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사회 - 증오는 어떻게 전염되고 확산되는가
카롤린 엠케 지음, 정지인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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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방위를 고민하며


혐오사회-증오는 어떻게 전염되고 확산되는가, 카롤린 엠케, 2017-07-18.


  생각해보니까 2017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후딱 지났다. 극도의 긴장감이 떠나지 않았던 한해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이 되니 길었다보다는 역시 짧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지나갈 해에 대한 아쉬움이려니 싶다. 더구나 한해동안 맑고 밝은 긍정적인 단어보다 칙칙하고 어둡고 부정적인 단어 속에서 살아왔으니 해결치 못한 찝찝함이 가득하다.

  올 한해도 여전히 혐오의 프레임 속에서 살았다. 삶이 힘겨워서인지 가치가 실종되어서인지 타자에 대한 혐오는 끊이지 않았다. 문제는 이런 혐오의 프레임은 대중에게서 퍼져나가기도 했겠지만 정치권에서 끊임없이 조장하고 이용했다는 점이다. 혐오와 증오의 감정이 확대되고 구조화되어 타인에 대한 멸시와 폭력을 당연시하고 나의 편을 가르는 이 과정을 너무도 좋아하기에 정치권은 이 혐오를 계속 이어갈 것이다.

  카롤린 엠케는 「혐오사회」에서 이 점을 이야기한다. 혐오가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형성된 감정”이라 얘기한다. “혐오와 증오는 느닷없이 폭발하는 것이 아니고 훈련되고 양성된다.” 그렇기에 이것을 자발적이고 개인적이라 간주하는 한 이 감정을 양성하는데 기여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기본적으로 이 주장에 동감하기 때문인지 이 책은 책장이 쉽게 넘어갔다. 현학적이지 않아서 저자의 글을 현실과 대입해 생각해볼 수 있는 여유도 있다. 저자 카롤린 엠케는 오랜 시간 동안 세계 분쟁지역을 취재한 저널리스트이고 성소수자라고 한다. 저자의 경험이 구조화된 혐오와 증오의 현상을 분석하는데 바탕이 되었기에 그 시선을 포착해내는 것이 달랐으리라 본다. 그렇기에 좀더 생생한 사례들과 그에 대한 명민한 생각들이 기술될 수 있었다고 본다.

  혐오에 대한 현상은 비슷비슷하고 분석도 비슷하다. 결국 같은 것을 겪으면서 이유를 알지만 해결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 생각하게 된다. 해결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해결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습관이란 늘 생각도 변화도 하기 싫은 법이니까. 올 한해도 반복된 혐오의 뉴스는 지역과 대상만을 달리해서 내년에도 이어질 것이다. 더구나 당장 크나큰 선거가 눈앞에 있으니 얼마나 이 치열하고 저열한 혐오의 언어들을 맞닥뜨리게 될지,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어떠한 혐오의 언어에는 휩쓸려가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생겨난다.


증오는 그저 존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만들어지는 것이다. 폭력 또한 단순히 거기 있는 게 아니다. 준비되는 것이다. 증오와 폭력이 어느 방향으로 분출되는지, 누구를 표적으로 삼는지, 또 그러기 위해 먼저 어떤 장벽과 장해물을 제거하려 하는지, 이 모든 것은 우연하거나 단순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된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여성혐오와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확산되고 상대적으로 인종에 대한 혐오는 덜한 것처럼 보이지만 한국사회 역시 다문화가정과 새터민에 대한 멸시와 차별을 진행해왔다. 상대적으로 노출이 덜 되었을 뿐. 세계적인 인종차별과 혐오에서만큼은 한국은 비켜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만큼 순수혈통, 단일민족에 대해 자부심을 치켜세우는 민족이 또 있을까. 가시적으로 보게 될 혐오의 언어를 미리부터 걱정하고 있는 것도 참 미련스럽게 보이지만 혐오가 가지는 힘을 무시할 수 없기에 그렇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순수성’ ‘표준’에서 벗어난 것은 예외없이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 개입되어서다. 한번 잘못된 이 인식을 돌리는 것은 어마어마한 폭력이 지나간 후에도 이뤄질까 말까하다. 지난 대선 토론에서도 성소수자 논쟁이 곧 무시할 수 없는 혐오확산으로 이어지는 현장을 봤다. 동성애자가 에이즈를 확산한다는 그 인식과 더불어 다른 사람이 싫어하니까 맹목적으로 혐오에 동조하는 모습들을 보았다.

  누군가 지속적으로 욕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참으라고 한다. 그 폭력에 맞대응하면 쌍방폭력이 된다. 정당방위가 아니라 쌍방폭력이 되고 마는 현실 때문에 혐오와 증오에 관한 개인적인 감정이 아닌 구조적 차원에서 접근하고 해결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혐오에 혐오로 대응하는 것이 한순간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해봤더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욕설에 욕설로서라도 맞대응하지 않으면 그것은 일방적이 되고 만다. 특별한 일이 되지 않은 채 넘어가는 일상적인 일로 치부되고 만다. 맞대응해야 보는 사람도 흥미롭게 관전한다. 세상이 그렇다.


증오와 순수의 광신주의에 맞서려면 시민사회와 시민들이 나서서 배제와 포함의 기술들에, 어떤 사람은 보이게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보이지 않게 만드는 인식의 틀에, 개인을 집단을 대표하는 표본으로만 보는 시선의 체제들에 저항해야 한다. 모든 사소하고 저열한 형태의 멸시와 굴욕에 용기 있게 이의를 제기해야 할 뿐 아니라, 배제된 이들을 지원하고 연대할 수 있는 법률과 실천도 필요하다. 그밖에 다른 관점들과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인식시킬 수 있는 다른 서사들도 필요하다. 증오의 틀을 무너뜨려야만, “전에는 서로 다른 것들만 보였던 곳에서 비슷한 것들을 발견할” 때에만 공감이 생겨날 수 있다.


  「혐오사회」에 대한 이 맞대응 방식에 대해 저자는 모두가 맞서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제도적 차원에서 이 혐오와 증오의 구조자체를 변화시켜야 한다. 사회문제를 바라보고 그에 대한 대안을 얘기할 땐 항상 이렇게 끝이 난다. 인식과 구조의 변화. 그래서 어떻게라고 그 세세한 방법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더 큰 고민의 장으로 넘겨버린다. 책을 읽을 땐 그 현상에 대한 분석자체에 힘이 실리며 만족스러움을 느끼다가도 현실로 넘어오면 뭔가 아득하다. 실천과 변화를 너무나 어렵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생각하게도 된다. 어쨌든 문제인식을 명확히 하고 난 후에 대안을 찾아 나가는 것이기는 하지만 혐오의 상황은 너무 깊고 넓으니까. 그럼에도 혐오와 증오가 형성되고 확산되는 일련의 매커니즘을 잘 보여주고 있어서 「혐오사회」를 읽는 내내 카타르시스는 최고조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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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있나요 - 2016 제10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박형서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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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없었다


2016 제10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박형서・윤성희・천운영・한유주・김태용・조해진・최은미・김금희, 은행나무, 2016-.


  문학사에서 김유정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작가의 이름을 건 문학상이 꼭 그 작가의 이미지를 구현해내는 것에 수여하는 것이 아님을 알지만 10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 「거기 있나요」에서는 특히 떠올리기 어려웠다.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내가 소설속에 있기는 한 건가, 나의 시선은 책에 있는데 영혼은 딴곳으로 가버린 경험을 하고 있었다. 이해와는 상관없이 나는 양자물리학을 경험하는 순간이었다고나 할까. 가물치, 제물포라는 물리포기의 정당성을 확장시켜주는 말처럼 일찌감치 물리는 물려온 삶이라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는 쉽사리 소멸되어 과학이론의 세계가 나오자 한발 물러서서 책을 읽다보니 여전히 소설의 내용이 흐리다. 다만 이해하고 이것을 또다른 차원으로 엮어낸 작가에게 놀라움과 부러움의 시선만을 던졌다.

  진화동기재현연구라는 인류의 진화 과정에 대한 재현 실험이 이 소설의 주축을 이룬다. 인류의 진화, 사회가 형성되어가는 과정에서 실험 연구진이 실험조건을 조절하면서 또한 진화의 속도와 내용은 달라진다. 연구진이 이렇게 조건의 변화를 주면서 연구진이 마치 인류를 쥐고 흔드는 듯이 그의 욕망 또한 거세어지고 실험의 대상인 쿼크가 연구진과 대립하는 것이 소설의 주된 내용이다. 거기 있나요는 실험 대상인 쿼크가 파괴되는 순간까지 외치는 절규다. 글로 한줄 요약을 하다보니 아주 쉬워보이지만 이 한줄의 줄거리를 작성하기까지 수많은 감정과 사고들이 파괴되었다 살아났다 했다. 여전히 과학소설이라는 말로 분류하며 이해함의 폴더와는 먼 곳으로 이 소설을 옮겨 놓는다.


그해 여름 우리가 정말로 자살하고 싶었는지 지금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나는 자살하고 싶었다. 절반의 진심이었다. 다른 세 사람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없었으니 그들이 진심으로 자살을 원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추측컨대 그들 역시 절반쯤 진심으로 자살하고 싶었을 것이다.  - 한유주, 「그해 여름 우리는」


  그해 여름에 우리는 어땠을까. 그해 여름을 겨울처럼 기억하던 시절은 분명 있었다. 한유주 작가는 자살하고픈 이십대 네명의 청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같은 공간에 네 명이 밀집하여 살아가서 그렇지 이 공간을 더욱 확장해보면 이 나라에는 무수히 많은 청춘들이 자살하고픈 욕구를 지니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특정 어느 곳엔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더욱 밀집해 있을 것이고. 왜 죽고픈 이들은 타인과 함께 죽는 것을 택하는 건지, 늘 전혀 모르는 이들이 인터넷에서 만나 동반자살한 기사를 보면 그들은 죽고 싶어서 모인 것이 아니라 단지 죽고싶다는 감정을 나누고서는, 살고 싶어서 만나려 애썼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 소설의 문장에서도 이렇게 절반은 살고 싶었을 마음을 보았다.

  천운영의 「반에 반의 반」은 기억, 추억에 관한 이야기다. 아니 삶에 관한 이야기인가. 누군가의 삶에 대한 기억은 기억하고픈 대로 흐르는 걸까. 추억이 소환하는 할머니의 생애는 각자의 기억속에서 부딪치며 재창조된다.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애잔한 기운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소설속에서 만난 것 같다. 

  김금희의 「새보러 간다」를 보면서 직장인의 비애만큼이나 직장인이라는 명명하에 갇혀버린 순응적 삶에 대해서 생각했다. 젊은 작가상 수상작이기도 한 최은미의 「눈으로 만든 사람」은 막 눈사람이 녹아 물로 남은 자취를 보는 것처럼 축축했다. 동화같은 이야기에 푸욱 빠지게 될 줄만 알았건만, 그렇지 않아서 더 놀랐고 답답했다. 이름에 의미를 붙이며 이름 때문에 나름 애를 먹었던 기억이 있어서인지 이름에 의미와 정체성을 붙드는 입양아의 이야기 조해진의 「문주」도 그 이름이 계속 생각나게 했다.

 

이름은 우리의 정체성이랄지 존재감이 거주하는 집이라고 생각해요. 여긴 뭐든지 너무 빨리 잊고, 저는 이름 하나라도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사라진 세계에 대한 예의라고 믿습니다.  - 조해진, 「문주」

 

  하지만 사람은 이상한 존재인가보다. 책을 덮고 나니까 거기 있나요라는 제목이 가장 크게 맴돌면서, 소설을 읽었던 시간 동안 거기 없었던 나의 영혼을 다시금 붙들어 맬 날을 기다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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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스퀘어에서 우리는 - 창작과비평 창간 50주년 기념 장편소설 특별공모 당선작
금태현 지음 / 창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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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탱고


망고스퀘어에서 우리는, 금태현, 창비, 2016.11.07.


  서른 한가지 아이스크림을 고르는 가게에 새로운 아이스크림이 생겨나도 망고탱고를 고른다. 다른 맛은 기억에 남지 않고 망고탱고의 맛만 뚜렷하게 기억하는 건 그곳에서 처음 먹은 아이스크림이기 때문일까. 첫사랑에 대한 기억만큼으로 자리잡은 망고탱고가 아니라 정말로 가장 맛있다. 망고탱고를 먹으면 정말로 입안의 혀가 춤을 추는 듯이 느껴진다. 망고스퀘어가 망고탱고로 보여서 시원하고 맛있는 맛을 떠올렸는데 필리핀 세부에 있는 실제지명 망고스퀘어는 그곳에서 살고 있는 하퍼의 삶의 이야기는 전혀 망고탱고의 그 달콤한 맛과는 멀었다.

  하퍼는 코피노다. 한국에 익숙한 코피노의 이야기라면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일 텐데 하퍼의 아버지는 병으로 사망했고 어머니는 늙은 일본인과 재혼해 일본으로 떠났다. 이쯤되면 하퍼는 엄마에게 버려진 건가. 그래서 하퍼는 일찍부터 소매치기와 불법 동영상 업로드로 돈을 벌며 세상을 살아간다. 하퍼가 올리는 영상의 주내용은 타인들의 실패나 실수담이다. 참으로 웃픈, 그런 영상들을 올리며 방문자를 유도하여 돈을 벌고, 그리고 또한 끊임없이 경고장을 받는다.

  특별히 하퍼가 코피노이기 때문에 그의 삶이 힘들고 어렵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가 마약배달을 하는 상황 역시도 코피노이기 때문은 아니다. 아버지는 없고 어머니는 재혼한 상황에서 홀로이 세상을 살아가는 아이들의 삶을 본 듯할 뿐이다. 그런 아이들을 이용하거나 동정하는 이들이 있어서, 이런 아이들의 삶을 제 마음대로 주무르는 이들이 있어서 하퍼의 삶은 지속되었다. 이제 스무살인 하퍼가 살아왔을 삶에서 하퍼가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질 수 있는 상황이 없기에 하퍼의 삶이 그대로 정해져가는 것이다.

  하퍼가 악랄하다거나 우울의 바다 속에 빠진 성격은 아니고 허세 가득하고 철없어 보이는 모습을 보여주기에 그저 뒤통수 탁 치고싶은 철딱서니없는 애로 보이긴 한다. 불법과 범죄로 얻은 돈으로 삶을 살지만 안정적인 미래에 대한 계획이란 미인대회 출신의 여자를 만나는 것인 스무살 청년 하퍼의 삶이다. 물론 그렇게 살아가는 자신의 삶에 대해 건조히 내뱉는 속에서 힘겨움이 체화된 하퍼의 일상에 애처로움이 느껴진다. 하퍼의 희망, 미인대회 출신의 여인은 베렌이라는 여자로 실현된다. 베렌과의 만남이 하퍼의 인생을 또한번 전환시키게 만드는데 베렌을 잡으러 가는 자에서 베렌과 사랑에 빠져 도망하는 신세가 되기 때문이다. 하퍼에게 베렌을 잡기를 요청이란 형식으로 실은 협박한 이는 박사장, 하퍼에게 마약배달을 시키는 자이다. 이들의 관계는 그렇게 거래관계였지만 헤어날 수 없는 잘못된 관계로 위치지으며 하퍼도 베렌도 박사장과 같은 이들의 악랄함 속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한다.

  하퍼는 지금 살아있지 않은 아버지, 기억에 없는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을 경유해 살아계신 어머니가 있는 일본으로 간다. 후쿠오카 그 곳에서 어머니와의 시간을 보내며 기억에 없는 아버지에 대해서도 이미지를 찾아내고 베렌과의 관계 또한 견고해진다. 일본여행에서 하퍼가 느낀 것은 ‘가족’이라는 이미지다. 그가 살아오면서 느끼지 못한 가족이란 말이 주는 따스함, 안정감을 구체적으로 그려내며 가족속에서 살고 싶은 꿈을 새롭게 하퍼는 갖게 된다. 가족에게서 분리된 채로 살아내야 했던 하퍼의 삶이 어쩌면 힘겹게 살게 된 근원으로 올라가 이유를 찾아낸 것이라고 봐야 할까. 원인을 찾았고 방법을 찾은 하퍼의 새로운 삶을 기대한다.


나는 우리 네사람이 가족이라는 둘레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베렌과 엄마가 나란히 주방에서 밥을 짓고, 나는 고등어를 굽는다. 지금처럼 할아버지와 함께 식탁에 둘러앉는다. 음식이 식탁을 구성하는 게 아니다.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이 식탁을 규정한다. 가족 중 누군가 잔소리를 하거나 참견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하퍼의 꿈은 감옥에서 전개된다. 박사장이 끝나지 않을 돈에 대한 욕구 때문에 계략으로 마약운반책으로 붙잡혀 무기징역을 선고받게 되니까. 스무살 청년 하퍼의 삶은 감옥에서 어떻게 이어질까. 이제 진정으로 원하는 목표를 가지고 삶을 살기를 원할 때에 맞닥뜨린 이 현실에서 하퍼는 박사장을 원망하지도 마냥 억울해하지도 않는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서일까. 꿈꾸듯 여전히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다. 교도소 댄스 공연에서 춤추며 베렌에게 프로포즈하는 것을 상상하는 하퍼의 삶은 하루 몇 끼를 먹냐는 신부에게 참치맛을 아냐는 식으로 대꾸하던 하퍼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허세가 아니라 진정 웅원하게 된다.


나는 벌써부터 부활절을 기다렸다.

   관례대로 누군가 석방을 맞이할 수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석방자 명단에 내 이름도 들어가길 간절히 희망했다. 잘못 불리지 않은, 진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싶다.


  어쩌면 『망고스퀘어에서 우리는』을 보자마자 망고탱고를 떠올린 건 하퍼의 춤으로 이어질 이야기의 전개를 알았던 것일까. “기다릴 줄만 안다면 불행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는 말이 판도라 상자속에 마지막 남아 있던 희망에 대한 두가지 해석을 생각하게 한다. 망고탱고를 입속으로 되뇌며 희망일지 절망일지 모를 하퍼 김의 미래를 생각하는 동안 존재하지도 않는 망고탱고가 이미 입속에서 다 녹아 그것이 가졌던 여운만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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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비밀의 숲 세트 - 전2권 - 이수연 대본집
이수연 원작 / 북로그컴퍼니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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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없음을 소망하며


비밀의 숲 1・2- 대본집, 이수연, 북로그컴퍼니, 2017-08-11.


  ‘감정적’이다라고 말할 때엔 거기엔 부정적인 뉘앙스를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감정이 없다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본다. 특히 그것은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싸이코패스의 전형이라고 본다. 그렇기에 감정적인 것은 부정적이긴 하나 감정이 없는 것에 비해서는 인간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감정적인 이유로 그것을 컨트롤하지 못해 범죄를 일으킨 이들보다 감정을 갖지 않는 이에게 더 큰 불안과 공포를 느낀다. 누군가의 감정적인 화보다 감정없음으로 인한 해가 ‘나’에게 미칠 가능성을 더 크게 보기 때문일까.    비슷한 맥락일지 법조인에게도 감정을 요구한다. 감정없음보다는 감정을 가지고 사건을 들여다보는 것을 기대하고 그것을 ‘공정’의 한 요소로도 여긴다.

  『비밀의 숲』은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관념인가를 알게 한다.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 오히려 감정이란 것이 판단을 좌지우지 하는 데 얼마나 깊게 관여하는가를 보여준다. 감정을 관여하는 뇌의 일부가 제거되어 그 기능을 상실한 자가 범인을 잡는 검사일까, 범인 그것도 연쇄살인범일 거라는 생각을 하게끔 하는 지점에서 『비밀의 숲』은 전개되는데 드라마로 방영되어 많은 인기와 호평을 얻고 각종 상을 휩쓴 『비밀의 숲』에서 가장 흥미있는 부분이 주인공 황시목의 이 감정기능의 제거였다. 그리고 이것이 공정한 생각을 하는데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감정없음은 곧 싸이코패스라던 익숙한 공식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정확한 의료계의 입장은 모르겠다만.

  감정적으로 휘둘리는 사람들 속에서 사건을 명확히 인지하고 그에 따른 판단을 내리는데 부족함이 없는 캐릭터로 인해 감정과 사고의 적절한 균형이 필요하다라는 뻔한 말을 하지 않을 수 있어서 좋았다. 이 세상의 온갖 인간관계와 무수한 사연의 연결망에서 침착하고 사리분별을 가지고서 판단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음에 황시목처럼 “범인은 잡는 겁니다. 잡아서 뭘 하는 게 아니라.”와 같은 사고로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이 타당하게 보인다. 특히나 그토록 힘들게 힘들게 이룬 촛불의 힘이 몇몇 특정한 판사들의 손에서 휘둘리는 한해를 경험하고 나서 이들에게 감정없음을 요구하고 싶어졌다. 이들의 뇌기능을 상실시켜 버릴까보다….

  

우리는 팩트를 찾는 사람들입니다. 완전히 묻혀버렸을 때 팩트를 경위님이 직전에 건져냈어요. 그걸 살리느냐 마느냐가 결정하는 건, 지금 당장의 상황이 아니에요. 한여진이란 사람이 지금까지 어떤 사람으로 살아왔는가, 거기 달렸죠.


  특정 판사들의 이름이 연일 실검에 등장하고 또 등장하고 또 등장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그들이 마치 싸이코패스처럼 굳어진 채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처음이야 힘들었겠지만 그 이후로는 너무나도 당당하고도 뻔한 패턴을 보여주는 것을 보면서 황시목의 저 대사가 어쩜 그리도 맞아 떨어지는가 싶다. 그렇게 스스로도 기존의 상식을 깨고 논리가 모순에 빠지는 채로 판결을 내리는 것이 당장의 상황이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거였다.

  한해를 마감하는 이즈음 문득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인터넷을 오갔는데 이들 법조인들의 이름이 무더기로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씁쓸하다. 그동안 검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해서 검사들의 소명의식과 역할에 관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고 각성하는 분위기가 이어졌는데 넘어야 할 산은 무더기였다. 아주 제대로 그동안 다소 간과했던 판사들의 매우 저열한, 권력지향의 ‘인간적인’ 모습을 만나고 있다.


우리 검찰은 그릇된 것을 바로잡는 사정기관으로서, 실패했습니다. 검찰의 가장 본질적 임무에 실패했습니다. 이 실패의 누적물이 이창준 전 검사장이며 우리 모두는 공범입니다.


  검찰도 법원도 언론도 관공서도 모두 저 말에 해당된다. 그들이 해야 할 역할을 하는데 실패했다. 적어도 그 이유가 그들이 가진 감정때문이었음을 부인할 순 없을 것이다. 권력과 재력에 친화적인 감정, 학연과 지연과 혈연에 매달리는 감정, 그들끼리의 세상에서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잘 살고자 하는 욕망 가득한 그 감정들. 겨울의 찬기운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감정없음이 보고픈 2018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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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의 북극곰...


우리의 남극 탐험기, 김근우, 나무옆의자, 2017-07-10.


  

http://www.ytn.co.kr/_ln/0104_201712261515210315



  얼음 구멍 속으로 얼굴을 내민 물개를 보고 깜짝 놀라 넘어진 새끼곰이 너무 귀여워 눈여겨보다가 『우리의 남극 탐험기』를 떠올렸다. 책을 읽을 당시에는 흥미는 없었고 아쉬움이 많았기에 쉬이 잊고 넘겼는데, 극과 극은 통하는 건가.

  곰을 부를 때면 늘 북극곰이라 부르듯 남극에는 곰이 살지 않고 대표적으로는 펭귄이 산다. 남극은 대륙이고 북극은 바다인데 곰이 바다 북극에서 살고 펭귄이 대륙에서 살고 있다는 게 오랫동안 그렇게 알아 왔으니 익숙할 뿐, 이상해라고 생각하니 더없이 이상하게 생각되기도 한다. 이 소설은 남극탐험기이지만 남극을 탐험하는 내용은 후반부에나 나온다. 전반부는 각각의 등장인물의 만남과 상황 등이 나오는데 사실, 주인공들의 남극탐험에 대한 개연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더구나 남극을 탐험하러 가면서 만난 북극곰도. 놀란 북극곰을 보다가 떠올린 건 이것이었다. 그래 북극곰을 남극에서 만나다니. 뒤늦게 말이다.

  대륙으로 둘러싸인 바다 북극이나 얼음으로 덮인 땅 남극이나 땅과 바다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얼음과 눈이 떠올려져 늘 추운 곳이라고만 생각해 오다가 새삼스럽게 남극과 북극의 차이를 세심하게 살펴보게 되었다. 남극탐험에 관한 이야기는 자주 들어봤어도 북극탐험에 관한 이야기는 들은 기억이 없다는 것도. 이누이트족, 에스키모인들이 살고 있어 탐험이라는 말이 적당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만 이래저래 북극이든 남극이든 탐험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은근슬쩍 든다.

  물론 소설속에서처럼 북극곰을 남극에서 만난다거나 하늘을 나는 펭귄을 만난다거나 그런 기대는 하지 않는다. 더더구나 말하는 곰과 펭귄에 대해서도. 극한의 지역을 탐험하며 발가락이 썩어 잘라낸 이야기도 나오지만 소설에서의 남극텀험기는 현실성있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환상같고 장난같다. 오히려 이야기에서 현실성을 획득하고 나름 흥미로운 인물은 섀클턴 박사다. 미숙아로 태어나 망막병증으로 시력을 잃고 살아간 그가 겪는 일련의 일들은 남다르다. 상류층에 재력있는 집안에서 자랐지만 그것과 또한 시력을 이유로 겪는 멸시와 조롱들, 그럼에도 타고난 의지와 특별한 성향으로 어린나이에 박사가 되고 교수가 된다. 늘, 여러 사람들로부터 공격받고 그리고, 동성에 대한 박사의 사랑과 이별이야기가 더해진다.

  병렬식으로 박사와 주인공 나의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그리하여 어느 한 지점에서 그들이 만나 남극탐험을 떠나지만 시종일관 왜 남극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남극탐험을 떠났던 섀클턴 박사의 목소리가 이끌었다는 이유를 대기엔 부족하게 여겨졌다. 소설이니까 하면서도 너무 말이 안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소설이 무엇인가, 내가 소설에서 기대하는 게 무언가를 생각했던 소설이 되었다. 

  소설의 주인공이 소설가라는 설정이 이 생각을 더하게 했다. 누구나 제 인생에 대해서는 아쉽고 안타까운 점이 있겠지만 주인공 ‘나’의 행동들은 치기어리게 보여서 공감이 덜했다. 이 주인공은 우연히 쓰게 된 글로 연이어 상을 받고 소설가가 되었지만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스타일이란 게 별건 아니고 정신 나간 놈들이 등장해서 되는대로 사고를 치고 헛소리나 찍찍 내뱉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엉터리이고 헛소리로 일관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래도 내게 문학상을 안겨준 심사위원들은 그런 스타일을 신인 작가의 패기라고 좋게 평가해주었고 독자들의 반응도 괜찮았다. 내 유일무이한 장점이었던 것인데 그게 망가져버린 것이다. 문학 비슷한 거라도 써보겠다는 생각에 초심을 잃고 진지하게 글을 쓰기 시작했더니 내 글은 무척 진지한 헛소리가 되고 말았다. 진지한 헛소리는 헛소리가 될 수 없었다. 재미도 없고 미학적 가치도 없는 쓰레기에 불과했다.


  진지한 헛소리가 무언가에 대해서 생각하며. 적어도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진지한’은 못느꼈고 소설을 다 읽고 난 후 허무함이 밀려왔던 것만 기억에 남는데, 이렇게도 다시 소설을 떠올리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니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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