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아이 이야기
제니 에르펜베크 지음, 안문영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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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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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니 에르펜베크가 발표한 첫 소설작품. 표지에는 장편소설이라 했으나, 노벨라Novella, 중편소설로 보는 것이 좋겠다. 작가의 작품으로 세 번째 읽는 소설인데, 에르펜베크는 참 다양한 주제로 작품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카이로스>를 소환해야 하나보다. 패전으로 전쟁은 끝났지만 히틀러 소년단 출신인 기성세대 한스 들에 의하여 운영되는 사회 시스템. 그것이 청년기에 들어가는 카타리나 세대를 억압하고 관리하는 시대를 비평한다면, <늙은 아이 이야기>의 늙은 아이는 성인처럼 큰 체격을 했으나 2차성징의 발현도 거의 보이지 않고, (자본주의 또는 통일 독일) 사회에서 적응하지도 못해 늘 서열의 마지막에 있어야 안정감을 느끼는 동독 출신 주민의 처지를 은유했을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본다. 일찍이 독일 소설에서는 소년 시절에 더 이상 나이 먹기를 포기한 남자가 몇 명 등장했다.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에서 오스카, 하인리히 뵐이 쓴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의 주인공 한스. 이 두 소년들은 파시스트들의 사회, 파시즘의 광기어린 악행 속에서 성장을 스스로 멈추기로 결정해 그들이 저지른 죄를 비판하려고 한다.

  예니 에르펜베크가 만든 ‘늙은 아이’는 좀 생각해봐야겠는데, ‘늙은 아이’가 조로증 같은 현상으로 몸은 성인의 것을 하고 있으되 나이가 얼마 되지 않은 소녀일 수도 있고, 애초 나이가 많지만 성징이 나타나지 않아 어린 아이처럼 보이는 성인일 수도 있다. 나도 처음에는 일종의 조로증세가 있는 열네 살 소녀로 생각했다가, 점점 읽어가면서 정신과 성호르몬에 문제가 있는 성인, 갑자기 한 순간에 개방되어 어떻게 할 줄 모르는 동독 사람을 비유한다고 읽게 되었다.


  독일 역사에는 이 소녀 같은 인물이 정말 존재했다고 역자후기에 쓰여 있다. 1828년에 뉘른베르크 시내 한복판에 비틀거리는 모습으로 나타난 당시 16세 소년 카스파 하우저. 그동안 철저하게 사회로부터 격리당해 아무런 사회적 성장을 하지 못한 카스파는 기초적인 말과 숫자를 배우며 사회 적응 훈련을 받다가 길에서 괴한의 칼에 찔려 죽었다고 한다. 이로써 카스파의 출생과 성장과정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된 채 다시 한번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늙은 아이 이야기>의 등장인물 ‘소녀’의 첫 구절을 읽으면 역자해설에서 소개하는 카스파 하우저하고 별로 틀린 것이 없다. 시내 한복판에, 한밤중에, 이 소녀가 빈 휴지통을 손에 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서 있었다. 경찰이 소녀를 발견해 말을 시켜봐도, 이름이 뭐니? 어디서 살아? 부모가 누구야? 몇 살이니? 물어봐도, 열네 살, 이라는 대답만 할 뿐이다. 완전히 고아이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큰 몸집에 어울리는 뚱뚱한 소녀. 예니 에르펜베크는 본문 겨우 두번째 페이지에 소녀를 ‘잉여존재’라고 판정한다. 경찰도 마찬가지였겠지. 그들은 소녀가 쥐고 있는 쓰레기통을 빼앗고 통통한 손을 잡은 채 아동 복지원으로 데려간다.

  복지원에 들어간 후에 소녀는 그나마 생각을 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앞에서 작가가 소녀를 잉여존재라고 하는 바람에 독자는 지적발달장애를 염두에 두었는데, 지적발달장애가 있는 소녀라고 보기에는 그나마 복잡한 생각을 하기 시작해서 조금 이상하다, 발달장애인의 마음 속 생각, 뇌의 화학작용을 에르펜베크, 작가의 시선으로 좇아가 해석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고, 조금 더 읽으면, 그러니까 소녀는 애초에 돌봄과 교육에서 완전히 소외되지 않아,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깡통급 복지원 학생들보다는 조금 나은 지식수준을 지니고 있다는 것까지 알게 된다.

  다만 육체적으로 건강하지 못하여 큰 덩치와 피하지방과 내장지방에도 불구하고 추위를 무척 많이 타는 데다가 만성 비염증세가 있어 늙은이처럼 맑은 콧물이 코에 방울방울 달려 있을 때가 많은데, 이를 닦기 위한 작고 얇은 손수건을 남한테 보이기 창피해한다. 그러니까 나름대로 희로애락을 다 느끼는 보통 사람이다. 바이러스에 취약하여 독감, 감기에 쉽게 걸리고, 회복하는데 오랜 요양을 해야 한다. 소녀는 따뜻한 복지원 양호실의 깨끗한 침대에 담요를 뒤집어쓰고 누워있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빨리 걷기도 힘들고, 뛰는 건 거의 하지 못하지만, 쉬는 시간이 있으면 철봉대에 올라 그 위에 앉아있기를 좋아하는 소녀.

  2차 성징이라고는 언제부터 했는 지 모르겠지만 생리를 하는 것 말고 없다. 가슴은 전혀 발달하지 않아 남성형 가슴에 남자 것보다 큰 젖꼭지만 달려 있다. 엉덩이도 발달하지 않아 그저 가운데가 불룩한 항아리형 원통처럼 생겼다. 소녀의 생존방식은 서열의 가장 낮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 그러면 아무도 소녀를 경계하지도 않고, 문제가 터져도 원인제공자로 지목 받지 않으며 해결자 혹은 해결방법을 생각해낼 멤버로 여기지 않는 자유로운 자리가 바로 가장 낮은 서열이라는 건 확실하게 알아서.

  아무리 그렇다 해도 문제가 한 사람을 건너뛰지는 않는다. 8학년 동급생 다섯 명이 3학년 남자 아이를 집단으로 괴롭히는 장면을 소녀가 본 적이 있다. 아이들도 소녀가 자기들이 한 짓을 알고 있다는 걸 앍고 전전긍긍한다. 소녀가 교무실에 가서 고발을 하기만 하면 다섯 명 전원은 규율상 퇴소를 당하게 되고 퇴소 후에 이들 역시 단 한 곳도 갈 데가 없다. 그러나 소녀는 결코 남에게 말하지 않는다.

  어느 하루, 다섯 명 가운데 하나인 뵈른이 어떤 식으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선생의 적지 않은 돈을 훔쳐 달아난다. 뒤에서는 선생이 쫓아오고. 뵈른이 도망가는 길에 그저 서서 구경을 하고 있던 소녀. 뵈른이 소녀와 꽈당 부딪히더니 가지고 있던 돈을 소녀에게 쥐여주고 꽁무니를 뺀다. 소녀는 주머니에 얼른 돈을 집어넣고 완전하게 표정 없이 그냥 다시 서 있다. 결코 누구에게도 자기 주머니에 돈이 들어 있다는 말을 하지 않은 채. 뵈른은 잡혔지만 돈을 훔친 적이 없다고 했고, 선생은 돈을 도둑 맞았으며, 소녀의 주머니에 있던 건 뵈른에게 돌아갔지만, 이 일을 시작으로 보육원에서 소녀의 사회생활은 전기를 맞는다. 이제 보육원의 주류 세계로 들어가게 된 것.

  그러면 좋을 것 같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이후 소녀는 서열의 가장 아래 자리에만 머물 수 없다. 알고 보니 글씨도 예쁘게 쓰고, 공부 못하는 아이들 보다는 아는 것이 있어서 그들의 시험지를 대신 메꾸어 주기도 한다. 이 단계가 되면 독자는 이 소설이 단순하게 외모가 늙은 아이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카이로스>처럼 일종의 정치소설일 수도 있고, 좀 개성있는 독자라면 정치소설이어야만 하는 이유를 찾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크게 재미있지는 않다. 그렇다고 한 번 휙 읽고 던져버릴 작품도 아니다. 개방시대를 맞은 폐쇄사회에 있던 사람들의 곤란함을 콕 집어 쓴 작품으로 읽히는데, 이런 부류의 작품이 많기는 하지만 독특한 문법으로 풀어낸 흥미로운 노벨라, 중편소설이다. 예니 에르펜베크는 처음으로 쓴 소설부터 현상을 자기만의 시각으로 비유하는 소재를 사용했다. 그래서 불편함을 주기도 하겠지만 하여튼 앞으로 주목해야 할 작가인 건 틀림없는 듯. 눈에 힘주고 지켜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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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하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1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이항재 옮김 / 민음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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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체호프하고 별로 친하지 않았다. 열린책들에서 출판한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10년 전에 읽었는데 여기에 필이 꽂히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그의 대표 장르라고 할 수 있는 희곡은 아주 오래전에 읽은 <세 자매>말고 한 편도 더 추가하지 못했다. 아직도 그렇다. 이번에 읽은 《사랑에 대하여》 역시 도서관 개가실을 어슬렁거리다가 신간 코너에 진열되어 있는 걸 보고 단순하게 그냥 집어 든 거였다. 아무 생각 없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서 <색∙계>하고 이 책 두 권이 있길래 <색∙계> 장아이링? 장애령 여사보다는 체호프를 딱 한 번만 더 읽어보자, 이번에도 마음에 안 들면 끝이다 싶어 골랐다고 말해야 더 정확하다. 만일 이 작품집 제일 뒤에 실린 단편이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인 걸 알았으면 이 책을 골랐을까? 나도 모르겠다.

  체호프는 남서부 러시아 로스토프 주, 아조프해 타간로프 만에 접한 도시 타간로프에서 태어나 살다가, 아버지의 식료품점 사업이 폭삭 망해 모스크바로 이주했다. 안톤만 타간로흐에 남아 기어이 학교를 졸업하고 모스크바대학 의학부를 졸업해고 1882년, 약관 스물두 살에 의사 개업하면서 이후 5년 동안 주간지에 3백 편의 소품을 발표한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체호프가 이 소품들이었던 거다. 네다섯 페이지, 더 짧은 건 세 페이지 분량밖에 되지 않는 소품들. 소위 ‘손바닥 소설’이라 하는데 지극히 짧은 소품들을 읽고 한 작가를 찬양할 수 없었을 터이다.


  이 책 《사랑에 대하여》는 의과대학에 다니던 당년 스무 살 시절 1880년에 쓴 소품부터 1899년의 ‘단편소설’까지 실려 있는데, 앞부분 소품들을 읽으면서 어김없이, 이젠 안톤 체호프하고는 영 아디오스, 마음을 먹었다가, 1892년 이후의 단편소설을 보면서 점점 눈알이 커졌다. 아, 이래서 체호프, 체호프 하는군.

  체호프 신상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면, 1880년대 후반에 체호프 인생 두번째 객혈을 하는 등 심신이 미약해졌지만 그래도 정신 차려 더 나은 작가가 되기 위해 저 극동의 사할린으로 출발, 2년간 살다가 1892년에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이후에야 (아마도) 체호프의 전성시대가 열린 것은 아닌지.

  실제로 이 책은 열아홉 편의 소품과 단편이 작품을 쓴 순서대로 실려 있는데, 1887년과 1892년 사이 4년 동안이 진공으로 있다. 1892년 이후 <유형지에서>부터 작품은 제대로 단편소설의 외형을 갖추었으며 역자 이항재의 말대로 “삶과 현실에 대한 심오한 관찰과 사색이 반영된 단편”을 발표한다. 물론 역자의 해설은 목적상 조금 주례사 성향이 있겠지만 이전 소품들과 견주다면 확실하게 그렇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서 이 책이 두 번째 체호프 단편집인데, 두 책 다 1880~90년대 작품을 아우르고 있다. 차라리 전기작품집과 후기작품집으로 구분해서 출간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물론 그러면 나는 당연히 후기작품집만 사 읽겠지만.


  이제 체호프 단편의 재미를 알기 시작해 만시지탄을 감출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편소설의 나라에 산다는 자부심이 빵빵한 내 눈에는 체호프의 단편이 좋기는 좋지만 19세기 말 작품으로 스타일의 한계가 있거나,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라도 억지로 스타일 타령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뭐 내 마음이니까.

  물론 앞으로는 체호프의 책이 눈에 보이면 일단 읽어볼 예정이다. 손절에서 급반전, 이제 눈에 띄면 읽겠다는 수준까지 왔는데 여기서 더 올라가지 말라는 법도 없으니 말이지. 아울러 그의 희곡들도 찾아봐야겠다. 괜히 안 읽고 버텼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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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05-27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전 체호프 우리나라 번역본은 다 갖고 있어요. 다 읽었다고 할 수 있어요. 이상하게도 우리나라 체호프 단편집들은 제목과 표지만 달랐지 대동소이 해요. 10작품이 있으면 읽었던 게 반 이상..뭐 그렇다구요. 희곡보단 전 단편이 훨 좋더라구요.^^

Falstaff 2025-05-27 16:21   좋아요 0 | URL
오, 그렇군요. ^^
워낙 작은 작품을 많이 쓴 양반이라... 사실 저도 말은 본문처럼 했는데 희곡 말고는 또 읽을지 장담하기 쉽지 않네요. 뭐 사는 게 다 그렇지요. ㅎㅎㅎ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지음, 안영옥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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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는 20세기 스페인의 황금기, 소위 27세대의 일원으로 워낙 유명한 극작가, 시인이라 말을 보태면 오히려 누가 될 정도이다. 문외한인 극동 변방의 이교도이자 이방인들이 보기에 이이의 유명세는 오히려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파를 지지하다가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팔랑헤당에 체포당해 재판도 없이 고향 그라나다에서 총살당한 비운의 시인, 극작가인 것이 한 역할 했는데, 이는 우리나라도 프랑코 비슷한 오랜 군사정권의 영향이 컸을 지 모른다. 뭐 아마추어 의견이니 신경쓰지 마시라. 하여간 로르카는 우리나라 독자에게 그리 크게 어필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언어와 정서 탓이 크겠다. 그리고 시인, 극작가, 에세이스트로 이름을 냈으니 외국 소설도 잘 안 읽는데 하물며 번역시는 누가 그리 읽겠으며, 희곡은 또 얼마나 읽히겠는지, 생각해보면 로르카가 유명세에 비해 그리 익숙하지 않은 것이 납득이 간다. 나도 이전에 읽은 로르카는 이이가 스무 살 때 쓴 기행 에세이 <인상과 풍경>밖에 없다. 그것도 소설인 줄 알고 읽었다가 에세이라서, 그라나다, 안달루시아의 환한 빛과 건물 말고는 생각나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러나 드라마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은 <인상과 풍경>과 확연하게 다르다. 분위기 자체가 그렇지 않다. 두 작품 사이에 18년이라는 터울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으나 역시 에세이와 극작품의 간극 때문 아닐까 싶다.


  베르나르다 알바. 60살. 작품을 쓴 시기가 1936년이니 당시 기준으로 보면 노파다. 어머니 마리아 호세파는 스무살에 베르나르다를 낳아 지금 80. 정신이 오락가락한다. 문학작품 속에서 이렇게 뇌 쪽으로 약간 비정상인 사람들이 특색있는 역할을 할 때가 많다. 이이도 좀 그런 편이다.

  베르나르다는 딸만 다섯. 순서대로 앙구스티아스, 마그달레나, 아멜리아, 마르티리오, 아델라. 첫째 앙구스티아스는 서른아홉 살이며 유일한 전남편의 딸이다. 전남편이 상당한 부자로 죽어서 그의 유산으로 앙구스티아스만 거액의 상속분을 보유하고 있다. 다른 네 명도 평생 쓸 만큼의 유산을 상속받겠지만 돈이란 것이, 특히 있는 것들이 있을수록 더 지독한 건 아시지?

  그리고 중요한 등장인물 가운데 한 명. 하녀 라 폰시아. 베르나르다와 같은 나이로 올해 환갑이다. 거의 평생 베르나르다와 함께 지내며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해서 만사 훤하지만, 냉정한 베르나르다는 폰시아의 충고나 기타 귀띔에 그리 신경쓰지 않고 면박만 준다. 어이, 폰시아. 너는 그냥 시키는 일만 하고 대가로 돈을 받으면 되는 거야, 알겠어? 이런 식.


  막이 올라가면 장례식 날이다. 베르나르다가 두번째로 정식 과부가 된 날. 그리하여 첫째 앙구스티아스만 빼고 전부 검정 상복을 입어야 하는데, 앙구스티아스 얘도 염치가 있으면 아무리 자기 아빠가 아니더라도 상복을 입는 것이 예의일 터. 이 문제는 앙구스티아스의 성격을 설명하는 장치 말고는 기능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하면 좀 그렇고, 이후 딸들 가운데 발생하는 갈등과 대립을 얼핏, 그리고 앞서 조금 보여주는 장치일 수도 있다.

  무슨 갈등이냐 하면, 이웃하는 귀족 가운데 키 크고, 잘 생기고, 덩치 좋고, 하여튼 사방팔방으로 어디 한 구석 꿀릴 것 같은 외모의 청년 페페 엘 로마노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스물다섯 살 페페는 스물네 살의 마르티리오가 자기하고 맺어질 것 같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래도 찔러보고 싶은 못 먹는 감이다. 막내 스무 살짜리 아델라는? 정확하게 얘기가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동네에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밴 처녀를 살해하려는 일이 벌어지니까 아델라가 자기 배를 쓰다듬는 장면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이미 페페 엘 로마노와 할 거 다 한 사이로 보인다.

  그런데 당시 스페인 사회에 국한해서 그런지, 아니면 유럽 지역, 더 확장해서 전 지구적으로 비슷한 지는 잘 모르겠다. 정식 결혼을 하기 위하여 알바 집안의 다섯 딸 가운데 한 명한테 청혼을 하려는데, 누가 당첨될 것 같으냐 하면, 유력 후보인 넷쩨 딸 마르티리오와 막내딸 아델라를 뺀 나머지 여성들, 하녀를 포함한 가족 구성원 전부 첫째 딸 앙구스티아스를 꼽는다. 페페보다 무려 열네 살이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하여간 이렇게 내정 비슷하게 된 상태라서 이제 페페 엘 로마노는 밤 시간에 앙구스티아스의 창문에 등장해 “밤드리노니다가” 간다. 그런데 시간이 문제다. 분명히 앙구스티아스의 창문에서는 밤 1시 반에 이별을 고했는데, 새벽 네 시에 페페가 그제야 알바 저택에서 걸어 나오는 걸 본 사람이 속속 등장한다. 누구? 생각하고 말고 할 것 없이 당연히 아델라로 보인다.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보인다는 거.

  서양 사람들이 나이 차이 때문에 장유유서 따지는 거 못 보셨지? 자매들 간에도 그렇다. 더구나 씨가 다른 자매들이라 분위기는 더욱 험악하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붙여야 하는 것이, 무대와 작품의 제목이 “베르나르 알바의 집”이라는 딱 갇힌 공간. 이곳은 한 명의 독재자 베르나르다 알바가 지배하는 공간으로 이이의 앞에서는 어떠한 말대답도, 반항 비슷한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알바 저택을 내전이 한창 진행중인 스페인 정세와 비유해도 괜찮을 거 같기는 하지만, 이제 세월이 몇 십 년 흐른 바에 구태여 그렇게 봐야 하는 이유도 없다. 이런 건 다 감상자의 선택일 바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저택 안에서 치매 증상이 있지만 특유의 옳은 이야기를 복잡하게 하는 80 노인 마리아 호세파의 전망도, 베르나르다를 혐오하지만 충실하고 오래된 하녀 폰시아의 조언도 다 필요 없다.

  그리하여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안에서 자매들 간의 사랑에 관한 시기, 증오는 결국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치닫게 되는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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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5-26 09: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투비컨티뉴드가 궁금한데 그럴려면 읽어야겠죠? ㅎㅎ

Falstaff 2025-05-26 16:57   좋아요 1 | URL
아휴.... 도서관 가셔요. 이 작품이 우리나라에서는 막 뮤지컬로도 공연하고 뭐 그랬지만 희곡으로 읽는 재미가 덜 할 줄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ㅎㅎㅎ

yamoo 2025-05-27 1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띠...별5 또 출현인데...그게 로르카네...이거 이거 되게 고민됩니다. 하필 로르카라니...그래도 사야겠죠..별5개라는데..^^;;

Falstaff 2025-05-26 16:58   좋아요 1 | URL
흠. 저는 책임 안 집니다. 하여간 만사 불여튼튼입니다. ㅋㅋㅋ
 
페르시아의 신부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19
도리트 라비니안 지음, 서남희 옮김 / 들녘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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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리트 라비니안은 이스라엘 중부 샤론 지역에서 1972년에 이란계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중동 지역을 생활의 기반으로 하는 집안 출신 유대인 작가는 처음 읽는 것 같다. 아모스 오즈도 그러지 않나 싶어 검색해보니 라트비아계 아버지와 폴란드계 어머니가 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선입견인지 외모로도 약간 차이가 있는 듯. <페르시아의 신부>가 첫번째 발표한 소설이란다. 데뷔작이 아니란 얘기냐고? 그렇다. 데뷔는 1991년 시집 《예, 예, 예》로 했다고 위키피디아에 나온다. 위키피디아를 읽어보면 2014년에 소설 <접경생활Borderlife>이 이스라엘 여성과 팔레스타인 남성 사이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반 자전적 소설이라는데, 흠, 좀 놀랐다. 하긴 사랑에 국경이 어디 있나?

  제목이 <페르시아의 신부>라서 나는 어린 소녀를 신부로 삼는 극한 조혼에 따른 사회문제나 무슬림 종교에서 신음하는 여권에 관한 페미니즘 소설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극한 조혼 풍습인 건 맞는데 자꾸 그쪽으로 생각해보려 해봐도 페미니즘 소설은 아니다. 그냥 20세기 초∙중엽 이란의 유대인 게토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풍경을 어린 신부와 어린 신부가 되기를 원하는 소녀를 주목하면서 그렸다고 보는 편이 좋을 듯하다. 당연히 이란, 페르시아 지역을 배경으로 하니까 남성의 가부장적 부당한 행위도 여러 번 등장하지만 라비니안은 그것을 강조하는 데 힘을 주지 않았다. 독자도 처음엔 좀 신경 써 읽기 시작했다가 진도가 나가면서 재미있게 후루룩, 배고플 때 덜 뜨거운 잔치국수 들이마시듯 즐기며 읽기만 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물론 달리 생각할 수도 있겠지. 내 생각이 그렇다는 말씀.


  열일곱 살 먹은 꽃 Flora플로라. 전보다 몸이 훨씬 불었다. 첫번째 임신이다. 근데 신랑이 토꼈다. 그래서 울고 운다. 울어도 그냥 우는 게 아니라 훨씬 분 몸에 걸맞게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곡소리로 엉엉 온동네 사람들이 이미 다 알듯이 드높고 드높다. 얼마나 우는지 여인네들은 이제 쿠치크 마다르, 즉 어린 엄마의 임신이 이것이 끝이었으면 하고 바랄 정도다. 참 별스러운 임산부. 엄마 미리암 하놈이 말하기를, 결혼하고 며칠 후 저주받은 월식일 밤에 그렇게도 말렸건만 하필이면 그날 악마가 밤하늘에 넘실거리는 시간에 아이를 만들어서 이 사달이 생겼단다. 근데 엄마의 말씀이 사실인 것을 알려면 신랑의 직업과 영업 방식에 관해서 좀 더 상세하게 알아야 한다. 왜 신랑은 습관적으로 질외사정을 고수했을까?

  나한테 음란마귀가 씌웠나 어쨌나, 신랑 이름을 읽고 거 참 웃기네 했다. 이름이 ‘샤힌 보지도지’이다. 벌써 십여 년 전에 2차 호프집에서 노동조합 집행부를 우연히, 진짜로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위원장, 부위원장, 사무국장, 투쟁부장, 복지부장 기타 등등. 나하고 동석했던 이들은 당시 노무팀장, 생산실장. 우리는 노무팀장 면을 살려주려 합석에 응했다. 그래 서너 조끼씩 순배가 돌아가고 얼근히 취한 나는 어떤 생각이 들어 슬그머니 웃음을 흘렸다. 그걸 본 위원장이 좋은 표정으로. 팀장님 왜 웃으셔요? 대답하기를 소학교 때 송창식과 변웅전이 하는 이야기 들은 생각이 나서 그렇지요. 뭔데요? 송창식과 변웅전이 서로 이름에 붙은 받침 떼고 읽으면서 티격태격, 거 가관이더군요. 그래서요? 우리 복지부장님도 받침을 떼고 읽으니 흐흐 재미 있습니다 그려. 이런 적 있었다.

  이야기하기 전에 틀림없이 노조 사람들 모두한테, 말하기 싫다, 당신들 열 받을 지 모른다, 했고, 그들이 천만의 말씀, 전혀 그럴 일 없으니 마음 편히 이야기 해보시라, 해서, ‘받침 뺀 복지부장’을 꺼냈으며, 전원 우하하하하 거창하게 웃어 제쳤음에도 불구하고, 괜히 심각한 사무국장 새끼가, 자기도 나더러 마음 편하게 얘기해라 해놓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노조 간부한테 그게 무슨 말입니까, 했다. 그랬더니 단 1초도 안 걸려 같은 노동형제가 하는 말에 휘까닥 돌아버린 위원장이 아이고, 술병 깨고, 술잔 집어 던지고, 그런 생 난리가 없었는데, 그 사람들, 돈도 안 내고 그냥 가버렸다. 뭐 그런 일도 있었다. 세상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그래서 어쩄든 나한테는 좀 민망한 이름의 샤힌 보지도지(‘염소도둑’이라는 뜻)는 사기꾼 성향이 농후한 전형적인 유대인 포목상인인데, 온갖 변설을 떨어 무슬림 집안에 안주인한테 천 두루마리를 보여준다. 옷감 여러 필을 방에 촥, 펼쳐놓고, 노가리를 실컷 푼 다음, 말이 좀 먹히면 이제는 옷감을 직접 들고 사모님 몸에 척 가져다 대고, 세상에 이런 몸에 이런 옷감이 없으리, 울룰랄라 칭찬을 하면서 몸을 비비적 거리다가 슬그머니 뻣뻣하게 경직된 살을 슬슬 문지르는 단계까지 이른다. 그러면 결국 할 거 다 하게 되는데, 언제나 마지막 결정적 순간에 뇌리를 떠나지 않는 아버님의 교훈, “샅에 달린 누에를 이방인 여인의 고치 속에 넣으면 안 되느니라.” 이교도 나비들을 태어나게 해서는 안 되니까 그 순간이 오면 얼른 빼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비단 손수건에 사정을 하는 게 하도 버릇이 되었다. 그래 결혼식을 한 날부터 시작해 계속 비단 손수건을 꺼내다가 하필이면 악마가 허공을 채우는 불길한 월식날 밤, 그날부터 별을 따기로 결심을 했던 거였다.

  페르시아 옴리쟌에 들어와 유대인 도살업자 집안의 사위가 된 샤힌 보지도지는 결혼식 포함해 6개월 동안 지내다가 머나먼 도시 이스파한으로 장사를 떠나 2개월, 아무리 길어도 3개월 안데 돌아올 터이니 몸 건사 잘 하고 있으라는 말만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날들이 가고 점점 초조해진 라토리안 집안. 옴리쟌을 거쳐가는 상인들에게 샤힌 보지도지를 물어보니 한 장사꾼이 하기 싫은 이야기를 한다는 표정과 어투로 시투룽하게 하는 말이, 그가 지나간 길에 어린 신부 셋과 과부 한 명이 배가 남산 만하게 불러 있다는 거였다.


  플로라의 아빠는 이름난 도살업, 정육점 가문의 쌍둥이 아들이었다. 지금은 아니다. 동생 내외가 깨를 볶으면서 잘 살다가 하루는 식중독에 걸려 한날 한시에 딸 하나만 남겨둔 채 숟가락 놨다. 딸의 이름이 나지아. 사촌 언니 플로라보다 네 살이 어려서 열세 살.

  플로라의 엄마 미리암 하놈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옴리쟌의 모든 유대인 게토 여성뿐만 아니라 게토 밖 무슬림 진영의 1부 4처 집단까지 아울러 가장 게으른, 게으르다기보다 집안일에 관심이 없는 여자였다. 물론 가정교육 문제인데, 원래 무진장 깔끔했던 집구석이 하루아침에 가장 어질러진 집안꼴로 변해버린 건 전적으로 못된 아빠 책임이었는데, 미리암은 아무튼 소녀시절부터 이런 미풍양속을 몸 깊이 간직한 채 시집을 와서 두 딸 역시 세상에서 가장 게으르고 식탐 많은 여성으로 키우는데 성공했다. 날이 갈수록 지저분한 집구석 꼬라지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던 미리암은, 시동생 부부의 장례식에 갔다가 당시 겨우 일곱 살 난 시조카 니지아가 얼마나 야물딱지게 청소, 요리 같은 집안일을 잘 하는지 홀딱 반해버렸다. 이미 동서가 죽기 전에 절대로 죽을 것 같지 않아, 정말로 자네가 죽는다면 니지아를 내 며느리로 삼기로 맹세를 함세, 이래버렸기도 했고, 아다시피 유대교나 무슬림에서 한 번 맹세를 하면 이건 절대 인간의 힘으로 취소할 수 없는 거라서 께름칙하던 차에, 마침 남편도 이번 기회에 니지아를 집에 데려와 키우자 하는 걸 못 이기는 척했다. 딱 한가지 조건을 달고. 자기를 ‘아메 보조르그’ 즉 존경하는 숙모님이라고 부르라는.

  근데 이 미리암이 워낙 미인이라서 순서대로 딸-아들-딸이 전부 생긴 건 하나 거의 완벽했다는 말씀. 비록 숙부네 집에 와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거의 하녀 수준의 온갖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했지만 니지아는 잘 생긴 사촌오빠 무사와 결혼해 플로라처럼 어린 엄마, 쿠치크 마다르가 될 꿈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있을 게 아직도 없는 거다.

  플로라는 열세 살에 초경을 했다. 처음이라 뭐가 뭔지 몰라 종아리와 발꿈치에 꾸덕꾸덕한 피딱지가 앉은 걸 보고 그것의 근원지를 찾아 올라가다 보니 그게 초경인 줄 알고 나지아한테 말했고, 나지아는 앞날의 남편 무사에게, 무사는 누나 호마에게, 호마는 아빠한테 말했으며, 아빠는 엄마한테 한 마디 함과 동시에 집집마다 키우는 전서구, 우편용 비둘기를 몇 십 마리 날려 지역의 각 게토에 널리 소식을 알린 바 있다. 그러자 다음 주부터 페르시아 각지에서 청년과 청년의 어머니들이 속속 모여들어 결혼 신청을 하기 시작했던 걸 나지아는 봤던 것.

  나지아도 빨리 초경이 터져야 무사 오빠하고 결혼을 할 터. 가만 보니 오빠는 더 기다리기 힘든 거 같다. 왜 힘든 줄은 모르겠지만 괜히 그렇게 보인다. 나지아는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손가락으로 슬쩍 아래를 훑어, 아직 깜깜한 새벽이니 냄새를 맡아보고, 그때마다 실망한다. 이제 열네 살이 됐는데도 소식이 없으니 이걸 어쩜 좋아.

  하지만 가히 소설 한 편의 주인공으로 발탁할 정도의 캐릭터라면 무슨 수를 쓸 것이다. 그러니 독자들이여 걱정하지 마시라. 정말 독한 방법으로 아직 멘스가 터지지 않은 소녀임에도 불구하고 나지아, 이 아이의 소원은 이루어지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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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여인
마리 은디아이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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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은 2009년에 파리 2구에 있는 드루앙 레스토랑에서 수여하는 공쿠르 상과 소액의 상금 10유로(16,220원)를 받아 전세계 잡지에 이름을 올린 바 있다. 다들 아시겠지만 공쿠르상은 세계에서 상금을 주는 문학상 가운데 가장 적은 돈을 수상자한테 주는 걸로 유명하다. 대신 최고의 프랑스 문학상이라 공쿠르 상만 받았다 하면 단박에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고, 스토리가 그럴 듯하면 영화로 만들어져 금세 돈벼락을 맞을 수 있어, 프랑스 소설가한테는 이 상 받는 것이 일생의 로망이기도 하다. 한 작가에 딱 한 번 주는 걸로 알고 있는데, 유일하게 두 번 받은 작가가 있었으니 로맹 가리. 이 심술궂은 작자가 에밀 아자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자기 앞의 생>을 출간해 1956년에 이어 75년에 한 번 더 공쿠르 상을 받았다. 이런 염병할 작자가 있나. 누군가한테는 필생의 소원일 텐데, 1975년이 ‘누군가’에게 절호의 기회였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지.

  마리 은디아이는 프랑스 누아르Loiret의 피티비에에서 세네갈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1967년에 둘째 아이로 태어났다. 첫째는 65년에 세상을 본 아들 팝 은디아이. 국가교육청소년부 장관을 거쳐 2023년부터 유럽 평의회 프랑스 대사로 재직중인 역사가 겸 정치인이다. 마리 은디아이가 첫 돌을 넘기던 해에 세네갈 아버지는 처자식을 몽땅 버리고 세네갈로 돌아가 호적등본 상 가족의 인연을 탁 끊어버렸다. 이후 홀어머니와 함께 설마 평생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유년기까지는 함께 살았다고 책의 앞날개에 쓰여 있다. 그래도 백인 홀엄마가 “1960년대에” 유색인 남매를 이렇게 둘 다 번듯하게 키웠으니 대단하기는 대단하다.


  <세 여인>을 읽어보니 마리 은디아이의 다른 작품은 굳이 찾아 읽을 거 같지 않아 이 정도만 가비얍게 소개하고 만다. 이 가운데 제일 중요한 소개는 은디아이가 돌 지나자마자 세네갈로 돌아간 아버지.

  작품 속 세 여인 가운데 첫번째 여자의 이름은 노라. 서른여덟 살이다. 결혼을 했었는지 모르겠고, 프랑스에서는 중요하지도 않지만, 딸 뤼시와 함께 살았던 변호사이다. 얼마전부터 법학을 공부하는 남자 자콥과 그의 딸 그레트를 자기 집에 데려와 주민등록등본에 올리지 않은 가족으로 함께 살고 있다. 다행히 뤼시와 그레트는 사이가 좋아 모든 방법을 동원해 함께 잘 논다. 아이들이 그러면 됐지 뭘 더 바라나. 다만 자콥이 이제는 법학 공부에도 관심이 없고, 따라서 변호사가 되고자 한다는 말도 허풍선으로 밝혀져 암만해도 노라가 버는 돈으로 모두 먹고 살아야 할 형편인 것 같다. 가정의 권력은 경제력에서 나오는 법이니, 이 가족의 왕초는 당연히 노라이다. 두번째 공동으로 아이들, 그리고 제일 꼬붕이 자콥이며,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개는 키우지 않는다는 것. 노라는 거의 모든 교육과정을 “총을 들고 건설하는 보람에” 사느라고 죽을 똥을 싸는 향토예비군처럼 악착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졸업을 했고, 어렵게 변호사 자격을 땄으며, 넓지는 않지만 집값에 관한 한 전세계적인 악명을 향유하고 있는 파리에서 30년 할부로 아파트를 구입한 데 대하여 도처에 자부심을 은밀하게 뿜어대는 중이다.

  그런데 무려 30년 전에 순서대로 딸-딸-아들을 키우고 있다가 다섯 살 난 아들만 홀딱 데리고, 사전에 아무런 말도 없이 갑자기 세네갈로 잠적해버린 아버지한테, 급하게 세네갈로 오라고, 꼭 와야 한다는 연락이 온 거였다. 학교에 다니는 뤼시도 있고, 파리 직장에서 해야 할 일도 있어서, 아몰랑! 단칼에 거절했건만, 딱 한 번만 방문해달라고 끈질기게 부탁, 아니, 간청하는 아버지를 끝까지 모른 척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노라는 세네갈 공항에서 내려, 아버지가 보낸 구형 검정 메르세데스를 타고 저택에 도착하는 것으로 작품은 시작한다.


  30년 전에 세네갈로 돌아온 아버지는 해변가의 휴양 리조트를 프랑스인에게 인수받아 이를 성공적으로 리모델링해 대단한 성공을 이룬 왕년의 부자였다. 휴양 리조트를 넘길 수밖에 없었던 전 사장은 유럽에서도 소설에 나오는 아버지들이 주로 완벽하게 더럽고 난폭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동업하던 세네갈 흑인 남자를 때려 눕힌 다음 커다란 트럭을 앞뒤로 몰아 나가 떨어진 동업자의 해골을 바퀴로 짓이겨 죽여버렸다. 자신은 감옥에 수감된 상태에서 당시 세네갈에선 뇌물로 안 되는 일이 없어 어떻게 권총을 감옥에 반입해 총구를 입에 물고 장하게 방아쇠를 당겨 숟가락 놨고. 전 사장의 처자식은 다시 프랑스 보르도 지방으로 돌아가 살다가 아들 뤼디가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세네갈로 가서 고등학교 교사를 했다. 이때 같은 학교에서 불문학을 가르치던 현지인 교사 판타와 사랑을 하고, 결혼도 하고, 아들도 낳았는데 불미스러운 일을 저질러 해고를 당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사는 게 2부. 그래서 좀 자세하게 쓰는 거다.

  세네갈에서도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가는 법. 노라의 아버지 사업도 날이 갈수록 시들기 시작해 견디다 못해 지금은 리조트 전부를 팔아서 생긴 현금으로 어떻게 살고 있다. 그동안 아들이자 노라의 사랑하는 동생인, 정말 남매간의 우애는 아주 좋은 상태인데, 아버지의 아들 소니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정치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이번 방문이 노라의 첫 세네갈 나들이는 아니다. 열두 살 때부터 몇 번 온 적이 있다. 한 번은 날이 가면 갈수록 가난해지는 가정을 견디기 어려워 어머니는 미용실 헤어디자이너를 때려 치우고 조금 비싼 매춘부를 하기 시작했었나보다. 이때 나이도 좀 많고 경력이 있지만 다정다감한 은행 지점장을 만나 처음으로 엄마, 아저씨, 그리고 엄마의 두 딸이 세네갈을 방문한 적도 있다. 당시엔 아버지도 세네갈에서 잘 나갈 때라, 엄마가 결혼해 가정을 다시 꾸렸다는 것에 안심을 해 지점장 아저씨와 친밀하도 위풍당당하게 대화를 나누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번에 만나는 아버지는 과거의 오만과 당당하던 풍채는 완전히 사라지고, 늘 깔끔하고 광채나던 의복과 신발은 간데없이, 길고 누런 발톱을 깎지도 않은 채 샌들을 신은 반바지 차림의 희끗희끗한 머리카락과 불룩 나온 배를 숨기지도 않은 차림이었다. 한 마디로 이제는 쇠락해도 많이 맛이 간 상태에 처했다는 것. 이 아버지는 이제 막 도착한 노라를 식탁으로 안내해서 하인 겸 메르세데스 운전수 마세크와 하녀 카디 뎀바에게 일러 방문객을 대하는 세네갈인의 전통인지 뻑적지근하게 저녁상을 차리게 하고 오직 먹는 일에만 집중한다.

  이 이야기에는 완전하게 엑스트라로 출연하는 하녀 카디 뎀바는 책의 3부에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좋은 남자와 결혼을 해서 임신을 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하지만 수태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남편이 죽고 만다. 시댁으로 들어가 대바구니 짜서 내다 파는 일을 했지만 시누이들과 비교해 전혀 생산성도 없고 영업도 하지 못해 하루는 종이쪽지에 주소를 써 주면서 유럽의 사촌, 앞에서 말한 고등학교 불문학 교사 판타를 찾아가라고 돈 몇 푼을 쥐어주고 쫓아버린다. 그래서 역시 갖은 고생을 하며 프랑스로 장정을 떠나는 이야기가 3부이다.


  아버지는 둘째 딸 노라를 왜 와달라고 그렇게 간청했을까? 집에 와서 보니까 아버지가 최근에 낳았다는 딸 쌍둥이는 있는데, 명색이 아버지이면서 딸 쌍둥이의 이름도 모르고, 쌍둥이의 엄마도 보이지 않는다. 세상에나, 이럴 수가. 알고 보니, 그렇게도 점잖고, 말없고, 내성적이고, 절대 과격하지 않은 서른다섯 살 먹은 동생 소니가 쌍둥이 엄마이자 아버지의 새 아내인 여자와 수년 동안 간통을 했으며, 틀림없이 쌍둥이가 소니의 딸임에도, 의붓어머니가 자신한테 싫증을 내는 것 같아서, 나일론 빨래줄로 목을 졸라 죽여버렸다는 거다. 이렇게 증언을 하고, 한 점의 부인도 하지 않은 채 최종 심판을 앞두고 유치장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범죄의 질이 하도 좋지 않아 세네갈에서는 어떤 변호사도 사건을 수임하지 않으려 해, 아버지는 언어가 같은 프랑스에서 변호사를 하는 노라에게 소니의 변호를 맡기려 한 것. 그리하여 세네갈의 비위생적인 유치장에서 소니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소니는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어떠한 증명도 하지 않으며 이렇게 말한다.

  “누나,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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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5-05-22 12: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 일천한 독서 경험에 의하면...

뭔 상 받았다고 해서 마냥 다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특히 그 중에서도 공쿠르상이
그러한 것 같습니다.

바람돌이 2025-05-22 14:52   좋아요 1 | URL
저도 동감입니다. 공쿠르상 받은 책 중에 나랑 안 맞는거 제일 많음요. ^^

Falstaff 2025-05-22 15:59   좋아요 1 | URL
저도 오랜 세월 그렇게 생각했는데요, 21세기 들어와서 많이 읽을 만? 보통 독자들한테 어필할 만한? 하여간 그렇더라고요.
특히 21세기로 접어들어서 영어의 제국주의적 언어 지배도 특별히 생각하는 시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