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리아드
마릴린 로빈슨 지음, 공경희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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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에임스들

길리아드, 메릴린 로빈슨, 마로니에북스, 2013.


  길리아드를 길+일리아드의 합성어로 생각하며 길에서의 이야기로 느꼈는데 책을 읽고 나서 이 느낌과 생각이 다르지 않음을, 그 생각을 이어가도 될 것이라 생각했다.

  길르앗(Gilead)은 요르단 북서부를 가리키고 선지자 엘리야의 고향이다. 구약성서 <창세기> 31장에 ‘길르앗의 향유’와 함께 나온다. 이렇게 보면 이 책이 종교적인 색채를 띠리라   짐작하게 된다. 이 책에선 화자가 살고 있는 지명이기도 하다. 책의 화자는 제임스 목사이며 그는 생의 마지막을 앞두고 아들에게 전하고 싶은 편지를 쓴다. 일흔 일곱의 제임스 목사가 자신이 죽고 나면 그 오랜 시간 동안을 아버지가 없이 살아갈 일곱 살 아들에게 남기는 이 편지는 아버지와 아들의 나이차로 인해 서글픈 감정이 들게 만든다. 아들에게 들려주고픈 이야기이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이 편지는 아주 길고 오래 이어진다. 자신이 살아온 나날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아들이 살아갈 나날들을 위한 이야기이기에 진중하다. 작가의 문체 역시 담백하고 마치 시골길을 걷는 듯한 느낌이다. 집을 떠나 길에서 사망한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가는 길에 동행한 어린 존 에임스 목사의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자신의 생을 덤덤하게 얘기한다.

  존 에임스들의 이야기라고도 붙일 수 있을 만큼 길리아드에는 존 에임스가 많이 등장한다. 먼저 존 에임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역시 존 에임스이며 목사이다. 존 에임스 목사의 친구인 보턴 목사는 친구 이름을 붙여 아들의 이름을 존 에임스 보턴이라 짓는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존 에임스들의 생과 갈등이 등장한다. 존 에임스 목사는 아들에게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하는데 그것은 자신의 가계를 전하는 것이기도 하면서 그 시대의 역사의 흐름이기도 하다.  그의 첫 번째 아내는 출산 중에, 딸은 태어나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존 에임스 목사는 오랫동안 홀로 살아오다 노년에 나이 차이가 많은 아내와 결혼하고 아들을 둔다. 삶이 좀더 건강하게 이어진다면 좋으련만 존 에임스 목사는 점점 기력이 약해져 갈 수 없다.

  존 에임스 목사가 다소 정적으로 느껴진다면 목사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좀더 동적이다. 두 사람의 갈등 때문일지도 모른다. 대대로 목사인 집안에 신자와 무신론자와의 갈등, 종교 노선의 갈등이 있다. 존 에임스의 할아버지는 쇠사슬에 묶인 예수의 환상을 보고 노예해방을 위해 투쟁한다. 조부는 남북전쟁 참여를 권하는 설교를 하고 북군 소속 군목으로 참전하며 전쟁에서 한쪽 눈을 실명한다. 이런 조부와는 달리 아버지는 평화주의자라서 갈등이 반복되고 존 에임스의 형은 독일 유학을 하면서 무신론자가 되어 돌아와 아버지와 갈등을 빚는다.

  길리아드는 존 에임스들의 터전이다. 존 에임스 목사의 동료이자 친구인 보턴은 아들의 이름을 존 에임스 보턴이라 짓는다. 존 에임스 목사에게는 이것이 달갑지 않은데 존 에임스 보턴이 마을에서는 알아주는 문제아로 낙인된 때문이다. 보턴 집안 역시 목사인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이 지속된다. 존 에임스 목사가 이 보턴 부자의 갈등에 개입해 중재하지만 망나니같은 보턴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내적인 갈등과 편견을 가지고 접근하고 있다. 하지만 존 에임스 목사의 이 마음을 무색하게 보턴은 가족에 대한 책임과 난관을 헤쳐 나갈 방법과 용기를 얻고자 하는 진지한 가장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갈등이 ‘노예해방’에 대한 관점과 이어진다면 존 에임스 보턴이 표면적으로 드러낸 갈등 역시 인종차별, 흑인에 대한 차별을 드러낸다.


목사로 산다는 것은 인생에서 매우 특별한 일이지. 사람들은 목사가 다가가는 걸 보면 얼른 화제를 바꾼단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들이 서재에 찾아와서는 아주 대단한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지. 삶의 겉모습 속에는 많은 것이 있어. 모두 그걸 알지. 많은 악과 두려움, 죄책감이 있고, 도저히 외로움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에 큰 외로움이 있기도 하단다.


  존 에임스가 목사인 만큼 사람들은 그에게 종교적인 믿음과 영혼의 평안을 얻고 싶어하는 모양이다. 그가 목사가 묵직하게 앉아 갈등들을 지켜보고 있거나 자신을 찾아와 내면을 털어놓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것이 활동적인 모습과 대비되면서 잘 어울린다. 그 나지막한 영향력이 좀더 단단하게 사람들에게 스며들어 가리라 여겨진다. 이 책은 존 에임스 목사님의 설교도 함께 한다. 곳곳에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아들의 삶에 길잡이가 되고픈 목사의 마음도 갈등을 지켜보며 갖는 생각도 일찍 생을 마감한 아내와 아이에 대한 그리움도 남겨질 아내와 아들에 대한 마음도 편지에는 담겨 있다.


물론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살아오면서 쓸쓸해서 책을 읽은 시기와 나쁜 친구라도 친구가 없는 것보다는 나은 시기가 묘하게 번갈아 나타난 데 감사하지. 살면서 늘 두 감정이 번갈아 나타나지. 인간적인 것들에 굶주리게 되면 책이 들려주는 불운함이나 화려함, 뻔뻔스러움에 끌릴 수도 있단다. 네게 그런 일이 없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만.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잠언27:7).” 생각지 않은 엉뚱한 곳에서 쾌감이 발견되기도 하지. 그것은 아비로서의 지혜다만, 신의 진실이자 내 오랜 경험에서 알게 된 것이기도 하단다.

  

  이 편지는, 아니 소설은 썩 잘 썼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퓰리처상을 받은 작품이지만 문체에서 느껴지는 강렬함은 없다. 하지만 목사의 설교를 계속 듣고 있는 느낌보다는 할아버지에게 듣는 인생사로 더 다가왔다. 이리저리 생각나는 대로 쓴 편지는 격정적인 토로보다는 조용히 뒤따르는 느낌이 들고 잠깐 딴 생각이 들게끔 해서 글을 놓치는 지루함을 선사하기도 한다. 1880년에서 1950년대의 조용한 시골마을의 정경이 그리움을 느끼게 한다. 그때의 사회 역시도 마냥 조용하게 흘러가지 않았겠지만 종교, 신과 믿음에 의지하며 그 가르침대로 살려 했던 목사의 삶의 노력들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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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 다이어리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캐롤 쉴즈 지음, 한기찬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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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흘러간다.


스톤 다이어리, 캐롤 쉴즈, 2015.


  사람이 태어나서 겪는 대표적인 생활사건이 결혼과 죽음이다. 흔히들 사회적인 어떤 ‘사건’들이 인생을 좌우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기본적인 생활사건에서 인생은 충분하고도 길게, 영향을 받는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다양한 생활사건 중에서 결혼과 죽음이 차지하는 스트레스 지수도 매우 높다. 『스톤 다이어리』는 이와 같은 인생의 생활사건만으로도 풍부한 이야기를 펼친다. 한 여성의 일대기를 덤덤하게 그리고 있는데 우리의 삶이 아득하게 펼쳐지는 듯하다.

  탄생과 결혼과 출산 그리고 죽음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1900년대를 살아낸 데이지 굿윌의 인생이야기는 그 시대의 분위기와 느낌과 어우러져 기인 여운과 울림을 더한다. 기나긴 삶의 이야기는 글의 전개방식과 문체의 유려함에 힘입어 쏜살같이 흘러간다. 

  데이지의 탄생은 비극적이라는 이름을 달고 시작한다. 1905년 캐나다 매니토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의 죽음과 맞닥뜨린 데이지는 그래서 아버지와도 헤어져 어린 시절을 보낸다. 너무나 뚱뚱해서 임신한 것을 몰랐던 어머니, 남편도 이웃들도 임신한 여자의 모습들을 그저 어머니의 평소 풍채로 알았기에 아이의 탄생은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 된다. 데이지의 어머니 머시 스톤의 죽음도 함께 겪기에 그날의 그 모습은 사람들 뇌리에 깊게 각인되고 삶의 변화 요인이 된다. 적어도 이웃 여인 클래런틴 플랫 부인은 남편과 헤어지기로 결심하며 머시의 딸 데이지를 맡아 기르는 선택을 한다. 플랫 부인이 머시에게 한 말처럼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남편이 아닌 데이지와 함께 한다. 비록 데이지의 어린 시절을 함께 했을 만큼의 시간이었지만, 더 많은 세월이 지나 클래런틴은 데이지의 시어머니가 된다. 더더 많은 세월이 지나 결과적으로는 데이지를 선택하며 떠난 남편을, 며느리인 데이지가 찾아 나서는 운명이기도 하다.


여자의 삶이란 가슴 아래에서 약동하는 생명을 느끼지 못한다면 양배추 한 접시만도 못한 거라우. 보살필 아이가 있다는 것, 그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기까지 지켜본다는 것, 그게 사랑이지. 우린 남편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또 신 앞에서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남편을 영원토록 사랑할 거라고 서약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낳은 피붙이라우.


  또다시 생활환경이 바뀌게 된 데이지의 생이다. 태어나서 아버지라 부를 만큼 결코 가까워보지 못한 아버지와 함께 살고 그리고 결혼하고, 결혼식과 함께 남편의 죽음을 맞게 되는 미망인의 삶. 1927년 스물 두 살의 데이지는 이로써 사람들로부터 확고하게 불행의 이미지로 덧씌워진 채 정의된다. 그러니, 데이지가 자신의 인생에서 제 존재에 대한 의구심으로 뿌리를 찾고 싶어하는 마음이 드는 것일 게다.


단 하나의 극적인 사건 때문에 한 여자의 인생에 무성했던 엉겅퀴 덤불이 깨끗이 사라질 수 있다니, 실로 부당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세상은 그보다 갑작스러운 반전이라든가 스릴, 사건을 단순하게 정리하려는 절박함에 가능성을 두고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데이지 굿윌 호드의 신혼여행에서 생긴 비극은, 그 반전이 너무나도 괴이하고 예측할 수 없는 것이어서, 한창 뻗어 나가는 인생의 평범한 겉모습을 흐리게 만들어놓았다. 솔직히 말해서 원래 그녀의 인생은 다른 사람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조용하고 온화한 것이었다.


  ‘어머닌 살아오는 동안 행복하셨어요?’

  데이지의 딸은 이런 질문을 하려 했다. 그러니, 데이지의 생에선 사랑이 있고 결혼이 있고 출산이 있다. 그렇게 삶은 행복했던 순간도 그렇지 않은 순간도 함께 뒤범벅이며 데이지의 인생을 끌어 왔다. 여기 등장하는 사람들은 데이지의 친구들과 데이지의 자녀와 손주들 역시도 태어나고 결혼하고 출산하고 갑작스레 이혼하고 또다른 사랑을 찾고 결혼하며 살아간다. 어쩌면 생은 누군가와의 만남이 자리하는 부분이 큰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로 인한 상실감이 인생을 지배하는 또다른 감정이기도 하고. 여기 데이지의 아버지 카일러 굿윌이 자신에게 임신 사실을 말하지 않은 아내로 인해 석탑 쌓는 일에 몰두하는 것, 돈을 잘 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내에게서 버림받은 매그너스 플랫이 아내를 용서하지 못하며 오랫동안 백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내며 가지는 감정, 남편을 잃은 데이지가 칼럼을 쓰면서 일에 몰두하며 상실을 달래는 시간들.

  먼훗날의 내가 과거를 돌아보듯 삶을 생각해보면 평범한 어느 날의 기억보다 어떤 사건 중심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 생에는 ‘거의 읽히지 않는, 분명코 큰 소리로 읽히지 않는 그런 페이지가 있기 마련’이고 그 페이지 속에 평범한 웃음과 평온이 깃들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 생을 살고 한 여자가 죽음의 순간에 있다. 그래서 씁쓸한 느낌이 드는 걸지도 모른다. 언제든 삶의 여정이란 현재가 아닌 순간이면 아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여전히 미망으로 남아있는 것이 있어서일까.

 

그녀는 역사적 우연 때문에, 경솔함 때문에, 무지 때문에, 기회와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오랜 생에 단 한 번도 다음과 같은 스릴 넘치는 모험을 경험할 수 없었다. 유화, 스키, 항해, 알몸 수영, 에메랄드 보석, 담배, 오랄 섹스, 피어스, 물침대, SF, 포르노 영화, 종교의 무아경, 트러플, 키르슈, 할라피뇨, 베이징 오리, 비엔나, 모스크바, 마드리드, 그룹 세러피, 전신 마사지, 굶주림, 훈장, 견책 등등.


  생각해 보면 여전히 이런저런 이유로 해보고 싶다하면서도 해보지 못한 일들이, 전혀 해보려고 도전해보지 않은 일들이 있다. 내가 눈을 감는 순간 ‘스릴 넘치는 모험’에 대한 경험없음을 아쉬워하고 있다면. 그래서 사람들은 그토록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고 밑줄을 그어 리스트를 지워나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면 생은 좀더 행복에 가까워지는 걸까. 글쎄 행복이라는 것도 너무나 추상적이고 막연해 보이기도 하면서 온전히 어떤 ‘하나’만 있으면 된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인생이란, 뭐든 뒤범벅이라 지금 내가 느끼는 행복과 죽음의 순간 돌아보는 행복이란 다를 것이라고, 내 인생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어쨌든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일이, 생각보다 힘들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황홀한 순간들, 살아볼 만한 인생으로 기억될지 어떨지 모르게 내 인생이 그냥, 그렇게 흘러간다.


‘정말 황홀한 순간들이 있었나요? 살아볼 만한 인생이었나요? 이를테면 어떤 그림이나 커다란 건물을 바라보거나 책 속의 어느 한 구절을 읽으면서 세상이 갑자기 팽창하는 느낌, 그러면서 동시에 완벽하리만큼 순수한 어떤 핵으로 응축되는 그런 느낌을 맛보신 적이 있었나요? 제 말뜻을 아시겠어요? 모든 것이 갑자기 딱 들어맞는,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인 것 같은 느낌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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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꿇기라는 현실


데프 보이스-법정의 수화 통역사, 마루야마 마사키, 황금가지, 2017.


  사실 사회가 행하는 배제는 어제도 오늘도 새로울 것 없다. 외면당하는 일까지 척척 이어진다. 그런데 가끔 이 배제가 주목받는 일이 있다. 이번 특수학교 설립 문제처럼 말이다. 달라진 사회분위기가 있다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과거에도 장애인 부모들은 무릎 꿇는 일에 익숙했다. 조아리고 또 조아렸다. 더러 언론에 보도되었지만 ‘이슈화’ 되지 않았다. 이번엔 무릎 꿇은 부모들의 모습이 보도되어 반응이 일어났고 교육감과 교육부총리는 특수학교 설립 추진을 확대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끝난 것은 아니니 또 지역주민의 반대 여론 등 같은 과정이 반복되긴 할 것이다. 무릎 꿇기에 대해 ‘쇼’라고까지 말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쇼를 하게끔 한 이들이야말로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되지 않는가.

  어쨌든 ‘특수학교 설립은 정말로 집값을 떨어뜨리나?’와 같은 기사가 연이어 쏟아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 듯 여겨진다. 그동안은 ‘주민간 마찰이 벌어졌다’ ‘무산됐다’와 같이 단순보도에 그쳤으니까. 변화의 시발점이 되어야 할 일이다. 특수학교가 설립되었더라도 ‘도가니’ 속 사건들이 벌어지면 또다시 학교 폐쇄가 치고 나올지 모르니까 말이다. 언제나 마음을 졸이고 지켜봐야 한다.  

  『데프 보이스』 속 사건도 특수 시설에서 벌어진다. 장애인을 교육하고 재활하는 시설에서 장애아동을 향한 성폭력은 왜 이토록 당연한 일인 것처럼 벌어지는 것일까. 충분히 예상가능하듯 시설장이 사망했고 그 원인은 아동성폭력이다. 그리고 17년이 지나 또한번 같은 시설의 장이 사망한다. 이 공통의 사망자가 저지른 일이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케하면서 소설은 ‘누가 죽였는가’를 찾아간다. 하지만 범인을 찾는 것이 핵심이 되지는 않는다. 충분히 예상가능하니까.

 『데프 보이스』는 추리와 미스터리 소설이긴 하지만 다르다는 느낌을 받는데 어쩌면 범인의 추적이 아니라 농인의 세계에 대해 집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 수화를 잠깐 배웠지만 제대로 써보지 못해 모두 까먹어 알파벳 정도만 기억하고 있지만 수화통역사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를 보면서 수화통역사의 역할과 장애, 그리고 사람을 대한다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거리를 안겨주었다.

  이야기의 화자는 아라이 나오토이다. 그는 오랫동안 경찰서 사무직으로 일했지만 공익 제보자가 됨으로써 경찰서를 그만두게 되어 구직활동에 나선 사십대 이혼남이다. 구직 상담을 받다가 그가 정한 진로는, 수화통역사다. 그는 코다였다. 코다란 농인 부모의 아이를 말한다. 부모는 청각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아이는 듣고 말할 수 있다. 아라이는 수화통역사 일을 하다가 피의자 농인을 위한 법정 통역 의뢰가 들어오면서 사건 속으로 개입한다.

  사건과 그 해결 과정에서 코다들이 느끼는 상처와 의무 그리고 정체성, 농인들이 느끼는 차별과 어려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실감했다. 특히 농인들이 피의자로써 법정에 섰을 때 말이 통하지 않을 때의 답답함과 안타까움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무심하고 기계적으로 윽박지르며 장애인들을 범인으로 몰고 가는 편견에 가득찬 생각들과 관료주의적인 시선이 얼마나 많은 장애인들을 범인으로 몰고 갔던가. 수화의 세계에서 언어에 대응한 수화와 전혀 교육받지 않은 경우의 수화가 다르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알 수 있었다. 교육이, 배움이 필요하다는 걸 절실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전달되지 않을 때 일어나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법정에 선 농인들을 보면서 체감됐다.

  

몇 년 전부터 공식적인 자리나 문서에서는 ‘들리지 않는 사람’을 지칭하는 ‘청각장애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농아인’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들리는 사람을 지칭할 때는 ‘비장애인’ 혹은 ‘건청인’이라는 표현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대해 들리지 않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농아인에서 ‘아=말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를 뺀 것은 자신들은 들리지 않지만 말할 수 있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그리고 그 반대는 ‘건청인’이라고 하지 않고 ‘청인’이라고 말한다. 단순히 ‘들리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예전에는 농아인이라고 표현했다. 농아인 또는 청각장애인이라고 표현하는 게 익숙해 있다가 다시금 장애인을 지칭하는 말의 표현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Deaf 커뮤니티였다. 이들은 자신들을 장애인이라고만 바라보는데 그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가진 집단’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들리지는 않지만 자신들만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 그렇다. 그들은 들리지는 않을지언정 말하지 못하는 이들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쾌하게 다가왔다. 다만, 소설 속에서도 나왔듯이 여기에도 여전히 갈등이 있다는 점이 안타깝다. 각자가 주장하고 목표하는 바가 있지만 농인에는 사고나 병으로 인해 들리지 않게 된 사람은 배제한다. 장애인들에 대한 편견과 힘든 세상에 맞서 싸워가는 방식이긴 하겠지만, 서로 간의 연대가 더욱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주장과 문화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미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졌으니 우리나라에서도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받지는 않았을까 싶다.


그들의 언어를 그들의 생각을 정확하게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그래야 법 아래에서 평등이 실현될 수 있다. 그들의 침묵의 목소리가 모두에게 들릴 수 있도록 전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다.


  아라이는 딱히 신념이 강한 것도 열정적으로 무엇을 행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의문많고 자신이 코다라는 사실로 인해 트라우마를 안고서 살아왔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오로지 현실적인, 그러니까 생계로서 수화통역사를 한다. 그가 수화통역사를 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확립하고 트라우마를 극복해 나가는, 냉소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가 달라져 가는 것도 눈에 띈다. 범인은 충분히 예상 가능하지만 사건을 처리해가는 방식은 달랐다.

  “욕을 하시면 듣고, 모욕을 주면 받겠다. 하지만 학교는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장애아 학부모의 목소리를 우리는 잘 듣고 있는가. 그들의 목소리를 잘 전달하는 이가 있는가. 이번에는 학부모들의 무릎이 수화통역사의 역할처럼 다른 주민들의 마음에 전달되었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살아가는 일, 이 속에 가득 쌓인 언어의 장벽을 넘어 마음을 열게 해줄 통역이 더 많았으면 하는, 그러나 무릎 꿇기는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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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순례가 아프다


순례자 O Diario de um Mago, 파울로 코엘료, 문학동네, 2006.


  순례가 시작했다. 흘끗 지나며 보다가 왜 겨울 풍경이 나타나지? 의문이 들었다. 또 흘끗, 종교적 의미의 순례가 아니라 유목민의 이동 이야기인 모양인데 순례라는 제목을 지은 것은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했다.

  다른 일을 하면서 한참 파업 중인 KBS의 다큐를 틀어놓고 맞닥뜨린 몇 개의 생각 때문에 난 내 머리를 쥐어박아야 했다. 무엇보다 ‘순례’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이슬람교의 메카로 향하는 순례를 먼저 떠올렸다는 점이다. 기독교의 대표적 순례지인 산티아고는 다음으로 생각했다. 순례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를 한정하고 있었던 것인지 특정 종교와 장소만을 떠올렸기에 눈내리는 산풍경을 보고 갸우뚱하며 뒤늦게야 내 생각의 오류를 알아차렸다. 마냥 종교적 의미로 순례를 생각하지 않기에 언제고 산티아고 순례는 가리라 하면서도 일단은 제한적인 생각에 머물렀다. 살아가면서 얼마나 이런 일들이 많을까…….

  어쨌든 처음부터 다시 순례를 보았다. 눈내리는 히말라야의 풍경과 끝없이 이어지는 사람들의 행렬이 유목민의 이동이 아니라 순례 행렬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렇게 인도 라다크 지역의 소녀의 순례기는 시작되었다.

  산티아고 순례 여행을 폭발적으로 이끈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의 느낌과는 달랐다. 파울로 코엘료 소설은 종교적 색채를 바탕으로 한 신비와 환상과 몽환적인 느낌이 강하다. 이 책은 작가 자신의 소설적 정체성을 찾아가기 위해 이제 발을 뗀 것을 알 수 있는 정도였다. 파울로 코엘료가 걸어간 순례 여행의 경험을 토대로 쓴 원제목이 『동방박사의 일기』인 만큼 좀더 종교적이고 사실 명상 수련의 느낌이 강했다. 또 얼핏 자기계발과도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에서는 신과 인간에 대한 물음이 계속되었다면 쏘남 왕모의 순례에서는 종교적인 느낌이나 영적 탐구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종교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 여행과는 전혀 다른 순례 행렬의 가장 나이 어린 참가자인 소녀 쏘남 왕모의 ‘패트 야트라’를 따라갔다.

  ‘패트 야트라’는 인도 불교의 한 종파인 드루크파의 수행 중 하나이다. 발의 여정이라는 뜻으로 강이 얼어붙는 영하의 강추위 속에서 해발 5,200M 잘룽카포 산을 넘어가는 순례 여행이다. 18일의 여정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걷는 이 순례길에서 많은 사람들이 쓰러지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기도할 시간이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파울로 코엘료의 산티아고 순례 여정보다 짧은 여정이지만 화면으로 직접 봐서인지 이제 중학생 소녀가 견디기엔 너무 힘들어보였다. 무엇보다 너무 추워보였고 어깨를 멘 짐이 너무 무거워보였다. 그들은, 그러니까 승려들은 그 길을 가면서 어떤 생각들을 하면서 걸을까.

  불교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따르며 진리를 깨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중을 구원하는 대승 불교와 개인의 수양에 중심을 두는 소승불교로 나뉜다 배운 기억이 있는데 종교적인 수행의 여정에서 각 개인들이 찾고자 하는 진리가 깨달음이 무엇인지, 그들이 고행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여정을 보면서 당연 궁금해 했다. 어쩜 그 궁금증은 내가 저 길을 걷고 있다면 무슨 생각을 하면서 걸을까, 어떤 생각들에 몰입되어 있을까에 대한 궁금증인지도 몰랐다. 왕모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그저 따라 걷는다고 했다. 목적지가 어딘지 상관없고 길을 걷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선택한 길이니까. 여정을 함께 하는 도반은 왕모에게 ‘패트 야트라’에서 필요한 세가가 인내와 인내와 인내라고 말한다.

  이제 출가한지 한달된 왕모를 승려로 바라보지 않고 ‘소녀’로 보는 나 때문에 이 순례의 여정은 연민의 눈길로 쫓아가게 되었다. 종교적 신념에 가득차서, 종교에 매혹된 소녀의 모습을 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일지 몰랐다. 다른 선택의 길이 있었다면 왕모가 출가를 결심하지 않았으리라고 확신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난한 가정의 첫째 딸이기에 왕모는 출가한다. 영어를 좋아하고 많은 나라를 다녀보고픈 소녀의 꿈은 가난이라는 단어 앞에서 다른 선택을 불허한다. 배우고픈 마음에 도시로 나가 다른 집의 가정부 일을 하며 학교를 다니려 하지만 일만 하느라 친구들이 고등학생인데 여전히 중학과정인 왕모. 5km를 걸어 학교를 가는 동안 만나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인사가, 소녀의 낭랑한 목소리가 귓전에 울리는데 그 소녀는 이제 없다. 동생들을 돌보며 웃던 소녀는 인생의 고행을 헤쳐 나가는 야무진 승려의 모습으로 전진하고 있다. 그 모습은 시종일관 아프게 다가왔다. 슬픈 게 아니라 아팠다. 

  배움도 삶도 의지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불교 지역이 아니었다면 다른 종교를 선택했을까. 자주 들어왔던 말이다. 왕모의 어머니가 하는 말, “나처럼 살지 않기를.” 적어도 어머니의 소망은 이루어진 것인가. 어머니처럼 살지 않을 왕모의 모습이다. 승려의 삶은 어머니의 삶과는 너무 다르지 않은가. 가족 누구도 기뻐할 수 없는 축복할 수 없는 왕모와 같은 아이들의 선택이 얼마나 많이 이뤄지고 있을지, 그들은 행복한지가 궁금했다. 가난하다는 건 늘 선택보다 포기하는 삶을 가르친다. 꿈을 정말 꿈으로만 만든다. 이룰 수 없는 꿈, 상상만으로 위력을 발휘하는 꿈.

  한시간의 화면으로 왕모를 보건대 인내와 인내와 인내로 그 삶을 견디어 갈 것을 안다. 험난한 자연환경을 견뎌야 하기에 고행인 순례길이 아니라 인생 자체가 순례라고 왕모가 말한다.

  “어디에 있든 누구와 있든 넓은 길을 걷든 좁은 길을 걷든 살아있는 날들은 순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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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복지를 확대하는 것은 급하지 않습니다.


복지국가를 향한 짧은 안내서 

- 국제적 관점으로 쉽게 쓴 사회정책입문

존 허드슨·스테판 쿠너·스튜어트 로우, 나눔의집, 20100.

  

  9월 7일은 사회복지의 날이다. 사회복지 관련된 곳에서는 오늘을 기념하며 행사가 이뤄지고 있겠지만 언론은 관련된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형식적이라고 해도 특정한 날이 되면 그에 관한 의미를 짚어보고 여러 문제들을 지적하는 게 지금까지 이뤄져 온 방식이었다. 가령 장애인의 날엔 그 전후로 장애인에 관한 기사가 들끓고 부부의 날엔 부부관계에 관한 기사가 들끓는 것처럼, 이런 특정한 날을 지정해야 관심받는 그런 영역들이 있기 마련이다. 다른 때라면 복지대책에 관해 집중조명이 될 터인데 여러 이슈로 언론은 바쁘다.

  하긴 전쟁이 어쩌고저쩌고 하루종일 떠들어대는 상황이니까 심각한 상황은 맞다. 그렇게 봐야 하나? 이런 상황을 자주 맞닥뜨려 양치기 소년이 외치는 ‘늑대가 나타났다’처럼 반응하게 되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서, ‘안보’ 외치는 기사는 안보이고 이런 기사들만 눈에 띄나 보다.

국민의 복지를 확대하는 것은 급하지 않습니다.

  9월 7일자 바른정당 원내대표 주호영의 교섭단체 대표연설의 한 문장이다. 이 문장을 말하기 위해 늘 노력해온 결과 평소에도 이 말을 하는데 주저함이 없었지만 오늘은 더욱 더 당당하게 소리 높여 외쳤다.


“다층 미사일 방어 체계를 갖추는 데 약 10조원이면 된다고 합니다. 국민의 복지를 확대하는 것은 급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의 안전과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구축 가능한 방어체계를 포기하는 것은 대통령의 치명적인 직무유기입니다.”


  무분별한 복지 포퓰리즘이란 프레임은 항상 ‘복지’가 달고 살아야 하는 말이다. 우리나라 사회보장지출은 OECD 국가와 비교했을 때 거의 최하위이고 국내 다른 지출비의 절반의 절반도 안되는 수준이다. 그마저도 늘 삭감되는 수모를 당한다. 도대체가 ‘무분별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럼에도 늘 특정 정당은 사회복지예산이 0.1%만 올라도 기겁을 한다. 그래 놓고서는 선거때면 노인들 관련 복지 공약은 하늘 드높은 줄 모르고 올리려고 기를 쓴다.

  10조원이라. 나라를 핑계대고 해먹은 돈이 많아서 10조원이 많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지경인데 그동안 그렇게 안보를 중시하면서 각종 군사 무기를 위해 그토록 불량품을 쓰려 안달이었을까. 왜 그토록 방산비리를 저질러 갖추어야 할 것을 갖추지 않았을까. 툭하면 꺼리를 만들어 복지를 세상에서 가장 불필요한 것으로 취급하는 이들의 생각에 대해 묻는다. 복지는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는 것과 상관없는 일인가. 그래 놓고서 국민은 나라를 위해서는 언제든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한다.

  너무 고전적인 이야기지만 매슬로우는 의식주의 생리적 욕구를 안전의 욕구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인간의 욕구라고 말했다. 가장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가 충족되지 못한 이들이 증가하고 있는데 ‘안전’하게 해주겠다며 마지막 밥알을 빼앗고 굶주리고 헐벗은 몸과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몸바치라 말한다. 그것이 나라와 국민을 위해 역할을 하겠다고 나선 이들이 행하고 있는 모습이다. 

  한국이 복지국가였던 적이 있던가. 복지국가가 되는 것이 혐오국가로 가는 길이라도 되는 양 하는 이들의 머릿속에서 복지국가가 나올 수는 없다. ‘복지’를 늘 없는 이들에게 날리는 적선으로 생각하는 이들에게서 ‘복지’는 게을러서 굶게 생긴 이들에게 야, 먹고 떨어져라 던지는 제 침묻은 밥을 던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에게 ‘복지’란 단어는 이해할 수 없는 단어이고 세계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 자신의 ‘복지’를 위해서 타인의 ‘복지’를 빼앗는 일엔 열심이고 더러 그것을 하는데 늘 ‘국민’이란 단어를 핑계한다.

  『복지국가를 향한 짧은 안내서』 이 책은 사회보장, 고용, 보건의료, 교육, 주거의 사회저책에 대해 설명하고 쟁점을 논하고 있다. 특히 몇몇 나라가 아니라 70여 개 나라의 사례를 비교분석하고 있어 정책에 대한 이론적인 접근뿐 아니라 실제 적용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해준다. 정책이란 ‘생물’과 같기에 각 나라가 처한 상황에 따라 실제 적용에서의 많은 차이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회복지정책은 다각적인 시각을 가지고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기본적인 가치와 추구하는 목표는 갖춘 상태로 말이다. 마냥 특정한 나라의 정책만을 쫓다 보면 실패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어쩌면 시의원, 도의원, 국회의원 할 것 없이 선진정책을 배우겠다며 늘 외유성으로 관광하고 돌아와 이런 식으로 정책들을 가져다 그대로 CTRL+C 해서 CTRL+V 했을 것이다.

  이 책은 사회보장에 관한 기본 이론서이다. 이야기가 가득하고 재밌게, 가볍게 읽을 수 있다기보다 사회복지전공자들을 위한 기본서로서 더 충실하다. 하지만 이 책 속에서 다루는 사회보장, 고용, 보건의료, 교육, 주거에 관한 내용들이 전혀 우리 생활과 유리된 내용들이 아니기에 오히려 정책에 대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다보면 한국이 왜 ‘복지국가’가 아닌지를 알 수 있을지도….

  어떤 ‘날’엔 그것을 기념하며 그것에 대해 예의를 갖추기 마련이다. 부족한 부분을 생각하고 수정해야 할 것을 더 돌아보며 말이다. 사회복지의 날, 늘 그래왔지만 오늘마저도 철저히 무시된 ‘사회복지의 날’에 복지국가는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다. 국가까지는 나아가지 않더라도 나의 복지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씁쓸하다. 세금은 꼬박꼬박 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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