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손보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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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인식하는 방식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손보미, 문학과지성사, 2018.


  제법 본 단편이 여기 수록되어 있다. 단편을 대상으로 한 문학상 수상작이다. 책 제목과 같은 단편은 없다.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에 관한 이야기는 내 관심에선 밀려난다. 고양이는 조용히, 우아하게 밤에 찾아드는 존재가 아니라 한밤 미칠듯이 갸르릉거리는 소리로 싸워대는 고양이가 더 각인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하더라도 끝끝내 이곳이 제 자리라 주장하는 것처럼, 옮겨야 하는 건 나인 것처럼 쳐다보는 고양이들의 그 소리없는 움직임에 오히려 놀라는 건 나라는 걸 기억해 낸 때문인지도.

  소설 속 무단침입한 고양이들처럼 내가 마주친 고양이들은 “폭신폭신하고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종류의 침입”과는 거리가 멀었다. 부드럽다니, 이미 침입 자체가 부드러움이란 말을 허락하지 않는다. 침입이란 이미 폭력의 한 부류 아닌가.

   

나는 가끔 무단 침입한 고양이들에 대해 생각한다. 내 생각에 그건 아주 폭신폭신하고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종류의 침입이다. 아주 폭신폭신하고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천천히 파고들어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고 부지불식간에 나 자신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하지만 때때로 무단 침입한 고양이는 정반대의 작용을 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분명하게 깨닫게 만드는 것이다. 징그러울 정도로 냉정한 방식으로.


  후자의 의미가 이 소설집에 어울린다. 조용히 침입하여 자리잡고 있던 고양이들을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그 고양이를 발견한 순간에 인식하게 되는 것들. 그로 인해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모습을 보게 된다. 아닌듯하면서 줄곧 고양이를 의식하고 있던 모습을 보게 된다고 해야 할까. 그러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면 고양이에 대한 생각, 즉 타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생각자체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타인에 대한 외부에 대한 지나친 의식은 이미 나를 갉아먹는 것이 있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며칠 후 그녀는 혼자 백화점에서 쇼핑을 한 후 백화점 안 카페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녀는 쇼핑백을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저들 중 나처럼 진짜 고통을 아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진짜 삶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삶이 무엇인지 운명이 무엇인지를 한번쯤 생각해보는 일은 달달한 케이크를 맛보면서도 생겨날 수 있는 물음이다. 살아가는 동안 가벼이, 쉬이, 무심히 여겼던 어떤 일들이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칠지는 쉽게 가늠되지 않는다.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 알게 된다. 인생이란 그냥 그런 식으로 흘러가는 것이란 것, 사는 건 다 그런 거라는 말들이 책속에서 자주 반복된다. 커다랗게 갸르릉거리는 것에만 몰두하고 그것만이 삶을 뒤흔드는 역할을 하리라 생각하지만 소소하고 사소한 일들의 반복과 우연으로 점철되는 삶, 그것이 주는 파장에 대해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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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공녀 강주룡 - 제2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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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껄 그대

체공녀 강주룡, 박서련, 한겨레출판, 2018.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일제강점기, 아직 독립은 먼 1920~30년대다. 생각해보면 이 시기를 살아가던 우리 민족은 헤아릴 수 없음에도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의 삶으로 사람들의 모습이 유형화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이 문학작품에서 그릴 수 있는 진정성있는 이야기이자 주권 잃은 민족이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실제 모습일 수밖에 없음이다. 이 소설은 그런 전형적인 삶을 살아가야 했던 여성이 태어날 때부터의 이름, ‘강주룡’으로 ‘두루주에 용룡 자, 내 한 몸으로 이 세상 다 안아주는 용이 되라’는 이름 뜻처럼 오래도록 기억될 삶을 소설화했다. 당대의 전형적인 유형을 이끌어가는 모습이 아니라 실존인물이 살아간 삶의 이야기다.

  1930년이 아니라 마치 1970~80년대 여공들의 삶이 아닌가 여겨진다면 강주룡이 한 일에 대한 놀라움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노동운동가이자 최초의 고공투쟁가인 강주룡의 인생은 소설에서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다. 그렇다는 것은 무언가 삶의 전환이 이루어졌음으로 봐도 무방하다. 노동운동가로서의 강주룡의 일생만을 알았다가 소설을 통해 독립운동가로서의 강주룡의 삶 또한 알게 된다.

  1901년생 평안 출생 강주룡의 삶은 시대적 배경 속에 흐르고 흘러가는 삶을 보여준다. 당시 수많은 이들이 간도로 이주한 것처럼 일제의 억압과 가난으로 강주룡의 가족 역시 서간도로 이주한다. 그때 나이 14세, 그 시대의 여성의 삶이란 일제에 의한 억압에 더해 가부장제 속에서의 부모와 남편에 의해 더 억압당할 수밖에 없는 삶이다.


주룡은 말을 건다. 얘, 강녀야, 넌 곧 시집을 간다. 몹시도 고운 이 하고 부부가 된다. 강녀야, 너는 독립운동을 하게 된다. 그런 것 상상이나 해봤니, 서방은 널 집에 돌려보내고 곧 죽는다. 넌 살인범누명을 쓰고 감옥에 간다. 하나만 일어나도 기가 막힌 일이 연달아 일어난다. 이 같은 말들을 꿈속의 강녀는 듣지 못한다.


  스무살,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5살 어린 신랑과의 혼인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면 독립 운동에 뜻을 품은 남편을 따라 ‘함께’하기로 한 일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까. 그 선택, 필연적으로 보이는 그 선택은 강주룡에게 내재한 신념에 따른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독립군에서도 뛰어난 기지로 활약하는 강주룡이 같은 뜻을 지닌 독립군에게 그 위험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여성’으로 부각되어 당하는 조롱과 질투, 멸시를 보고 있으면 그 답답한 마음이 풀리지 않는다. 독립이라는 뜻을 품은 이들의 생각과 행동이 그러할진대 ‘시어머니’와 ‘아버지’라는 가부장제의 뜻을 따르는 대표들은 오죽하랴. 아들, 자기 자신의 삶과 안위를 중시하던 그들에 의해 강주룡이라는 사람으로서의 가치는 훼손당한다. 독립운동 하던 남편의 병사의 책임이 오로지 강주룡의 몫이라 규정짓는 그 흔하디 흔하게 하는 말, ‘남편죽인 년’, 당연한듯한 그 굴레에 이젠 나이 많은 지주에게 팔려가야 하는 삶이 그 시대에도 여성들의 삶이었다.


돼먹지 못한 인간이 한 고약한 말은 잊으면 그만이다. 누가 나더러 모단 껄이 아니라 했다고 내가 정말 모단 껄이 아닌 것은 아니다.


  독립운동하는 남편을 따라가 직접 독립운동활동가가 되었던 것처럼 타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규정짓는 삶을 살기 위해 강주룡은 그들이 씌운 굴레를 내던진다. 가족을 떠나 평양 고무공장의 노동자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물론 그 환경이 여성에게 가하는 핍박이 덜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런 일이란 있을 리 없다. 그러나 강주룡은 모단 껄에 대한 왜곡된 시선과 여성 노동자를 향한 차별과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올바른 것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굳건히 하며, 그 부당한 노동환경에서 특히 여성에게는 더욱 더 열악하고 차별받는 상황에서 노동해방과 여성해방을 외치며 노동운동의 선두에서 활약한다. 평양 을밀대 12m 지붕에 올라 임금삭감을 반대하며 우리나라 최초의 고공투쟁의 선구자가 된 강주룡은 이후에도 단식투쟁을 지속한다. 1970~80년대 내 나라에서도 노동운동은 힘겹고 어려운 일이었고 무참히 짓밟히는 일이 허다했으니 일본경찰에 잡히고 감옥을 드나들며 투쟁하는 강주룡의 몸이 쇠해지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렇게 서른살 강주룡의 삶이 이야기가 끝이 난다.


내래 배워 아는 것 중 으뜸 되는 지식은, 대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처럼 명예로운 일이 없다는 거입네다. 하야서 내래 죽음을 각오하고 이 지붕 우에 올라왔습네다. 평원 고무 공장주가 이 앞에 와 임금 감하 선언을 취소하기 전에 내 발로 내려가는 일은 없습네다. 끝내 임금 감하를 취소치 않는다면 내 고저 자본가 압제에 신음하는 노동 대중을 대표해 죽기를 명예로 여길 뿐입네다.


  강주룡의 일대기, 전기문을 보는 듯이 쓰인 소설은 쉬이 책장이 넘겨진다. 그렇기에 한편으로는 벌써 끝이 난 건가라는 생각이 든다. 실존인물의 삶이니까 상상에 보태더라도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한계가 있겠지만 어쩐지 아쉬움이 짙게 남는다. 더구나 노동운동의 이야기를 다룬 2부에서의 고공투쟁을 다룬 부분은 생각보다 너무나 휘익 지나가는 듯이 느껴져 단신 기사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아쉬움은 강주룡 생애에 대한 안타까움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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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특별하게 평범한 가족에 대하여 - 2017년 내셔널 북 어워드 대상 수상작
로빈 벤웨이 지음, 이진경 옮김 / 상상의힘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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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바퀴로 달리는 가족


아주 특별하게 평범한 가족에 대하여, 로빈 벤웨이, 2018.


  그레이스, 마야, 호아킨. 세 아이가 펼치는 이야기에 결국 눈물 흘리고 말았다. 아주 특별하게 평범한 가족이라는 제목은 책을 읽기도 전에 예상 전개를 가늠케 한다. 이 아이들이 모두 입양아라는 것, 더욱이 청소년 문학이란 특성이 더해져 그 결말도 예상가능하다. 어쨌든 가슴 따뜻하게, 모두에게 희망이 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럼에도 세 아이의 시선에서 펼쳐지는 이 이야기에 뭉클 거릴 수밖에 없었다.

  친부모에게서 나와 서로 다른 가정으로 입양된 세 아이가 성장과정에서 겪는 혼란은 청소년들이 겪게 되는 일반적인 문제들을 집약시켜 놓았다. 하지만 미국이란 나라의 사회문화적 특성이 우리와는 무척이나 달라서인지 그 문제적 상황도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도 참 다르구나라고 느꼈다. 그것은 단지 청소년 문학이라는 이유이기 때문은 아닌 듯 보였다. 그런 면에서 입양에 대한 시각, 청소년들이 겪는 문제를 보는 방식이 위에서 내려보거나 사선으로 보는 우리네 문화적 특성에선 이런 소설의 분위기가 나올 수 있었을까 싶다. 제 아무리 청소년 문학이라도 말이다.

  자신이 입양아라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세 아이에게 닥친 문제는 10대에 임신을 한 그레이스의 혼란과 고통에서 시작한다. 오로지 자신만이 책임지고 겪어야 하는 임신과 출산의 고통, 그 상황에서 또래들로부터의 비난은 여자아이 그레이스에게만 집중된다. 그 시간 동안 아이의 아버지란 존재는 없다. 책임을 지지도 같이 비난을 받지도 않는 존재다. 자신의 아이를 자신처럼 제 손으로 입양시키는 결정을 해야만 했던 그레이스에게 생모에 대한 그리움과 궁금증은 필연적이었을 게다. 그렇게 자신의 혈연들이 가까운 곳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레이스는 형제들에게 메일을 띄운다.

  마야는 제 언니에게 온 메일을 받으며 동생이라는 귀찮은 존재가 아니라 의지할 수 있는 언니의 존재를 기뻐한다. 자신이 입양된 이후로 생긴 동생은 가족사진 속에서 자신을 뚜렷이 ‘다른’ 존재, ‘이방인’이라 느끼게 하는 존재다. 그럼에도 입양아에 대한 책자를 보며 자신을 어떻게 잘 키울까를 고민하는 부모님은 동성애자인 마야의 성향 또한 이해하고 수용하며 언제나 마야를 지지해주는 존재인데 이혼을 진행 중인데다 엄마는 알콜중독 증상까지 있다.

  세 아이의 맏이인 호아킨은 여러 번 위탁가정을 전전했다. 현재 위탁 가정의 부모가 자신을 입양하려 하지만 위탁 가정에서 겪은 폭력, 파양 그리고 불운한 사고로 인한 트라우마로 자신을 좋아하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에게서 자꾸 멀어지려 한다. 그렇게 마음을 닫아 둔 채 자신의 역사가 없다는 사실에, 자신의 성장 과정의 사진이 하나도 없다는 그런 사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스물이 되지 않는 아이들의 삶이 각자 처한 환경에 얼마나 영향을 받고 있는지 보게 된다. 그런 세 아이는 오랜 세월 한번도 만나지 않았지만 엄마가 같다는 이유로 모여 조금씩 조금씩 그들의 과거의 삶과 현재의 삶을 공유한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흐르고 엮이는 마음들이 무척 예뻐서 세 아이에 대한 응원이 넘쳐 오른다. 각자의 성장 속에서 상처받고 고뇌하며, 극복하는 과정에서 그들 부모, 양육자와의 관계 그리고 서로의 존재가 어떻게 영향을 미치며 내면의 변화를 일으켜주는지가 섬세하게 그려진다.


 “크리스마스에 모두가 자전거를 받았어요. 위탁아이들도요. 정말 큰 선물이었어요. 제 것은 두 바퀴 자전거였고, 전 어떻게 탈지를 몰랐어요. 그래서 위탁아빠가 보조바퀴를 자전거에 달아 줬어요. 그리고 저는 자전거를 타고 다녔어요. 넘어진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보조바퀴들이 절 멈출 수 있게 해 주었어요. 그리고 마침내 자전거 타기를 배웠어요. 그래도 전 보조바퀴를 떼지 못하게 했어요. 왜냐하면 그 느낌이 좋았거든요. 알겠어요? 보조바퀴가 절 언제나 잡아 줬어요. 그게 제가 그레이스와 마야에게서 느낀 것과 비슷해요. 넘어지려고 할 때 넘어지지 않았던 것처럼. 걔들이 함께 있었거든요.”


  어떨 땐 입양가족들에 대해 ‘특별하다’ 말하고 어떨 땐 ‘평범하다’ 말한다. 그것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때의 특별과 평범이란 말이 가지는 의미는 같은 것처럼 여겨진다. 생물학적인 관계에 연연하는 한국문화, 그럼에도 ‘입양’은 잘 하는, 다시 말해 다른 가족으로 내 아이를 보내는 일은 국가가 나서서도 잘하는 이 나라에서 입양가족은 다른, 아니 ‘틀린‘ 가족이 될 것이고 입양이 자연스러운 다른 나라에선 가족구성이란 이름으로 평범할 뿐. 물론 개인의 성향이 가장 중요하게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되겠지만, 이런 포용력은 개인의 성향을 아우르는 사회문화도 바탕에 있을 것이다.

  이 책 속 세 아이의 부모들은 보통의 부모와 다르지 않다. 내 아이에 대한 애정이 넘쳐나고 다투고 싸우고 사랑하고 헤매고 그렇고 그런. 어른만 아이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이 여러 가족의 이야기에서 아이와 부모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받음을 알 수 있다. 그건 사실 입양가족의 특징이 아니라 모든 가정의 특징이다. 특별히 입양가족이니까 어떠할 것이다라는 생각들, 그것이 특별과 평범을 가르는 기준이기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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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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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기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황현산, 난다, 2018-06-25.


  여기 묶인 글들은 2013년에서 2016년에 쓰인 것이 많았다. 그 해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아는 까닭에 많은 글이 힘있는 비판의 어조인 것에 고개를 끄덕했다. 그렇지만 씁쓸하게도 느껴졌다. 문득 불문과 전공 교수들의 글이 유려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런 시대가 아니었다면 글의 내용은 달랐겠지, 다른 글들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생각이 겹쳐 왔다.

  유독 올해 많은 작가들의 부고를 들었다. 세상의 한부분이 허전하게 느껴진다. 어린 왕자 번역본에 관한 글이 있어 책장을 뒤져 어린왕자를 꺼내놓고 선생이 지적한 부분을 찾아본다. 수정되어야 할 일본판을 참고한 번역본임을 알고 빛바랜 책에 소혹성 3251에서 1을 지우고 마흔 세 번이 아니라 마흔 네 번의 해가 지는 걸 구경하며 마흔 네 번의 쓸쓸함을 느끼는 것으로 고치고 나서 그만큼의 쓸쓸함에 물들어버린 것만 같았다. 세상에서 문학으로, 프랑스 문학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고뇌한 작가의 글에 먹먹한 오후 노을이 유독 짙어 보인다.


흉악 범죄가 일어날 때마다 반복되는 일이지만, 폐지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사형 제도를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없애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나 같기에 우리의 패배를 증명하는 꼴이 된다. 게다가 문제는 없어지지 않는다. 흉악범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일상이기 때문이다.



  흉악 범죄가 일어나는 것처럼 그 때에 벌어진 모든 것들이 우리에겐 일상이었다. 그 일상을 견뎌내고 또 견뎌내지 못하고 무너지고 무뎌지고 그랬는데 새삼 그 시절의 뚜렷이 드러나는 글들을 보고 있자니 그런 글들을 억압하고 몰아내고 흉악 범죄만을 일으키던 사람들의 세상에서 살아야 했던 때가 더더욱 억울해진다. 그러하기에 이런 글들에 푸욱, 위로를 받게 되는 모양이다. 아직도 사그라지지 않는 분노와 먹먹함이 있는 내게 말이다. ‘사소한 부탁’을 해야 할만큼 사소한 것들도 지켜지지 않았던 그때. 그때의 분노와 아픔이 없었다면 작가의 병은 없었을까.


 진보주의를 삶의 방식으로만 말한다면 불행한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기다. 한 사람의 진보주의자가 미래의 삶을 선취하여 이 세상에서 벌써 미래의 토인으로 살지 않는다면 그 미래의 삶에 대한 확신과 미래 세계의 건설 동력을 어디서 얻을 것인가, 그의 존재는 이 불행한 세상에 점처럼 찍혀 있는 행복의 해방구와 같다.


  진보주의는 좌빨이라는 목소리가 너무 크고 시끄럽게 세상을 도배하기에 그 단어에 열내고 반박하는데 급급했지 새삼 내 언어로 정의내리는 일엔 소홀했다 싶었는데 황현산 선생님의 진보주의의 정의가 콕 박힌다. 그래, 그것은 정치의 방식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고 삶의 방식으로서 얘기되는 것이었다. “불행한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기”. 이 글은 책에서 한번 더 반복된다. 사소한 것들을 지켜낸다면 사소한 것들을 지키고 산다면 소소한 행복들은 지켜질 것이겠지만 그 사소한 것들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말해야 하는 세상은 불행한 세상일 터이니 불행한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선생이 써내려간 글에서 그의 분노를 비판을, 부탁을 눈여겨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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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안 읽는 이유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백세희, 흔, 2018-06-20.


  제목이 주는 놀라운 힘, 이 책 또한 그 하나가 아닌가 싶다.

  개인의 치료기록, 나는 기분부전장애(심한 우울 증상을 보이는 주요우울장애와는 달리, 가벼운 우울 증상이 지속되는 상태)라는 병명을 보고는 세상에 우울증이 아닌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 증상으로 전문가를 찾는 사람이 있구나 싶었고 그들의 그 적극성, 의지에 놀랐다. 심한 우울증에도 병원을 찾지 않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축적된 이야기였기에 통계는 언제쯤부터 바뀌었을까, 상황을 기민하게 보는 기사는 없던가,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책 제목이 여기저기서 보이고 들렸을 때 나 역시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었던 적이 있는 사람으로서 이 제목에 공감했지만 굳세게 나를 끌어당기진 않았기에 만날 일은 없었다. 그리고 어느덧 이 책이 회자되는 것만큼이나 팔리는 만큼이나 반향은 생각과는 달라서 책을 읽진 않았다. 그럼에도 강하게 남는 이 제목. 역시 판매의 힘은 제목이 반이다라는 생각을 거듭 했다. 다시 한번 이 책을 떠올린 건 얼마 전 기사 때문이다.

  

벽도, 책장도 있는데 왜 책은 안 읽는가. 솔직히 우린 답을 이미 안다. 다른 이유는 핑계일 뿐, 간단하게 말해 필요 없어서다. 책 읽기를 그토록 권하는 건 공감의 힘을 높이고 시야를 넓히고 논리를 밝혀 줘서다. 우리 사회에서 공감, 시야, 논리란 쓸데 없는 짓이다. 바깥 세상을 이렇게 접어 버리고 나면 남는 건 자기에 대한 몰입이다. 아무리 ‘책에도 귀천은 없다’지만 그저 ‘불쌍한 나’를 쓰다듬는 나르시시즘 에세이들이 베스트셀러 목록을 채우는 것 또한 그 때문이다. 

- [한국일보, 책 안 읽는 이유, 2018.10.19

:http://www.hankookilbo.com/News/Read/201810191513342440?did=da]


  책을 안 읽는 이유가 어디 하나뿐이겠는가. 독서의 가치를 하락시키고 퇴폐시켜 버린 그 누군가의 그토록 순수한 교육적 열의가 먼저 떠오른다만 그것을 제쳐둔다면, 베스트셀러 목록을 채우는 것이 있다는 것은 다시 말해 책을 읽는 이유가 된다. 지금 책을 읽는 이유가, 이 책을 읽는 이유가 기자가 지적한 대로의 이유라 할지라도 말이다.

  기자의 글에서 제일 먼저 떠오른 책이 이 책이라서 책을 들춰보고 우울해졌다. 아, 시월의 마지막 날이라 바쁜 일들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시간을 소비하고 난 뒤의 허탈감에 그리고 몇 장 남지 않은 달력에 온 신경이 쏠리며 오로지 나라는 존재가 소멸된 느낌이 들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추워진 날씨가 달갑게 느껴진다. 지금 기분부전장애상태인 건가.

  세상에 자기 이야기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저 누군가는 그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 뿐. 거기에 마케팅에 어울리는 글이 있고 아닌가가 있을 뿐. 어쨌든, 작가는 이 우울을 좋은 결과물로 만든 사람이고 나는 아니다. 그렇기에 작가에게 박수를 보낸다. 최근처럼 넘쳐나는 조현병 환자, 우울증 환자들의 끔찍한 범죄 기사들을 접하다보니 거듭 저자의 우울에 경의를! 그리고 이 책은 사람들에게 많이 읽혔고 팔렸다. 그렇게 만들어 준 힘에도 경의를! 책의 내용과는 별개로 어쨌든 누군가를 탓하고 누군가를 해하는 대신에 자신의 내밀한 기록들을 출간한 저자의 우울증을 다시금 보게 된다. 책을 쓴 건 저자일지라도 세상은 상업자본의 힘이라, 출간한 이들의 승인없인 이루어지지 못할 터이니 저자가 출판사 마케팅 일을 하고 있다는 그 놀라운 우연에 놀라움이 사그라든다. 뭔가, 잘 짜여진 판에서 내가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느낌이다. 글에 대한 응원이 아니라 우울을 앓고 있는 저자 개인에 대해 응원하고 싶어진다 할지라도 나는 그 마무리를 할 수가 없다. 저자가 다시 2권을 들고 돌아오기까지는.

  그것을 더 부추기는데 내 어릴 적 친구들이 동원되는데 떡볶이쯤이야. 미키도 미니도 도날드 덕도 구피도 플루토도 앨리스도 곰돌이 푸도 어릴 적 기억하는 그 모습 그대로 나와 다시금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같은 느낌을 전한다. 나에게만 알려주는 비밀이라는 듯 시크릿, 시크릿을 외친다. 죽고 싶은 일이 있을지언정 그런 생각이 들지언정 떡볶이를 먹다 보면 멋진 인생이 다시 시작될 거라는 이야기는 분명 친구들 모여 한탄하듯 위로하듯 나누는 이야기이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온갖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 조금만 무엇을 찾아보면 자신을 위로할 이야기들을 만나고 보다 전문가의 견해들을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이 뻔하디 뻔하게 흘러 온 말들에 지금, 이 시점에 열광하게 되는 건 정말로 “책 안 읽는 이유” 때문인가. 아니면 그런 책들이 무수히 진열되어 있기 때문인 걸까.

  어떤 책들에선 감정의 격랑으로 피곤해질 때도 있다. 하지만 그 감정의 카타르시스가 주는 맛을 잊지 못하기에 다시금 슬금슬금 책을 찾게 된다. 믿고 찾는 출판사도 있겄건만. 하지만 이쯤되면 나는 내 취향으로 인해서, 내 성질로 인해서, 정말로 점점 책을 읽지 않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가을, 독서의 계절이 이르게 온 추위만큼 완전히 사라지는 이 막연한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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