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섭 선집 한국문학의 재발견 작고문인선집
김진섭 지음, 선안나 엮음 / 현대문학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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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섭. 1903년에 목포에서 출생한 안동 사람. 한학에 일가견이 있는 아버지가 전라도 지역에서 벼슬을 할 때 목포에서 나 7년을 살았고, 제주에서 몇 년, 나주에서 또 몇 년, 이후 서울로 유학, 양정학교를 졸업한 후 1921년에 일본 호세이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다가 때려 치운다. 23년 관동지진을 겪고 24년에 다시 독문학과에 재입학해 재일 유학생들과 뜻을 합쳐 해외문학연구회를 조직한다. 이를 두고 우리 문학사에서 ‘해외문학파’로 칭하며 대충 김진섭, 김광섭, 이하윤 등을 거론한다. 이하윤의 ‘이’는 ‘오얏 리李’가 아니라 ‘다를 이異’를 쓰는 게 까까머리 중학생이던 내 눈에 와 박혀 여태 기억한다.

  하여간 이이는 1950년 한국전쟁 초기에 살던 집이 내 외갓집 바로 옆, 종로구 경운동에 있었는데, 이때 ‘북괴군의 탱크가 물밀 듯이 짓쳐 내려오자마자’ 초장에 잡혀 북으로 끌려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만 마흔일곱 살이면 초로初老의 중년이었으니 살아도 그리 오래 살지는 못했을 거 같다.

  그래서일까, 이이의 수필이 중학생 교과서에도 실렸던가? 까마득하다. <백설부>. 존경하는 블로그 이웃께서 흰 국화 시를 소개하시는 글을 읽는 순간 팍 떠올랐던 글이 김진섭의 <백설부白雪賦>여서 당장 다른 도서관에 상호대차 신청해 받아 읽었다.


  나는 여간해서 수필을 읽지 않는다. 요샌 수필이라 하지 않고 에세이라 하는 거 같은데 오히려 ‘수필’이란 단어에 더 광채가 나지 않나? 하여간 여태 읽은 수필집이라고는 이상보의 <갑사로 가는 길>, 민태원의 <청춘예찬>, 문일평의 <하화만필>, 이상의 <권태>, 김소운의 <목근통신>, 양주동의 <문주반생기>, 이어령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와 <바람이 불어오는 곳> 정도가 다다. 알량한 수필 독서력에 이제야 《김진섭 선집》을 더하니 참 보잘것없는 라이브러리에 지나지 않는다. 뭐 그렇다고 새삼스레 발심을 해서 이제부터 머리띠 질끈 묶고 새롭게 수필집 열라 찾아볼 마음까지 생기지는 않지만.

  만 7년을 호세이 대학에 다닌 김진섭은 1928년에 귀국해 경성제국대학 도서관 촉탁으로 근무하다가 1931년에 유치진, 윤백남 등과 극예술연구회를 조직, 주로 외국 근대 희곡을 번역해 공연했다. 이왕 극장 주변에서 연구회를 만들었으면 스스로 극작가를 한 번 해보지 않은 것이 아쉽다. 같은 의미로 독일문학을 전공하고 귀국했으면 스스로 소설 같은 픽션 작품을 생산하지 않고 그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학적 재질과 배운 것을 자산으로 수필만 수백 편 쓴 것도 아쉬운데, 하긴 뭐, 이건 수필 말고 픽션을 좋아하는 내 취향상 아쉽다는 것이지, 수필 좋아하는 분 입장에서는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니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이이가 본격적으로 수필을 청탁받아 쓰기 시작한 것이 1930년대. 자신은 무려 7년간이나 일본 유학하고 돌아온 지식인. 시대는 일제강점기의 우중충한, 하지만 태평양 전쟁이나 해방 후 세계적 기근 시기에 비하면 그나마 먹고 살기가 조금 편했던 시절. 지식인이라면 당연히 상당히 계몽적일 수밖에 없던 시대이다. 그래서 이이의 수필 가운데 많은 작품이 무지하게 계몽적이고 따라서 잘난 척 무지 해대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진심 잘난 척일 확률도 높겠지. 그럼! 당시 ‘내지內地’ 유학생이 몇 명이나 됐겠느냐고. 얼마나 잘난 척을 하는지 한 문단만 읽어보자.


  “그러나 나는 물론 여기서 소외 사변적, 논리적, 학문적 철학자의 철학을 비난, 공격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나는 오직 이러한 체계적인 철학에 대하여 인생의 지식이 되는 철학을 유지하여주는 현철한 일군一群의 철학자가 있었던 것을 알고 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철학자만이 철학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로 인간적 통찰력과 사물에 대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는 이상 모든 생활인은 그 특유의 인생관과 세계관 즉 통속적 의미에서의 철학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다음에 말하고자 함에 불과하다.“ (<생활인의 철학> p.250)


  내용은 전혀 어렵지 않다. 생활인 누구나 철학을 가질 수 있다는 뻔한 내용을 돌리고 돌려서 마치 큰 깨달음을 주는 것처럼 써놨으니 이거야말로 진정한 “잘난 척”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지.

  당연히 모든 작품이 이렇지는 않다. 술과 술동무 이야기, 성문 밖 성북동이 얼마나 외지고 어둡고 험한 동네이며, 그래서 밝은 달빛이 얼마나 고마운 밝음인가 하는 이야기처럼 일개 시민이 사는 모습을 그릴 때는 또 잘 배운 동네 남자 같은 면도 있다.

  그래, 그래. 변죽은 그만 울리고 애초 읽고 싶었던 <백설부> 한 귀절을 따 보자.


  오, 천하가 얼어붙어서 찬 돌과 같이 딱딱한 겨울날의 한가운데, 대체 어디서부터 이 한없이 부드럽고 깨끗한 영혼은 아무 소리도 없이 한들한들 춤추며 내려오는 것인지, 비가 겨울이 되면 얼어붙어서 눈으로 화한다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만일에 이 삭연索然한 삼동이 불행히도 백설을 가질 수 없다면 우리의 적은 위안은 더욱이나 그 양을 줄이고야 말 것이니, 가령 우리가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추위를 참으며 열고 싶지 않은 창을 가만히 밀고 밖을 한 번 내다보면 이것이 무어랴. 백설애애白雪皚皚한 세계가 눈앞에 전개되어 있을 때 그때 우리가 마음에 느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p.180)


  위 인용이 제일 아름다운 부분이라 가져온 건 아니고, 그냥 따오기 적당한 분량이라서 택했을 뿐이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침을 튄다 해도 <백설부> 전문을 읽은 만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거늘. 그저 <백설부> 일독을 권하는 수밖에.

  그럼 지금 이 책을 사거나 빌리거나 헌책이라도 구해 읽어보라 권하고 있느냐고? 천만의 말씀. 권하지 못하겠다. 그건 우리나라 국가대표 수필선수 고 김진섭 때문이 아니다. 엮은이 선안나가 문제다. 1962년에 나서 성신여대 대학원 국문과에서 석사, 박사를 하고 지금 모 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단다. 아직 정년이 되지 않았을 터이니 지금도 교수를 하고 있는 거 같은데, 아오, 이하 생략.

  애초에 자신이 김진섭이라는 수필 대가의 모든 작품을 읽고, 검토하고, 이 가운데 독자에게 선보일 수 있는 명편을 추려, 그간 근 백년의 세월이 지났으니 적당한 현대어와 적절한 각주를 달 수 있는 역량을 제대로 가졌는지, 자기 깜냥을 알아 작업을 맡든지 말든지 해야 하는 거 아니냐 말이다. 엮은이는 주석을 제대로 달 실력이 애초 없는 것 같으며, 작가가 작품에서 인용한 다른 유럽 작가의 작품을 한 권도 읽어본 적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다, 1962년생이니 학창시절에 종아리 맞아가면서 한자어를 배웠을 터인데 그때마다 종아리에 붉은 줄을 자심하게 그어 피바다를 만들었을 거 같다. 뭐 청소년 시절에 공부 안 한 거야 집안 살림 사정일 수도 있고 사춘기의 특권인 잠깐 일탈소녀 하느라 그랬을 수도 있으니 야박하게 그거 가지고 뭐라하지 않겠는데, 그럼 책을 엮으면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자주, 더 맹렬하게 사전, 아니면 인터넷의 부실 정보라도 파 봐야 했던 거 아냐? 그저 설렁설렁. 이걸 책이라고.


  원활圓滑하다. 선안나를 이 단어를 “원골하다”로 읽는다. 활滑자가 물수 변에 뼈골(骨)이 붙은 거거든. ‘골’로 읽는 경우는 익살스럽다는 뜻일 때만. 작품의 골계미滑稽美 정도에만 쓴다. 이이는 자동차 엔진오일 갈러 가서 이렇게 얘기할 지도 모른다. “사장님, 윤골유 교환하러 왔어요.”

  논어에 나오는 말, 지자(知者 많이 아는 자)는 물을 ‘좋아하고(樂좋아할 요), 인자(仁者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樂좋아할 요). 그래서 사자성어가 된 요산요수(樂山樂水). 이건 “낙산낙수”가 되어 버렸다. 1980년대 KBS던가 한 오락프로그램에서 정규직 남자 아나운서가 나와 낙산낙수라고 해 정여사와 내가 얼마나 웃었는지 기억난다. 엄한 스승 앞에서 요산요수가 아니라 낙산낙수라고 읽었다면 종아리 피바다 되는 건 물론이고 일세의 웃음거리가 된 다음에 여차하면 염殮까지 했을 수 있다.

  미증유未曾有. ‘지금까지 한 번도 있어본 적이 없는 유일한 일’을 일컫는 단어. 이걸 “미회유”라니 그것 참. “미증유의 참사” 뭐 이런 거 들어보셨지? 이거야말로 미회유의 참사. 증曾과 회會는 아예 다른 글자다. 비슷하게 생겨서 그렇지. 눈 크게 뜨면 어떻게 다른 글자인지 보인다.

  예를 든 세 단어? 이런 건 시험에도 안 나왔다. 대가리 박박 깎은 남학생이나 귀밑 2cm 단발머리 여학생이나, 개나 소나 다 아는 거라서. 지금말고 선안나 청년 시절 삼천만의 기본상식. 이걸 책이라고....쯧.


  국어국문학 석∙박사 학위를 가진 엮은이한테 책에 인용한 영, 불, 독의 작가, 작품까지 가져와 들이대는 곤혹스러운 짓을 하지는 않겠다. 쉬운 단어는 각주에 따로 설명하고, 어려운 단어는… 그만 하자, 그만 해. 대학교수라며? 그저 학생들만 불쌍하지 뭐. 아, 겸임교수? 겸임은 교수 아냐? 에잇, 그러거나 말거나 가서 황태 콩나물 국이나 끓여 늦잠자는 마누라 깨워 먹여야겠다. 나도 해장 좀 하고.

  만일 김진섭의 수필 또는 <백설부>를 읽고 싶으면 다른 책을 고르시라.

  오늘의 교훈. “활자는 영원히 지울 수 없으니 함부로 책 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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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다비드 그로스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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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4년에 예루살렘에서 출생한 다비드 그로스만. 요즘 이스라엘 하는 꼴이 하도 못마땅해 이스라엘 작품을 읽어볼 생각이 전혀 없어서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었다가 왜 그랬는지, 갑자기 이 책을 관심도서 목록에 올려 놓았었다. 나 한테 그로스만은 다비드가 아니라 바실리 그로스만으로 콱 박혀 있다. 이 그로스만이 그 그로스만이 아니라는 것도 이이의 작품을 멀리한 작은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웃기지? 살면서 별 일이 다 있는 법이니까 뭐.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를 읽는 내내 작가의 진짜 가족 이야기가 궁금했다. 위키피디아를 보니까 그로스만의 아버지는 아홉 살 때 과부 엄마와 함께 폴란드 디누프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이민 왔다고 한다. 외할머니도 폴란드에서 경찰의 괴롭힘을 피해 딸, 아들과 함께 이주했다. 이래서 다비드 그로스만은 팔레스타인 히브리어뿐 만 아니라 이디시어도 구사했을 듯.

  그의 할아버지 가운데 한 명은 양탄자를 사고 팔아 마진을 챙겨 수입을 보충했다 하는데 책 속에는 주인공의 아버지가 헌옷을 수입해놓고 팔지 못해서 집에 엄청 쌓아놓고 있는 것으로 각색했다. 위키피디아도 못 믿겠다. 아버지가 과부 엄마 손을 잡고 이민 왔다며? 그럼 할아버지는 폴란드에서 죽었다는 거다. 팔레스타인에 와서 다시 결혼해 엄마를 낳은 외할아버지라는 뜻인가? 그런데 외할머니를 “그의 모계 할머니 his maternal grandmother”라고 썼으면 외할아버지도 비슷하게 불러야지. 아, 몰라, 몰라.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A Horse Walks Into a Bar>는 한강이 <채식주의자>로 부커-인터내셔널 상을 받은 다음해인 2017년에 부커-인터내셔널 상을 받은 작품으로, 우리나라 번역도 히브리어로 된 원본 말고, 제시카 코엔이 영어로 번역한 부커-인터내셔널 판을 정영목이 중역했다.


  작품의 화자 ‘나’는 3년 전에 이스라엘 최고의 변호사, 우리나라로 치면 ‘김앤장’쯤 되는 법무법인의 대표 변호사 가운데 한 명 정도로 생각하면 딱인 피고측 변호사를 법정에서 지독하게 모욕하고 판결한 지방법원의 판사 출신 ‘아비샤이 라자르’다. 판결 후에 이스라엘 법조계에서 기피인물로 찍혀, 대법원 판결이 완전히 뒤집힌 건 물론이고 완전히 사법계의 왕따 신세로 몰려 자진 명예퇴직을 선택해 일선에서 물러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랑하는 아내도 세상을 떠 사는 맛을 모르고 살던 터. 어느 날 밤 11시 반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어린 시절 칼힌스키라는 사람한테 1년 내내 함께 수학 과외수업을 받은 적 있는 도발레 그린스타인.

  도발레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고등학교 시절.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서 무력으로 그들의 땅을 점령해 끊임없이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분쟁을 일으켰고, 아랍 국가들 한테도 여전히 깡패짓을 하고 있어서 고등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우리나라도 이스라엘을 본받아 교련을 남녀 고등학생, 남자 대학생들의 정규과목으로 정해 열병 분열, 사격, 화생방은 물론이고 백병전까지 가르쳤다. 웃기지? 나도 했는 걸 뭐. 이스라엘은 고교 1학년 때 즉 여학생도 포함해 모든 학생을 상당기간 사막 한 가운데로 데려가 집체교육도 시켰다고 이 책에 나온다. 이 단기 병영에서 피가 끓는 많은 고등학생들이 처음으로 이성의 몸을 만지고 뭐 그랬던 모양이다. 하지만 주인공 도발레는 158cm의 키와 마른 체격 때문에 아이들의 집중 괴롭힘의 대상이 되어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아비샤이가 도발레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이 캠프였으니까 벌써 40년 이상의 세월이 훅 흘러갔다. 그동안 도발레는 베테랑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되어 있었고, 다섯 아이의 아버지, 두 여자의 남편이었다.

  40년 이상이 흘러, 전혀 연락도 없다가 처음 전화를 해서 하는 말이 며칠 후에, 이스라엘에서 실업률과 범죄율이 제일 높은 도시 네타니아의 한 바에서 공연을 하니, 그 공연에 꼭 참석해달라, 공연을 보고 느낀 감정을 단 한 두 문장이라도 좋고, 한 통의 전화라도 좋으니 자기한테 알려주었으면 좋겠다, 간곡하게 부탁을 하는 거였다. 당연히 취미가 없던 아비샤이는 거절을 하려 했지만 말주변으로 수십년을 먹고 살았던 도발레답게 결국 아비샤이를 설득하는 데 성공해 도발레의 57번째 생일, 8월 20일 밤 공연을 그대로 지면에 옮겨 놓은 것이 이 작품이다.


  미리 말해두자.

  도발레 그린스타인은 158cm의 왜소한 체격에 살집마저 전혀 없다. 색깔도 거무튀튀하게 상해버린 가죽이 겨우 뼈에 발린 듯해서 과세 표준이 납세자의 몸무게에 따라 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는, 사실 전립선 암이 말기에 달해 8월 20일 공연이 사실 그의 마지막 공연이다. 그래서 자기 평생의 작업을, 몇 십년 동안 남이 저지른 과오를 판정한 퇴직 판사에게 평가받고 싶어 아비샤이를 초청했을지도 모른다. 아비샤이는 아비샤이대로 자기가 본 가장 끔찍한 괴롭힘을 당한 소년 시절의 군사 캠프의 기억, 괴롭힘을 당한 친구를 보호하기 위해 가장 사소한 일도 하지 못한, 하지 않은 자신의 비겁을 도발레가 세상에 고발하기 위한 무대일 수 있겠는 생각이 들어 공연 내내 긴장할 수밖에 없다.

  도발레는, 당연히 코미디 적인 발언이지만, 엄마한테 유감이 있다. 57년 전에 예루살렘의 오래 된 하다사 병원에서 진통을 시작한 어머니 사라 그린스테인. 내가 잘 되기만 바란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으면서, 그랬으면서도 나를 낳다니! 세상에서 가장 불안정하고 슬픈 사람. 이런 사람은 그러나 도발레가 아니라 그의 어머니 사라였단다. 아니면 어머니와 아들이 다 불안정하고 슬펐는 지도.

  아버지는 늙어 조용하고 아들의 교육에 진심이기는 했지만 영낙없는 시온주의자라서 지독하게 가부장적이며 유대적 가부장의 명예를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겨 아들의 작은 잘못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이 허리띠를 풀어 채찍으로 삼아 휘두르던 작은 악마이기도 했다. 정말로 “작은” 악마. 하필이면 아버지는 지독하게 작은 키까지 아들한테 물려줬다. 어머니는 여자 가운데서도 큰 키인데 말이지.

  도발레가 태어난 1956년. 12월에는 시나이 전쟁이 터졌다. 압셀 나세르가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한 해. 그 해에 이스라엘은 시나이 전쟁, 카라메 전투, 엔테베 작전 등을 펼쳤고 도발레의 집에서는 그린스테인 전쟁을 시작했다고. 이 대목에서 책을 읽는 나는 긴장했다. 하여튼 내 귀에 거슬리는 이야기가 나오기만 해봐라. 당장 (읽기를) 때려 치울 테니. 즉, 이스라엘 작가라고 해서 이스라엘의 대 아랍국가 정책을 지지하기만 하면 이 책은 물론이고 다시는 다비드 그로스만을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던 거다.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 작품을 발표하기 8년 전 레바논 전쟁 당시 스무살이었던 막내아들 ‘우리’가 탱크부대 조장으로 레바논 군의 미사일 공격을 받아 전사했음에도, 아모스 오즈와 함께 팔레스타인에 다한 이스라엘의 정책에 반대 입장을 유지한 다비드 그로스만은, 내가 우려한 일이 일어날 기미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얼굴에서 웃음기가 떠나지 않았던 소년. 늘 밝은 모습으로 아비샤이의 기억에 남은 소년이 집에서는 아버지의 가죽 허리띠 채찍과, 폴란드에서 당한 괴롭힘과 감금 수준의 피보호에 대한 기억으로 평생 심하게 우울했던 어머니를 견뎌야 했으며, 밖에서는 또래 아이들로부터 끊임없는 폭행과 놀림, 따돌림을 감수해야 했다. 그걸 아비샤이는 몰랐다. 알긴 알았지만 자신의 일이 아니었고, 심각하게 생각해보지도 않았으며, 그를 돕기 위해 어떤 작은 행위도 하지 않았다. <마농의 샘>에서 마르셀 파뇽은 말했다. “침묵하는 자, 너희들 모두 유죄”라고.

  집에서 어머니와 둘만 있던 시간. 하루에 길어야 두세 시간. 그 시간동안 도발레는 엄마에게 작은 기쁨을 주기 위해 공연을 시작했던 것 같다. 개그만 할 수 없어서 해본 것이 물구나무서기. 물구나무를 선 시간을 점차 늘어갔고, 집 안에서 집 밖으로 넓어졌으며, 물구나무선 채로 걸어 다니면, 똑바로 섰을 때는 거의 모든 친구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한 대씩 툭툭 때리고 다닌 것과 달리, 아무도 건드릴 생각도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건드리기는커녕 신기한 듯, 심지어 존경스럽다는 듯 바라보기까지. 세상을 거꾸로 서서, 거꾸로 보는 일. 아, 여기까지만 말하겠다, 궁금해하시라고.

  작은 키에 암으로 비쩍 마른 도발레 그린스타인은 거의 반백년 만에 한 시절의 친구, 남의 잘못을 판정하는 데 젊은 시절을 보낸 전직 판사를 관객으로 모시고, 자신의 필생의 공연, 백조의 노래를 부른다.

  다비드 그로스만. 그의 책을 더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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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12-10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만에 출현한 별5개. 저두 찾아보고 구매 여부를 결정하겠습니다!ㅎ

Falstaff 2025-12-10 14:51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추천입니다! 만족하실 거 같은데 ㅎㅎㅎ 그거야 모를 일입지요. ㅎㅎㅎ
 
서울 오아시스
김채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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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에서 문학과 문예창작을 공부했고, 202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서 단편 소설 ‘현관은 수국 뒤에 있다’가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1992년생 김채원의 소설집. 난 연식이 좀 돼서 “김채원”이라니까 <겨울의 환幻>을 쓴 1946년생 김채원을 떠올렸으며, 며칠 후에 80세가 될 터인데 애쓰시는 군, 조금은 짠한 마음까지 들었었다. 뭐 그랬다는 거다. 도서관 신간 코너에 올려져 있길래 이름도 입에 착 달라붙고 해서 곧바로 열람실에 가져가 읽었다.

  김채원은 서울문화재단의 예술인 아카이브 페이지에 이렇게 썼다.


  “쓴 소설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게 됐을 때 스스로 저를 작가로 여겼습니다. 이때 책임감은 윤리, 도덕과 같은 사회적 맥락 안에서의 긍정적인 방향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한편으로는 전혀 다른 방향이기도 합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책임감이란, 소설에는 꼭 필요한 표현이지만 그 소설을 쓴 작가에게는 비판이 돌아올 수 있는 표현이 있다면 비판과 비난을 받아들일 결심을 하고 기어코 그 표현을 사용한다는 데에서 기인하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나는 이 책에 관한 감상을 쓰지 않겠다. 작가가 비판과 비난을 받아들일 결심을 했더라도 김채원의 작품을 읽은 나는 비판과 비난을 입 밖에 내지 않겠다. 즉, 마음 속에 있더라도 작가가 듣거나 읽지 못하게 하겠다는 뜻이다.

  여러 작품 속 주인공은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인물이며, 거의 매번 가족 가운데 한 사람 이상이 자살에 성공한 환경을 지녔다. 아니면 적어도 신경정신과 전문 병원에 입원이라도 한 병력이 있든지. 당연히 작품들은 대단히 우울하고 마치 누군가 바늘로 콕, 찔러주기만 하면 우울과 상심과 자살할 결심이 팍 터져 버릴 것 같다.

  이러니 내가 어떻게 솔직한 감상을 독후감입네 하면서 쓸 수 있겠나? 전에도 이런 심정이라서 읽은 느낌을 쓰지 않은 독후감이 하나 있었다. 이 책도 그렇다.

  한 마디만 남기겠다. 작품들은 잘 읽었다고. (이건 진심이다. 그렇더라도 또 김채원을 읽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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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12-09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4개나 주셨네요...흠...세풀베다 작품을 읽으시고 별4개..김채원의 소설을 읽고도 별4개...독후감은 부정적인데 비판을 안하시겠다니...그럼에도 별4개의 평점을 주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Falstaff 2025-12-09 11:03   좋아요 0 | URL
거미줄 또는 실핏줄 같은 섬세한 심리묘사 좋고 뭐 그래서 별은 낮게 줄 수 없지만 유독 심한 우울....을 견디지 못하겠더라는 겁니다. 심하게 우울해요.

2025-12-09 1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2-09 1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2-09 1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모피를 입은 비너스 을유세계문학전집 146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지음, 김재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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윽, 을유, 너마저.
전에 펭귄에서 찍은 책의 복간이군요. 새로운 번역이었으면 좋았을 뻔했는데... 뭐 인상적인 작품이 아니라서 새 번역이라도 또 읽지는 않았겠지만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다른 곳도 아니고 을유라, 새 번역이 아닌 것에 좀 실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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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5-12-09 2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펭귄판으로 읽었습죠...재미는 뒤지게 없는...

Falstaff 2025-12-10 04:42   좋아요 1 | URL
ㅋㅋㅋ 쇤네도 뭐 그리 달리 읽지 않았습죠.

아서코난도일 2025-12-10 1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번역이 별론가요? 사려고 장바구니에 담아놨는데 댓글보고 망설여지네요.

Falstaff 2025-12-10 14:50   좋아요 0 | URL
번역에 관해서.... 아이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너무 오래 전에 읽어서요.
사도-마조히즘 할 때 ‘마조히즘‘이 작가 자허마조허에서 나온 건 아시지요? 사드처럼 드럽거나 변태적인 건 아니지만 제 경우엔 작품 자체가 만족스럽지 않았는데요, 이 출판사에서 방금 찍은 책에 관해 자꾸 안 팔리는 쪽으로 의견을 달게 되어 을유문화사 보기가 좀 민망하네요. ^^;; 뭐 취향이 안 맞을 뿐이니 혹시 모르지요, 도일 님하고는 맞을지...

아서코난도일 2025-12-10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끄럽게도 마조히즘이 작가 자허마조허에서 나온것도 모르고 있었네요~ 검색해보니 작품 자체에 대한 평이 안좋네요. 일단 구입보류 하고 좀 더 고민 좀 해봐야 겠습니다~ 친절한 답변 감사합니다~
 
사랑하고 선량하게 잦아드네 문학동네 시인선 224
유수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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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달 전에 구병모가 남자인 줄 알고 어머나, 어머나, 요즘 세상에 우리나라에 남자 소설가도 있네, 했다가 찐따 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엔 유수연이 여자인 줄 알았다가 시집 읽기 전에 먼저 구글 검색해보고 남자 시인인 걸 알아 다시 한번 찐따 되는 불상사를 겨우 막았다. 요즘엔 이름에도 젠더가 없나? 글쎄, 영희가 남자고, 철수가 여자래. 남자 영희? 흠모해 마지않았던 고 리영희 선생은 알지만 여자 철수는 아직 못 봤다. 하여간 남자 수연, 유수연은 1994년에 춘천에서 태어나 안양예고와 명지대에서 시를 공부하고, 성균관대학 대학원 경영학 석사 졸업했다는데 MBA를 말하는 건가? 진로에 고민 많았겠다. 2017년에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면 생일이 지나지 않아 이이의 나이 스물둘. 춘천이 물이 좋아 오랜만에 20대 초반에 등단한 시인이 나왔나보다. 시집 《사랑하고 선량하게 잦아드네》의 초판이 2024년 11월. 서른 살에 두번째 시집을 냈다. 시는 당연히 20대 후반에 쓴 것들이겠지. 시를 쓸까, MBA 딴 김에 회사를 경영할까? 회사를 경영하면서 시를 쓰면 된다. 암만해도 우리나라에서, 세계 어디에서나 마찬가지기는 하지만 시 하나 쓰면서 먹고 살기엔 너무 팍팍하잖아.

  근데, 인제에서 나서 스무 살에 시집 가 춘천에서 70년 가까이 산 김여사 말에 의하면, 춘천이란 도시가 말만 그럴 듯하지 도시를 휘감고 흐르는 북한강과, 북한강물을 가둔 온갖 댐에서 날이면 날마다 짙은 안개가 밀려와 그런 모양인데, 도시 건설 이래 숱한 폐병쟁이를 양산한 것도 모자라 우울증 환자의 단위 인구별 밀도도 상당히 높은 편이라고 한다. 물론 이건 소양강댐을 지으면서 졸지에 고향을 잃은 실향민 신세로 떨어졌으며,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 젊은 시절에 폐병이 도져 군대 징집 면제를 당한 김여사의 다분히 억하심정적 발언이라 그리 믿음직하지 않은 의견이지만 유수연의 시집을 읽는 도중에 왜 여사의 말이 문득 떠올랐을까?

  시집의 1부 소제목이 “네가 웃으니 내 세상이 위로가 돼”이다. 네가 웃어주어야 겨우 내 세상이 위로를 받는단다. 나 혼자 내 세상을 위로할 방법이 없는 시인. 스스로 위로하는 최선의 방법을 알려주노니, 자위를 해라, 자위를. 크리넥스 한 장이면 된다. 돈도 안 들잖아? 괜히 잘 살고 있는 ‘너’한테 실없이 웃으라 하지 말고. 하고 싶은데 자위도 안 되고, 너는 웃어주지 않고, 이러면 결국 남는 건 우울밖에 더 있겠어? 20대잖아, 20대. 지나고 보면 화려했던 거 같은데, 정작 20대 시절을 지내고 있는 이들은 환장하게 어려운 시절. 특별한 사정이 없는 20대라면 적어도 7할은 연애 또는 사랑 때문일 수도 있다. 눈에 확 들어온 건:



  형 물이잖아



  사주를 봐준다는 말이 좋다 내 미래를 예비해주는 것 같다 내 미래를 걱정해주는 말씨도 좋다


  태어난 날 미래가 정해진다는 건 미신 같지만 설명이 가능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이해를 진심이라고 부른다


  나는 금이니 자기랑 잘 맞을 거라던 너는 이제 없지만


  네가 내 생일을 알아내기 위해 사주를 봐주겠다고 한 걸 나중에 알았을 때 내가 태어난 게 처음으로 좋았다 (전문, p.16)



  1부 소제목의 ‘너’가 나의 사주를 봐주겠다는 핑계로 생년월일을 알아냈다. 이런 ‘너’가 있는 게 내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좋게 만들었다면, ‘너’와 나는 보통 사이를 초월하는 건 분명하니, 연인이라고 봐도 좋다. 근데 ‘너’는 나를 형이라고 부른다. 이 시, 은근한 커밍아웃인 것처럼 읽히기도. 어쨌거나 내가 태어난 걸 좋게 생각하게 해준 너는 이제 없다. 안타깝지만. 원래 그런 거야. 만난 사람은 언젠가 헤어지게 되어 있거든. 어려운 말로 하면 회자정리會者定離.

  그 후배는 금이고 나는 물이란다. 쇠와 물. 쇠, 금인 너는 나를 잘 떠났다. 함께 있어봤자 너는 나 때문에 녹이 슬어 시간이 지나면 나 부스러질 팔자이니. 하긴 그게 사랑이지. 내가 부스러질지언정 너에게만 기대 사는 거. 사랑, 징글징글한 거, 그거 맞아.



  습작


  꿈에서 보았다는 말은 진부하지만 꿈에서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은 진부하지 않다 특별하지 않지만 사소하지도 않은 것은 잊혀질 수 없다 팔목에 꽂았던 링거 바늘 자국이, 몸에 박힌 연필심이 오래 머무는 것처럼 나도 몰랐던 내 몸의 어느 점과 같이, 당신이 말해주기 전까지 모를 그런 흔적으로 꿈은 계속 남아 있고 꿈을 앓다 내가 남아나지 않는다 그러나 꿈은 꿈이고 베개는 베개이고 이 슬픔이 슬픔이 아닐 수 있다는 건 지난 내 시의 흔적이다 ‘우리 사랑을 내버려둔 채 사랑하도록 해요’라는 유서를 쓰고 그런 유서만 아니라면 죽을 수도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유서를 쓰고만 산다 내게서 더는 다정한 마음을 찾지 말아달라고 고장난 바람이 날개 끝을 검게 물들이는 동안 여름은 가지 않고 새들이 계속 구름을 끌고 창 끝으로 사라졌다 닫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적는 동안 당신은 나의 가장 아름다운 기도가 되고 문득 오늘의 슬픔이 어느 날의 기적이 될 수 있기를 그러나 베개가 많이 젖었네, 많이 울었어? 아니, 아 그러면 젖은 머리로 잤구나 오늘은 말리고 자, 말해주던 너는 꿈에도 오지 않는다 눈을 뜨면 아무도 없는 건 모든 삶이 꿈에서 쫓겨난 탓으로 둔다 아무도 없지만 너는 종종 내 옆에 눕고 나는 계속 어떤 문장을 너처럼 안고 잠든다 (전문, p.17)



  위 시의 핵심 단어는 “슬픔.” 시인은 앞뒤 재지 않고 슬픔을 그냥 슬픔이라 발음해버리고 말았다. 슬픔은 끝내 유서와 죽음까지 이어지고, 북한강의 안개 같은 추억 또는 그냥 기억 속에서 치마 걷고 미친년 또는 물귀신처럼 서 있는 근화동 소양강처녀상像처럼 나타나, 울었어? 아니라고? 그럼 젖은 머리로 잤구나, 앞으로는 꼭 말리고 자렴, 하고 말해줄 지도 모른다.

  내 불만은 시에서 직접 슬픔, 눈물, 유서, 죽음이라는 구체적 명사가 등장하는 일. 그래서 언짢은 건 아니고 내 취향상 슬픔, 눈물, 유서, 죽음, 그리고 사랑, 희망 같은 건 노래 속에 포화상태가 되어 저절로 드러나야지 애초에 이리 발음해 나오는 걸 즐기지 않아서 그런 것이니 노여워하지 마시라.

  시인은 “외로움은 혼자 하기도 하고 / 둘이 각자의 외로움으로 슬퍼하기도 한다”거나 “하다 하다 돌까지 사랑하려 한다 / 내가 살아온 시간보다 오래 사랑받아온 돌도 많다”더니 “돌에 하는 사랑을 둘이 못할 것 없었다” 하기도 한다. “슬픔이 바나나보다 빨리 익는다” “보기도 좋은 슬픔이 울기도 좋은 걸 누가 모르나” 누군가 사랑하고 있는 모습을 누군가의 입장에서 보는 건 행복하다” 등등 사랑, 슬픔이라는 단어가 부끄럽지도 않은지 그냥 막 출현한다. 다시 말하는데, 그런 게 내 마음에, 무수히 많은 독자 가운데 겨우 한 명에 불과한 내가 읽기에 그리 좋아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니 그리 마음 쓸 것도 없다. (인용한 시귀절 전부 시집에 나온다. 일일이 출처를 밝히지 않겠다.)



  서른



  삶을 밀려 쓴 것 같다


  답지가 아닌 타인을

  계속 들춰보고 싶다


  맞아, 삶엔 답이 없다

  알아, 그래도 있지 않을까


  깨지지 않는 것만으로

  더는 이해받을 수 없다


  그 온도에 물이 끓는단다

  그전에 멈추면 안 되는 거란다


  멈춰도 오래 따뜻할 수 있다


  뜨겁지 않은 체온으로

  사람을 데울 수 있다는 것


  서로가 서로를 안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을 때


  삶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전문. P.76)



  시인한테도 시간은 능률능률 흘러 어느 새 서른살이 되었다. 그간 숱한 서른 살이 된 시인의 시를 읽었지만, 어떠셔? 좀 약하지? 서른 살이 뭐야? 세상 다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쥐뿔도 아는 것 없는 시절. 여차하면 까마득한 절벽 위에서 한 걸음 내딛는 듯한 갈팡질팡의 시기. 뭐 나 그리고 내가 읽은 서른 살 시인들이 모두 없이 살아서 이렇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멈춰도 따뜻할 수 있고, 삶은 그래도 문제가 되지 않는 서른살을 보내는 시인은 얼마나 행복한가. 그래도 서른살은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살은 온다”가 제일 멋있었어.

  따뜻할 수 있고, 문제가 되지 않는 삶, 서른살을 사는 시인도 21세기의 불안까지 떨쳐내지는 못하는군.



  원죄



  지갑을 떨군 사람에게 이거 떨어뜨렸다 말하니 자기 것이 아니라 말한다 자기 것이 아니라 믿는 순간이 제 몸을 더듬어 지갑을 찾는 시간보다 짧다 그는 감사하다 말하고 사라졌다


  이거 당신 거 아닌가요

  누군가 쫓아온다


  아닌데요 아니에요 제 것이 아니에요

  수없이 말해도 내 몸을 더듬어 넣어준다


  놓고 간 게 있어요

  내 정신 좀 봐


  다녀오겠다 나선 이가 다녀왔다 말하지 않았다


  그는 문에 단 풍경이 하도 시끄러워 떼었다고 했다

  그 말고는 여닫을 이 없는 말수 적은 목재 문이지만 (전문. p.77)



  지갑 떨어뜨려놓고 주워 줘도 굳이 내 거 아니라고 하더니 그냥 고맙습니다, 말하고는 사라진 인간이 시인이었구나. 왜 그랬을까? 만인 앞에서의 쪽팔림? 내가 지갑 같은 걸 떨어뜨리는 인간이 아니라는 자만? 혹은 모르는 사람이 말을 시켜서? 그보다는 워낙 외로움을 타는 인간이라 딱 그 순간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반응장애 상태인 것처럼 보인다. 시 쓰는 사람 가운데 종종 보이지. 쯧쯧. 농담이다. 나, 신경정신과 적으로 아는 거 쥐뿔도 없다. 나도 그냥 해본 말이다.

  이제 서른한 살의 팔팔한 시인이니 구름 같은 앞날을 기대할 수 있겠다. 아무쪼록 큰 시인이 되기 바란다. 그러면서 시 감상은 매정하게 한 것 같아 면목 없다. 춘천 출신이라 처가 식구 본 거 같아 더 미안하다. 좋은 말 좀 화끈하게 해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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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5-12-08 1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몇 달 전에 구병모가 남자인 줄 알고 어머나, 어머나, 요즘 세상에 우리나라에 남자 소설가도 있네, 했다가 찐따 된 적이 있었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빵터졌습니다.
아니, 근데 이 시인은 남성 시인...! 저도 여자인 줄 알았어요. 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5-12-08 15:24   좋아요 1 | URL
ㅋㅋㅋ 자냥님도 참... 쪽팔리게시리 콕 찝어서 말씀입죠. ㅋㅋㅋㅋ

페넬로페 2025-12-08 16: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솔직히 구병모ㅡ남자
유수연ㅡ여자 아닙니까? ㅎㅎ

Falstaff 2025-12-08 19:00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제 말이요!!!

yamoo 2025-12-08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 이름 여자 이름이 참 알 수 없더라구요...
중성적인 이름은 승현이 있구...현주라는 이름은 여성이 많지만 남성도 꽤 있죠.
현경의 경우도 여자가 많지만 남자도 있고, 은영이라는 이름도 남자 이름이 꽤 있죠. 고3때 담임 별명이 미친개 였는데, 이름이 오은영이었어요..ㅎㅎ 완전 상남자 스탈인데...이름 보면..ㅎㅎ
심지어 김미경이라는 남자 이름도 있더라구요..
근데 제가 본 이름 중 잊혀지지 않는 이름....최고다 씨...성이 최가이고 이름이 고다....주민센터에서 기둘리고 있는데 최고다씨~~라고 부르는...공뭔도 이름이 희한했는지 이름 맞냐는 소리를 바로 앞에서 들었네요..ㅎㅎ

Falstaff 2025-12-08 19:03   좋아요 0 | URL
별 이름이 다 있군요!
배철수 할머니도 계신다더군요. 허연 콧수염 DJ 배철수의 방송에 나왔다는데요, 유튜브인지, 라디오 방송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