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하는 페미니즘 - 여자의 삶 속에서 다시 만난 페미니즘 고전
스테퍼니 스탈 지음, 고빛샘 옮김, 정희진 서문 / 민음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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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기 그리고 건조기


빨래하는 페미니즘-여자의 삶 속에서 다시 만난 페미니즘 고전, 스테퍼니 스탈 저, 2014.


  쨍쨍한 하늘 그리고 폭염, 빨래가 잘 마르겠구나.

  찌뿌둥한 하늘 그리고 폭우, 빨래가 안 마르겠구나.

  날씨가 좋을 때나 좋지 않을 때나 팔할의 빨래 생각은 지극히 현실적인 반응일 게다. 내일을 위한 옷과 양말 유무는 밖으로 나가는 데 최소로 필요로 되는 것이니까. 또한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빨래 담당자’의 역할에 세뇌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할 테고.

  나와 같이 빨래에 민감한 여성이 있으니 남편의 빨랫감을 집어던진 여자, 스테파니 스탈이다. 최근 페미니즘 경향과 변화의 움직임을 위해선 신간을 읽는 것이 적절할 텐데도 신간들에는 관심과 흥미가 떨어진다. 그럼에도 페미니즘의 고전이랄 수 있는 책엔 여전히 관심이 간다. 실천적, 운동적인 접근보다 이론적이고 논쟁적인 책들에 대한 관심일까. 아무튼 그렇기에 페미니즘의 대표적 고전 도서를 ‘다시 읽기’하는 이 책은 다시 또 읽고 싶어지는 책이다. 스테파니 스탈식으로 재세탁된 고전들은 저자의 경험과 버무려져 쉽게 다가온다. 원제보다도 한국판 제목이, 그리고 책표지가 아주 맘에 든다.

  장하준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인터넷보다 세탁기가 세상을 더 많이 바꿨다고 이야기한다. 인류를 바꾼, 가장 혁명적 발명품으로 세탁기가 상위를 차지하곤 하는데 여성을 가사노동에서 해방시켜 사회로 진출할 수 있게끔 했기 때문이다. 분명 세탁기를 비롯한 가전제품의 발명으로 인한 가사노동시간의 단축은 경이로운 일이다. 이제는 날씨까지 극복하는 건조기, 건조기능이 부가된 세탁기도 등장하였으니 ‘여성’의 일이 얼마나 줄어들었는가. 그렇다. 여성의 일하는 시간이 ‘줄어들었을 뿐’이다. 여전히 빨래를 비롯한 가사일은 여성의 일일 뿐이다. 그것만은 세탁기가 발명되든 건조기가 발명되든 변하지 않았다.

  스테파니 스탈은 결혼, 임신, 출산, 육아를 겪으면서 페미니즘이란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의문을 갖는다. 일을 가진 여성으로서 사회생활을 하던 그녀의 ‘여성’의 자각은 꿈을 비롯한 많은 것을 포기하게끔 되는 상황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현대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이야기다. 이 혼란과 절망에서 사랑, 죄책감, 좌절이라는 어려움에 맞서기 위해서 스테파니 스탈이 선택한 것은 페미니즘 고전 읽기이다. 그녀의 이 선택은 그녀 자신을 혼란에서 나오게 해줄까. 같은 상황에 처해 같은 감정에 휩싸인 또다른 여성들의 삶의 변화를 이끌어 줄까. 페미니즘 고전이 등장할 때마다 그 책은 여성에게, 세상에 용기를 북돋워주고 모순된 것들을 일깨워주었을까. 페미니즘은 세상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자조에 어떻게 대응해 왔을까.

  스테파니 스탈이 들여다본 페미니즘 고전의 목록은 메리 울스턴그래프, 버지니아 울프, 시몬 드 보부아르, 베티 프리단, 게이트 밀렛,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개럴 길리건, 주디스 버틀러 등 초기 페미니즘, 급진적 페미니즘, 프랑스 페미니즘 등 다양하다. 이 책들을 개괄하고 요약하면서 스페파니 스탈이 처한 개인적 상황에서 느낀 감정을 이야기하기에 이해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프랑켄슈타인의 저자 메리 셜리의 어머니인 메리 울스턴그래프트와 시몬느 드 보봐르의 개인적인 생애에 쏠리는 관심은 그들이 주장한 페미니즘의 이론과 연계해서 더욱 생각거리를 안겨다 준다. 그들 작가들도 완벽한 생활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이론을 쓰윽 그려낸 건 아니었다. 한계에 부딪치면서 생각하고 깨치고 생각한 고민의 흔적이 담겨 있다.


한때 육아와 가사 노동은 여자들을 연대하게 만들어 주는 주제였습니다. 2세대 페미니즘은 그러한 연대의 힘을 바탕으로 탄생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가사 노동은 인종과 계급을 나누고 이민자와 비이민자를 가르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남자들의 방식’을 추구하는 것이 여자들을 진정으로 해방시켜 주고 있는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공통의 어려움을 가지고 연대했던 여성들이 같은 문제로 서로가 대립하는 상황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는 같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면 이제는 같이 하지 못하는 이유를 찾기 위해 애쓴다. 보다 근원적인 문제에서 비켜난 지엽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며 그렇게 연대의 틀은 무너져간다. 이러한 역할을 누가, 하고 있는 것인가.

 

일과 양육이 주는 만족도가 얼마나 큰지, 두 가지가 자아실현에 얼마나 기여하는지 비교해 보려는 시도는 허울만 그럴듯할 뿐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두 가지가 서로 다른 종류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언론은 ‘직장 맘 대 전업 맘 전쟁’ 같은 자극적 기사들을 내보내면서 그런 중요한 차이를 언급하지 않은 채 오만하게 넘어가 버린다. 


  스테퍼니 스탈을 힘들게 했던 이 세상에서의 여성이라는 자각, 여성 성역할로 인한 스트레스와 히스테리와 함께 찾아왔던 가족과의 불화는 페미니즘 고전을 다시 읽으면서 화해 무드로 나아간다. 상황의 변화가 있어서가 아니라 저자의 생각의 변화, 인식의 변화가 동반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스테파니 스탈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경험이었고, 이 경험의 이야기를 저자는 세상에 들려주어 다른 이들로 하여금 혼란의 극복방법을 제시하게 한다.


정체성은 지식의 주체가 되는 경험에서 나옵니다. 이 점을 잊지 마십시오. 존재란 과정, 이야기, 대화입니다. 항상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노력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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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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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항상 꽃뱀이 된다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리베카 솔닛, 창비, 2017-08-30.


  오래 전에, 아주 오래 전에 어느 시인의 성폭력 이야기를 들었다. 오히려 지금 이야기되는 것보다 더욱 충격적이고 경악스러워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다. 물론 그 이야기를 전한 사람의 ‘권위’에 힘입어 이야기의 타당도와 신뢰성도 높았다. 그 시인의 시는 내 취향에는 맞지 않았기에 시와 시인이 분리되지 않았다. 어느날 갑자기 성향을 바꾸어 진보문학의 대가이자 더없이 능력있는 시인이자 문학활동가가 되었는지, 그와 관련한 이야기에 흥미가 솟기도 했다. 어쨌든 그 이야기는 아주, 오래 전이다.

  그 시인의 이야기가 수면으로 올라왔을 때 ‘우와, 드디어’라고 안타깝게도 기뻐했다. 잘못을 시인하는 듯이 행동했던 시인은 외신에서 자신의 행동을 적극 해명하고 시간이 흐른 후 형사소송이 아닌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10억7000만원짜리 재판이 얼마전 시작되어 인터넷엔 여성 시인 이름만 실시간으로 올랐다. 호텔룸 제안 이후의 성폭력 폭로가 이어졌기에 무언가를 ‘노리는’ 폭로라는 부정적 시선도 있었다. ‘미투 권력’이라는 비아냥도 있었다. 재판 진행 중인 사건을 둘러싼 거대한 구름을 보고 있자니 답답하다 싶었는데, 내가 시인의 성폭력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편해질 수 없는 마음이 리베카 솔닛의 『모든 질문의 어머니』, 침묵의 강요를 생각나게 한다.


여자가 남자에게 공격당한 경우라면 거의 모든 상황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여자를 비난하는데, 그것은 남자를 비난하지 않으려는 방편이다.


  참 이상한 것이, 남성과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특성에 의해 남성의 ‘성폭력’은 당연하며 이해해줘야 하는 것으로 여성은 절대로 당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얘기된다. 이런 모순적 인식의 기저에는 오로지 ‘남자를 비난하지 않기 위한’ 이유만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리베카 솔닛이 말처럼 페미니즘은 남자들 일이어야 한다.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이 여자들 일인 것은 그저 그 일이 여자들에게 저질러지기 때문이다. 그 일을 저지르는 건 대부분 남자들이니 어쩌면 페미니즘은 줄곧 남자들 일이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한국판 제목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의 원제는 『모든 질문의 어머니』. 리베카 솔닛은 경험의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유머가 깃든 언어로 감각적으로 이야기한다. 지금도 여전히 여성혐오, 데이트 폭력, 디지털 성범죄가 만연하고 “물어뜯는 질문, 질문 속에 이미 답이 포함되어 있으며 실은 우리를 강제하고 처벌하는 것이 목적인 질문”만이 가득한 세상이다. 강요된 정답과 강요된 침묵을 ‘추구’받는 현실에서 여성이 침묵에서 벗어나 이야기해야 함을, 그러한 여성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 세상의 언어는, 이야기는 달랐다. 여성들은 항상 ‘어머니됨’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여성의 삶의 방식은 아기를 출산하고 양육하는 것이라는 인식 속에서 여성의 세상은 가부장제 속에서 차별과 편견과 멸시의 언어의 대상이 되어왔다. 모든 이야기들은 남성의 시각에서 이루어졌다. 심지어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리베카가 제시하는 「여자가 읽지 말아야 할 책 80권」 목록은 의미심장하다. <에스콰이어>지가 소개한 ‘남자가 읽어야 할 최고의 책 80권’의 책목록을 비튼 것이다. 리베카 솔닛이 우려하는 것은 이 목록을 좇는 독자가 이들 책을 통해 여성을 배우게 될 텐데 그들은 “여자를 배우고 싶을 때 찾아가야 할 전문가라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는 남자들”이라는 점이다. 즉 이들 책은 여성혐오적인 시선이 가득한 책들로 익히 아는 작가들의 이름이 끝도 없이 등장한다. 탐정류의 소설에서 강간은 어떤가. 강간은 강간범이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옷이, 여성이 먹은 것이, 여성이 간 장소가 저지르는 것처럼 묘사된다. 

“남자들은 일종의 날씨처럼, 주변에 감도는 자연력처럼, 우리가 다스리거나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불가피한 무언가처럼 추상화 된다. 이런 이야기에서 남자들 개개인은 사라지고, 강간과 폭행과 임신은 여자들이 적응할 수밖에 딴 도리가 없는 날씨가 된다.”


이 나라에는 이런 식의 이야기가 많다. 믿는 사람이 바보가 되는 이야기, 가난의 원인이나 인종차별의 결과와 같은 현상을 드러내기보다 덮어 감추는 이야기. 결과에서 원인을 떼어내고, 의미를 멀찍이 치워버리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에 명확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바로 새로운 인식이다. 오래도록 배제되었고 있음에도 그것을 명할 언어가 없었다면 이제는 개개인이 겪고 있는 경험을 묘사할 단어를 만들고 여성들의 이야기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사물을 보는 세상을 보는 새로운 인식을 위한 새로운 언어를 만드는 일, 여성은 이야기가 필요했다. 침묵하거나 답정녀의 세상을 살지 않기 위해서, 나아가 더 자유롭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말이다. 차별과 편견의 언어를 버리고 새로운 언어를 갖는 일은 그렇기에 필요하다. 결국 리베카 솔닛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세상의 모든 것을 그 진정한 이름으로 부르는 일, 힘닿는 데까지 진실을 말하는 일, 어떻게 우리가 여기까지 왔는지를 아는 일, 특히 과거에 침묵당했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는 일, 수많은 이야기가 서로 들어맞거나 갈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 혹시 우리가 가진 특권이 있다면 그것을 사용해서 특권을 없애거나 그 범위를 넓히는 일. 이 모든 일이 우리가 각자 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그렇게 세상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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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캐럴의 이야기



Alice-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거울 나라의 앨리스 

루이스 캐럴, 존 테일러 (그림), 마틴 가드너, 북폴리오, 2005.


  어느 누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야기에 주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수많은 판본이 나오고 여러 갈래로 세계로 이야기가 번져갈지언정 그 기본적인 틀은 굳건하고 그렇기에 간단하게 보이니까 말이다.

  주석달린 앨리스를 보면서 일찌감치 다층적인 말재간을 부리는 앨리스의 세계가 더욱 확장되었다. 그 시대의 배경에서 이야기를 다시 생각하게 되고 작가의 생각, 표현의 의미를 더 알게 되니까 말이다. 모자장수와 삼월 토끼는 영국의 양대 정당을 가리키고 겨울잠쥐는 국민을 상징하는 것처럼 이 이야기는 온갖 정치 풍자가 가득하다는 것도. 특히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더욱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에 의의를 둔다.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그 심오한 수학적 계산의 형태는 그냥 이야기로만 흘리기엔 아깝고 흥미있는 요소니까 말이다. 그에 더해 어린 시절엔 이야기 자체에 관심을 가졌다면 작가에 대한 관심도 높아간다.

  직장 상사 리델 학장과의 교류는 학장의 가족과의 교류로 이어진다. 학장의 세 딸들과 함께 정원에서 뱃놀이 등을 함께 즐겼다고 하는데, 둘째 딸의 이름이 앨리스 리델이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이 둘째 딸을 모델로 지어진 이야기다. 당시 세 살 꼬마라고 하는데 아이는 이 이야기를 다 이해했을까. 세 살 아이에게 자신과 함께 놀아주고 자신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일 것은 분명하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도도새처럼 내성적이고 말더듬는, 그리하여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꺼려하는 루이스에게는 이야기를 들려 달라 조르고 함께 즐겁게 놀 수 있는 마음 편한 아이들이 소중했음은 분명한데, 어찌 그런 소문들에 휩싸이게 됐을까.

  널리 알려진 대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아이들에게 요청받아 즉석에서 들려준 이야기다. 후에 삽화를 그려 넣어 앨리스에게 책으로 선물했다고 전해진다.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 직장 상사의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다시 책으로 선물을 할 정도라면 루이스는 아동문학에 대한 남다른 재능을 뒤늦게 발견한 건 아닐까 생각해보지만 그전부터 루이스는 다양한 방면으로 재주를 드러냈다. 수학자이자 논리학자로서의 역할, 성직자, 사진가, 시인 등 예술적 감성이 가득하게 넘쳐난 수학 교수였다. 루이스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아동성애자, 롤리타 콤플렉스-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게 된 것은 유달리 아이들을 모델로 한 사진을 찍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이들을 향한 집착과도 같아 보이는 사진과 언행들이 루이스의 기록에 제법 드러나고 이를 놓고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소문들이 흐르고 넘치고 그렇기에 루이스는 사진찍는 일도 그만두었다고 한다.

  루이스는 앨리스에게 지속적으로 편지를 보내긴 했던 모양이다. 앨리스의 어머니가 이 편지들을 모두 불태웠고 의절하기까지 했다고 하니 말이다.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어서인지 알 길 없다. 루이스의 일기 중 의절하던 날들의 이야기가 루이스 가족에 의해 찢겨 있었다는 점이 더욱 궁금증을 당기게 된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어떤 글이 쓰여 있었기에. 물론 루이스가 다른 소녀들과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 적도 없었고 그런 소녀들에게서 불편한 이야기가 나왔던 적은 없다 한다. 루이스가 주욱 독신이었던 것 때문에도 소문이 보태진 것일까. 결국 동화 이야기보다 작가에 대한 궁금증을 더 떠올리고 있다.  

  이 책을 보다 보면 이것이 동화가 아니라 어른을 향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수없이 달린 주석들,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며 읽기란 재미있기도 하지만 그거 자체에 매몰될 때가 있다. 덧달린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흥미. 그런데 무언가 안타깝다. 루이스의 인생이 어떨지도 모르면서 그냥 고독하고 외로움에 휩싸인 느낌이 들기도 했다가 루이스에 대한 소문을 겹치면 마냥 섬뜩한 느낌에 휩싸이기도 한다.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 낸 루이스와 현실의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의 간극, 두 개의 자아를 가진 것만 같은 한 사람의 생애. 그리고 이상한 나라로 거울 나라로 간 앨리스의 이야기를 재밌게 즐기면 될 터인데 외적인 부분에 솔깃해지는 가운데 그 상황의 중심에 있었을 실존 인물 앨리스가 느꼈을 감정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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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어린 시절을 채워줬던 앨리스의 세상은 환상이었다. 모험 가득한 세상에서 앨리스처럼 살아보고 싶었던 그 시절에는 앨리스가 우상이지 않았을까. 세월이 지난 지금 앨리스는 낯선 얼굴을 하고선 다른 이야기를 한다. 아니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한다. 앨리스의 입에서 나오기에 어색한 말, 그런 말들을. 너만의 길을 그려 보라 하지만 이런 말들을 웃으며 전하는 앨리스가 어린 시절의 그 앨리스일까. 지금의 모습을 과거로 이어간다면 어린 시절의 앨리스는 어떻게 토끼 굴 속으로 뛰어 들어갔을까.  꼬마 앨리스의 성장이 가짜처럼 보여서, 생기없는 인형처럼 보여서 방긋 웃으며 건네는 앨리스의 말들을 덮고 기억 속 앨리스를 꺼낸다.    


  그곳엔 앨리스보다 더 흥미를 돋우는 수많은 캐릭터를 만난다. 모두 말재간이 넘쳐나기에 앨리스가 왜 그 세계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는지를 여실히 느끼게 해주는 그 캐릭터들. 그러고보니 앨리스 덕분에 트럼프 카드가 친숙하게 느껴졌던 것도 같다. 수많은 동화책 속에서 왕과 왕비, 공주의 등장하는데 앨리스에서는 여왕이 등장하는데 무지 희화화되어서 흥미진진했던. 새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보니 기억보다 앨리스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 열 살은 되었을 나이라고 생각했는데 일곱 살.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아이다. 그 나이의 내가 지녔던 호기심과 모험심은 어디에 있을까. 지금 보면 곳곳에 보이는 풍자가득한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이해하며 읽고 보았던 건지 새삼 성인이 되어 보는 동화의 느낌은 참 새롭다. 어쩌면 어릴 적엔 이보다 훨씬 축소된 내용의 그림책을, 동화책을 읽었던 것일 게다. 이 책이 완역판이라고 하니까.

 

 모험을 멈추지 못한 앨리스의 겨울 여행은 거울 속으로의 잠입이다. 거울 나라로의 여행은 마치 수수께끼 가득한 질문을 받은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저자가 수학과 교수라는 사실, 그리하여 수학공식처럼 전개되는 이야기라는 점이 더해지고 그 오묘한 말들의 조합들에 빠져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책장을 넘기는 재미가 쏠쏠하다.

  루이스 캐럴. 본명은 찰스 도지슨. 오래도록 루이스 캐럴에 길들여져 옥스퍼드 대학교 수학 교수 찰스 도지슨이 앨리스를 탄생시킨 이름으로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게 느껴진다. 그가 창조해낸 이야기는 어린 아이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즉석에서 만들어진 이야기이고 즐거이 들은 아이들 덕분에 책으로까지 출간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아이들이 의미없는 의성어와 의태어의 반복에 얼마나 즐거워하는지가 생각난다. 그런 점을 루이스 캐럴은 잘 캐치한 듯하다. 그러면서 자신의 전공과 잘 맞물리게 이야기를 만들어 나갔다.

  앨리스를 따라, 앨리스인 것처럼 모험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그 어떤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고 말발도 죽지 않은 일곱 살의 앨리스. 새삼 생각하니 그 나이대의 아이들이라면 두려워하지도 이것저것 재지도 않은 채 하는 말에 귀기울이고 이상한 것을 이상타 말하며 정의감에도 불타오르는 앨리스와 같은 모습일 거라 싶다. 그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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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 제14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은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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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의 편지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장은진, 문학동네, 2009.


편지를 받을 사람이 있고 또 답장을 보내줄 사람이 있다면, 생은 견딜 수 있는 것이다. 그게 단 한사람뿐이라 하더라도. 


  일주일쯤 전에 편지가 도착했다. 북에 띄운 메시지가 USB에 담겨 왔다. 되돌아온 편지가 아닐 걸 알면서도 전달되지 못한 편지처럼 느껴졌다. 북에서 온 메시지는 없었다. 씁쓸했다. 만나지 못하면 소식조차도 받을 수 없는 건가.

  이산가족 상봉 뉴스 속에는 젊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뉴스에서 연신 말하듯 고령의 노인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부둥켜 우는 모습들이 마음을 짠하게 했다.

  “할머니는 저렇게 울진 않았을 거야. 별로 안 애틋했어.”

  남북정상회담이 확정되기 전에 이산가족 상봉 추진이 있을 거라는 걸 알았다. 작년부터 적십자 관계자들의 연락과 방문을 받았으니 이산가족과의 만남은 준비가 오래 걸렸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남북 생존자 명단이 교환될 즈음 북에는, 할머니의 사망 소식이 전달되었을까. 돌아가시기 전에 동생은 한번 보시겠구나 했지만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이산가족 상봉단이 되지 못했더라도 아쉬울 것 없었을 거라는 이 위안은 할머니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조금만 더 살아 계셨다면 동생을 만나고 가셨을 텐데라는 아쉬움은 내가 갖는 것이니까.  

  아버지는 외사촌들의 소식을 자유롭게 알게 될 날이 올까. 북에서는 아무도 편지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외삼촌의 생존 소식조차도 전해받지 못했다. 남북 이산가족 만남의 정례화를 계속 이야기하고 있지만 어떤 매체들은 그런 것조차도 탐탁지 않게 이야기한다. 이산가족들의 사연들이 소개될 때마다 아직 만나지 못한 이산가족이 많다는 것을, 남아있는 가족보다 이미 사망한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듣게 된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 ‘이산가족’은 없어지겠지만 그 쓸쓸하고 슬픈 마음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을 것이다.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삶의 시작은 기쁨이지만 삶의 결말은 결국 슬픈 것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기억나는 건 제목과 이 문장이다. 때로 이 제목이 맴돌 때가 있다. 소설은 참 쓸쓸하면서 따스했다는 기억을 준다. 삼 년 동안 길 위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그들과 이야기하며 친구를 맺은 ‘나’가 그들에게 띄우는 편지. 단 한번이라도 답장이 온다면 여행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는데 아무도 ‘나’에게 편지하지 않는다. 가족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함께 한 눈먼 개 와조와 전전하며 하루의 마감때 쓰는 편지는 그날의 여행과 가장 잘 맞을 것 같은, 잘 이해해 줄 것 같은, 편지를 버리지 않고 잘 보관해줄 것 같은 사람에게 띄운다. 여행 중 만난 사람을 번호로 기억하는데 자기 책을 파는 여자 소설가 751과는 여행을 함께하기도 한다.

  ‘나’는 편지를 쓰는 것만큼이나 편지가 왔는지를 확인한다. 우체통이 비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마다 ‘나’는 절망하지만 다음 날이면 다시 편지가, 답장이 오기를 기대한다. 서로 교감하고 서로의 아픔과 상처를 맞닥뜨리고 위로하기도 했는데 소통했는데 답장을 하지 않는 일련번호들. 할아버지 장례식날 받은 연인의 이별통지처럼 ‘나’만 그들에게 일방통행의 소통을 했던 것처럼 아무도 편지하지 않는 3년여의 나날. 모텔이 꽉 차는 날 고시원에 묵다가 화재로 겨우 살아나기도 한다. 기력이 다해 가는 와조 때문에 아무에게도 편지받지 못하지만 집으로 돌아가게 되지만 돌아온 집에서 와조는 ‘나’의 곁을 떠난다. 편지를 받기를 원하는 집엔 ‘나’를 맞이한 편지도, 가족도 아무도 없다. 

  ‘나’가 와조와 함께 이렇게 편지여행을 다니게 된 시작에는 ‘나’의 지독한 외로움이 담겨있다. 고통과 고독과 절망의 순간을 견뎌가는 ‘나’의 여행의 끝이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기를 기대하는 만큼 세상에 혼자이고 싶지 않은 ‘나’가 간절히 열망하는 것은 교감이다. “진정한 외로움은 혼자 있어서 외로운 게 아니라 둘이 있어서 외로운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이 ‘같이 있다’가 아니라 ‘같이 나누다’이기를 바라는 ‘나’의 마음이 끝없이 확장되는 일련번호에게 가 닿았으려나.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는 10년쯤 전 출간된 소설 제목이 기억나는 건 ‘나’가 여행에서 만나는 수많은 일련번호들처럼 번호표를 달고서 가족을 기다리는 이산가족의 사연들이 오버랩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들도 이렇게 한번 만나고서 돌아가면 간절히 서로의 편지를 기다리겠지. 그러나 받을 수 없었던 편지, 그로 인해 절망하고 그러나 또 희망하면서. 우리 할머니가 그러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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