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 계절
구효서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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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로 남은 이야기


아닌 계절, 구효서, 문학동네, 2017-04-03.


  많은 작품을 쓴, 수많은 문학상 수상작가 구효서의 소설집 「아닌 계절」은 아닌 계절 겨울, 여름, 봄, 가을에 관해 이야기한다. 통상적으로 사계절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말하나 작가는 아니다. 통상적인 말의 수순을 버리고 아닌, 특정한, 사계절의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이야기, 이야기는 계절을 배경으로 그러나 계절을 주인공으로 불러낸다. 그 계절에, 그 겨울과 여름과 가을과 봄에 겪었던 이야기들은 그 계절이 ‘아닌’ 계절을 떠올리기 아려울 만큼 그 계절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아닌 계절은 그 계절을 느끼느라 그 계절에 갇혀 있느라 더디게 읽힌다. 작가가 전하는 말의 리듬은 터벅터벅, 고독을 아픔을 짊어진채 느리게 느리게 나아간다. 그럼에도, 읽은 문장을 다시 읽는 일이 반복되어도, 그래서 문장들과 이미지는 반복해서 마음에 쌓이는 모양이다. 모호한, 부정칭 같은 인물들의 이름이 멀게 느껴져 거리를 두고 이들을 보다가도 한발자국씩 가까이 가게 만든다.  적당히 떨어진 채로 말이다.


나는 지금 여기서 누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 하고 중얼거렸다. 알 수 없는 일이므로 누구든 어디든 상관없었다. 분명한 건 각막을 에는 듯한 추위뿐이었다.


  주위 누군가 사라져도, 온통 낙서로 뒤덮인 벽이 늘어가도, 세상이 어떤 일이 벌어져도 기억하는 것은 오직 겨울, 춥다는 느낌과 생각인 「세한도」의 [세한도]의 여자처럼. 아이가 물에 빠져도, 양식장 주인이 아이를 죽이는 것을 보아도, 어느 어머니에게서 촌지를 받아 다른 어머니에게 부치는「바다, 夏日」의 ‘미음’처럼. 세상을 보고 있지만 보고만 있는 그러한인물들의 모습이다. 이것은 「봄나무의 말」속 회화나무의 역할이 아닌가. 오히려 이 회화나무가 감정을 가지고 이야기를 건넨다. 다른 인물들이 그들이 겪는, 그들이 보고 있는 상황을 익숙한 거리감으로 그저 ‘보고만 있는’데, 회화나무만이 마을의 일꾼 닷근이와 꽃서방과 새악시의 이야기를 전한다. 화자의 목소리에서 유독 두드러지는 감정을 토로하는 것이 이렇듯 다른 인물들이 아니라 ‘회화나무’인 것이 우연일까.


찌고 숨 막히는 듯하다가 더위는 고스란히 살을 에는 통증이 되었다. 어떤 느낌도 여자에게 이토록 명징했던 적이 없었다. 혹독했으며 처음이며 마지막일 것 같았다.


  「여름은 지나간다」의 인물은 전쟁통에 헤어져 육십년이 지나 재회한 노부부이다. 이들은 서로에게 묻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이 있음에도 그 말들을 하지 않는다. 그들 부부의 이름을 기억하려 해도 그들은 많은 말을 하지 않아 기억하기 어려울 지경인데 이름마저도 ‘파’와 ‘하’다. 감탄사이거나 혹은 의미없는 소리일 뿐이 이 단어가 이름이 되면서, 이 노부부의 이미지는 그 주위를 둘러싼 배경속으로 들어가고 만다. 그러니, 선명하게 부각되는 계절. 이들이 만난 그 계절, 지나갈 여름, 아닌 여름이다.

  작가는 등장인물의 모호한 이름이나 모호한 시공간적 배경을 의도했다고 했다. 이 의도가 문학적 익숙함은 아닐지언정 일상적 공간에서는 익숙하다는 것, 아닌 계절을 덮은 후 선명하게 느껴지는 감정이었다. 말이 회화처럼 번지는 통에 한참을 이미지에 갇혀 있게 하는 맛이 있었다. 요즘처럼 스토리를 부각하는 소설이 인기임을 생각한다면 이 책을 잡는 손길은 더뎌지겠구나 싶었다. 한편으론 이 책에서 추리와 미스터리를 읽을 때와 같은 장르적 느낌을 짙게 받았다. 단편소설에서 ‘문학’이란 느낌이 가득한, 문장 때문에 더디게 읽게 되는 글들을 만나는 즐거운 일이 계속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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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지 않도록.


바깥은 여름, 김애란, 2017-06-28.


  한파주의보가 내렸다. 비도 내리고 바람도 거칠게 불었다. 깊은 가을로 들어선지 오래다. 그러니, 바깥은 이미 여름이 아니다. 한 해가 두달도 남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면 이젠 겨울로 들어서게 된다. 그러니, 바깥은 여름을 향해 조금 더 가고 있다.

 올 여름께 베스트셀러였던『바깥은 여름』은 김애란 작가의 일곱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상문학상과 젊은작가상 수상작이 실려 있지만, 단편명에 『바깥은 여름』은 없다. 「풍경의 쓸모」에 스치듯 나오는 문장에서 단편집의 제목을 삼았다. 쓸모라는 단어를 보면서도 풍경의 쓸쓸함과 씁쓸함으로 읽혀진 것처럼 『바깥은 여름』의 이미지는 기인 그림자가 사그라지지 않는 풍경으로 남았다. 작품마다 상실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입동」과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의 상실은 같은 것처럼 다가왔다. 아이를 잃은 부부와 남편을 잃은 아내의 무너진 일상의 생활들이 아프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아이와 남편이 사망한 일이 하나의 사건으로 여겨졌다. 하나의 사건이 일으키는 파장이 얼마나 큰지, 당사자와 그것을 바라보는 이의 간극은 크다는 걸 소설을 통해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이 두 작품에서 세월호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생각나는 더없이 트라우마로 남은 큰 사건이기 때문일 것이다. 두 작품에서 아무리 트라우마를 겪는다 해도 함께 공감을 나눈다한들 결국 타인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참으로 슬퍼졌다. 나 역시 그들처럼 결국엔 바깥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일 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글퍼졌다. 우리는 자식을 잃은 부모는 남편을 잃은 아내는 ‘어떠해야 한다’ ‘어떠한 모습으로 있어야 한다’는 굴레를 씌우고 우리의 편의대로 애도를 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당신이 누군가의 삶을 구하려 자기 삶을 버린 데 아직 화가 나 있었다. 잠시라도, 정말이지 아주 잠깐만이라도 우리 생각은 안 했을까. 내 생각은 안 났을까. 떠난 사람 마음을 자르고 저울질했다. 그런데 거기 내 앞에 놓인 말들과 마주하자니 그날 그곳에서 제자를 발견했을 당신 모습이 떠올랐다. 놀란 눈으로 하나의 삶이 다른 삶을 바라보는 얼굴이 그려졌다. 그 순간 남편이 무얼 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당신을 보낸 뒤 처음 드는 생각이었다. -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중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서 제자를 구하다 사망한 교사의 아내의 말이다. “당신이 누군가의 삶을 구하려 자기 삶을 버린 데 아직 화가 나 있었다”는 문장에서 내 심장은 덜컥거렸다. 우리는, 그들에게 타인인 우리는 그가 “누군가의 삶을 구하려 자기 삶을 버린 데” 대해서 더 특별히 애도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하지 않은 이들을 은근히 비난하며…. 13일, 세월호에서 제자를 구하다 사망한 교사의 장례가 있었다. 그날 이후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소설 속 아내의 말이 계속 머리에 떠올랐다. 마치 「입동」에서 겪은 일로 이웃이 아니라, 사람들이 아니라 기계에 대고 슬픈 물음들을 물어대는 것만 같았다.

  새삼 공감이라는 것이 언제나 내 경험치 안에서 움직이고 있음도 느껴졌다. 그것이 시리가 대답할 수 있는 최대치. 나는 타인의 일에 관해서 언제나 시리일 수밖에 없는 걸까. 조사 ‘은’이 가리키는 성실한 저 대조의 의미. 바깥은 여름이고…. 바깥은 여름이라고 제목 지은 작가의 의도를 알 것 같다 말함으로써 시리에서 비켜가고 싶은 나의 의지를 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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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왕을 모셨지
보흐밀 흐라발 지음, 김경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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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를 모셨지

 

영국 왕을 모셨지, 보흐밀 흐라발, 문학동네, 2009.

 

   기차를 탔다. 배가 고파 잠시 정차한 역에서 급하게 핫도그를 샀다. 가진 건 만원 지폐라 어린 장사꾼이 돈을 거슬러 줄 때까지 기다린다. 기차가 떠날 시간은 다가오고 마음은 급해지는데 어린 소년 장사꾼의 행동은 굼뜨기만 한다. 기차가 출발하려 한다. 기차냐 잔돈이냐. 한발은 기차를 향해 한발은 소년을 향해 가는 몸은 결국 기차속으로 빨려가 소년과 작별하고 만다. 가면서 생각하겠지. 저 맹랑한 녀석, 두고보자! 저 맹랑한 녀석, 그래 잘 벌어서 잘 먹고 잘 살아라! 저 맹랑한 녀석, 저 녀석!

   그 맹랑한 녀석 디테는 호텔 수습 웨이터이다.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말라”는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모든 걸 봐야 하며 모든 걸 들어야 한다”는 교육을 받는다. 호텔이란 그런 곳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지만 그들을 보면서도 보지 않은 척해야 한다. 디테는 집시들이 피를 튀기는 난동이 벌어져도 아무런 동요없는 호텔에서 그가 교육받은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알아간다. 호텔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뼈저리게 느낀다. 온갖 기행들을 일삼는 이들이 있고 그 행동의 바탕이 돈이라는 것을. 돈의 힘! 핫도그를 팔아 등친 돈으로 드나들고 라이스키 창녀촌에 드나들며 거금을 뿌리며 돈의 위력을 알아간다. 물론 디테의 꿈도 자연스레 백만장자가 된다. 돈의 힘!

   디테는 호텔 파리에서 영국 왕을 모셨다는 스크르지바네크 지배인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 지배인은 겉모습만으로도 손님이 원하는 것과 손님에 대해 척 파악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 그 이유를 물으면 지배인의 대답은 늘 한결같았다. “영국왕을 모셨지.”

   디테에게도 이런 날이 왔다. 아비시니아 황제에게 봉사할 기회를 얻게 된다. 황제를 영접하는 호텔의 풍경은 상당히 재밌게 펼쳐진다. 신난 디테의 모습이 상황을 묘사하는 속에 가득하다. 이 맹랑한 소년 디테도 이제 “아비시니아 황제를 모셨지”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건가. 훈장까지 받았으니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거다 마침내 지배인처럼 호텔리어로 성장하게 되는 걸까. 다음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디테가 이끄는 대로.

   작가는 우스꽝스럽고 어리석어 보이는 등장인물들을 화자로 내세워 유머와 풍자와 해학이 가득한 블랙코미디를 펼친다. 이야기의 표면은 아, 참 재밌네 싶지만 곧 닥치는 슬픔의 감정은 끝이 없다. 그의 별명이 바로 ‘체코 소설의 슬픈 왕’아니던가. 그럼에도 표면적으로 밝게 이끄는 그의 이야기의 힘은 이 소설에서도 초반까지는 유지된다. 체코의 그 파란만장한 역사에서 체코를 떠난 적 없는 작가의 이 작품은 1971년도지만 출판 금지로 비밀리에 유통되다 1989년에서야 체코에서 공식 출판되었다 한다. 18년을 떠돌다 정식출판된 이 책은 출판을 저지하려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얘기가 된다. 이 맹랑한 디테, 과연 성장하면서 어떤 일들을 겪기에!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디테는 들어간다. 아니 제 발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저 있었을 뿐인데 그런 상황을 맞았을 뿐이다. 디테는 자신의 생에서 불행과 행운이 함께 했다고 말한다. 디테가 독일인 리자를 만난 것은 사랑하게 된 것은 우연이었지만 그것은 불행과 행운을 몰고 왔다. 어쩌면 그때부터 디테의 삶은 역사 속으로 깊이 관여된다.   

  더 이상 소년이 아닌 만큼 어릴 적 세상을 보는 방식으로 행동해서는 안될지 모르겠지만 디테는 여전히 그가 호텔 속에서 배우고 익힌 방식 그대로, 그저 그 틀에서 성장해 갔다. 독일인 리자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데 따르는 일은 체코 민족주의 운동의 단원과는 배치되는 일들이 요구되지만 디테는 그런 것엔 깊은, 명민한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고 디테의 행동은 독일을 위한 삶이 된다. 나치가 벌인 혈통주의 체코인들에겐 외면당하고 호텔에서는 쫓겨나지만 독일이 체코를 합병하면서 디테는 다시 행운의 삶이 되었다가 폭격에 리자를 잃는, 머리가 잘린 아내의 시신을 보는 일을 겪지만 디테는 살아남는다. 리자가 남긴 희소 우표로 백만장자가 되고 호텔을 인수해 유명해진다. 이런 행운과 불운의 반복된 삶 속에 마침내 그가 원하던 백만장자가 되지만, 다른 이들이 디테를 백만장자의 부류에 넣기를 꺼린다. 공산정권이 들어서며 백만장자들의 재산을 압수하고 수용소로 보내기 위해 소환장을 발부한다. 디테만 제외하고 말이다. 그럼에도 디테는 백만장자임을 인정받기 위해 기꺼이 수용소로 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수용소에서는 디테를 아는 척하는 백만장자도 호텔 사장들도, 아무도 없다. 시간이 흘러 모든 것을 잃고 수용소에서 나온 노년의 디테는 산 속으로 들어간다. 자연과 동물들과 함께 하며 지난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자신과 대화한다.

 

나는 사람들의 눈에 띄거나 칭찬을 받는 일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았다. 그런 모든 건 내게서 사라졌다. 거의 한 달 내내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원래의 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뼈 빠지게 일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은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종종 나는 도로를 정비하는 일을 내 인생의 길을 정비하는 것과 비교해보았다. 인생을 돌아보니 마치 다른 사람에게 일어났던 일인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의 인생 전체가 누군가 다른 사람이 쓴 한 편의 소설이며 내 인생이란 책의 열쇠는 나 자신만이 갖고 있는 것이었다. 내 인생의 유일한 증인은 바로 자신이었다. 비록 내 인생이라는 길의 처음과 끝에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을지라도 곡괭이와 삽 대신 기억의 도움을 빌려 아주 먼 과거까지 돌아갈 수 있게 정비해놓고, 기억하고 싶은 곳으로 돌아가 회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영국왕을 모셨던 최고급 호텔 파리의 지배인에게 배워 아비시니아 황제를 모신 자그마한 체구의 디테가 회상하는 자신의 삶은 어디에 방점이 있을까. 백만장자의 꿈을 쫓아 전진하던 소년 디테, 독일인 아내를 만나 사랑하며 나치의 점령속에 살았던 청년의 디테, 공산정권에 의해 수용소에서 살아야 했던 중년의 디테. 체코의 파란만장한 현대사에 휩쓸려 살았던 디테의 삶에서 “영국왕을 모셨지”라는 말을 내뱉을 수 있던 때는 역시, 운명을 수용하는 노년의 삶에서 가장 잘 어울린다. 늘 작았던 자신을 더 커 보이게 애쓰지도 않으며 호텔을 갖고 싶어하던 욕망도 디테에게선 사라졌다. 그의 삶에서의 불행에 기뻐하며 운명을 수용하는 태도는, 그가 지나온 삶에 대한 반성의 의미도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배인의 “영국왕을 모셨지”가 약간 뻐김의 느낌이 가득하다면 노년의 디테의 “영국왕을 모셨지”는 자조가 가득하게 느껴진다. 자본주의와 나치즘과 공산주의 사회에서 디테가 느낀 삶의 태도와 방향은 전면 수정되었다. 앞으로 남은 생애, 마주할 자신과의 이야기에서 디테는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갈까.

   시대에 휩쓸렸다는 말은 안타까움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무책임해질 수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503, 박근혜 변호인단이 모두 사퇴한 날, “영국왕을 모셨지”를 말하는 지배인의 표정과 얼굴을 생각했다. 이들은 되돌아볼 어느 날 자신의 삶에 “공주를 모셨지”라며 어깨를 치켜올리며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을까. 시대의 흐름에 휩쓸린 것이 아니라 시대가 합의한 헌법질서를 파괴하고 합법적 절차에 의해 탄핵된 것에 대해 막무가내 땡깡으로 비호하며 제 욕망을 위해 상식과 정의를 무시하며 살고 있는 것에 대해 만족감을 느낄까. 어떤 행운을 기대하기에, 그와 같은 몰상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도 역사에 무책임해도 살아감에 양심의 거리낌이 없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들의 “공주를 모셨지”가 너무나 오래도록 그들 권력과 욕망을 채워주었기에 여전히 “공주를 모셨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이 안타깝다. 여전히 “공주를 모셨지”로 세상을 살고 있는 이들로 인해, 생의 마지막 날에도 그러고 있을 것 같다. 영원히 자신을 공주의 노예, 심부름꾼으로 자처하며.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디테의 회고가 참 다르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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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과 어금니 아빠


푸른 수염, 아멜리 노통브,  열린책들, 2014-09-15.


  아멜리 노통브의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그 통통튀는 이야기의 매력에 푹 빠졌었다. 작가는 다작하는 작가였고 책을 내는 시기 또한 빨랐다. 그렇게 아멜리 노통브의 책을 제법 읽고 난 후 어느날, 신작에도 무신경해졌다. 대체로 많은 작가들이 자신을 나타내는 문체와 이야기 구조, 소재 등등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지만 그래서 어떤 작가는 모든 이야기의 차별성을 찾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읽고 싶어지는 작가가 있고 그렇지 않은 작가가 있게 된다. 온전히 취향의 문제이겠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아멜리 노통브는 내  향의 틈바구니에 있는 걸까.

  푸른 수염의 이야기는 여러 버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샤를 페로가 처음 이 작품을 쓴 이후로 수많은 변주가 있었다. 아니, 푸른 수염 자체가 변주다. 이야기의 근원이 전설과 실존 인물에 기초하여 지어졌다고 하니 말이다. 샤를 페로가 이야기를 발간한 것이 1697년이니 그 이전에 푸른 수염과 같은 인물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다. 15세기 프랑스의 질 드레 남작이 유력한 용의자다. 질 드레 남작이 푸른 수염이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역사상 기록된 최초의 연쇄살인범이란 타이틀을 달고 있다. 군인으로 전쟁 후 온갖 엽기적인 행위를 서슴은 푸른 수염의 남자 이야기는 그가 실존인물이라는 데서, 그러니 그가 한 행위가 실제 발생한 것이라는 데서 경악하게 된다.

  푸른 수염으로 창작된 이야기의 변주에서 주목되는 것은 아마 금기에 더 방점을 두고 있는 모양이다.  절대로 “저 방은 열어봐서는 안돼”라고 푸른 수염은, 남편은 말하고 아내들은 어떤 이유로든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문을 열어보고는 죽음을 맞이한다. 마치 성경의 이브처럼 유혹에 못이기는 여성들이 그것 때문인 양 작은 방안에 시체로 걸려 있다. 그렇다면 첫 번째 아내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죽어야만 했는지, 그때의 빈방은 무슨 이유로 금기가 되었는지가 궁금한 이들이 있었을 것이고 첫 번째 아내의 행동에 주목한 작품도 있었던 듯하다. 대체로 푸른 수염이 변주가 된다 해도 그 기본틀이 바뀌지 않는데 많은 이들이 푸른 수염 이야기에 매력을 느끼는 요소는 뭘까. 그리고 푸른 수염이 아니라 아내들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아멜리 노통브의 푸른 수염은 한 여자가 월세 광고를 보고 세입자가 되기 위해 면접을 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돈 엘레미리오 니발 이 밀카르라는 주인은 20년째 집밖으로 나오지 않는 계란과 황금에 집착하는 남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 방에 살던 여자 8명이 행방불명되었지만 그 방에 들어가기 위한 여자들의 줄은 길다. <욕실 딸린 40㎡ 크기의 방. 주방 기구 완비된 넓은 주방 자유롭게 사용 가> . 매우 싼 가격이라는 장점 외에 이 방의 주인에 대해 알고 있다면 이 방에서 살고 싶은 이유는 무얼까.

  그리고, 이 소설속 모집 공고는 어금니 아빠의 가출 소녀를 모집하는 공고와 오버랩되었다. 한참 뉴스를 장식하는 어금니 아빠를 보다가 푸른 수염이 떠오른 것은 저 공고 때문이었다. “함께할 동생 구함. 나이 14세부터 20세 아래까지. 개인룸 샤워실 제공. 타투 공부하고 꿈을 찾아라. 개인문제, 가정문제, 학교 문제 상담환영. 기본급 3~개월 기본 60~80. 이후 작업 시 수당 지급.” 이 공고를 보면서 어떤 ‘문제’를 염려하지 않았을까. 사트뤼닌처럼 ‘가출’한 소녀들에게는 그런 문제쯤은 전혀 신경쓸 이유가 되지 않았던 걸까. 푸른 수염의 아내들이 연달아 사라진 것을 알면서도 그 집으로 들어가는 아내들처럼 왜, 푸른 수염의 집으로 발을 들여놓는 것이며 그 방문을 열고 마는 것인지. 이 공고를 보고 찾아간 이들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소설은 짧고 발랄한 20대와 칙칙한 40대의 질의응답이 주를 이룬다. 어쩌면 살인자일지 모르는 남자에게 사랑을 느끼는 여성의 제 궁금증을 알아내기 위한 행동과 물음은 필사적으로 보인다. 절대 그 사람이 그럴 리가 없어를 보장하기 위해 용감무쌍함을 보이기까지 한다. 그에 비해 어쩌면 살인자인, 결국 살인자인 남자는 단지 한마디 ‘방에 들어가지 말라’는 한마디 말만 던져놓은 채 생각보다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은 채 귀족임을 내세워 상당히 자상하고 젠틀한 모습을 보여준다. 어금니 아빠가 그러지 않았던가. 온 세상에 대해 자신이 희귀병을 가진 아이를 매우 사랑하고 아끼는 존재로 자신을 포장하는. 그러나 그것은 결국 그들 자신의 ‘취미’ ‘취향’을 위한 포장된 행동일 뿐이었다.

  색채 스펙트럼에 집착이라 말하고 변태행위를 취미로 삼는 돈 엘레미리오처럼 어금니 아빠의 10대 소녀에 대한 집착은 그들 스스로 내세우는 ‘금기’보다 더 ‘금기’되어야 할 사항이다. 어금니 아빠에 대해 사이코 패스라고 프로파일러들이 분석하고 있다. 푸른 수염도 사이코 패스다. 그들이 막무가내로 칼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취향’의 영역에서 마치 정당하다는 듯 사람들을 죽이는 행위들이 오래 시간 동안 푸른 수염으로 대비되어 매력적인 캐릭터로 이미지화되는 것, 현실의 푸른 수렴들이 끊임없이 속출되고 있기에 더욱 끔찍하다. 현재로선 어금니 아빠의 아내와 어린 소녀 이외 다른 아내들은 없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사트뤼닌처럼 동화되어 버린 어금니 아빠의 딸이 ‘금’으로 변하기 전에 얼른 푸른 수염 어금니 아빠가 행한 현실적인 공포가 딸에게 명확히 인식되었으면 좋겠다. 그 자신이 한 일까지도 말이다.

  푸른 수염의 결말이 소설적으로 입혀진 것은 알겠지만, 안타깝게도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 『푸른 수염』은 어금니 아빠라는 이미지로 대체되어 버렸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게, 월세 공고를 통해 욕망의 대상물을 구하는 푸른 수염의 행동이 똑같았던지.....사트뤼닌처럼 그 자신 명백히 이성의 끈을 붙잡고 있기를 바랐건만 사트뤼닌은 잠시 통통튀는 목소리만으로만 남았다. 결국 제 욕망을 따르는 일에 집착하는 것이 인간의 한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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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0-16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금니 아빠‘ 기사를 보면 인간에 대한 환멸이 느껴집니다. 님의 말씀대로 ‘푸른 수염~‘ 버전은 다양한 것 같아요. 그 만큼 소설가 들에게는 좋은 소재이기도 하고.. 저는 하성란의 ‘푸른 수염의 첫번째 아내‘라는 소설집을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모시빛 2017-10-17 19:35   좋아요 0 | URL
푸른 수염을 쓰면서 저도 푸른 수염의 첫번째 아내가 제일 먼저 떠올랐는데요...근데 당최 내용이 기억나지 않더군요.^^::: 제목만 각인되어 있고 세월이 지났다고 까마득하게..이래서 책을 읽은 후 리뷰를 쓰는 일이 필요한가 봅니다. 새삼 열심히 써야지란 생각이 언뜻 들기도 하고 sprenown님이 인상깊다고 하니 ‘첫번째 아내‘를 다시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sprenown 2017-10-17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굳이 읽지 않으셔도, 비슷한 맥락일 겁니다. 푸른수염과 결혼한 여자. 오동나무 장.푸른 수염이 호모였다는 ..이런 지저분한 얘기죠.
 
이 폐허를 응시하라 - 대재난 속에서 피어나는 혁명적 공동체에 대한 정치사회적 탐사
레베카 솔닛 지음, 정해영 옮김 / 펜타그램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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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이 주는 축복


이 폐허를 응시하라 - 대재난 속에서 피어나는 혁명적 공동체에 대한 정치사회적 탐사 


  미국 캘리포니아 산불이 일주일째 지속되고 있다. 사망자와 피해자도 계속 증가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가장 강력한 허리케인 어마가 카리브해 섬나라와 미국 플로리다에, 그 이전에 허리케인 하비가 미국 텍사스에 엄청난 피해를 안겼다. 인도네시아 발리섬에서는 아궁화산이 분화로 하루에도 천여 건의 화산 지진이 일어나 주민 12만명 이상이 대피 상태이기도 했다. 지난 몇 달간 허리케인과 지진 등 세계는 재난이 끊이지 않았다. 자연재해는 나라를 가리지 않고 속속 이어졌다.

 자연재해만이 아니다. 10월에만도 총기난사 사건이 계속 발생해 역사상 최악의 총기 난사라는 미국 라스베가스를 비롯해 스웨덴과 버지니아 주립대에서도 사건이 발생했다. 14일 소말리아 자살 폭탄테러는 수백만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세계 곳곳에서 각종 테러 역시 끊이지 않고 있다. 

  뉴스는 끊임없이 세계에서 발생한 재난을 보도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온갖 사건 속에서 ‘재난’이 멈추지 않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리베카 솔닛의 『이 폐허를 응시하라』는 최악의 재난 속에서 사람들이 보인 행동을 조사하고 해석한 책이다. 100년이란 시간 동안 일어난 재난, 그 상황을 겪은 사람들은 분명 다르지만 그들의 행동에는 분명 공통의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리베카 솔닛은 이 점에 주목한다. 관점은 재난의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유토피아, 휴머니즘 관점이다. 그리하여 이 책의 주제를 리베카 솔닛은 서론에 명시한다.


이 책은 평범한 사람들이 재난에 훌륭하게 대처한 이야기를 다루며, 그러한 대처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다룬다. 지금은 널리 이야기되고 있지 않지만, 이 주제는 최악의 상황이 닥쳤을 때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말해줄 수 있는 주제다.


  수많은 재난이 있었고 이로 인해 사회질서가 무너지는 일 또한 허다했다. 정신의학은 재난의 영향을 트라우마로 일컬으며 약한 인간을 가리키고, 재난 영화는 재난에 직면해 흥분하고 광폭한 모습의 인간을 주로 묘사한다. 하지만 재난 연구를 통해 리베카 솔닛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발현되는 인간본성이 있으며 두드러진 본성은 “회복력과 임기응변 능력, 관대함, 동정심, 용기 같은 것”이라 말한다.

  저자가 주로 조사한 대표적인 다섯 가지의 재난을 보면 재난이 발생 후 권력자·지휘부는  재난에 처한 사람들을 ‘문제’로 규정하며 대응 방식을 편다. 곧 이들을 폭도로 간주하며 또다른 폭력을 행사하는 식이다. 하지만 평범한 시민들은 패닉 상태에 빠진 가운데서도 점차 이를 이겨내고 무료급식소, 응급처치소를 세우는 등 다른 이를 돕고 재난을 복구하기 위한 즉각적인 활동을 한다. 이러한 이타주의의 사례는 언론에서도 자주 다루는 소재이기도 하다. 폐허 속에서는 어김없이 평범한 “영웅”들이 발생하고 이들의 동기는 재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와 이타주의의 발현이다. 엄청난 재난을 겪은 후의 사람들은 단순히 서로를 돕는 것에 그치지 않고 좀더 구조적이고 체계적인 형태의 조직을 갖추는 것으로 나아간다. 이로써 다양한 형태의 운동조직이 갖추어지고 서로 연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른바 ‘강력한 시민사회’로의 성장이다.

  언제나 재난에는 보통의, 시민들이 있었다. 하지만 재난 극복에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재난의 심각성을 부추기거나 특정한 이들을 문제시하는 방법으로 위기를 타개하려는, 프레임 전환을 활용하기도 한다. 그들은 연대의식보다 위기극복보다 그 상황에서도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이익, 정권유지를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의 인간에 기대어, 그들의 인간 본성의 순수성을 이타성을 믿으며 우리는 재난을 극복해 간다. 물론 소수 이기성을 보이는 사람들은 있을 지라도.


위계질서와 기존의 제도는 이런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위기를 극복하는 데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시민사회는 이타주의와 상호부조를 정서적으로 훌륭하게 입증할 뿐 아니라, 도전에 대처할 수 있는 창조성과 자원을 실천적으로 동원하는 데에도 성공적이다. 대재난에는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결정을 내리는 이런 분산된 권력구조가 적합하다. 재난이 엘리트들에게 위협적인 한 가지 이유는 권력이 현장의 민중에게 넘어가기 때문이다.


  리베카 솔닛이 꼼꼼하게 조사하고 재난을 경험한 이들의 인터뷰를 통해서 이러한 특징들을 알려주었지만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언제나 재난이 닥쳤을 때 우리가 기댈 곳은 네 이웃들이었다는 점을 말이다. 인간의 선함에 이타성에 측은지심에 기대었다고 말이다. 리베카 솔닛은 이러한 시민들의 연대의식, 공동체에 대해 “축제” 또는 “혁명”과 같다고 말한다. 재난이 주는 축제로 재난상황에서 제대로 된 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넘어서서 조작을 일삼는 지도층이나 체제를 무너뜨린다는 점이 있다. 체제의 변화, 이것이 바로 혁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긴박한 순간들에 대하여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할 수 있다. 첫째, 재난은 가능한 것,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잠재되어 있던 것을 입증해 준다. 우리 주변 사람들이 가진 회복력과 관용, 다른 종류의 사회를 즉석에서 꾸려가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둘째, 재난은 우리들 대부분이 연대와 참여와 이타주의와 목적의식을 얼마나 간절히 갈망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재난 속에 경이로운 기쁨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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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0-16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은 휴머니즘입니다. 재난속에서 피어나는 자발적인 시민들의 연대와 관용, 그리고 인류애.

모시빛 2017-10-16 19:48   좋아요 0 | URL
넵. 동감입니다. 자발적 시민들의 연대로 상까지 받은 국민들이 있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