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하지 않겠다


이해 없이 당분간, 김금희 외, 걷는사람, 2017-08-06.


  어느 순간부터 한국문학에서 소설의 길이가 짧아지고 있다. 일정한 분량을 요구하는 문학상에서도 장편 아닌 중편 정도의 소설로 바뀌고 있다. 여전히 일정한 분량의 단편 소설을 신인의 등단 심사로 하고 있지만, 출판계에서는 적어도 지속적으로 ‘짧은’ 이야기를 펴내고 권장하고 있다. 그러면 이런 짧은 이야기는 이미, 등단한 이들에게만 해당하는 ‘장르’인 건가?!

  다양한 문학상에서 이름을 봐온 많은 작가들이 아주 ‘짧게’ 말하고 있는 책, 『이해없이 당분간』. 22명의 작가들의 이름을 보면서 나름 어느 작가의 작품이 좋은가를 가늠부터 하면서 책장을 넘기면 그 짧은 이야기에 뭔가 아직 남은 건 아닌가 하며 책장을 뒤적이게 된다. 소설이라기보다 수필같은 느낌을 받는다.

  짧다는 건, 22명의 작가가 글을 썼다는 건 22번의 휴지를 둘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휴식을 두고도 이 책은 터무니없이 속독하게 되는데 그래서인지 책을 덮고 난 후 책의 제목만 남았다. 이해없이 당분간. 뭐라고 해야 하나, 그냥 이해없이 당분간 살자, 뭐 그런 말을 혼자 되뇌였다. ‘이해해라’ ‘이해해줘’ ‘이해해야지’라는 말을 너무 자주 듣고 다짐하며 살아왔기 때문일까. 때론 누군가를 무언가를 ‘이해하지 않겠다’라는 생각을 그대로 유지할 때 어떤 해방감을 느낄 때가 있다. 그것은 도대체 메워지지 않는 간극에 힘겨워하며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탓이리라. 그리고 늘 그것에 대한 근본적인 책임을 나 자신에게 두었던 것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이해하지 않으려는 나를 배려없음과 이기심가득한 인간이 되려는가, 채찍질하며 어떡하든 ‘이해’하려 몸부림치려던 때, 그것 자체가 스트레스였음을 이제 알아간다. 그것은 보다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한 몸부림이었을까, ‘착한’에 대한 강박이었을까.

  어떤 사건에 대해 사람에 대해 ‘이해하고 싶지 않아’를 고수하며 편한 마음을 느꼈던 이후로 억지로 이해하려던 작위적인 형태를 버렸다. 살면서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일도 있는데 이런 이해에 대한 강요가 마음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제목이 남은 책을 보며 다시금 다짐한다. ‘이해없이 당분간’ 살겠다라고.

  마침 인터넷엔 전직 상사가 실검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 사람의 행태를 알고 있기에 호탕할 수밖에 없는 웃음이 나왔고 “역시 이해가 안되는 Ⅹ”이라 외치며 하루종일 피식거렸다. 실검을 장식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더욱 더 실소가 늘어갔다. 이해되는 건 그 개인의 욕망, 역시 이해가 안되는 것은 ‘나를 뽑아줍쇼’로 자리를 유지하는 자의 결코 변하지 않는 그 행태. 욕망이 있다면 그 욕망에 맞춰 성실하게 일하는 자세를, 진심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자세를 가져야 함에도 그런 것은 역시 안중에 없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선이라는 사실에 놀라고 여전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마냥 찍어버리는 유권자들에 또한번 이해하지 않겠다가 반복된다.

  하긴,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누군가를 얼마나 알겠는가. 가까이서 본다 한들 알기 쉽지 않은 이들도 있다. 그렇기에 ‘그럴 사람이 아닌데’라는 말은 허무하게 들린다. 누군가를 ‘그럴 사람이다’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고 단정짓는 것도 개인적인 관계와 관찰에 따른 나의 ‘느낌과 판단일 뿐, 그것이 진정 맞다, 아니다를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누군가에게 “그럴 사람 아니다”가 누군가에게는 “그럴 사람이다”를 완전히 반박하는 말이 아니다. 그건 별개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과 이해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연이어 인터넷에 오르내리고 있다. 비록 가까이서 보지 못하여 ‘그럴 사람’에 대해 판단하기란 어렵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저지른 ‘죄’에 대한 이해력은 지니고 있기에 개인에 대해 ‘이해하지 않겠다’는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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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번째 파도
최은미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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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파도가 남았다

아홉 번째 파도, 최은미, 문학동네, 2017-10-31.


  작가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대해 쓰고 싶었다고 했다. 『아홉 번째 파도』는 사랑의 이야기인가, 난 고개를 갸우뚱하며 책을 덮었다. 작가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줄곧 사랑따윈 어디 있나 하며 ‘사회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말에 다소 당황했고, 난감했고, 허무했다.

  사랑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응원하는 일도 거기에 빠져들지도 않았다. 내 머릿속에 감성은 어디로 보내버린 건가, 사랑에 대한 정형화된 틀을 가지고 있는 건가. 어떤 상황을 보는 시각이 한정적인 건가.

  소설은 가상의 도시 ‘척주’를 배경으로 살인사건 용의자 추적과 핵발전소 건설을 둘러싼 주민들간 갈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폐광지대인 이곳엔 과거에도 자살로 판명된 의문의 사망사건이 있었고 핵발전소 유치를 둘러싼 갈등이 첨예한 가운데 약왕성도회라는 사이비집단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곳이다. 어린 시절 척주에서 살다가 다시 돌아온 보건소 약사직 송인화가 사건의 중심에 얽혀 있다. 살인사건의 용의자가 누구인지, 왜 죽였는지를 추적해 가며 과거와 현재의 사건이 이어지고 그 상황에서 충격적인 비밀들이 드러난다. 충격이라고 했지만, 사실 충격이랄 것도 없이 이야기의 전개를 가늠할 수 있다. 핵발전소 유치와 같은 갈등 상황에서 이권을 얻기 위한 이가 결국 승리하리라는 것을. 답정너처럼 그들이 바로 모든 열쇠를 쥐고 있음을. 그러니까 결국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이의 끝없는 욕망과 광기로 치달을 이야기가 되리라는 것을.

  그래서 소도시 느낌의 척주시는 늘 언제나 팽팽한 긴장감이 쌓여 있다. 업무만이 아니라 사람들간의 개인적인 관계도 긴장과 대립으로 팽팽하다. 누군가와 마음을 터놓고 나눌 새없이 편가르기가 자연스레 형성되는 곳에서 송인화와 사회복무요원 서상화와 과거의 연인 국회의원 보좌관 윤태진과 송인화의 이야기가 있다. 척주 출신으로 고교시절 콜타르에 빠지고 난 뒤 후유증에 시달리는 윤태진의 좌절과 분노가 송인화와 대비되어 생생했다. 

 『아홉 번째 파도』라는 제목에 대한 이미지를 생각하다가 러시아 화가 이반 아이바좁스키의 그림명이라는 것에서 이해가 되었다. 그림 「아홉 번째 파도」에는 산처럼 우뚝 솟아 폭풍우치는 바다에 난파된 배와 이제 해가 떠오르는 듯 붉은 빛과 구름들이 어우러져 있다. 폭풍우가 이제 끝나려는 듯 해가 떠오를 모양이지만 러시아 선원들에게 ‘아홉번째 파도’란 폭풍이 몰고 오는 가장 치명적인 마지막 파도라고 한다. 난파된 배에서 지쳐 쓰러진 선원들이 러시아인들이라면 ‘아홉 번째 파도’에 관한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인데, 그들은 쓰러지지 않고 마지막 아홉 번째 파도에 맞서기 위한 대비를 할까. 그대로 쓰러져 버릴까.

  소설 『아홉 번째 파도』에서 본 것은 끝없이 덮치는 파도였다. 휘몰아치는 파도에 송인화도 서상화도 윤태진도 난파된 배를 겨우 붙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모두, 척주시라는 바다에서 욕망과 광기에 가득한 이들이 벌이는 파장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있다. 한 개인의 욕망이 동일한 욕망으로 뭉쳐져서 만들어내는 거대한 포말. 쉬이 사그라들지 않고 끊임없이 덮쳐오는 거대한 파도. 그들이 만다는 비리가 악이 덩어리지는 척주시의 모습은 이제까지 쉬이 만나는 모습이었고, 앞으로도 여전히 볼 모습들이다. 한 개인이 소소하게 희망하던 삶의 꿈들이 무참히 일그러지는 모습들 또한 쉬이 보는 모습이다.

  개개인들의 삶을 더 이상 비참하게 하지 않고 행복한 세상에 살기 위해 이런 사회문제들을 파헤치고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거대한 구조만을 바라보다가 언뜻 언뜻 개인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누구든 다르고 개인적이긴 하지만 크고 중요한 것 역시도 개개인에게 다른데 문득 대를 위해 소는 희생됨이 마땅하다는 사고, 우선되어야 하는 가치에 대한 차이, 무엇이 대이고 소인가에 대한 생각들이 아홉 번째처럼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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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호위
조해진 지음 / 창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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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핀 연기

빛의 호위, 조해진 저, 창비, 2017.2.20.


  오랜만에 햇빛을 본다. 지난 겨울은 추웠고 그래서 봄은 더욱 더 멀리에서 멈춰진 것처럼 느껴졌다. 봄비의 가벼움이 아니라 겨울의 무거운 비가 완전히 걷어진 건지는 모르겠다. 창문을 열면 아직 추위는 머물러 있다. 창문 밖으로 바라보는 빛은 어제보다도 따스하다. 햇빛이 비치지 않은 곳곳엔 아직 찬기운이 머물러 있다. 햇빛쪽으로 나아가야 휘감은 온기가 느껴진다. 그녀, 권은이 느꼈던 빛이 창문으로 넘어온 빛과 같은 느낌이었을까.

  빛이 호위하는 순간의 그 황홀함이 따스함과 함께 가득한 「빛의 호위」다. 분쟁지역에서 보도사진을 찍는 권은. 홀로 외롭게 방안에 앉은 아이가 반장에게 건네받은 카메라 속에서 빛을 발견하는 순간, 그 순간에 대해 ‘의미’를 만들고 그 ‘의미’를 간직하며 살아간다. 이 이야기는 또다른 이야기, 나치의 유대인 박해로 지하창고에 숨어 지내야 했던 알마 마이어의 이야기와 함께 진행된다. 알마 마이어 역시 그 갇힌 공간에서 연인이 넣어준 악보 한 장에서 ‘빛’을 발견한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 뭔지 알아? 편지 밖에서 나는 고개를 젓는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어. 사람을 살리는 일이야말로 아무나 할 수 없는 위대한 일이라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반장, 네가 준 카메라가 날 이미 살린 적이 있다는 걸 너는 기억할 필요가 있어.


  실제로 카메라에서 빛을 발견하였을 것이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휙 지나가는 빛’을. 하지만 이미 반장이 무심히 건넨 카메라에서, 급박하고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숨을 곳과 먹을 것을 내어준 연인에게서 이미 권은은, 알마 마이어는 마음을 열어 빛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들의 존재와 행위로 ‘빛’을 온전히 환하게 인식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 잠깐의 빛에서 희망을, 마음을 온전히 담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소설집의 몇 개의 단편소설들은 대표적인 문학상을 받은 작품들이라 반가운 친구들을 다시 만나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과 같은 또다른 느낌으로 조해진의 단편들이 지니는 일관된 느낌을 느껴본다. 대부분이 상처와 고통의 상황 속에 놓여 있고 그 기억으로 인해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각자의 삶에서 겪은 상처에 힘들어 하지만 어떻게든 숨을 쉬기 위해 애쓰고 있다.

  등장인물들도 공간적 배경도 시간적 배경도 한국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과 인물이 교차되며 등장한다. 빛의 호위 속의 권은과 알마 마이어가 교차되어 보여주듯이 개인적인 이유로든 사회적인 이유로든 받게 되는 상처란 시간도 장소도 인물도 뛰어넘는다. 왜인지 상처란 개별적인 것 같으면서도 보편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또한 그 반대로 보편적인 것이지만 개별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누가, 어떤 이유로 상처를 받았더라도 또는 누구에 의해 상처를 받았더라도 그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누군가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상처를 주는 것도 상처를 극복하게 하는 것도 사람. 누군가의 호의. 그로 인해 어떤 위험하고 쓸쓸한 상황에서라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됨을 느낀다. 전반적으로 쓸쓸한 저녁 풍경같은 느낌의 단편들이었지만 「빛의 호위」 하나로 저 멀리 밥짓는 연기를 생각하게 한다. 인간에 대해 실망과 절망하다가도 다시 희망과 기쁨을 얻게 한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휙 지나가는 빛처럼 창문을 열면 그 빛이 타고 들어온다. 문을 열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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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혹은 그림자 - 호퍼의 그림에서 탄생한 빛과 어둠의 이야기
로런스 블록 외 지음, 로런스 블록 엮음, 이진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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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필요없을 때가 있다


빛 혹은 그림자-호퍼의 그림에서 탄생한 빛과 어둠의 이야기 


  에드워드 호퍼는 사실주의 화가로 유명하다. 뉴욕에서 태어난 호퍼는 어릴적부터 자신이 생활하고 눈에 익은 도시의 풍경을 주로 그리고 있다. 그런 까닭에 가장 ‘미국적인 정서’를 잘 표현하는 작가라 불리고 있다. 도시와 교외의 풍경, 그의 그림에서 미국적인 정서가 가장 잘 드러나 있다고 사람들이, 평론가들이 얘기한다는 것은 역시 미국이란 나라는 도시와 고독과 한뜻 각진 삶이 가장 미국답다는 얘기인가.

  에드워드 호퍼는 1882년 태어나 1967년 사망했다. 그의 생애로 보건대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하던 시가는 대공황과 전쟁이 휩쓸던 시기다. 미국만이 아니라 전세계가 상처의 시기였던 그때 호퍼는 그림속에 자신이 살고 있는 주위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다. 사실주의 작가라고 하지만 그의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사실적인 느낌보다 몽환적인 느낌이 더 든다. 호퍼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대표적인 스릴러 영화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이라고 한다. ‘기찻길 옆집’ 이나 ‘이른 일요일 아침’ 등의 작품 풍경이 영화 사이코에 나오는 배경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에드워드 호퍼는 화가인데도 그림보다 이름만 들었다. 아마도 여러 책들 속에서 언급된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일 게다. 현대 사실주의 화가이지만 교과서로 미술책에서 배운 적 없는 작품은 기억에 남았을 리 없다. 생각해보니 호퍼의 그림은 오히려 이 책을 읽음으로서 보게 되었다. 실로 이름만 알고 있는 화가의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된 셈이다. 유명한 미국의 대표적인 화가의 작품을 만나게 된 순간은 소설과 함께, 이야기와 함께.

  그림을 모티브로 한 소설들을 여러 권 읽었지만 스토리가 이야기가 남는 작품이 있는데 이 책, 「빛 혹은 그림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림이 남았다. 호퍼의 그림을 본 적이 없어서일 지도 모르겠고 호퍼의 그림만큼이나 많은 이야기가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호퍼의 그림을 소재로 많은 작가들이 이야기를 써내려간 이 소설집 「빛 혹은 그림자」를 보면서 어떤 한 장면을 보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다양한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마치 어떤 그림에서는 그것이 그냥 풍경일지라도 하나의 모습일 뿐인데도 마치 어떤 사건의 현장인 것처럼 소설가가 그린 이야기가 아니라 새로운 이야기를 상상하고 있기도 했다. 나라면 이 그림에서 이런 것이 떠올려지고 느껴졌을 거라며. 그렇기에 소설보다 호퍼의 그림이 남는다고 말하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 소설들의 탄생의 중심이 호퍼의 그림이었기에 호퍼의 그림에 나 역시도 집중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너무 그림과의 연결고리를 선택하기에 집중되어 있다는 느낌도 받았다. 나 역시도 전체적인 이야기 속에서 그림을 묘사한 장면을 찾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글들이 호퍼의 그림에, 이미지에 갇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반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일정한 패턴을 가진 호퍼의 그림에서 여러 생각의 얼개를 풀어나가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화가이든 소설가이든 재미있는 경험이었으리라 본다. 호퍼는 지극히도 말이 적은 내향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그런 만큼 소설가들은 상상의 날개를 펼 수 있는 여지가 더 많았을 지도.

  히치콕도 그렇고 이 소설집을 기획한 로런스 블록도 범죄 스릴러의 거장이라 한다. 참여한 작가들이 범죄와 미스터리 스릴러를 즐겨 쓰는 작가들이 많다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호퍼의 작품에서 이렇듯 범죄와 미스터리와 스릴러 작가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호퍼의 작품에서 기인한 것일까. 가장 미국적이라는 호퍼의 작품, 기획자의 영향이 있었다 하더라도 참여한 작가들의 특성과 그림에서 파생된 이야기의 전개를 볼 때 호퍼의 작품에서 ‘어둠’의 기운들을 많이 보는 모양이다. 아니러니하게도 호퍼는 그의 작품 속에 빛을 잘 사용하고 있는데 말이다. 도시에 생각보다 빛이 참 많이 감싸고 있구나 느끼게 된 호퍼의 그림. 도시인의 고독을 화폭에 담았다고 하는데 그들의 고독을 빛이든 조명이 언제든 감싸고 있는 호퍼의 그림들이었다.

  때론 어떤 것을 보며 나홀로 상상하는 맛이 더 즐거울 때가 있다. 막상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는 생각에 호기심과 걱정을 안고 있다가 막상 그 이면을 알아보고 난 후에 밀려드는 허무함이 조금 자리잡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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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눈빛
박솔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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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된 겨울 극장에서


겨울의 눈빛, 박솔뫼, 문학과지성사, 2017-09-25.


  이젠 겨울의 찬기가 가시려는 걸까. 봄 앞에 무력해지는 겨울의 눈빛을 하고 이 한기는 물러갈까. 겨울이란 계절이 지닌 특성이요 정체성임에도 춥다, 춥다, 춥다 외치며 왜 이렇게 추우가 겨울에 진저리 칠 즈음 기온은 달래는 듯 온기를 내었다 다시 얼어붙곤 했다. 벌써 2월의 말이고 3월이 다가오는데 또 한동안은 꽃샘추위가 온기를 잔뜩 덮어버릴 것을 아니까 여전히 겨울 옷 속에 몸을 숨긴다.

  9편의 단편이 담긴 소설집 「겨울의 눈빛」에서 여전히 겨울옷을 둘러쓰고 봄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심리적으로도 아직 봄은 오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봄을 생각하기엔 너무도 어둡고 공허한 공간이 반복되어 나타난다. 특히 부산이란 지명은 반복되어 나타난다. 지리적으로 부산은 겨울에도 온도가 높은 곳임에도 차갑고 매서운 부서지고 무너진 폐허의 공간으로 이 지명은 기억된다. 거듭된 사고를 가진 공간, 사고의 흔적을 머금은 채 새로이 재생되지 않은 공간에서 사람들은 살아간다.

  소설마다 반복적인 사고가 발생하고 그 사고를 보고, 경험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문장 또한 강박적이게 반복되거나 쉼없이 이어진다. 기억을 되살리듯 이야기하듯 이어지는 문장으로 인해 폐허는 정적이지 않은 동력을 지닌 것처럼 느껴진다. 폐허 자체가 생명력을 가진 것처럼. 소설에서 작가가 그리는 사고와 그 사고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세계는 현실적인 상황과 가상의 상황들이 버무려져 있다. 마치 사물을 눈으로 보고는 있지만 실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사고를 실제와 유리하려는 본능적인 생존인 것도 같다. 

  그럼에도 왜 사람들은 그 사고가 일어난 공간을, 폐허의 공간을 떠나지 않고 그 기억들을 지우지 않고 반복적으로 이야기하고, 그리고 있을까. 「어두운 밤을 향해 흔들흔들」에서는 무너진 부산타워를 그리고 그리고 그리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무너진 무수한 부산타워의 조각들을 보고 또 본다. 「우리는 매일 오후에」에서는 ‘나’는 묻고 ‘남자’는 대답한다. 부산에 있는 고리원전에서 사고가 일어났고 그 이전에 일본에서는 지진이 일어났고 원자력발전소 폭발이 일어났고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시스템도 붕괴되었다는 것인데 ‘나’가 이것들을 아는 이유는 ‘남자’에게 묻고 또 물어 대답을 들었기 때문이고 ‘남자’가 그것을 알고 있는 이유는 ‘나’가 끝없이 묻고 또 물었기 때문이다. 「겨울의 눈빛」에선 이런 사고를 담은 영화를 보는 ‘나’가 있다. 그런 사고가 일어난 공간에 남은 이들과 그들의 기억과 상처를 이야기하는 영화지만 ‘나’는 전혀 강렬함이나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나’는 “그때를 기억하고” “그때의 감각을 기억하고” 있기에 화면을 통해 재연된 그것은 ‘나’에게 모멸감만을 안긴다.


내가 아는 누가 또 누구누구가 지금 무얼 하는지를 말하는 것으로 이토록 모멸감이 드는 이유는 무어야. 우리가 개를 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렇게 허무해져야 하는 것은 또 무어야. 마치 태어나서 처음 개를 만져본 사람들처럼. 너는 그렇게 살았구나. 너의 친구는 그리고 또 다른 친구는 그렇게 살고 있구나.


  그렇구나. 그들은 그렇게 살고 있구나. 역시 허무해지는 마음으로 재난이 닥친 공간을 그 공간에서 멀어져 있지 않은 이들을 보게 된다. 충격과 상실로 인해 마음 역시 폐허를 만들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너무의 극장」에서 상영되는 연극처럼 기괴스럽다. 제목과 연관되는 내용도 대사도 연기도 없이 그저 관객인줄 알았던 이들이 무대 위로 달려가 배우들을 내리치는 폭력만이 있는 연극. 어느 것이 「너무의 극장」에서 상영되는 이야기가 될까. 무너지고 원전이 터지는 그런 사고들일까, 그 사고의 공간에서 기억을 품고 살아가는 것일까.  「너무의 극장」이 있는 한 그 폭력적인 연극은 계속 상영되는 걸까. ‘나’는 그 기괴한 폭력의 극을 계속 보고 있어야만 할까. 물론 ‘나’는 그것을 기괴하다에서 멈추지 않고 그것에 관해 말하겠다는 의지를 다진다.


부산에는 바다가 있고 부는 바람은 바다 냄새가 나는 바람. 바람에 실려 부산의 목소리가 노랫소리보다 선명하게 들려오는데 부산은 내게 너는 왜 바다 이야기 해운대 이야기 광안리 이야기 그리고 반짝거리는 야경과 그 밖에도 줄줄줄 댈 수 있는 모든 멋진 것들을 말하지 않고 그저 적당한 말들만 그것들을 죽인 이야기만 하는 거야? 왜 나에게 오염된 것들을 버리고 가려는 거야? 부산은 내게 항의하고 나는 알아 알아 다 안다니까 웃으며 부산에 가면 많은 멋진 것들이 있지 바람에 대고 말하며 아직 남은 ‘그저 적당한 말’을 뜯어내 바닥에 내던졌고 그저 적당한 말은 떨어지지 않으려 내 손을 깨물었고 내 손에서는 피가 났고 내 피는 붉었다.


  강박적일 정도로 반복하여 묻고 그리고 기억하는 것은 피폐해진 이들의 마냥 수동적이고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나‘가 이런 다짐을 가지는 순간 그 모든 반복적인 행동들은 폐허를 벗어나기 위한 의지로 기억된다. 누군가는 사고를 잊으라 말하고 누군가는 사고를 잊지 말아달라 말한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로 잊음을 선택할 문제가 아니니 ’사고‘는 반복되지 않도록 기억하고 문제가 된 것은 해결해나가는 일이다. 그런 메시지를 건조한 겨울의 눈빛은 말한다. 멋진 것들이 있는 것도 그것을 얘기하는 것이 더 좋은 것도 안다. 하지만 해야 할 것이 있음을,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피가 날 정도로 아픈 일이 되지만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아직도 겨울, 여전히 「너무한 극장」에서 너무한 이야기들이 상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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