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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섭 선집 ㅣ 한국문학의 재발견 작고문인선집
김진섭 지음, 선안나 엮음 / 현대문학 / 2011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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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섭. 1903년에 목포에서 출생한 안동 사람. 한학에 일가견이 있는 아버지가 전라도 지역에서 벼슬을 할 때 목포에서 나 7년을 살았고, 제주에서 몇 년, 나주에서 또 몇 년, 이후 서울로 유학, 양정학교를 졸업한 후 1921년에 일본 호세이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다가 때려 치운다. 23년 관동지진을 겪고 24년에 다시 독문학과에 재입학해 재일 유학생들과 뜻을 합쳐 해외문학연구회를 조직한다. 이를 두고 우리 문학사에서 ‘해외문학파’로 칭하며 대충 김진섭, 김광섭, 이하윤 등을 거론한다. 이하윤의 ‘이’는 ‘오얏 리李’가 아니라 ‘다를 이異’를 쓰는 게 까까머리 중학생이던 내 눈에 와 박혀 여태 기억한다.
하여간 이이는 1950년 한국전쟁 초기에 살던 집이 내 외갓집 바로 옆, 종로구 경운동에 있었는데, 이때 ‘북괴군의 탱크가 물밀 듯이 짓쳐 내려오자마자’ 초장에 잡혀 북으로 끌려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만 마흔일곱 살이면 초로初老의 중년이었으니 살아도 그리 오래 살지는 못했을 거 같다.
그래서일까, 이이의 수필이 중학생 교과서에도 실렸던가? 까마득하다. <백설부>. 존경하는 블로그 이웃께서 흰 국화 시를 소개하시는 글을 읽는 순간 팍 떠올랐던 글이 김진섭의 <백설부白雪賦>여서 당장 다른 도서관에 상호대차 신청해 받아 읽었다.
나는 여간해서 수필을 읽지 않는다. 요샌 수필이라 하지 않고 에세이라 하는 거 같은데 오히려 ‘수필’이란 단어에 더 광채가 나지 않나? 하여간 여태 읽은 수필집이라고는 이상보의 <갑사로 가는 길>, 민태원의 <청춘예찬>, 문일평의 <하화만필>, 이상의 <권태>, 김소운의 <목근통신>, 양주동의 <문주반생기>, 이어령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와 <바람이 불어오는 곳> 정도가 다다. 알량한 수필 독서력에 이제야 《김진섭 선집》을 더하니 참 보잘것없는 라이브러리에 지나지 않는다. 뭐 그렇다고 새삼스레 발심을 해서 이제부터 머리띠 질끈 묶고 새롭게 수필집 열라 찾아볼 마음까지 생기지는 않지만.
만 7년을 호세이 대학에 다닌 김진섭은 1928년에 귀국해 경성제국대학 도서관 촉탁으로 근무하다가 1931년에 유치진, 윤백남 등과 극예술연구회를 조직, 주로 외국 근대 희곡을 번역해 공연했다. 이왕 극장 주변에서 연구회를 만들었으면 스스로 극작가를 한 번 해보지 않은 것이 아쉽다. 같은 의미로 독일문학을 전공하고 귀국했으면 스스로 소설 같은 픽션 작품을 생산하지 않고 그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학적 재질과 배운 것을 자산으로 수필만 수백 편 쓴 것도 아쉬운데, 하긴 뭐, 이건 수필 말고 픽션을 좋아하는 내 취향상 아쉽다는 것이지, 수필 좋아하는 분 입장에서는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니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이이가 본격적으로 수필을 청탁받아 쓰기 시작한 것이 1930년대. 자신은 무려 7년간이나 일본 유학하고 돌아온 지식인. 시대는 일제강점기의 우중충한, 하지만 태평양 전쟁이나 해방 후 세계적 기근 시기에 비하면 그나마 먹고 살기가 조금 편했던 시절. 지식인이라면 당연히 상당히 계몽적일 수밖에 없던 시대이다. 그래서 이이의 수필 가운데 많은 작품이 무지하게 계몽적이고 따라서 잘난 척 무지 해대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진심 잘난 척일 확률도 높겠지. 그럼! 당시 ‘내지內地’ 유학생이 몇 명이나 됐겠느냐고. 얼마나 잘난 척을 하는지 한 문단만 읽어보자.
“그러나 나는 물론 여기서 소외 사변적, 논리적, 학문적 철학자의 철학을 비난, 공격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나는 오직 이러한 체계적인 철학에 대하여 인생의 지식이 되는 철학을 유지하여주는 현철한 일군一群의 철학자가 있었던 것을 알고 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철학자만이 철학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로 인간적 통찰력과 사물에 대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는 이상 모든 생활인은 그 특유의 인생관과 세계관 즉 통속적 의미에서의 철학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다음에 말하고자 함에 불과하다.“ (<생활인의 철학> p.250)
내용은 전혀 어렵지 않다. 생활인 누구나 철학을 가질 수 있다는 뻔한 내용을 돌리고 돌려서 마치 큰 깨달음을 주는 것처럼 써놨으니 이거야말로 진정한 “잘난 척”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지.
당연히 모든 작품이 이렇지는 않다. 술과 술동무 이야기, 성문 밖 성북동이 얼마나 외지고 어둡고 험한 동네이며, 그래서 밝은 달빛이 얼마나 고마운 밝음인가 하는 이야기처럼 일개 시민이 사는 모습을 그릴 때는 또 잘 배운 동네 남자 같은 면도 있다.
그래, 그래. 변죽은 그만 울리고 애초 읽고 싶었던 <백설부> 한 귀절을 따 보자.
오, 천하가 얼어붙어서 찬 돌과 같이 딱딱한 겨울날의 한가운데, 대체 어디서부터 이 한없이 부드럽고 깨끗한 영혼은 아무 소리도 없이 한들한들 춤추며 내려오는 것인지, 비가 겨울이 되면 얼어붙어서 눈으로 화한다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만일에 이 삭연索然한 삼동이 불행히도 백설을 가질 수 없다면 우리의 적은 위안은 더욱이나 그 양을 줄이고야 말 것이니, 가령 우리가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추위를 참으며 열고 싶지 않은 창을 가만히 밀고 밖을 한 번 내다보면 이것이 무어랴. 백설애애白雪皚皚한 세계가 눈앞에 전개되어 있을 때 그때 우리가 마음에 느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p.180)
위 인용이 제일 아름다운 부분이라 가져온 건 아니고, 그냥 따오기 적당한 분량이라서 택했을 뿐이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침을 튄다 해도 <백설부> 전문을 읽은 만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거늘. 그저 <백설부> 일독을 권하는 수밖에.
그럼 지금 이 책을 사거나 빌리거나 헌책이라도 구해 읽어보라 권하고 있느냐고? 천만의 말씀. 권하지 못하겠다. 그건 우리나라 국가대표 수필선수 고 김진섭 때문이 아니다. 엮은이 선안나가 문제다. 1962년에 나서 성신여대 대학원 국문과에서 석사, 박사를 하고 지금 모 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단다. 아직 정년이 되지 않았을 터이니 지금도 교수를 하고 있는 거 같은데, 아오, 이하 생략.
애초에 자신이 김진섭이라는 수필 대가의 모든 작품을 읽고, 검토하고, 이 가운데 독자에게 선보일 수 있는 명편을 추려, 그간 근 백년의 세월이 지났으니 적당한 현대어와 적절한 각주를 달 수 있는 역량을 제대로 가졌는지, 자기 깜냥을 알아 작업을 맡든지 말든지 해야 하는 거 아니냐 말이다. 엮은이는 주석을 제대로 달 실력이 애초 없는 것 같으며, 작가가 작품에서 인용한 다른 유럽 작가의 작품을 한 권도 읽어본 적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다, 1962년생이니 학창시절에 종아리 맞아가면서 한자어를 배웠을 터인데 그때마다 종아리에 붉은 줄을 자심하게 그어 피바다를 만들었을 거 같다. 뭐 청소년 시절에 공부 안 한 거야 집안 살림 사정일 수도 있고 사춘기의 특권인 잠깐 일탈소녀 하느라 그랬을 수도 있으니 야박하게 그거 가지고 뭐라하지 않겠는데, 그럼 책을 엮으면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자주, 더 맹렬하게 사전, 아니면 인터넷의 부실 정보라도 파 봐야 했던 거 아냐? 그저 설렁설렁. 이걸 책이라고.
원활圓滑하다. 선안나를 이 단어를 “원골하다”로 읽는다. 활滑자가 물수 변에 뼈골(骨)이 붙은 거거든. ‘골’로 읽는 경우는 익살스럽다는 뜻일 때만. 작품의 골계미滑稽美 정도에만 쓴다. 이이는 자동차 엔진오일 갈러 가서 이렇게 얘기할 지도 모른다. “사장님, 윤골유 교환하러 왔어요.”
논어에 나오는 말, 지자(知者 많이 아는 자)는 물을 ‘좋아하고(樂좋아할 요), 인자(仁者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樂좋아할 요). 그래서 사자성어가 된 요산요수(樂山樂水). 이건 “낙산낙수”가 되어 버렸다. 1980년대 KBS던가 한 오락프로그램에서 정규직 남자 아나운서가 나와 낙산낙수라고 해 정여사와 내가 얼마나 웃었는지 기억난다. 엄한 스승 앞에서 요산요수가 아니라 낙산낙수라고 읽었다면 종아리 피바다 되는 건 물론이고 일세의 웃음거리가 된 다음에 여차하면 염殮까지 했을 수 있다.
미증유未曾有. ‘지금까지 한 번도 있어본 적이 없는 유일한 일’을 일컫는 단어. 이걸 “미회유”라니 그것 참. “미증유의 참사” 뭐 이런 거 들어보셨지? 이거야말로 미회유의 참사. 증曾과 회會는 아예 다른 글자다. 비슷하게 생겨서 그렇지. 눈 크게 뜨면 어떻게 다른 글자인지 보인다.
예를 든 세 단어? 이런 건 시험에도 안 나왔다. 대가리 박박 깎은 남학생이나 귀밑 2cm 단발머리 여학생이나, 개나 소나 다 아는 거라서. 지금말고 선안나 청년 시절 삼천만의 기본상식. 이걸 책이라고....쯧.
국어국문학 석∙박사 학위를 가진 엮은이한테 책에 인용한 영, 불, 독의 작가, 작품까지 가져와 들이대는 곤혹스러운 짓을 하지는 않겠다. 쉬운 단어는 각주에 따로 설명하고, 어려운 단어는… 그만 하자, 그만 해. 대학교수라며? 그저 학생들만 불쌍하지 뭐. 아, 겸임교수? 겸임은 교수 아냐? 에잇, 그러거나 말거나 가서 황태 콩나물 국이나 끓여 늦잠자는 마누라 깨워 먹여야겠다. 나도 해장 좀 하고.
만일 김진섭의 수필 또는 <백설부>를 읽고 싶으면 다른 책을 고르시라.
오늘의 교훈. “활자는 영원히 지울 수 없으니 함부로 책 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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