은 시선을 지니고 있었던 듯하다. 그저 어리다고만 한다면 ‘철없음’이란 꼬리표가 따라붙기 마련이다. 어려서라고 하기엔 독특한 아일랜드인의 유머코드가 있다. 작가는 그 시선들을 이 책속에 펼쳐놓아 힘들고 슬프고 애잔한 이 얘기를 거듭 이 유머의 끝으로 끌고 가 미소짓게 한다.

  책을 읽기 전에도 후에도 안젤라의 재가 의미하는 바가 뭘까 생각했다. 기독교에는 재를 이마에 바르고 죄를 고백하고 고난을 기억하는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 있다. 안젤라가 미국에서 말라키를 만나는 것에서 시작하니 작가의 어머니 안젤라에 대한 이야기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평균대를 균형잡듯 걸어가는 네명의 아이들 표지사진과 시작부터 벌써 많은 아이들을 낳은 안젤라를 보며 그리고 그 아이들을 잃고 미친듯 절규하는 안젤라를 보며 안젤라의 재가 ‘안젤라의 아이들’로 겹쳐졌다. 안젤라의 아이들. 그 시절이니까 더욱 더 그러했겠지만 이 땅에서 엄마의 역할이란 아이를 낳고 낳고 낳고 죽고 죽는 아이를 지켜보는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재의 수요일, 신앙심 깊은 안젤라는 어떤 죄를 고백할까.

  죽음의 문턱에서 레모네이드를 찾는 안젤라와 엄마에게 레모네이드를 먹이는 프랭크의 모습이 참 슬프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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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들은 생각이란 걸 하지 마라


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돌베개, 2007-01-12.


  『이것이 인간인가』는 프리모 레비의 수용소에서 겪은 생생한 체험담이다. 이탈리아인인 그가 어떻게 수용소로 가게 되었는지, 수용소에서 어떠한 삶을 겪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당연 전쟁의 참상과 전쟁이 인간에게 가하는 폭력과 인간성의 소멸을 그려낸다.

  내용에서 이미 ‘감정’이 어떤 상태로 이르게 될 지 예감할 수 있는데 프리모 레비의 문체는 시종일관 담백하다. 그런 까닭에 프리모 레비는 ‘독일인에 대한 분노’는 어디있느냐는 질문까지 받는다. 하지만 독자들은,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힘든 상황을 겪은 이가 맞는가 싶을 정도로 덤덤하게 지난 일들을 전하는 프리모 레비의 문체에서 오히려 냉정한 분노를 경험하게 된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더욱 명료해지고 그리하여 전쟁의 참상이, 고통을 겪은 인간의 비애와 고통이 극대화된다.


역사와 삶 속에서 ‘누구든지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며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가복음 4장 25절」)’라는 잔인한 법칙을 실감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인간이 홀로 존재하며 삶을 위한 투쟁이 원초적인 메커니즘으로 축소되어버리는 수용소에서, 이 불공평한 법칙은 공공연히 효력을 발휘하며 모두에게 인정을 받았다.


  프리모 레비는 “끝도 없는 절망의 나락에서 자신들을 건져낸 것이 살려는 의지나 의식적인 체념같은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불편함, 구타, 추위, 갈증’이었다”고 말한다. 평범한 인류의 표본이었기 때문에. 인간을 파괴하고 인간을 죽이는 인간을 목격하는 일은 수용소에서 비일비재했다. 프리모 레비는 “인간이 다른 인간의 눈에 하나의 사물일 뿐인 시절을 보낸 사람의 경험이 비인간적”이라고 말한다. 프리모 레비는 인간이 광기에 물든 저 2차 세계대전에 인간을 사물화하는 인간들을 목격했다. 지금은 광기도 전쟁의 시대도 아니건만 ‘인간을 사물화’하는 무수한 인간들에 둘러싸여 있다. 진정 지금 이 현실이 수용소의 생활이란 말인가.

  인간성이 무너져가는 상황에서도 인간이기를 잊지 않는 작은 노력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프리모 레비가 보여준다. 그래서, 그들에게 더욱 연민하게 되고 더더욱 가슴 아린다. 그렇기에 더더욱 극악의 인간성 상실로 제 면면을 유지한 인간들에 대한 분노가 가득찰 수밖에 없다. 지난 그 일들이 결코 ‘지나가지’ 않을 일로, 지속될 기억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보여준다. 프리모 레비도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하기를 시작했다 말했다. 또한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라 말했다. 프리모 레비라고 어찌 분노가 없겠는가. 프리모 레비는 “이성과 토론이 진보를 위한 최선의 도구라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정의를 증오 앞에 놓는다”고 이 책에서 말하고 있다. 그런 그의 기록이니만큼, 이 글이 가진 힘은 단지 피폐한 경험의 표출이 아님을 그 참상의 묘사가 아님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인간을 죽이는 건 바로 인간이다. 부당한 행동을 하는 것도, 부당함을 당하는 것도 인간이다. 거리낌 없이 시체와 한 침대를 쓰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다. 옆 사람이 가진 배급 빵 4분의 1쪽을 뺏기 위해 그 사람이 죽기를 기다렸던 사람은, 물론 그의 잘못은 아닐지라도, 미개한 피그미, 가장 잔인한 사디스트보다도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전형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이다.


  더운 날이 이어져 이러다 돌아버리겠다 싶다. 폭염에 미쳐갈 지경일 때 더욱 돌아버릴 폭언들과 그에 따른 해명을 듣다 보면 이까짓 폭염쯤은 얼마나 약한 열기인가 생각하게 된다. 여긴 수용소도 아닌데 프리모 레비의 말은 이다지도 완벽하게 들어맞고 있을까.

  “아들같이 생각해서” 폭언과 폭력을 일삼고, “아들같이 생각해서” 가두고 잠도 못자게 하며, “아들같이 생각해서” 인간이하로 대우한 군장성 부인의 말은 여지없이 이 말을 떠올리게 한다. “딸같이 생각해서” 성추행하고, ”엄마같이 생각해서“ 막말·폄하하고, ”여친이라 생각해서“ 마구 때리고, ”가족같이 생각해서“ 노예처럼 부리는.

  이것이 인간인가.

  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인간 군상의 생생한 활동사항을 자주 접하게 된다. 이쯤되면 전쟁이, 수용소만 문제가 된 환경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 나타나는 여러 다른 유형의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어느 정도 인간의 ‘의지’라는 부분도 작용함을 믿게 된다. 더욱 피폐한 인간을 만들어가는 환경은 전쟁, 수용소일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곳, 끔찍한 인간성 말살 장소에서 인간성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듯이 인간성 상실의 최악을 보여주는 무리들도 있다. 그처럼 제 손에 권력이란 것이 주어졌을 때 인간성을 말살하는데 최적인 인간들이 있다는 것이다. 전쟁도 아닌 상황에서 이러하다면 이들이야말로 전쟁을 일으키는데 적극적이고 수용소를 운영하는데 최적화된 인간들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권력을 쥐면 그 권력을 마구잡이로 난사하는 것이 일인 것처럼 행하는 이들이 증가하는 것을 볼 때마다 이 사회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국민을 위해”라고 말하는 국회의원들도 당선배지를 달고 나면 ‘국민’ 따윈 안중에도 없다. 그들 모두는 마치 수용소에 들어앉은 것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으로 철저하게 인간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종족으로 전락한다. 역시, ‘생각하는 사람’의 전형에서 가장 재빨리 멀리 있는 사람들인가. 이따위 사람들은 제발 생각이란 걸 하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특히, 저 따위의 생각들은 함부로 입밖으로도 내뱉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이것이 인간인가. 권력을 잡으면 눈이 뒤집히는 것이 인간인가. 정말 그런 건가. 그렇다면 권력없는 인간은 늘 이런 권력을 쥔 인간들의 행태를 견디며 살아야 하는 것인가. 아니, 수용소에서도 그렇지 않은 이들이 존재하듯 모든 권력을 가진 이가 부당한 행동놀이에 빠져사는 것은 아니다. 결국 권력을 감시하고 제제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대다수의 권력이 없는 사람들은 키워나가야 하는 것이다.  

  모든 부처에 갑질 사례에 대한 전수조사가 실시한다는 기사가 있었다. 또 한동안 극도로 열을 올릴 이야기들을 들어야 하는 일이 남아 있다. 결코 갑질 사례가 없을 리가 없으니까.

  이것이 인간인가. 이 말이 거듭 입속에 되뇌지는 것은 ‘그들’로 인해 힘겨운 삶을 겪은 이들의 삶에 대한 얘기임과 동시에 ‘그들’의 생각과 태도, 그들 자체에 대한 비난의 말일 것읻. 이것이 인간인가. 앞으로도 이 말을 얼마나 생각하고 말하게 될 것인가 생각하면 이 사회가 ‘인간성’을 제거하는데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고 있구나란 생각도 거듭 들게 된다. 프리모 레비의 말을 인용하면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엔 이 말로 바꿔지리라 싶다.

  “인간을 파괴하는 것은 창조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쉬운 일도, 간단한 일도 절대 아니지만 ‘갑질쟁이들’ 당신들은 그 일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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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 2017-08-08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저도 몇주 전 읽은 책인데, 아직도 그 분노와 슬픔이 문득문득 명치를 칠 때가 있어요. 왜 그런가 했더니 모시빛님 글처럼 아직 우리 도처에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탄식을 하게 만드는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나는 까닭인가 봅니다.

다시금 인간이 무엇이며 인간이 인간답기 위해 어떤 태도와 시각을 가져야 하는지 생각하게 만듭니다.

모시빛 2017-08-09 23:46   좋아요 0 | URL
넵,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프리모 레비의 담담한 투와는 달리 전 와락 분노를 드러내고 말았네요...
근데 참으면 병나잖아요....인간에 대한 생각과 어떻게 세상을 볼 것인지는 늘 생각해도 명쾌해지지도 않고 부족한 것만 같네요. 생각을 안하고 사는 게 속편한 듯 싶지만 계속 생각해야 하는 물음이겠지요.
 
엄마의 글쓰기 - 고민이 시작된 딸에게 건네는 엄마의 손편지
김정은 지음 / 휴머니스트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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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엄마의 글쓰기 - 고민이 시작된 딸에게 건네는 엄마의 손편지, 김정은, 휴머니스트,  2017-07-03.


  명확히 하자. 이 책은 엄마가 아이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는 책이 아니다. 자라나는 아이에 맞는 적절한 글쓰기 교육서가 아니라, 실제 엄마의 글쓰기 이야기다. ‘엄마’란 누구일까. 여기서 ‘엄마’는 두 아이의 엄마인 저자 자신을 가리키겠지만, 또한 저자 자신과 저자의 엄마 그렇게 두 엄마의 존재라는 생각도 든다.

  엄마인 저자는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겪게 되는 혼란을 이미 ‘거쳐온’ 경험자임에도 아이들이 물어오는 질문에 당황하고 아이들이 겪는 혼란에 적절하게 해줄 말을 찾지 못해 힘겨워하며 서로 간의 오해가 원망이 되어 갈등을 빚게 된다. 학교가기 싫다 하고, 자존감을 상실해 주눅들어 있고, 미래 직업에 대해 고민하고, 친구와의 사귐에 어려워하고, 성경험을 물어오고, 세장 진지한 질문을 하고, 마냥 엄마를 원망할 때… 저자는 아이들이 맞닥뜨리는 필연적인 혼란들에 안쓰러워한다. 또한 초보엄마인 자신의 역할을 탓하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힘겨워한다. 그러면서 두 아이의 엄마인 저자는 자신의 ‘엄마’를 떠올린다. 저자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학교에 들어갔을 때, 사춘기일 때, 이차성징을 겪을 때, 엄마와 갈등을 빚을 때, 그런 일상의 나날들에 엄마는 저자에게 어떻게 해주었던가.

  그때 저자의 엄마는 도시락에 손편지를 넣어 두었다. 엄마의 손편지를 떠올리며 저자 또한 마주보고 하기 힘든, 그러나 전해주고 싶은 말과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손편지로 전달하기로 한다. 

  엄마의 편지를 받으며 아이들은 궁금했던 것에 대해 해답을 얻고 상처받고 화난 상황에서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을 다잡는다. 물론 저자도 아이들의 생각과 마음에 대해 더욱 잘 알게 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아이들에게 편지를 전해주는 과정에서 저자 역시 한발자욱 성장해 나간다. 자신의 마음속에 마냥 묻혀 있던 어린날의 상처들, 엄마에게 품었던 섭섭함과 이해하지 못할 엄마의 행동들을 다시, 엄마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기도 하고 마음으로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며 아이들에게 들려줄 더욱 좋은 이야기와 고민해결방법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 방법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반성에서 이어지기도 하고 경험에서 얻은 문제점을 고려하면서 나타나며, 명확하게 가치관을 정립하는 과정으로 나아간다.

  결국 이 엄마의 글쓰기는 아이들의 질문에서 아이들과의 생활에서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아이들이 생활해 가는 동안의 지침, 가치관으로 삼았으면 좋을 방법들을 건의하는 것이다. 하지만 또한 그렇게 살아가리라 다짐하는 저자의 외침이기도 하다. 표면적으로는 ‘아이’의 성장을 돕는 엄마의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는 엄마의 내면의 성장기가 이 책이 아닐까 한다.

  엄마는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에게 맞는 언어로 편지를 쓰며 엄마의 생각을 전한다. 하지만 다시 자신의 언어로 아이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재정리한다. 그것은 과거와의 화해이기도 하고 현재에 대한 파이팅이기도 하며 보다 나은 미래를 아이들과 함께 하고픈 희망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쩌면 아이들에게 띄운 편지보다 내면의 욕망을 잘 정립한 저자의 ‘일기장’이 눈에 간다.

  아이들에게 모든 최고의 것을 해주고픈 우리네 엄마들. 과거 극도로 가난한 나라의 상황과 비교해보면 보면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움을 안겨주고 있기도 하다. 개별적이고 상대적이긴 하지만 이전 세대에 비해 풍족한 물자의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물려받는 경험은 덜한 이 세대가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전달해주는데 익숙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 책은 아이들에게 건강한 가치를 전달해주기 위한 ‘엄마’ 자신의 건강한 가치관을 정립하는 과정으로 읽혀진다. 내 마음속에 각인된 ‘내면아이’를 끄집어내고 치유해야만 흔들림없는 이야기들을 아이들에게 들려줄 수 있지 않을까.

  아이와 저자와 저자의 엄마, 이 3대가 함께 편지로 이어진 일상의 삶들이 일회적인 이벤트로 끝나지 않고 지속되어 온 기록을 보며 자연적으로 ‘글쓰기’가 갖는 힘을 알게 된다. 글쓰기 방법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지만 ‘글쓰기’를 얘기하고 있는 이 책은 엄마와 아이들의 사랑과 이해의 연결고리를 지난 추억과 현재와 미래의 삶에 대한 의지와 가치관의 연결고리를 정리해주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도구가 된다.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왜 김광석의 노래가 떠오를까. 엄마가 다시 쓰는 일기 때문일까. “나를 둘러싸는 시간의 숨결이 떨쳐질까 / 내가 간직하는 서글픈 상념이 잊혀질까 / 내가 알고 있는 허위의 길들이 잊혀질까 / 잊혀져 간 꿈들을 다시 만나고파”

  엄마가 다시 쓰는 일기장 속에서 아련한 상념을 맞닥뜨리며 아이들의 성장을 위해 고민하고 생각하며 전해주는 엄마의 글쓰기도 필요하지만, 나 자신의 상념과 꿈을 기록하는 나만의 글쓰기도 필요함을 깨닫는다. 저자 역시 자신의 엄마에게 글을 쓰기를 권한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에도 엄마로부터 손편지를 받는 저자이니만큼, 이 이야기의 시작이 자신이 엄마에게 받았던 편지로부터 기인한 만큼 ‘엄마가 다시 쓰는 글’이란 느낌은 아련함을 동반한다. 이 세상의 엄마는, 엄마이기도 하지만 엄마 이전에 ‘나’이기도 하다.


 『가족에게 권하는 인문학』 · 『엄마의 글쓰기』 

 김정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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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패단의 방문
제니퍼 이건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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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쓸쓸한 미래의, 시간


깡패단의 방문, 제니퍼 이건, 문학동네.


  깡패단. 몇 장을 읽은 후 음악에 대한 열정을 품으며 떼지어 모여 다니던 베니의 학창시절 친구 무리를 지칭하는 건가 생각했다. 그리하여 록을 사랑하는 음악적 동지들이 겪는 세월의 이야기가 전개되리란 예상했고, 이들의 삶이 생각보다 깡패처럼 흘러가진 않았군 하고 생각하며, 장편인가 단편모음인가를 헷갈려하며 어쨌든 책장을 넘겨가던 때.


시간은 깡패야. 그렇잖아?

그 깡패가 널 해코지하는데 가만있을 거야?

 

  뒤늦은 깨달음처럼 떠올려지는 문장들은 그건 미래의 목소리였다. 13장의 이야기는 몇몇 인물들의 삶을 시간의 순서없이 보여주었다. 시작점을 기준으로 삼자면 현재 음악 회사에서 일하는 베니와 사샤의 현재에서 과거와 미래의 이야기다. 그들의 인생에서 만나는 가족과 친구와 이웃과 동료들의 삶 또한 독립적으로 펼쳐져 이야기는 더욱 풍성해지고 다양해진다. 그리고 어떻게든 이 생애에 어떤 식으로든 만나게 되는 인연과 인생이 된다.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는 현재를 살고 있는 그들은 모르게, 그들 삶을 이미 엿본 ‘누군가’가 그들의 뒷전에서 미래 삶의 모습을 전한다. 지금 이 순간 과거의 모습을 기억하며 생각에 잠긴, 미래를 생각하며 무엇을 도모할까 준비중인 그들 앞에 불쑥 불쑥 그 목소리가 나타날 때마다 애잔해진다.

  알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기대 때문일까. 과거의 온갖 기억들은 갑자기 떠올려져도 그것들이 깡패처럼 갑자기 등장하고 방문해도 잠시 움찔하거나 깊은 회한에 잠기게 될 뿐인데, 그런데 그들 주위로 배회하는 “너는 나중에 이렇게 될 것이다” “할 것이다” 라는 그 목소리는 너무도 슬프게 들린다. 미래를 알고 싶어 예지몽을 꾸려 하고 점성술을 의지하는 인생치고는 “미래의 예언“과도 같은 목소리에 대한 달갑지 않은 반응이 되어 버리는 걸까. 꿈꾸는 미래가 아니어서, 그렇게 되어버린 삶의 과정이 너무도 궁금해서, 미리 알아버린 삶에 대해 허망해서……. 그렇게 누군가의 삶에 대해 덤덤히 말하는 그 목소리에 감사하지 못함은 어쩔 수 없다.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기억만큼이나 갑자기 알게 되는 미래는, 그것이 스스로의 선택과 행동 때문에 나타날 것임에도 막연함으로 아프게 다가온다.

  생각해보면 과거만큼이나 미래도 ‘유실물’이다. 습관적으로 사샤가 훔치는, 그래서 타인에게는 결국 유실물이 되어 버리는 물건처럼. 소유했을 지도 모를, 그렇게 되어버릴 지도 모를 미래가 과거와 현재와 또 가까운 미래의 ‘행동’, ‘무엇’ 때문에 변할지 모르니까. 운명이란 그렇게 작은 한순간의 일로도 쉽게 우리의 생을 다르게 흐르도록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시간은 되돌릴 수 없음에도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듯 훅훅 몰아치는 결정된 미래의 목소리가 그래서 그렇게 심상치 않게 다가왔던가.


그녀와 코즈는 힘을 합쳐 이미 결말이 정해진 이야기를 써나가는 관계였다. 그녀는 괜찮아질 것이다. 더는 사람들의 물건을 훔치지 않게 될 것이고, 그녀를 이끌어주었던 음악과, 처음 뉴욕에 왔을 때 만난 친구들로 이루어진 인맥과, 커다란 신문지에 휘갈겨 써서 당시 살던 아파트 벽에 붙여놓았던 일련의 목표들을 다시금 소중히 여기게 될 것이다.


  우연히 마주치고 필연적으로 관계맺는 인간들의 세상살이가 결국은 정해진 이야기를 향해 흘러간다는 건, 슬프고 재미없는 일이다. 그래서 ‘정해진’ 운명이나 사주팔자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싶은데, 은근히 가까이 가서 귀기울이게 된다. 미쳐버릴 만큼의 궁금함을 안고서.어떤 경우엔 만족하고 어떤 때는 주눅들어 그렇게 되어 버릴 인생이라면 지금은 마음대로 살겠다는 듯이 방황하며, 어떤 때 “그딴 거에 신경 안 써” 외면하기도 하며. 그래도 인생의 어느쯤 정도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아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야, 내 인생은 끝났어.”  그러다가 또 문득 그 목소리에, 그 결정에 대해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외칠지도 모른다. “아니야, 끝나지 않았어!” 아직 남은 시간에 대고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난 바뀌고 있어요 난 바뀌고 있어요 난 바뀌고 있어요 난 바뀌었어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구원, 변모―맙소사, 그녀가 얼마나 절실하게 원하는 것들인가? 매일매일, 매 순간순간. 우리 모두 마찬가지 아닌가?


  이토록 시간으로 인해 갖는 인생에 대한 만족감과 패배감은 항상 당겨진 고무줄과 같아 보인다. 회한하고 기대하는 인생으로서의 시간. 늘 극과 극의 서사를 달리게 만드는 그것. 이 깡패같은 시간에 대한 이야기는 작가의 흥미로운 이야기 방식에 힘입어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더불어 록음악과 매치된 시간의 이야기는 더욱 리듬감있게 시간을 인식하게 한다.  시간이 비트를 달고 달려오는 느낌이다가도 한없이 느릿느릿 물러나는 느낌이다. 또한 작가가 만들어낸 등장인물들의 인생도 과거와 현재, 미래를 오가며 흥미롭게 전개되고 마치 아주 먼 시간 뒤에 문득 친구들의 인생의 날들에 관해 들은 것처럼 즐거움, 기쁨, 슬픔, 안타까움, 회한 등이 몰려드는 느낌을 받는다. 되돌릴 수 없음을 알아도 늘 되돌리고픈 시간을 두고서, 늘 끝이야, 끝이야 하면서 끝이 아니기를 바라는 시간을 두고서 펼쳐지는 인생.


쉼표가 나오면 노래가 끝날 거라고 생각하게 돼. 그랬다가 사실은 노래가 끝난 게 아니라는 걸 알면 마음이 놓이지. 그렇다 한들 노래는 곧 진짜로 끝나버려. 모든 노래엔 절대적인 끝이 있어. 바로 그거야. 시간. 끝.이.라.는.게.정.말.존.재.한.다.는.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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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모르고 살았을까

 

그림자 여행 : 내가 꿈꾸는 강인함, 정여울 저, 이승원 사진, 추수밭, 2015.

 

  

  50편의 이야기가 사진과 함께 펼쳐진 에세이다. 사진과 이야기는 그림자를 달고 있다. 이야기는 문학비평가 정여울의 시선으로 사진은 작가 이승원이 시선이 담겼다. 사진은 아련한 느낌이 드는 풍경과 인물들 위주다. 이국의 모습. 가보지 못한 곳의 풍경을 보면서 아련함을 느낀다는 것이 이상하다. 아련함이란 경험의 측면에서 그리움을 동반한 느낌일 터인데,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동경이 아니라 아련한 추억으로 다가오다니. 이 책속 사진과 글들이 그런 아련함으로 내내 따라다녔다. 마치 그림자처럼. 그 그림자가, 보기 좋았다.

   <그림자 여행>이라는 책제목의 부제는 ‘내가 꿈꾸는 강인함’이다. 그림자 여행도 여행일테니 여행속에서 맞이하는 감상의 글인가 했다. 결국 이것은 내면으로의 여행이었다. 그 여행은 길고 깊고 멀다. 그림자를 마주하는 여행의 본질적인 목적이 ‘나를 알기’ 나도 모르는 트라우마를 걷어내기인 것처럼 강인함을 외치는 이 목소리는 본질적으로 얼마나 많은 그림자를,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것일까.

   여기엔 우리가 삶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모습에 대한 생각들이 담겨 있다. 문학평론가이자 작가로서의 삶과 글쓰기와 독서에 대해, 인간관계에 대해, 살아가면서 받게 된 상처에 관해 이야기한다. 다양한 이야기를 하다 문득 ‘내가 그랬구나’ ‘나는 그렇다’라는 나를 돌아보게 되는, 나를 인식하게 되는 순간들과 마주한다. 그것은 굳어 온 습관의 나를 인정하는 것이자 변하고픈 나에게 용기를 북돋우려는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보이는’ 모습을 본다. 그러면서도 누군가를 ‘잘 안다’고 생각한다. 또한 대부분의 경우 ‘보이려는’ 모습이 따로 있다. ‘보여야 하는’ 부분만 보인다. 그 외의 것은 꼬옥 숨겨둔 채 더욱 더 깊이 처박아 두게 된다. 사회에서 우리는 길들여지고 만들어진 나의 모습을 드러내놓고 더러 그것이 ‘나’인 양 지내다가 하릴없는 무기력과 슬픔과 좌절을 경험하고서는 묻는다. 나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뭐지?

 

어떤 뼈아픈 자극 없이는, 사람들은 좀처럼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정직한 대답을 얻어내지 못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아픔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그건 제대로 된 질문이 아닐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질문할수록 아프다는 것을, 그 아픔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조금씩 자기 영혼의 깊이를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간다.

 

   그때에야 알게 되는 것 아닐까. 스스로 묻어 두고 밟아 두었던 수많은 나날들의 내 모습이 감정이 구겨지고 헝클어져 곪은 상처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그것이 수면 위로 올라와 더욱 큰 상처를 만들어 가릴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아주 오랜 시간, 아주 자잘해 보이던, 심지어 하찮아 보이던 작은 선택들이 천천히 만들어온 나 자신의 모습을 깨닫는 순간. 그 순간, 나를 만든 것은 어떤 ‘굵직 굵직한 순간’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프게 인식하게 된다.

 

   나를 안다는 것, 나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되는 것이 고통을 동반한 것이듯 그 결과 또한 고통이 소멸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빛이 만들어내는 필연적인 그림자. 그것을 마주하고 그 그림자를 끌어안을 때에야 비로소 나에 대해서 알았다고, 나에 대한 정체성을 찾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작가는 이야기하고 있다. 그림자를 찾는 일도 그림자를 끌어안는 일도 힘겨운 일이기에 많은 나날 외면해 왔던 것이라면 생은 그림자를 알아도 그림자를 외면해도 늘 고통과 상처에 놓인 존재가 된다. 조금 더 편안하게 이 상처를 마주하고 상처로부터 멀리 떨어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 그런 길도 있음을 작가는 보여주고 있다.

 

오직 달빛에 의지해 길을 걸어본 적이 있는가. 오래전 칠흑 같은 밤길을 천천히 걸어가면서 나는 오로지 캄캄한 밤에만 모습을 드러내는 꽃들의 사생활을 목격했다. 달빛 아래 고요히 드러난 처연한 낙화의 풍경은 할로겐 조명 아래 다이아몬드 보다 더 눈부셨다. 그때 나는 눈을 아프게 하는 압도적인 불빛이 아니라, 사물이 지닌 본래의 빛깔을 끌어내는 '어둠속의 빛'을 보는 법을 배웠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도 어엿한 빛깔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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