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사랑한다는 것, 어떤 일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


『바가바드기타』. 마하트마 간디. 

 

 『바가바드기타』에서 두 가지에 끌림을 가졌다면 인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알 수 없는 매혹과 이끌림이 첫 번째요, 바가바드기타라는 낯선 용어와 내용을 그나마 익숙하게 들어 온 간디가 해설하였다는 점이다.

  어느 종교인들 그 심오한 진리와 믿음에 대하여 자랑치 않겠냐만 바가바드기타는 종교적이자 철학적인 느낌이 강조되는 듯했다. 물론, 한두 번 읽고서 이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웠다. 특히 무교인 사람의 특징으로서 신에 대한 맹목적인 존경을 보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특정 종교가 없기에 그 포괄적인 의미에 대해 이해하는데 쉬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자신의 종교와의 괴리를 경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 신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일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했다. 물론 난 이 말에 대해 공감하지 못한다. 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일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특정일 혹은 그 이상의 일에 집착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 아닐까. 그것이 물론 베풂으로써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신을 사랑하여 집착하지 않는 경우가 집착하기 때문에 신을 섬기는 경우를 능가하진 못할 것이다. 물론 그러한 집착들, 탐욕과 이기심을 비우기 위해 신에 대한 사랑을 갈구하고 신에게 의지하는 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바가바드기타는 ‘지존의 노래’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크리슈나 신의 가르침을 담은 시가이다. 이는 결국 인도 힌두교의 정신이라 할 수 있는데 비교적 간디의 해설로서 내용의 이해를 겨우 한다고 해도 깊이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아마도 이렇게 어렵게, 이해하기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이 경전의 내용이, 크리슈나의 가르침이 표현하고 있는 이중적인 언어 표현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순적인 표현은 항상 그러한 느낌을 가지게 한다. 내 안에 있으면서도 있지 않은 것, 선하면서 동시에 악한 것, 가짜인 것이 진짜인 것 등의 말들은 항상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든다. 이를 통해 나 역시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가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익숙하게 여기고 있는 진리라는 개념에 대해, 또한 경건한 마음과 진실한 마음으로 무언가에 대해 누군가에 대해 가질 수 있는 믿음의 정도는 어느 정도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바가바드기타에서 11장은 전체 중에서도 가장 시적인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 때문에 특히 다른 장에 비해 이들 장에 집중해서 읽게 되었다. ‘비판하지 않는 그대에게’라는 소제목이 달린 9장도 어떻게 내용을 전개시킬지 호기심이 당긴 부분이다.


내 이제, 비판하지 않는 그대에게, 이 신비스런 지식과 아울러 특별한 지식을 일러주리니. 이를 앎으로써 그대는 악에서 풀려날 것이다.

이는 학문의 왕이요, 신비스러움의 왕이요, 순수요, 다스림이요, 곧장 알 수 있는 것이요, 다르마의 본질이요, 실천하기 쉬운 것이요, 변하지 않는 것이로다.


  물론 종교적인 부분, 믿음이라는 것은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고 했으나 그러나 믿음에 대한 스스로의 무지에 대해 비판해 보는 것은 필요하다고 본다. 나아가 나의 믿음이라는 것 또한 어느 정도 종교적인 신념에 공감할 때 비로소 나의 마음 속에 진실한 믿음이 생겨나리라 본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비판이라는 것은 맹목적인, 헌신적인 믿음과 같은 의미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이를 통해 지속적으로 나를 비판할 수 있는 힘이 주어지기를 바란다.

  우선적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욕망으로 인해 생겨난 고통에서 해탈할 수 있는가. 물론 이에 대한 것은 집착을 버리라는 것으로 일관된다. 그러면 집착을 버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느 종교에서나 집착에 대한 경계와 집착을 버리는 것이 곧 새로운 믿음에의 길임을 강조한다.

  바가바드기타 역시 이에 충실하다. 그러나 바가바드기타도 단순한 진리에 대한 경전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진실한 실천이 매우 중요한 것임을 강조한다. 특정한 문구에 대한 경배나 감탄을 넘어서 그것이 행위로서 이루어질 때 비로소 신에 이르는 길이 보여 지고 신 안에 있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진리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지식이란 실천과, 행위와 함께 하게 될 때 진실한 빛을 발휘하는 것이며 그것이 결국 신에 이르는 길이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논리가 아니라 그 길이 내면적인 변화로써 신적인 삶의 환희와 자유, 즉 해탈로 인도하는 길인가의 여부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으로서 겪게 되는 무수한 이율배반적인 사건들, 그 속에서 겪게 되는 딜레마는 개인의 이익과 진리, 보편적인 타당성과의 갈등이라는 점에서 결국 이를 벗어나는 것은 그 모든 집착을 버리는 것이 된다. 다시 집착을 버리는 것은 신의 뜻에 따르는 것, 신의 말씀을 깊게 이해하며 그를 실천하는 방법이다. 신은, 인간의 삶에서 신에게 이르는 길은 결국 ‘신’을 알고 그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방법은 오로지 ‘바크티(헌신)이다.

  바크티를 얻을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지식을 아는 것도 아니요, 지식을 알고자 하며 이를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바가바드기타에서 이야기하듯 지식은 경전 이전에 마음을 여는 것에서 출발한다. 나의 해탈은, 비판 이전에 열린 자세를 견지하는 것에서 시작하여야 한다. 바가바드기타는, 나에게 이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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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의 세계에 어른과 아이의 구분이 필요할까


 


  무수히 많은 동화들을 여러 버전으로 봐왔지만 그 모든 동화들은 안데르센 아니면 그림 형제의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 유년의 동화는 이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에 의해 길들여졌던 것이다. 나이를 먹고 요즈음 나오는 동화책들의 황홀한 그림과 예쁜 책들에 넋이 가면서 어쩌다 전집을 읽을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어느 게 안데르센 것이고 그림 형제 것인지를 좀 더 명확하게 구분하고 싶었던 건가.

 물론, 그림 형제의 동화들이 어린이용 동화와는 많이 다르다는 건 알고 있다. 그래도 뭐가 이렇지라는 생각에 다시 표지를 확인하고서야 조그맣게 쓰인 ‘어른을 위한’ 이라는 글을 보았다. 생각했던 것과 다른 느낌은 전적으로 저 글귀의 역할이었다. 그래도 전집이나 완역은 흥미를 돋운다. 빠지는 부분 없이 뭔가를 알게 된다는 기분. 작가의 원본을 보게 된다는 즐거움.

  빼곡하게 쓰인 여러 편의 글들을 읽으면서 동일한 패턴들이 지루하게 여겨졌다. 누군가에게는 좋은 세상이기도 하다. 누구라도 왕궁으로 들어갈 수 있고 진기하다고 하는 것들을 내밀거나 하면 공주와 결혼할 수 있다. 공주님들은 사소한 이유들로 전리품이 된다. 새어머니는 늘 아이들을 귀찮아하고 괴롭히고 마녀들은 왜 그다지도 사람들을 이유없이 괴롭히는지. 이 이야기들이 작가들의 순수한 창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떠도는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각색한 것이라고 하니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가 반영된 것이 그런 형태로 전승되었을 테다.

  동화는, 동화여야 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동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시기, 마음의 문제인가? 더 이상 동화 속 환상에 놀라울 일 없고 결과적으로는 새로운 이야기들이 없으니 그림없는 동화책을 읽으며 하릴없는 지적질 속으로 빠져 버렸다. 이런 내가 안타깝지만 ‘어른을 위한’ 동화라잖아?

  동화는 굳이 어른을 위한 것일 필요가 없다. 아이들이 읽는 동화책을 그대로 읽으면 된다. 그것이 동화의 세계다. 교훈을 찾아야 하고 느껴야 하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가 필요할까. 이야기의 수위가 다르다고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을 바꾸면 그것은 어른들을 위한 이야기가 되는 걸까. 이야기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데. 그래놓고 왜 그림 형제의 이야기들을 동화라고 굳이 붙일까. 동화는 아이들이 읽는 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정확하게 어학 사전을 들춰봤다. 동심(童心)을 바탕으로 하여, 어린이를 위해 쓴 산문 문학의 한 갈래라고 동화를 정의한다. 동화에는 환상과 아름다움의 세계가 펼쳐져 있고 그리고 권선징악으로 마무리된다. 아니 그것들을 읽어내야 한다.

  아이들을 위한 동화는 가지치기로 보다 온화한 말로 이야기를 조정하는데 비윤리성은 굳이 어른들의 몫인가. 그것을 구분하는 것, 비윤리에 물들지 않고 이야기를 읽어내야 하는 어른들의 세계가 벅차게 느껴진다. 요즈음처럼 급속도로 세상이 변하고 윤리에 대한 인식이 바닥을 치는 상황에서 ‘어른들을 위한’ 동화는 영화등급이나 시청등급의 다른 표현이지 어른들을 '위한' 것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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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믿어라, ‘실험과학’이 아닌 ‘도덕과학’을

 

 ☞ 「과학의 사기꾼」 요리하기(cooking)  

 

  ‘과학’이란 보편적인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 체계적인 지식이다.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는 과학의 발달 속에서 이루어져왔음은 분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과학이라는 이름의 진리와 법칙을 발견하기 위해 연구하고 노력해 오면서 우리는 일상에 존재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을 보다 쉽게 이해하고 접근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전문가가 아닌 경우에야 여전히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운 속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렇기에 깊은 의심을 품거나, 그 의심을 증명해 보려는 노력이 덜한 것이 사실이다.

  「과학의 사기꾼」은 그러한 의심에 대한 실행을 보여주고 있다. 즉, 과학분야에서 일반인들이 모르고 감춰졌던 부분에 대한 실제를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과학이라는 객관적이고 실험이 강한 부분에서 간과한 비객관성, 비관찰성과 수많은 오류들, 그리고 그 오류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과학사에서 진보하고 위대한 발명과 발견이라 불리는 사건들의 사례를 들어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이 사례에서는 역사책에서, 전기 위인전에서 봤던 위인들이 이야기와 노벨상이라는 엄청난 권위의 상을 받은 과학적 사건들의 허구와 조작이 나타난다. 충분히 가치를 인정받은 많은 업적들이 사실은 객관성을 잊어버리고 자료를 조작하거나, 혹은 은폐하거나, 남의 것을 가로채기했다는 내용이다. 더 나아가 그러한 사례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해관계에 의해 공공연히 묵인되어 왔다는 사실도 말해주고 있다.

 그러면, 우리에게 법칙으로 진리로 읽혀왔던 어떤 사건이 문제였고 누가 문제를 그대로 방관했는가?


☞ 장난질(hoaxing)?

 

  역사상 위대한 천문학자로 알려진 프톨레마이오스가 실제 별자리관측을 하기보단 다른 사람의 연구업적을 이른바 ‘빌려’, 자신의 학설을 펴냈다는 것은 사실 놀라운 정도는 아니다. 어차피 어떠한 진리든, 법칙이든 무언가에 대한 의심에서 비롯되고 다른 것을 참조한 것에서 이뤄진다는 측면을 생각하면 말이다. 그러나 작가가 붙인 제목처럼, 점점 더 의문스러워지는 것은 사실이다. 과연, 단순한 실수인지 그렇지 않으면 천재의 영감인지가 말이다.

  피사의 사탑에서 물체를 떨어뜨리는 실험을 할 정도로 끈질기고, 객관성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한 과학자로 알려진 갈릴레이. 지동설과 관련하여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하였지만 마지막까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을 하였다는  일화는 갈릴레이의 위대성을 더욱 부각시켜줬다. 그러나 갈릴레이의 일화가 실제로는 의심스럽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떨어지는 사과하면 떠오르는 뉴턴의 성격과 관련한 이야기, 아인슈타인의 이야기 등은 그동안 특정한 업적에 의해 그 사람들의 참모습이 얼마나 편견에 가득 찬 채로 조작되고 위인으로 덧씌워진 것인지를 드러낸다.

  무엇보다 이들이 자신들의 연구에서 거짓없이 연구결과를 만들어내고 그 연구의 오류나 문제점을 시인하고 계속적으로 진실을 찾아내기 위한 노력들을 더 했어야 했으나 그렇지 못했다는 사실은 아쉬움을 준다. 과학자로서의 실험과 연구를 생각하게 하는 아인슈타인이 실제 연구와 증명을 위한 노력보다는 특정한 이론에 대한 가설을 만들어내는 것이 주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의 이론들이 지금에서도 위대한 이론으로 평가받고 그러한 가설이나 이론을 세운다는 것도 중요한 일이긴 하나, 자신의 이론이나 학설을 증명하기 위한 실제적인 노력의 뒤따름이 없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론이나 업적에 대해 과소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유명한 학자에 대해 그 연구에 대한 신뢰는 지식에 대한 찬탄과 동시에 실제로는 그들의 인간성에 대한 신뢰가 포함된 것이리라 본다. 때문에, 『과학의 사기꾼』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과학사의 발견된 연구들이 심각한, 혹은 사소한(?) 수치상의 누락이나 조작들로 가득하고, 실제 검증된 연구와 실험이 생략된 법칙과 이론이다라는 것은 아니다. 현재까지 이르면서 잘 알지 못하는 많은 학자들이 그들의 연구로 노벨상을 받고 인류의 과학학문발전에 기여를 했지만 이러한 조작된 기여가 과연 인류에 어떤 공헌을 했느냐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물리학이나 수학, 화학이라는 분야보다 더 크게 부각되는 것은 유전학이나 의학분야의 연구와 같은 부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황우석박사의 줄기세포 사건과 같은 일을 생각해 볼 때 그렇다. 슈틀러와 쿠글러가 항체를 통해 암의 치료법을 찾아냈다는 연구를 보자. 암으로 고생하는 많은 사람들은 당연 엄청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 연구가 거짓으로 밝혀졌을 때, 그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줄기세포로 치료에 대한 기대를 가졌던 수많은 사람들의 참담한 심정을 단순히 개인의 업적에 눈이 먼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 다듬기(trimming)


  위대한 힘들이 위대한 결과를 보여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 과학자들의 단순하고 불순한 ‘의도’에 의해 참담하게 무너졌는지는 연구자들이 끊임없이 생각해야 할 부분이다.

 서머린의 경우에서도 그렇듯이 개인의 업적을 드높이기 위해 아주 단순히 싸인펜을 살짝 덧칠하는(실제로 이러한 일이 발생했다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그러한 모습이 과연 연구의 진정성을 얼마만큼 생각하였느냐는 물음을 가지게 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과학이라는 특성이 구체적이고 정확한 연구와 실험을 중시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저 특정분야에 권위자의 영향력에 지나치게 매여 있다는 사실은 실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과학’이라는 분야가 가지는 ‘그들만의 요리잔치’의 문제와 윤리의식의 강조라고 할 수 있다.

  과학은 그 학문영역의 특성상 실체를 검증하는데 있어 같은 분야의 전문가들의 행동력과 연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때문에 이들은 결국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이거나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 연구결과와 연구주제가 이상적이거나 과학사에 큰 역할을 한 것일수록 의심을 하지 않기도 하지만 그 의심에 따른 검증결과를 드러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과학자의 조작과 실수, 사기를 정당한 연구로 검증하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지 못한 처사로 치부되는 것이 과학계의 현실이라는 것을 꼬집고 있다. 때문에 연구의 실질적인 목적과 존립이유를 망각한 채 ‘같은 식구를 음해’하는 일로 간주되고 그러한 일을 한 사람이 오히려 따가운 눈초리 속에서 피해야 하는 일들이 빈번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서로의 이해를 위해 공모하거나 사건을 눈감아 주고, 혹은 남의 업적을 제 업적인 양 가로채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결국 과학자들의 ‘윤리의식’의 부재, 공명정대하고 올바른 것, 바람직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가치의식의 전도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들이 과학이라는 연구를 수행할 때 비이커와 과학사전을 들고 공부를 할 것이 아니라 ‘도덕’교과서를 옆에 두고 연구를 진행해야 할 필요성이 바로 여기 있는 것이다.

  과학은,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을 중심으로 하였을 때 결국 인간생활의 보다 평화롭고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도구이다. 무엇에 우선하여 가치를 두는가에 대한 의식교육이 끈임없이 강조되고 과학이라는 영역의 한정되고 비공개적인 분위기가 사라지기 위해선 이것이 중요하다.

  과학자들이 그들의 연구의 목적을 분명히 하고 보다 더 바른 윤리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만이 과학에서의 사기와 조작문제는 사라질 수 있다. 과학이 가지는 무서운 힘의 영향력을 새삼 알게 되고 또한 과학이라는 정교하고 실험적인 학문이 얼마나 모순적이고 쉽게 조작될 수 있는지의 이러한 사례들에서 강조할 것은 결국 개인의 윤리의식의 확립과 과학전반의 학자들의 윤리의식 확립이다.

  결국 바른 연구결과는 정확한 연구와 더불어 개인의 가치관의 정립을 통해 이뤄진다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하인리히 창클이 전하고자 하는 바다.

 고대사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과학사에 위대한 학자들에서부터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단순한 요리와, 장난, 정교한 다듬기의 모습은 결국 이들의 인간적인 부분에 있어서의 문제였음을 강조하는 것이 작가의 의도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 책에서 나타나는 과학의 실제 내용에 대한 의문에 대한 것은 조금 눈감아 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작가는 수많은 과학업적을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으나 과학에 대해 무지한 일반인들은 연구의 내용이 가지는 실제적인 내용을 이해하기엔 설명이 조금 부족하지 않은가 한다. 단지 어떤 연구결과를 발표했고 그 과정에서 역시 조작과 속임이 있다는 큰 아우트라인을 잡을 수는 있지만 말이다.

 이 책이 ‘과학’서로서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설명이 없는 것은 작가의 의도는 멘델의 유전법칙이 이렇고 그것이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초우라늄이 어떤 것인가?, X선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내용들에서 일어난 사기와 조작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는가가 핵심이니 말이다. 우리는 과학에 대해 좀더 엄격한 잣대를 과학자에 대해서도 더한 엄중한 기준을 가지고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실험과학의 문제가 아닌 ‘인간과학’의 속임에 대해 끊임없는 경고를 보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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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 조나단, 비상이 꿈꾸는 낙하


갈매기의 꿈, 리처드 바크


  모든, 낙하하는 것의 지향점은 비상이다. 모든 낙하하는 것의 도달점은 그것이 부딪친 곳이다. 바로, 그곳. 도달점과 지향점 사이에는 수천 개의 시선이 얽히고설키어 있다. 어떤 시선에 발목이 잡히고 또 어느 시선에 목이 조일지 모른다. 그리하여 수천 개의 시선에 길들여지고 수천 개의 시선이 길러낸 ‘나’가 된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암전. ‘기억할 수 있는 동물’로 ‘약속할 수 있는 동물’이 되어 버린 ‘나’가 이제와 묻는다. 다시 날기 위해서, 다시 부딪쳐야만 하느냐고.

  비상과 낙하를 오가는 갈매기가 말한다.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


   바닷가, 먹이 찾기에 바쁜 갈매기들 틈에서 자꾸 머리를 처박던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톤은 수많은 비행 기술을 연마한 끝에 시속 300km로 날게 된다. 스스로도 갈매기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그 순간이라 칭하던 그의 성공을 축하하는 갈매기는 아무도 없다. 갈매기들에게 날개란 먹이를 찾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조나단은 ‘무책임하게 무모한 짓을 했기 때문에, 그로서 갈매기 가족의 위엄과 전통을 헤치면서…’ 그렇기에 조나단은 버려질 운명이다. 그가 갈매기 사회의 습속화된 도덕에 따라 다시 약속하는 갈매기가 된다면, 그의 날개를 버리고 그의 부리로 먹이를 찾는 일에 더욱 집중한다면, 가족의 품으로 무리 속의 일원으로 다시 받아들여질지 모른다. 어떤 형벌이든 반성과 항복의 제스쳐를 통해 소멸될 기회를 얻는다. 형벌은 길들임을 위한 것이니 다시 길들여지겠노라 약속만 한다면야 형벌의 목적은 충분히 이룬 셈이니까. 그렇게 늘 외면받던 조나단 갈매기, 용서하고 받아준다는 그들의 눈을 바라보겠는가. 조나단 갈매기는 약속의 의지로 눈을 내리까는 대신 이렇게 외친다.

  “삶의 의미를, 삶의 더욱 높은 목적을 찾고, 그것을 실천하는 갈매기보다 누가 더 책임이 있단 말입니까? … 이제 우리는 살아갈 이유가 생긴 것이 아닙니까! 배우고, 발견해 내고, 자유로와지고 하는!.”

  추방. 그가 머물던 한 세계가 닫혔다.


  내 가족과 종족으로부터 추방당하고 추위와 고독과 두려움을 겪으며 조나단은 여전히 비행기술을 연마한다. 그는 이미 날기를 사랑하고 비행을 통해 자유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무수한 노력으로 비행기술을 터득하며 마침내 무한한 자유를 느낄 수 있는 초현실적 공간까지 날아오른다. 가고 싶어 하는 어느 장소나 어떤 시각에도 갈 수 있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장소를 갈 수 있는 비행 기술. 그가 꿈꿨던 세계가 열린 것이다. 그리고 조나단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가 자신을 추방한 갈매기 무리로 돌아갈 결심을 했을 때 그의 머릿속에 맴돈 것은 스승의 말,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하라.”였다.

  조나단은 그가 배우고 깨달은 매우 간단한 것들에 대해, 갈매기가 나는 것은 당연하며 그들의 본질은 자유이며, 자유를 방해하는 건 어떤 형태의 의식, 미신, 제약이든 물리쳐야 한다는 것에 대해 얘기했다

  “자유로 이끌어 가는 법만이 참된 법이다. 그 밖에 다른 법은 없다.”

  그의 세상에서 자유는 끊임없는 날개짓, 끊임없는 비상이었을 것이다.


   뭐, 갈매기 얘기였지만 이들의 비행하는 삶 속에서 니체의 영원회귀와 초인을 읽는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단순히 반복된 삶이 아니라 생성의 반복이고 그것은 또한 삶의 경이로움이자 그 자체로 삶의 구원이다. “영원히 회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서, 어떤 포만이나 권태, 피로도 모르는 생성으로서, 자기 자신을 축복하고 있는 것. 영원한 자기 창조와 영원한 자기 파괴의 디오니소스적 세계”

  나의 이해가 니체의 이러한 세계를 ‘사랑’으로 읽고 있다. 갈매기 조나단과 그의 스승들의 자기극복과 의지, 그들의 날개짓에 대한 무한한 경외와 사랑이 니체가 말하는 것과 닿아 있지 않는가. 어릴 적 조나단을 만났을 때만 해도 그저 그 모든 일상에 만족하고 물음없이 살아가는 생이 아니라 비상을 꿈꾸는 이의 삶으로 읽었는데, 오늘 다시 니체와 맞물려 자아실현 이외의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을 만난다. 조나단과 그의 스승들의 창조력은 꿈을 실현했다는 자기만족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이 사랑하는 날개짓은 그들에게 존재에 대한 깨달음이며 자유이며 춤이었다. 그들의 날개짓은 삶에서 본질적인 물음으로 인도하며 또한 그 물음이 단지 물음으로 끝나도록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생을 사랑했고 그들의 생을 의지로 이겨냈다. 조나단은 추방당한 곳으로 되돌아와 자기가 그러했던 것처럼 무리 속에서 외면받으며 비상하는 날개짓을 꿈꾸는 이들에게 “한계를 넘어서”기를 가르치며 자신을 신적 존재로 여기는 것을 부인하며 특별할 것 없는 새임을 강조한다. 

   머리를 처박기만 하던 어린 갈매기가 저렇듯 놀랍게 성장하는 것을 보며 ‘조나단은 매우 특별한 갈매기였기에’ 그 모든 것이 가능했다고 생각해왔다. 이미 선택되어 그 길고 가는 갈매기라고 생각했는데 조나단은 끊임없이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의 제자 플래처도 깊게 모셔두었던 조나단에 대한 ‘신적 존재’라는 이미지를 내려놓는다. 그저 스승에 대한, 스승의 제자들과 세상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깨달을 뿐이다.

  먹이를 위한 날개짓이 공격적이고 매섭다면 그저 그것에 대한 사랑으로 이루는 날개짓은 얼마나 힘차고 아름다울까. 비상을 꿈꾸는 자, 바닥에 처박기를 두려워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비상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사랑스런 춤이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리처드 바크의 이 책이 출판되었을 때 성직자들로부터 무수한 비난을 받았다 한다. 이 책의 첫 출판이 1970년이라는 것을 보면 얼마 되지도 않은 때다. 성직자들은 “신성한 신의 영역에 인간이 도전한, 오만한 죄로 가득한” 책이라 했다. 출판 거절도 여러 번 당했다고 한다. 금기와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보이는 조나단의 행동이 누군가의 눈에는 불쾌했던 모양이다. 길들여진 눈은 늘 그것만 본다. 갇힌 프레임 속에서 확장될 수 없는 니체가 바라본 약자들의 논리를 갈매기의 꿈을 바라보는 이들을 통해 발견한다. 나 또한 강자는 악한 자라는 프레임에 갇혀 있던 사람으로서 강한 자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자라는 개념의 전환을 새긴다. 이 사회에서 병든 자들을 기꺼이 불쌍히 여겨주는 강자가 되어, 아모르 파티를 외칠 수 있기를 소원한다. 그리하여 지금, 조나단과 같은 무한한 비상의 날개짓을 위해 바닥에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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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자는 아름답다

 

달과 육펜스, 서머셋 몸


 

“찰즈 스트릭랜드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솔직히 말해서 나도 그 사람에게는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위대함을 부정할 사람은 거의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물론 지금 내가 말하는 위대함이란 출세한 정치가나 성공한 군인에게서 느끼는 그런 위대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같은 위대함은 인간 자체가 지니고 있는 위대함이라기보다는 단지 그가 가지고 있는 지위가 위대하게 보일 뿐인 그런 위대함이 아닐까.…거기에 비할 때 찰즈 스트릭랜드의 위대함은 진짜였다.”


   이렇게, ‘달과 육펜스’의 처음은 시작한다. 마흔 살, 이제 삶의 안정을 취했다고 여겨지는 나이의 가장이 안정적인 가정과 직장이라는 삶을 버리고, 자신의 꿈을 찾아가는 내용이 바로 ‘달과 육펜스’다. 제목에 대한 끌림, 주인공에게 느껴지는 강렬함. 화가 폴 고갱을 모델로 쓰여진 전혀 허구이지 않은 이야기. 주저없이 감명 깊게 읽은 책으로 달과 육펜스를 꼽을 수 있는 건, 찰즈 스트릭랜드에게 나를 이입시키기 때문이다.

   찰즈 스트릭랜드는 한 가장의 가장으로서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하고 살아가던 보통의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가정을 버리고 집을 나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주식 중개인으로서 성실히 일하던 평범한 가장이 직장과 가족을 버렸을 때는, 분명 다른 여자에게 열렬하게 빠졌을 거라는 많은 이들의 분노에 찬 생각과 달리, 그의 행동은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열정 때문이었다. 그림에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괴팍한 예술가 지망생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는 가난하고 고된 삶은 개의치 않고 그림에 대한 열정과 예술혼으로 당당하고 자유롭게 살아나가고 있었다. 물론 그의 괴팍스럽고 냉소적인 태도는 사람들 속에 섞이지 못하고 그림 또한 인정받지 못했다. 몇 년의 방랑을 거듭하며 찰즈 스트릭랜드는 마지막으로 타히티 섬에서 정착했다. 이곳에서 17세의 원주민 소녀 아타와 결혼하여 열대의 울창한 나무 숲, 그늘 속으로 구불한 오솔길을 따라서도 한참을 가는 산호초 섬, 에덴 동산 같은 곳에서 생활하였다. 그 곳에서 스트릭랜드는 행복해 했다.

   스트릭랜드의 말년 생활을 전해준 의사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나병이었고 마지막엔 눈마저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한번도 자신의 운명을 비관하거나 용기를 잃은 적이 없었고 마지막 운명하는 순간에도 단 한번도 평온을 잃거나 흔들린 적이 없었다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죽으면 시체를 묻고 난 후 집에 불을 질러 달라고 했다. 그리고 나무 조각 하나 남지 않고 완전히 다 타서 재가 될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면 안 된다는 약속을 하게 했다. 그가 그린 벽화와 함께 찰즈 스트릭랜드도 한줌 재로 남았다.


   달과 육펜스는 화가 폴 고갱을 모델로 했다. 실화인 듯 허구인 듯 스트릭랜드가 고갱인 듯 이 화가에 대한 강렬한 인상은 늘 마음속에 각인되었다. 또한 달과 육펜스라는 제목이 너무 좋았다. 이때부터 13살이란 나이에 만난 스트릭랜드는 내 인생을 표면적으로 지배하는 주인공이었다. 지금은 이렇게 조용히, 조용히 살아가고 있자. 하지만, 곧 나도 나의 열정을 불태우고 살자. 열정적으로, 자유롭게 살아가자. 그래서 문제가 되기도 한다. 아직 마흔이 안됐으니까, 그때가 되기 전까진 육펜스를 움켜쥐고 있는 나를 합리화한다. 그래서인지 스트릭랜드처럼 그림을 그리는 시기를, 자연스레 마흔 살을 데드라인으로 삼고 있다. 그 이후로는 더 이상 안된다고, 늦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늘,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에 대해 고민한다. 나는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시체처럼 일을 하는 것이 오로지 안정적인 수입 때문이라는 자괴감과 함께 말이다. 그러면서도 선뜻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건, 그 일에서 안정된 생활을 얻을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직장인으로 살아가기를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그리고 한편으로 꿈만 꾸고 있다. 그것에 가는 것이 마냥 두렵기도 한 것 같다. 마치 내 꿈을 실현하고 나면 살아갈 이유가 없어질까 두려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또한 꿈꾸는 삶을 동경하며 그렇게 사는 것에 길들여진 것이 아닐까 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는 늘 재능이 있다고 믿어 왔는데 그 길을 걷다 보니 아무런 재능이 없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래서 그저 꿈꾸는 삶에서 발을 벗어나지 못하는 건지도 모른다.

   작가 서머셋 몸은 찰즈 스트릭랜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의 영혼 속에는 원래부터 어떤 창조적 본능이 뿌리 깊이 박혀 있었으나, 주위의 환경 때문에 그것이 오랫동안 가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 창조 본능은 마치 암세포가 살아 있는 조직 속에서 커 가듯이 맹렬하게 자라나다가, 끝내는 전신을 사로잡아 그로 하여금 꼼짝없이 어떤 행동을 일으키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내 속에도 시작하기도 전에 구겨 넣은 창조적 본능이 아직까지 살아 있기를 바란다. 조금 늦었더라도 그것을 건드리면 맹렬하게 타오르기를 바란다. 어쨌든 달과 육펜스는 끊임없이 나를 일깨우는 책이다. 찰즈 스트릭랜드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지금은 현실과 타협하고 있지만, 곧 달을 찾아 가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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